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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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바이러스의 현미경 사진
원인 병원체
Influenza A virus subtype H1N1
발생 국가/지역
전 세계
기간
1918년 2월 ~ 1920년 4월
전세계 피해 숫자 (추정치)
감염
약 5억 명
사망
약 1,700만 ~ 5,000만 명
(치사율 3.4% ~ 10%)

1. 개요
2. 명칭과 유래
3. 발병과 대유행
4. 대유행 이후
6.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최후반부터 종전 직후까지인 1918년 ~ 1920년 사이에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의 변형인 H1N1 바이러스에 의해 유행한 독감. 과거 유럽에 창궐했던 14세기의 흑사병, 수백 년간 전 인류를 괴롭힌 천연두와 함께 인류에 큰 피해를 남긴 범유행전염병 중 하나이다. 근대 이후 최악의 팬데믹으로 불린다.

이 병의 증상으로는 일반적인 독감이나 폐렴 증상과 동일하나 탈산소로 인해 피부가 푸르게 괴사하는 증세를 동반한다.


2. 명칭과 유래[편집]


스페인 독감이라는 명칭만 보면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창궐한 독감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이 독감 때문에 스페인이 유명해진 이유는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많은 관련국들이 보도 검열로 이 독감을 다루지 않았으나 스페인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국이어서 검열로부터 자유로워 이를 집중 보도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른 나라 국민들은 스페인 언론을 통해 질병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고 본의 아니게 스페인 독감이라고 명명됐다. 스페인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까지 감염될 정도로 스페인에서도 많이 퍼지긴 했지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2세도 걸렸으니 스페인에서만 더 크게 유행한 것도 아니고 단지 언론통제를 덜 한 만큼 소식이 더 빠르게 전달되었을 뿐이다. 결국 스페인은 독감의 발원지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해당 질병에 대한 정보를 세계 각국에 빠르게 전달하는 데 큰 공이 있는 국가인데 질병의 이름 자체가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리게 됐다.

스페인으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일인데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실제 발원지는 미국, 영국, 중국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러한 이유로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 대신 1918년 독감 범유행(Pandemia de gripe de 1918)이나 미국 독감, 시카고 독감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1918년 초기에 최초로 확진되었으나 일부 연구는 질병 특성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16, 1917년 영국 군대에서 유사한 사례가 보고되었고 1917년 중국에서 보다 큰 규모의 유사 감염 사례가 보고되었다.

3. 발병과 대유행[편집]


기원에 있어서는 이견이 많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병사들이 귀향하기 위해 모여 있던 캠프에서 발병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3일 열병'이란 이름처럼 짧은 증상 기간 이후 단순한 감기 증상을 가지고 귀향한 병사들이 각지에 전파함에 따라 유례 없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기록에 의한 보고는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가 최초다. 3월 8일 캔자스 퍽스톤 기지와 3월 11일 미군부대에서도 발병자가 발생했으니 출처를 따지면 스페인이 아니라 미국 독감이나 다름없는 셈. 비록 미국에서 최초로 보고되었으나 미국이 아닌 유럽 발원설, 중국 발원설도 있다. # 고병원성으로 발전한 것은 같은 해 8월 영국령 시에라리온프리타운에서 발견된 것을 최초로 여긴다.

킬 군항의 반란으로 독일 제국이 무너지던 시점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빠르게 완치되었다. 마하트마 간디, 레이먼드 챈들러, 월트 디즈니, 프란츠 카프카, 존 퍼싱, 프랭클린 루즈벨트, 우드로 윌슨도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완치되었다. 그러나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막스 베버, 기욤 아폴리네르, 프리드릭 트럼프[1], 베네딕토 15세 등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이 질병이 특히 무서운 것은 고대의 유행병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질병이 냄새로 전파된다거나 피의 균형을 맞추면 병이 낫는다는 등 현대로 보면 괴상한 생각을 하였고 방역이나 위생 개선에 대한 의식은 고전적인 단계에 불과했다.[2] 그러나 20세기 초의 사회는 이미 세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었고 공중 보건[3] 체계가 어느 정도 잡혀 있던 근대화사회였다. 그런데도 피해 규모가 가히 어마어마했다.

당시 세계 인구가 약 17억명이었는데 감염자는 약 5억명에 사망자는 최소 1,700만명에서 최대 5,000만명(총 감염자의 3~9%, 전체 인구의 1~3%)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사망자 수가 이렇게 들쭉날쭉한 이유는 진단할 겨를도 없이 야전에서 사망한 군인들과 합병증 사망자[4]를 포함하지 않거나 행정력 미비,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 당시 제대로 된 통계가 없어 사망자를 추정할 수도 없는 인도,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잡더라도 1차대전 사망자 수인 900만명의 2배~5배에 다다르는 사망자 수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는 스페인 독감의 유행이 1차대전의 종결을 앞당겼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5] 사모아는 인구의 90%가 감염되어 30%가 사망했고 이누이트 마을 몇 개도 몰살의 운명을 겪었으며 산마리노는 이 질병 하나 때문에 국가 멸망의 위기까지 갔다.

