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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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문서
역사 · 역대 황제 · 오해와 반박
역사
프랑크 왕국(중프랑크 · 동프랑크) · 부르군트 왕국 · 랑고바르드 왕국 · 독일 왕국 · 이탈리아 왕국 ·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
현대 국가
독일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 스위스 · 벨기에 · 네덜란드 · 룩셈부르크 · 리히텐슈타인 · 이탈리아 · 모나코 · 산마리노 · 바티칸 · 체코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프랑스 · 폴란드
주요 가문
카롤루스 가문 · 오토 가문 · 잘리어 가문 · 호엔슈타우펜 가문 · 벨프 가문 · 룩셈부르크 가문 · 비텔스바흐 가문 ·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선제후국
초기 부족 공국
프랑켄 공국 · 슈바벤 공국 · 바이에른 공국 · 로렌 공국 · 초기 작센 공국
1356년 이후
마인츠 주교령 · 쾰른 주교령 · 트리어 주교령 · 작센-비텐베르크 공국 · 라인 궁정백국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 보헤미아 왕국
관련 용어
로마왕(독일왕) · 제국의회 · 선제후 · 금인 칙서(1356년판) · 저지대 국가 · 변경백 · 방백 · 팔츠 · 궁정백 · 주교후 · 제국백 · 자유도시 · 부족 공국 · 영방국가
주요 종교
가톨릭(국교) · 발도파 · 후스파 · 개신교
관련 유물
롬바르디아 철관 ·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 · 금인칙서 ·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관
군사
제국군 · 황제군 · 란츠크네히트 · 도펠죌트너 · 슈바르체라이터
주요 사건
카노사의 굴욕 · 십자군 전쟁 · 대공위시대 · 이탈리아 전쟁 · 후스 전쟁 · 종교 개혁 · 독일 농민전쟁 · 30년 전쟁(베스트팔렌 조약) · 7년 전쟁 · 나폴레옹 전쟁(제국의 해체)



신성 로마 제국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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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Sacrum Imperium Romanum (라틴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독일어)
황제기
황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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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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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rolingian_empire_887.svg(색_수정).png
887년 카를 3세의 영토

파일:신성 로마 제국(1190).svg
13세기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최대 강역

파일:2283px-Holy_Roman_Empire_1648.svg.png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분열된 영토
네덜란드스위스를 잃었다.[1]

800년[1]/962년[2]~1806년
국가
황제 찬가
위치
중부유럽
수도
로마(법적 수도)
(자문 회의, 1497년~1806년)
레겐스부르크 (의회, 1663년~1806년)
베츨라어 (대법원, 1689년~1806년)

(중심 도시 문단 참조)
정치체제
선거군주제, 연방군주제(사실상 국가연합)
국가원수
황제
주요 황제
카롤루스 1세
카를 3세
오토 1세
하인리히 4세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2세
카를 4세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
요제프 2세
프란츠 2세
언어
공용어
라틴어
독일어[3]
기타 언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네덜란드어
저지 독일어
프랑스어
슬로베니아어
폴란드어
종교
가톨릭 (국교)[4]
구성원
독일인
이탈리아인
옥시타니아인
보헤미아인
슬로베니아인
주요사건
800년 프랑크 국왕 카롤루스의 황제 대관식
843년 베르됭 조약
924년~962년 궐위
962년 독일 국왕 오토의 황제 대관식
1254년~1273년 대공위시대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황제 첫 선출
1356년 금인칙서 반포
1618년~1648년 30년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5]
1806년 레겐스부르크 제국 회의, 제국 완전 해체
성립 이전
프랑크 왕국 (800년 이전)
독일 왕국 (962년 이전)
이탈리아 왕국 (962년 이전)
초기 구성국
독일 왕국 (962년 이후)
이탈리아 왕국 (962년 이후)
보헤미아 공국 (1002년 이후)
아를 왕국 (1032년 이후)
중간 독립
교황령 (1177년)
네덜란드 공화국 (1648년)
스위스 (1648년)
해체 이후
라인 동맹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
현재 국가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대부분) 프랑스, 네덜란드,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폴란드 (일부)

