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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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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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국
Imperio Español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국기[1]
해군기[2]
PLVS VL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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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페인 제국.png

1500년대의 최대 강역[3]
1492년 ~ 1975년
성립 이전
해체 이후[4]
카스티야 연합 왕국
스페인 왕국
멕시코 제국
콜롬비아
페루
리오데라플라타
아라곤 왕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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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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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 {{{-1 [[푸에르토리코|

푸에르토리코
]] {{{-1 [[괌|

]]
네덜란드 공화국
모로코
서사하라
적도 기니
국가
국왕 행진곡
수도
톨레도 (1492~1561)
마드리드 (1561~1601)
바야돌리드 (1601~1606)
마드리드 (1606~ )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입헌군주제[5]공화정군사독재
인구
60,000,000명 (1790년)
국가 원수
스페인 국왕
언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카탈루냐어, 아라곤어,
바스크어,필리핀어,나우아틀어, 오토미어, 마야어,
아이마라어, 치브차어, 과라니어 등
종족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카탈루냐인, 바스크인,
아라곤인, 필리핀인, 나우아틀인, 오토미인, 마야인,
아이마라인, 무이스카인, 마푸체인, 과라니인 등
종교
로마 가톨릭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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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달 & 그라나다 정복
1494년 -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
1504년 나폴리 왕국 점령
1519년 마젤란의 함대 출항, 세계일주 (~ 1522년)
1521년 아즈텍 정복
1529년 사라고사 조약 체결
1534년 잉카 정복
1535년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1] 설치
1542년 페루 부왕령 설치
1545년 포토시 은광 개발, 막대한 은의 유입
1556년 사실상 건국
1565년 필리핀 식민화 시작 (~ 1571년)
1568년 네덜란드 북부의 반란
1571년 레판토 해전, 오스만 해군 격파. 지중해 패권 장악
1580년 이베리아 연합 결성
1581년 북부 네덜란드의 사실상 독립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에게 패배
1609년 안트베르펜 조약, 네덜란드와 12년간 휴전 합의
1640년 포르투갈 독립, 이베리아 연합 해체
1643년 로크루아 전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북부 네덜란드 독립
1659년 피레네 조약, 데카덴시아 종결
1700년 합스부르크 단손, 보르본 왕조로 교체[2]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벨기에 상실
1762년 7년 전쟁,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3] 할양받음
1783년 파리 조약, 영국으로부터 플로리다 회복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1813년)
1810년 멕시코의 반란
1816년 아르헨티나 독립
1818년 산 마르틴, 칠레 독립 선포
1819년 시몬 볼리바르, 그란 콜롬비아 선포
1821년 멕시코, 페루 독립 / 플로리다 미국에 할양됨
1884년 베를린 회담, 서사하라 식민화
1898년 미서전쟁 패배, 쿠바와 필리핀 상실
1905년 모로코 사건
1912년 모로코 북부 식민화
1931년 공화국 수립
1936년 스페인 내전
1939년 프랑코 집권
1975년 보르본 왕정복고, 제국 해체
[1] 현재의 멕시코와 미국 서부[2] 펠리페 5세[3] 미시시피강 서부 한정 + 뉴올리언스
}}}
통화
레알, 에스쿠도, 스페인 달러, 페세타
면적
13,700,000km² (1780년)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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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영어
Spanish Empire
스페인어
Imperio Español

1. 개요
2. 역사
2.1. 형성 및 최전성기
2.2. 네덜란드의 부상
2.3. 쇠퇴와 중흥
2.4. 몰락
2.5. 20세기
2.6. 현재
3. 의의
4. 식민지 목록
5. 현재 국외 영토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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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s Ul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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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imperio donde nunca se pone el sol
해가 지지 않는 제국



1. 개요[편집]


1556년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가(압스부르고 왕가)의 시조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로스 1세 (재위: 1516년 ~ 1556년)가 퇴위한 뒤 그의 신성로마제국 지역을 제외한 스페인과 이탈리아, 네덜란드(저지대), 국외 식민지 등의 왕좌를 물려받은 펠리페 2세 (재위: 1556년 ~ 1598년) 시대에 성립되어 대략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세계 규모의 식민제국이다. 그리고 이웃한 포르투갈 제국과 더불어 유럽 및 세계사의 방향성을 바꾼 대항해시대,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제국이다.[6]

전성기 시절에는 오대양 육대주에 걸쳐 식민지를 지배했으며 PLUS ULTRA(라틴어보다 더 멀리)[7]를 국가 슬로건으로 삼고, 세계 곳곳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면적으로만 보면 대영제국에 이어 세계 2위의 해양제국으로, 한때 아메리카 대륙 전역을 석권한 적도 있었다. 대영제국의 칭호 중 하나로 알려진 해가 지지 않는 제국(El imperio donde nunca se pone el sol)도 본래는 스페인 제국을 이르는 말이었다.[8]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하면서 쿠바, 필리핀, , 푸에르토리코 등을 상실한 시점을 스페인 제국의 붕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스페인이 이후로도 모로코, 적도 기니, 서사하라를 비롯한 아프리카 일대에는 식민지를 유지했기 때문에 20세기까지도 스페인 제국이 존속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

