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재령군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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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전개
2.1. 이후
3. 남한 측의 인식
4. 북한 측 주장
5. 진위 여부
5.1. 1972년 경향신문 기사
6. 기타


1. 개요[편집]


영어: Sinchon Massacre

대한민국과 해외 학자들은 신천·재령군 봉기라고 하며 정확하게 말하면 신천 말고 다른 지역에서도 함께 봉기했으므로 황해도 봉기다. 이 사건은 6.25 전쟁 와중인 1950년 10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황해도 신천군재령군에서 발생한 북한군과 공산당원에 대항한 봉기양민학살을 말한다. 학살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주동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북한에서는 신천 대학살이라고 부르며 미군홀로코스트 전쟁범죄라고 주장하지만 증거가 없고 대체로 북한군의 철수 과정에서 범죄, 봉기 과정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상호학살로 많은 희생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 출처[1][2] 또 이에 따른 북한군중공군의 보복으로 많은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2. 사건 전개[편집]


전쟁 전부터 황해도 신천군에서는 김일성 일가와 소련군과 함께 비밀리에 연대한 반국가단체들이 저질렀던 사상 검열, 학살, 이외에도 각종 갖은 박해와 재산강탈 및 문화재 반출, 소련군정의 지원 아래 김일성 세력이 일방적으로 실시한 토지개혁 여파로 인한 재산 강탈과 그에 저항하는 갈등, 기독교 탄압, 예비검속 등에 맞서 저항하여 대한광복회·반적대(反赤隊)·반공구국동지회·구국기독동맹 등이 조직되어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북한의 남침 이후 북한당국의 감시를 받던 전 민주당원·반공적인 학생들이 북한군의 징병을 피해 구월산으로 도피하였다가 1950년 7월 중순 반공단체의 대표들이 모임을 갖고 '광복회' 혹은 '구월산반공유격대'[3]를 결성하였으며 입산하지 않는 학생들도 각 면, 읍내 학교와 단체를 포섭하였다. 이들은 유엔군의 참전 사실을 알고 대한민국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서로 연락체제를 갖추고 지하 조직을 강화하여 전단살포·총기 탈취·경비 초소 습격 등을 진행했다.

특히 1950년 10월 9일 사리원에서 해주 방면으로 가는 무기수송 트럭이 재령을 통과하게 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재령의 권영화는 홀로 북한군 트럭을 급습하여 소련제 장총(아시바 소총) 19상자 214정을 노획하였다. 이후 신천광복회의 김순겸·호순겸이 북한군 복장으로 가장하고 재령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재령의 권영화·김화경·정자환과 접촉해 소총 10상자 114정을 이관받았다. 유엔군이 해주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12일 대원들은 무장봉기를 위해 총지휘관 신상규[4]·구월산유격대 김옥·북부대 홍태환 등을 조직별 책임자로 결성하고 14일 신천과 재령에서 동시에 거사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10월 13일 낮에 안악과 재령에서 봉기에 대비해 총기를 분배하던 도중 인민군에 적발되어 일찍 봉기를 일으켰다가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진압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당했던 것보다 가혹한 예비검속을 우려한 신천의 반공 세력은 10월 13일 오후 6시부터 산발적으로 저항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오후 9시에 본격적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재령에서 후퇴한 반공 인사들이 합세한 신천무장대는 그날 밤과 익일 새벽 내내 치열한 전투를 펼쳤는데 그 과정에서 신천서부교회의 김익두 목사와 신도들이 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동시에 무장대는 신천내무서를 공격했다. 공산군의 저항이 강해서 이튿날까지 전투가 계속되었고 14일 정오 무렵 내무서를 완전 점령했으며 맥주병으로 만든 화염병을 내무서에 투척하여 전소시켰다. 내무서원들이 도망가자 감옥에 억류되어 있는 반공청년 80명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이틀 동안 적들에 의해 살해된 수많은 시체를 발견했다. 산천여고, 정치보위부 지하실, 군당방공호 등에서 발굴된 시체는 1,000여구가 넘었다.[5] 반공무장대원들은 이에 흥분하여 마을에서 공산주의자를 찾아내 사살했다. 민간에 대한 가택수색과 거리검문 등으로 많은 주민들이 연행당했던 신천 시가지에서 남산에 대형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속에 무장한 의거대원 3명이 3개 대로 나누어 시가지로 돌격해 왔다. 의거대는 검찰청·내무서·인민위원회·정치보위부 등을 점령한 다음 문화극장의 유선방송을 통해 의거대가 시가지로 진입한 것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각 면에서도 동시에 봉기하여 내무서 분주소와 면 인민위원회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공산당 군당본부과 온천면으로 집결한 내무서원과 공산당원들이 의거대를 공격해 왔고 해주로부터 22대의 트럭을 타고 반격해 왔다. 마침 이 때 아군 전투기 4대가 적측에 기총사격을 가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의거대는 일제히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10월 17일 적을 물리치고 18일 저녁에 입성한 유엔군에게 봉기 기간 활동사항을 보고하였다. 의거대가 승기를 잡으면서 조선로동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 가해졌는데 10월 14일, 신천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황해도 인민위원장 리용진도 잡혀서 발가벗겨진 채로 가슴에 직위, 등에 이름이 쓰인 채로 조리돌림을 당한 후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한 10.13 만세운동 주동자 김봉선의 아들이 신천읍 민청사무실 전선대에 리용진을 묶은 후에 총을 쏘아 죽였다. 한편 유엔군의 북진을 피해서 인민군과 로동당,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신천군에서 봉기가 일어난 줄 모르고 신천군에 온 이들은 모조리 잡혀서 인민군은 무장해제 후에 모조리 총살당했고 노동당원들은 휘발유를 끼얹은 후에 군당 방공호에 몰아넣고 남녀 가리지 않고 산 채로 태워 죽였다. 이후 노동당원의 가족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으며 과거 노동당에 협력했거나 노동당원이었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지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등 아비규환의 살육극으로 치달았다.

