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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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부흥운동

935년~
?년

마의태자의 항전 ( 마의태자? )1

1193년~
1194년

동경민란
김사미·효심의 난

1202년~
1204년

경주 별초군의 난

1202년~
1204년

이비·패좌의 난

1204년

동경 신라부흥모의2
1확실하지 않음, 2사전에 발각됨




1. 개요
2. 배경
3. 목록
3.3. 경주 별초군의 난
3.4. 1204년의 신라 부흥 모의
4. 유사사례
5. 평가
6. 연구


1. 개요[편집]


935년신라고려에 항복한 이후, 고려 때 옛 신라 지역인 경상도강원도 일대에서 벌어졌던, 신라를 되살린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난들을 일컫는 용어.

신라와 같은 삼국, 남북국시대에 병존했던 고구려, 백제, 발해부흥운동[1] 등과 달리 교육과정에서 큰 비중을 두지는 않는다. 신라의 멸망 과정이 외부 세력의 공격(신라, 당나라, 요나라)에 멸망한 고구려, 백제, 발해와 반대로 한반도 내 국가인 고려의 지속적인 압박에 항복하며 막을 내렸고 이들에 비해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2]


2. 배경[편집]


935년에 후삼국시대의 패권이 고려 쪽으로 흘러가자, 신라는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했다. 당시 신라 조정 내에서는 마의태자, 이순유, 이돈유 등 신라의 고려 병합을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으나 이미 국운이 다한 상황에서 이들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 이후에도 1000년 간 국체를 존속한 신라를 하루아침에 없앤 데에 대한 이런저런 반발이 있었고 옛 신라 지역이었던 경상도 지역에선 고려에 대항하는 일부 계층들의 반란들도 있었지만, 신라의 국가적 역량은 견훤금성 함락 후에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망가져 있었다. 게다가 왕건은 이런 일을 예상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요소요소에 정예 부대를 배치했었고, 때문에 소소한 소요 사태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경순왕의 항복으로 신라는 고려에 흡수되었지만 고려신라를 그대로 계승한 나라는 아니었다. 또한 이전에도 신라는 고려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사신을 교환하고 있었기에 신라의 모든 구성원이 이런 통합에 찬성할 수는 없었다. 고려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중국 송나라신라방에서는 신라 멸망 후 150여년이나 지난 1072년에도 자신들을 신라인으로 소개하고 고려 음악이 아닌 신라 음악을 연주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처럼# 1000년이나 이어온 신라라는 정체성은 보존되고 있었다. 따라서 부흥운동의 불씨는 남아 있었다.

고려 초기 김치양이 자신과 천추태후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한 것을 신라 부흥 시도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작 김치양이 신라계 성씨라는 근거는 없다. 일단 김치양의 출신지인 동주(洞州, 현 황해도 서흥군)를 관향으로 한 성씨는 동주 김씨와 서흥 김씨가 있었는데 동주 김씨의 시조는 김행파로 출처불명의 토착계 호족이었고 원래 성씨가 없었다가 왕건과 인척관계를 맺게 되며 사성으로 김씨가 되었다. 서흥 김씨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신라계 김씨가 맞는데 김치양이 활동하던 때보다 한참 나중인 여몽전쟁기 및 삼별초의 항쟁 때 동주를 관향으로 삼으며 탄생한 성씨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친척이었는데 이미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던 동주 김씨가 그의 성씨로 훨씬 유력하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김치양을 마의태자의 손자라 설정해 각색하기도 했다.

신라 진골 중 상당수는 일찍부터 고려에 투항한 6두품이나 호족에게 망한 나라 신하 취급을 당해야 했고, 특히 골품제를 고수하던 진골 귀족들 같은 경우, 고려시대에 일단 경상도 일대의 향리로서 나름대로의 기득권은 보장받을 수 있었으나, 시류를 약간 잘 타서 조금 일찍 고려의 관리가 된 자들 앞에서는 대단히 입장이 깎이는 수모를 참아야 했다.

