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예비신부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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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범행
3. 공개수배
4. 체포
5. 강제송환 및 구속
5.1. 근 4년 간의 도피생활
6. 형량
7. 여담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97년 1월 1일 내연관계에 있었던 남녀가 결혼 예정이었던 남성의 예비신부를 살해 후 암매장한 사건. 용의자들이 여권 브로커를 통해 신분을 위조해서 미국으로 도피하여 장기 미제사건이 될 뻔했는데 공개수배 사건 25시를 통한 LA지역 교민의 신고 덕분에 극적으로 검거되었다.


2. 범행[편집]


용의자 최수혁(당시 27세, 1969년 4월 12일생~)은 약혼녀 오주예(당시 22세, 1974.04.15~1997.01.01)와 약혼하여 결혼[1]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광주광역시 소재 모 건설회사의 경리직원으로 일하던 정효실(당시 25세, 1971년 7월 11일생~)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1997년 1월 1일 밤[2] 최수혁은 오주예를 광주광역시 동구 산수2동으로 불러내었고 이 과정에서 정효실이 오주예와 심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오주예를 목 졸라 살해했다.[3][4]

현장에 있었던 최수혁과 정효실은 즉시 오주예의 시체를 정부미 포대에 넣고 최수혁의 고향이었던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장동저수지 인근에 유기했다.

이후 1월 5일까지 최수혁은 뻔뻔하게 예비장인이었던 오주예의 아버지와 함께 오주예를 찾아다니면서 목욕탕에서 함께 목욕을 하기도 하면서 도피기회를 엿보았다.

1월 5일[5] 최수혁은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삐삐에 자신과 정효실이 오주예를 살해하였다는 내용을 녹음하여 이들의 범행의 전말이 드러나게 되었으며[6] 이후 최수혁의 결혼자금과 지인들로부터 빌린 돈을 갖고 도피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들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3. 공개수배[편집]


경찰은 두 사람을 잡기 위해 MBC 경찰청 사람들에 공개수배를 의뢰하였고 1997년 2월 4일자 176화와 1997년 12월 16일자 217회로 2차례 용의자를 찾습니다 코너를 통해 방영되었으며 1998년 상반기 중요지명 피의자 종합수배에 정효실이 고유번호 4번 용의자(죄명: 살인)[7]로 수배되었고 1998년 3월 11일 공개수배 사건 25시 4회에서도 공개수배[8][9]되었지만 두 사람의 소재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전혀 포착되지 않았고 결국 미제사건으로 넘어가는 듯 했다.


4. 체포 [편집]


사건 25시에서 공개수배된 지 약 2년 5개월이 지난 2000년 8월 말 목포경찰서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범인들의 소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온 남성은 자신을 미국 LA에 거주하는 교민이라고 밝혔으며 LA 코리아타운에서 판매된 공개수배 사건 25시 녹화 비디오를 시청했는데[10][11] 그게 바로 최수혁과 정효실이 공개수배된 회차였고 자신이 방문한 롱비치의 한 슈퍼마켓에서 두 사람과 매우 유사한 한국인들을 봤다는 제보를 해 온 것이다.

이에 목포경찰서는 사건 당시 배포된 수배 전단지를 제보자가 알려준 LA 현지 주소로 보냈고 이를 받은 제보자가 전화를 걸어와 동일인물이 확실하다는 답을 하자 경찰청 외사과를 통해 INSLAPD와 공조수사를 시작하였으며 제보가 들어온 지 약 2개월 후인 2000년 10월 17일(현지시각) 롱비치 슈퍼마켓에 출근한 두 용의자를 체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5. 강제송환 및 구속[편집]


두 사람은 김성민, 김현미라는 이름의 여권을 제시하면서 불법체류 사실만 인정할 뿐 자신들이 최수혁, 정효실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LAPD가 이들의 지문을 채취하여 한국 주민등록 시스템의 지문과 대조한 결과 최수혁, 정효실임이 드러났지만 동명이인이라면서 자신들의 범행을 부인하는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관련 기사

이미 한-미 사이 범죄인 인도조약은 1998년 6월 발의되었고 1999년 12월부터 시행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대로라면 위 2명은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한국으로 송환이 가능했지만 아직 그런 선례가 없었던 터라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았다. 일단 송환 요청을 위한 서류의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던 터라 우선 불법체류자 자격으로 LAPD를 설득하여 이들을 우선 구금하였으나 두 사람이 캘리포니아 법원에 보석금을 지불하여 가석방을 신청할 의사를 보였다.[12]

이에 대한민국 경찰청은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 제 10조에 의거한 긴급인도구속[13]을 신청했다. 이를 캘리포니아 법원에서 받아들이자 이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한국 귀국 후 범죄 사실을 진술할 뜻을 밝힘과 동시에 불법체류자로서의 추방 형식의 자진귀국 의사를 밝히면서 2000년 10월 30일(현지시각) 아시아나항공 204편(OZ204)을 통해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10월 31일(한국시각)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남도경 목포경찰서 형사들에게 신병이 인계되어 구속되었다.


