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 반공학생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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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참고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총소리가 몇방 땅땅 하고 났다. 방을 뛰어나와 정문 앞을 나가니 저기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오는 것이 보였다. 보안부장 한웅이란 놈, 그 부하 차정삼이란 놈이 “쏴라! 쏴라!” 다급하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 다다 학생들은 티끌을 차며 도망했고 문앞까지 들어왔던 몇이 꺼꾸러졌다.

그 광경을 보고 저기 멀건이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건만 아무도 가까이 오려하지도 않았다. 청사 안에 직원도 여러 백명이건만 어디 간지 뵈지도 않았다. 하는 수없이 나는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문교부 직원 몇을 데리고 나왔다. 가보니 셋이 넘어져 있지 않나.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쓴 채 엎어진 것도 있고 자빠진 것도 있었다. 쓸어안아 일으켰다. 죽었구나! 죽었구나! 26년이 지난 오늘 이글을 쓰면서는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어 글자를 완전히 이룰 수 없지만 그때는 눈물도 나올 수 없었다. 아직도 따근따근한 몸인데 눈을 번히 뜨고 말이 없었다. 왜 죽었냐? 왜 죽었냐?

함석헌, 씨알의소리 1971년 11월 6호에서


자 쏠테면 쏘아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죽어도 좋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8일자 2면에 실린 학생의 총을 겨누는 보안대에 대한 발언에서


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시에서 중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치며 일으킨 반소-반공 의거. '신의주 학생의거'로도 많이 지칭된다.

2. 설명[편집]


1945년 11월 18일 평안북도 용천군 용암포읍에서 열린 기독교사회민주당의 용암포 지부 결성 대회에서 평북자치대 용암포 대표가 기념사를 통해 폐교 조치된 수산기술학교의 복구를 요구하고 공산당의 불법을 규탄하자 이를 지지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단순히 공산당의 불법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군정은 북한에서 상점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전쟁범죄를 일삼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태라기보다는 소련군의 약탈적 행위와 현지 공산당의 횡포에 대한 반감이 쌓여 발생했다는 평가가 있다. 기독교사회민주당 대회에 소련군정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현 조선노동당)은 경금속 공장직공을 동원하여 기습했고 평안교회 장로를 현장에서 죽이고 학생과 시민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11월 23일 이 소식에 격분한 신의주시 6개 중학교의 학생들과 부근의 5,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반소 반공을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으며 공산당 본부, 인민위원회 본부, 보안서를 조를 짜서 습격하였다. 당시 그들이 외친 구호는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등이었다. 이에 시위대를 향한 공산당의 보안대와 소련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23명의 학생이 피살됐고 7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2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투옥됐다. 공산당 소속의 보안대와 무장한 소련군에 의한 참혹한 진압에는 T-34Yak-3도 동원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48~50명 사망이라고 하는데 북한 당국이 실효지배 중이고 시일마저 오래되어서 어느 숫자가 맞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신의주시 보안서에 모두 가둘 수 없어 신의주시 인민위원회 건물에도 끌려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고문을 당한 학생들의 대다수는 도 보안부로 이송되었고 주모자라고 생각되는 학생들은 소련군 비밀경찰에 넘겨젔다.

