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 사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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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ima_Sakon.jpg
島左近
島清興, 島勝猛 등
1540년 6월 9일 ~ 1600년 10월 21일, 음력 9월 15일.[1]
1. 개요
1.1. 츠츠이가의 가신
1.3.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활약과 사망
2.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일본 전국시대 무장.

통칭 시마 사콘. 그러나 사콘은 통명이고 실제 이름은 카츠타케(勝猛)가 아니면 키요오키(清興)라고 추정되며 공식문서상에 남아있는 이름은 키요오키이다. 이름 만큼이나 생애도 매우 불분명해서 1540년 근방에 태어났다고만 전해지며[2], 세키가하라에서 전사하였는지도 확실치 않다.

참고로 막내딸 타마는 검호로 이름높았던 야규 무네요시의 장손인 야규 토시토시(柳生利厳, 토시요시라고도 읽음)의 후처였으며, 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나온 셋째 아들이 야규 토시카네(柳生厳包)로,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 이복형을 제치고 야규신카게류를 계승했다.


1.1. 츠츠이가의 가신[편집]


최초 하타케야마[畠山] 가문을 섬기다가 하타케야마 가문이 1562년미요시 나가요시에게 패하고서 츠츠이 가문을 섬기게 된다. 그 후에 갓난아기였던 츠츠이 준케이를 보좌하여 야마토국 통일이라는 업적을 이루는데 이때 뛰어나게 활약한 츠츠이家의 양대 축인 시마 키요오키와 마츠쿠라 시게노부를 각각 시마 사콘[左近]과 마츠쿠라 우콘[右近]이라 부르던 것이 그 남자의 유명한 '사콘'이라는 이름의 유래다.[3]

반생을 낭인으로 떠돌아다녀서 미카타가하라의 전투에서는 다케다군에 소속되어 도망치는 이에야스를 쫓았다는 일화가 전해지며[4], 야마자키의 전투에서는 츠츠이家의 대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중을 방문하기도 했다.


1.2. 이시다 미츠나리의 밑으로[편집]


나이 40이 넘어서 역사의 주무대에 비로소 서게 된다. 그 무렵 사콘은 선대 츠츠이 쥰케이가 죽은 후 뒤를 이은 그 사람의 조카인 츠츠이 사다츠구와 의견이 맞지 않아 출번하여 유곽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매일같이 각지의 영주들이 명사인 사콘을 초빙하려고 찾아오곤 했다. [5]

이 무렵 시마 사콘이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관한 과정은 약간 불투명해서 일반적으로 자신의 봉록 4만석 중에 반절에 해당하는 2만 석을 제안했고 끈질기게 들러붙은 끝에 그 열의에 져서 사콘이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관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시다가 사와야마 14만 석의 봉록을 받게 된 다음에 2만석을 제안했다는 설도 있기 때문에 불확실하긴 하다. 참고로 석고가 1만석이면 다이묘급[6]이므로 대단한 고액연봉에 해당한다. 뛰어난 장수의 당시 평균이 되는 몸값은 5천 석에서 1만5천 석 정도이며 2만 석이라는 것은 상당히 파격한 제안이다. 아니 1만 석 전후는 거대한 각 가문의 레전드급의 무사들이나 조상 대대로 주군을 모시며 영지를 키워 나아간 후다이 가신들이나 받을 수 있는 녹봉이다.[7] 검객으로 최대한 출세했다는 야규 무네노리가 1만 석을 겨우 넘고 가장 유명한 닌자라는 핫토리 한조가 그 활약에도 수천 석의 하다모토였으며 해적들 중 최고 명문이라는 무라카미家의 가장 유명한 방계 구루시마가 2만 석이니 일개 낭인 무사를 단번에 다이묘급으로 만들어 줬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조금은 감이 올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일화는 와타나베 칸베에[8]의 것을 시마 사콘의 것으로 바꿔서 전했다는 설도 있다.

매우 여유만만한 성격인 모양으로 계략을 꾸밀 때도 대담하기 이를 데 없어서 스스로 낭인 행색을 하고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미츠나리의 보좌로서 조선에 건너오기도 하였으며, 히데요시 사망 후 이에야스가 집권하자 미츠나리에게 이에야스 암살을 진언하였으나 대의명분을 중시한 미츠나리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에야스 암살 계획을 나츠카 마사이에와 독단으로 실행하고자 하였으나 이에야스가 눈치 채고 해당 지역을 황급히 벗어나는 바람에 실패했다.


1.3.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활약과 사망[편집]


결국 사태는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나이가 60 전후인데도 선봉에 서서 맹렬히 싸웠는데[9] 이때 선봉에서 시마 사콘의 군대와 맞서 싸운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사들은 전투가 끝나고 수 년이 지나서도 꿈속에서 사콘이 외쳤던 '쳐라!(かかれ!)'는 호령을 듣고 공포에 질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치열한 전투 중 총에 맞아 큰 상처를 입고 후방으로 일단 후퇴했다.(이때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 정오가 지나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서군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사콘은 죽음을 각오하고 재출진해 타나카 요시마사구로다 나가마사의 부대를 맞아 분전하다가 다시 총격받고 전사했다고 한다.

