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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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鳳祚
1900년[1] 8월 20일[2][3] ~ 1992년 12월 27일 (향년 92세)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교육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영월(寧越)[4], 호는 화암(和巖)이다. 창씨명은 가라시마 준(辛島純).

2. 생애[편집]


1900년 8월 20일 강원도 정선군 서상면 상평리(現 정선군 정선읍 광하리 상평마을)에서 아버지 신기묵(辛綺默, 1868 ~ 1930. 5. 4)[5]과 어머니 정선 전씨(1867 ~ 1933. 5. 28)[6]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정선군 정선면(現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280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12살 되던 1911년 개신교(북감리회)에 입교해 정동예배당에 주로 출석했다.

일찍이 정선공립보통학교(現 정선초등학교) 졸업 후 상경한 뒤 경기도 경성부 효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77번지 임재덕(林在德)의 집에 기거해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임재덕의 어린 자식들을 가르쳤으며, 이렇게 번 돈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現 배재고등학교)를 다녔다. 이 밖에 고향 집과 배재고등보통학교로부터 각각 매달 5원씩 보조를 받았음에도 형편은 녹록지 않았으나, 그 뒤 김운호(金雲鎬)[7]의 후원으로 공부를 계속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지망할 수 있었고, 졸업을 앞둔 1919년 2월 신체검사를 받은 뒤 무시험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이 즈음에는 경성부 정동(現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진학 후 쓸 용돈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원동(現 종로구 원서동)에 있던 김운호의 집에 찾아가던 도중 종로2정목(現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 육각당(六角堂)[8] 안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얼굴이 암모나이트 같은 남자가 기미독립선언서를 읽고 얼마 뒤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에 만세시위에 참여하던 군중들 중에서도 500~600명 가량되던 학생들의 행렬에 가담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1정목에서 봉래정2정목(現 중구 봉래동2가) 남대문역, 의주통(現 중구 의주로), 평동(現 종로구 평동) 서대문, 정동(現 중구 정동), 정동 주일미국공사관 소속 주 경성 영사관, 태평통(現 중구 태평로), 황금정(現 중구 을지로), 종로[9],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 광화문통 경복궁 광화문, 합동(現 서대문구 합동) 프랑스영사관, 평동 서대문, 서대문정(現 종로구 신문로), 장곡천정(現 중구 소공동), 본정1정목(現 중구 충무로1가) 경성우편국 모퉁이, 본정2정목 경성전기주식회사 앞, 본정1정목 경성우편국 앞을 거쳐 남대문통2정목(現 중구 남대문로2가) 조선식산은행에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10]

결국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예심이 청구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투옥되었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위와 같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출옥했다.

출옥 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복학했으나, 기존에 입학 예정이었던 경성의학전문학교에는 자연스럽게 입학 취소가 되었고 대신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역사학을 전공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 2월 9일 조선학생회 창립총회에서 연희전문학교 대표로 참석해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졸업 후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에 유학해 1930년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도호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다시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8년 12월 제8대 이화고등여학교(現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11]취임했다. 태평양 전쟁 중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서 조직한 '채권 가두 유격대' 서대문대(西大門隊)에 소속되어 신흥우·주요한 등과 함께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태평양 전쟁 자금으로 쓰기 위해 채권을 파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48년 9월 30일 새교육협회 창립총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1953년 3월 이화예술고등학교(現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했다. 1961년 10월 교장직에서 퇴임한 후 학교법인 이화학원 상무이사 및 이사장, 상명학원 이사장, 한양학원 이사, 영훈학원 이사,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 및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1972년 8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받았고, 서울특별시 문화상(교육부문)을 수상했다.

1992년 12월 27일 새벽 3시 3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48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3. 여담[편집]


  • 청주 한씨 한희숙(韓熙淑, 1906. 12. 27 ~ )[12][13]과 결혼해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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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산·영월신씨대동보 11권 381쪽에는 1897년생으로 등재돼 있다.[2] 음력 7월 26일. 이화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 참조.[3] 1919년 6월 18일 예심판사 신문조서에는 7월 17일생,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 1심 판결문에는 7월 22일생, 모닝뉴스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 예심 판결문에는 7월 23일생 등으로 각각 다르게 기재돼 있다.[4] 판서공파(判書公派) 31세 재(在) 항렬. 족보명은 신재봉(辛在鳳).[5] 이명 신한섭(辛漢燮).[6] 전공여(全公汝)의 딸이다.[7] 1919년 3월 7일 조선총독부 검사 신문조서(신봉조). 1919년 6월 1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신문조서(신봉조)에는 김운현(金雲鉉)으로 기재돼 있다.[8] 탑골공원 팔각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9] 신봉조의 배재고등보통학교 같은 반 친구였던 성주복(成周復) 또한 이날 만세시위에 참여해 종로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19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신문조서(성주복)에 따르면, 신봉조는 성주복의 반 급장이었다고 한다.[10] 1919년 6월 1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신문조서(신봉조)에서, 당시 예심계 직무대리 조선총독부 판사 호리 나오요시(堀直喜)가 "장래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신봉조는 "이번 운동의 결과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할 필요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후 신봉조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것을 보면 다소 아이러니한 대답이다.[11] 역대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들 중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자 유일한 남자 교장이다.[12] 초명은 한만복(韓萬福)인데, 1939년 7월 1일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미 한희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으므로 한만복은 아명으로 보인다.[13] 한인태(韓仁泰)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