김일성은 진압이 완료된 1945년 11월 23일 오후 4시 강상호, 최용림, 전병호 등을 데리고 소련군용 헬리콥터로 신의주시로 이동했다. 소련군정은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저들의 앞잡이에 불과했던 김일성을 사건 다음날에 신의주 현지로 내려 보냈다. 소련군정의 당시 기록에 의하면 소련 공산당의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길거리가 온통 빨간 페이트칠이 되어 있는 것을 본 김일성이 마중 나온 김일에게 "저 뼁끼(페인트) 자국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이에 김일은 "소련군 직승기(헬리콥터)가 주모자들을 잡으려고 뿌린 뼁끼"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김일성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미련한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11월 24일 10시 김일성은 신의주 동중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대해 연설하고 11월 25일 용암포를 들른 다음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공산주의자인 한웅 등이 숙청되었고 일부 학생들이 선동당했다고 하여 사건의 파급력을 북한에서 축소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때 검거된 학생 주모자들과 '우리청년회'라는 주도 세력으로 간주된 우익 단체는 시베리아까지 끌려갔다가 6.25 전쟁이 끝난 후 북한으로 다시 이감되었다. 시베리아 복역 기간 동안 학생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철저한 사상교육을 받았으며 사상 개조가 철저히 이루어졌다고 판단된 사람만 출소되고 나머지는 다시 북한의 교화소에 갇혔는데 당시 북한 교화소에서는 주 1~2회 정도 사상개조 정치학습을 실시했다. 그런데 북한 사회에는 그때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잘 아는 사람이 없던 반면 이들 학생들은 소련에서 복역하는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선 '뚝 떼어버려서' 교원들의 강습을 날카롭게 지적했고 덕분에 교원들이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1959년에 이들은 18호 관리소로 옮겨졌고 이후 거기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에 KBS에서 이때 체포되었다가 시베리아의 끄트머리인 축치 반도에 위치한 추코트카까지 끌려갔던 한인 몇 명의 발자취를 탐사한 적이 있다. 해당 지역 자체가 러시아에서도 타 주, 공화국과 연결되는 고속도로와 철도 모두 깔리지 않을 정도로 교통망이 매우 불편한 오지였던지라 찾아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이들은 축치에서 가정을 이루며 정착하다가 1990년대 말에 모두 세상을 떴다.

후일 한국 민주화의 대부이자 퀘이커 신자인 함석헌 역시 이 사건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당해서 소련군정에 의해 투옥당했다. 결국 그는 고향을 등지고 1947년 남한으로 넘어왔다. 소련군 감옥으로 이송된 인사들도 상당하였고 결국 신의주 학생의거 관련 증언의 대부분은 월남에 성공한 함석헌의 자서전 내용이 바탕이 되었다.

훗날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장도영이 신의주 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시기에 소련 전투기가 시가에 늘어선 학생들을 향해 기관총 소사를 퍼붓는 모습을 학교 건물 2층에서 직접 목격했다. 장도영이 저녁이 돼서 알게 된 사실은 시내의 모든 중학교 학생들이 단합해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으로 공산당 본부를 비롯해 그 휘하의 여러 관공서를 기습점유해 그들의 학정을 전복하려던 반공학생들의 궐기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김일성이 사태 수습을 위해 동중학교에 강연하러 오자 이것도 직접 보았다. 이때는 다들 그를 김일성 장군 사칭자로 믿고 있었던 데다 옷차림이 너무 보잘것없어 방문 자체를 우습게 여겼으며, 그가 떠난 후에도 학생들이 그의 말투를 흉내내며 장난쳤다고 한다.

한동안 이 사건은 남한의 반공 교육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냉전기에는 국민학교 도덕 교과서에 1956년 헝가리 혁명과 함께 수록되기도 했다.[1] 이미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대대적으로 홍보되었으며 장면 내각도 2.28 학생민주의거와 더불어 학생 주체의 정치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념했다. 물론 이후 군사정권에서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11월 23일을 반공 학생의 날로 기념하였다. 교과서에는 M 계열 미국 전차를 연상시키는 소련 전차 군단에 수백 명의 학생시위대가 돌진해서 집단으로 죽는 그림이 실렸다. 70년대 초반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되었으나 이후에는 서서히 잊혔다. 2020년대에도 이를 기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노년층이 주류다.

3. 참고[편집]


(네이버 지식백과)신의주반공학생의거
(함석헌, 씨알의 소리)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동아일보 블로그, 신의주학생사건 보도
김주원,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월남의 뿌리, 반공-학생의 기원 - 신의주 학생사건의 재현 방식 연구
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실상


4. 관련 문서[편집]



[1] 물론 헝가리 혁명은 너지 임레에 대한 소련의 탄압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고로 임레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우익 진영에서 반공 선전용으로 사용하면서 반공의거로 각색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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