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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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각주]



시크교
Sikhism | ਸਿੱਖੀ

파일:익 온카르.png
파일:시크교 상징.svg
표어[1]
상징[2]
규모
약 3000만 명
창시자
구루 나나크
소재지
펀자브 및 세계 각지[3]
명칭
펀자브어
ਸਿੱਖੀ
한국어
시크교
힌디어
सिख धर्म
우르두어
سکھ مت
영어
Sikhism
프랑스어
Sikhisme
스페인어
Sijismo
러시아어
Сикхизм
에스페란토
Sikismo
아랍어
السيخية
일본어
シク教
중국어
錫克教번체, 锡克教간체[4][5]

1. 개요
2. 역사
2.2. 무굴 제국하의 시크교
2.2.1. 고빈드 싱의 시크교 개혁
3. 역대 구루
4. 교리
5. 특징
6. 독립운동
7. 성지
8. 어록
9. 기타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시크교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주로 이슬람교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창시된 종교이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와 같은 다르마 계통의 종교로 구분된다. 중세 인도의 악폐습을 개혁하려는 일종의 인도판 종교 개혁 움직임을 보이며 널리 전파되었다. 덕분에 후술되어있듯 인도의 주요 종교들에서 전근대적인 안 좋은 점들을 제거하고 좋은 점을 혼합한 이상적인 느낌도 드는 종교이다.

2020년대 기준 신자는 약 3천만 명,[6] 성도는 인도 북부에 위치한 암리차르로, 시크교의 총본산인 암리차르 황금사원이 위치한다.

시크교도 특유의 머리 위 둥그렇게 칭칭 두른 터번 파그리(pagri)는 그들의 상징이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무슬림이 터번을 많이 하는 줄 아는데, 사실 이슬람권에서는 시아파의 일부만이 의무적으로 터번을 착용한다. 실제로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착용하는 모자는 터번이 아니라 타키야(طاقية, taqiyah)라고 부르는 하얀 니트 모자로, 무슬림은 아니지만 셰프 정창욱이 착용하는 게 바로 그것.[7] 이슬람의 영향도 받았기에 겉으로 보이는 복장이나 외모 내지는 사원 건축 양식[8]을 보면 이슬람교와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인도 계통의 종교이기 때문에 각종 단어들이 산스크리트어로 된 것들이 많으며 개념적으로도 불교힌두교처럼 다르마윤회사상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2. 역사[편집]


파일:나낙 사힙.jpg
구루 나낙의 탄생지인 나낙 사힙의 성지

2.1. 창시자 구루 나나크[편집]


창시자는 구루 나나크(ਗੁਰੂ ਨਾਨਕ ਦੇਵ, Gurū Nānak, 1469–1539)이다. 그는 수드라인 아버지와 브라만인 어머니를 둔 사생아로 추정되며 이슬람교를 믿는 한 직공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한다. 인더스 강에서 영감을 받아 이슬람힌두교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가르침, 시크교의 가르침을 만든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9] 구루 나나크는 여러 신을 믿는 힌두교의 믿음을 깨뜨리고, 신은 오직 하나의 진리라고 보는 전통을 세웠다. 사실 그 전에도 신은 하나라고 보는 여러 운동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힌두교 종교개혁 운동이었던 '박티 운동'이 그랬다. 하지만 박티 운동은 철저하지 못했다. 그들은 신이 여러 몸으로 부활한다고 믿었고, 신이 세상에 내려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구루 나나크는 철저하게 신은 하나만 있다고 고집했다. 또한 신을 단지 정신적인 존재뿐만이 아니라, 형체가 없으면서 설명도 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로 생각했다. 곧 신을 따른다는 것은 진리를 수행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신이 말씀하신 진리라고 생각해보자. 이때 거짓말을 한다면, 진리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신에 대한 불경한 행위가 된다.

한편 나나크는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종교적 멘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러한 지도자를 구루(guru)라고 불렀다. 나나크에 의하면 구루 없이는 구원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구루는 종교적 인도자로서 환영의 바다에서 진리의 길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구루는 신이 지상에 내려온 것이라고 보지 않았고, 나나크는 구루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신은 오직 하나요, 하나의 진리라고 보는 그의 사상이 한몫했다.

나나크의 사상 중 중요한 부분이 바로 카스트 제도에 대한 반대이기도 했다. 사실 카스트제에 대한 불만은 고타마 붓다 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힌두교 개혁운동이었던 박티 운동도 그 중 하나였다. 박티 운동 역시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고 평등한 인간을 내세웠다. 하지만 실행에 있어서 미흡한 점이 많았는데, 낮은 카스트에 있는 사람을 수행자로 받아들인다거나, 이따금씩 낮은 카스트가 주는 음식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구루 나나크는 카스트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상을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 '무료 공동체 식당'을 열었다. 펀자브어"구루 카 랑가르"(Guru ka langar)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랑가르(ਲੰਗਰ)란 펀자브어로 '부엌'이라는 뜻이므로, 직역하자면 '구루의 부엌'이라는 뜻이 된다. 2019년 빠니보틀이 방문한 적 있으며(파일:유튜브 아이콘.svg), 2023년에는 미니멀유목민 부부도 방문했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그래서 아래에 언급하듯이 시크교 사원에서는 계급, 종교, 인종, 문화, 언어 등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음식을 제공한다. 심지어 군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악바르 대제가 사원을 방문했을 때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었다.#

나나크는 카스트 제도의 잔인한 영향력을 부수기 위해 실제적인 단계를 밟아나갔다. 모든 [나나크가 창시했던] 중심지에 무료 공동체 부엌, 즉 구루 카 랑가르(Guru ka langar)를 시작했으며,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카스트에 개의치 않고 함께 밥을 먹도록 했다. 나나크의 저작에는 카스트 제도와 카스트 관념에서 뻗어나온 다른 관습들, 특히 브라만에 의해 창시된 개념들을 비판하는 구절이 많다. 음식이 만들어지는 곳에서 낮은 카스트에 있는 사람의 그림자만 닿아도 불결하다고 여기는 개념이 그것이다. - 쿠슈완트 싱(1915~2014, 인도 외교관 겸 역사학자)