물론 모든 신라계 귀족 가문이 몰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지방으로 카운트하면 동경은 고려의 웬만한 지방보다도 훨씬 많은 주요 문벌귀족을 배출한 지역으로, 김원충, 김원정, 김경용, 김한충, 최승로, 최제안 등이 고려 초기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개경으로 가지 않고 동경에 남은 귀족들도 비록 과거와 달리 중앙 정치에서 배제되고 향리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일단 고려 3경 중 동경으로서 다른 지방보다 비중이 높았고, 김부식의 증조부로서 동경의 주장(州長)이 되었던 김위영처럼 경주 지역에 남아서도 명문가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고려 사회는 신분 이동의 폐쇄성이 신라보다는 낮았기에 비록 신라 진골이라도 노력과 여러 요인이 따르면 고려의 중앙 관계에 진출할 수는 있었으나, 누구나 김부식 형제처럼 과거로 출세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상당수는 지방 향리가 되어 기득권이 이전보다 확실히 못한 상태로 떨어진다. 때문에 적어도 옛 금성 일대의 이런 부류들은 고려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다른 부류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 왕실의 일원이자, 귀족의 최고점으로 어딜가나 대접받으며 수도에서 떵떵거리던 진골 귀족들이, 이젠 고려 3경이라고는 해도 지방의 대도시 정도로 격하된 동경에서, 대접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개경 중앙귀족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동경에서 이 정도면 다른 지방에 갔을 땐 그보다도 못했을 건 분명하다.[3] 가만히 앉아서 혈통빨로 높은 벼슬을 하던 시절은 과거에 끝났고, 그들이 당시 이런 상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선 남은 자료가 없어서 추측해볼 수밖에 없으나,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이들의 이러한 불만은 고려왕조의 통치력이 쇠퇴하는 무신정권 시대에 신라부흥운동으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3. 목록[편집]


김보당의 난무신정권 시기 경주 지역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는데, 신라 부흥의 기치를 내건 기록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3.1. 김사미·효심의 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사미·효심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김사미, 효심이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이자 십팔자위왕 소문에 의거해 왕좌를 노리고 있었던 경주 출신 이의민과 내통하여 일어난 반란. 한편 이의민이 내통하여 일어났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최충헌과 그 일파가 경주 지역에서 발생한 난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이의민에게 뒤집어씌웠다고 보기도 한다.


3.2. 이비·패좌의 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비·패좌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비, 패좌가 각자 경주, 운문산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가 연합한 반란.

3.3. 경주 별초군의 난[편집]


1202년 10월 경주 지역의 야별초군이 운문 일대의 반란군과 부인사, 동화사의 승려를 끌어들여 경북 영주 일대를 공격한 사건. 영주 공격은 영주 사람 이극인, 견수 등에게 패했고, ‘신라부흥’을 표방하고 장군 석성주(石成柱)를 신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석성주는 일단 그 자리에서는 기뻐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군수에 밀고해 실패하였다.


3.4. 1204년의 신라 부흥 모의[편집]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1204년 동경 사람이 "신라가 다시 융성할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리고 상주, 청주, 충주, 원주 등에 격문을 뿌리며 반역행동을 꾸몄다는 이유로 행정구역을 강등했다.


4. 유사사례[편집]




5. 평가[편집]


대체적으로 고려시대에 있었던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신라부흥운동은 고구려/백제/발해의 부흥 운동들과 반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고구려/백제/발해의 부흥 운동들은 이전 국가의 지배 계층이 일으켰고, 멸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기에 역사를 잘 모르는 대중의 입장에서 봐도 부흥 운동임이 명백해 보인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갔던 대조영발해 건국도 고구려부흥운동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주장은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4]

어떻게 되든, 신라의 부흥운동은 신라 자체가 어쨌든 평화적 교섭을 통해 고려에 흡수되었고, 또 해당 부흥운동은 신라의 원영역 내의 주민에게 어느 정도 광범위하고 일관된 지지를 받지 못한 측면에서, 고구려나 백제, 발해 등 삼국, 남북국시대의 타 왕조들의 부흥운동들보다 더 쳐지는 측면이 명확하기에, 금방 생생하게 감이 오진 않는다. 당장 보면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북도 내에서 이 부흥군에게 반대하는 자발적인 근왕군들도 조직되었을 정도였다. 여기서 고려와 신라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체제에 충성하는 지방민을 조직적으로 육성했기에 진압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신라는 정권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골품제 유지를 위해선 태생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방민들이 쉽게 이탈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서는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조차도 그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반란이 일어났고 그 기치 아래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속해 있었던 지역 주민들이 이들의 반란에 공감대를 얻었기에, 부흥 운동으로 보기에 결코 손색이 없다. 망한 나라의 복국 운동은 꼭 해당 망한 나라의 왕족이 참여해야 하고, 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야 하며, 민란이나 지방반란의 요소가 없어야 한다는 일각의 인식은 아예 전제부터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 해당 조건들을 다 지키고 성공하는 복국-독립 운동은 성공 사례가 거의 없으며, 애초에 망한 나라를 접수하는 국가부터도 이런 조건들이 불가능하게 철저히 관리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족들이 일제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왕족들을 철저하게 감시해서 독립운동과 연계가 전혀 불가능하게 하지 않았던가? 조선은 고려 왕족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고려 또한 겉으로는 경순왕을 우대해준 것 같아도 경주에 묻히지도 못하게 조치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게다가, 당장 후삼국시대후고구려후백제 역시 제 국가들이 멸망한 지 벌써 230년이 넘은 고구려, 백제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지역 호족과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수립에 성공한 케이스들이었다. 특히 후고구려의 경우는 바로 북쪽 만주 지역에 고구려의 계승국을 자처하는 발해가 있었는데도 말이다.[5]

