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케인
덤프버전 : (♥ 2)
분류
1. 개요[편집]
"There's only one person who's going to decide what I'm going to do and that's me."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바로 '나'다."
오슨 웰스의 1941년 영화.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2] 으로 평가 받으며, 1940년 당시 25세였던 오슨 웰스는 이 작품의 제작, 연출, 주연을 혼자 도맡았다.[3]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영화는 웰스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것이며 전설적인 영화 음악가 버나드 허먼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하다.
2. 예고편[편집]
3. 줄거리[편집]
1941년 뉴욕에서 인콰이어러지를 비롯, 수많은 신문들의 발행인이었던 찰스 포스터 케인(Charles Foster Kane: 오슨 웰스 분)이 죽었다. 그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으나 사망 직전에는 플로리다의 대저택 제나두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케인은 생전에 많은 정치인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고, 미국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여러 얘기들에 대해 케인은 "나는 현재 미국인이고 과거에도 미국인이었으며 앞으로도 항상 미국인일 것이다. (I am, have been, and will be only one thing - an American.)"라고 말로 일축하곤 했다. 잡지 편집장인 록스턴은 케인의 죽음 내면의 것을 취재하고자 기자인 제리 톰슨(Jerry Thompson: 윌리엄 올런드 분)에게 케인이 죽기 전에 말했다는 '로즈버드'가 무슨 뜻인지 알아오라고 한다. 톰슨은 케인의 주변 인물을 샅샅이 취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한다.
찰스 포스터 케인은 1862년, 콜로라도 주 리틀세일럼에서 태어났다. 케인의 집에 있던 하숙생이 준 쓸모없는 광산에서 노다지가 쏟아져, 케인 가족은 벼락부자가 된다. 케인의 어머니 메리(애그니스 무어헤드 분)는 콜로라도 깡촌에서 키우지 않고 더 좋은 기회를 주고 싶었는지, 동부에 거주하는 재력가 월터 파크스 대처(조지 컬러리스 분)에게 어린 케인과 광산 운영권 및 수익을 맡긴다. 대처는 그 수익금으로 케인에게 상류층 삶을 누리게 해주고, 케인이 성장하면 케인에게 광산 소유권과 수익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 때 케인은 가기 싫어서 저항을 하지만 끌려간다. 동부의 재력가 밑에서 성장한 케인(버디 스완 분)은 25살이 되었을 때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뉴욕 인콰이어러지를 인수한다. 처음 신문 발행 날 노동자의 입장에서 일해나가겠다는 케인의 야심찬 선언이 실리고, 폭로 기사들로 인콰이어러지는 발행부수가 급격히 늘어난다.
1900년, 케인은 대통령의 질녀인 에밀리 노턴(Emily Norton: 루스 워릭 분)과 결혼하고 아들 찰스 주니어가 태어난다. 그러나 케인은 미모의 여가수 수전 알렉산더(Susan Alexander: 도러시 코밍고어 분)와 사랑에 빠진다. 선거에 나선 케인은 부정한 애정 행각(스캔들)이 발각돼 낙선한다. 그 후 케인은 아내 에밀리와 이혼하고, 1918년에는 에밀리와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케인은 수전과 결혼하고 수전을 가수로 데뷔시키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케인은 수전에게 계속 노래를 부르라고 종용하지만 수전의 자살 소동으로 그만 둔다. 1929년에는 케인의 신문사 중 가장 중요한 신문사가 문을 닫는다.
1932년, 집사가 수전마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에 케인은 극도로 난폭해져서 물건을 때려부수다가 눈 내리는 집 유리공 장식물에 손이 닿자,[4] "로즈버드..."라고 읊조리고는 장식물을 챙긴 후 걱정돼서 찾아온 고용인들을 무시하고 저택을 나선다. 해당 장면 더 이상 누구도 케인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 케인은 결국 홀로 숨을 거둔다.
Newswoman: If you could've found out what "Rosebud" meant, I bet that would've explained everything.
Jerry Thompson: No, I don't think so. No. He was a man who got everything he wanted and then lost it. Maybe "Rosebud" was something he couldn't get, or something he lost. Anyway it wouldn't have explained anything. I don't think any word can explain a man's life. No. I guess "Rosebud" is just a piece in a jigsaw puzzle. A missing piece.