일제강점기한반도에서는 "무오년 독감"이라고 불렸으며 1918년 가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대유행했다.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 1,678만 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 2,113명(44%)이 감염되어 13만 9,128명(전체 감염자의 1.87%, 전체 인구의 0.83%)이 희생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은 일본 제국군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6]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1차 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이 조선에 다시 배치받으면서 대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7] 1918년 9월 들어 본격적으로 환자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10월에 유행이 절정에 이르렀고 각 학교가 휴학했으며 단체와 관청이 업무를 보지 못했다. 11월 개성시에서는 사망률이 평소의 7배에 이르렀고 충청남도에서 특히 기승을 부려 예산군홍성군에서는 수천 명이 사망해 사망자를 처리할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고 추수를 못한 논이 절반 이상이었다. 또 서산시에서는 12월 기준으로 인구의 대부분인 80,000명이 독감에 걸렸다. 매일신보 11월 12일자에 따르면 경성부에서는 268명이 죽었고 그 중 조선인은 119명이었으니 조선인의 사망률이 낮았다. 이 자료는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로 실제론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8] 같은 달 평양에서도 인구의 절반이 감염됐고 집배원들이 감염되어 업무가 마비된 우체국이 속출했다. 신동아: 스페인 독감, 식민지 조선을 휩쓸다[9] 당시 3.1 운동이 벌어진 원인에는 조선총독부의 무능한 방역 대책도 한몫했는데 자신들의 무능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사망했지만 오히려 조선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를 보이며 한창 고조되던 반일 감정을 부채질했다.[10]

미국 시애틀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승객의 대중교통 탑승을 거부했다. # 또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미착용 시 경우에 따라서는 유치장에 며칠 가두기도 했다.

일본 도쿄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고 시민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1#2[11]

아메리칸 사모아에서는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총독 존 마틴 포이어(John Martin Poyer)가 라디오를 통해 듣고 내린 해외 여행객 입국 금지 조치 때문이다. 세인트헬레나 같은 일부 고립된 지역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끔찍한 수의 사망자가 나왔음에도 치사율이 1.87%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이 역설적으로 매우 높은 감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12] 만약 감염된 환자가 주변에 감염을 시키기도 전에 단시간 내 바로 죽는다면 치사율은 높지만 도리어 감염 전파력이 떨어지는 감염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전 세계를 휩쓸며 맹위를 떨쳤던 스페인 독감도 총 3번의 대유행과 몇 차례의 소규모 유행 이후 최초 발병 이듬해인 1919년 4월 즈음해서는 상당 부분 종식되었다. 어떻게 해서 종식된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으나 집단 면역 형성[13], 유전자 변이[14], 검역 격리와 방역의 효과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는 1920년 봄 4차 웨이브가 있었다. 주로 미국, 유럽, 남미 등지에서 심각했고 일본에서도 1920년 3월까지 유행했다. 디트로이트, 밀워키 등 일부 지역은 1918년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내기도 했다.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당시에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무증상 감염과 사전 격리 조치를 취한 사례가 빈번했고 이에 따른 사회적 반발과 물류 마비, 자영업의 고난 등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 당시와 비슷한 사회적 현상 및 대중들의 인식들이 나타났다.

4. 대유행 이후[편집]


2005년 미군 병리학 연구소의 타우펜버그 박사의 연구를 통해서 스페인 독감의 정체는 조류독감으로 추측되었다.[15] 병사들이 머물던 캠프에서 기르던 식용 조류에서 발병했으며 역시 식용 돼지[16]를 통해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병사들에게 쉽게 감염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마이클 워러비 애리조나대 교수팀은 1880년부터 1900년 사이 태어난 이들이 어린 시절 H1 바이러스에 별로 노출되지 않아 면역력이 없는 상태에서 스페인 독감의 H1N1형 인플루엔자 A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최악의 사망자를 냈다는 연구 결과를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2014년 4월 28일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첨단 분자 시계 방법론을 이용해 스페인 독감의 원인균인 H1N1형 인플루엔자 A 바이러스와 일반적인 H1N1 돼지 독감, 1918년부터 1957년 사이의 계절성 H1N1 바이러스의 유래를 분석했다. 그 결과 스페인 독감 원인 바이러스가 조류에서 직접 유래했거나 사람과 돼지 독감 바이러스간 유전자 재조합으로 만들어졌다는 기존 가설이 틀렸다는 결론을 얻었다. 대신 발병 10여 년 전 사람에 감염된 H1 바이러스가 조류 독감 바이러스 유전자와 섞이면서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발전했다는 결론을 내놨다.

