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차량제작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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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1]
1. 개요
2. 역사
3. 이름
4. 재현
5. 시발 세단
6. 여담
7. 모형화



1. 개요[편집]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5년미군이 내다버린 윌리스 MB 지프들을 주워다가 완전히 해체한 후 쓸만한 부품끼리 긁어모아서 다시 조립해 만든 영운기로, 당시 법제에서는 자동차로 인정받았다. 때문에 형태도 지프 스타일, 즉, SUV이다.

이 차량의 정신적 후속작이라고 할 차량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코란도다.[2]

제작사는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


2. 역사[편집]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3]의 인터뷰.
버려진 미군 지프를 가져다 만들었기 때문에 디자인이나 플랫폼, 파워트레인이 윌리스 MB와 같다. 그리고 워낙 열악한 환경에서 차를 만들다 보니 초기에는 천막에서 생산했을 정도이고 제작 기간도 수개월이 걸릴 정도였다.

엔진의 경우 함경도 아바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영삼[4]이 주도해서 제작했다. 미군 폐차 부품이 떨어져 가는 상황이 되자, 당시 국제차량제작의 최무성 사장에게 엔진 국산화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국산 엔진 제작이 추진될 수 있었다. 미제 엔진을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한 끝에 1955년 국산 엔진 제작에 성공했다. 놀랍게도 전통적인 대장간 거푸집 주조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열처리 문제 때문에 엔진이 파손되는 시행착오를 10번이나 반복한 끝에, 열처리 방법을 터득하여 11번째 시도에 성공했다. 4시간 연속으로 엔진을 고속으로 작동시켜보는 방식으로 성공을 확인했다. 1954년 국산 엔진 제작을 시작한 지 1년 만이었다.[5] 자사의 자동차 부품들이 멋대로 활용되고 복제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미국 자동차 회사 관계자가 시발차 공장에 와서 엔진 만드는 광경을 보고 뜻밖의 의미로 경악했다고. 그래서 그는 "당신들 정말 대단하군요. 하지만 이런 짓은 당장 그만둬야 할 겁니다." 라면서 찬사와 경고를 해주고 갔다고 한다.

현대자동차의 현대 포니 엔진 국산화를 담당했던 <포니를 만든 별난 한국인들>[6]의 저자 강명한에 따르면, 서울대 기계공학과 2학년 재학중에 영등포 시장 근처의 삼성공업사[7]에서 실습을 했는데 당시에 시발자동차 엔진을 제작했었다고 한다. 청량리의 주물공장에서 엔진 블록을 만들고 삼성공업사에서는 블록을 드릴링, 보링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실습 이후 자신이 시발자동차 제작에 일조했다는 뿌듯함에 시발 택시를 탈때 마다 운전기사에게 국산 엔진 성능이 어떤지 넌지시 묻고는 했다는데 출시후 두어달 되면 힘이 다 빠진다고 불평을 듣기 일수였다고 한다. 보통 중고 미군 지프차 엔진을 구해서 바꿔 달았다고(...)[8] 상술했듯이 엔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정밀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며, 6.25 전쟁 직후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기술에서도 복제에 성공한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1955년 8월 출시 당시 이 차량은 최초에는 인지도가 낮고, 유선형의 다른 자동차와는 달리 사각형의 투박한 디자인인지라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9],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10월에 개최한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이 시발자동차는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인지도가 대폭 상승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이 차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오히려 상류층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 심지어 시발차를 생산하기 위하여 주문자에게서 받은 돈만 1억 환이 넘었다고 하며(당시 판매가는 약 90만 환), 시발차를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팔려고 시발계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 후 1962년에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에서 닛산에서 개발한 자동차인 블루버드와 동일한 부품을 수입해서 생산한 '새나라'가 등장하면서 시발차는 새나라에 비해 품질, 디자인, 성능 등에서 밀리다 보니 판매량 저하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발차는 약 3,000대가 넘게 팔린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에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시발택시가 현역으로 운용되었다. #


3. 이름[편집]


이름은 시발 문서의 1번과는 한자가 같은데(始發), 최초로 국산 기술로 자동차를 만든것을 기념하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식 상표는 'ㅅㅣ-ㅂㅏㄹ'. 모음 길이를 구별하던 시대라 그런지[10] 그냥 '시발'이 아니라 '시-발'이라고 하이픈을 넣어서 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이름이 순전히 욕 하나 때문에... 이래도 감이 안 온다면 똑같이 창세, 시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제네시스를 떠올려 보자. 확실히 좋은 뜻이긴 하다.