여기자 : "로즈버드"가 무슨 뜻인지 알아냈다면 모든 게 밝혀졌을 거에요.
제리 톰슨 : 아뇨, 아닐 겁니다. 절대로. 원하는 걸 다 얻고도 잃어버린 사람 아닙니까. "로즈버드"는 그가 얻을 수 없었거나, 잃어버린 것일 겁니다. 별 의미도 없을 거에요. 누군가의 일생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5]
"로즈버드"는 퍼즐 한 조각일 겁니다. 빠진 조각이요.
이상의 기사 작성 과정에서 톰슨은 끝까지 로즈버드가 무슨 뜻인지 알아내지 못하고 단지 같은 인간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케인 때문에 슬픔만을 느꼈을 뿐이다. 톰슨은 케인의 진실을 밝히지 못해 위와 같이 한탄하면서도, 열차 놓치겠다면서 케인의 값진 유산들을 남기고 일행과 함께 자리를 뜬다.
화면은 앞서 케인의 값진 유산들과 비슷하게 쌓여 있지만 가치가 없어서 버려지는 잡동사니들로 바뀌고,[6] 이 잡동사니들은 관리자의 명령하에 소각된다.[7] 한 일꾼이 앞장서서 썰매를 집어들어[8] 소각로에 버리는데, 그 순간 먼지가 불에 타면서 지워지자 케인의 유언과도 같았던 로즈버드 (Rosebud)가 드러난다. 위의 대화 장면 및 엔딩
부와 명예를 다 가졌던 케인이 가장 그리워하고도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것은 바로 정말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었던 것이다. 혹은 케인이 처음에는 재력가에게 끌려가길 거부했던 점, 이후 돈맛을 보고서 서서히 타락해가다가 모든 걸 잃고 홀로 사망하는 점을 고려하면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4. 제작 비화[편집]
오슨 웰스가 촬영 전에 전설적인 서부 영화 감독인 존 포드의 〈역마차〉를 약 40번 넘게 보며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독 오슨 웰스는 케인 역의 젊은 시절부터 70대 노년의 모습까지 연기를 모두 맡았는데, 자연스러운 모습을 위해 분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당시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모리스 시더먼은 웰스의 얼굴 전체를 본 따서 연구했다고. 얼굴 본을 뜬 동안에 소설 〈악의 제국〉을 다른 스태프에게 읽게 시켜 웰스에게 들려줬다고 한다.[9]한 달 동안 매일 저녁을 먹은 후, 극장을 찾아가 〈역마차〉를 보았다.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왜 이렇게 만들었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내게 영화학교에 가는 일과 같았다.
ㅡ 오슨 웰스 출처
젊은 시절의 경우, 오슨 웰스가 25살이었을 때에 찍은 영화이긴 하지만 한층 풋풋하고 어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볼살 부분을 뒤로 잡아당겼다고 한다. 수잔나와의 애정행각이 발각되고 라이벌지 기자에게 계단에서 난간을 붙잡고 소리치는 장면에서 웰스는 3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발목에 금이 가고 2주간 휠체어에서 앉아 연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거유세 장면에서는 다리에 철심을 대고 서있는 연기를 한 것이 언듯 보인다. 노년의 경우에는 콘택트 렌즈를 이용해 흐릿한 빛의 눈을 만드는 등 섬세하게 표현했다. 웰스는 이 때문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아 후반에 수잔나가 떠나자 상처입고 분노하여 거칠게 방을 부수는 장면에서 손목을 다치기도 했다고 한다.
웰스는 다른 장면을 찍을 때는 케인의 첫 부인 에밀리 역을 맡은 루스 워릭에게 이것 저것 디테일한 주문을 많이 했지만, 영화학도들이 한번쯤 공부하고 넘어가는 그 유명한 아침식사 장면에서는 별 주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웰스의 말에 따르면, 이 장면에서는 세월이 흐르면서 에밀리와 달리 괴물로 변해가는 케인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워릭이 연기한 에밀리의 초반 느낌 그대로 가주길 바랐기 때문에 이 씬을 찍을 때는 크게 지시하지 않았다고 한다.[10]
에밀리 역을 맡은 루스 워릭의 말에 따르면 오슨 웰스는 워릭에게는 젠틀하게 대했지만, 수전 역을 맡은 도러시 커밍고어에게만은 배우들과 스탭진 앞에서 공공연히 모욕을 주는 등 안 좋게 대우했다고 한다. 워릭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웰스에게 왜 그녀를 그런 식으로 대하느냐고 묻자, 웰즈는 "그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를 진심으로 증오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워릭이 "감정 연기를 위해서 배우가 진짜로 학대당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자 웰스는 "그녀는 배우가 아니라, 수전 알렉산더 그 자체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그녀가 맡은 역처럼 살아갈 것[11] 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출처 영화 후반부 수전이 케인을 독기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연기가 놀랍도록 생생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웰스가 커밍고어에게 한 처우를 의도하지 않은 연기 정도로 넘어가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웰즈는 원래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을 영화화하려고 했는데,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걸 알고 포기했다. 그리고 대신 만든 것이 이 〈시민 케인〉이다. 참고로 소설 《어둠의 심연》은 훗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에 의해 영화화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지옥의 묵시록〉이다.