오늘날에 이르러 시크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인정받고 있지만, 본래는 힌두교 내의 하나의 개혁 운동으로 보기도 했다. 자이나교불교와 달리 이슬람의 중요한 요소를 힌두교에 조화시킨 일종의 힌두-이슬람의 종합이지만 신분 제도를 없애고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고기를 다 먹고 운동을 장려한다든지 기존의 힌두교와 이슬람을 섞으면서 꽤 다르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슬람힌두교 양쪽 모두의 몇 안되는 공통점이였던 여성 차별조차 철폐했다. 그래서 시크교도들로 하여금 지참금 문제로 아내를 패죽이거나 학대하는 일을 금기시하게 했으며 명예살인도 종교적으로 어긋난다며 금지한데다 다른 종교에도 관대한 경향이 있다.[10]

2.2. 무굴 제국하의 시크교[편집]


그 후 시크교는 몇 대의 구루(지도자)를 거치며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초기 발전사 중 명성 있는 사람이 제5대 구루 아르준(Arjun, 1563-1606)이다. 아르준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종교적 신심으로 명망 높았고, 특히 제1대 구루 이후 역대 가르침을 집대성하고 자신의 철학과 여러 찬가를 덧붙여 시크교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아디 그란트)'를 완성해낸 인물이었다. 시크교 문헌에 따르면, 무굴 제국의 전대 황제였던 악바르가 그가 이슬람을 모욕하는 경전(그란트 사히브)을 쓴다는 전갈을 듣고 찾아갔다가, 책의 사본을 전해 읽고는 오히려 감동해서 금화와 의복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암리차르 인근의 시크교 마을 크헤하르타에는 그가 몬순에 대비해 짓도록 한 우물이 전해진다. 또한 그의 시절에 시크교의 가르침을 구현해낸 시크교 사원 하르만디르가 완공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암리차르 황금사원 문서 참고.) 한 연구가에 따르면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으며 오히려 시크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악바르 황제 덕분에 시크교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구루 아르준의 공으로 시크교는 상당히 확장되었고, 그는 진정한 황제라는 뜻의 '사카 파드사'(Saca Padsah)라고 인정받았다. 이 칭호는 어디까지나 종교적 의미만 갖지 당연히 행정적, 국가적 실권과는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순교 후 6대 구루에 이르러 지역 실권자와 비슷한 뜻을 갖게 된다.

그러나 1606년 무굴 제국의 모든 종교에 관용적이던 황제 악바르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자한기르 때부터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자한기르는 황권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고 박살내기로 유명했는데(항목 참조) 장남이 반란을 일으키자, 시크교 지도자 아르준이 도와줬다고 생각하고는 1606년 체포, 고문 후 처형했다. 실제로 아르준은 그의 장남의 이마에 사프란을 발라 종교적으로 축복하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란에 직접 가담했는지는 상당히 다른 문제인데, 그가 적극적으로 중앙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견해, 자한가르의 정치적 동기에 의한 살해라는 견해, 시크교도를 지속적으로 박해한 결과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다만 황제의 일기를 보면 자힌기르는, 세력을 넓혀나가며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를 개종시켜나가는 아르준을 이미 적대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헛된 짓거리를 끝내던지 아니면 그가 이슬람 공동체로 와야 할 것'이라고 열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들을 탄압해가는 힌두교나 이슬람에게 맞서서 비무력적임에도 무굴 제국대에 이르러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던 시크교도들은, 무굴 제국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무굴 제국에 항쟁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사실 자한기르 황제는 아르준의 처형뿐만 아니라 가산 몰수, 가족 체포 등을 명했지만 구루의 사망으로 인해 시크교도의 세력이 약화될 것이라 판단되었는지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제6대 구루 하르고빈드(1595-1644)는 건장한 교도들의 무장훈련, 요새(Lohgarh) 신축, 용병 모집 등을 시작했으며 몇 년 간 구금 후 풀려난 이후에도 무장 활동을 계속했다. 역설적이게도 자한기르가 오히려 시크교도들의 결집과 무장화를 도와준 셈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눈엣가시여도 종교적 지도자를 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정부가 망명 온 이란의 성직자 호메이니를 암살하려고 하자, 오히려 정치적 반대파였던 이란팔라비 정부가 반대했던 일이 있다. 자칫하다간 그가 순교자가 되어 정치적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자한기르의 뒤를 이어 샤 자한이 황제가 되었다. 샤 자한 역시 시크교에 대한 불관용 정책을 고수하면서 시크교도와의 갈등이 커져 갔다. 그의 치세 때 시크교도와 여러 차례 교전이 있었으나 로힐라, 암리차르 전투에서 구루 하르고빈드가 승리했다. 하지만 대규모 무굴 군대의 침공을 우려한 그는 히말라야 자락에 있는 키라트푸르(Kiratpur)로 자리를 옮겼고 말년까지 그곳에 있었다. 샤 자한은 1636년 키라트푸르를 포위했지만 하르고빈드는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고, 이것이 하르고빈드 대에 있었던 마지막 무굴 제국과의 전투였다. 결과적으로 하르고빈드는 펀자브 지역의 이질적 민족 구성에 기반한 반(反)무굴, 배타적 정서와 결합해서 지역 내에 독자적이고 견고한 명망을 쌓기 시작했으며, 시크교 신자의 수도 점점 증가해나갔다.

1638년, 구루 하르고빈드의 후계자로 점찍힌 아들이 갑자기 사망해버리면서 하르고빈드 사후에 손자였던 하르 라이(Har rai)가 제7대 구루에 오르게 된다. 문제는 구루 하르 라이가 샤 자한의 아들내미들끼리의 권력투쟁에 끼였는데, 차기 황제 아우랑제브가 아니라 다른 형제를 지원했다는 것... 결국 아우랑제브가 승리한 뒤 즉각 하르 라이를 델리로 호출했지만 하르 라이는 맏아들을 대신 보냈고, 맏이는 다행히 황제의 신용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하르 라이는 맏아들이 아우랑제브와 정치적 유대감이 지나치다고 판단했는지 차대 구루로 겨우 다섯 살이었던 하리 크리쉬엔을 승계시켰다. 하지만 구루 하리 크리쉬엔은 얼마 안 지나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종조부였던 테그 바하두르의 이름을 불렀으므로, 전대 구루인 하르고빈드의 아들들이 아니라 그가 제9대 구루가 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시크교를 자신의 통제권 안이 넣으려고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시크교만이 아니라 왕국 내의 모든 종교에게 '개종을 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렸고, 카슈미르 펀디트(지역 힌두교 공동체)가 시크교 지도자인 테그 바하두르에게 청원을 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테그 바하두르는 아우랑제브와의 담판을 통한 평화교섭을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는 그를 뜯어말렸다. 그러자 그의 아들인 고빈드 라이(훗날 고빈드 싱)가 아버지만큼 지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가치있는 분은 없다고 하자 테그 바하두르는 직접 아우랑제브와 담판을 벌이려 델리로 갔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개종을 요구했다. 테그 바하두르와 그를 따라온 시크교도 수행인들을 개종을 거부했으며 아우랑제브는 그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시크교는 이 바하두르를 다른 종교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역사상 유일무이한 종교 지도자로서 추앙한다. 다만 이 일화는 구루 테그 바하두르 사후 한참 시간이 지나서 기록됐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하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아우랑제브와 담판하고 나서 여전히 델리에 남아 있었던 하르 라이의 맏아들이, 지도권을 가져간 구루 테그 바하두르에게 적대심을 품고 아우랑제브를 만나 그의 죽음을 도왔다는 말도 있다. 경전에 남은 그의 말들을 분석한 연구 결과 그가 제국의 이슬람 헤게모니에 대해 사회-정치적 변혁을 도모하다가 그렇게 됐다는 말도 있다.