언어별 명칭
라틴어
Sacrum Imperium Romanum
독일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이탈리아어
Sacro Romano Impero
체코어
Svatá říše římská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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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어
Heiliges Remisches Reich
팔츠 프랑켄
Hailisch Reemisch Raisch
저지 독일어
Hillig Röömsch Riek
헝가리어
Német-római Birodalom
이디시어
הייליגע רוימישע אימפעריע
슬로베니아어
Sveto rimsko cesarstvo
크로아티아어
Sveto Rimsko Carstvo
프랑스어
Saint-Empire romain
네덜란드어
Heilige Roomse Rijk
폴란드어
Święte Cesarstwo Rzymskie
영어
Holy Roman Empire
중국어
神聖羅馬帝國/神圣罗马帝国[발음]


1. 개요
2. 국호
3. 깃발
5. 중심 도시
7. 정치
8. 관직
9. 군사
10. 영향력
11. 종교
12. 외교
12.1. [[프랑스 왕국|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프랑스와의 관계
14. 각종 매체
14.1. 신성 로마 제국을 모델로 한 가상의 나라



1. 개요[편집]


중부유럽에 존재했던 다민족국가 체제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연방국가 체제라고 보면 된다. 1512년칙령 반포에서는 정식 명칭을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 했지만, 정작 이 명칭은 잘 사용되지 않고, 그냥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독일 제국(Deutsches Reich)이라 불린다. 자세한 건 아래 국호 설명 참조.

800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1세교황 레오 3세로부터 명목상의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924년 황제 베렝가리오 1세의 사망 이후 제위 계승이 중단되다가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이탈리아 왕국을 통합하고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황제 대관을 받으면서 제위가 부활하여 본격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도중 1806년 황제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2. 국호[편집]


962 ~
Imperium (제국) / Regnum Teutonicus (독일 왕국)
999 ? ~
Imperium Romanum / Römisches Reich (로마 제국)
1157 ~
Heiliges Reich (신성 제국)
1184 ~
Sacrum Imperium Romanum / Heiliges Römisches Reich (신성 로마 제국)
1485 ~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6][7]

신성 로마 제국 초기 오토 1세와 그의 아들 오토 2세 때에는 특별한 국명 없이 단지 '제국(Imperium)'이라고 칭했다. 특별한 국명을 명시해야 할 때는 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전신이자 여전히 제국 내 제후 왕국으로 존재하는 독일 왕국라틴어 국명 'Regnum Teutonicus'을 그대로 사용했다. 주변 프랑스 등지에서도 아직은 자기네들이 독일 왕국을 지칭하는 표현인 동프랑크 왕국, 알레만 왕국[8] 등으로 불렀다.

황제를 지칭하는 명칭으로는 오토 2세가 이탈리아 원정 중인 982년 'Romanorum imperator Augustus(Emperor of the Romans,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독일인로마인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9]

초기 황제들이 '제국'이라고만 칭했던 것은 당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중흥기의 정점에 있었다. 800년대 프랑크의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서 교황에 의해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았다가 동로마 제국의 항의로 인해 타협의 결실로 임페라토르바실레우스의 칭호를 받고 서로마 제국이 아닌 서유럽의 최고자로 인정해준 예가 있기에 그저 '제국', '독일인과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오토 1세손자이자 제국의 세 번째 황제인 오토 3세(제위 980년~1002년) 때부터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과 '로마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오토 3세 사망 후 제위를 이어받은 하인리히 2세는 당시 동로마 제국 중흥기의 절정을 장식했던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호전적이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의식하여 '로마'라는 표기를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기도 했다. 11세기 중반 이후 동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자[10][11] 하인리히 2세 사후 제위를 이어받은 잘리어 왕조의 콘라트 2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 / Römisches Reich)'이라는 국명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확립되었고 주변국에서도 더이상 동프랑크 왕국이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콘라트 2세의 아들 하인리히 3세는 즉위 후 아직 황제 대관을 받기 전 상태에 있던 1039년 'Rex Romanorum(로마인들의 왕, 로마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대관 전 황제를 칭하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1157년 프리드리히 1세는 국명에서 로마를 빼고 대신 신성을 넣어 '신성 제국(Heiliges Reich)'이라고 국명을 바꾸었다.

