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인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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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목록
2.1.1. 국왕의 아프리카 소총연대
2.1.2. 서아프리카 전선군
2.1.3. 서인도 연대
2.1.5. 영국령 서인도 제도 연대
2.2.2. 스파이
2.2.4. 티라이외르
2.2.4.1. 세네갈 티라이외르
2.3.1. 레굴라레스
2.3.2. 티라도레스 데 이프니
2.4.1. 슈츠트루페
3. 같이 보면 좋은 문서
4. 참고 자료
4.1. 웹사이트
4.2. 도서
4.3. 논문



1. 개요[편집]


Colonial Troops

식민지 사람들을 모아서 만든 군부대. 당연히 식민지를 가진 식민제국에만 존재했다.

식민제국의 입장에서 식민지인으로 부대를 만들면 여러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식민지인은 유럽인보다 적은 돈을 줘도 되었다. 식민지인들은 유럽인이 버틸 수 없는 현지 기후나 풍토병에 익숙했다. "훨씬 더 중요한" 본토인들의 목숨을 아낄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어떤 경우에는 적군에게 자신들이 "잔인한 야만인"을 상대한다는 심리적 공포를 안겨줄수도 있었다.[1] 물론, 이를 위해서는 식민지인들을 믿을 수 있어야 했다.

식민지인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국가의 군대에 들어가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2], 인정받기 위해, 약속을[3] 받고, 가업이라, 그냥 끌려와서 등등.

본래 식민지인 부대는 식민지 내 치안 유지 임무 - 다르게 말하면 저항 운동 진압 임무에 투입되는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20세기가 시작되며 대전쟁이 벌어지자, 열강들은 식민지인 병사들을 세계 각지의 전장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이들의 용맹함을 칭송하는 동시에 잔혹하고 야만적이라고 폄하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식민제국들이 무너지며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일부는 피식민국의 군부대로, 일부는 식민국의 군부대로 남아있다.


2. 목록[편집]



2.1. 영국[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식민지인 부대를 적극적으로 서부 전선에 투입하지 않았다. 식민지인에게 총을 쥐어주고 백인을 쏴죽이게 하는 것은 식민 통치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1.1. 국왕의 아프리카 소총연대[편집]


King's African Rifles, KAR. 1902년 영국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들이 치안 유지를 위해 창설한 연대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독일령 아프리카의 슈츠트루페를 상대로 싸웠다.

전간기에는 사이드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이 이끄는 데르비쉬 왕국을 멸망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동아프리카의 이탈리아군, 마다가스카의 비시 프랑스군, 버마의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뤘다.

전후에는 말레이 비상사태와 마우마우 봉기 진압에 투입되었다.

여기 출신 유명인사로 이디 아민이 있다.


2.1.2. 서아프리카 전선군[편집]


West African Frontier Force, WAFF. 나중에는 왕립(Royal)이 붙어 왕립 서아프리카 전선군(RWAFF)이 된다.


2.1.3. 서인도 연대[편집]


West India Regiments, WIR. 영국령 서인도 제도 출신자로 이루어진 여러 연대들.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인 1795년 여덟 연대가 창설되며 처음 등장했다. 이때 모병된 이들 중에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미국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머릿수가 부족해 사탕수수 농장이나 노예선에게서 노예를 사 인원을 메꿨다고. 이 노예들은 1807년 노예제 폐지와 함께 노예 위치에서 해방된다.

1800년대에는 서인도 제도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미영전쟁에도 참전했다. 하필이면 뉴올리언스 전투에.

1870년대에는 대서양을 건너 아샨티 제국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후 부대 절반은 아프리카에, 나머지 절반은 서인도에 있는 방식으로 지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아프리카 전선과 중동 전선에서 싸웠다.

1927년 마지막 서인도 연대가 해체되었다. 1958년 서인도 연방이 형성되며 부활했지만 1962년 연방 해체와 함께 다시 사라졌다.


2.1.4. 인도 제국군[편집]


British Indian Army. 대영제국의 식민지인 인도 제국의 군대.