라디오 광고도 있는데, 로고송이 놀랍게도...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자동차를 타고 삼천리를 달리자~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자동차를 타고 종로 거리를 달리자~

라는 가사이다. 아쉽게도 이 로고송은 악보와 음원마저도 유실된 상태다. 해당 영상[11] 위 전영선 소장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그 당시에도 시발이라는 말의 어감 때문에 아이들이 이 로고송을 부르고 다니는 것을 들은 어머니들이 어디서 그런 욕지거리를 하고 다니냐며 야단을 치는 해프닝이 종종 있었다는 모양이다.

영문 이름도 있는데 시작을 의미로 'The Start TAXI' 로 작명했다.[12]


4. 재현[편집]


안타깝게도 실제 생산할 당시의 차는 현재로서는 단 한 대도 존재하지 않는다.[13] 또 차량의 품질도 상당히 좋지 않았다. 즉 남아있는 거라고는 죄다 재현품.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삼성교통박물관에 2대[14], 제주도 세계자동차박물관에 1대가 전시 중이다. 자동차 대여 업체인 금호상사에도 한 대가 있다. 광화문광장 옆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도 1대 전시되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 제작자의 증언 등이 있어 재현은 온전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 시대가 시대인지라 흑백사진뿐이라 도색을 못할 뻔했는데 다행히 했다. 제작자의 증언에 따르면 에탄올 버전도 만들려 했다고.이게 바로 시발차, #2

2019년 12월, 보배드림에 방치된 시발자동차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이 찍힌 곳은 대전에 위치한 정일모터스라는 정비공장 옆이다.[15] 하지만 이 차량은 1993 대전 엑스포 당시 전시된 재현차량이다. 즉, 오리지널이 아닌 레플리카.

야인시대 107화에서도 복제품이 잠깐 나온 바 있다.


5. 시발 세단[편집]


1957년 9월 10일 대한뉴스 제130호 - 국산 시발 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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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세단
디자인은 1956년식 플리머스 벨베디어나 동시대의 머큐리 몬터레이를 참고한 모양이다. 형태만 보면 어찌 왜건처럼 생겼다.

대한뉴스에 따르면 국제차량제작소에서는 파생 모델로 세단을 제작해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차량은 9인승으로[16] 월 100대까지 생산이 가능했으며 천장이 낮은 것을 빼고는 미제 승용차와 비교해도 뛰어나다고 설명됐다. 말이 세단이지 현대 기준으로는 MPV 계열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천장이 낮은 걸 빼면. 시발 계열의 자동차 부품들은 자체 제작되어 국산화를 60프로까지 달성했다고 한다. 심지어 엔진도 미국산을 복제해서 주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엔진 도사로 불리던 김영삼이 이 회사에서 일했었고 윌리스제 직렬 4기통 2.2리터 고데빌 엔진을 복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고시속은 130km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급격한 자동차 증가로 석유 파동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가 1957년 5월 8일 자동차의 수를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면서 시발 세단의 생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여파로 판매량도 상당히 저조했으며 남아있는 차량도 단 한 대도 없고 복제품조차도 없다.


