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타 카츠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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柴田 勝家(しばた かついえ
(1522년? ~ 1583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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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 기러기 가몬[1]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매우 용맹한 무장이자 평생을 군사에 바친 사람.

노부나가의 시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장이자 과감한 사람.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으로, 오다 가문의 가신. 오다 노부히데 시기부터 오다 가문을 섬겼고, 오다 노부나가 시기에는 그의 주요 가신으로 활약한 인물.


2. 생애[편집]


기노시타 히데요시가 중용될 때 기존 가신들에게 찍힐까봐 아부하기 위해 고참들의 성에서 한자씩 따서 성을 바꾼 것이 '하시바'이며, '하()'는 니와 나가히데에서, 시바()는 시바타의 성에서 따왔다.

본래 노부나가의 동생인 노부유키 파에 서서 활약했다. 그러나 노부유키가 한 번 패하고 노부나가에게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모반을 꾀하자 차마 그 꼴을 못본 카츠이에는 노부유키의 모반을 밀고했고 노부나가에게 붙어 이후 죽을 때까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하였다.

오다 가문 최강의 맹장으로 용명을 떨쳤으며 그래서 붙은 별명이 오니 시바타(), 돌격 시바타(かかれ[2]柴田).

그의 통솔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비와호 동남에 위치한 쵸우코지성에 가츠이에의 군세가 롯카쿠 요시카타의 맹공으로 성에 틀어박힌 채 고립되었는데 거기에 물과 식량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자 가츠이에는 큰 항아리에 성에 남은 물을 모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사발씩 먹이고 자신의 창으로 항아리를 깨면서 "이제 성에 남은 물이 없으니 죽기로 싸우는 일만 남았다"며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파부침주()와 비슷한 효과. 결국 그와 그 병사들은 죽기로 싸워 적의 포위망을 돌파, 성에서 탈출하여 퇴각하는 데 성공한다. 이 일화로 독깨기 시바타(り柴田)라는 이명도 얻었다.

항상 여러 방면에 적을 두고 싸웠던 오다 가문의 일개 방면군을 맡아 활약했으며 니와 나가히데, 아케치 미츠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 중신 중에서도 필두 가로에 속하는 인물로, 에치젠아사쿠라 요시카게를 격파한 후 노부나가는 가츠이에에게 에치젠을 맡기고 나아가 호쿠리쿠(北陸) 방면 공략을 담당하게 했다. 한때는 테도리가와에서 우에스기 겐신에게 대패[3]하여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겐신의 급사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노부나가의 원군은 강 건너에서 도와주지 못하고 지켜만 보다, 간신히 빠져나온 시바타만 데리고 후퇴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급습으로 패사했을 즈음에는 엣츄 방면에서 겐신 사후의 우에스기 가문 공략 중 이었고 이와중에 우에스기 측의 우오즈성을 함락 시켰다.

당시 장자였던 노부타다 역시 니죠 성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순서대로라면 시바타가 권력을 쥐었어야 할 것이었으나, 북방에서 어물거리는 사이에 히데요시가 당시 적대하던 모리와 재빨리 화평하고 돌아와 아케치 미츠히데를 격파하며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히데요시보다는 카츠이에가 훨씬 유력한 후계자로 받아들여졌으나, 키요스 회의에서 결정적으로 주도권을 뺏기게 된다. 대립을 거듭한 끝에 이후 히데요시와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도 기동전에서 앞선 히데요시 군에 패배하여 자살하였다.


3. 기타[편집]


선교사 프로이스는 노부나가가 가장 아끼는 두 장수 중의 한 명으로 언급했으며, 명예를 중시하는 가츠이에와 밑바닥 출신인 히데요시는 도저히 죽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마에다 토시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여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도 투항을 거부하고 할복을 시도, 천수각에 불을 붙여 아내인 오이치와 함께 죽었다.

노부나가 집권 초창기에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와 함께 모반을 도모했었는데도 불구하고 용서받았고, 노부유키의 두번째 반란에서 노부나가의 편에 선 이후로는 완전히 노부나가의 심복이 되어 군단장으로 중용되었다. 그의 사후에는 노부나가의 적통인 산보시를 옹립하려 드는 히데요시와의 정권 다툼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노부나가의 누이 오이치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다.[4]

또한 마에다 토시이에가 배신했을 때도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때까지의 공을 칭찬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프로이스는 훌륭한 기사도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시바타 카츠이에/기타 창작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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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바타 카츠이에의 가문으로 기러기 가몬을 사용하였다.[2] かかれ(가카레)는 전국 시대 관련 매체에서 주로 대장급 무장들이 많이 외치는 말로 "덤벼라!" "돌격하라!" 정도의 뜻이다. 동사 かかる는 흔히 '걸리다'라는 뜻으로 제일 많이 쓰이지만 일어사전을 찾아보면 '덤벼들다, 공격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3] 히데요시가 멋대로 전선을 이탈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나, 가장 큰 원인은 도하 직후 테도리카와가 범람하여 퇴로가 차단되고 전군이 분단된 상태에서 우에스기 군의 급습을 받아 각개격파 당했기 때문. 이 때문에 일각에선 우에스기 군이나 그와 연합한 세력이 오다 군에게 수공을 건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4] 노부나가의 가족 사랑은 끔찍해서 친인척을 죽였다는 이유로 절간에 불을 싸지르거나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이치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첫번째 결혼 생활은 남편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빠 노부나가가 적대 관계로 치닫는 등 이례적으로 불행했고, 오이치의 두번째 결혼은 노부나가 사후에 일어난 일이라서 노부나가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