의거대를 경찰대(대장 김장성)로 조직하여 치안유지를 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 지역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신천 무장치안대는 향토 사수를 다짐하고 구월산에 잠복해 있다가 하산하는 북한군 공비와 항쟁을 벌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와 유엔군이 후퇴하자 12월 7일 신천무장대도 군민들과 함께 해주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후퇴하기 직전 신천무장대는 그동안 좌익으로 의심되었던 이들을 마지막으로 학살하고 떠났다. 해주에 당도한 신천무장대와 군민들은 해로를 통해 월남을 시도하였으나 국군이 신천 주민들의 해주 진입을 막으면서 무산되었다. 신천에 아직 중공군이 진입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신천무장대는 다시 신천으로 북상하여 12월 19일 안악의거대와 협동해 신천을 탈환하였다. 이후 재령 방면에서 공격해 온 북한군과 맞서 신천읍을 세 차례나 빼앗기고 빼앗았다. 신천무장대는 향토 사수를 결의하고 잔류하기로 결정했으나 구월산으로 숨었던 북한군 패잔병들이 신천읍을 거듭 공격하여 무장대원들이 이를 방어하는 데 한계에 도달하고 피해가 누적되자 본대는 1950년 12월 21일 옹진을 통해 인근 섬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신천군 북부면·노원면, 산천면·용문면·용진면·두라면 등 면 단위 무장치안대는 철수를 거부하고 구월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각 면 단위로 활동하고 있는 무장대를 하나의 조직체로 결속시키기 위해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구월산전투사령부와 신천군 남부지역에 있는 두라산을 근거로 한 두라산전투사령부를 각각 창설하였다. 구월산전투사령부는 무장대원 800명과 비무장대원 400여 명이 있었고 두라전투사령부는 무장병력이 400명에 비무장 대원 300명으로 이루어졌다. 전투사령부는 산악지대에 구축한 공작 비밀 아지트를 근거지로 하여 정보수집, 애국반공인사 구출, 교란작전을 수행하였다.


2.1. 이후[편집]


1951년 2월 15일 신천 10.13 의거 당시 주동 역할을 한 장재화가 대원 37명으로 동키 제1부대를 창설했다. 3월 3일 장재화·홍태환·박주경 등 37명이 신천·황주·사리원 주변의 적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무전기를 가지고 구월산과 두라산으로 침투했다. 무전기를 수 차례 떨어뜨려 고장이 났기 때문에 게릴라 활동을 했다. 신천내무서·군당·안악내무서·삼천 모나자이트 광산 등을 기습하다가 그곳 산악 지대에서 전 치안대원과 현지 반공 청년들을 규합했다. 1951년 4월 18일 문홍주·차현무 등 37명과 현지에서 입대한 대원 등 60명은 현물세 보관창고 4곳을 습격했다. 당시 창고에는 1700~1800명도 함께 억류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엔군이 점령할 당시 경찰서나 치안대에 근무했거나 그 가족들이었고 유격대원의 가족들도 있었다. 창고를 공격하자 약 400명이 탈출했으나 중공군 토벌대가 도착하여 반격할 때 나머지 인원은 대부분 피살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과정에서 대원도 50명이 희생되었다. 대부분 죽거나 실종되고 7월 27일 장재화 등 8명이 귀환했다.