이들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전파한 덕분에 스페인어링구아 프랑카의 지위를 갖는 영어를 제외하고는,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국제지역 언어가 되었으며, 이베로 로망스어(Iberian Romance)의 장점을 살려 세계주의에 입각한 광대한 스페인어권 시장경제를 형성하였다.[10][11]

시작부터 로마 제국 재건을 목표로 했으나 전성기인 황금시대의 패권을 살려서 그것을 이루는데는 실패하였다. 유대인아랍인들, 개신교권을 포용성 있게 대하여 통합화를 이루는 것에도 실패하였다.[12] 로마 제국 재건을 전제로 한 관점에서 보았을때,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관용과 포용의 부족함으로 유럽의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켜 오늘날에 이르게 하였다는 비판또한 존재한다. 국가원수가 황제여서 제국이 아닌 패권국의 의미로 제국이다. 스페인 국왕들 또한 그러한 점에서 스스로 황제라 자칭하지 않았고, 이부분에선 늘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13]

스페인 제국은 레콩키스타에서 시작해 르네상스, 대항해시대, 30년전쟁을 관통하며,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을 거쳐 스페인 내전과 전후 냉전시기, 1960~70년대 탈 식민지주의, 90년대 이후 본토와 식민지 간 경제적, 사회적 재정립 시기까지 이어지는 시대와 맥락을 같이하며, 이들의 흥망성쇠는 유럽 제국주의의 팽창과 몰락, 진보와 후퇴, 분열과 통합을 이해하는 주요 키워드이다.

현재 미국 영토의 70% 정도가 예전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었다. 그래서 보통 미국 남부서부개척시대를 떠올릴때 나오는 문화들은 대부분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14] 옛날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미국 도시들의 이름이 스페인어다. 미국의 수많은 주들[15]의 이름들이 스페인어로 되있는것만 봐도 스페인 제국이 미국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현재 미국 영토인 곳들 중 캘리포니아, 텍사스,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 애리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에게서, 푸에르토리코는 스페인한테 미국이 각각 미국-멕시코 전쟁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뺏은 것이다. [16]


2. 역사[편집]





2.1. 형성 및 최전성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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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펠리페 2세.

포르투갈과 함께 세계 최초의 식민제국으로서 스페인 제국의 역사는 15세기부터 시작된다. 이슬람 세력을 안달루시아 남쪽 끝으로 몰아낸 카스티야 왕국은 15세기 중반 후안 2세 ~ 엔리케 4세 시기 왕위계승문제로 혼란스러웠지만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 알폰소가 사망후 이복 여동생 이사벨이 즉위하여 빠르게 내부를 수습했다. 아라곤 왕국은 베네치아에 필적할 만한 지중해 해상제국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한때 이탈리아 남부를 넘어 그리스를 넘보기도 했고, 1409년 최초로 시칠리아부왕(Viceroy)을 파견해 통치를 시작했다. 1443년 나폴리 왕국마저 차지하여 부왕을 파견했으나 곧 동쪽으로의 경제권 건설은 난관에 부딫치게 되었고,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자벨 1세와 아라곤 왕국 페르난도 1세의 혼인 이후 대체적으로 인구에서 우월한 카스티야 왕국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부부왕의 치세 시작으로 통합 스페인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통일과 영토수복을 계기로 스페인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1492년 10월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었다. 이미 16세기 초 콜럼버스의 항해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래 에르난 코르테스와 페드로 데알바라도가 멕시코[17]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를,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디에고 데알마그로, 페드로 데발디비아가 페루에콰도르, 칠레를, 알론소 데오헤다와 세바스티안 데벨랄카자르, 바스코 데누네스 발보아가 콜롬비아파나마를, 후안 데 카바욘이 코스타리카를, 페드라리아 다빌라가 니카라과를, 후안 데살라사르가 파라과이를, 페드로 데 멘도사가 아르헨티나우루과이를 정복하고, 후안 데오냐테와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코로나도가 뉴멕시코, 텍사스, 에리조나 등 지금의 미국 남서부 지역들을 정복, 점령하면서 이후 스페인은 북중미와 남미 일대에 거대한 식민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세바스티앙 1세모로코 원정 도중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전사하여 정통 왕계(王系)가 단절되자 모계(母系)를 통해 포르투갈 왕실과 핏줄이 이어져 있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1580년 에스파냐-포르투갈 동군연합(同君聯合)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에스파냐의 기존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에다 1571년 정복한 필리핀 식민지[18],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개막하며 정복한 아프리카브라질, 인도,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식민지[19] 및 국외 영토까지 포괄하여 거대한 규모의 해양제국을 이룩하는 데 성공한다. 이 시기 필리핀에 처들어온 왜구를 카가얀 전투[20]에서 격퇴하기도 하였고#,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블로그 참조[2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berian_Union_Empires.png

펠리페 2세 사망 당시(1598) 스페인-포르투갈 연합 왕국의 영토. 붉은색은 스페인 영토, 푸른색은 포르투갈 영토.

