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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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구조 및 운용법
2.1. 구조
2.2. 운용법
3. 종류
3.1. 중구경 개인총통
3.2. 대구경 개인총통
3.3. 기병들의 총통화기
4. 발사체
4.1. 대형 관통 화살
4.2. 철환 및 소형화살 사격
4.3. 근접 파편사격
5. 무기 역사에서의 가치
6. 역사적 전투력과 묘사
6.1. 전투영상: 조선초기의 대규모 교전 묘사
6.2. 목적변경: 화승총 전래 이후의 평가
6.3. 번외편: 승자총통의 복수
7. 현대의 평가
8. 미디어
9. 여담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에서 사용한 핸드 캐논의 일종인 개인화기. 철환을 장전하여 산탄총으로서 운용했다.[1]

사진의 모델은 선조 시기에 개발한 후기형 버전이며, 최초 개발자는 김지(金墀)이다. 총통의 이름인 승자(勝字)의 경우 조선의 다른 화포 규격이 천자문의 글자 순서[2]로 분류되는 것과 달리 원래 천자문은 이길 승(勝) 자가 없기 때문에 그 유래가 공식적으로는 불명이다.

선조 초기 여진족과 대결한 니탕개의 난에서 개인화기로서 화기가 없이 원시적 무장을 한 여진족을 상대로 큰 활약을 했으나 이후에 벌어진 임진왜란에서는 산탄총의 특성상 조선의 무력한 개활지 전투 능력에 일조하게 된다.

하지만 무기 자체는 중세 핸드건의 직계로서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진압할 때 활약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총을 도입하고 철포전술 익힌 [3] 왜군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최강의 원거리 무기였다. 조총과 비교하더라도 하위호환이 아니라, 산탄총소총의 관계처럼 상호보완 관계였다.

미군도 1차대전에서 참호 소탕 작전에선 소총보단 산탄총을 선호했고, 너무 잘 써먹은 나머지 프로이센이 "어떻게 짐승 사냥하는 총으로 사람잡냐 이 야만인들아!"라고 비난했듯이, 무기는 각자 빛을 발하는 상황이 따로 있는 것 뿐이다. 승자총통과 조총을 비교하는 건 "똑같이 포 달렸잖아!"라며 전차와 자주포 갖고 서로 비교하려는 짓과 같다.

조선군 무기체계는 초장거리 화력은 일본이 거의 가지지 않은 중화기인 화포를 쓰고[4], 근거리는 승자총통으로, 중거리는 조총보다 연사력이 더 높은 활로 해결하려고 했다. 조선군 무기체계 자체가 무슨 사거리가 부족한 게 아니다. 오히려 임진왜란에 화포쇼크를 먹고 1611년에 일본 자체 제작에 들어가 1614년 오사카 성 전투에 처음 써먹는다.

조선군이 승자총통만으로 대적하려고 한 적도 없고 왜군도 조총만 들고 와서 싸우려고 한 적 없으니 1대1로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각자 여러 병과를 두어 함께 쓰는 교리가 있었다. [5][6]

임진왜란 당시 해상전투의 기본 양상은, 조선군이 200보 (240m)에서 대형 총통으로 장거리 사격을 하면서 왜군을 좀 다져놓으면서, 양측 함선이 서로 근접하면 조선군은 근거리 사격을 하다가 배를 불살라버리고, 왜군은 조총과 활로 보조하면서 승선해 백병전으로 승부를 보려는 양상이었다. 허나 이때 판옥선이 주로 3층구조였던 반면 왜군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세키부네는 2층 구조였다. 따라서 근접을 했다손 사다리로 1층 더 올라가야하는, 각자 소규모 해상 공성전의 양상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평지에서는 조총이든 승자총통이든 적이 달려와서 베어버리는 리스크가 컸으나, 공성전이라면 그럴 상황이 좀처럼 일어나지 못해, 수비측에서 총통에 5~20개씩 탄환 넣고 적을 향해 쏘기에 이만한 무기가 없었다.

또 수군은 조총의 손잡이 + 탄환 3개씩 넣어 총통의 작동 방식을 도입한 소승자총통을 사용해 적 추격 시 사용했으며 이건 니탕개의 난 이전에, 대마도가 조선에 조총을 헌상하기 전에 이미 김지라는 기술자가 개발한 물건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부대는 1593년 조총을 모방한 정철총통을 만들어 쓰기 전까지 이 소승자총통을 주력 개인화기로 삼았다. 사극에 묘사가 안 되어 그렇지 총 든 일본군에 대고 활만 쏴댄 게 아니며, 오히려 승자총통이 일부 상황에서는 조총 따위와 비교도 안 되는 구경과 보다 많은 화약 사용량에서 나오는 조총보다 강한 화력과 산탄 효과로 우위를 점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인들에게 알려진 승자총통은 조선 초기부터 사용했던 일총통, 이총통, 삼총통을 가늘고 길게 다듬어낸 형상을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다른 시대의 1인용 화포와 큰 차이는 없다. 뱀처럼 가느다란 모양으로 작대기에 꽂아서 쓴다.

애석하게 사극에서는 위험성이나 소품, 예산 등의 문제로 거의 등장한 적이 없는 비운의 무기이기도 하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등장한 적은 있다. 사극이 아닌 재현 다큐멘터리로 확장하면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행주대첩 편에서도 등장한다. 이후 사극들은 소품 문제로 등장하지 않아 조총 든 일본군에 활로 맞선 조선군이라는 어이없는 이미지를 남겼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징비록의 경우 깔끔하게 정철총통 도입 후엔 그냥 조총을 운용하는 걸로 묘사했고 변이중 화차가 등장하는 등 타 사극과는 다른 모습이 나온다.

2. 구조 및 운용법[편집]



2.1. 구조[편집]


길이는 대략 50~60cm, 무게는 3kg~5kg 정도이다. 비싼 청동합금으로 만들어서 안정성이 높았다. 포신에는 죽절이 나 있고 약실에는 심지를 넣는 부분이 있다. 장전 방식은 핸드캐논답게 심지를 이용하여 매우 원시적이었다.

뒤쪽에다 조립하는 나무 손잡이의 길이는 70~80cm 정도로서, 포체와 결합하면 길이가 110~200cm 내외에 달했다. 포 본체에 따로 소켓식 결속부가 있기 때문에 합치면 짧아진다. 덕분에, 포신이 은근히 무거운데도 불구하고 나무 손잡이를 지렛대처럼 활용하여 방향을 잡을 수 있었으며, 엄폐물 뒤에서 안정적으로 사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보러가기

조선화포에는 화살형태의 미사일 거치대라는 부차적인 목적이 있었다. 일부 개인용 총통은 균형이 잡힌 대형철퇴로서의 타격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핸드 캐논류는 위급시 폴암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승자총통을 비롯한 조선초기 화포들은 그 모양이나 설계상 급박한 상황에서 철퇴로 이용하기에도 적합한 밸런스를 갖춘 디자인이었다. 현대전에서도 급하면 헬멧, 야삽, 주먹 등을 동원해 싸우니, 화력이 제한적이었던 중세에는 근접무기의 효용도 필요했다.[7]

승자총통은 조총보다는 오오즈츠 같은 대형조총에 비교하는 편이 그 설계나 운용법을 이해하기 쉽다. 당시 조선에 이라는 개념 자체가 따로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8] 승자총통의 목적은 백병전에서 갑주를 뚫는 샷건, 폴암, 보병들에게 대형 타겟을 타격하는 능력을 주는 바주카를 조합한 무기체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조총을 경험하자 빠른 속도로 밀려난 무기이기도 하다.