5. 평가[편집]
5.1. 호평[편집]
한 사람의 인생은 단순화할 수 없는 것이라는 메세지를, '로즈버드' 라는 장치와 당시로서는 독특한 서사 구조, 미장센의 대비 등 여러 서사적, 연출적 요소들로 표현해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영화적 혁신을 이룬 걸작이다.
시민 케인은 시대를 앞서 간 혁신적인 영상 스타일과 순차적인 서사구조를 파괴하고 시각적인 표현을 통해 인물들의 관계를 표현하고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는 모더니즘적인 이야기 방식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느와르가 아직 제대로 장르화조차 되지 않은 1940년대 초에 단순한 선악구도를 넘어 어두운 인간의 본질과 내면을 비추었다.
몇몇 미국 평론가들은 이를 알아보고 “위대한 업적”이라며 극찬하였으나[12] 황색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방해로 인한 홍보 실패로 막상 개봉 당시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영화였다. 개봉 당시에는 아카데미에서 7개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각본상만[13] 을 수상하는데 그쳤을 정도로 큰 관심을 받지 못했었다. 당연히 흥행에 실패해 그렇게 영화도 잊혀지나 싶었으나, 4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지금은 많은 평론가들과 매체에서 최고의 걸작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영화이다.
개봉 년도와 '최고의 영화'라는 별명 때문에 낡고 졸린 영화라 생각하기 쉽지만, 저작권이 끝난 지금에 봐도 세련되고 재미있는 영화다.[14]
'AFI 선정 100대 영화'에서 이견이 없는 1위로 꼽혔다. 평론가들과 언론들로부터 모은 데이터들을 싸그리 합산하여 순위를 매긴, 영화계의 어클레임드 뮤직이라 할 수 있는 사이트인 They Shoot Pictures, Don't They?의 역대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서도 마찬가지로 1위를 차지했다.
'최고의 영화'라 불리는 만큼, '왜 훌륭한가?'에 대한 답도 평자마다 다양하다. 〈시민 케인〉이 왜 걸작인지에 대해서는, 역시 자신만의 견해가 필요할 것이다. 〈시민 케인〉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글 〈시민 케인〉에 대한, 익무 회원의 글 주로 거론되는 극찬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 문법의 종합과 강렬한 시각성. 당시 절정을 향하던 몽타주와 미장센 기술을 〈시민 케인〉은 최적의 조합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미장센은 딥 포커스라는 신기술과 거울 이미지의 활용으로 그 가능성을 드넓혔다. 표현주의 세트와 리얼리즘 조명을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로 만든 것 또한 극찬받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시민 케인〉의 세계는 리얼하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톰슨 기자는 내내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첫 신문 발행 날, 노동자의 입장에서 일하겠다는 선언에 젊은 케인이 서명할 때, 역시나 케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15] 거울과 창문을 사용하여 한 화면 안에서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진행되는 장면이 많다. 이 또한 미장센의 예시가 될 수 있다. 화면과 분리된 소리는 몽타주 이론의 응용이 된다.
둘째, 혁신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스토리텔링. 시간순의 진행을 깨뜨리고 사건을 뒤섞어 놓았으며,[16] 이를 생각의 흐름을 따라 추리와 심리를 기준으로 정렬해 영화 스토리텔링의 혁명을 일으켰다. 또한 '로즈버드'라는 핵심 소재로 관객에게 관심을 유도하는 방식, 종국에 그 로즈버드의 정체를 몰래 드러냄으로써 관객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 또한 호평받는 점이다.