1184년 라틴어로 '신성 로마 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라는 국호가 처음 사용되었다.[12]

이후 15세기 들어 이탈리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1442년 합스부르크 왕조 때 '독일 족속의 로마 제국'을 사용했다. 하지만 15세기 중반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토스카나를 위시한 이탈리아 북서부, 보헤미아, 프랑스 동부(아를 왕국, 브르고뉴 공국 등), 벨기에, 네덜란드 등 비독일어 사용자 영토를 상당 부분 가지고 있었다. 1474년 '독일 족속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국호가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국호는 1485년부터 프리드리히 3세가 본격적으로 사용했으며, 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에 의해 1512년 쾰른 제국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공식 국호로 사용되었다.

약자로는 Heiliges Römisches Reich을 줄인 HRR이 주로 사용되며, 영어권에서는 Holy Roman Empire의 약자인 HRE도 많이 사용된다.

그 외에도 Deutsches Reich, 곧 독일국 내지는 독일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19세기 말부터 2차 세계 대전까지 존재했던 국민국가의 공식 국호이지만, 신성 로마 제국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쓰이는 말이다. 국내 역덕들에겐 "민족 국가도 아닌데 독일이 웬말이냐" 싶겠지만, 정작 서양권 학술서에선 잘만 쓰이는 표현이다.


3. 깃발[편집]


크게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 라이히스파흐네(reichsfahne)[13]와 황제를 상징하는 황제기 쾨니히스파흐네(königsfahne)[14]가 있었다.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1200-1350).svg.png
Reichsfahne(1200년 ~ 1350년)
파일:신성 로마 제국 전쟁기(1200-1350).svg.png
전쟁기(1200년 ~ 1350년)
십자군 전쟁 시기인 1200년경에 만들어져 1350년경까지 쓰인 깃발이자 전쟁기다. 1350년 이후 황제기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지만 17세기 말 빈 포위 때까지만 해도 전쟁기를 들고다닌 경우가 간간히 있었다.

14세기부터는 황제기를 국기처럼 사용하게 된다. 고대 로마의 검독수리 상징을 계승하였으며 오늘날 독일 국장에도 반영되어 있다.
파일:신성 로마 제국 황제기(14세기).svg.png
황제기(14세기)
파일:신성 로마 제국 황제기(1400년대).svg.png
황제기(1400년대 초)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황제기(1433년 ~ 1806년)
1433년 지기스문트 황제 즉위 후로는 쌍두수리를 사용하게 된다.

4.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중심 도시[편집]


17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중부 유럽은 약 1,900만~2,000만명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특히, 당시 중부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50,000명)이자[15] 경제적•지성적 중심지(빈 대학교, 1365년 설립)였던 과, 정치적(1582년 황제 루돌프 2세의 거주지)•문화/예술적•지성적 중심지(프라하 대학교, 1348년 설립)였던 프라하, 상업적 교차로인 쾰른 (인구 40,000명) 등을 수용해, 유럽의 핵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15세기 이전에는 공식적인 통치기구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수도도 있을 수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신성 로마 제국도 다른 나라랑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수도가 있긴 했다. 그 수도는 바로 로마였다. 애초에 나라 이름이 왜 신성 '로마' 제국인지 생각해보자. 하지만, 제국의 주요 영토는 오늘날의 중부 유럽 쪽이라 공식 수도는 로마라지만 나라 남쪽에 수도가 너무 치우친 형태인지라 제국 초기부터 그냥 황제가 사는 곳이 사실상의 수도처럼 기능했다. 즉, 황제가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 그에 따라 수도도 같이 따라다니던 셈이었다. 그나마 1176년 베네치아 조약으로 교황령이 신성 로마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자 아예 나라 밖에 수도가 있는 꼴이 됐는데 그래도 고정적인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들을 들자면 아래와 같다.

의회 (777년 ~ 1806년)


황제의 통치 거처 (794년 ~ 1806년)


황제 대관식

교황 대관식 (800년 ~ 1530년)

선출황제 대관식

로마왕 대관식


황제 선거 (1273년 ~ 1792년)


대법원 (1495년 ~ 1806년)


자문회의 (1497년 ~ 1806년)
  • (1497년 ~ 1806년)


6. 역대 황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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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정치[편집]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는 대대로 황제와 제후들 간의 대립, 대외적으로 외국의 왕[16]이나 아니면 교황과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성 로마 제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는 제국의회와 국가교회정책, 작센 왕조 시기의 동유럽이탈리아 반도로의 진출, 황제 선출과 선제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많은 작위와 영방국가들이 특징이다.