2.2. 운용법[편집]



본격적인 장전 및 방포 과정은 1:15부터이다.

승자총통 방포에 대한 사료 영상이 지나치게 모자라다는 점을 한탄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9] 단, 제작자 역시 사료 부족의 한계로 일부는 추측으로 때운 부분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기존 총통류에 쓰이던 격목이 토격으로 바뀌었다는걸 제외하면 기존 총통과 발사 과정의 유사성이 많다.

3. 종류[편집]



3.1. 중구경 개인총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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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자총통.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이다. 50~60cm이다. 하지만 조선중기 이후로는 신호용이나 화차 제조용으로 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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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자총통. 58cm. 2개의 포신에 3개씩 화약실이 있었다. 매우 원시적인 6연발 화기였다. 하지만 사거리가 짧고 성능이 매우 조악했다. 주로 수레에 싣어서 화차를 만들거나, 여러 번 장전하기 어려운 지형에서 장전하지 않고 6발을 쏘는 특성을 이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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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자포, 5연자포. 10연자포도 있었다. 주로 수레, 화차, 성벽에 매달아서 쏘았다. 총신을 하나씩 뒤로 넘기거나 분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사용한 포신을 빼서 재장전했다고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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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의 전 단계인 소승자총통이다. 승자총통에 총신을 단 형태이며, 1회당 3알의 총알을 사용했다. 임란 이전에 개발되어 의외로 많은 양이 생산되어졌다. 하지만 조선군이 조총 생산라인을 빠르게 가동시키자 주력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적선과 교전을 할 때 조총 보급 전까지 근접전 용도로 사용되었다. 암튼 소승자총통이 거의 화승총과 비슷함에도 쓰지 않은 건 당시 사람들이 조총 앞에서 내린 승자총통에 대한 평가라고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중에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이라는 화승총도 사용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지시에 따라 휘하의 무관 정사준이 기존 승자총통의 단점(조총보다 짧은 총열로 인한 명중률 문제, 낮은 위력)을 보완하기 위해 노획한 일본의 종자도총을 바탕으로 정철(참쇠)로 된 총열에 조총처럼 총신과 방아쇠를 달아 제작했다.[11] 연구 및 제작기간에는 1년 정도가 소모되었고 성능실험에서 일본군의 조총보다 더 좋은 위력과 성과를 보여주게 된다. 일본군의 조총을 참고해 만들것으로 기존의 핸드캐논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의 화기가 '총통'에서 '총'으로 거듭나게 되는 시발점이다. 틀에 부어서 만드는 기존의 총통과 다르게 철판을 두드려서 만들었으며 항왜들이 제작에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염초와 철을 구하는데에 제약이 있어서 대량생산되지는 못했다. 대신 명나라에서 조총을 대거 들여오고 항왜들이 일본 본국에서 밀수로 빼오기도 해서 조총 보유 숫자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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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통이다. 75cm이다. 무려 15세기의 세종대왕 치세에 만들어진 소구경 개인 화포의 유물이다. 위의 사진을 비롯한 일부 화포들은 포신을 일부러 휘어놓아서 탄착점을 늘리는 특이한 운용법을 쓰기도 했다.

3.2. 대구경 개인총통[편집]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바주카이다. 이런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위의 동영상처럼 멀리서는 화살 모양의 미사일 발사대로 썼다. 원시적인 로켓 런처인 셈이다. 근접 상황에서는 다수의 철환으로 근접한 적의 방진을 타격하는 대형 샷건처럼 사용했다. 국궁이나 조총에 부족한 파괴력을 보완한다는 장점이 있어서 이후에도 화승총에 밀려나지 않고 근대적인 개수를 거친 후기형이 개발되었다. 수군에서 적극 사용하여 일본 수군에 큰 피해를 줬던 물건들이며 이후 사르후 전투, 정묘호란, 병자호란청나라 팔기군과의 대결에서도 썼으나 여기선 운용 미숙과 이런저런 악재로 활약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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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전총통이다. 31cm이다. 보병 제압을 위한 다수의 화살탄을 발사했다. 세전 8발, 차세전 12발을 사용했다. 화살을 이용하는데 특화한 만큼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화살이 살상력을 지닐 수 있는 거리는 대략 100m에 달했다. 하지만 갑주를 관통할 수 있는 거리는 화승총보다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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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총통이다. 길이는 58cm이다. 그야말로 개인용 화포에 속했던 종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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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총통이다. 사진은 중백자총통이다. 총길이가 98cm에 달하는, 대형총통과 개인화포의 사이에 있는 개인화기였다. 탄환은 5발씩 넣고 쏘았으므로 효율은 떨어졌으나 위력은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기부터 명나라에서 도입하여 시험과목으로도 편성했을 정도로 중요한 화력지원무기가 되었다. 편곤처럼 명나라에서 수입했지만 조선군에서 더욱 강조하면서 다양한 개조형이 나왔던 무기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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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자총통이다. 94cm이다. 별승자총통과 함께 승자총통의 대표적인 대형 버전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총통보다 크기는 작지만 비교적 정확하고 운반이 편리해서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의 지형에서는 이러한 조준의 용이함과 운반성이 중국제보다 유용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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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手砲)이다. 89cm이다. 지원용 화포와 개인용 총통이 뒤섞인 형태로서 조선 후기에도 사용했다는 형태는 대부분 이런 모습으로 변모했다.

3.3. 기병들의 총통화기[편집]


기병들이 사용하기 위한 초소형 개인총통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효율성은 그다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기병들의 총통은 조선 중기에는 이미 신기전과 함께 신호용으로나 사용되는 신세였다. 삼혈포, 쌍안총, 신제총통 같은 종류가 있다. 잘 쓰지 않아서 상태가 좋지 않은 유물만 몇 점 남아있다.

화승총 도입 이후에는 조총의 개머리판을 단축한 마상총이 등장하고 조선 기병들에게 보급되면서 대체되었다. 그렇게 궁기병이 남아있던 조선 기병도 1700년대로 들어서자 다들 총기병으로 대체되었다.