인플루엔자 A 바이러스는 대개 유아[17]와 노년층의 사망률이 높은 데 반해 스페인 독감은 20∼40대 사망률이 크게 높았다.[18] 대부분은 폐렴균에 의한 2차 세균 감염이 원인이었다. 이는 당시 나이별 인구 분포에 기인한 바가 큰데 실제로 100년여 후인 2020년의 인구 분포 곡선을 대입하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의 나이대 별 사망률 분포와 유사하다. 즉, 스페인 독감이라고 나이든 사람에게 덜 감염되었던 건 아니고 60대 이상 인구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사망자 수로는 부각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만일 고령화가 진행된 현대라면 당시보다 노인의 사망자 수가 많았을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학 기술 발전 등 100년이라는 시간 간격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 비교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연구팀은 1880년부터 1900년 사이에 태어난 상당수가 어린 시절 H3N8 바이러스에 노출되었고 그 결과 H1N1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별로 없었다 보니 사망률이 높았다고 분석했다. H3 바이러스 항체를 가진 당시 20대 후반 젊은이들이 H1 항원에 노출돼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 물론 H3N8 바이러스마저 겪어 보지 않은 도서 지역 등에선 스페인 독감의 치사율이 몇 배나 높았다. H5N1(조류 독감의 일종)은 젊은 층, H7N9(조류 독감의 일종)는 노년층 사망이 많은 것도 어린 시절 다른 HA 항원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워러비 교수는 "1918년 독감 대유행 이후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유래했고 치사율이 왜 그렇게 높았는지, 그리고 왜 청년층 사망률이 높았는지가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며 "이 연구 결과는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아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현대의 H1N1가 이 스페인 독감의 변종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스페인 독감에 비해서 독성은 약해진 데다 현대인들의 영양 상태가 당시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치사율은 낮았다. 대신 전염성은 강해져서 일반 감기와 같이 연례 행사가 되었다.

한국사 교과서나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흑사병과는 다르게 언급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일단 한국,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전후한 일제의 만행이 워낙 심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묻힌 듯. 세계사 교과서에서 언급이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임팩트 때문으로 추측된다.

5.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의 비교[편집]


100년 가량 후인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유행으로 인해 스페인 독감의 재림과도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비슷한 팬데믹도 팬데믹이지만 거의 정확히 100년이라는 시간차가 주목을 더했다. 인포그래픽 통계 사이트 Visual Capitalist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1월 29일 기준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판데믹 중 7위이며 현재진행형으로 순위가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다행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스페인 독감의 아성을 뛰어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2020년대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독감에 비하면 애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스페인 독감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대는 의학이 발전하지 않은 시기라서[19] 바이러스의 자체 전염력은 떨어질지라도 전파력이 훨씬 높아 과거 세계 인구가 훨씬 적고 교통수단이 미비한 그 시기[20]에 5억 명이나 감염되었으며 그 중에서 최소한 1,700만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선언된 기간 동안 나온 공식적인 코로나 사망자인 690만명의 약 2.5배나 되는 수치다. 당시 세계 인구가 현재의 4분의 1 가량이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사망자 수의 규모가 비율상으로는 10배가 넘는 수치였다고 볼 수도 있다.[21][22]

이 독감을 겪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또 겪었는데도 생존한 할머니가 있으며 미국에서도 같은 사례가 나왔다. #1, #2 2번 사례의 할머니는 심지어 재확진되었는데도 완치했다. 1918년 당시 살아있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이 독감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사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독감과 관련된 서적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당시 사람들도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겪은 사람들과 인식과 대응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에는 미국과 유럽이 마스크 착용에 적극적이었다는 등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다. 당시에도 주마다 다르긴 했으나 미국인들도 마스크를 써야 살아남는다는 인식이 매우 강했으며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집어넣기도 했다. # 물론 1960년대 카운터컬쳐의 발흥 이전의 서구 사회는 지금보다는 공동체주의적 경향이 강했고 젊은 세대와 비교하면 힘든 것을 묵묵히 참고 견디며 윗사람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풍조도 훨씬 강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다만 이렇게 전 세계적 팬데믹이라는 사회적 측면에서는 닮은 면이 많지만 병리학적으로는 별 관련이 없다. 스페인 독감은 독감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다.