워낙 전설적인 작품이다보니, 어느 분야의 작품에 대해 극찬할 때 "시민 케인 같은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밈 성격으로는 작품성이 평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종류의 매체[17] 에서 높은 작품성과 낮은 대중성을 가진 작품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 봉준호는 〈하녀〉를 두고 한국 영화계의 〈시민 케인〉 같은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지는 영화 〈더 룸〉을 두고 못 만든 영화계의 〈시민 케인〉이라는 평을 내렸다(...).
-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뮤직 비디오는 단편 영화계의 〈시민 케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게임계에서는 2013년 명작게임의 반열에 오른 더 라스트 오브 어스에 대해서 영화잡지 엠파이어가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너티 독이 그때까지 만든 게임들 가운데 가장 빼어날 뿐만 아니라 아주 강력한 현세대 콘솔 최고의 게임 후보로, 이는 비디오 게임에 있어서 시민 케인에 비견될 순간일지도 모르며 수십 년간 회자될 걸작으로 남을 수도 있다."라는 평을 남긴 바 있다.
하지만 2편은...
5.2. 과대평가론[편집]
장폴 사르트르는 개봉 당시에 이 영화를 혹평했는데, 그의 실존주의 사상과 맞지 않아 혹평한 것으로 사료된다.[18]
일각에선 과대평가 됐다는 비판을 하는데, 영화 팬들 뿐만 아니라 평단이나 영화인들 내에서도 동일한 지적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좋은 영화이지만 역사상 최고의 작품은 아니라는 것. 오슨 웰스 전문 연구자들도 최근에는 〈시민 케인〉보다는, 〈악의 손길〉이나 〈위대한 엠버슨가〉를 웰스 최고의 명작으로 치는 경향이 있다.
여러 비판과 논쟁을 겪으면서, 드디어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투표[19] 에서 1위 자리를 〈현기증〉에게 내주고 2위로 내려왔다. 지속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전세계 투표 결과에 반영된 셈. 2012년 투표 결과
〈시민 케인〉에 대한 호평 중 하나로 1940년대까지 나온 몽타주, 미장센과 같은 영화 언어를 총망라했다는 것이 주로 거론됐지만, 이마저도 당대 영화들이 이미 사골 우려먹듯 하고 있었던 터라, 그 참신함과 혁신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일각에서는 감독인 오슨 웰스보다 촬영 감독인 그렉 톨랜드의 공이 더 크다는 지적도 있다. 그렉 톨랜드(1904~1948)는 존 포드와 같은 감독과 작업하며 촬영 기술을 익혀왔고, 〈시민 케인〉에서 촬영술의 정점을 찍었다. 게다가 영화 촬영 당시에 초보감독이었던 오슨 웰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 그렉 톨랜드이기에, 일각에선 두 사람의 '공동 연출'이라 보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20]
사실 그렉 톨랜드가 오슨 웰스에게 먼저 찾아와서 같이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 했는데 당시 톨랜드에게 이유를 물으니 웰즈가 영화 제작에 대해 아무것 도 몰라서였다고 한다. 톨랜드는 거장답게 이제 갓 영화계에 뛰어든 젊은 예술가 웰스의 재능과 가능성을 믿으며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웰즈도 십대시절부터 연극무대에서 다년간 다져진 경험으로 무대 조명에 대한 지식이 있긴 했어도 막상 영화제작은 처음인지라 만 하루 반 동안 톨랜드에게 속성 기본 촬영 레슨을 받고 매일같이 16-18시간 이상, 새벽 3-4시까지 열정적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시민케인에서 선보인 그 때까지의 상식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영상 아이디어들도 정식 영화학교같은 교육기관에서 이론 수업을 받거나 할리우드 스튜디오등에서 일하며 일반적으로 통용되어오던 관행을 웰즈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웰즈는 영화를 직접 미친 듯이 보면서 영화를 배운, 국내의 박찬욱이나 봉준호처럼 미국의 첫번째 영화광 세대 감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작업 비하인드 스토리는 영국 감독 리들리 스콧이 제작하고 리에브 슈라이버, 존 말코비치등이 출연한 1999년 HBO TV 영화, 《RKO 281》#에 잘 묘사되어 있다. 