2.2.1. 고빈드 싱의 시크교 개혁[편집]


지도자를 잃었지만 테그 바하두르의 아들 고빈드 싱이 제10대 지도자로 올라서 저항운동을 벌여 결국엔 펀자브에서 무굴 제국의 패권을 영원히 깨뜨려버렸다. 고빈드 싱은 평화주의에 가까웠던 시크교에 전투적인 속성을 더하기 위해 일종의 무장집단인 칼서(Khalsa)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시크교도들은 한 그릇에 담긴 암리트(성수)를 다함께 나눠마시는 의식을 치르고 칼서에 입단한다. 이 때에 확립된 것이 시크교도의 5대 상징물인데, 장발, 긴머리를 감싸 활동성을 늘리는 터번, 스스로를 지킬 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는 반바지(팬티대용), 여차하면 타격점 및 방어용으로 사용 가능한 팔찌 등으로 과연 상징물부터 전투민족다운 기상이 느껴진다.

또한 4가지 수행 규칙을 지키도록 하였다. 첫째, 몸에 있는 어떤 털자락도 자르지 말 것. 둘째, 담배를 피거나, 씹거나, 알코올이 든 음료를 마시지 말 것. 셋째, 피가 흘려서 죽인 동물을 먹지 말고, 단칼에 내리친 동물의 고기만 먹을 것. 넷째, 무슬림 여성을 겁탈하지 말 것. 넷째 규칙은 당시 무슬림과의 전투가 빈번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보복 행위를 금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크 공동체의 모든 신자가 고빈드 싱의 개혁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나나크의 가르침 및 시크교의 교리를 따르되 고빈드 싱의 개혁에 따르지 않은 이들을 가리켜 '사하지다리'(Sahajdhari)라고 부른다. 이들은 고빈드 싱의 5대 상징물을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한편 근대 이후 서구문명과의 충돌에 대한 반응으로 머리를 깎고 서양 문화를 적극 받아들인 시크교도들도 있는데, 머리카락을 깎은 시크들을 모나(Mona) 시크라고 하고, 반대로 머리를 기르는 시크들은 케사다리(kesadhari)라고도 부르고 있다.

고빈드 싱은 다음과 같은 교리상 원칙도 내세웠다.

  • 앞으로는 사람을 구루(지도자)로 받들지 않는다. 시크교 경전 그란트가 지도자 역할을 한다.[11]
  • 모든 시크교도는 동시에 모두 지도자이다.
  • 모두가 평등하다. 신분의 높고 낮음도 없고, 남녀노소의 불평등 또한 없다. 모든 이를 품어야 한다.
  • 아름다운 우주의 본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 뿐인 신이다. 우리는 그 하나됨을 명상하고 서로를 감싸안아야 한다.
  • 불필요한 의식도 필요 없고, 억압도 필요 없다. 격식을 따지지 말라.


2.3. 시크 왕국 건설[편집]


시크교와 힌두교를 탄압하고 박해함으로서 각 지방에서 일어난 강력한 반발로 인해 점차 무굴 제국은 쇠퇴하게 되고 19세기 초 '펀자브의 사자' 란지트 싱(Ranjit Singh)을 중심으로 뭉쳐 펀자브 지방에 시크 왕국을 건설하고 아프간 일부를 점령하기까지 하여 세력을 떨치며 인도를 정복한 영국과도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쟁을 영국-시크 전쟁이라고 한다. 시크교도들은 분전하였으나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살던 펀자브 지방은 다시 타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이때 시크교도들은 뛰어난 용맹함을 보였고, 이들과 싸웠던 영국군조차 시크교도들의 용맹함에 감탄할 정도였다. 특히 시크교도들로 구성된 기병 부대인 고르쿠라 사르다르는 영국군으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최고의 기병대"라면서 찬탄을 받았다. 몇가지 신통하지 않은 문제가 골칫거리가 되긴 했어도 일단 영국은 강제적으로 개종을 요구하지 않았기에 무굴 제국 때와는 달리 그럭저럭 평화롭게 유지됐으며 영국은 종종 시크교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두었다. 그러나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하고 종교에 의한 국가 분열이 이뤄지면서 서서히 시크교도들도 자기들의 나라를 가지려는 이념을 가지게 된다.

외세의 탄압 때문에 존폐 문제를 겪었기 때문인지 교리나 문화가 힌두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장이나 무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남자 신도들은 언제나 키르판(kirpan)이라는 단도칼을 휴대하고 다닌다. 인도군이나 경찰에서도 시크교도 출신의 군인이나 경찰이 많고 시크교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도 수상의 경호원도 전원 시크교도들이다. 해외에 진출한 시크교도들도 직업이 군인이나 경찰인 경우가 많다. 또 실질과 상업을 중시하기도 해서 인도에서도 중요한 기업나 공장들이 시크교도 소유인 경우도 많고 시크교도들이 인도경제의 중추 역할을 한다.


3. 역대 구루[편집]


괄호는 각 구루의 지도권 행사 기간이다. 초대부터 10대 고빈드 싱까지는 사람이고, 11대 구루 그란트는 사람이 아니라 경전이다.