평시에는 20만 명 규모였으나 인도의 무지막지한 인구 수(...)에 힘입어 제1차 세계 대전에는 175만 명, 제2차 세계 대전에는 250만 명 규모로 팽창하여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의 병력 수급 및 전쟁 수행에 큰 역할을 했다. 다만 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립 약속을 믿은 인도인들이 국가적으로 모병에 응했으나, 2차 세계대전에서는 협력을 거부하는 힌두교도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슬람교도와 토후국, 소수민족들이 대부분의 병력을 댔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주로 식민지 전선과 중동 전선에서 싸웠다. 높으신 분들의 지지에 힘입어 두 개 보병 사단과 두 개 기병사단이 서부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몇 년 후 중동 전선으로 보내졌다. 여담으로 이 때는 카스트별로 부대가 분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충병이 필요한 곳이 아니라 소속되어야 하는 곳으로 갔다고.[출처]


2.1.4.1. 구르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구르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5. 영국령 서인도 제도 연대[편집]


British West Indies Regiment, BWIR.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전선, 중동 전선, 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었던 부대. 1915년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지원자들로 창설되었었다.

영국군은 이들을 전투 부대가 아닌 지원 부대로 운용했다. 서인도 연대 병사들은 참호를 파고 도로와 진지를 건설하고 들것과 짐을 나르며 영국의 전쟁 수행을 지원했다. 다만 중동 전선에서는 전투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18년 12월, 이탈리아 타란토에 주둔하던 BWIR 9대대가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영국군의 푸대접과 전쟁이 끝나고 전역을 기다리면서도 계속 노역을 해야한다는 것에 분노한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반란 진압에는 4일이 걸렸다.


2.2. 프랑스[편집]


식민지인에 대한 병역 정책은 모병제였지만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병사가 적을 경우에는 서아프리카,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강제 징집을 할 수 있는 법안이 1912년에 제정되었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식민지인 부대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전쟁 전부터 식민지인 부대의 활용을 주장한 "도살자" 샤를 망쟁(Charles Mangin) 장군이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독일에 비해 적었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흑인군(Force Noire)의 창설을 주장했던 것. 전투민족 운운과 아프리카인은 신경계가 발달되지 않아 공포와 고통을 유럽인보다 덜 느끼더라라는 소리는 덤.

이에 대한 독일의 반응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전쟁 전 프랑스가 아프리카인의 유럽 내 복무를 두고 설전을 벌이자 독일은 "우릴 상대로 야만인을 내보내겠다고?"라며 불쾌해했다. 독일의 이런 반응은 전쟁 중에도 계속 유지된다. "프랑스놈들이 유럽에 야만인을 풀었다! 강간, 학살, 시체 훼손이 판친다!"라는 식의 선전으로. 프랑스 군부도 심리전의 일환으로 이러한 선동에 일조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도 병력이 동원됐지만, 프랑스 지휘부는 동남아시아 인들의 체구가 작아 전투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전투에는 거의 투입돼지 않았고 주로 참호/진지 공사, 군자재 운반 등의 노역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군을 보낼 때도 식민지인 부대가 동원되었다. 독일인들은 이 흑인 병사들이 프랑스가 독일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 고의로 불러온 강간범이자 야만인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에서 이 일은 "검은 굴욕(Die Schwarze Schande)"이라고 불리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 군대 중 많은 수가 식민지인 부대였다. 그런데 파리가 해방된 후 자유 프랑스군은 식민지인 부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자리를 현지에서 모집한 프랑스인으로 채우는 "표백(Blanchiment)"을 벌였다.

인도차이나 전쟁알제리 전쟁 같은 전후 식민지 전쟁에서도 프랑스 식민지인 부대가 동원되었다.


2.2.1. 구미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구미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2. 스파이[편집]


Spahi.

알제리, 모로코 , 튀니지 등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현지인들로 조직한 경기병 부대로 이름의 유래는 오스만 제국의 기병인 시파히이다.

현재 프랑스에는 제1 스파이 연대(1er régiment de spahis, 1er RS)가 남아있다. 프랑스인으로 이루어졌으며 말이 아니라 AMX-10RC을 타고 다니지만 열병식 같은 때에는 원조 스파이들처럼 망토를 두르고 나온다.


2.2.3. 주아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주아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4. 티라이외르[편집]


Tirailleurs. 본래는 척후병을 뜻하는 단어지만 프랑스 내 식민지인 부대를 가리키는데도 쓰인다.

세네갈 티라이외르, 인도차이나 티라이외르, 튀니지 티라이외르, 알제리 티라이외르[4], 모로코 티라이외르, 마다가스카르 티라이외르 등 여러 티라이외르들이 있었다.

모로코 티라이외르는 1912년 프랑스령 모로코 출신자들로 창설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수아송 전투, 베르됭 전투 등에 참전했다.

