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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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 후기의 왕족. 이름은 왕온(王溫). 봉지인 승화(承化)는 현재의 전주시이다. 즉 전주의 후작.
2. 생애[편집]
정간왕 왕기의 7대손이며 대령후 왕경의 외증손자이기도 하다. 강종의 제2비 정강원덕태후의 아버지 신안후 왕성의 증손자이다. 동생으로는 영녕공 왕준과 사공(司空) 왕정[2] 이 있다.
1270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해 여몽전쟁을 끝내고 개경으로 환도하고자 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던 삼별초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자신을 추대한 배중손과 노영희를 따라 전라도 진도로 이동하여 항전하였다. 이듬해인 1271년, 고려와 원나라[3] 연합군이 진도 공격에 나서서 삼별초가 패배하면서 홍다구에게 살해당했다.
囑煕,雍曰,若事捷,當救兄死
(왕준이) 왕희와 왕옹[4]
을 불러서 말하였다. '만약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마땅히 형의 죽음을 구하여야 한다.'
<<고려사절요>> 권19
당시 국왕이던 원종은 물론 동생 영녕공 왕준까지 그를 구하려 했는데, 특히 영녕공 왕준은 진도 공격에 종군한 두 아들 왕희(王熙)와 왕옹(王雍)에게 싸움에서 이기면 자신의 형을 죽음에서 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영녕공 왕준에게 적개심을 품고있던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의 군대가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승화후 왕온은 아들 왕환(王桓)과 함께 침계리 인근에서 살해당했다.
진도군 의신면에는 '전(傳) 승화후 묘'가 있는데, 전(傳)이란 알려져 있다는 뜻으로 승화후 왕온의 묘라는 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승화후 왕온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구전에 의하면 승화후가 사망한 후 진도군민들이 그 자리에서 시신을 수습해 묻었다고 한다. 이후 이 지역은 삼별초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진설리(陳設里)라 불렸으며, 진도읍에서 의신면 운림산방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왕무덤재(王墳峙)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5]
전(傳) 승화후 왕온의 묘 20m 아래에 묘가 하나 더 있는데, 승화후 왕온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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