'(서구) 교회의 보호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권력은 제한되어 있었다. 시대에 따라 다르나, 전반적으로 후대로 갈수록 자체 직속 영지를 제외한 제국에 대한 영향력은 떨어져 갔고, 나중에 가서는 끝내 자체 영지 외에 대해서는 명목상의 군주 수준으로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제국 전성기 때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경우들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오토 1세 ~ 하인리히 3세', 호엔슈타우펜 왕조때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기관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이 기관들은 독자적이거나 황제를 견제하는 세력보다는, 법적으로, 또 실제로 황제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재상사무국[17], 제국법원[18], 궁정회의[19], 제국의회[20]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중 재상사무국은 행정적 업무를 도맡아 했고, 제국법원과 궁정회의는 사법권을 행사했다. 제국의회는 비정기적으로 열린다는 점에서, 또 정치적 혼란이 도래할 때 열린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세 기관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제국의회는 입법 겸 각 계층을 대표하는 선거인단(선제후 선거인단, 제후 선거인단, 도시 선거인단)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8. 관직[편집]


신성 로마 제국 관직의 시발점으로 메로비우스 왕조 당시의 프랑크 왕국의 관직들에서 기원된 궁정직이 있다. 초기만 하더라도 그런대로 제국의 실질적인 행정 업무를 전담했으나 중세 중기에 들어서면서 봉건제가 심화되자 점차 특정 제후들이 겸직하는 명예직으로 변질되어 세습직고위직으로 분화되었다.


9. 군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국군(신성 로마 제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황제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영향력[편집]


라틴 제국의 정식 국호인 '로마니아 제국('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로마 땅'의 제국)' 및 황제의 직함(임페라토르 로마노움, 로마 황제), 이탈리아인이 제작한 요안니스 8세 메달의 문구('로마인들의 왕이자 황제')에서 볼 수 있듯이 서유럽인들 역시 동로마 제국을 정식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다. 다만 신성 로마 황제는 교황에게 인정받은 서로마 제국의 후계자라 주장했기 때문에 로마 코무네의 폭도들처럼 동로마 황제뿐만 아니라 신성 로마 황제 역시 로마 황제라고 본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옛 서로마 제국의 강역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국력은 옛 로마 제국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하다보니 구 서로마 영토에 있는 국가들 모두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사실 국력 문제를 넘어서 이걸 인정해버리면 자기들의 지위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 헛소리로 치부하는 게 당연하지만 말이다.

제위는 교황이 인정한 것이었던 만큼 제국 그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 국제적인 공식석상에서는 황제와 선제후를 상석에 앉히는 등 나름대로 예우는 해주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해서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 즉 동양 버전으로는 외왕내제식의 이론을 펼쳐서 황제의 영향력이 자국으로 침투하는 것은 철저히 배제했다.[21]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이런 국가들의 개김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이런 무리한 발언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역은 자연스럽게 황제 본인과 실질적인 봉건계약이 맺어져 있는 독일과 플랑드르, 북부 이탈리아로 좁혀졌다.

(서로마) 교황의 위엄이 닿지 않는 정교회 문화권에선 이 나라를 로마 제국의 후예로조차 보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서쪽에서 '서방인의 황제', 또는 '프랑크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까지는 인정하였으나 '로마인의 황제'라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이 나라는 당연히 '로마'라고 불렸으며, 다른 국가들도 이를 당연한 사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애초에 고대 로마 제국에서 단절없이 쭉 이어져 내려온 동로마 제국과 몇 백 년 후에 갑툭튀해서 로마 제국의 후예(심지어 로마 제국이 아직 동반부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를 자칭하는 "프랑크 족이 세운 왕국" 간의 정통성 차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봐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따라서 정교회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신성 로마 제국이 '새로운 제국'일 수는 있어도 '로마 제국'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황제'였으니 의전서열은 다른 서유럽 왕들보다 위에 있었다. 16세기에 이반 4세루스 차르국이 서유럽과 교류를 시작했을때도 의전에서 1등급 대우를 받은 유럽국가는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또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이라클리오스를 '로마의 군주'라고 지칭한 편지, 경전 쿠란의 여러 챕터들 중 하나인 '로마장'의 존재, 룸 술탄국이라는 국명,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로마 황제(카이세리 룸)'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파르티아사산 왕조의 지배 시절부터 수백년 간 자신들과 투닥거린 동로마 제국을 당연히 '로마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신성 로마 제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 다만 십자군을 비롯한 서유럽인을 '프랑크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볼때 '프랑크'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22]