6.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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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널드 트럼프의 조부다.[2] 위생에 대한 의학적이고 체계적인 인식은 19세기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산욕열 항목 참조.[3] 상수도, 하수도 같은 공중위생시설은 물론이고 비말 전파를 막으려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점이나 손을 씻어야 감염률이 떨어진다는 정보 등도 당시 이미 충분히 널리 퍼진 상식이었다.[4] 사실 이 독감 자체보다는 허약해진 몸에 합병증으로 세균성 폐렴이 발병해 폐에 물이 차 숨을 못 쉬어 침대에 누운 채로 익사한 사람이 대다수다.[5] 특히 이중 참호전에서도 발병되었다고 알려졌다. #[6] 일본 제국군에 조선인의 입대가 허용된 것은 문화 통치 후반인 1926년까지 가야 한다. 다만 홍사익, 이응준일본 육사에 관비 유학을 가서 경술국치 이후 일본군에 편입된 일부 대한제국군 출신 인원이 있기는 하였으나 아주 극소수였으므로 이들이 원인일 가능성은 낮다.[7] 당시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의 경우 34만 6,619명 중 15만 9,916명이 감염되었고 1,297명이 사망하였다. 일본은 5,500만 명 중 2,500만 명(45%)이 감염되어 48만 명(감염자의 1.92%, 전체 인구의 0.87%)이 사망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최초 발병 보고 지역이 강계여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극동으로 전파된 뒤 다시 만주를 거쳐 유입되었다는 시각도 있다.[8] 당시 중국에 있던 김구도 이에 감염되어 20일간 앓았다고 백범일지에까지 기록해 두었다.[9] 단, 기사에 나오는 삼중현(三重縣) 조우정(鳥羽町)은 현 미에현 토바시로 조선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는 지역이다.[10] 이는 3.1 운동의 근본적 배경이었던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11] 소설가 시가 나오야는 1919년 스페인 독감을 소재로 한 <유행감모(流行感冒)>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12] 물론 지역별 차이는 있어서 고립되거나 의료 체계가 낙후된 지역은 이보다 치사율이 더 높았고 사모아 등 일부 고립된 지역에서는 최대 20%에 달하는 치명률이 나오기도 했다.[13]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대응이 장기전으로 흘러가면서 백신 미접종자의 존재와 시간에 따른 백신 효과의 감소로 인해 백신만으로는 집단 면역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왔고 백신 접종에 더해 감염력은 크고 증상은 약한 변이 바이러스가 지배종이 되어 자연 감염에 의한 면역 획득이 더해져야 유의미한 집단 면역이 형성될 수 있다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고었다. 스페인 독감 당시에는 백신이 없었으므로 오로지 자연 감염만으로 집단 면역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된다.[14] 바이러스가 변이하면서 대체로 감염력은 높아지고 치명률은 낮아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바이러스는 종의 생존과 번식을 우선하지, 모 전염병 게임처럼 숙주의 절멸을 원하는 군체의식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15]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이 알래스카에 묻혀 있었는데 동토가 냉동고 역할을 해서 바이러스가 보존되어 있었다. 1951년 첫 바이러스 추출 시도는 실패했지만 1998년 다시 발굴해 그걸 연구했다고 한다.[16] 신체적 특성이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17] 의외로 악명 높은 코로나19는 유아에게는 치명적이긴커녕 20대보다도 치명률 및 위중증률이 현저히 낮다.[18] 다만 이 나이대에서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것은 아니고 사망률 자체는 유아와 노년층이 제일 높았다. 정확히 말하면 연령별 사망률 곡선이 U자를 그리는 일반 인플루엔자와 달리 W자 모양으로 나타났다.[19] 당시 의학이 현재보다는 뒤떨어질지언정 콜레라 대유행을 겪으면서 기본적인 보건 개념은 확립된 상태였다. 미국 등 선진국들에선 마스크와 거리두기 등 2020년대와 크게 차이가 없는 방역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오히려 현대에 비해 도시 밀집도가 훨씬 낮고 대륙간 이동이 제한적인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현대보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20] 비록 당시 교통수단이 미비했다고는 해도 있을 것은 나름 다 있었다. 지상에는 증기 자동차증기 기관차가 돌아다녔고 대륙간 이동에는 증기선을 이용하였다. 단거리에 한 명씩만 타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승객 여행 목적의 여객 비행기(Benoist XIV)도 1914년 영업을 시작했다. 참고로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1912년에 일어났다.[21] 이마저도 최소한의 추정치를 적용한 비교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1,700만명보다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연구가 거듭되면서 사망 추정치도 자연스레 증가하여 대체로 3,000만~1억명 사이로 추산하는 편이다.[22] 게다가 대부분의 사망이 가을~겨울 6개월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젊은 층의 사망이 두드러졌단 점에서 사망자 수 비교 이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미국은 이로인해 기대수명이 무려 51세에서 39세로 12세나 감소하였다. 반면 코로나19는 2019년 78.8세에서 77세로 1.8년 감소하는 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