  • 제1대 구루 나나크(1507~1539)
  • 제2대 구루 앙가드(1539~1552)
  • 제3대 구루 아마르 다스(1552~1574)
  • 제4대 구루 람 다스(1574~1581)
  • 제5대 구루 아르잔(1581~1606)[12]
  • 제6대 구루 하르 고빈드(1606~1644)
  • 제7대 구루 하르 라이(1644~1661)
  • 제8대 구루 하르 크리샨(1661~1664)
  • 제9대 구루 테그 바하두르(1665~1675)
  • 제10대 구루 고빈드 싱(1675~1708)
  • 제11대 구루 그란트 사히브 (1708~현재)[13]


4. 교리[편집]


'신은 하나'라는 개념은 시크교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서 '와헤구루(Waheguru)'라는 신을 믿는다. 이웃한 이슬람교와 힌두교 등의 개념들을 관용있게 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일신교이다. 육식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다른 종교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 중 하나다.

  • 3가지 원칙
Naam Japo: 신을 섬기는 노래를 하고, 신의 이름으로 명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Kirat Karo: 신이 주신 각자의 능력과 재능을 이용해 열심히 일하라.
Vand Chhako: 자신이 가진 것을 남들에게 베풀어라.

  • 5가지 도둑: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5가지의 도둑을 말한다. 이 5가지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시크교에서 말하는 다르마다.
Kaam: 정욕
Krodh: 화
Lobh: 탐욕
Moh: 집착
Hankaar: 오만

  • 5가지 덕목: Moksha[14]에 이르기 위해 개발해야 할 것들 중의 하나.
Sat: 진리
Santokh: 만족
Daya: 연민
Nimrata: 겸손
Pyaar: 사랑


5. 특징[편집]


제10대 구루 고빈드 싱(Gobind Singh) 때부터 남자 성을 전부 '싱(Singh, 사자),' 여자 성을 '카우르(Kaur, 왕자[15])'로 통일시킨 것이 유명하다.[16] 이유는 시크교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했는데, 원래 인도에서는 성씨로 카스트가 자동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구분이 불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시크교도들의 이름에는 무조건 이 이름이 들어가 있다. 유명한 예가 만모한 싱(Manmohan Singh) 전 인도 총리. 피지의 골프 스타 비제이 싱(Vijay Singh)도 펀자브계 시크교인이다.

그 외에도 5K라고 하는 특유의 장발과 수염[17], 면바지, 쇠 팔찌, 나무 빗 그리고 키르판(Kirpan)이라는 짧은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특징적. 시크교는 키르판에 대해 '용기와 약자에 대한 보호'[18]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물론 검술을 전문적으로 배운다거나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차고 다니는 것은 아니라 상징적 의미, 장식용이지만 시크교도와 만약 싸움이 나면 칼을 뽑아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 물론 칼은 어떻게 봐도 결국 흉기이기 때문에 여객기 내부 같은 공간에서까지 착용을 허가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시크교도들도 죽어도 차고 다녀야겠다 고집부리는 건 아니라 서방국가에 사는 시크교도들은 공공장소에서 키르판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5K는 다음과 같다.
  • 케쉬(Kesh): 몸 전체에 걸쳐 손대지 않은 머리칼, 신에 대한 헌신을 상징
  • 캉가(Kangha): 나무 빗. 청결을 상징
  • 카라(Kara): 쇠 팔찌, 신 앞에서 모두 평등함을 상징
  • 카체라(Kachera): 특정 종류의 면 바지. 정욕의 통제를 상징
  • 키르판(Kirpan): 단도 혹은 검. 교리를 지킨다는 의미. 자기 방어, 명예, 힘, 불굴의 정신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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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공군 원수 아르잔 싱. 터번을 썼다. 손에 원수 사령장을 들고 있다.

유명한 예가 달러 멘디. 심지어는 서방 국가들은 군 복무 중인 시크교도를 배려하기 위해, 시크교도는 규정 이외의 길이로 수염을 기르고[19] 군모 대신에 터번에 군 모표를 달고 군모 대신 쓸 수 있게 조치했다. 인도군, 미군, 영국군 사진에 종종 보이는 터번 쓴 군인은 대부분 시크교도. 2014년 기준 인도군 합참의장인 비크람 싱도 시크교도이다. 그래도 생명이 다급한 상황에서는 벗어도 허용이 되는 듯, 뉴질랜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는 소년을 지혈하기 위해 터번을 벗은 시크교 청년은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솔직히 이걸 가지고 뭐라 할 신이나 신자가 있기나 할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CaptRattansikh.jpg

미군에서도 시크교도들은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르도록 허락받았다. 다만 영연방 국가와 달리 비교적 최근에 허용된 것으로, 시크교도인 심라트팔 싱 미합중국 육군 대위가 2016년에 미 국방부를 상대로 시크교도의 관습인 터번과 수염 등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20] 연방대법원이 이를 허용하자, 3가지 심사[21]을 거친 뒤 2017년부터 허용하게 되었다. 대신 터번의 색은 육군 규정에 따른 정모, 베레모, 전투모의 배색을 차용하고, 터번 가운데에 해당되는 군모에 규정된 부착물을 달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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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에서도 시크교도들은 터번을 쓸 수 있다. 이는 영국군 근위대라 해도 예외가 아니라 시크교도들은 그 특징적인 모자가 아닌 터번을 쓰고 근무할 수 있다. 단, 배색은 원래 써야 할 모자의 색과 동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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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군에서도 터번을 쓴다. 사진의 인물은 할짓 싱 사잔(Harjit Singh Sajjan)으로, 2014년까지 캐나다 육군에서 중령(Lieutenant Colonel)으로 복무하다가 2015년 트뤼도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2015년 11월 4일에서 2021년 10월 26일까지 장관직을 수행하다 임기를 끝마쳤다.

군대가 이럴진대 경찰도 터번을 막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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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시경 소속 시크교도 경장의 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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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은 위의 터번을 사용하게 된다.

인도에선 소수 종교지만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파르시) 못지않은 부유층 종교로 명성이 자자하다. 인도군 상층부를 휘어잡은 것도 있지만[22] 교리 자체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펀자브 주에서 농업 관련으로 부를 얻은 시크교도들도 많고 다른 나라로 가서 사업에 뛰어들거나 군대로 가서 특수부대로 근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에서 추진한 녹색혁명 덕택에 얻은 부를 바탕으로 미국 등 서방 국가로 떠난 이른바 NRI(none residence india)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실제로 아요디아 사태나 할리스탄 독립운동 등 활동 자금은 이들에게서 나온다. 이들이 기부하는 할리스탄 자치운동 기금은 막대하여 황금사원에 누구라도 먹을 것과 잠자리를 내주는 기금으로 쓰인다. 그래서 황금사원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옴에도 먹을 것과 잠자리가 충당가능하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인도에선 시크교도 수는 정말 극소수 종교라고 터부시하나, 그래도 인도 인구(약 13억 추정) 최소 2%에서 최대 8%는 된다. 이는 적어도 2,400만에서 최대 9천만 명이 넘기에 무시할 숫자가 아니다. 인도 정치인이 소수라 별 것 아니라고 말하는 인도 내 이슬람 인구 역시 무려 1억 5천만 이상으로 인도는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이슬람 국가다. 만모한 싱처럼 주류 정치계에서 거물로 성장한 정치인도 있다.


