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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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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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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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후
명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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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선왕후 최씨
1
의정왕후 김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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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왕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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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제5왕후
신성왕후 | 神成王后

고려 현종의 조모
신성왕태후 | 神成王太后

파일:신성왕후 정릉 1916.jpg
정릉 전경
출생
900년대 추정
신라 금성 김억렴의 사저
(現 경상북도 경주시)
사망
연대 미상
능묘
정릉(貞陵)
재위기간
고려 대량원부인[A]
935년 이후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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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주 김씨
부친
김억렴
배우자
태조
자녀
1남 [ 펼치기 · 접기 ]

종교
불교
작호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A ]
시호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1. 개요
2. 생애
3. 출자에 대한 논란



1. 개요[편집]


고려 태조 왕건의 제5비.

경주 김씨 가문으로 신라진골이자 왕족 출신이다.


2. 생애[편집]


신라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김억렴의 딸이며 경순왕에게는 사촌이 된다. 왕건이 전국 여러 지방의 유력 호족과 정략결혼을 해 부인이 29명에 달하지만, 그 부인들 중에서도 가문의 격이 가장 높은 호족(?) 가문 출신이다. 후삼국시대 신라의 세력이 아무리 약화되었다해도 신라 왕실을 지지하고 따르는 호족들은 상당히 많았고, 역사와 전통을 고려할 때 신라 왕실은 일개 다른 호족 가문들과 일대일로 비교할만한 가문이 아니다. 태조와 혼인한 시기는 935년 사촌인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하고 나라를 바친 직후다.

신라는 성씨가 다른 사람이 국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사례가 기록상에 몇차례 있다. 고대에도 석탈해, 김미추 등이 있고, 왕건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사망한 경문왕왕건과 동시대 사람신덕왕도 신라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성왕후와의 혼인으로 왕건이 신라 황실의 사위가 되어 신라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도 왕씨의 나라를 순순히 따를 수 있는 명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왕건의 적지 않은 나이[1]에도 불구하고 신성왕후와의 사이에서 왕욱이 태어났다.[2] 가문의 격과는 상관없이 다른 부인들에 비해 왕건과 상당히 늦게 결혼했기 때문에, 신성왕후의 아들 왕욱은 왕위와 거리가 멀었다. 결국 차기 왕위는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혜종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왕건은 부인과 아들이 너무 많았고, 고려 초기는 왕위쟁탈전으로 얼룩졌다. 그러나 신성왕후의 손자 대량원군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의 제8대 왕 현종이고, 이후 고려의 마지막 제34대 공양왕까지 모든 고려의 임금들은 모두 현종의 후손이다.[3] 왕건의 29명이나 되는 부인 중 결국엔 최후의 승자(?)라고 볼 수 있다.[4]

사후인 1009년 3월, 손자 현종에 의해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로 추존되었으며, 능은 정릉(貞陵)으로 추봉되었다.


3. 출자에 대한 논란[편집]


대량원부인은 고려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조선시대의 역사서 동국통감에만 나타나는 왕건의 부인 중 한 명이다.

김관의(金寬毅)ㆍ임경숙(任景肅)ㆍ민지(閔漬) 세 사람의 글에는 모두,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李氏)가 태위(太尉) 정언(正言)의 딸로서 안왕(安王, 곧 현종의 아버지 안종(安宗) 왕욱(王旭))을 낳았다.’ 고 하였으니, 어디에 근거한 주장인지 알 수 없다.

≪동국통감≫12 <신라기> 경순왕

고려사에는 후대량원부인 이씨(後大良院夫人 李氏)[5]가 협주 이씨(俠州 李氏) 이원(李元)의 딸로 나오는데 광주원부인,[6] 소광주원부인[7]의 또다른 자매가 혜종의 아내가 되자 후광주원부인[8]이라 불린 걸 고려할 때 후대량원부인 이전에 대량원부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신성왕후가 김씨가 아니라 이씨이며 이정언의 딸이라는 기록도 있다.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대위(慶州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합주(陜州)를 다스리고 있을 때 태조가 이 고을에 행차하였다가 왕비로 삼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김부대왕 인용 왕대종록(王代宗錄)

신성왕후가 이정언의 딸이라는데 안종을 낳았으니 대량원부인과 기록이 일치한다. 하지만 신성왕후는 일반적으로 김씨이며 김억렴의 딸이라고 기록된 것과는 모순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도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할 것이라고 언급하며 신성왕후가 김씨가 맞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정언이 합주를 다스릴 때 납채했다고만 나오고, 둘 간의 혈연관계는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국통감의 찬자들이 혈연관계가 없는 두 인물을 부녀관계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신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억렴의 지위는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로 신성왕후=대량원부인이라는 근거는 충분하다.

한편 안종 왕욱이 신성왕후 김씨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정사인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을 우선적으로 신뢰하여 신성왕후가 김씨가 맞으며 안종 왕욱 역시 그녀의 소생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한편 오기로 인해 착각했을 것이라는 추측과 후대의 조작으로 보는 설도 제기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900년대생로 추정되는 신성왕후가 왕건과 결혼했을 때 나이가 35살 정도로 꽤 많은 편이어서,[9]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전남편이 이정언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도 안종이 신라 왕실의 외손이라는 사실은 유지된다.

따라서 대량원부인 이씨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신성왕후 김씨와 대량원부인 이씨를 동일인으로 보았다.
  • 이상각의 《고려사 - 열정과 자존의 오백년》에서는 대량원부인 이씨의 기록이 고려사에 누락되었다면서 왕건의 부인은 고려사의 29명에 대량원부인 이씨를 더해서 총 30명이라고 보았다.
  • 김창현의 《광종의 제국》에서는 대량원부인 이씨가 현종의 아버지 왕욱의 친모인데, 신라계가 현종을 옹립하고 나서 현종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종의 부친 왕욱을 신라 출신인 신성왕후 김씨의 소생으로 조작하고 대량원부인 이씨를 고려사의 기록에서 삭제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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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출자에 대한 논란" 문단 참고[1] 50대 후반 ~ 60세 사이[2] 여성은 나이가 많으면 임신이 어렵지만 남성의 경우 건강만 괜찮다면 노년에도 자녀를 볼 수 있다. 중국 삼국시대의 조조도 아들 조간을 환갑이 넘겨서 봤고 북한김일성도 70세가 넘어서 딸을 봤다.[3] 즉, 신라 혈통이 고려 왕실에 편입되어 현종 이래로 쭉 이어진 것이다.[4] 다만, 태조의 왕후들 중에서 가장 많은 고려왕을 후손으로 둔 사람은 신성왕후가 아니라 신정왕후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정왕후 항목 참조.[5] 태조의 제13비[6] 태조의 제15비[7] 태조의 제16비[8] 혜종의 제2비[9] 이 때 당시 태조의 보령은 58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