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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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在孝
1812년(순조 12) ~ 1884년(고종 21)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이자 작가. 본관은 평산(平山)[1] ,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2. 생애[편집]
1812년 전라도 고창현(現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아버지 신광흡(申光洽)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상려(金常礪)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7년(고종 14) 한량으로서 은수룡(殷壽龍)과 함께 빈민 구휼을 위해 돈 500냥을 기부하여 그에 대한 포상으로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이후 가선대부 호조참판에까지 올랐다.
종래 계통없이 불리어오던 광대 소리를 통일하여 12마당을 《춘향가》, 《심청가》 등 6마당으로 정립, 체계를 이루고 독특한 판소리 사설 문학을 이룩하였다.
그는 판소리의 흥행 가능성(?)을 내다보고 광대패를 조성하는가 하면 현재 개념으로 보자면 연예 기획사에서 아이돌 양성까지도 해냈다. 그 때까지의 판소리 가창자는 성량으로 승부하는 남성 위주였지만[2] 신재효 이 사람은 여성 가창자를 키우는가 하면, 싹이 보이는 아동을 가르쳐 소리를 하게 했는데 이게 당시로선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시도였다.
이렇게 아동에게 소리를 하게 하는 것을 童唱이라 하는데, 신재효는 동창용 판소리를 또 따로 집필해(동창 춘향가) 부르게 했다. 문제는 이 동창용 판소리에 음담패설이 무지막지하게 많았다는 것... 사실 지금이나 당대에나 문제거리로 지적될 일이지만 어린애가 음담패설하는 걸 듣고 좋아라 한 인간이 많았던 모양이다.(...)[3]
평소 판소리를 매우 즐겼던 흥선대원군도 신재효와 진채선의 재능을 인정해서 운현궁에 자주 부르는 등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3. 기타[편집]
- 신재효 판소리 필사본인 고수 청계본의 완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판본은 모두 1940년대 이후에 정리된 것이라 하며 19세기 당시의 언어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 한다.#
[1] 현령공파 27세 재(在) 항렬.[2] 남창(男唱)[3] 다만 판소리 창법은 성대에 특수한 결절을 생성하는 노래 방식이기 때문에, 성장기의 성대에 결절이 생기면 성장 후엔 목소리를 아예 잃게 된다. 심심찮게 TV에 나오는 판소리 영재들이 성장 후엔 왜 소리없이 사라지는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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