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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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泳柱
1916년 10월 2일 ~ 1977년 12월 17일 (향년 61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 정치인이다. 본관은 영산(靈山)[1], 호는 하운(夏雲), 창씨명은 시게미츠 에이츄(重光泳柱).

2. 생애[편집]


1916년 10월 2일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아버지 신진하(辛鎭厦, 1873. 8. 11 ~ 1955. 5. 15)와 어머니 경주 김씨(1880 ~ 1967. 4. 24)[2]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이후 경찰공무원에 입직한 뒤 동아대학교 법정학부 법률학과에도 다녔으나 3학년 때 중퇴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이던 1941년 10월 치러진 경상남도 경부경부보 고시시험에 합격해 일본 제국 경찰에 입직했고, 1942년 거제경찰서에서 근무했다.

8.15 광복국립경찰전문학교 행정과를 수료한 뒤 경찰공무원이 되었고, 경감에 올라 1945년 11월 13일부터 1946년 10월 25일까지 초대 경남 고성경찰서장(경감)을 역임했고, 1946년 9월 27일부터 1946년 10월 6일까지 제3대 통영경찰서장(경감)을 역임했다. 1946년 10월 7일부터 1947년 1월 3일까지 진주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1947년 제7관구경찰청 제9구경찰서장을 겸했고, 1948년 6월 24일부터 1950년 5월 10일까지 경상남도경찰국 사찰과장(총경), 1950년 5월 19일부터 1950년 7월 18일까지 제6대 부산동부경찰서장(총경), 1950년 7월 19일부터 1950년 9월 24일까지 다시 경상남도경찰국 사찰과장을 역임했다. 1952년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 총경을 역임했고, 같은 해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에 남지고등학교의 전신인 남지일민고등학교를 세우고 초대 재단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53년 10월 5일부터 1954년 3월 6일까지 제12대 충청남도경찰국장(경무관)을 역임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녕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하을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당 하을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이재현, 현오봉, 최석림, 박상길 등과 복당하였다.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는데, 3.15 부정선거 관련자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지역구 내의 반발이 극심하였다. 결국 민주당 박기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7월 30일 오후 3시에 창녕군 개표소 부근에서 반혁명세력 규탄을 부르짖는 시위대에 납치된 뒤 등 뒤에 "내가 신영주입니다. 자유당 때 돈 많이 먹었읍니다."라고 쓴 쪽기를 붙이고 개처럼 시위대 선두에 서서 거리를 돌다가 끝내는 시위대에 집단폭행을 당하는 사건 또한 있었다. 이듬해인 1961년 초에는 3.15 부정선거 가담자라는 이유로 반민주행위자로 분류되어 공민권이 제한되고 피선거권이 상실되었다.

1963년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했고, 경상남도 창녕군지구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26일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았다. 3.15 부정선거 가담자라는 게 논란이 되었으나 공천은 강행되었고, 결국 경상남도 창녕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6대 국회 기간 동안에 아시아의원연맹 제1차·제2차 총회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성낙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때 변절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성낙현에게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밀리자 반발하였다가 해당 행위자로 제명되었다.

이후 재단법인 국민대학교 이사, 천일여객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77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녕군)


22,218표 (43.94%)
낙선 (2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녕군)

[[무소속|
무소속
]]

20,883표 (39.36%)
당선 (1위)
초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녕군)
16,312표 (28.66%)
낙선 (2위)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녕군)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23,759표 (42.95%)
당선 (1위)
재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녕군)
27,492표 (45.89%)
낙선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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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28세 영(泳) 항렬.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영산·영월신씨중앙종친회장도 역임한 바 있다.[2] 김성규(金聖奎)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