다만 이러한 기병들의 총통 기술도 보급할 만큼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부터 화약 무기를 널리 보급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정도의 유물이다. 실제로 사람들의 일부 잘못된 인식과 달리 조선왕조는 화포 및 총통 등 화기에 적극적이었다. 단지 북방에 집중되어 있었을 뿐이다.

참고로, 기병용 총통은, 세총통 같은 원시적인 권총의 개념과는 약간 다른 무기였다. 다른 개인총통처럼 막대기에 꽂아서 기병이 지렛대처럼 들고, 말 위에서 쏘는 로켓런처 혹은 화창처럼 조준하는 형태였다.

4. 발사체[편집]


승자총통 및 조선 전기의 핸드캐논의 사격법은 종류에 따라서, 크게 3가지로 특화되어 있었다.
1. 방패 파괴용 대형 화살 1개를 쏘는 바주카 방식.
2. 1~5개의 쇠구슬 혹은 소형화살 4~8개를 넣어서 소형타겟을 살상하는 화승총과 비슷한 방식.
3. 10~20발의 소형 쇠구슬을 넣어서 블런더버스처럼 근접하여 파편 충격을 주는 방식.

4.1. 대형 관통 화살[편집]


보병이 쏘는 화살 모양의 관통 미사일이다. 세전/피령전/총통전으로 발사하는 화기에 따라서 명칭과 종류가 다양했다. 개인화포에서 화살을 쏨으로서 핸드캐논의 화력(화약량)을 온전히 사거리로 돌리는 운영법인 만큼, 기록을 보면 대구경 개인총통에서 쏘는 피령전의 사거리는 최대 600보, 현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480M 이상에 달하는 종류도 있었다. 화약 에너지가 대부분 사거리로 전환되는 만큼, 비거리 자체는 동 시대의 화승총보다 길었던 경우가 많다.

대인 살상보다는 주로 방패 같은 적의 구조물을 파괴하는데 사용되었다. 대인마 살상용은 주로 철환 즉 쇠구슬을 쓰는 소승자총통 등이 쓰였다.

하지만 조준이나 반동제어가 어렵고, 화살 포탄을 제조할때의 불균형적인 공업 수준으로 인하여 에너지 효율이 심각하게 분산되는 문제가 있었다. 즉, 개인화기로서의 신뢰성은 철환 사격보다 비효율적이고, 관통 미사일의 파괴력은 대형총통에서 발사하는 대장군전의 위력에 비교해서 부족한 발사법이었다. 물론, 현대의 바주카 혹은 RPG-7처럼 보병들의 특수화기로서는 쓸만했으나, 일반 병사들의 메인 전투 화기로서는 약간 비효율적인 기능이었다.[12]

그럼에도, 보병들이 원거리에서 적의 구조물을 파괴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중기까지는 사정거리를 수백m으로 늘린 파괴용 관통 미사일처럼 사용되면서, 특수화기 개념으로 존속되었다. 그러나, 철환 사격으로도 살상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발전이 계속 이루어지자, 구조물 파괴 역할은 이전보다 강력한 대형 탄환을 1~300m 내외까지 발사하는 대형 화승총과 유사한 방식으로 결합된 후기형 소형 총통으로 발전했다.

4.2. 철환 및 소형화살 사격[편집]


쇠구슬 3~5개 혹은 소형 화살 4~8발을 발사하여 일반적인 개인화기처럼 보병과 기병 같은 소형 타겟을 살상하는 매우 일반적인 운용법이었다.

요컨대 화승총 등장 직전의 개인화기들의 주력 사격법이었다. 살상거리는 30~50m 정도였다. 또한, 조선시대의 개인화기 중에서도 포신이 1m에 달하는 대구경 개인화기들도 이런 일반적인 사격법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것들은 외국의 대형 화승총인 오오즈츠와 월건(Wall-gun)을 상회하는 위력으로 훨씬 다양한 탄종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조선군이 임진왜란에서 양산형 화승총의 효율성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대형 조총에는 평범한 반응을 보인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무기의 신뢰성과 명중률 등등 여러 분야에 있어서는, 화승총이 훨씬 유리했기에 결국 화승총으로 대체되는 사격법이었다. 그리고 위의 소형 관통 미사일을 발사하는 방법과 장점이 결합되어, 이후의 조선의 총통들은 일반적인 화승총보다 강력하고 큰 총탄을 멀리 발사하는 역할의 지원화기로서 조선후기까지 존속되었다.

4.3. 근접 파편사격[편집]


조란환 10여발 이상, 대량의 화약을 넣어서 완벽하게 근접전에 올인하는 방식이다. 화약과 탄환을 많이 넣으므로 충격력은 강력하지만, 유효 사거리가 20m 이하라서 사실상 근접한 적의 방진에 파편을 끼얹는 방법에 가깝다. 현대인들의 기준에서 생각해보면 보면 터무니 없이 사정거리가 짧지만, 이런 근접 파편사격은 갑옷을 입은 보병, 기병의 대열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로서 중세시대에 널리 쓰인 방식이었다.

다만 다수의 쇠구슬들이 비거리가 짧고 불확실했으며, 훨씬 폭장력이 약한 조총으로도 충분한 관통력이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오버파워라서 효율성은 떨어졌다. 다만, 방어전에서는 이러한 파편충격 효과가 예상보다 위력적이었다. 또한, 보병들의 방진을 혼란시키는 용도로는 조총 몇 개보다 훨씬 강력했다.[13]

5. 무기 역사에서의 가치[편집]


조총의 등장 이후의 개인화기, 즉 의 가장 큰 목적은 보병 제압이다. 승자총통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부터 사용했던 화포를 소형화해서 보병끼리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얻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승자총통은 임진왜란에서 총으로서 편의성 및 정확도를 어느정도 달성한 조총을 만났다. 덕분에, 화약무기의 설계이념이 이룬 발전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패배를 달성했다. 무기 발전의 역사에서 총의 가치를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유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승자총통은 핸드 캐논 사이에 걸친 무기의 마지막 도달점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이런 승자총통에도 장점은 있었다.
첫째, 갑주를 입은 보병들과 인마를 충격으로 무너트리는 샷건+폴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둘째, 대형 승자포들은 화살탄을 이용한 원거리 타격, 대형 샷건식 운영을 통해서 조총보다 파괴력이 뛰어났다.
셋째, 수레에 여러 대를 싣어서 화차를 만들거나, 성벽 같은 지형지물에 장착하여 수비용 무기로서 응용이 가능했다.
넷째, 나름 늘씬한 외형으로 운반이 쉽고, 유사시 균형 잡힌 철퇴로서 사용하기에 편리했다.

현대 연구가들에게서도 조총 이전의 핸드 캐논이 가진 미덕으로만 평가하면 그럭저럭 잘 다듬어진 형태라고 평가받는다. 3종류 가량의 발사법으로 각 상황에 맞춘 운용을 고려하고, 급박하게 전쟁이 터진 직후에 농성전이라도 그럭저럭 이길 수 있게 만들었던 무기라는 것이다. 즉 이라는 무기의 발전사에서 보면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당시 한정된 기술을 가진 조선군의 경험 내에서만큼은 잘 사용했다는 평가. 물론 당사자들도 전쟁 도중에 화기를 조총으로 교체하는 타당한 행동을 보였다.

