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우(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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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수상 경력
4. 외부 링크


申東雨

1936년 10월 11일 ~ 1994년 11월 17일 (향년 58세)


1. 개요[편집]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풍속화가이다.

진주햄 천하장사 소시지에 그려진 씨름 그림을 그렸는데, 해당 업체의 스폰서를 받은 2쪽짜리 PPL 만화를 1970년대부터 월간 소년중앙에 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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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우 화백은 그 특징적인 화풍으로 인상깊은데, 이런 그림체다.

홍길동의 1권을 보면 본문 그림체 자체가 내내 이런 식이고 흑백이지만 이 정도 분위기와 퀄을 유지한다.

마치 조선시대 풍속화 그림체로 만화를 그린 느낌이다. 따라하기 쉽지 않은데, 그림체도 그림체지만 그 그림체로 묘사해야 할 저런 대상 자체를 요즘은 모르기 때문이다. 민속촌가서 관찰하고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 시대의 유산이 남아있던 끝자락을 산 사람이기도 해서 살리고 생략할 디테일을 구별해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이다.[1]


2. 생애[편집]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그림재주가 남달라 용산고등학교-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했고, 특히 대학 시절에는 학보에 만화를 그려 학비를 벌었다.

1953년 부산 피난 당시 <땃돌이의 모험>으로 데뷔해 1965~1969년까지 소년조선일보에 '풍운아 홍길동'를 연재하며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형 신동헌 화백과 함께 국내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 작품인 '홍길동'을 합작했다. 특히 본 만화에서 주인공이 칼을 내지를 때마다 '송', '방'하는 의성어가 나오는데, 이 구호는 절친인 우현 송영방 화백의 이름에서 따왔다.

당시 인기 만화가답게 정부 정책 홍보 만화를 많이 그렸다. 이런 작품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알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1988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공모에도 응모한 바 있었고, 미스터피자초기 로고도 제작했다.

여러 학습만화와 위인전 삽화를 그렸으며, 계몽사의 어린이 위인전기 강감찬, 황희 편이나, 금성출판사에서 내놓은 16권짜리 삼국지수호전, 전래동화 시리즈, 위인전기 시리즈의 다수를 비롯한 다양한 책들의 삽화를 많이 그리기도 했다. 1990년대 유년이었던 세대도 그의 작품을 접했을 정도.

당시 어린이 잡지에도 자주 등장했는데 연재 만화가 아닌 진주햄의 2페이지짜리 광고 만화였다. 반응이 좋아 대부분의 어린이 잡지에 상당 기간 실렸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1980년 금성출판사에서 출간한 작품인 '칼라판 학습만화 한국의 역사' 시리즈[2] 방실방실 웃는 이방실이나 척척, 척 베어버리는 척준경 드립이 실려 있다. 홍건적을 두고 '빨갱이는 이때부터 탈이었죠'(!)라는 그 시대에만 칠 수 있는 비범한 드립을 치기도 했다. 다만 출판 시기가 시기이고, 당시 문교부 산하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들이 내용을 감수한 터라 5.18 민주화운동북한의 간첩이 내려와서 벌였다는 왜곡된 내용이 있는 등, 진실을 알기 어려웠던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당시 어쩔 수 없이 군사정권 비위에 맞는 그림을 그렸던 적도 있었다. 또한 6.25 전쟁 에피소드에서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친거 까지는 그렸으나 피난민들이 난리를 피해 서울을 벗어나려고 한강대교를 건너는 그림에서 북한군을 상기시키는 누런색의 탱크가 같이 건너는 그림을 그려 놓고 한강다릴 폭파하는 장면이 실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내용이 L-4 연락기에서 “한놈의 적이라도 더 죽여야 해.”란 대사와 함께 폭탄을 손으로 떨어뜨리는 아주 부자연스러운 이야기로 급전개되었다. 내용상 한강대교 폭파에 대해 '북괴군의 남하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식으로 다루어졌는데, 심의 문제인진 몰라도 당시 6.25 특집 드라마 등지에서 통설로 전해지던 민간인 사상자 얘기는 없었다.[3]

1960년대 이래 TV에 많이 출연한 만화가였으며, KBS <우리들 세계>를 비롯해 <잡학사전>,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등지에서 출연하며 보드에다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체가 부드럽고 간단한 편인데, 그에 맞게 대단한 속사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인들 보기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을 그려내는 묘기로 박수를 받고는 했다. 흉내내기도 어려운 독특하고 독창적한 그림체, 동세 및 시선 처리 등에서는 당시 고우영 정도 말고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의 실력자임은 분명하다. 1984년엔 공익광고에도 나왔다.

말년에 들어서는 독자적인 이야기나 기획의 극화는 그리지 않고 대부분의 내용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기업 홍보물 삽화나 학습지 등이었다.

