스파르타쿠스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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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독일어: Spartakusaufstand[1]
영어: Spartacist uprisin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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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 연맹원.

1. 개요
2. 내용
2.1. 배경
2.2. 진행
3. 영향
4.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1919년 1월 5일부터 15일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전역에서 일어난 사건. 명칭은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에서는 '1월 봉기'(Januaraufstand)라고도 부른다.

중도좌파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권 세력이었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독일 사회민주당, 그리고 급진좌파였던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독일 공산당 사이의 투쟁이었다. 또한 반란 세력 내부에서도 무장 반란을 통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울 것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점진적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개혁파의 알력이 있었다.

주요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은 베를린이지만 이 외에도 브레멘, 바이에른, 튀링겐, 루르 등 말 그대로 독일 전국에서 일어났다. 베를린의 경우 같은 해 3월에 다시 한번 거리에서 1,000여 명이 죽어나가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2. 내용[편집]



2.1. 배경[편집]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 제국의 전쟁 지원을 결정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반발하여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은 사회민주당에서 탈당했다. 이들은 '인터내셔널 그룹(Gruppe Internationale)'이라는 독자적인 세력을 조직하였고 1916년에 스파르타쿠스 연맹이 되었다. 1917년에는 전쟁 지원을 계속할지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분 끝에 사회민주당에서 쫓겨난 당원들이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창당했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곧 독일 독립사회민주당과 통합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1918년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독일 국회에서 최다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사회민주당에게 정국 주도권이 넘어가고 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곧이어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도망갔다.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은 사회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것을 합의하고 양당에서 3인씩 6인으로 구성된 인민대표회의(Rat der Volksbeauftragten)에 참여했다. 그러나 12월 24일에 벌어진 수병 폭동 사건에서 사회민주당이 취한 일련의 행동에 대한 항의로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은 12월 29일 인민대표회의에서 물러났다. 이와 동시에 스파르타쿠스 연맹도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으로부터 다시 갈라져 나온 뒤 다른 좌익 조직들과 통합하여 독일 공산당(KDP)을 창당하며 적극적으로 정치 일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1918년 12월 30일부터 1919년 1월 1일까지 개최된 독일 공산당 창당대회에서 룩셈부르크는 자신이 작성한 창당 계획서를 12월 31일 제시하였다. 그는 이 계획서에서 독일 공산당은 민중 다수의 명확한 지지 없이는 정권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1919년 1월 1일 룩셈부르크는 공산당이 앞으로 있을 선거에 참여할 것을 재차 주장하였으나 이는 당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과격파에 의해 표결을 통해서 기각되어 버렸다. 과격파는 '길거리로부터의 압력(Druck aus der Straße)'과 노동자들의 폭력, 소요, 선동을 통하여 정권을 획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2.2. 진행[편집]


1919년 1월 4일 베를린에서는 지난해 12월 24일 수병 폭동 사건 당시 벌어진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길 거부한 것을 빌미로 베를린 경찰청장 에밀 아이히호른(Emil Eichhorn)이 당국에 의해 해임된다.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당원이었던 에밀 아이히호른은 이 해임 조치에 맞서 사회민주당 이외의 좌파 세력들에게 시위를 일으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독일 공산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등의 반정부(반 사회민주당) 세력은 이를 받아들여 시위를 조직하기로 했다.

다음날인 1월 5일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는 시위를 조직한 자들이 당초에 했던 예상을 훨씬 벗어난 규모였는데 정국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고 도심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시위는 곧 과격적 무장 반란의 색채를 띠게된다. 이들은 베를린 경찰청, 기차역, 주요 신문사들이 모여 있는 지역 등을 점령했다[3]. 지도자급 인사들은 경찰청 본부에 모여 53인으로 이루어진 임시혁명위원회(Provisorischer Revolutionsausschuss)를 선출했다. 이어 1월 7일 임시혁명위원회는 베를린의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50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는 한편 일부는 무기를 들고 반란 세력에 가담하면서 사건은 러시아에서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임시혁명위원회는 반란(봉기)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공산사회를 세울 것을 주장하는 과격 세력과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진행할 것을 주장하는 개혁적 세력 간의 알력을 제대로 수습하는 데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는 정규군을 스파르타쿠스 연맹 세력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 역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특히 11월 혁명을 촉발한 킬 군항의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을 스파르타쿠스 연맹 세력에 동참시키고자 했으나 정작 수병들은 무장 반란을 지지하기를 거부하고 중립을 선언하면서 망해 버렸다.

1월 8일 독립사회민주당 대표들이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협상을 제안한 뒤, 공산당은 임시혁명위원회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협상은 결렬됐고 에베르트는 우익 준군사조직 자유군단에게 사건을 진압할 것을 지시한다. 이미 1월 6일부터 동원에 들어간 상태였던 자유군단은 곧 스파르타쿠스 연맹과 시가전에 돌입했고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처절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2달 전까지만 해도 진행 중이었던 1차 대전 당시에 참호와 평지, 산맥과 같은 장소에서 짧으면 몇 달, 길게는 4년 넘게 연합군과 교전을 겪었던 경험이 풍부했던 독일 제국군 출신 장교와 병사 참전자들이 주축이 된 데다 무기 역시 최전선에서 성능이 입증된 것들을 그대로 쓰고 있던 자유군단과 달리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징병검사에 탈락(혹은 징병검사에 합격했어도 대체복무가 가능)하거나 징집/재소집 연령을 한참 넘긴 노동자들이 절대 다수인데다가 무장도 빈약했던 스파르타쿠스 연맹 간의 전투가 애초에 대등하게 진행될 리가 없었다. 자유군단은 신속하게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몰아붙였고, 1월 15일까지는 스파르타쿠스 연맹 세력에 의해 점거됐던 지역들을 수복했다. 같은 날 저녁에 반란(봉기)의 지도자들 중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붙잡혔고, 그날 밤으로 비밀리에 처형되어 룩셈부르크는 란트베어 운하(Landwehrkanal)에 던져졌으며 리프크네히트는 이름 없이 시체 안치소로 보내졌다. 이 과정에서 베를린에서 벌어진 시가전으로 시민 156명, 자유군단 17명이 사망했다.


3. 영향[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당시부터 사이가 벌어졌던 독일 사회민주당독일 공산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 다툼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이어져 공산당은 사민당 발목만 붙잡았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에 크게 기여하여 두 당 모두 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두 세력은 여전히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서독 건국 직후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였던 쿠르트 슈마허는 단호한 반공주의자였고 공산당을 붉은 나치라고 비판하면서 사회민주당 일각에서 제기된 '사회민주당과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합당'을 기각했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서 독일 사회민주당좌파당의 다툼으로 이어지고 있다.


4.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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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슈파르타쿠스아우프슈탄트[2] 스파터시스트 업라이징[3] 예전부터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씹어대던 사회민주당의 기관지 '전진(Vorwärts)'이 신나게 분풀이 당했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