5.1. 근 4년 간의 도피생활[편집]


검거된 두 사람이 목포경찰서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범행 직후 최수혁의 친척이 빌려준 차를 타고 남해고속도로를 통해 부산광역시로 이동했고 나중에는 서울특별시로 올라와 한양대학교 인근 자취방을 얻어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도피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14] 여권 브로커에게 500만원을 내고 위조 여권을 구입해 최수혁이 1997년 11월 '김성민'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으로 출국했고 정효실도 1998년 1월 '김현미'라는 이름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15]

그렇게 미국에서의 도피 생활을 시작한 두 사람은 로스앤젤레스위성도시롱비치히스패닉 타운 슈퍼마켓에서 종업원으로 근무하면서 은신하고 있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한 불법체류자 신분인 데다 미국에서 정식 취업할 정도의 기술도, 언어 구사 능력도 없었고 도피자금의 상당수를 위조여권 구매에 써 버린 만큼 다소 치안이 불안정한 지역에 은거하면서 낮은 수입으로나마 도피자금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롱비치 자체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콤프턴 및 카슨(Carson) 같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치안이 제일 불안한 지역과 인접해 있어 치안이 좋지 않은 편이다.

두 사람을 자주 접해 왔던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항상 어두운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집과 슈퍼마켓만을 오갔다고 하는데 KBS 공개수배 사건 25시 제작진이 목포경찰서를 방문했을 때 최수혁이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주변의 멕시코 출신 이민자한테 운전면허증을 받아서[16] 거주지로부터 먼 슈퍼마켓에 출퇴근했기에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으며 미국에서 죄를 짓지 않으면 체포는 당하지 않을 거라 안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설마 자신들이 공개수배된 사건 25시 방영분이 하필 LA 코리아타운에서 해적판으로 판매되었고 그걸 본 사람이 자신들을 목격해서 검거될 줄은 몰랐을 듯. 그래도 미국 생활이 마냥 편했던 건 아니었는지 목포경찰서로 압송되어 왔을 때 심정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최수혁은 "후련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6. 형량[편집]


2001년 4월 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 결과 정효실에게 징역 18년, 최수혁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17] 관련 기사

2001년 7월 26일 광주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 결과 정효실에게 10년, 최수혁에게 4년이 선고되었다.[18] 이때 최수혁은 상고장을 냈다가 철회하여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고 정효실은 애초부터 상고를 포기했지만 검사가 정효실의 형량에 대해 상고장을 내면서 대법원으로 가게 되었다.

2001년 12월 27일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19] 정효실의 형량은 10년으로 확정되었다.[20] 두 사람이 가석방 등의 혜택을 받지 않았다면 정효실은 2010년 10월 30일, 최수혁은 2004년 10월 30일에 만기 출소한 것으로 추정된다.[21]

또 최수혁, 정효실의 도피 행각을 도운 친척 최모씨도 1심에 함께 회부되었는데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 항소심까지 가지는 않았다.


7. 여담[편집]


  •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이 발효된 뒤 처음으로 실제 집행된 사례라서 제법 상징적인 사건으로 회자된다.

  • 추방 형식으로 용의자들을 쉽게 내주던 90년대와 달리 2000년대에는 국가들이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여 용의자들을 정식으로 소환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형식으로 바뀌고 있었던 데다 범죄인 인도조약 초창기라 상당히 많고 까다로운 서류 절차로 인하여 체포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사건은 불법체류 및 긴급 인도 구속이라는 편법을 이용하여 범죄인을 인도받은 사례이기도 한데 만약 아래 내용 중 한 가지라도 포함되어 있었다면 긴급인도구속 조건이 충족이 안 되어 보석금 지불 후 다른 주 혹은 멕시코[22]로 도피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1) 살인이라는 중범죄자가 아니었거나[23]
2) 이들이 미국에서 불법체류 중 다른 범죄를 저질러서 미국 법령에 따른 처벌 대상이었거나
3) 이들이 살인 용의자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어 우선 단순수사 대상자였거나

이렇듯 이 사건은 이태원 살인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 경찰청 외사국의 적극적인 노력이 범죄자들의 빠른 송환을 이끌어내는 길임을 증명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 두 용의자의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KBS 공개수배 사건 25시에서는 2000년 10월 28일자 방영분을 통해 검거 소식을 간략히 소개했고[24] 두 사람의 압송 장면과 인터뷰를 취재한 뒤 2000년 11월 4일 방송분에서 좀 더 상세히 다뤘다.