1588년 잉글랜드 원정에 실패하고 무적함대가 패배하여 스페인 패한 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잉글랜드가 기고만장하여 역으로 스페인을 침공했을 때 잉글랜드 해군이 박살나는 등 스페인의 우위 속에서 런던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펠리페 2세가 에스파냐, 정확히는 카스티야 중심의 중앙집권제도를 고집하여 포르투갈 귀족들의 불만을 샀음에도 연합왕국 자체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존속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27px-Dominios_de_Felipe_II.svg.png

1581년 동군연합 성립 당시 스페인의 유럽 내 지배 지역. 이 가운데 북쪽의 속령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펠리페 2세 당대부터 스페인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2.2. 네덜란드의 부상[편집]


네덜란드는 바람이 많이 부는 늪지대로, 면적이 좁고 천연자원도 없었으며,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는 작은 지방이었다. 1568년, 주로 개신교도인 네덜란드인은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 군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반란군이 무적의 풍차를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는 돈키호테처럼 보였다. 하지만 80년이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공공의 적 스페인을 칼레 해전을 통해 승리한 후 스페인을 상대로 승전을 계속하며 독립을 쟁취했을 뿐 아니라, 스페인과 그 동맹국이자 스페인과 해상강국 투톱을 차지하던 포르투갈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해양 항로의 주인으로서 네덜란드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등극한 것이다.

그 성공의 비결은 신용에 있었다. 네덜란드 소도시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지상에서 싸우는 대신 용병을 고용해 자기들 대신 스페인과 싸우게 했다. 그동안 자신들은 바다로 나가 점점 더 큰 선단을 꾸렸다. 용병을 쓰려면 돈이 많이 든다. 함포를 장착한 선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네덜란드인은 강력한 스페인 제국보다 더욱 쉽게 군사 원정대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급성장하는 유럽의 금융가로부터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부주의하게도 자신에 대한 금융제도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었다. 은행가는 네덜란드에는 용병과 선단을 갖추기에 충분한 액수를 신용을 담보로 대출해주었다. 이 군대와 선단 덕분에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로를 장악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그 이익으로 대출을 갚았으며, 그 덕분에 신용도는 더 높아졌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 금융의 중심지로 급성장했다.

네덜란드가 금융 제도의 신뢰를 얻은 이유는 크게 둘이다. 첫째, 이들은 기일에 맞춰 전액을 반드시 갚았다. 그래서 은행에게 신용을 얻었다. 둘째, 사법부가 독립되어 있는 데다 사적 권리, 그중에서도 사유재산권을 보호했다. 자본은 민간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해주지 않는 절대왕정, 독재 국가에서 새어나와 법치와 사유재산권이 있는 국가로 흘러들어갔다.

반면 스페인 법원은 왕에게 영합하는 성향이었다. 법원은 왕의 입맛에 맞추려 하는 데다, 왕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였다. 한편 네덜란드의 법원은 정부와 별개이며, 시민이나 군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스페인은 계속해서 정복 사업을 유지했지만,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올려서 원성을 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돈을 빌려서 정복사업의 자금을 마련했지만, 한편으로 자사의 주식을 팔아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점점 더 늘어났다. 주식 소유주는 회사가 내는 수익의 일부를 받을 권리를 갖게 된다. 이들 주주는 네덜란드 제국의 대들보가 된 동인도 회사, 서인도 회사 같은 주식회사의 주식을 구매함으로써 기꺼이 자금을 투자했다.


2.3. 쇠퇴와 중흥[편집]


한편 1618년 30년 전쟁이 터지고, 에스파냐가 오스트리아 대공국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원하여 전비(戰費) 부담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데다,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아시아 교역 지대에서의 해적 행위를 스페인 정부가 제대로 막지 못하자[22]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진 포르투갈 쪽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결국 30년 전쟁 중이던 1640년 포르투갈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스페인군과 관료들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언했으며, 60년 만에 스페인-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은 와해되고 포르투갈에는 브라간사 왕조가 들어섰다.[23]

이와 비슷하게 카스티야 중심의 강압 정치와 종교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세금 부담에 짓눌린 카탈루냐는 포르투갈의 독립에 자극을 받아, 프랑스 왕국루이 13세의 지원을 기반으로 1640년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652년까지 무려 12년이나 지속되어 스페인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641년에는 안달루시아, 1647년에는 남이탈리아의 속령인 나폴리 왕국, 1648년에는 아라곤 본토가 모반을 꾀했으며, 스페인은 이 모든 반란 기도를 진압하기 위해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다.[24]

여기에 30년 전쟁의 패전으로 1648년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프랑스와 계속된 전쟁으로 1659년 플랑드르 남서부의 아르투아와 페르피냥이 속한 로세욘 지방을 할양해야 했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혼이 거듭된 끝에 태어난 카를로스 2세 (재위: 1665년 ~ 1700년) 시대에 이르러서는 1678년에는 스위스 접경의 영토인 프랑슈-콩테를 프랑스에 넘겨주더니,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보르본 왕가로 왕위가 넘어간 뒤 플랑드르와 나폴리 왕국 등의 유럽 영토는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주며 상실하게 된다.