물론 쉽게 평가절하하기엔 무기의 위력이 꽤 적절한 편이며 특히 수군은 조총 확보 전까지 잘 써먹었다. 사실 현대의 사제총기들도 대게 승자총통과 비슷한 원리가 많은데 이러한 사제총기들의 경우 관통력이 매우 강력한 편이다.

6. 역사적 전투력과 묘사[편집]



6.1. 전투영상: 조선초기의 대규모 교전 묘사[편집]



승자총통으로 대표되는 고려 말과 조선 전기의 개인용 총통은 화승총이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의외로 세련되고 강력한 무기체계였다. 때문에, 핸드 캐논의 전성시대였던 조선 초기에는 지금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위의 영상에서 1:20~1:40까지는 바주카포 형태처럼 사용하는 대형 화살을 쏘아서, 적의 방패를 파괴하는데 전술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1:45 부터는 연발식 총통 화차가 등장하여 장거리 지원 사격을 하면서, 적이 전력을 유지할 수 없도록 다연장 화력 투사를 하는데도 사용되는 묘사를 볼 수 있다.

참고로, 위의 만령 전투는 현실에서 조선군과 조선군 양쪽이 개인총통을 운용했던 대규모 화약 전투였다. 영상을 정독하면 카탈로그와 전술적인 운용을 알 수 있는데, 당시에는 이시애의 반란군과 세조의 진압군이 무려 수백개의 핸드 캐논[14]을 동원하여, 바주카 형태, 화차 형태 등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전술적으로 응용하였다. 바주카 형태의 사용법으로는 적의 방패를 깨부수고, 화차 형태의 사용법으로는 뚫는 것이 막막한 방어진에 대규모 원거리 포격을 하여 적이 진영 자체를 포기할 수 밖에 없도록 몰아붙이는 등등, 화력덕후 기질을 보여주는데 잘 사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6.2. 목적변경: 화승총 전래 이후의 평가[편집]



임진왜란 당시 승자총통과 조총의 장단점을 다룬 국립진주박물관의 영상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도중에 2만 정의 조총명나라에서 수입하기로 결정했고, 순식간에 전국의 주력부대에게 보급해버렸다. 조선시대의 사용자들도 보병에게 어설픈 다목적 무기를 지급하는 것보다는, 그냥 개인 병사끼리의 살상력이 높은 화승총을 지급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일본군이 위력적으로 생각했던 대형조총(오오즈츠)에 대해서는[15] 선조실록에서 수군은 이미 포가 많아서 쓸모없을 테니 육군에나 좀 더 만들어줘라고 말하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즉, 일본군이 위력적으로 생각했던 대형 화승총은 당시 승자총통의 대형버전(별승자총통)이라는 지원화기가 조선에서 많이 있었으므로 그다지 특별한 무기가 아니었다. 조선에서 화승총에게서 얻은 교훈은 편리하고 뛰어난 개인용 전투 무기를 최대한 많은 병사들에게 보급할 수 있어야 전쟁에서 이긴다는 깨달음이었다.

여담으로, 조선과는 반대로, 일본은 임진왜란 동안 조선에서 겪었던 화포 쇼크 때문에 야전 화포를 조총보다 쓸모없는 무기라고 무시했던 전국시대까지의 평가를 수정하게 된다. 그리고 161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처음으로 일본제 화포를 만들 시도를 하고 오사카 전투에 데뷔한다.[16]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개전 후의 조선에서는 불과 1년여 시점에서 조금이나마 승전을 거두는 상당수의 조선 주력부대가 화승총을 운용하는 상태였다. 심지어는 전쟁 후반에는 전선에서 활동하는 조선의 정규군 대부분이 화승총으로 무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당장 노량해전에서도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모두 조총을 운용했고 배에 사다리를 놓는 근접전으로 가면서 상호 조총을 난사하고 칼싸움을 하는 등 개싸움이 벌어졌으며 이순신도 이 때 조총 사거리에 들어와버려 결국 전사했다.[17]

참고로, 몇몇 사극과 인터넷 창작물에서 만든 잘못된 이미지 때문에 승자총통의 위력이 허약해서 버려졌다는 잘못된 군사적 교훈이 퍼져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화기의 성능=위력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인터넷과 방송에서 퍼트린 전쟁 교훈의 잘못된 해석이며 승자총통이 위력이 약해서 버려졌다는 관점의 묘사는 조선시대의 군인들이 불편한 승자총통을 배제하고 편리한 화승총을 선택한 이유를 완전히 정반대로 설명하는 오류에 가깝다. 승자총통과 같은 핸드캐논들은 오히려 화약을 많이 넣어서 폭장량을 강력하게 변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원화포와 개인화기 사이에 걸친 무기라는 애매한 활용법 때문에 화승총에 비하면 보병의 기본무장으로는 비효율적이었다.[18]

심지어 조선의 총통들은 임진왜란 이후 바주카오르간 건 방식으로 개량되어서 화승총과 함께 사르후 전투정묘호란/병자호란 사용되었으며 특별한 지원화기로서 공존했다. 심지어 프랑스 해군 등 서양 열강의 침략 당시에도 승자총통을 이어받은 조선의 핸드캐논들이 외적에게 피해를 주는 지원화기로서 활약했다. 프랑스 해군의 경우 병인양요 때 여기에 제대로 혼쭐이 났다.

기본적으로 승자총통은 개인화기로서는 사용법이 복잡하고 주로 유탄발사기처럼 쓰였지만 현대의 RPG 혹은 샷건과 같은 특수화기 역할까지 맡을 수 있는 무기였다. 이 때문에, 옆에서 장전을 해주는 보조요원들이 많이 필요했다.[19] 이 때문에, 장전을 담당했던 보조병사와 예비군을 전투병력으로 전환하는데도 화승총이 훨씬 유리했다. 즉, 개인화기로는 훨씬 명쾌한 효율성과 명중력을 지닌 화승총을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실제 전쟁에서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서는 화약무기의 전체적인 재배치가 필요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승자총통은 조선 중기 이후 일종의 소대 단위 RPG-7 혹은 국군에서 사용하는 K201 유탄발사기처럼 여전히 중요한 무기로서 살아남는다. 비록 화승총에게 제식화기라는 자리는 빼앗겼지만, 조선의 승자총통 시스템은 보병들을 위한 특수 화포라는 기능이 계속 인정받았다. 현대에도 RPG, 경기관총, 드론 같은 특수한 형태의 지원화기들이 소총수의 인구수 못지 않게 실전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승자총통 같은 특수화기를 목적을 바꾸어 계속 사용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보더라도 당연한 판단이다. 또한,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진주성 전투이치 전투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승자총통이 쓸모가 많았다. 당시 조선에 보급되어 있었던 화기의 갯수로 따져보면, 지자총통 이상급의 대형 화포만 가지고 수만 명의 왜군을 막았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활이나 투석구만 가지고 성벽으로 기어 올라오는 갑옷 입은 수만 명을 저지한다는 것도 어려운 이야기다. 즉, 조총보다 개인화기로서의 신뢰성은 별로라고는 해도 지휘관따라서는 보병들의 집단 작전에서 RPG-7 혹은 드론처럼 특수한 역할의 지원화기로서 보병 부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니나다를까 행주산성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 승자총통에 맞아 벌집이 되어 죽다 살아났고 수많은 일본군이 끔살당했으며 진주성에서도 일본군 조총부대가 승자총통에 조기에 무력화되어 승리에 기여하기도 했다.[20]