현재도 프랑스군에 티라이외르 부대인 제1티라이외르연대(1er régiment de tirailleurs, 1er RTir)가 남아있다. 1994년 북아프리카 출신 티라이외르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창설했다고. 물론 소속 병사들은 죄다 프랑스인인 기계화보병 부대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면 행사 같은 곳에서 19세기풍 티라이외르 군복을 걸치고 나온 사진이 나온다.


2.2.4.1. 세네갈 티라이외르[편집]

Tirailleurs sénégalais.

티라이외르들 중 제일 잘 알려진 부대인 세네갈 티라이외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내 프랑스 식민지 출신[5] 흑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다. 세네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세네갈에서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 이 부대는 1857년 아프리카 정복을 위해 창설되었다.[6]

아프리카 정복 시기에는 세네갈 티라이외르 대부분이 현지에서 구매한 노예들이었다. 프랑스는 1848년에 노예제를 폐지했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에는 여전히 노예제가 남아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예제 폐지에 따라[7] 노예 구매를 중단한 적도 있지만 병력 충당이 안 되어서 다시 노예를 사들이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34,000여명의 세네갈 티라이외르가 축축한 참호 안과 질척한 무인지대에서 프랑스인들을 위해 싸웠다. 이는 프랑스군의 1.6%였다. 이들은 인종적 편견에 따라 이상적인 충격부대로 여겨져 공세의 선봉에 섰으며 이프르, 베르됭, 니벨 공세와 같은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다만 추위에는 약해 겨울이 되면 프랑스 남부로 보냈다고.

상술했듯이 1912년부터 부분적 징병제가 시행되었다. 인력이 급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노예 사냥을 방불케하는 인간 사냥까지 벌어졌다고. 물론 아프리카인들도 신체 훼손, 도주, 무장 봉기 등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1918년에는 블레즈 디아뉴[8]를 내세워 대규모 모병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는 강압적 방법이 아닌 참전자에게 프랑스 시민권 부여, 학교 건설 등과 같은 회유책이 사용되었다. 이 부분적 징병제는 1919년에 국민개병제로 바뀐다.

세네갈 티라이외르는 제2차 세계 대전에도 동원되었다.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 방어에도 투입되었는데, 독일군은 '열등한 인종'인 흑인으로 이루어진 이들을 포로로 대우하지 않고 생포하자마자 그냥 총살시켜버리기도 했다. [9]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인 레오폴 상고르도 이때 프랑스군 소속 티라이외르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기 직전에 이전에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 장교가 상고르 일행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고 "쟤네들을 처형하면 위대한 아리아인인 당신들의 명예만 실추된다"고 독일군을 설득한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포로로 잡힌 티라이와르들은 독일과 프랑스에 세워진 수용소로 보내져 연합군에게 해방되기 전까지 노역을 해야했다.

1944년 세네갈 티아로예(Thiaroye) 기지의 세네갈 티라이외르들이 백인 병사들과 같은 임금, 체불된 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자유 프랑스군은 이를 반란으로 간주하고 사격을 가했다. 프랑스측이 인정한 이 사건의 사망자 수는 35명이지만 생존자들은 300여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바나니아(Banania)라고 프랑스판 제티 같은게 있는데 여기 포장지에도 세네갈 티라이외르가 그려져있다. 본래는 피진으로 "맛있다"하는 문구도 적혀 있었지만 인종차별적이라는 이유로 까이다가 2006년부터 달지 않게 되었다고. 그래도 웃고있는 티라이외르는 남아있다.


2.3. 스페인[편집]


스페인의 모로코인 부대는 1936년 발발한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전선 측의 주력부대 중 하나가 되었다.[10] 원주민 남자 7명 중 1명이 스페인에 건너갔다고 할 정도로 많은 수가 북아프리카인 부대에 입대했다.

전쟁 초기에 스페인 국민전선의 모로코인 병사들은 스페인 남부에서 약탈, 학살, 강간을 벌였다. 역사가 María Rosa de Madariaga와 Sebastian Balfour는 이러한 행위가 모로코 내 저항세력을 진압할 때 하던 행동이 그대로 스페인으로 건너온 것이라 주장한다.[11] 이러한 행동은 공화파 민병대원들에게 "무어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심어주었다. 당연하겠지만, 공화파에게 포로로 잡힌 모로코인 병사들이 포로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일도 흔했다.

