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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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독립 단체
1.1. 개요
1.2. 주도 인물
1.3. 활동
1.4. 목표
1.5. 해산
1.6. 기타
1.7. 같이 보기
2. 둘러보기
3. 기타
3.1. 중국의 친일 단체



1. 한국의 독립 단체[편집]



1.1. 개요[편집]


신민회()는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이며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해산되었다.

신민회는 무엇을 위하여 일어남이뇨? 민습(民習)의 완고 부패에 신사상이 시급하며 민습의 우미(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움)에 신교육이 시급하며 열심의 냉각에 신제창이 시급하며, 원기의 모패(줄고 시들다)에 신수양이 시급하며, 도덕의 타락에 신윤리가 시급하며, 실업의 조췌(시듦)에 신규범이 시급하며 정치의 부패에 신개혁이 시급이라. 천만가지 일에 신(新)을 기다리지 않는 바 없도다. …… 무릇 우리 대한인은 내외를 막론하고 통일 연합으로써 그 진로를 정하고 독립 자유로써 그 목적을 세움이니 이것이 신민회의 원하는 바이며 신민회의 품어 생각하는 까닭이니 간단히 말하면 오직 신정신을 불러 깨우쳐서 신단체를 조직한 후에 신국(新國)을 건설할 뿐이다.

-

신민회 설립 취지문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

-

신민회 4대 강령


1.2. 주도 인물[편집]


내로라하는 한국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참여했던 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원으로 있었다. 안창호, 양기탁, 이승훈 등을 중심으로 이동휘, 윤치호, 이동녕, 이회영, 신채호, 이상재, 오천석, 남형우, 김립, 정재관, 장도빈 등이 신민회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이었다. 대체로 평안도(서북 지방)의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1.3. 활동[편집]


1909년, 신민회는 안창호 등이 주도하는 실력 양성 운동에 중심을 둔 온건파와 양기탁, 신채호, 이동휘 등의 강경파가 주도한 국외에서 독립 운동 기지 건설에 힘쓰는 강경파로 노선이 분화되었다.
  • 실력 양성 운동
    • 교육 : 오산학교(1907년, 정주, 이승훈), 대성학교(평양, 안창호) 설립, 신학문 수용
    • 산업 : 평양 자기 회사, 방직 공장, 연초 공장 등
    • 문화 : 태극 서관(평양, 대구, 서울)을 통한 서적 출판, 조선 광문회를 통한 고전 연구와 간행
    • 언론 : 대한매일신보[1](신민회 기관지), 소년(협력지), 조선 광문회(학술지, 동국통감 등 민족 고전 간행, 조선어 자전 편찬 추진[2]
  •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
    • 만주 삼원보에서 교육기관인 경학사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3]
    • 북만주 밀산부(密山)에 개척촌인 한흥동 건립

그 외에도 인격 수양 단체인 '청년 학우회' 조직, 조선 광문회 활동 지원 등이 있다.

1.4. 목표[편집]


이 시대 항일 단체의 목표는 당연히 국권 회복이었다. 신민회는 실력 양성의 방법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 당시 항일 단체 중 최초로 민주 공화정체의 국민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당시 통감부의 정미 7조약 이후 시행된 보안법, 신문지법 등으로 비밀결사 단체로 조직되었지만, 그 방식은 합법적인 틀 안에서 자강,계몽운동부터 해외기지건설 추진까지 전방위적이었다. 그러나....

1.5. 해산[편집]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해산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1.6. 기타[편집]


국사나 근현대사 시험을 볼 때 이름과 성격이 비슷한 신간회를 보기로 들어서 오답을 유도하는 질문이 많다. 신민회는 비밀 결사고 3.1 운동 이전에 있었던 단체며 신간회는 공개적인 단체에 좌우 합작, 시기적으로 3.1 운동 이후라는 차이점을 기억하면 쉽게 기억할 수 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1903년 결성되었다가 이듬해 해체된 신민회와는 다른 단체다.

1.7. 같이 보기[편집]



2. 둘러보기[편집]






3. 기타[편집]



3.1. 중국의 친일 단체[편집]


新民會 (위의 단체와 한자가 같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 북중국 방면군이 중국인을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해 1937년 12월에 조직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반공 단체. 만주국에 비슷한 단체로 협화회가 있었다. 신민회 회장으로는 괴뢰 정권인 화북 정무 위원회 위원장이, 총무 부장에는 북중국 방면군 특무부 소속 간부가 취임했다. 이를 통해 화북에 군(일본군), 관(화북 정무 위원회), 민(신민회)을 총동원한 식민 통치 체제가 만들어졌다. 신민회는 중국, 일본, 만주국이 상호 불가분의 관계이며 3국이 함께 발전하고 공산당을 소멸시켜 세계 평화에 공헌하고 일본 중심의 새 아시아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소리 이념을 중국인에게 주입하는 것이 신민회의 활동이었으며, 그 외에도 지방마다 지도부, 분회 등을 조직하고 청소년 단체, 부녀회, 무장 단체를 결성하며 일제 통치에 도움을 주었다. 1945년 일제 패망과 함께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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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기탁과 어니스트 베델이 창간하였고, 양기탁이 신민회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면서 대한매일신보를 주관지로 활용한 것 뿐. 즉, 신민회가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거나 한 단체는 아니다. 신채호의 유명한 역사평론인 독사신론이 대한매일신보에서 연재되었다. [2] 1907년 설립된 국문 연구회 소장으로 있던 주시경이 추진하던 한글사전 사업을 근간으로 하였다.[3] 신흥무관학교의 정통은 경희대학교가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