11. 종교[편집]


신성 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동로마의 정교회처럼 국가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는 핵심 요소였다. 오히려 동로마의 경우 나라의 중심이 되는 국교라는 입장일 뿐이지만,[23] 신성 로마 제국은 애초에 나라의 시작부터가 교황이 (서)로마 황제관을 준 것이 계기이며, 심지어 이 당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서가 위조임이 발각되어서 교황이 없으면 신성 로마 제국이 더 이상 정당한 로마 제국의 후예로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가톨릭과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가톨릭교회가 우위인 관계였다. 현대인의 시각이야 어떻든, 당시 서유럽인의 인식 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후계자이며, 동방의 정교회 제국인 동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서방의 가톨릭 제국이었다. 그리고 개신교가 출현하여 제국의 신앙이 분열되는 순간, 제국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24]

12. 외교[편집]



12.1. [[프랑스 왕국|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프랑스와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오해와 반박[편집]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볼테르,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글(Essai sur l'histoire générale et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중 챕터 70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오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세기 들어서 개신교의 출현과 서방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고 30년 전쟁까지 겪은 18세기엔 실제로 볼테르가 말한대로 주변 왕국들을 휘어잡지도 못하고 종교계에서도 영향력이 약해지는데다가 나라로서의 명분마저 빈약해 볼테르만이 아니라 여러 지식인들이 비슷한 논조로 신성 로마 제국을 무시하게 되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제국은 비교적으로 조용한 확장으로 외적으로 번영을 이루었으나 금인칙서로 인하여 외교권이 각 제후들에게 넘어감으로써 제국 내의 제후들이 성장해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 등으로 성장했다. 특이하게도 신성 로마 제국은 중세 초기 ~ 중반까지는 봉건제답지 않은 강력한 왕권을 지니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황제들이 정말로 (봉건제가 유명무실해질 정도로) 왕권을 강화할 때마다 귀신같이 어린 왕이 등극하거나 아예 혈통이 끊겨 버리는 사태가 계속 발생한다.

특히 결정적인 사건은 대공위시대. 덕분에 다른 나라들이 중앙집권을 향해 나아갈 때 (설령 황제가 속한 가문의 힘이 강력할 지언정)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점점 허수아비에 가까워졌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나는 등의 변수로 결국 중앙집권화는 무위로 돌아갔고 결정적으로 30년 전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패전하면서, 결국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형식적으로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하고[25] 영방국가들이 황제의 통제에서 이탈[26]하여, 겉껍데기가 되었다. 그래도 신성 로마 제국의 실세노릇을 하던 오스트리아는 이후로 국력을 회복하는데 성공해서 헝가리 전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서남부를 확보해 중흥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는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알려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공일 뿐이었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공이 곧 신성 로마 제국의 성공은 아니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명목상 봉신국인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 북부지방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을 제어하려다가 패배를 당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일괄적으로 쇠락의 길을 걸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북독일에서의 패권을 회복하기는 커녕 제국 전체에서의 영향력은 점점 낮아져갔고, 그 상태 그대로 프랑스 혁명 전쟁이 터지자 연합군을 꾸렸으나 결국 나폴레옹에게 패배당하고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14. 각종 매체[편집]


당연하게도 중세를 다루는 역사·전쟁 비디오 게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력이다. 많은 게임 커뮤니티 안에서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짧은 이름들에 비해 너무 긴 국호 때문에 "독일"로 불리거나 "신롬, 신로제, 롬" 같은 약칭으로 지칭된다, 영어로는 "HRE"로 줄여서 칭하며, 우스갯소리로 짝퉁 로마란 뜻으로 "짭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27]

국명에 '신성'이 붙은 게 왠지 간지를 더해줘서 그런지 판타지물에서 신성 ○○ 제국이 주구장창 나오는데, 단연 신성 로마 제국의 명칭의 영향이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5신성 그리핀 제국, 워해머 판타지의 주인공 팩션인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문명 시리즈에서는 문명 4에서 카롤루스 대제를 지도자로 하여 등장했다. 말 그대로 방어에 유리한 특성인 방어적과 정복전 및 영토 확장에 유리한 제국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병 유닛은 물론 근접 유닛을 상대로도 전투력 보너스를 받는 란츠크네흐트를 고유 유닛, 일반적인 법원보다 도시의 유지비를 더욱 크게 줄여주는 시청사를 고유 건물로 가지고 있다. 즉 최대한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방향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잘 맞는다. 이 밖에도 문명 3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를 지도자로 하는 오스트리아 문명이 나온 적이 있으며, 문명 5에 나오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문명도 신성로마제국과 관련이 있고 문명 5와 6의 독일 문명 고유 건물/지구인 한자도 신성로마제국 시절에 있었던 것이다. 또 문명 6 독일 문명의 지도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다.