웰즈가 허스트 캐슬에 방문한 적이 없다는 것을 빼면 비교적 고증이 잘 되어있는 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한편, 〈시민 케인〉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오슨 웰스가 아닌 각본가 허먼 J. 맨키비츠를 거론하는 의견도 있는데, 일례로 비평가 폴린 카엘[21] 은 〈시민 케인〉과 더불어 오슨 웰스를 칭송하는 세력들을 공격하며, 1971년에 〈시민 케인〉의 진정한 창작자는 오슨 웰스가 아닌, 각본가 허먼 J. 맨키비츠라는 내용의 두꺼운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2020년에는 〈맹크〉라는 이름으로 맨키비치를 다룬 전기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작품 중에 치명적인 오류가 존재하는데, 대체 케인이 죽을 때 '로즈버드'라는 말을 한 것이 어찌 알려졌냐는 것이다. 위의 설명에도 있지만 케인은 홀로 죽었는데 케인이 죽을때 말한 로즈버드라는 단어를 작 중의 모두가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촬영당시 스태프 중 누군가가 이 사실을 깨닫고 웰스에게 지적했더니 웰스가 잠시 고민하다가 "이 사실은 자네만 알고있게" 라고 입막음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존재한다. 물론 기록적인 명작에 이런 오점이 있었다는 식의 유머로만 넘어가자. 실제로는 영화 후반, 케인의 말년을 보필한 집사가 본인이 그의 유언을 듣고 임종을 지켰노라고 증언한다. 위에 링크된 영상에서도 케인이 값나가는 물건을 때려부수며 분노를 표하자 집사 뒤로 고용인들이 몰려와서 구경하는 장면이 명백히 나온다.
5.3. 단평[편집]
〈시민 케인〉을 잘 보기 위해서는 리뷰를 찾는 대신 이 영화를 백번 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22]
〈게임의 규칙〉과 함께 현대 영화에서 가장 선구적인 작품
영화사에 남을 기적 같은 작품, 걸작의 수준을 뛰어넘는 작품[24]
ㅡ 로저 이버트
영화 〈시민 케인〉이 왜 훌륭한지 3시간도 넘게 말할 수 있습니다.
In 1941, Welles was both beginner and expert, undergraduate and professor, young Charlie and old Charles Foster. And if he never had the boundless freedom and energy to make another film like Citizen Kane, neither did anyone else. It’s terrific.
1941년에 웰스는 초심자이자 전문가였고, 학부생이자 교수였으며, 젊은 찰리이자 나이든 찰스 포스터였다. 그리고 그가 <시민 케인>과 같은 다른 영화를 만들기 위한 무한한 자유와 에너지를 가지지 못했다면, 그 누구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시무시하다.
, BBC Culutre
과잉된 테크닉으로 점철된 영화로,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과대평가된 작품이다. 적어도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오슨 웰즈의 다른 작품들이 훨씬 훌륭하다.
시민 케인이 영화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를 우리 시대의 걸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시민 케인〉은 공식적인 '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입니다. 세계 영화사를 정리하려는 어떤 리스트도 〈시민 케인〉을 빼면 완전치 못합니다. 앞으로 어떤 영화들이 나오더라도, 〈시민 케인〉이 달고 있는 '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이라는 배지를 쉽게 빼앗지는 못할 겁니다.
ㅡ 듀나
오슨 웰즈는 사기꾼에 재미도 없고, 시민 케인은 비평가들에게 늘 일등 먹는 영화지만 따분하며 연기가 엉망이고 이런 영화가 찬사를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현대적인 시점에서 〈시민 케인〉은, 같은 1941년에 제작한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레이디 이브〉와 히치콕의 〈스미스 부부〉, 하워드 혹스의 〈교수와 미녀〉, 그리고 라울 월시의 〈하이 시에라〉 등과 비교해서 온전히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럴 수 없을 겁니다.