이는 고려가 후삼국이 통일된 이후, 고려인이라는 단일민족의식이 자리 잡은 뒤에도 한반도 각 지역에는 옛 삼국 유민 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비-패좌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과 같은 고려시대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앞세운 경상도 일대의 반란들이 고려 정부군에 의해 토벌된 뒤에도 꾸준히 옛 경상도 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앞세운 반란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후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신라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 등의 옛 삼국 유민 의식 또한 소멸하며, 단일민족의식이 생겨나 결국 고려 내부에서 신라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6. 연구[편집]


  • 김호동, 高麗 武臣政權下에서의 慶州民의 動態와 新羅復興運動, 1982
  • 김당택, 李義旼의 慶州勢力과 新羅復興運動, 경주사학, 1997
  • 이정신, 12·13세기의 삼국부흥운동, 한신인문학연구, 2000
  • 김호동, 고려 무신정권하에서의 경주민의 동태와 신라부흥운동, 민족문화논총, 2008
  • 이정신, 고려시대 경주민의 항쟁과 제사, 신라문화, 2008
  • 김호동, 고려 명종 23년의 '신라부흥운동' 사료 검토, 신라사학보, 2012
  • 신안식, 고려중기 삼국부흥운동의 '地域性'과 '抵抗性', 한국중세사연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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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멸망 직후 부흥운동과 발해, 후삼국시대의 태봉고려, 후백제와 달리 무신정권~여몽전쟁 시기 부흥운동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비중이 낮다.[2] 발해부흥운동은 비교적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규모도 큰 편이었지만 결국 큰 성과 없이 끝난데다가 왕건의 후삼국통일로 민족의 실질적인 통합이 끝난다는 역사 인식 때문에 비중이 낮다.[3] 아래의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경주 별초군의 반란 때 사이가 나빴던 영주(현재의 영천)를 먼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반란이긴 했지만 일개 지방도시 중 하나로 세력이 격하되자 경쟁심을 갖고 있던 주변 지역들도 무시하게 된 모습이 드러난다.[4]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들어선 기준으로 하면 30년이고 그에 반해 신라가 망하고 고려 시기에 김사미, 효심의 난, 동경민란과 같은 경상도 일대의 신라부흥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와 비교하면 시기, 연대적으로 200년도 더 넘어 발해 건국과는 연대적으로 차이가 난다. 발해는 일단 발해 왕조의 개국 군주인 대조영부터가 즉위시 나이를 40세로만 쳐도 명백히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고구려 시기를 경험한 1.5세대 유민이고 대조영 이전에 유민들을 이끌었다고 기록된 걸걸중상은 빼도박도 못하는 고구려인이지만 김사미, 효심의 난, 이비, 패좌의 난 같은 고려 왕조 때 일어난 신라부흥운동의 경우 이를 주도했던 주도 세력들이 대강 1160년대 태생들로만 잡아도 신라 멸망으로부터 족히 7~8세대는 지나 신라 시기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발해부흥운동의 경우는 발해 멸망 후 거의 2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5] 그러나 발해는 국력과는 별도로, 당과 신라의 위신 탓에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하지 못하였다. 당도 당고종 본인은 썩 뛰어나지 않은 군주였음에도 어쨌든 백제와 고구려, 특히 전조 수나라가 100만 대군으로도 도모하지 못하고 오히려 망했던 그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업적이 상당히 들어가서 '고종'이라는 격 높은 묘호를 받았고, 신라도 무열왕과 문무왕의 삼한일통 업적으로 왕권이 매우 강력해졌는데, 그 고구려가 부활했다고는 차마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다름아닌 왕건의 고려 이 두 나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