근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전략 게임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특유의 메커니즘이 잘 구현되어 있다. 실제 역사처럼 유명무실한 나라가 될 수도 있고, 유저의 선택에 따라 중앙집권화를 이루고 열강이 될 수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Europa Universalis IV/신성 로마 제국 항목 참조

14.1. 신성 로마 제국을 모델로 한 가상의 나라[편집]


국명과 역사적 위상이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모티브로 삼은 창작물 속 가상국가들이 많다. 다만 이름만 따온 것들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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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 기준. 오토 1세에 이르기까지 제위 단절이 있었고, 제국으로 보기에는 느슨한 형태였기에 아직까지 소수 의견에 그친다. 다만 룩셈부르크 왕조 이래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신성 로마 황제들은 카롤루스 대제를 독일의 초대 왕이자 제국의 초대 황제로 인식해왔다. 오토 1세 이전에 '카를'을 제호로 쓴 카롤루스 대제를 1세로 보고 그의 후계인 카롤루스 왕조에서 2세와 3세까지 배출했기 때문에 오토 1세 이후 카를을 제호로 쓴 카를 4세카를 5세가 각각 카를 1세나 카를 2세라고 불리지 않고 4세와 5세가 되는 것이다.[2] 오토 1세의 대관 기준. 일반적인 교과과정에서는 대부분 본격적인 제국의 형태를 갖추게 된 962년을 명시한다. 대한민국의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나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 SAT, AT 교재에도 962년으로 서술한다.[3] 이전부터 실질적 공용어였으나 1784년 요제프 2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변경되었다.[4] 지방 제후 차원에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루터교회가 허용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칼뱅파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제국 차원의 국교는 언제나 가톨릭이었으며, 가톨릭은 국교 정도가 아니라 제국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5] 이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제후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사실상 해체되게 된다. 이 시점부터 역사서에서도 유명무실해진 '신성 로마 제국'보다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만을 가리키는 '합스부르크 제국'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등장하게 된다. 다만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신성 로마 제국에는 포함되지 않는 합스부르크 가문 고유의 동유럽 영지도 포함되기 때문에 '후기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제국'이라고 완전히 등치시켜 볼 수는 없다. 그리고 훗날 나폴레옹이 신성 로마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려고 하자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들을 전부 끌어모아 새로 만든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 제국이다.[6] 독일 민족 개념은 19세기 근대 민족주의의 산물로서 제국 당시에는 그런 해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은 시대배경을 무시한 오역이다. 단 제국 당시에는 거주지와 언어와 문화로 구별되는 독일 족속(natio germanica) 정도의 개념은 있었으며 deutsche Nation 자체가 natio germanica의 번역에 불과하다.[7] 단, 이 칭호는 13세기경 처음 공문서에서 등장했다.[8] Alemani에서 유래하는 단어. 원류로는 알자스, 로렌, 스위스 등에서 분포한 고지대 게르만족의 연맹체를 뜻하고, 프랑스, 스페인 등의 라틴 문화권에선 그대로 "독일"이라는 의미로 쓰인다.(현대 프랑스어로 독일은 Allemagne) 사실 저 말이 쓰일 당시의 프랑스는 라틴 문화권의 국가라기보다 게르만의 일파인 프랑크족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당시 저지대 독일에서 그나마 문명화된 쪽이 프랑크였고 그 북쪽의 작센(색슨)은 이제 막 기독교를 받아들이거나 정복하는 도중인 상태였다. 고로 "프랑크를 제외한 문명화된 게르만"의 통칭은 그 나머지인 '알레마니=독일'이 된다.[9] 전신인 독일 왕국 시절 왕명이 '독일인의 왕'이었던 것을 확장한 것이다.[10] 동쪽으로는 만지케르트 전투, 서쪽으로는 바리 공성전과 디라히온 공방전을 거치며 이탈리아와 소아시아 내륙을 잃고 에게 해 연안으로 축소되었다.