21세기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화사적 관점에서 〈시민 케인〉의 맹목적인 절대화를 삼가고 도리어 상대화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시민 케인〉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에 걸맞는 위치에 다시 앉히는 것이 오히려 〈시민 케인〉을 영화사에서 되살리는 유효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6. 기타[편집]
- 지금의 극찬과는 달리 당대의 황색매체 언론계를 지배하던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영화의 주인공인 케인이란 인물이 자신을 모델로 만들었다고 여겨 온갖 방해를 놓았고, 당시 흥행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영화 경력을 시작하기 전 라디오 방송에서 드라마를 연출하던 웰즈가 자신이 일하는 모든 라디오 방송국들의 운영권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허스트를 보며 영화의 모티브를 구상했다고 한다. 미국-스페인 전쟁을 적극적으로 선동한 행적을 대놓고 풍자했으나 허스트는 케인과 달리 기득권에 비판적인 좌파 성향은 아니었다.[29]
- 이러한 이유로 194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은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게 돌아갔다. 9개 부문에 후보[30] 로 올라갔으나 각본상만을 수상하는 데 그쳤는데,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이는 최악의 아카데미 시상식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허나 21세기 들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어 '최악'이라는 평가는 희미해지고 있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도 역시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충분히 아카데미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수작이다. 단지 비교 대상이 하필 시민 케인이기에 저런 평가를 받은 것.
- 한국에선 저작권이 만료되어 관람하기 쉽다. 유튜브에 검색만 해도 볼 수 있을 정도.
- 미국 애니메이션에서도 많이 패러디 되었는데,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고스트버스터즈〉에서는 전설적인 부자가 죽은 성에 그의 유령이 나와 애절하게 "로즈버드"[31] 라고만 말하며 성을 방황하는데, 이 유령을 잡으려는 주인공 이곤 일행이 레이저총을 쏘다가 성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일행이 창고를 박살내면서 온갖 창고 안 물건들이 바깥으로 쏟아진다. 이 와중에 이들도 성 바깥 비탈길로 떨어진다. 그 가운데 윈스턴이 구르다가 우연히 자신이 깔고 내려가던 낡은 썰매를 보는데 이 썰매에 로즈버드(장미봉오리)라고 적혀 있다. 이걸 모두에게 말하는데 그 소리를 들은 유령이 다가와서 썰매를 타며 좋아하면서 성불하는 줄거리이다. 이거 방영할 당시에 한국에 모를 사람이 많았다. 시민 케인이 1990년 1월에 시네마데끄라는 업체를 통해 VHS로 나왔으며 영화 월간지에서도 허구헌날 영화상 최고걸작이라고 소개하여 알 사람 알고 볼 사람은 다보곤 했다지만, 애초에 알만한 사람이란것 자체가 매우 유명한건 아니란 얘기고, 거기다 당시 "만화영화"주 시청자들중 그런 흑백영화를 빌려보는 사람이 있었을리가.
- 오랫동안 할리우드에서는 로즈버드(장미 꽃봉우리)가 허스트의 동거녀이자 여친이었던 영화배우 매리언 데이비스의 신체 부위를 허스트가 은밀히 부르던 말(...)이라는 루머가 있었다. 허스트가 이를 알고 격노하여 시민 케인의 홍보와 개봉을 막기 위해 온갖 방해공작을 펼친 것도 이해가 될만하다는 것. 1989년 "오슨 웰스를 기억하며"를 출간한 작가 개리 텔리스는 허스트가 실제로 데이비스의 특정 신체부위를 "로즈버드"라고 부른 것은 맞다고 한다. 하지만 각본을 쓴 허먼 맹키위츠는 "로즈버드"의 실제 의미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밀스러웠고 한가지 보다는 여러가지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전기 작가 리차드 메리먼과 패트릭 맥길리건에 따르면 맹키위츠가 캔터키 더비 경마장에서 돈을 걸어 이긴 말 이름 “올드 로즈버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그 이름의 의미처럼 극중 케인의 "잃어버린 유년시절"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
- 웰즈는 1977년에 출간된 매리언 데이비스(1897-1961)의 어록 녹음등을 정리한 회상록, “윌리엄 랜돌프와의 인생: 우리가 함께 한 시간들”#의 서두를 직접 써주었다. 그는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연인이자 재능 없는 아마추어 오페라 가수로 나온 수전 알렉산더가 그녀를 모델로 한 것처럼 대중에 인식된 것을 “더러운 수법(dirty trick)”이었다며 후회하고 반성하며 바로 잡으려고 했다. # 사실 시민 케인의 캐릭터들은 허스트가 중심 모티브가 되긴 했지만 여러 실제 인물들에서 영감을 받아 웰스가 “예술적 면허(artistic license)를 가지고 재조합한 것있다. 특히 극중 아마추어 오페라 가수로 나오는 수전 알렉산더와 프로페셔널 영화배우였던 매리언 데이비스는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고 했다 [단,]
- 매리언 데이비스는 10대 시절 브로드웨이의 버라이어티 쇼인 "지그펠드 팔리즈(Ziegfeld Follies)" [32] 공연 무대에서 댄서로 출연 중 유부남 허스트의 눈에 쏙 든 이후로 그가 설립한 대형 영화사를 통해 강제로(?) 막대한 지원을 받아 자신의 타고난 본령인 경쾌한 코메디가 아닌 진지한 드라마 역할을 맡아 연기하며 힘들어했고 대공황 당시 허스트의 영화사가 초거액의 빚을 지고 문을 닫자 자연히 그녀의 경력도 내리막길을 걷기는 했다.[33] 하지만 그녀는 당시 희극 연기의 전설, 찰리 채플린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고 그와 유일하게 개그 배틀을 뜰 수 있을만큼 재치와 미모(실제 사진을 보면 <맹크>에서 데이비스 역할을 맡은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많이 닮았다)를 겸비한 성공적인 영화배우였다.
