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여(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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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우여2.jpg
성명
신우여(申禹汝)
이명
신대필(申大弼)
생몰
1882년 7월 28일 ~ 1923년 3월 26일
출생지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사망지
러시아 연해주 연추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신우여는 1882년 7월 28일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부모와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이후 그곳에서 중등학교에 재학하던 그는 1919년 3월 28일 중국 훈춘에서 조선인 4,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하영(李河英) 등과 함께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여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같은 해 김규면이 지도한 신민단(新民團)에 참여하였으며, 문창범, 이동휘 등의 지휘아래 의용병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 6월, 신우여는 신민단의 부대장으로 러시아 연해주 쟈피거우 부근 시베창에서 전투를 벌였다. 1921년 러시아 연해주 수이푼 지역 한인 빨치산들의 통합 움직임에 따라, 1921년 7월 러시아 연해주 수이푼의 솔밭관 한족공산당의 부대에 합류하였다. 여러 한인 빨치산 부대들이 모인 솔밭관 한족공산당 부대는 1922년 김경천 군사부장을 중심으로 총사령관 최추송, 참모부장 최성삼이 임명되었으며, 신우여는 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에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연해주 총지부의 서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한국내 관헌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50세 이상 60세까지의 노인으로써 노인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해 6월 200여 명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40여명을 섬멸했다. 그후 그의 부대는 그로제꼬보와 한까 구역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25일 연해주 주둔 일본군의 철수와 동시에 연해주에서는 백군과 적군간에 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때 신우여부대도 적군 편에 서서 그라데꼬보와 흥개호 일원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적군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뒤 한인 빨치산 부대들에 대한 무장 해제와 해산이 시작되자, 그는 연추로 가 가족들과 상봉하였으나 병에 걸려 1923년 3월 26일에 사망했다.

신우여의 조카 나제즈다 신 씨의 증언에 따르면, 신우여는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는데,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중앙아시아와 연해주, 중국 등에서 살다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008년 6월 12일 KBS와 인터뷰를 가진 나제즈다 신 씨는 혹시나 신우여의 후손을 만날까 하는 기대를 안고 병원에 10일 이상 다니면서 간신히 몸을 추슬러 고국에 왔는데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 것에 깊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신우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