이후로 보르본 왕조가 스페인을 지배하였고 운이 좋게도 현명한 왕들이 나와서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카를로스 3세 시기에 이르러 스페인의 아메리카 영토는 남부 아르헨티나에서 미국 서부와 남부, 중부지방 및 캐나다 남쪽까지 이르게 되었고 내실도 튼튼히 다졌다. 펠리페 5세는 유럽과 신대륙의 무역을 장려하고 국내 발전에 힘써 100여년 동안 스페인은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카를로스 3세 시기에 루이지애나도 획득하는 등 중흥하였다. 키를로스 3세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종교재판 규정을 완화했다. 또한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등 북미 식민지 경영에 적극적이었으며 북미 여러곳에 스페인 탐험대가 파견되었다.[25] 이 무렵 스페인 식민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었다.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신생 미합중국을 지지하여 1779년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프랑스와 같이 지원군을 파견했다. 지브롤터에서는 세인트빈센트 곶 해전을 시작으로, 아메리카에서는 과테말라와 니카라과(산 후안 공방전)에서 영국군과 충돌했고, 루이지애나에서는 1780년 5월 세인트루이스 전투에서 영국-인디언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스페인군은 1781년 1월 7일 모빌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781년 3월 9일 ~ 5월 8일 펜서콜라 공방전에서 영국령 식민지인 웨스트 플로리다 주의 수도인 펜서콜라를 공략했다. 이 대가로 1783년 파리조약때 스페인은 7년전쟁 당시 쿠바의 아바나와 맞바꿔 영국에 넘겨준 플로리다를 재탈환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그 영향이 스페인에게 번졌고 이는 스페인 황금기의 붕괴를 가져왔다.[26]


2.4. 몰락[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pain_in_1898.png

나폴레옹이 등장한 시기에 카를로스 4세는 계속된 실정으로 결국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그의 아들이 페르난도 7세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나폴레옹은 자기의 친형을 호세 1세로 즉위시키고 페르난도 7세를 쫓아내어 중앙정부는 프랑스의 손에 넘어간다. 한편 중앙의 상황과 달리 지방에서는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모습이 보였다. 프랑스군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약탈과 강간을 일삼자 지방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일어난다. 특히 여성들까지 전쟁에 참여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결국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철수하며 페르난도 왕자가 국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돌아왔고 페르난도 7세로 즉위하면서 보르본 왕조가 복구되었다.

하지만 강대했던 스페인 해군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대패로 사실상 붕괴되었고, 본토 역시 프랑스에 맞선 수 년간의 게릴라 항쟁으로 인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식민지들의 소요에 개입할 수 있는 여력을 사실상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새로이 즉위한 국왕들은 국민들의 기대와 달리 자기 왕위에만 관심을 가지고 중남미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진압하지 못하여 하나둘씩 독립시키며 기대를 좌절로 만들었고 내부의 문제들도 해결하지 못해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그 뒤를 이은 왕들도 정치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점점 커져가는 상황이었다. 스페인 전열함대 또한 나폴레옹 전쟁에서 입은 끔찍한 피해를 자력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러시아 제국의 74문 전열함 다섯 척을 중고로 구매하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19세기 말인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쿠바에서는 쿠바 독립세력이 스페인의 식민지배에 대항하여 10년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이에 미국은 쿠바와 필리핀의 독립 운동을 도와 스페인의 만행으로부터 구해주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결국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 리코, 북마리아나 제도를 모두 상실했고 남은 서태평양의 섬들은 따로 유지시키기에는 비용 부담이 커서 독일에게 매각했다.

이때 스페인이 본국의 함대를 쿠바와 필리핀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영국이 화해를 중재하자 곧 포기하고 미국에 영토를 내줘야 했다. 유럽국가들도 스페인보다 미국의 손을 들어준 상황이었고 세계열강에서 스페인이 빠지고 본격적으로 미국이 세계에 등장한다.

이후로 건진 건 서사하라적도 기니, 스페인령 모로코가 있는 아프리카 영토 뿐이었다. 당대 강대국인 영국이나 프랑스는 물론이고, 심지어 17세기까지 스페인의 속령에 불과했던 벨기에네덜란드가 보유한 식민지보다도 더 작은 영토를 가진 상태가 되었다.

스페인령 모로코의 경우 스페인의 주요 식민지 목표였으나 프랑스의 개입으로 완전한 통치는 못하고 프랑스와 분할통치하였다.[27] 이때 프랑스를 견제하는 독일영국 덕에 그나마 차지한 것이었고, 모로코 북부를 차지했다. 스페인 본토와의 연계성도 높았고 경제성도 좋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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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령 모로코(분홍색 부분)
스페인령 사하라(붉은색 부분)

한편 스페인령 모로코의 리프(Rif)지방에는 고급 광물이 풍부하여 노천광산 채굴을 통해 쉽게 추출할 수 있었다. 1911년~1914년 사이 세우타-테투안을 잇는 협궤철도가 건설되었다. 스페인 정부는 사업가 호라치오 에체베리에타(Don Horacio Echevarrieta)[28]를 내세워 광산을 경영했는데 이게 원주민과의 마찰을 불러 리프전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에체베리에타는 연간 100만톤의 철광석을 채굴하여 본국으로 실어날랐다.


2.5. 20세기[편집]


한편 스페인 제국의 산업화는 19세기 후반 바스크 지방과 카디스, 말라가, 바르셀로나의 철광업과 조선업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스파노-수이사나, CASA, 이베리아 항공, Saltos del Duero, AESA같은 산업 재벌기업도 이즈음 성장하기 시작했다.[29] 이 외에도 스페인은 영국의 드레드노트를 기초로 에스파냐급 전함 3척, 에메랄드급 경순양함을 기초로 프란시페 알퐁소급 경순양함, 카운티급 중순양함을 기초로 카나리아스급 중순양함을 진수하였다.