특히 수성전이나 높은 3층 판옥선과 2층 세키부네 사이 벌어지던 소형 공성전 양상을 띄던 당시 해상 난전에서는 그 역할을 십분 발휘했으며 무적죽장군 같은 화기에 비한다면 당연히 괜찮은 무기다. 실제로 이순신 함대의 주력 화기로 화포로는 천자포와 지자포, 개인화기로는 승자총통 특히 소승자총통이 있었다.

심지어 조선 후기 기록에도 승자총통은 다시 등장한다. 동조총(銅鳥銃), 동소총(銅小銃), 승자동포(勝字銅砲)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현재 남아있는 승자총통 유물 중에는 임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강칠 교수의 저서 '한국의 화포'에 실려있는 사진/실측자료를 보면 기술적인 차이를 화력의 향상으로 메꾸기 위해 총에 두른 죽절과 약실이 더 두꺼워지고, 총 자체도 약간 크고 튼튼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21] 이렇게 생긴 모양이었다.

승자총통도 시대에 비하면 뒤떨어진 무기지만 이후의 조총도 서양의 발전한 카빈이나 강선식 소총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300년 동안 신대륙을 필두로 어마어마한 식민지를 얻어 착취로 막대한 금속과 경작지에서 창출한 부와 싼 식민지 작물로 경비경감으로 식자층이 생겨난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같은 서유럽 신흥 열강들과 산업혁명 이후 독립한 미국의 경우 이미 쇠락해진 기존 서양 열강인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로부터 이러한 무기체계의 이점을 이용해 식민지를 빼앗기 시작해 이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네덜란드로부터 뺏어간 식민지들은 물론 기존에 유럽인에게 미지의 땅이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내륙지역들과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등에도 진출하여 산업혁명과 기계의 연구에 투자할 수 있게 되어 규모의 경제에서 압도하게 된다. 사실 조선도 여기에 완전 손 놓고 있던 건 아니고 효종과 숙종 대에 박연이나 하멜 등과 접촉하고 나선정벌 등이 일어남으로써 조선도 수석식 총, 즉 플린트락의 존재를 인지하고 개발 및 생산에까지 성공한다. 그러나 습기를 비롯한 환경적 문제와 비싼 가격[22] 때문에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실험품 제작까지는 성공했지만 일반 병사들에게 지급하기에는 너무 비쌌다는 것이다. 대신에 영조 때 박영준이 천보총을 개발해 보급한다.


승자총통의 장점 및 조총과의 비교와 단점에 대한 영상

개화문부터 폐화문까지의 과정 때문에 장전속도에서 조총이 밀리긴 했지만.[23] 역으로 승자총통은 지화식 화기인 탓에 타이밍 조절과 움직이는 표적을 계속 조준하는 것에 실패해서 명중률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천자총통, 현자총통 같은 대형화포에 비하면 인기가 밀리는 편이고, 다른 매체에서는 단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그나마, 수십개의 승자총통을 묶어놓은 연발식 총포류를 장착했던 화차는 최근에 간간히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제작되어 있는 소품과 인식의 문제가 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왕조 500년 같은 1980년대1990년대 사극엔 등장한 적이 있었다. 오히려 외환위기를 지나며 요즘 시대에 등장이 뜸해 어린 세대에게 잘못된 인식을 주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현대에 제조되는 사제총기들의 원리가 승자총통이나 대조총과 비슷하다. 사제총기들의 경우 정규군의 제식화기보단 당연히 위력이 떨어지지만 나름 관통력이 상당히 강한 편이라서 경찰 관계자들도 압수하고 쏴 본 뒤 놀라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연사력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한국같은 경우 경찰이 리볼버식 권총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제총기로 테러에 나서면 경찰특공대를 부르기 전까지는 경찰도 끔살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위용을 보인다. 당장 아베 신조를 암살한 사제총기도 연사력은 떨어져도 관통력이 강했다.

6.3. 번외편: 승자총통의 복수[편집]


위처럼, 화승총에 당해본 이후에는, 조선군에서도 개인화기로서 성능이 떨어진다며 조총을 순식간에 전병력에게 양산하면서 밀려난 개인화기이다. 하지만, 위력과 살상력 자체는 전혀 나쁘지 않았고, 특히 근접전에서 산탄을 발사할때의 위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백병전을 차단할 수 있는 판옥선화차에서는 잘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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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개인화기로서는 쓸모없어진 승자총통 40문을 장착하여 만들어낸 화차전투마차의 모습이다. 이렇게, 백병전을 차단할 수 있는 방호벽을 만들고 여러개를 묶어서 오르간 건으로 사용하면 사실 사용자에 따라서는 잘 써먹었던 무기라는 후일담이 있다.

물론, 이것은 일부의 사용자들의 재치가 뛰어나서 일어났던 기술 역전 현상이었을뿐, 처음부터 조총을 보급했다면 큰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무조건 좋게 생각해선 안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술력과 신뢰성은 무조건 상대보다 앞서나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조선이 조총을 순식간에 양산해버리고 모든 군대에 보급하는 엄청난 속도를 본다면, 기존의 승자총통하고 역할이 비슷해보이더라도 필요성에 맞는 각 시대의 최신 무기를 제때 보급하여 필요한 곳에 교차적으로 편제를 잘 짜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찾을 수 있다.[24]

7. 현대의 평가[편집]


현대 보병끼리의 싸움에서도 각종 중화기와 산탄총의 우선도가 기본적인 소총보다 떨어지는 이유를 승자총통과 조총의 교훈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위력 자체는 훌륭했던 무기라서 교훈을 헷갈리기도 쉬운 무기인데, 역사스페셜에서 진주대첩을 다루면서 조총에 견줄 만한 화기로 들었다. 물론 승자총통 자체는 지원화기로서 유용한 무기였기에 개인화기가 아닌 전술적인 지원 용도로는 조총을 이긴 경우가 꽤 많다. 문제는 전반적으로 개인화기라는 개념과 목적에서는 조총에게 확실히 밀렸다는 점이 쉽게 간과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승자총통류를 써서 조총을 이긴 승리는 특정한 지휘관들이 뛰어났던 것이지 기본적으로 보병들에게 편의성을 부여하는 시스템적인 부분에서는 완패라는 점에서 반드시 반성이 필요하다. 물론 현대적 잣대를 무조건 들이대기엔 당시 조선 상황에선 좀 가혹한 면이 있다. 마카오 조차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과 일찍이 조우하고 스페인포르투갈을 통해 유럽인을 자주 접해온 명나라나 역시 포르투갈 등과 일찍이 규슈를 통해 만났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서양에서 관심이 없는 나라였으며 조총을 일찍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철도 모자랐다. 그나마 이순신 등 일찍이 깨인 사고를 가진 명장들과 김충선항왜들의 노력으로 후발주자치고는 빠른 속도로 조총을 도입한 것이다.