공화파 측에서는 "스페인과 기독교를 위해 싸운다던 반란군 놈들이 이슬람 믿는 무어인들을 데려와 스페인 사람들을 죽인다!"라며 국민파의 북아프리카인 동원을 공격하였다. 국민파는 이 문제를 두고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힘을 합쳐 유대-프리메이슨-무신론자-빨갱이들을 몰아내야한다! 이건 성전이다!"라고 선전하였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스페인의 지도자가 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 식민지인 부대의 지휘관으로 있으서 전공을 올리고 경력을 쌓았다. 프랑코는 모로코인으로 구성된 경호 부대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2.3.1. 레굴라레스[편집]


Fuerzas Regulares Indígenas. 원주민 정규군. 보통 레굴라레스(Regulares)라고 줄여 부른다.

스페인령 모로코의 현지 모로코인들을 모집해 편성한 부대로 1911년 창설되었다.

1934년 스페인 외인부대와 함께 아스투리아스 광부 파업 진압에 투입되었고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국가주의파의 정예부대로 크게 활약했다.

1956년 모로코 독립과 함께 대부분이 모로코로 넘어갔지만 현재도 레굴라레스 연대 두 개가 남아있다.


2.3.2. 티라도레스 데 이프니[편집]


Tiradores de Ifni. 이프니 소총수.


2.4. 독일[편집]



2.4.1. 슈츠트루페[편집]


Schutztruppe

독일 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지키던 부대. "아스카리"[12]라고 불리는 원주민 병사들을 사용했다.

Schutz는 보호를, Truppe는 부대를 뜻한다. 즉 방위대.

이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 항목 참조.


2.5. 이탈리아[편집]


주로 에리트레아인과 소말리인, 리비아인을 채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탈리아군 식민지인 부대는 아프리카 전선에서만 싸웠다. 1915년에 2,700명의 리비아 병사들을 이탈리아로 데려왔지만 너무 많은 수가 폐렴으로 죽어서 도로 돌려보냈다고.[출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주둔 중이던 26만 명 규모의 이탈리아군 중 18만 명이 에리트레아, 소말리아와 몇 년 전 전쟁으로 점령한 에티오피아 출신이었다.

이중에 소말리아에 살던 한 병사는 이탈리아가 철수한 후 다시 이탈리아를 위해 복무하려고 총과 군복을 관리하면서 살다가 1990년대에 소말리아 내전으로 이탈리아군이 다시 소말리아에 UN군으로 파병돼서 진지공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자, 할아버지가 되었는데도 군복과 총을 찾아서 들고 바로 달려가서 다시 이탈리아군으로 복무하게 해달라고 사정하였다. 사연을 들은 이탈리아군 지휘관은 할아버지가 부대의 마스코트로 이태리군이 철수할 때까지 복무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골 때리게도 이 할아버지는 국기 게양 때마다 주변의 이탈리아군의 만류에도 항상 "두체 만세! 국왕 만세! 이탈리아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13]


2.6. 일본[편집]


대한제국 강제병합 이후 이왕가로 격하된 조선왕실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조선보병대 및 조선기병대가 존재했으나 사실상 의장대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유지비가 많이 든다고 조선기병대가 먼저 해체되고 조선보병대도 대공황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그 뒤에는 식민지인 부대를 따로 유지한 적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즈음에 병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지원병 (육군특별지원병제)제도와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학병)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징병령까지 발동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일본인이 주축이 된 정규군 부대에 분산해서 배치했으며 조선인만으로 조직한 부대는 끝까지 편성하지 않았다.

다만 만주군은 조금 성격이 다르다.


2.6.1. 만주군[편집]


일본군의 괴뢰군이었던 만주군은 형식상 독립국인 만주국의 군대이므로 일본군에 속한 식민지군이라고 규정하기 애매하다. 만주는 일본의 괴뢰국이었고 식민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만주군 내에는 만주국의 주류민족인 한족과 만주족이 아닌 소수민족 특수부대가 존재하기는 했다. 조선인 부대로 유명한 간도특설대백계 러시아인 부대도 있었고 출처가 불분명하나 임시부대 성격으로 몽골인 부대, 회교도 부대, 오로촌족 부대등이 있었다.

3. 같이 보면 좋은 문서[편집]




4. 참고 자료[편집]



4.1. 웹사이트[편집]


영국 국립 육군 박물관 사이트의 서인도 연대에 관한 페이지. 이 문서 서인도 연대 문단의 내용은 사실상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번역 및 요약 한 것이다.