이 시기 스페인의 대외정책은 세계 대전 참전 같은 적극적인 외부로의 무력투사 대신 영국, 프랑스와의 앙숙관계를 청산하고, 북서아프리카 항로에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주력하였다.1884년 베를린 회담을 통해 지금의 서사하라지역을 침공하여 스페인령 사하라를 성립시키고 프랑스와의 협력을 통해 서아프리카의 저항세력을 일소하기 시작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의 결과로 베이징의 외국인들이 피해를 입자 신축조약 대표로 나서 열강대표로 청나라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으로는 많은 변혁이 이루어진 시기였는데 1898년 미국과의 전쟁을 계기로 스페인 사회 전반적인 쇄신을 추구하는 “98세대”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이 시기이며, 호아킨 코스타,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의 실존주의가 선봉에 섰다. 특히 이 시기 등단한 스페인 문학가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내전 이후 스페인 문학을 전세계로 퍼트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건축 예술분야에서도 광산업이나 제조업으로 재산을 축적한 신흥 자본가계층의 지원을 받은 아르누보 양식의 전성기가 이때쯤이다. 이 분야의 레전드 안토니오 가우디도 모직물산업의 큰손 구엘 백작(Eusebi Güell)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재능을 꽃피웠다.

이후 스페인은 모로코에서 일어난 반란(리프 전쟁)을 초기 진압하지 못했고, 왕정에 대한 불신이 커져, 리베라(Primo de Rivera)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발생, 그리고 이어진 군부의 계속된 실책으로 결국 1931년 보르본 왕조마저 공화국 수립으로 몰락하였고 완전히 추방되어 왕정이 폐지되었다.

이 과정에서 북아프리카 식민지에 주둔한 이른바 아프리카 군단(Ejército de África)의 영향력이 커졌고, 이들은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후 제2공화국 역시 스페인 내전으로 폐지되었고, 스페인은 유사 파시즘 정권이 등장하였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영토 확장보다 자신의 안위를 중요시 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우호 국가였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이 스페인에 지원 요청을 하였지만 프랑코는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영국과 독일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다. 결국 독일, 이탈리아가 패망하며 히틀러무솔리니는 죽고 프랑코와 스페인만 살아남았다.[30]

그러나 2차대전 전후 3세계의 각성과 탈식민주의 물결속에 프랑코 정부 또한 기존의 식민지 정책을 제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스페인령 모로코는 1956년 모로코의 독립과 함께 반환하고 2백 년간 유지되던 스페인령 기니 역시 1968년 10월 적도기니로 독립하였다.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고 죽기 전의 명령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하였다. 그동안 프랑코는 스페인 왕가 대신에 잠시 스페인을 맡았다고 섭정 격으로 자기 통치의 합리화를 했다. 계승 서열을 따진다면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왕위 계승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의 자유주의 성향을 꺼린 프랑코는 후안의 아들을 대신 지명했다. 하지만 어떻든 평화롭게 넘어갔고 새 헌법 제정과 함께 마침내 민주주의 정부가 성립됐다.

이 해에 스페인령 사하라에서 스페인이 철수함으로써 세우타, 멜리야와 북아프리카 몇몇 도서지역을 제외하고 스페인의 국외영토는 모두 독립했고 수백 년간 이어진 스페인의 제국주의 여정은 끝을 맺는다.


2.6. 현재[편집]


21세기 시점에는 스페인령 카나리아세우타, 멜리야, Plazas Fuertes de África (아프리카의 요새들)이라 불리고 있던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가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다.

  • 카나리아 제도1833년, 스페인 본국의 카나리아 지방(Provice of Canary Islands)으로 편입되어 1978년 헌법에 따라 자치정부가 성립되었다. 현재 EU내 최외곽 지역(Outermost Regions)으로써 EU법 규정의 예외가 존재하고 EU 관세조항과 부가가치(VAT)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 특수한 지역이다. 비슷한 지위로 프랑스령 기아나,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등이 있다.

스페인인이 최초로 정복한 식민지이자 마지막까지 보유한 식민지인셈. 이들이 정복하여 세운 도시인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아바나, 멕시코 시티, 리마와 같은 중남미 정복도시들의 원형이 되었다.

  • 세우타멜리야는 북아프리카 해안에 붙어있는 스페인령 도시들로, 1995년 자치도시(Autonmous cities)로 지정되어 자치정부와 자치의회가 성립되었다.

  •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는 세우타와 멜리야를 제외하고, 스페인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모로코 해안선 가까이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 영역들을 일컫는다. 플라사스 데 소바레니아란 '주권의 장소들'이라는 뜻인데, 스페인 국가가 성립할 때부터 차지하고 있는 땅이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생태학 적으로 중요한 지역인데, 지금도 모로코 정부에서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고, 2011년에는 모로코 활동가들이 이곳에 상륙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프랑스와 영국의 국외영토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모로코 왕조 성립 이전인 16세기에 귀속됐기에 고유영토라는 논리로 거부하고 있다.[31] 이 논리는 역으로 영국이 스페인에게 지브롤터 반환을 거부하는 논리로 쓰인다.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 유산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32]


3. 의의[편집]


스페인의 옛 식민지 권역은 스페인으로부터 들여온 스페인어가톨릭 등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특성을 구성하게 되었고, 수백년간 이어진 본토와 식민지의 교류는 Hispanidad라 부르는 공통된 지식재산(Intellectual property)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지식재산을 바탕으로 현지 문화와 융합된 독특한 예시로 예수회과달루페의 성모, 페루 성모 신심을 들 수 있다. 또한 현재 스페인어를 모어로 삼는 인구도 5억을 넘어간다. 지금의 중남미 국경의 기초도 과거 부왕령의 산물.

