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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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영향
3. 미국 사회의 변화



1. 개요[편집]


Now, somehow, in some way, the sky seemed almost alien. The profound shock of realizing that it might be possible for another nation to achieve technological superiority over this great country of ours.

지금, 왠지, 어떤 면에서인지, 하늘이 아주 낯설어 보였다. 다른 나라가 위대한 우리 나라보다 기술 우위를 점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린든 B. 존슨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Sputnik crisis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다. 이 일은 미국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미국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 사건을 가리켜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한다.

미국은 소련의 과학 기술이 생각보다 앞서 있다는 충격과 소련이 본토에서 핵미사일을 쏘면 막을 수 없다는 핵전쟁의 공포를 느꼈다. 이전까지는 폭격기를 통해서만 핵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기 때문에 레이더로 감지하여 차단할 수 있었지만 소련 본토에서 미사일을 통해 여러 발의 핵폭탄이 동시에 대기권 밖에서 날아오면 당시 기술로는 이를 막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소련은 한 달 뒤인 11월 3일 스푸트니크 2호에 살아있는 개를 태워서 쏘아올려 기술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미국은 급하게 뱅가드 위성을 뱅가드 로켓에 실어서 발사했으나 대기권 진입은 커녕 두 차례 연속 폭발하면서 망신을 당했다.[1] 1958년 1월 30일 익스플로러 1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지만 불과 5kg인 익스플로러 1호를 비웃듯 소련은 2월 3일 무려 1.3톤짜리 과학탐사 위성 스푸트니크 3호를 발사했다.[2]


2. 영향[편집]


당시 소련 등 동구권 국가와 미국 등 서구권 국가는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고 있었지만 핵무기는 미국이 우위에 있었고 대형 폭격기를 이용한 항공 폭격 이외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공군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미국이 핵전력도 우위에 있었는데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그 믿음이 흔들렸다. 위성을 발사한 것이 다가 아니라 이전부터 니키타 흐루쇼프가 말해 왔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미국은 우세한 공군력으로 소련의 핵무기를 방어하고 자신들만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소련이 쏘아올리는 로켓에 스푸트니크 대신 핵폭탄을 넣는다면 지구 어디든 언제든지 핵무기를 떨어트릴 수 있게 되었고 하늘이 아닌 우주공간에서 공격하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공군이라도 절대 막을 수 없게 되었다.[3][4] 과학기술에서 열등감 수준이 아닌 국가 안보에서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즉, 미국이 우주 개발에 뛰어든 것은 표면적으로는 소련에게 기술력으로 뒤쳐질 수 없어서지만 내부적으로는 당시에는 절대 방어할 수 없었던 ICBM의 위협 때문이었다.


3. 미국 사회의 변화[편집]


  • NASA(미항공우주국)의 설립: 대통령 직속기구로 설립되어 이후 무수한 우주개발을 이끌고 아폴로 11호의 성공으로 미국의 스푸트니크 쇼크를 끝낸 장본인이다.

  • 교육과정의 변화

스푸트니크 쇼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분야는 교육이다. "우리가 왜 소련에게 과학이 뒤쳐졌는가? 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분위기가 불길처럼 번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존 듀이가 주장한 경험중심 교육을 교육과정의 기초로 하고 있었다. 경험 속에서 학습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며 창의력개성을 중시하는 진보주의 교육사상이었다.[5]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미국의 학교 교육과정이 학문중심 교육과정으로 바뀌었는데 현재 한국의 교육과정을 생각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교육과정을 바꾸기 위해 각 대학교 교육학 교수들이 모여서 회의하였는데 얼마 전까지 교육학계의 주류였던 경험주의 계열 교수들이 이 회의에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당시 사회 분위기가 심각했다.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미국 정부는 이 결과의 책임을 과학계나 국방부가 아니라 교육계로 돌렸다. 한마디로 "학교에서 애들이 원하는 것만 가르치니까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소홀하게 되었다. 소련보다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을 뜯어고쳐야겠다."는 것이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 공부하길 원해서 공부하는 내재적 목표다. 교육을 통해 국가의 과학기술 성장을 이끌겠다는 것은 교육을 도구로 사용하는 외재적 목표다. 이전 경험중심 교육과정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에 따라 학문중심 교육과정을 만들어 실시하게 되었다.