6. 독립운동[편집]


현재 인도에서는 시크교도만의 독립 국가인 할리스탄을 요구하는 시크교 독립운동이 펼쳐지고 있어서 인도 정부의 골치를 썩히고 있다. 연방제 인도 하에서는 자신들의 라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독립운동을 막고자 1984년 6월 1일에 시크교 성지인 아칼탁트(암리차르 황금사원 안에 있는 건물) 공격을 명령했던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인도군 내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시크교 출신 장군들 반발에 부딪쳤다. 아두르 파즈한 싱 대장을 비롯한 시크교도 장군들은 외려 반발만 일으키고 내전을 부채질할 것이며, 나아가 "총리도 위험하다"며 반대했지만 인디라 간디 총리는 싱 대장을 비롯한 반대파를 해임하고 아룬 바이디야 대장과 시크교도로 유일하게 작전에 참여한 쿨딥 싱 브라르(1934~ ) 중장을 지휘관으로 황금사원에 군대를 보내니 이를 블루 스타 작전이라고 한다.

인도군은 블루 스타 작전으로 인도군 83명, 시크교도 492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뒤에 참전한 인도군 간부들이 10배 이상을 줄였다고 비난하면서 논란이 거세진다. 시크교 측은 대략 5천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고, 인도군도 3천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당시 전선에서 지휘하던 브라르 중장은 아칼탁트에 포격을 가하고 전차를 투입하는 바람에 시크교도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더불어 파즈한 싱 전직 장군이 예측한 대로 1984년 10월 31일 인디라 간디 총리는 시크교도 경호원인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이들은 무장해 있던 기관단총을 인디라에게 탄창이 텅텅 빌 정도로 쏴버렸고, 그래서 인디라 간디의 시체 사진을 보면 매우 끔찍한 수준이다. 시크교와 무관하지만 아들 라지브 간디도 스리랑카 내전에 간섭하다가 어머니가 죽은지 7년 뒤에 그 보복으로 타밀족이 자폭테러를 일으켜 시체가 반토막나는 끔찍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베안트 싱은 그 자리에서 다른 경호원들에게 사살되었고, 사트완트 싱은 부상을 당한 채로 잡혀 재판을 받고 1989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시크교 성직자들은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고 이 2명을 성자로 추앙하며 아칼탁트에 헌배했고 이 2명의 유족들도 자랑스러워했다. 이 암살 덕에 인도 각지에서 시크교도들이 마구 공격받으면서 이들도 저항하는 통에 추정으로만 시크교도 및 힌두교도를 합쳐 약 2~4만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런 시크교도 학살에 인도 정부는 외면했고 열받은 시크교 과격파들은 인도항공 182편 폭파 사건을 비롯한 테러로 맞대응하고 인도 정부가 국제적 비난을 당하면서, 부랴부랴 학살에 대하여 책임소재를 따지네 뒷북을 쳤다.[23]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도들을 극렬하게 탄압하고도 그들을 계속 경호원으로 쓴 이유는 시크교도들은 사람고기 빼고 죄다 먹는다고 할 정도로 육식과 운동을 권장하고 힘을 키우는 걸 장려했기 때문에 체격이 워낙 좋고 강해 오래 전부터 군인이나 경호원으로 선호된 까닭이다.[24] 안 그래도 인디라 간디에게 측근들은 "동포들의 죽음에 분노한 시크교도 경호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해고하라." 는 권유를 했으나,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경호원들은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 나나크보다 자신을 더 따른다고 할 정도로 자신의 경호원들을 믿는다고 하면서 거부했다. 인디라 간디는 총에 맞기 직전까지 경호원들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디라의 죽음을 재촉하고 말았다.

당시 블루스타 작전 사령관 바이디야 대장도 1986년 8월 10일 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가던 길에 시크교 특공대의 기관총 공격으로 80발이 넘는 총알에 맞아 즉사했다. 그리고 시크교도들에게 배신자로 몰린 브라르 중장대장으로 진급했으나 이후로 암살 위기를 7번이나 겪어 부상을 당했으며 이후 군복을 벗고 숨어살아야 했다. 심지어 그의 형제들 역시 그와 절연을 선언하고 돌을 던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난 2012년 10월 1일 런던에 아내와 같이 여행을 갔지만 거기서 살고 있던 시크교도에게 공격을 받아 칼에 목을 맞고 큰 부상을 입었다. 대수술 끝에 겨우 살았지만 후유증이 심해 남은 평생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범인들은 영국에서 살인 미수로 10년이 넘는 징역형에 처했는데 시크교 커뮤니티에서 이들을 영웅화하여 좋은 사식도 넣어주고 석방되면 돈이나 여러 모로 보상한다라고 시크교 신도들은 아주 좋게 볼 정도로 브라르는 악마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브라르는 2020년 현재 86살 고령으로 뭄바이 어느 곳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부상 여파가 아직도 남아서 거동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다수로 거주(약 3천만 명)하는 펀자브 주가 바로 파키스탄펀자브 주와 국경을 맞닿고 있는데, 종교 특성상으로도 파키스탄과 친하게 지내기 어렵기에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에도 시크교도들이 많이 활약했다. 하지만 펀자브 주는 인도 전체 점유율 25%, 20%, 콩 및 여러 농작물 상당수의 재배를 책임지는 곳이라 인도 정부로선 펀자브를 중심으로 하는 할리스탄(시크교도들의 나라 이름) 독립을 인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시크교도와의 분쟁은 이 일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잦아든 편이며, 시크교도 정치인 만모한 싱이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인도의 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시크교도들은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차별을, 무슬림들에게는 박해를 받아온 비운의 집단이다. 종교 관용 정책을 펼쳤던 무굴 제국악바르 대제 이 후로 시크교도들은 인두세를 내고, 학살당하는 등 이슬람 정권 내에서 주요한 박해의 대상이었다. 이 때는 마찬가지로 고통받았던 힌두교도들과 굵직한 갈등은 없었지만, 문제는 이후 인도의 독립 과정에서 발생한다. 영국의 인도인 분리 통치 정책에 의해 이슬람과 힌두교 두 축으로 나뉜 인도의 대다수 집단들은 후에 성장하여 독립단체로 변모하여, 독립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크교도들은 그들에 비해 소수였고, 일부 지역(주로 펀자브)에 집중하여 세력을 형성했으므로[25]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그 결과 무슬림과 힌두교도가 각각 파키스탄과 인도로 독립하는 와중에도 시크교는 힌두교 중심의 인도에 편입되고 말았다.