미국의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카우보이 문화도 실은 스페인계 목동 바케로(vaqueros) 에서 유래되었다. 본래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중부 카스티야는 건조지대여서 농업 대신에 양목업이 발달하였는데,[33] 이후 스페인인들은 16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에 정착하면서 카스티야와 기후가 비슷했던 미국 남부에서 멕시코 북부 건조지대에 목축업을 도입하였다. 차이점이 있었는데 카스티야에서는 주로 양을 방목했다면, 당시 멕시코 북부와 미국 남부에 이르는 지역은 땅은 남아도는데 인력은 부족한 상황이라서 양 대신에 소를 방목했다. 연약한 양은 반야생 상태에서 키우기 힘들고 계속 관리가 필요했던 반면 소의 경우 반야생 상태에서도 잘 자랐다. 이들은 수백년간 반쯤 야생으로 방목한 소들을 포획하여 넓은 지역의 평야를 건너 운반하였다. 그리고, 북아메리카 중부 대평원과 북부의 스네이크, 컬럼비아강 원주민들과 교류를 하여 말을 비롯한 구 대륙의 가축과 농법을 전파하였다. 미국 서남부의 말 품종인 무스탕(Mustang)도 스페인인들이 본토 안달루시아에서 도입하여 야생화한 품종이다.

스페인인 바케로[34]들은 올가미 밧줄, 말, 개를 이용하여 저녁 무렵에는 짐승들을 몇 마리씩 몰아 모으거나 수천 마리의 소를 국토를 가로질러 수십 km씩 이끌어가며 가축들을 몰았다. 이들과 접촉한 동부의 영국인, 미국인들은 이들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였고, 이후 영국과 스페인의 전통 및 문화가 혼합하여 독특한 미국식 카우보이 문화가 탄생하였다. 미국-멕시코 전쟁이후 서부개척시대가 도래하자 미국인들은 적극적으로 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들의 거친 풍토와 자연에 대한 자세는 미국인들의 정신에 뿌리깊에 각인되어 미국을 상징하는 프론티어는 근현대 미국을 상징하는 이념이 되었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를 비롯한 미국 서남부에는 현재에도 버카루(Buckaroo)라는 방언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남미에는 북미의 카우보이와 유사한 가우초와 우아소 문화가 남아있다.

한편 1949년 이래로 스페인의 주도로 이베로-아메리카 공동체[35] 라는 스페인어권 국가들간 제반 분야 협력 및 교류증진을 위한 공동체가 설립되어 운영중이다. 개념 자체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1898년 미국과의 전쟁 패배 이후 등장한 98세대 철학자들이 제시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스페인과 구 식민지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법률,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폭넓은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4. 식민지 목록[편집]



  • 페루 부왕령(1542 ~ 1824) - 프란시스코 피사로디에고 데 알마그로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세운 식민지인 누에바 카스티야와 누에바 톨레도를 합쳐서 만들었다. 본래 현재 남아메리카의 스페인어권 지역 전부를 포함하는 남미 유일의 스페인 부왕령이었지만 18세기에 두 부왕령이 분리되어 나갔다. 수도는 리마이다.
    • 페루 - 현재 브라질 서쪽 아마존 지역 영토 일부까지 포함되었다. 결국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하고 페루가 이 지역을 통치했었으나 1909년에 브라질에게 영유권을 빼앗김으로서 현재의 페루와 브라질 간 아마존 국경이 획정된다.
    • 칠레 도독령
  •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 1776년 페루 부왕령으로부터 분리되어 설치되었다. 현재의 아르헨티나의 전신이다. 참고로 이 부왕령이 분리돼 나가면서 페루 부왕령에 남은 길쭉한 부분이 칠레가 된다.


  • 이베리아 연합
    • 브라질(1580 ~ 1640)
      • 브라질국(Estado do Brazil)
      • 마라냥국(Estado do Maranhão)
  • 플라사스 푸에르테스 데 아프리카(Plazas Fuertes de África)[39]
  • 스페인령 네덜란드 -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독립을 쟁취한 북부 7주는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중간에 이탈한 남부 10주[40]는 스페인 치하로 남았다.
  • 시칠리아 왕국 - 1409년 스페인 최초로 부왕(Viceroy)이 파견되었다. 시칠리아 왕국의 명목상 왕위는 아라곤 ~ 압스부르고 왕조 ~ 보르본 왕조로 이어졌다.
  • 나폴리 왕국
  • 밀라노 공국
  • 부르고뉴 백국
  • 스페인령 모로코
  • 스페인령 사하라[41]
  • 스페인령 기니