오랜 세월 속에 많은 작품이 훼손 및 망실되어 전해진 게 제대로 없으나, 그래도 (그 내용은 차치하고)다작을 해서 전해지는 분량만으로 적지는 않다. 풍운아 홍길동을 비롯한 여러 작품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복간판으로 나온 바 있다. 그 정도로 신동우 화백이 한국 만화사의 거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형제인 신동헌 화백과 함께 한국 애니메이션의 효시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큰 업적이다.

1980년대 이르러서는 만화보다 풍속화, 삽화를 그리는 일에 주로 몰두하다가[4] 풍운아 홍길동이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자 무척 기대했으나, 개봉 1년여를 남긴 1994년 11월 17일 새벽 5시, 서울 당산동 자택에서 잠자던 도중 갑자기 사망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였던 호돌이 캐릭터 공모전에 응모했으나 아쉽게도 탈락했다. 여러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본인은 꼬리로 태극 형상을 만드는 호돌이를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고...

유족으로는 형 신동헌 감독과 부인, 슬하 1남 1녀가 있으며, 특히 형 신동헌도 동생처럼 만화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1967년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 <홍길동>을 만들어 한국 애니메이션계를 개척하는 데 공헌했다. 아들 신찬섭은 제일기획 캠페인팀장 등을 맡으며 맥심 TOP 등지의 광고들을 기획해냈다. 신동헌의 아들 신경섭은 미국에서 애니메이터로 활동했다.

신동우 프로덕션은 신동우 화백 사후에도 꽤 오랫동안 활동했다. 위 주석에 상술한 바와 같이 신동우 화백 화풍을 비슷하게 모사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어 1990년대 중후반에도 정부광고 등에 신동우 프로덕션 특유의 화풍이나 서체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작가 사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다는 점에서는 박봉성 프로덕션과 비슷한 사례이지만, 타 프로덕션의 경우 극도로 분업화된 공장제 시스템 때문에 가능했던 점과 달리 신동우 프로덕션은 저 능력자 문하생의 스킬(...)에 의지한다는 것의 차이. 사실 비슷하긴 하지만 약간 화풍에 차이가 있다.

대단한 필력을 가진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일이었고 만화 표절작이 많던 당시에도 전혀 베낀 작품을 내지 않았다. 생전에도 정부 시책을 홍보하는 작품을 많이 그렸고, 그것이 사후까지도 이어졌기 때문에 대표적인 어용 만화가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 유일한 오점이다. 사실 표절작이 없던 이유는 간단하다. 차돌바위 만화로 초창기부터 인기를 얻었고, 이후 진주햄 소시지를 광고하는 PPL 만화나 기업 사보 만화, 정부 시책 홍보 만화를 많이 그렸고 방송에도 꽤 나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표절작을 그릴 이유가 없어서이다.

여담으로 생전에 TV 광고를 찍은 적이 있는데, 필기구 회사 아피스의 만년필 광고에 출연했었다.

부산 영도구 목장원 식당 각 테이블 자리마다 신동우 화백이 부산 피난시절 추억의 풍속화가 놓여져 있다.


3. 수상 경력[편집]


  • 1980년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 한국만화상 아동만화 부문 본상
  • 1991년 색동회상
  • 2007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


4. 외부 링크[편집]


  • 신동우 화백 페이스북: 아들이 직접 운영하며, 2002년에 처음 홈페이지 형태로 개설됐다가 2000년대 중후반경 싸이월드로 옮겼고, 2014년 12월경부터 현 위치로 옮겼다.
  • 신동우 화백 유튜브 채널: 생전 출연 영상들이 업로드돼 있다. (이 또한 아들이 운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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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신동우 프로덕션의 문하생 중 한 사람은 거의 비슷하게 그려낼 수 있어서, 신동우 화백 말년에 프로덕션에서 작업한 동화책 삽화 시리즈를 보면 이 사람 그림이 대다수이다. 이 동화책 전집은 일러스트 작가 이름을 매 화마다 명기하고 있어서 신동우 화백 본인이 그린 것과 문하생이 그린 것을 직접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화풍이 약간 다르긴 하다.[2]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인 국사학자 최영희(1926~2008)가 감수, 국편위 교육연구관이던 최완기(1945~2007, 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생활학과 교수)가 고증을 맡았다. 1993년에는 박성수(1931~2016)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연구실장의 감수 하에 작화와 내용까지 바꿔가며 개정되었고, 신동우판의 경우 2005년 계열사 금성미디어를 통해 <로그인 한국의 역사>로 재판되었다.[3] 이 사건은 2010년대 이후 실증적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2016년 신기철의 논문 <기록과 기억, 그리고 진실>을 통해 서울종로경찰서 경관 77명이 사망했다고 최종 확인되었다.[4] 그림에서는 최고였지만 스토리에는 약한 편이었다. 홍길동은 고전에 바탕을 둔 것인데 고우영처럼 캐릭터를 재창조한 수준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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