과학 중심 교육의 강화를 불러왔다. 일례로 모든 생물학 교과서에 진화론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창조설이 점점 교과서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수학교육 현대화 운동(New Mathematics Movements, 새수학 운동)이 일어났는데 미국이 소련에게 밀리게 된 계기가 과학과 수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수학을 철저하게 추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교육하는 것이 특징이다. 문제는 아동의 학습 능력을 고려하지 않아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는 점이다.

미국 교육의 이런 변화는 한국의 교육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육과정을 만들 때 빈 종이를 펼쳐 놓고 맨땅에서부터 만들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선진국의 교육과정을 보고 만들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미국의 교육과정을 많이 참고하면서 한국의 교육과정도 학문중심 교육과정이 되었다. 수학교육 현대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 3차 교육과정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교육과정이 나오기도 했다.


  • 스푸트니크 위성의 위치를 추적하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이를 반대로 적용해서 현재 위치를 알아내는 기술이 발명되었다. 그게 바로 지금도 널리 사용 중인 GPS.

충격을 받은 미국은 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진행했고 이후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 돌입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 발전 시기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끝내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킨 미국이 유인 달 착륙 경쟁의 승자가 되었다. 이후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양국은 우주 경쟁은 인류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것임을 천명하고 적대적 관계를 탈피해 미소관계동기를 부여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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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소련은 사망자가 없음에도 아쉬움을 표하는 서문이나 위로문이 아니라 조문을 보냈다고 한다.[2] 당시 이를 두고 니키타 후루쇼프는 감자를 쏘아올렸다고 비웃었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직전까지 모든 부분에서 항상 소련이 한 발 앞서나갔다. 오로지 유인 달착륙, 추가로 우주선간 도킹 정도를 제외하면 최초의 생명체 귀환, 최초의 유인 우주선, 최초의 우주 유영, 최초의 행성 무인탐사선, 최초의 달뒷면 탐사 등 모든 유니크 타이틀은 소련의 차지였다. 그 한번이 너무 압도적이라는게 흠[3] 소련은 1949년에 이미 22kt급 핵폭탄인 RDS-1의 폭발실험을 완료했고 1955년에는 수소폭탄의 개발도 완료했으며 스푸트니크 쇼크 4년 뒤인 1961년에는 지금까지도 가장 강력한 핵폭탄인 차르 봄바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기술적으로 인공위성에 핵폭탄을 탑재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니 미국인들의 근거 없는 두려움은 아니다.[4] 대륙간 탄도탄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기술이냐면 대륙간 탄도탄을 요격할 기술을 가진 건 미국과 러시아가 전부다. 심지어 그 요격이라는 것도 탄두가 로켓에 실려 있을 때나 가능한 기술이지 분리되어 탄두가 대기권 재진입과 동시에 목표물로 자유 낙하를 시작하면 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운 좋게 탄두 요격에 성공하거나 불발되어 폭발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쳐도 탄두 그 자체와 파편들이 지상에 충돌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5] 당시 미국 교육은 현재 기준에서 봐도 진보적이었다. 김형석의 증언에 따르면 6.25 전쟁 직후 한국 교육계에서 미국 선생님들을 초청해 교육 방법을 전수받았다. 교동초등학교 교장이 미국에선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어떻게 통제하냐고 질문하자 미국 선생님들은 통제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번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당선됐는데 원래 학창 시절에 말 안 듣는 애였지만 대통령이 될 만큼 훌륭하게 자랐다고 했다. 평생 서당이나 일제의 주입식 교육만 받았던 김형석은 큰 충격을 받았고 스승, 학부모 중심의 교육을 탈피하고 학생 중심의 교육인 새교육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