문제는 전투 후 오타니 요시츠구의 수급과 마찬가지로 사콘의 유체도 발견되지 않았고 전후에 사콘을 교토에서 목격했다는 이야기도 이어졌다.[10]

유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사콘의 최후를 두고 여러 설이 나왔고 싸움에서 살아남아 성명과 모습을 바꾸고 숨어서 살았다는 설도 있다. 사콘의 나이로 치면 딱 맞는 정도의 노인이 미츠나리의 묘에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불확실하긴 하다. 이 설에 따르면, 사콘은 교토로 숨어들어 절의 승려로서 살다가 1632년에 죽었다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만 해도 혼노지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나오는등 애초에 전국시대 기록 자체가 이 기록, 저 기록에 나와 정리한 것에 가깝기에 교차검증이 안되는 기록들이 상당히 많다.

2. 대중매체에서[편집]


창작물에 등장할 때에는 공식 문서에 남아 있는 '키요오키'라는 이름보다는 '카츠타케'라는 이름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쓰이는 편인데, 이름 글자가 좀더 무사다운 느낌을 줘서 그런 듯하다.('이길 승'에 '사나울 맹') 아예 이름을 생략하고 사콘이라고만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시마 사콘의 이미지를 현대에 형성한 것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아래 대중매체 캐릭터 들은 역사 인물 시바 키요오키 보다는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 등장하는 인물 시마 사콘으로 형성된 대중적 이미지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세한 것은 시마 사콘/기타 창작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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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생몰년은 모두 정확하지 않다.[2] 신빙성은 낮으나, '와슈 제장군전(和州諸将軍伝)'이라는 책에는 텐분 9년 5월 5일생(양력으로 1540년 6월 9일)으로 되어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도 이 설을 채택.[3] 뜻풀이를 하자면 左(왼쪽)近(가깝다)와 右(오른쪽)近(가깝다)라는 뜻으로, 좌우에서 가깝게 보필하는 사람이라는 뜻. 벼슬을 사칭했다는 말도 있는데 당시에는 꽤나 비일비재한 일이었다.[4] 다만 학계에서는 이 설을 실제로 일어났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간주한다.[5] 워낙 기록이 별로 없어서 일개 낭인을 저렇게 초빙하려하는지 의문일 수 있는데, 여러 가문을 섬겼지만 번번히 그 가문이 망해버려서 여기저기 떠돌았을 수 있는데 그가 참전했던 전투 때마다 아군이던 적군이던 그의 실력이 상당히 입소문이 났을 수도 있다. 그렇다보니 실력 좋은 무사가 없어서 아쉬웠던 전국시대 때는 이런 인물은 당연히 스카웃 대상이다. 다만 역사의 표면에 드러날만큼의 직책이나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명성에 불구하고 기록이 별로 없을 수 있다. 그리고 미츠나리의 밑으로 오면서 그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남게된 것.[6] 석고가 1만석이라고 해도 영지를 쇼군에게 받아야 한다. 쇼군이 하사한 영지를 가졌어도 1만석 이하면 다이묘가 이니다.[7] 알고 보면, 일본 전국시대史를 보면, 실제로 레전드급이 아니라도 1만 석 이외의 가신들이 의외로 많기는 하다. 허나 이것은 대부분 조상대대로 주군을 모셔 왔던 예로서 몇 대를 이어가며 영지를 계속 늘려 나아간 때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혼다 타다카츠는 혼다 가문 15만 석이지만, 따지자면 혼다 타다카츠가 10만 석, 그 아들인 타다모토가 5만 석.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혼다 타다카츠의 할아버지인 혼다 타다토요와 아버지인 타다타카의 도쿠가와를 향한 충성과 죽음도 혼다 가문 15만 석을 만드는 데 공헌했다고 봐야 하리라.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지 가진 건 자기 몸뿐인 인물이 가문에 들어와서 1만석 이상 녹봉을 받는 가신이 된 예는 몇 없다. 다만 평민+닌자+쇼군 부하 출신 등이 대다이묘로 출세한 오다 가문만은 예외, 뭐 이런 혁신성을 띤 인재 운용을 오다 가문의 성공 비결로 뽑고는 하니까....[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만 석을 제안한 호걸이었으나 당시 5백 석에 불과했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관했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히데요시가 묻자 칸베에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장래 100만 석이 되면 자신에게 10만 석을 줄 것을 약속했는데 미츠나리의 큰 그릇을 보고 감동했기에 미츠나리에게 사관했다고 말했고 거기에 감동한 히데요시는 칸베에의 봉록을 늘려 주려고 했으나 칸베에는 미츠나리가 100만 석이 될 때까지 자기는 500석만 받겠다고 하여 히데요시가 매우 감동했다. 일본 전국시대의 미담으로서 이름 높은 이 일화는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패배해서 와타나베 칸베에도 자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참고로 그때도 100만 석을 받는 다이묘는 마에다 토시이에 정도였고 다이묘 대부분은 고작 수만 석에서 십수만 석 정도에 불과했다.[9] 이 당시 60이면 상당한 고령이다. 하지만 미츠나리의 가신으로 고액의 녹봉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건강했을 수도 있다.[10] 보통 전투후에는 인근 마을 주민들이 돈이될만한 갑옷과 무기들을 수집하러오는데, 만약 시마 사콘이 전사를 했다면 갑옷이 벗겨져서 신원 확인을 못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