대형 승자포들은 소형포에 맞먹는 살상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방송사와 매체들에서는 이러한 대형 승자총통들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많이 생산해둔 천자총통 모형이 값도 싸고 크기도 커서 멋을 살리기 좋기 때문이다.[25] 여기에는 외환위기 때문에 제작비가 급감해서 승자총통을 표현하기 어려워져서 그렇다는 아주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1990년대 사극만 해도 승자총통이 진주성 전투나 행주대첩, 이치 전투, 충무공 이순신의 주요 해전 등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했다. 최근 한국 경제력이 회복되어 소품 찍어내기가 편해지고 국립진주박물관의 화력조선과 같은 유튜브 영상이나 각종 조선시대 배경 전쟁극 등을 통해 승자총통이 어린 세대에게도 알려지면서 서서히 사극에 재등장하기 시작했다. 징비록에 등장한 변이중 화차가 대표적이다.

다양한 화차들이 재현되면서, 주로 수레 같은 지지대에 수십 개를 싣는 재현품을 만드는 경우가 늘어났다. 실제로 조선 초기 이후의 소형 승자포들은 신기전처럼 주력에서 밀려났으며 화차에 장착하는 무기 혹은 거점제압을 위한 일종의 바주카로서 역할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기록에는 조총 쇼크가 반드시 등장하는데 현대 사극에서는 "조선에는 총이 없어서 처음으로 총을 보고 놀랐다!" 라고 황당한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는 2000년대 이후 IMF를 겪으며 반토막난 제작비 때문에 승자총통을 묘사하기 힘들어 그랬던 것이 어린 세대에 잘못된 인식을 준 게 크다.

하지만 조선은 초기부터 발전된 핸드 캐논과 갖가지 화포들을 잔뜩 양산하여 배치한 국가였다. 즉, 임진왜란 당시의 조총 쇼크는 조선 초기부터 보급했던 유서깊은 샷건 및 바주카를 겸한 개인 화기보다 강한 화약 개인화기는 없다고 생각한 조선의 승자총통류 무기가 조총에게 쉽게 패배해서 받은 충격이라고 해석해야 정확하다.

그리고 여기에 훈련도가 부족한 삼남지방의 병사들이 전장 쇼크로 무너진게 더해진 형태이다.[26] 훈련도가 낮은 부대는 아군의 사격 소리에도 쇼크를 받아 붕괴될 수 있으며 이런 사례는 조선뿐만 아니라 후대에서 명나라유럽 등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사르후 전투에서만 해도 명나라의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들이 자신들의 총소리에 자신들이 놀라 일제히 사격하고 탄환을 축내서 결국 후금 기병에게 끔살당했다. 조선군은 1m에 가까운 크기의 대승자총통, 별승자총통, 천자총통같은 대형 화포들을 전방위적으로 보급한 상황이었다. 고작 총소리를 들었다고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들이 놀랄 리가 있겠는가.[27]

조총의 보급이 이웃들보다 한 단계 늦은 이유에는 필요성의 문제도 있었다. 조선은 몇 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조총 보급을 끝마칠 정도의 역량은 충분한 국가였다. 문제는 가까운 명나라, 일본에 비하면 조총이 필요할 정도로 격한 전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서양과의 접촉도 없어서 이것도 이것대로 운이 없었다고 볼 수 있었다. 명나라의 경우 마카오 조차 과정에서 광동성 연안에서 행패부리던 포르투갈인들과 투닥거리다 조총이나 불랑기포 등을 처음 접했고 이후 왜구 침입을 격퇴하면서 또다시 조총을 접한 후 여진족, 몽골족이나 왜구 대응을 위해 잽싸게 도입했고 일본 역시 무사가 직업이던 전국시대라서 서양 세력인 포르투갈인을 접촉하고 조총을 접하자마자 바로 도입할 수 있었으나 조선엔 모티브가 될 만한 이런 일 자체가 없었다. 벨티브레하멜네덜란드인들이 데지마로 가다 표류해 제주도에 온 것은 한참 나중에 병자호란까지 다 끝난 뒤 효종이 북벌을 준비할 시기의 일이다. 당장 조선이 받아들인 유럽식 무기는 모두 명나라를 통해 전래된 것들이었으며 19세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시대가 되었을 땐 원형 무기 제공자인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스페인도 이미 쇠락해서 스페인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에 쳐발리며 식민지를 다 뺏기고 그 스페인식 무기를 쓰던 멕시코도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미국 남서부를 통째로 내줬으며 네덜란드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여러 식민지를 뺏기던 때였다.

암튼 이런저런 악재로 조총 도입이 늦어 그렇지 막상 임진왜란 도중 1593년부터 조총이 도입되자 조선군은 조총에 쉽게 적응했으며 승자총통을 쓰던 포수들의 경우 전원 소승자총통에서 조총으로 무기가 대체되고 대구경 승자총통들만 현대의 유탄발사기나 로켓 런쳐 수준의 지원화기로 남았다. 이후 병자호란까지 끝나자 다시 궁수까지 사라져서 숙종 시기가 되면 전원 조총병만이 훈련도감과 5군영에 남고 갑주도 사라졌다. 조총에 쉽게 적응해서 보급도 빨랐고 되려 동아시아 화기류 발전은 조선이 선도했다.

8. 미디어[편집]


동영상 초반에 사전총통(4발들이 소형화살을 쏘는 소구경 총통이다. (동영상처럼) 일반적으로 화차에 수십기를 묶어서 사용했다. 사람이 직접 사용하는 버전으로는 8전총통이 있었다. 소형은 수십개씩 묶어 기관총처럼 운용했다. 2분 30초부터는 대형 승자총통으로 피령목전을 발사한다.