6. 여담[편집]


  • 생산 당시 시동방식이 앞 범퍼 구멍에 시동핸들을 삽입하여 돌려서 시동을 거는 크랭크시동 방식 이였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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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디젤버스
시발픽업

  • 시발차를 만든 국제차량제작소는 이 사진처럼 버스도 제작했다. 명칭은 시-발듸-젤뻐쓰. 하체는 폐차된 미군 군용트럭의 것을 이용했으나, 엔진은 이스즈자동차의 DA120 6,126cc 125마력 디젤 엔진을 사용했으며 국내 최초로 디젤 엔진을 사용한 버스 였다. 그러나 발매했던 시기가 1961년 10월 30일이라서 얼마 안가서 새나라 자동차 에게 밀리게 되었던 끝물 시기였다. 사실상 가장 마지막으로 발매한 모델이며 생산 대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18]

  • 시발 픽업트럭도 만들었지만, 단 2대만이 생산되었다. 이유는 당시 시발과 시발 세단의 인기가 높아서 상대적으로 수요가 없었던 픽업을 굳이 대량 생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시발픽업보다 훨씬 힘도 좋고 적재량도 많아서 강원도 험지도 잘 굴러다니는 미군 CCKW가 민간에 마구 불하되고 있었기 때문에 화물작업에서 굳이 조그마한 픽업을 쓸 이유도 없었다.[19] 이 픽업은 1964년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스쳐가듯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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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ival motors.jpg
초기형 시발[20]
후기형 시발[21]

  • 시발자동차를 생산하면서 차체 설계에 관한 노하우가 쌓였는지, 초창기에 제작된 시발차에 비해 후기에 제작된 시발차들은 차체에 전체적으로 곡선이 들어가고 일부 장식이 추가된 디자인을 하고 있다.[22]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관련된 사진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 당장 위의 시발 디젤버스와 시발 픽업의 디자인을 보면 확실이 시발에 비해 깔끔하고 세련되었단 걸 알 수 있다.

  • 필리핀에도 이 차처럼 군용 지프를 개조해서 만든 대중 교통수단인 지프니가 있다. 이쪽은 아직도 현역이다.[23]

  • 항공기 판으로는 해취호가 있다. 사실 한국의 극초기 개발 항공기들은 죄다 추락하거나 어디서 주워온 외국제 부품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항공우주 기술이 그만큼 수준높은 기술이다.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최병조 명예교수(1953년생)의 회고에 의하면, 어릴 때 놀다가 시발택시에 치인 적이 있다고 한다.[24] 회고담에서 "시발택시"라고 명확히 진술하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한국인들에게 확실히 네임드 차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오원철이 박정희에 의해 공무원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여기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방산산업과 각종 민수산업이 나름 효율성 있게 돌아가도록 한 현실 경험을 쌓을 수 있던 것이며, 시발자동차가 한국현대사에 아직도 가려진 의의가 많다는 뜻이다.


  •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울퉁불퉁한 도로를 지나가면 유리창이 깨졌다는 말이 있다.

  • 시발자동차 생산 당시 테스트라고 해봐야 기껏 주행 테스트[25] 밖에 없었고 오로지 잘 달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안전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한번 교통사고가 나면 차체가 심하게 찌그러졌다고.

7. 모형화[편집]


모형화된 제품은 전무하다. 박물관 전시용 모형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졌을 뿐 양산되는 제품은 없다. 클래식카들을 비롯한 옛날 차량들중 모형화된 차량들이 많은걸 생각하면 의문이 생길수도 있는 부분.