[11] 노르만과 투르크와의 조우 전까지는 서쪽으로 로마 시 턱밑까지, 동쪽으로 안티오크 등 레반트 북부와 테오도시오폴리스, 반 호수, 바스푸라칸 등 아르메니아까지 뻗쳐 있어, 로마 교황에게 실질적인 억제기가 되었음은 물론, 압바스 왕조의 쇠퇴 속에서 일어난 마르완, 함단 등의 아랍 반(半)독립국들을 속국으로 두었었는데, 불과 몇십 년 만에 제 몸 추스리기도 힘든 수준으로 떨어졌다.[12] 기존에는 1254년 대공위시대 때 대립왕 중 한 명이었던 홀란트 백작 빌헬름(빌렘) 3세가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이라는 국명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서 1184년에 처음 사용된 것이 밝혀졌다.[13] 국기라는 뜻이다.[14] 왕의 깃발이란 뜻이다.[15] 북이탈리아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등 빈보다 인구가 많은 도시가 소수있었다.[16] 특히나 황제는 거의 항상 프랑스 국왕과 대립했다. 바로 옆나라이기도 하고 서로 라이벌이기 때문이다.[17] Archchancelor(영), Erzkanzler (독)[18] Reichsgericht[19] Reichshofrat[20] Reichstag[21] 특히 프랑스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국력과 맞먹거나 더 강했고 뿌리가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프랑크 왕국이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은 황제만 아닐 뿐이지 역사, 정통성, 권위면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도 별로 꿀리지 않았다. 프랑스의 이러한 논리는 서유럽의 지배적인 체제였던 봉건제 시스템에선 당연한 논리였다. 자세한 건 봉건제 문서 참고.[22] 12세기 말, 3차 십자군에 참가했다가 죽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를 두고 이슬람 역사가들은 '독일인의 왕'이라 불렀고, 16세기에 카를 5세-페르디난트 1세 형제와 싸운 오스만 제국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 조약을 맺는 자리에서 페르디난트 1세를 가리켜 로마 황제가 아닌 '독일인의 왕'이라고 불렀다. 오스만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황제라고 불러준 때는 1606년 신성 로마 제국과의 일명 '장기 터키 전쟁'을 끝내고 나서였고 이것도 그냥 황제였지 로마 황제는 아니었다. 이슬람 진영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을 그저 '독일인들의 나라' 정도로 여겼다.[23] 로마는 나라가 훨씬 먼저부터 있었고 그리스도교 국교화는 그 훨씬 뒤였다.[24]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는 지금도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매우 높다.[25] 사실 네덜란드는 실질적으로 스페인령으로 배분되어있었지만, 잉글랜드 국왕이 한때 프랑스 국왕의 봉신 자격으로 한때 프랑스 영토의 40%까지 차지했던 시절이 있던것처럼 지위가 꼬여있는것이 많았다.[26] 북독일에서만 영향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남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던 바덴두를라흐 변경백국, 뷔르템베르크 공국 등도 사실상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게다가 남독일의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던 바이에른 선제후국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2차례에 걸쳐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항했다. 황제의 영향력이 먹히는 지역은 레겐스부르크 등 남부 지역의 일부 제국 도시나 마인츠 선제후국, 트리어 선제후국과 같은 일부 가톨릭 교회령 정도에 불과했다.[27] 마냥 우스갯소리만은 아닌게, 위에 적힌 대로 "신성"이라는 명칭은 몰라도 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을 둘 다 국호에 넣기에는 정통성이 빈약했다. 굳이 했다면 로마제국중 하나를 빼야만 했다. 신성이야 교황이 해결해줄 수 있지만 로마와 제국은 동쪽으로 이사간 진짜 로마 제국이 있는데 이건 교황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교황이 준 것은 정확히는 서로마 제국 황제의 관이었다.신성 서로마 제국[28] 이름만 따온 케이스. 애초에 여기는 기원이 영국 왕실이다.[29] 지배계층인 황가와 6개의 공국 가문들이 전신인 팰컨 제국 시절부터 중첩적인 근친혼을 맺었다는 설정이 있는데, 이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30] 작중에서는 친독 부역자 출신 세르게이 타보리츠키가 세운 국가로 통일 문구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명언인 "세상이 망할지라도 정의를 행하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