4.2. 도서[편집]


  • Echenberg, Myron J. 《Colonial conscripts : the Tirailleurs Sénégalais in French West Africa, 1857-1960》. Portsmouth, NH : Heinemann ; London : J. Currey, 1991.
  • Lawler, Nancy E. 《Soldiers of misfortune: Ivoirien tirailleurs of World War Two》. Athenes, OH : Ohio University Press, 1992.
  • Lunn, Joe. 《Memoirs of the maelstorm : a Senegalese oral history of the First World War》. Portsmouth, NH : Heinemann ; Oxford : James Currey ; David Philip: J. Currey, 1999.
  • Tuma, Ali A. 《Guns, Culture and Moors: Racial Perceptions, Cultural Impact and the Moroccan Particip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1936-1939)》. New York, NY : Routledge ; Oxford : Routledge, 2018.


4.3. 논문[편집]


  • Raffael Scheck, 〈The Killing of Black Soldiers from the French Army by the "Wehrmacht" in 1940: The Question of Authorization〉, 《German Studies Review》 Vol. 28, No. 3, 2005.
  • Christian Koller, 〈The Recruitment of Colonial Troops in Africa and Asia and their Deployment i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Immigrants & Minorities》 Vol. 26, Nos. 1/2, 2008.
  • Ruth Ginio, 〈French Officers, African Officers, and the Violent Image of African Colonial Soldiers〉, 《Historical Reflections / Réflexions Historiques》 Vol. 36, No. 2, 2010.
  • William Dean, 〈MORALE AMONG FRENCH COLONIAL TROOPS ON THE WESTERN FRONT DURING WORLD WAR I: 1914–1918〉, 《Scientia Militaria, South African Journal of Military Studies》 Vol 38, Nr 2, 2010.
  • Martin A. Klein, 〈Slaves and Soldiers in the Western Soudan and French Wesr Africa〉, 《Canadian Journal of African Studies / Revue Canadienne des Études Africaines》 Vol. 45, No. 3, 2011.
  • 이재원, 〈제1차 세계대전과 프랑스의 식민지인 병사: 세네갈 보병을 중심으로〉, 《프랑스사 연구》 31, 2014.\
  • Carina Schmitt, 〈The Warfare – Welfare Nexus in French African Colonies in the Course of the First and Second World War〉, 《Historical Social Research / Historische Sozialforschung》 Vol. 45, No. 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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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파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2] 그냥 큰 칼 차고 싶어서 가는 경우도 있었고 안 굶어죽으려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3] 보조금, 시설 건설, 시민권, 심지어는 독립까지! 물론 시민권이나 독립 같은 스케일 큰 약속들은 세계 대전 수준이 되어야 나왔다. 그리고 약속을 하는 것과 지키는 것은 다른 얘기.[출처] A B Christian Koller의 The Recruitment of Colonial Troops in Africa and Asia and their Deployment i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4] 제2차 세계 대전 영화 영광의 날들의 주인공들이 이 부대 소속이다.[5] 처음에는 세네갈에서만 모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로 확장되었고 나중에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에서도 모병이 이루어졌다.[6] 사실 프랑스가 아프리카인에 총을 들려주고 자신들을 위해 싸우게 시킨 것은 이것보다도 더 오래된 일이다. Myron Ecehnberg에 따르면 세네갈로 파견되는 프랑스 군인의 대부분은 사고쳐서 징계로 온 폐급들이었기 때문. 거기다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기후에 잘 적응하지도 못했다.[7] 1857년 전, 즉 세네갈 티라이외르는 존재하지 않지만 흑인 노예병을 부리던 시대의 이야기다.[8] Blaise Diagne. 최초의 세네갈 출신 프랑스 국회의원.[9] 독일인들이 1차 세계 대전과 "검은 굴욕"을 거치며 차곡차곡 쌓은 프랑스군 흑인 병사에 대한 공포와 혐오도 한 몫 했다.[10] 모로코인 부대와 스페인 외인부대가 소속된 아프리카군은 당시 스페인군 최정예 병력이었다.[11] 또다른 역사가 Ali Al Tuma는 당시 대부분의 모로코인 병사들이 실전 경험이 없었다고 지적하였지만.[12] Askari. 아랍어로 군대라는 뜻인데, 비아랍권 아프리카에서도 통용된 단어이다. 중세부터 아랍 상인들이 동아프리카 연안을 오가며 문화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 저 밑 이탈리아 사례에 나오는 할아버지도 아스카리다.[13] 하지만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문서에도 각주로 서술되었듯 해당 일화는 어느정도 걸러들을 필요도 있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문서에 출처로 서술된 사이트는 이탈리아 제국을 찬양하는 웹사이트고 (사이트 이름부터가 "Italia Coloniale"이다) 해당 일화가 기술된 다른 웹사이트는 텀블러와 여기 기술된 아카라이브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 뿐 공신력 있는 소스는 없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