이렇게 편입된 시크교도들은 남인도의 드라비다 인종들과 마찬가지로 북인도 힌두인들 중심의 인도 공화국에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이 것이 할리스탄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할리스탄 독립 운동은 펀자브 주에 대대적으로 실시된 녹색 혁명으로 큰 경제력을 얻은 시크교도들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으나, 결국 아요디아 사태를 촉발해 힌두교와 시크교는 극단 대립상황에 빠진다. 이 대립상황은 1994~1995년 경에서야 진정되는데, 사실 대다수 시크교도들은 장기간에 걸친 분쟁에 지쳐 있었으며, 무장투쟁과 테러 등은 시크교의 전통 무장조직인 칼싸 조직인 아깔리 달 내 강경파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친 시크교 평신도들의 지원 거부로 겨우 진정된 것이니 시크교 평신도 입장에선 억울할 만도 하다.

또한 아요디아 사태와 이후의 할리스탄 독립운동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진 시크교도 사냥 과정에서 시크교도들이 겪어 온 비극도 잘 알려져 있다. 시크교도들은 그들의 긴 머리와 수염, 터번을 보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힌두교도들을 피해 종교적인 이유로 평생 지켜왔던 터번을 벗고 수염과 머리를 깎아야 했으며, 주기적인 힌두교도들의 시크교 지역 레이드를 피해 재산과 토지를 버리고 도망가야 했다. 이 시기에 델리와 수도 뉴델리로 도망간 시크교도들의 수효가 얼마나 많았는지 델리의 문화가 크게 변화하였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에 90~00년대만 하더라도 델리의 릭샤왈라[26]는 거의 대다수가 시크교도였을 정도이니 그 참상은 말로 다 못다할 정도였다고 하겠다. 또한 시크교도들에게 아요디아 사태와 뒤 이은 시크교도 대학살 사건들은 절대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7. 성지[편집]


시크교의 성지는 인도 암리차르에 위치한 암리차르 황금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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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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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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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사진

한국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방문기에 따르면 해당 사원은 카스트는 물론 인종, 종교 등에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식 아래 누구나 갈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무료 식사와 잘 곳이 제공되고 외국인과 내국인의 숙소가 구분되어 있다. 다만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을 씻은 후 맨발로 다녀야 하며, 머리를 터번이나 적어도 모자로 가려야 하고 가방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식사는 영상 속에서는 커리, , 밥이 기본적으로 제공되며 후식으로 짜이도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영상 속에서 펩시 콜라와 코카콜라를 판매하는 곳도 볼 수 있는데, 펩시 콜라는 5루피, 코카콜라는 6루피(약 100원)로 안 그래도 물가가 저렴한 인도에서 더 저렴하게 판다.

8. 어록[편집]


ਬੋਲੇ ਸੋ ਨਿਹਾਲ, ਸਤਿ ਸ੍ਰੀ ਅਕਾਲ!볼레 소 니할! 삿 스리 아깔

말하는 자 얻으리라, 위대하신 영원한 진리여![27]


ਵਾਹਿਗੁਰੂ ਜੀ ਕਾ ਖਾਲਸੇ와헤구루지 까 칼사
ਵਾਹਿਗੁਰੂ ਜੀ ਕੀ ਫਤਿਹ와헤구루 지 끼 파테헤

신에게 칼사 교단이, 신에게 승리가 있느니라!


ਇੱਕ ਓਅੰਕਾਰ, ਸਤਿ ਨਾਮੁ익 온카르 사트남

신은 하나다, 영원한 이름이여



9. 기타[편집]


  • 최대 신자 국가는 당연히 인도이며, 2위는 식민지 시절의 본국이었던 영국, 3위는 캐나다이다.
    • 미국으로 잘 가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에는 인도계 이민자들이 전통적으로 많았으며, 더 나아가 캐나다가 종교에 대해서 관대하기 때문이다. 캐나다는 다문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운용하고 있으며 당연히 종교도 여기 들어간다. 또한 '영국식 정교분리'를 사회정책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단 퀘벡의 경우 라이시테가 적용되므로 예외)
    • 캐나다 사회지도층에는 시크교도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2017년 캐나다 정당인 신민당의 당수로 시크교도인 자그미트 싱이 선출되었다. 또한 하르지트 싱(캐나다 자유당 소속)이 2015 - 2021년에 국방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 사회지도층이 시크교도인 것에 더불어, 캐나다의 대도시에는 security guard가 시크교 터번을 쓰고있다는 클리셰가 있다. 영화 Turning Red에서도 이 클리셰가 사용되었다. 미국의 덩치좋은 흑인 클리셰와 비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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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나다에서는 1960년대 이후 시크교도 공무원(경찰/군인)의 터번 착용이 허용되었다.[28] 단 2013년 이후 퀘벡이 강경 라이시테 노선을 타면서 터번을 착용하는 것이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성'을 침해한다는 주장으로[29] 퀘벡 경찰과 공무원은 터번 착용이 금지된다. 단 군인의 경우 연방정부의 관할이기 때문에 여전히 터번 착용이 가능하다.
  • 서양에서는 시크교도들을 무슬림 이나 힌두교[30]으로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터번을 쓴 이슬람 경찰이 미국 경찰이 될 수 있냐"는 불만을 하원의원이 지적했다가 "무슬림이 아니라 시크교도인데도 모르느냐"는 비아냥에 데꿀멍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미국은 정교분리 국가이고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기 때문에 무슬림이더라도 미국 경찰이 될 수 있다. 뉴욕 경찰청을 배경으로 하는 블루 블러드에서도, 수배 중인 이슬람계 용의자를 찾던 경관이 시크교도를 무슬림으로 착각하고 육탄전을 벌여 체포했다가 인종차별 경찰로 비난받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알고 보니 그 시크교도가 뉴욕 대학교 의대 교수였다는 게 함정... 그 경찰은 찍소리 못하고 비난받을 수밖에. 시크교 사원을 종종 모스크로 착각해 테러를 당하는 시크교도들도 간간히 나타나는 실정이며, 미국에서도 9.11 테러가 발생하고 가장 먼저 살해당한 증오범죄의 피해자가 터번을 쓴 시크교도 남성이었을 정도로 애꿎은 피해를 입고는 한다.[31]