5. 현재 국외 영토[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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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르고뉴 십자가'로도 불리며, 카를 5세의 시대 이래 스페인 제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되었다. 1843년부터는 오른쪽의 해군기를 국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2] 현대의 스페인 국기와도 디자인이 유사하나, 문장의 양 옆에 지브롤터의 기둥이 없고 방패 안의 문양도 2개밖에 없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1785년부터 무적함대의 상징기였으며, 1843년부터는 꽤 오랫동안 국기로도 쓰였다.[3] 16세기라고 했지만 스페인 제국이 보유했던 모든 영토를 나타낸 것으로, 특정 시점의 스페인 제국의 강역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 가령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일부나마 남아 있던 17세기 후반에 스페인은 아직 루이지애나를 개척하지 못했으며 서사하라는 훨씬 이후의 베를린 회담을 통해 획득한 것이다.[4] 본국(스페인)과 주요 식민지만 표기했다.[5] 1837년부터 시행되었다.[6] 대항해시대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다시피 근세 시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인류사 내내 군소 지역끼리만의 육로를 통한 교류나 중계 무역의 시스템적인 한계를 벗어나 아예 타 대륙권 시장과 직접 거대 무역과 대양을 넘어서는 스케일의 외교를 펼치는 등, 본격적인 세계사의 시작을 알린 업적이 존재한다. 물론 여러 면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는 절대 찬양조가 아닌 식민제국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제국주의 국가로서 직접 역사에 남긴 부정적인 면모와 이를 따라하여 무려 20세기까지 악랄한 짓을 자행한 여러 후속 제국주의 국가들에 끼친 안 좋은 영향력까지도 전부 포함한 어떤 면에서는 중립적인 용어이다.[7] 본래 카를 5세의 개인 좌우명이었지만, 후에 압스부르고 왕조의 왕가 문장에 쓰였으며, 현재도 스페인 국기의 국장에도 들어있는 국가 슬로건이다. 헤라클레스 기둥을 상징하는 두 기둥에 쓰여져 있다.[8] 여담이지만 19세기 말엽에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위의 관용구를 풍자하여 "엉클 샘은 이제 해가 지지 않는다."라는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9] 하지만 19세기 말기부터 스페인은 패권국에서 완전히 멀어져, 한때는 스페인의 동네북이었던 이웃 포르투갈보다도 식민지가 적어졌다. 그나마 포르투갈은 앙골라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마카오,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 등 수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미국-스페인 전쟁 패전 후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라곤 아프리카 서사하라와 모로코 일부 지역, 적도 기니 등이 전부였다. 2020년대 현재에는 선진국이자 G20으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사이에선 나름 내로라하는 지역강국 축에도 못 드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10] 스페인은 기본적으로 속인주의에 입각한 국적법을 시행하는 국가지만 구 식민지 국가출신에 대해서는 굉장히 널럴한 규정을 적용한다. 덕분에 스페인은 옛 식민지 국가군들과 인구 전출입이 굉장히 활발하며, 옛 식민지 국가 출신중에는 스페인을 포함한 이중, 삼중국적자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 중 하나로 다른 유럽권 국가들이 20세기 후반부터 영어권 대중음악 시장에 잠식되어 자체적인 대중 가요 콘텐츠들이 급격하게 미비해진 것과는 별개로 스페인의 경우,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범 스페인어권의 가요와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오히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을 위시로 한 영미권 가요계에 라틴 팝붐을 일으키고 이를 국제적으로 파급하는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라틴 팝의 범적인 규모는 영미권 팝 다음가는 규모와 수요를 자랑한다.[11] 또한 로망스어군 내에서도 스페인어는 범용성이 좋은 편이다. 가령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쓰는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도 스페인어는 굉장히 가까운 친연성으로 70%의 단어가 스페인어 단어와 어근을 같이 공유하며, 포르투갈어를 쓰는 앙골라에서도 스페인어 화자들이 큰 어려움없이 대화가 되곤 했다. 냉전기 쿠바는 공산혁명의 이상과 외화벌이를 목표로 쿠바 내무성 정보관리국 제5과를 곳곳에 파견했는데 이들이 특히 활약한 곳이 포르투갈어를 쓰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였다. 또한 라틴어의 또다른 직계 후손인 이탈리아어와도 상호 호환성이 상당한지라 같은 유럽권 내에서 서로 통역없이도 어느 정도의 직독 직해가 가능한 수준이다. 오히려 순수한 발음과 발화면에서는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가 비음이 섞이는 경우가 많은 포르투갈어보다도 더 흡사한 면이 강하다.[12] 스페인 내에서도 그러한 시도를 했던 인물들이 존재했었다. 대귀족 보르자 가문은 유대인 혈통들의 능력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기용하기도 했으며, 보유한 발렌시아 영지 내 적지 않은 인구가 무슬림이였다.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는 네덜란드 지방에 부임시 개신교 세력들에 포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스페인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실패했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나오는 막대한 양의 황금, 은과 더불어 제국 내 회계 능력이 뛰어난 유대인들을 포용하여 실력 발휘를 원활하게 할 수있게 했다면 스페인 제국은 지금의 미국에 비견되는 슈퍼파워, 기축통화국 되었을지 모른다. 