- 매리언 데이비스는 술을 무척 좋아하는 주당 [34] 에 할리우드 사교계의 여왕이자 파티 걸이기는 했어도 언제나 상냥하고 잘 베풀고 잘 웃어서 누구나 좋아할만한 캐릭터였다. 허스트의 부인조차도 그녀에 대해 나쁜 얘기를 한 적이 없고 그녀 또한 허스트의 부인에 대해 단 한번도 나쁜 얘기를 한적이 없다고 한다. 데이비스는 사업과 돈 관리에도 소질이 있어 허스트가 대공황 이후 막대한 재산을 잃자 자신이 그동안 허스트에게 선물 받은 백만 불(지금 시가로 1,800만 불, 약 200억 원) 가량의 보석들을 팔고 대저택인 허스트 캐슬을 지켜주기도 했다. 심지어 허스트의 다른 여친에게도 그러기를 권유했다고 할만큼 그녀는 끝까지 일편단심이었다. 그가 88세에 세상을 떠난 후에 데이비스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기는 했어도 허스트가 그녀에게 남긴 막대한 유산(그의 전체 재산 규모는 지금 시가로 무려 30억 달러, 즉 한화 3조 3천억 원이었다!)의 분배를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돈 때문이 아닌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는 것.
- 타이니 툰에서는 몬타나 맥스를 케인 역으로 대입한 패러디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로즈버드'는 자전거 제조회사인 애크미로 나온다. 당연히 MBC에서 말괄량이 뱁스라고 더빙 방영된 버젼에서도 그대로 나왔었다.
- 〈심슨 가족〉에서는 번즈를 케인에 비유하여 한 에피소드를 만들었는데, '로즈버드'가 '테디 베어'로, 어린 케인이 부모님과 헤어질 때 원작에서는 가기 싫다고 반항(?)한 것과 달리 심슨에서 번즈는 자기가 나온다고 한다(...).
- 심즈에서의 돈 치트키가 rosebud다. 심즈라는 게임의 특성상 돈 치트키를 쓰면 심의 인생은 부유해질 지언정 게임의 참 재미, 참 의미가 크게 떨어진다는 점에서 대단히 적절한 치트키 이름이라고 하겠다.
- 앨런 무어의 〈젠틀맨 리그〉의 스핀오프인 네모 3부작 가운데 1부인 Heart of Ice에서는 케인이 실제 역사에서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위치에 대입되어 언론재벌로 등장한다. 풀네임은 역시 '찰스 포스터 케인'. H. 라이더 해거드의 소설 〈그녀〉의 등장인물인 아이샤와 크로스오버되어, 그녀의 보물을 지키고 있다가 네모 선장의 딸인 제니 다카르에게 그것을 도난당하고 과학자 세 명을 고용해 제니를 뒤쫓게 한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사람들이 간 곳이 광기의 산맥.[35]
-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영화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영화의 소품이었던 로즈버드 썰매를 60,500달러, 한화 약 6억 9천만 원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오슨 웰스의 작품 복원에는 관심이 적어서 시민 케인을 제작했던 관계자로부터 까이기도 했다. 웰스는 이 영화 이후 힘들게 영화를 만들었고, 복원도 은근히 까다로운 편이라 알려져 있다.
-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 2021년 12월 4K UHD 블루레이로 복원되어 국내에 정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