  • 시크교도인들은 혐오발언이나 시비 등에 휘말리는 등의 상황에서 "나는 무슬림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최대한 차분히 상황을 모면할 것을 교육받는데, 이는 무슬림이 아니라고 설명하여 위기를 모면하면 "무슬림이면 차별받아도 된다"고 은연 중에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대표적으로 캐나다신민당 대표 자그미트 싱의 행사에 한 여성이 난입해 "캐나다에 샤리아 율법을 들일 생각이냐"며 연설을 방해하자 싱은 자신이 무슬림이 아니라고 일절 말하지 않고 지지자들에게 "사랑과 존중을 보여주자"고 대답하여 해당 여성이 알아서 퇴장하게 만든 사례가 있다. #




  • 엠파이어: 토탈 워에서는 '펀자브' 라는 마이너 팩션으로 등장한다.[32] 전용 유닛도 없고 사실상 구색 맞춤용이지만 시크교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라타 연합으로 펀자브 지역을 점령하면 펀자브에서 시크 보병계열 유닛을 훈련할 수 있다.


  • 2015년에 인도에서 '나나크 샤 파키르'라는 영화를 찍은 적 있는데,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 나나크의 전기를 담은 것이다. 그런데 영화 상영 전부터 시크교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시크교 교리에서는 우상을 만드는 행위를 원칙적으로 엄금하고 있어서 그림의 형태로 숭배하는 것, 나아가서 인간의 형태로 그를 묘사하는 것 또한 금지하고 있는데 그 교리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영화 제작사 측에서는 "이 영화는 전통의 규칙을 지키고 있다. 구루 나낙은 단지 컴퓨터 그래픽에 의해서만 묘사되었으며 배경에서 멀리, 한 줄기 빛으로 에워싸여져 있다."고 밝혔으며 실제로 영화에서 구루 나나크는 하얀색 빛으로 감싸져 있어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시크교도들은 이것은 궤변이며 이는 구루 나나크를 인간 형태로 복제한 것에 불과하므로 교리 위반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구글 플레이나 애플 스토어를 들어가보면 높은 평점대임에도 1점 비율이 굉장히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대개 시크교인들이 영화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준 것들이다.트레일러

  • 인도 본토를 제외한 다른 인도 문화권에서는 시크교의 지위가 인도 본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특히 파키스탄의 경우 이슬람 근본주의가 한창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절에 시크교도들이 엄청난 탄압을 받은 바 있다.