파일:조선왕조_승자총통.gif
수성군이 거의 개인화기 수준의 수량을 운용하면서 나름의 화망까지 만들면서 싸우는 모습도 묘사된다. 승자총통 뿐만 아니라 수성전에 대완구,화차,현자총통까지 동원하는 장면도 묘사된다. 행주 대첩이나 진주 대첩처럼 조선이 성공한 수성전의 실제 양상이 막강한 화력의 조선군이 숫자만 믿고 달려드는 왜군을 쳐바르는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외로 놀라운 고증이다.
하지만 그 이후 사극에서는 천자총통 같은 대형 화포에 밀려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극에서의 왜곡된 조총 쇼크 같은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그나마 징비록 같은 경우에선 소승자총통이나 문종화차 같은 소형 총통을 탑재한 병기들이 활약을 하는 편이다.

  • 웹툰 호랑이형님에서 '16년 중~하반기 연재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착호갑사들이 승자총통을 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피령목전이나 소형 화살이 아닌 철환을 사격한다. 인간보다 몇배는 강한 수인(獸人)에게도 상당한 데미지를 입히는 모습이 인상적. 다만 발사시 반동으로 밀려나거나 하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다.
-반박: 호랑이 형님에 묘사된 소형총통은 약실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였고, 총신이 짧은 형태로 미루어 볼때, 조선중기에 김지에 의해 개발된 소형 화기인 승자총통 보다는 여말 선초의 소형총통류(현재 유물로 남은 경희고소총통慶熙古小銃筒)에 가깝게 묘사되었다.
파일:오연자총.jpg

  •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에서 승자총통의 변종인 오연자총이 등장. 수레 위에 거치한 형태로 나왔다. 일제사격으로 몰려오는 좀비들을 한번에 쓸어버리는 막강한 위용을 보여주지만 좀비들이 너무 많은 나머지 돌진해온 좀비들에게 포대가 부딪혀 무너지며 등장 끝. 영상 매체에서 매우 출연이 드문 총통류 화기, 그것도 아예 출연한 전적도 없는 오연자총이라는 형태로 등장해 활약한 것이 매우 뜻깊다.국립진주박물관과 건들건들의 오연자포 고증 탐구 영상

  • 웹툰 은탄에서는 홍Kill동의 주무기로 사용한다. 그냥 총통이 아니라 더블배럴 승자총통인 쌍자총통[28]이라서 양쪽으로 발사가 가능하다.




9.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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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년에 사망한 연안 김씨 여성의 묘에 3문이 부장품으로 묻혀있는게 발견됐다. 하나는 장전된 상태였고 보존상태는 모두 좋다. 물론 옷이나 자기, 베개 같은 평범한 부장품도 같이 있었다.여기서 해당 묘에서 발굴된 승자총통과 복식에 대해서 볼 수 있다.

문제는 묘역이 형성된 시기가 김지가 승자총통을 제작한 시점과 비슷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막 실전배치되기 시작한, 민간인이라면 구하기도 힘들었을 최신무기를 부장품으로 묻은 셈이다. 대체 어떻게 구해서 왜 묻었는지는 미스터리. 게다가 화약 대신 숯가루가 장전돼있었다고 한다. 국립진주박물관 화력조선 책자에서는 요괴를 쫒기 위한 벽사용으로 묻은 걸로 추정했다.


10. 관련 문서[편집]