여러 대에 걸쳐 추방했는더, 심지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들마저 추방해버렸고, 이는 큰 실책이였다. 추방 당한 이들은 영국,네덜란드로 가서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기 때문이다.[13] 이는 영국 또한 마찬가지였다.[14] 스페인어로 되어있는 미국 지명은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15]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플로리다, 몬타나, 네바다, 뉴멕시코 등이 있다.[16] 단, 텍사스텍사스 공화국을 수립해 자발적으로 멕시코 제2연방공화국에서 탈퇴한뒤 미국에 가입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중부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프랑스 소유가 된 뒤, 미국이 프랑스에게 돈주고 산 것이다.[17] 아즈텍과 마야 문명의 영향권에 속해있지 않던 멕시코 북부 지역은 코르테스와 알바라도가 아즈텍과 마야를 정복한지 17세기 중후반에 와서야 스페인에게 정복되었다.[18] 필리핀은 국명 자체가 정복 당시 군주였던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19] 1999년 12월에야 중국에 반환된 마카오도 포함된다.[20] 1,000명의 왜구가 단 60명의 스페인군에 패배한 사건이다... 사실 국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일본 해적인 왜구가 고평가되어 있지만, 1601년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안드레 페소아 선장이 지휘하던 포르투갈의 무장상선은 무려 30척의 무장 선박에 탑승한 왜구 1,800명의 공격을 물리치기도 했다!#[21] 다만, 왜구도 16세기쯤 가면 무장만 일본인이고 훈련도 거의 안된 중국인들이 대다수에 다른 나라, 심지어 서양인들도 일부 있는 오합지졸 해적 집단에 불과했다.[22] 사실 스페인은 유럽 본토에서도 네덜란드 독립군 함대인 일명 '고이센(바다의 거지떼)'이 마구잡이로 저지르는 해적질과 약탈을 제대로 못막을 만큼 해군력이 부실했다.[23]이베리아 연합 기간동안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에 밀려 아시아지역 식민 거점을 하나 둘 잃기 시작했다. 다행히 브라질은 1663년 수복했지만 말라카를 잃은것은 정말 뼈아팠다(...). 사실 말라카는 현재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오죽하면 아직도 해적들이 말라카 해협에서 날뛸 정도.[24] 현재 이들 지역은 남이탈리아 빼고 모두 스페인 영토이긴 하나 카탈루냐 지역은 특히 반(反) 카스티야적인 자립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툭하면 분리 독립 논의가 불거지곤 한다.[25] 캐나다 서부 벤쿠버나 알레스카앞바다에 뜬금없이 스페인어 지명이 붙은 이유이다. 당시 영국이 제임스 쿡을 앞세워 태평양의 남은 도서지역 위주로 탐험을 했다면 스페인은 호세 페르난데스나 호세 나바레즈 등의 탐험가들이 태평양 연안위주로 탐험을 했다.[26]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들어선 보르본 왕조의 외교적 입장은 펠리페 5세루이 15세 치세에 벌어진 사국 동맹 전쟁 시기를 제외하면 항상 친(親) 부르봉 정책이었다. 때문에 혁명 초기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단두대로 목이 달아나자, 제1차 대불동맹에 참여해 혁명정부와 적대했지만 이후 프랑스의 압력을 받고 자의반 타의반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27] 모로코 사건 참조.[28] 스페인의 백만장자이자 기업인, 광산업자, 부동산사업자, 은행가, 정치인으로 이베리아 항공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모로코에서 광산을 경영하면서 리프전쟁의 스페인 포로를 구해오기도 했다. 부동산에서 일가견이 있어서 마드리드빌바오, 바르셀로나의 건축사업에 참여하기도 했고, 광산업으로 벌은 돈을 관광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급진 자유주의 성향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반대로 2차대전 기간 중에는 빌헬름 카나리스와의 인연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한 복잡한 인물이다.[29] 바스크 지방의 조선업은 1970년대까지 번영하였으나 이후 오일쇼크와 인건비 상승, 동아시아 지역의 조선업 성장, 세계경제 불황으로 1980년대 몰락하였고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신화는 이러한 도시의 쇠퇴속에서 계획된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30]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때 스페인이 지원한 것에 소련과 스탈린은 매우 분노했고 이탈리아와 독일처럼 스페인도 손봐야 한다고 했지만, 미국과 영국의 만류로 그냥 넘어갔다. 대신 꽤 오랫동안 경제제재를 받고 국제적 고립에 처했다. 스페인의 NATO 가입 역시 프랑코가 사망하고 스페인이 왕정복고가 된 이후인 1982년에야 이루어졌다.[31] 다만 스페인이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를 구성하는 세 지역을 점령한 시기는 각각 1564년, 1673년, 1848년이라 명분이 상당히 떨어진다.[32] 엘 파이스(El pais)의 르뽀기사다.[33] 농사를 아예 못 짓는 땅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카스티야 인근 발렌시아와 안달루시아 지역에 농장들이 워낙 발달한 상태라서 카스티야에서 농업을 해봤자 경쟁력이 없었던 것도 있다.[34] 영어식으로는 버커루[35] 라틴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제국과 포르투갈의 구 식민지 지역만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다시말해 이베리아 언어인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만을 쓰는 지역을 이르는 말. 프랑스어를 쓰는 아이티나 영어를 쓰는 가이아나, 자메이카나 네덜란드어를 쓰는 수리남은 제외된다[36] 17세기 네덜란드에 밀려 패퇴[37] 당시에는 캐롤리나 제도라 불렸다.[38] 스페인령 동인도[39] 아프리카의 요새들 이라는 뜻으로 스페인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하여 통치하던 몇몇 항구, 거점들이다.[40] 현재의 벨기에 지역[41] 현재의 서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