용인에 위치한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에서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완구가 유일하다. 가격대가 저렴한지라 바디가 플라스틱이고 문열림 기능이 없는 통짜여서 모형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수준이다. 그래도 완구 특유의 귀여움이 느껴진다. 1970년대 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듯한 느낌의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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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으로 재현하려면 이걸 사다가 도색만 다르게 하면 된다. 이 제품은 아카데미과학제 M151A2 하드탑 트레일러 지프이다.단 M151A2 무트 지프는 윌리스 지프 다음 모델로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온 모델이다. 윌리스 지프의 부품을 모아서 만든 시발을 얼추 흉내만 내는 수준. 다만 2000년대 초에 생산된 제품이라 2023년 기준으로 현재는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3D 이노 메탈로 재현된 금속모형도 있는데 완구용보다는 장식용에 비중이 크기 때문에 문열림기능과 바퀴구동기능이 없다. 색상이 실차 그대로 재현되어 비교적 디테일이 뛰어나지만 조립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조립시간을 넉넉히 잡았을 때 3~4시간 소요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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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시발'은 절대로 욕이 아니다. '처음으로 일어남'이라는 뜻의 한자어 이다. [2] 구 코란도 역시 윌리스 MB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3] 全永先. 1939년 대구 출생. 대구계성고등학교계명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4년 하동환자동차에 입사한 이래 신진자동차, 새한자동차, 동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등에서 하동환 A60, 새한 BD098, BF101, 동아 HA20, HR252 등 주로 국산 버스 차종의 개발 및 디자인에 참여했고, 1992년 은퇴하여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자동차의 보존 및 복원에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4] 14대 前 대통령과는 다른 사람이다. 한국 자동차 공학 1대급 엔지니어인데 본인은 정규교육을 받은적이 없지만 교회에서 한글과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의 기계설계 책들로 독학을 하고 나중에 일본으로 직접 가서 기계설계와 엔진설계, 주조까지 배웠던 사람이다.[5] KBS 스페셜 - 빅 아이디어 (2부) 산업의 심장 편[6] 1985년 저작인데 당연히 절판되었고 중고 시세가 15만원 정도한다. 이에 2022년에 <응답하라 포니원 - 포니를 만든 별난 한국인들>으로 재발간 되었다.[7] 당연히 삼성 그룹과는 관계가 없다.[8] <응답하라 포니원 - 포니를 만든 별난 한국인들> 24쪽[9] 폐차된 지프를 재활용하여 조립했고 차체 일부는 드럼통을 펴서 만들었다. 현역 당시 생산시기별로 디자인이 조금씩 달라서 완전히 똑같은 형태가 아니었다.[10] 진짜 이게 반영됐다면 당시에만 해도 그 욕과는 다른 발음으로 취급됐을 것이다.[11] 근데 이 영상 내용이 욕처럼 들렸는지 연령제한이 걸렸다.[12] 한국 상표나 기업은 보통 한국어로 읽은 발음을 그대로 영어로 쓰는데, 시발자동차는 '시발'을 발음 그대로 쓰지 않고 그 단어의 의미인 'Start'로 바꿔썼다. 근데 위키피디아 등 사이트에선 sibal car라고 한다. The Sibal TAXI[13] 도시미관 유지 및 새로운 자동차관리법의 시행으로 남아있던 시발 차량은 1968년 이전에 모두 폐차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시발 차량의 폐차를 알리는 신문기사.[14] 그나마 실차에 제일 가깝다.[15] 신탄진쪽 대덕공단에 위치해있다.[16] 3열 배열 이기 때문에 트렁크가 없다.[17] 다만 복제 차량은 원터치키 시동방식으로 제작했다.[18] 이후 국제차량제작은 이스즈자동차와 기술제휴로 당시 이스즈자동차의 신형 버스와 트럭 모델을 들여와 라이센스 생산하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무리하게 자금을 투자한 것이 화근이 된데다가, 이듬해 새나자동차의 등장으로 인하여 타격을 입고 결국 쓰러지게 되었다.[19] 도시의 용달 수요는 아직까지 지게차와 리어카가 감당하고 있었고 여기서 60년대의 유지비가 훨씬 저렴한 오토바이 엔진을 쓴 기아마스타 3륜차로 바로 넘어간다.[20] 드럼통을 펴서 만들었기 때문에 디자인이 상당히 투박했다.[21] 뒤에 있는 차량들이 전부 시발 자동차다. 이름은 같지만 디자인이 서로 다른 이유가 각종 폐자동차 부품들을 재활용하여 개조했기 때문이다.[22] 사실은 폐 미제 승용차 부품들을 들여와서 개조한 것에 가깝다.[23] 특히 마닐라 쪽의 지프니가 시발차와 유사하다.[24] 서울대학교 법학, 제59권 제1호(2018), 18~19면[25] 말이 주행 테스트지 실질적으로는 동네 한바퀴 도는 시운전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