  • 서울이나 부산에도 인도계 시크교 신자들이 꽤 있는데 대개가 유학생이나 요리사로 들어온 경우이다. 하지만 캐나다와는 다르게 대놓고 시크교식 터번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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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 온카르(ਇੱਕ ਓਅੰਕਾਰ)', 곧 '신은 하나다.'라는 뜻으로 구루 나낙 시대부터 쓰였으며 시크교 종파를 가리지 않고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표어이다.[2] 시크교의 상징 문양인 '칸다(ਖੰਡਾ)'는 그 자체로 인도에서 쓰이는 양날검의 이름이기도 하다. 해당 문양은 칸다와 차크람, 후술할 키르판을 합친 것이며 무력을 중시하는 시크교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주로 주류파 시크교에서 사용되는 상징이다. 유니코드에서도 U+262C(☬)에 할당되었다.[3] 대다수의 인구는 인도,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과 영연방 국가에 분포한다.[4] Xí kè jiào[5] 한국한자 독음으로는 석극교다.[6] 2020년대 기준 인도 인구의 약 2% 정도 된다.[7] 터번의 경우 아마도 오사마 빈 라덴이 터번을 착용한 사진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무슬림식 옷차림이 터번이라는 오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시크교도들이 터번을 매는 방식은 무슬림들이나 힌두교도들이 두르는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특색이 있기 때문에 몇 번 본다면 구분하기 쉽다.[8] 모스크와 비슷하게 생겼다.[9] 이러한 배경은 그와 평생을 같이 떠돌며 함께 지냈던 무슬림 친구 마르다나의 영향이 컸다. 더불어 구루 나나크는 힌두교도였다. 당시 이슬람이 인도에서 확장세를 펴면서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이 서로 죽일놈 보듯 배척하고 있을때 이러한 친구 관계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였다.[10] 관대함을 모토로 하는 교리도 교리지만 비교적 근래에 나와서 입지를 다져야 하는 입장이기도 해서, 잘 대해주면 좋은 거 알아보고 알아서 종교를 바꿀 거라 생각하는 측면도 있기에 다른 종교에도 관대한 편이다.[11] 이는 구루의 지도권을 둘러싸고 시크교의 내분/분리가 일어나는 것을 꺼린 까닭이었다. 실제로 그때까지 시크교는 지도권을 둘러싼 갈등을 여러 차례 겪었다. 운 좋게 어찌어찌 다 무마되긴 했지만...[12] 그의 재임시기인 1604년 시크교 경전 아디 그란트가 최초로 완성된다.[13] 시크교의 성서로 최종적이자 유일한 구루이다.[14] 일종의 깨달음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Nirvana)과 비슷한 개념[15] 현대의 의미는 공주이지만, 당시의 의미는 공주가 아니라 왕자이다. 산스크리트어 Kumĝra에서 온 Kuwar라 왕자라는 뜻이고, Kuwari나 Kunari가 공주의 의미인데, 동시에 미혼이라는 의미역시 포함하고 있었기에, 혼인여부를 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Kuwar, 즉 Kaur로 한 것.[16] 싱(Singh)은 라지푸트인, 구르카, 힌두 전투계급이 자주 사용하던 성이기도 했다. 카우르도 라지푸트에서 자주 쓰던 성이었다. 따라서 싱이나 카우르가 성인 사람이 반드시 시크교도인 것은 아니다. 즉 시크교 남성은 무조건 성이 '싱'이지만, 성이 '싱'인 사람이 모두 시크교도는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배우 란비르 싱은 시크교 신자가 아니고 힌두교 신자다.[17] 시크교 남자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선 안 된다.[18] 할사(Khalsa; ਖ਼ਾਲਸਾ)라고 하는 교리이다. '무기와 가마솥을 통한 승리'Deg Tegh Fateh; ਦੇਗ ਤੇਗ਼ ਫ਼ਤਿਹ)라는 표어로 대표된다.[19] 많은 이들의 편견과 달리, 이슬람은 남성의 수염 기르기가 교리상 강요되지 않으므로(탈레반 등이 수염을 기르도록 강제하는 것도 그냥 지역 토착 풍습일 뿐이라 이단이라 욕먹고 있다.), 무슬림 장병은 미군에 규정된, 콧수염 이상의 수염은 기를 수 없다.[20] 당연히 대위 본인은 웨스트포인트에서는 기존 규정대로 머리와 수염을 깎았고 터번도 쓰지 못했다.[21] 1. 시크교의 관습이 전우와의 통합을 저해하지 않는지 / 2. 수염을 기르고 터번을 쓴 상태로 방독면 착용에 문제없는지 / 3. 터번을 쓴 채로 방탄모 착용이 가능한지. 이 중 2는 비슷한 고충을 가지고 있던 군종 랍비(!)들도 가세하여, 결국 함께 가스실습실에서 직접 방독면을 착용하는 시험을 치렀고, 3도 위 사진과 같이 밴대나 비슷하게 생긴 작은 터번을 쓴 채로 방탄모를 쓰는 것으로 통과했다.[22] 2012년 11월 기준으로 인도의 육군 참모총장인 바크람 A.싱 대장이나 해군 참모부총장 자히르 싱 나야갈리 중장, 전직 공군 참모총장 J.J. 싱 대장을 비롯한 이들도 죄다 시크교도이며, 인도 전 인구 5%도 안 되는 시크교도들이 인도 장교 및 장군층의 30%를 차지한다는 통계까지 있다.[23] 시크교는 테러를 일으켰다는 비판은 피할수 없긴 했으나, 시크교가 당한 학살이 너무 대규모인지라 학살을 방치한 인도정부를 비난하는 여론이 더 높아졌다. 9.11 테러 이후에 이런 사건이 낫다면 시크교가 독박을 썻겠지만, 당시에는 '그나마' 테러에 관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크교가 어느정도 이해를 받았고 인도정부에 국제적으로 더 많은 비난이 쏟아지게 되었다.[24] 성룡 영화 프로젝트 A를 보면 홍콩 총독부를 지키는 군인도 터번을 쓴 시크교도가 나오는데,(극중 대사도 없고 총독부 건물을 둘러보다가 성룡이 몰래 잠입한 걸 보고 놀라는데 홍콩 경찰간부인 원표가 그냥 보초나 서라고 명령해 그냥 간다.) 제대로 고증에 맞는 묘사다. 실제로 시크교도들은 영연방 여기저기서 중요시설 경호담당으로 자주 등용됐다. 왜 그런가 하면 고기를 가리지 않고 먹는데다가, 다른 종교의 강압에 맞서고자 군사훈련이라든지 운동을 장려하기에 무예 및 총기도 잘 다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구르카와 달리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방어 및 예방책으로 맞서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런 점으로 경호담당으로 딱 알맞았기에 지금도 홍콩, 싱가포르아시아의 옛 영국 식민지이던 국가를 가보면 터번 쓴 시크교도들이 경호원이나 특급호텔 및 박물관이나 여러 큰 건물에서 경비원 등으로 자주 보인다. 자이나교도들이 채식하고 머리를 써가면서 경제를 잡은 것과 대조적이다. 인도의 지하철이나 헬스장에 가보면 시크교도들의 크고 아름다운 위엄을 체감해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조그마한 힌두교도들과 대대적으로 한판 붙었던 세포이 항쟁 때 왜 수적으로 우세한 힌두교도들이 발렸는지 납득이 간다.[25] 시크교도들은 사실 영국군에 복무하는 등 독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인도는 넓은 국토와 험준한 데칸 고원의 존재 때문에 고대 이후 통일 국가에 의해 통치된 시기가 매우 짧아서 인도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적 유대는 없다시피 하고, 더욱히 힌두교와 시크교는 더더욱 공감대가 적다. 힌두교도끼리도 분열되고 싸우던 걸 초대 수상 자와할랄 네루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이 탱크를 몰고 가서 진압하고, 마하트마 간디라는 키워드로 간신히 모은 것이 인도 공화국 초기의 성립과정이었다.[26] 인도하면 떠오르는 자전거 택시나 오토바이 택시기사를 뜻한다.[27] 'ਸਤਿ'은 산스크리트어의 'सत्य'에서 온 말로 '진리, 올바른 것'을 의미한다. 'ਸ੍ਰੀ'는 존경심을 드러내는 단어로, 지칭하는 대상이 위대하다고 생각될 때 붙는다. 'ਅਕਾਲ'은 '불멸의, 영원한'을 뜻하나 여기에서는 위대하신 스승을 뜻하는 와헤구루(ਵਾਹਿਗੁਰੂ), 즉 '신'을 의미한다.[28] 미국에서도 뒤늦게 1987년 시크교도 경찰이나 군인들은 모자 대신 터번을 쓸 수 있도록 허가를 얻었다.[29] 라이시테에 따르면 공무원은 착의에 있어서 종교적 지향을 드러낼 수 없다. 시크교도가 터번을 착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톨릭 교도도 십자고상 목걸이를 착용할 수 없다.[30]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에 등장하는 인도인들이 시크교식 터번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시크교인이 쓰는 터번의 원래는 펀자브 지방을 포함한 북인도인데 인디아나 존스에 등장하는 인도는 정글이 존재하하는 것을 보아서 남인도나 동인도로 추정된다. 드라비다인이 주류인 남인도는 머리쓰기를 하지 않는다.[31] 서양인이 무슬림=터번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 이유는 18세기 당시 유럽인들이 근대 페르시아 문화를 지녔던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에서 무슬림을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12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무슬림을 안 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십자군 전쟁이 13세기 말에 끝나고 17세기 말까지 대략 400년동안 무슬림을 대중적으로 안 접했기 때문에 그 당시 무슬림들의 특징을 잊은 상황이었다. 물론 12세기 일부 아랍 무슬림들도 근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으로 터번을 착용하고 있었다. 20세기 초부터 이슬람주의가 성행하면서 근대 페르시아 문화가 무슬림 사이에서 말소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서양, 동아시아에서는 무슬림=터번이라는 이미지가 존재하고 대중매체에서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32] 시작할 땐 존재하지 않는다. 보고 싶다면 펀자브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도록 유도하여 반란군이 지역을 점령하고 팩션으로 성장하게 해주면 된다. 다만 이 게임 최종보스인 마라타 연합이 워낙 강한지라 구경하기도 힘들고 팩션으로 성장해도 잠깐 한눈 팔면 멸망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