  • MBC 경찰청 사람들에서 2차로 공개수배된 1997년 12월 16일자 방영분에서는 목포경찰서 형사가 범인들의 해외 도피 가능성을 언급했다. 실제로 이 시점에 최수혁은 이미 미국으로 달아난 상태였고 정효실도 출국 2개월 전이었으니 정확한 판단이었던 셈.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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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7년 1월 11일 13시 30분 광주광역시 소재 모 교회에서 식을 올릴 예정이었고 으로 신혼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2] 상술한 결혼식이 있기 열흘 전이었다.[3] 이는 두 사람이 검거된 후에 밝혀진 사실로, 사건 당시에는 남성인 최수혁이 오주예를 살해하고 정효실은 사체유기에만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4] 사건을 벌이기 전에 정효실은 최수혁의 결혼 소식에 두 차례 음독자살까지 시도하였다.[5] 피해자 가출신고 후 경찰서에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 예정일이었다.[6] 최수혁은 사과의 뜻과 함께 장례를 잘 치루어 달라는 당부와 오주예의 시체가 유기된 곳을 설명하는 내용을, 정효실은 부모에게 부모, 형제 모두 버리고 사랑을 택했고 이제 어떻게 되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7] 수배될 당시 흑백 사진으로 등록되었다. 당시 2번은 동일한 범죄(살인)로 최초 수배된 박래현, 7번은 제천 노인 살인사건의 범인 박종수였다. 자고로 1998년 상반기는 1997년 하반기(3번), 2003년 하반기(4번), 2008년 상반기(1번)처럼 여성 살인용의자가 수배되었던 몇 안 되는 케이스였다.[8] 상술한 살인용의자 박종수도 같이 수배됐다.[9] 경찰청사람들 251회 방영분의 제일 끝에 강력계 형사가 말하는 장면에서 정효실이 수배된 1998년 상반기 수배 전단이 등장하는데, 방송에서는 글씨가 작아 자세히 확인되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살인용의자일 경우 강도살인(당시 명칭은 강도치사)이 아닌 이상 특정한 경우에는 오른쪽에 괄호로 세부적으로 어떻게 살해했는지 기재했었다.[10] 다만 이 비디오는 개인이 녹화한 걸 재판매한 해적판이다. 공개수배 사건 25시는 출연한 재연 배우들의 인권 문제도 있고 나중에 검거되거나 자수한 용의자들에 대한 초상권 시비 우려 때문에 복사 판매나 재방송을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공식 홈페이지가 만들어진 직후인 2000년 5월 20일자 방영분부터 다시보기가 리얼 플레이어 스트리밍 방식으로 제공되었는데 이것도 2001년 1월 27일 방영분까지였다.[11] 인터넷 시대 이전 교민 사회에서는 한국의 공중파 방송을 VHS 테이프로 녹화하여 현지 교민 비디오 대여점에서 이를 들여온 후 사람들이 빌려다 보는 문화가 매우 일반적이었다. 당연히 저작권/저작물배포권 등이 완전히 무시되었으므로 한국에서나 현지에서나 불법이지만 당시엔 인식도 약했고 지금처럼 한국 콘텐츠의 해외수출 판로가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기 때문에 한국이나 해외나 단속할 이유도, 의지도 없었다. 드라마/예능/애니메이션(공중파 더빙) 등 아주 광범위하였으며 녹화-복제-비행편으로 공수 등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통상 방송일로부터 2주 가량이 소요된다. 당연히 인터넷 시대 이후 인터넷으로 토렌트, 스트리밍으로 보급로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비디오 대여점 항목의 해외 문단 참조.[12] 미국은 중범죄자들이더라도 엄청나게 위험한 자로 간주되거나 연방 주요 피의자가 아닌 경우 보석이 쉽다.[13] 긴급한 경우, 일방당사국은 외교경로를 통하여 인도청구될 범죄에 대하여 체포영장이 발부되었거나 형이 선고되었음을 통보하고, 범죄인인도를 청구할 것임을 보증함으로써 인도청구될 자에 대한 긴급인도구속을 타방당사국에 청구할 수 있다.[14] 앞서 언급했다시피 사건 직후인 1997년 2월에 MBC 경찰청 사람들을 통해 공개수배된 상태였다.[15] 당시 경찰청 사람들 역시 공개수배 범인 검거율이 제법 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여권 사진을 찍을 때와 출국할 때 다소 변장해서 공항 검역 직원들의 눈을 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공개수배된 사진과 유사하게 다녔다면 진작에 검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16] 정황상 위조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7] 사건번호 :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2000고합128.[18] 사건번호 : 광주고등법원 2001노235[19] 이때의 담당 검사는 훗날 국회의원을 지낸 임내현이다.[20] 사건번호 : 대법원 2001도4434[21] 징역이나 금고 등의 구금형의 형량은 최초 구속 날짜로부터 계산한다.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여 구속된 2000년 10월 31일이 시작 날짜인 것.[22] 당시 멕시코는 시우다드후아레스 연쇄살인사건 등으로 인해 치안이 나빠지고 있었으며 마약 카르텔이 한창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닉이 쉬웠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소노라나 시날로아 같은 곳으로 도피가 가능할 정도이며 치와와로 튀어도 은신이 가능할 정도다.[23]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인도가 가능하다는 ‘최소중요성의 원칙’에 의거[24] 다만 이 날 방영분은 다시보기가 제공되지 않았는데 여권 위조 사건으로 공개수배된 용의자 중 1명이 실제 범인이 아니라 명의 도용 피해자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