  • 한국의 무기
  • 핸드 캐논
  • 조총
  • 샷건[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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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경우에 따라 피령목전(皮翎木箭; 대형 화살)을 장전하여 방벽 깨는 용도로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2] 천-지-현-황…으로 나뉜다.[3] 널리 퍼진 낭설로, 삼단 철포술 같은 게 개발 되었다는 건 당대의 기록에 나온 적도 없고 그냥 메이지 유신 이후 썰이 교범에 나온 거다.[4]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서로 누가 일본을 차지하냐 경쟁하느라, 외국에서 조총을 많이 수입했지만 화포는 별 관심이 없었다. 조총 맛을 안 일본 왜구들은 왕직이라는 희대의 중국 해적 두목 휘하에 들어가 가정왜구라는 왜구 전성기를 열게 된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5] 같은 전차끼리도 1대1로 비교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독소 전쟁 당시 소련은 일부러 고장나기까지 수십시간 밖에 안 걸리는 품질로 T-34를 찍어내서 소모품으로 써버리면서 독일의 기갑 웨이브를 압도하는 물량으로 좌절시킨 적도 있듯이, 무기의 1대1 비교는 거시적으로 봐야한다.[6] 승자총통과 조총을 1대1로 비교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15만 대군으로 침공해왔고 조선군은 5만, 거기다가 상당수가 최전방으로 여긴 북방 여진족을 상대하고 있었고 삼남지역은 후방 중의 후방이라 이순신 제독의 전라좌수영 빼고는 군기가 심히 빠진 상태였다.[7] 다만, 총에 가까운 후기형 승자총통들은 내구성이 약해서 철퇴로 쓰면 금방 구부러졌다. 또한 승자총통을 비롯한 여말선초의 총통들은 값비싼 청동합금(당연히 철보다 비싸다)을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철퇴로서의 용법을 주로 사용하기보단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으로 쓰는 정도로 추측한다. 아예 대놓고 철퇴로서의 용도를 겸하게 만든 것은 임란 때 중국에서 들어온 핸드 캐논인 쾌창. 이 쾌창은 아예 재질부터 청동합금이 아니라 쇠로 만들어졌으며, 사용법도 중근거리에서 장전해 놓은 산탄을 한 방 쏜 뒤 돌격해서 근접병기로 쓰는 것이다.[8] 애초 그 銃이라는 단어가 총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화기를 다 싸잡아 총통으로 일컫고 구경 별로 천자/지자/황자/승자 등으로 나눠 개인화기와 공용화기를 구분했다.[9] 실제 승자총통의 다큐멘터리는 유튜브에서도 셋이나 찾아볼 수 있으나 정작 실제 운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방포 실험한 영상은 없고 끽해야 화력실험이 고작이었다는 점에서 한탄할 만한 점이긴 하다.[10] 비슷한 무기로 서양의 오르간 건개인 화기용으로 개발된 덕 풋 피스톨이 있다.[11] 임진장초, 1593년 8월 장계[12] 중세의 기술력으로는 화살 형태의 포탄이 쇠구슬보다는 훨씬 뛰어난 성능이 발휘되었음에도 잘 사용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경제적인 비효율성과 낮은 공업기술 때문에 오차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화살 형태의 포탄은 화포에서 쏠 수 있는 특수한 화살이라서 쇠구슬과 달리 대량생산이 어렵고 일일이 구경에 맞추어서 잘 깎아야 했다. 그런데, 핸드캐논은 고정된 타겟이 아니면 잘 맞지 않는 무기였으므로 결국 살상용으로는 근접해서 발사해야 했으며, 경제적으로 훨씬 저렴하고 위력이 일정한 쇠구슬에 비해서 근접전에서는 차이가 별로 없었다. 때문에, 화살 형태의 포탄은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되었다. 그나마, 조선은 산악지형이 많아서 비거리가 뛰어난 포탄의 수요가 높았고, 워낙에 저격을 사랑한 국가였으므로 화살 포탄을 일일이 깎아서 만들만큼 평화시대의 여유가 있어서 이런 사용법이 오랫동안 유지된 케이스였다.[13] 유럽군대도 방어전에서 종종 사용한 방식이다. 강선총이 대세가 된 남북전쟁 시기까지 활강식 머스킷에 작은 탄환 여러개를 넣어서 충격력을 극대화 했다.[14] 영상에서 언급한 기록상으로만 양쪽이 최소한 1,000개는 될법한 개인화기를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덤으로 반란군 진압이 끝나고 북방에 재보급해준 구조물 파괴용 대형화살(차중전=세전=피령전)들은 대략 5,000발인데, 시대상을 감안했을때는 몇천명 정도의 전투 규모에 비해서 양측의 조선군들이 사용했던 개인화기의 비율 및 전술적인 사용법이 굉장히 체계적이다.[15] 화포를 도입하지 않은 일본은 이 대조총을 화포 대용으로 사용했다.[16] 임진왜란 당시까지 일본의 화포는 소수의 포르투갈 컬버린등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 인신매매가 유행했는데, 다이묘(주로 간사이 지역 영주들이었다)들은, 히데요시가 세수확보에 악영향을 준다고 여겨 일본인 매매 금지령을 내려 대신 조선인을 잡아 팔기 전 까진 총 50만명의 일본인들을 서구 노예상에게 팔아치웠다고 한다. 당시 일본 여자 10명 = 화약통 1개로 교환되었다.[17] 이순신 함대는 조총의 사거리를 알고 있는 관계로 훨씬 화력이 우월하고 사거리가 긴 화포로 조총을 무력화시켜온 경향이 있어서 절대 조총 유효사거리 내에 들지 않고 조총을 쏘려고 폼 잡는 일본군 머리 위로 화포를 날려 끔살시켰다. 녹도만호 정운은 육지로 적을 추격하려다 대조총에 맞아 전사했으며 칠천량 해전에서는 원균의 실책으로 기습을 당해 배 위에 일본군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와 백병전이 벌어져 거북선도 3척이나 격침당하고 참패한 것이었다. 이 때 이억기, 배현립 등 주요 장수들도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18] 대표적으로 승자총통은 원거리 파괴목적의 화살포탄을 장전해야 해서 총신이 짧았다. 이 구조는 원거리에서 적의 구조물을 파괴하는 로켓 방식의 관통화살을 쏘는 지원화기로서는 쓸모있는 기능이었지만 개인화기로서는 철환 사격의 탄도를 안정화시킬 수가 없어서 적 병사에 대한 대인사격의 명중력을 낮게 만들었다.[19] 나중에 만든 소승자총통은 소형화해서 한 사람이 부무장으로 쓸 순 있었다.[20] 김시민 장군은 성 내외를 둘러보던 중 시체더미 속에서 죽은 척 하고 숨어있던 일본 조총병의 저격에 의해 전투 4일째에 순국하였다. 대중매체의 묘사처럼 전투가 한참일 때가 아니었다.[21] 임란 이후의 재래식 소형화기들은 일본 대조총의 영향을 받아 조총이나 서양 핸드캐논과 유사한 개머리판을 장착하여 일반적인 보병의 화력 지원용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한말 신미양요 당시 미합중국 해군의 기록에도 조선군이 징겔(아시아의 핸드캐논류를 서양에서 부르던 이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22] 플린트락은 부싯돌이 필요하고 기계 장치가 더 복잡한데 반해 성능은 매치락과 큰 차이는 없다. 게다가 기계 장치는 어찌어찌 한다 해도 한국에 흔한 화강암같은 짱돌들은 부싯돌로 쓰기 적합하지 않고 황철석이나 마노 정도가 서양의 플린트와 대등한 성능을 내는데 문제는 이것들이 조선에서는 거의 준 보석이었고 심지어 부싯돌은 20회 정도 쏘고 갈아야 하는 소모품이다 보니...[23] 단 영상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구식 화약병기의 장전 과정은 큰 차이가 없고 속도는 개인 기량의 의존도가 큰 탓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24] 임진왜란 시기 선조가 조총 보급에 열정적이었다는 독자연구가 자주 이루어지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며, 임진왜란 초기까지의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아는 것과 무관하게 자체적인 조총 보급의 능력은 없었다. 조총은 당장 전투가 시급했던 일본에서 최고의 인력을 집중시켜 복제를 시도했음에도 대량생산까지 3년 가까이 걸렸고, 조선 역시 본격적인 조총 자체생산은 이순신의 정철총통 생산이 시작된 정유재란 직전 시점부터였다. 전쟁 이전의 조선은 조총을 복제할 능력도 이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조총을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는 무역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수의 무능, 조정의 경직성 등으로 인해 조선이 조총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독자연구성 주장은 나무위키는 물론 2020년대 이후 역사적 탐구가 활성화된 다수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주장이지만, 이는 사학계와 사학자를 막론하고 이미 2010년대 이전에 논박된 궤변에 가까운 주장이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은 조정의 경직성 따위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당장 백성들이 죽겠다고 부르짖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대일 전쟁 준비에 필사적이었고, 신립이나 이일 등 당대의 무장들 역시 결코 전쟁 위험성이나 무기의 도입에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조선이 준비 없이 뻗대고 나간 것은 병자호란이지 임진왜란 때가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거의 국가총력전에 가까운 수준으로 전쟁을 준비했으며, 그 결과 국력, 기술력, 군사들의 질과 양, 군비의 규모 등에서 당시 오스만 튀르크를 넘어서고 군사 규모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가던 초강대국 아즈치모모야마 히데요시 정권을 상대로 버티어 냈다.[25] 정작 천자총통급의 대형 포들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자주 안 사용했다. 여러모로 승자총통의 대형버전 혹은 대형총통 중에서 가장 구경이 작은 현현대로 따지면 경기관총과 RPG-7 수준의 지원화기에 해당하는 화약무기들이 주력이었다. 일본에서도 오오즈츠라는 화력지원형 대형조총만들어 화포대용으로 사용했다. [26] 당장 삼남지방의 경우 밥 먹고 훈련만 하는 용병인 경군과 달리 수자리 센다며 농민을 징집한 징집병이라 훈련도도 사기도 낮았다. 반란을 우려해 지방 속오군은 막 대하고는 했다.[27] 물론 1, 2년만에 전군 보급이 완료될 무기였는데 일본이나 중국처럼 조금만 빨리 받아들이지하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으나 앞서 언급했듯 마카오나가사키 등에서 일찍이 포르투갈과 접촉한 명, 일본과 달리 조선은 운이 없었다.[28] 심지어 이건 도화선 구멍이 여러 개라서 시간차 6연발 발사가 되는 더욱 미친 물건.[29] 샷건이 효율적인 대인 저지력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라이플보다 천대받는지, 승자총통과 조총의 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전장에서 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무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