동키 13부대도 신천무장대 출신의 인물들로 조직되어 황해도 해안과 구월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개시하였다. 동키부대는 이후 8240부대 예하로 귀속되어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전후 북한은 주민등록과 성분 재조사사업 시 황해도 일대에 인근을 어느 곳보다 엄밀히 조사하여 관련 가족을 색출해 가혹한 탄압과 박해를 가했으며 특히 '처단자 가족' 들은 모조리 혹독한 중노동현장인 산간 벽지 벌목장, 광산, 탄전, 발전소, 건설장, 정치범수용소 등으로 집단이주시켜 혹사시키거나 집단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3. 남한 측의 인식[편집]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채 학살 자체가 있는지도 모르거나 알고 있다고 해도 "사실은 북한이 다 죽여 놓고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 것" 정도로 언급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신천 의거일이라고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간략하게 공산당의 가족 처단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고 학살을 미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나온 《6.25와 민간항쟁》이라는 반공서적에 버젓이 나온 이야기다. 1958년에 출간되어 신천군 사건을 전반적으로 다룬 『항공의 불꽃』(조동환[6] 저)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대표적인 반공서적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책에서 신천군 사건은 공산군을 무찌른 영웅적인 '반공 의거'로 서술되어 있다. 북한 측에서 신천군에서 미군이 수만명의 무고한 양민을 죽였다는 식으로 선전하기 시작하자 남한에선 '우리가 그렇게나 빨갱이들을 죽였다고? 그건 몰랐네~' 라고 오히려 반기는 모습을 보이면서 북한이 발표한 수치를 인용하여 반공 선전물을 만들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전세계적으로 냉전이 격화되었다가 끝물로 다가가기 시작한 1980년대 초중반에는 "구월산의 메아리" 같은 유아용 반공 그림동화책이 시중에서 팔리기도 했다.

오래된 국사 교과서에는 신천 반공 의거로 간략하게 언급된 정도다. 검색 엔진에 '신천 10.13 반공 의거'나 '구월산 유격대' 같은 것을 넣어 보면 적지 않은 미화 사례가 검색된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는 신천 10.13 반공 의거라 하여 공산당에 대항해 싸운 유격대를 기리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고 1983년에는 MBC에서 구월산 유격대를 주인공으로 한 반공 드라마 3840 유격대를 방영하기도 했다.

이를 다룬 작품이 황석영의 《손님》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마을 사람들 간의 학살로 다루고 있으며 약간 무리하게 화해와 갈등 해소를 강조하고 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4월 21일 방영분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북한 측 기록 영상 화면을 최초로 소개하였고 당시 관련자들[7]과 인터뷰를 일일이 진행했다. 황석영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다는 점으로 호평을 받았다. 당대에는 공산당과 김일성의 만행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탄압받던 우익들이 좌익과 투쟁하는 것은 생존 그 자체의 문제였다. 다큐에서 증언한 이들은 첫 학살은 좌익이 우익들을 학살하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이후 보복학살을 우익들이 했다고 하며 이 시기 신천에 대규모 미군 부대가 있었는지는 다소 의심스러우나 이 지역에 일부 미군들이 북진을 잠시 멈추고 상황통제를 위해 아주 잠시나마 주둔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선전하는 것과는 달리 미군이 직접적으로 학살을 했는지는 특별한 근거가 없다고 했다.

<폭격>의 저자로 유명한 김태우 교수의 저서 <냉전의 마녀들>에 따르면 한국전쟁기 황해도 지역 학살에서 우익 청년들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논저들은 대체로 생존자들의 구술자료에 대해 의존하고 있다. 구술자료들은 매우 일관되게 우익 치안대의 역할을 강조한다. 반면 미국의 직접적 학살 가담이나 명령, 방조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 내의 합의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신천 학살이 벌어지고 있던 상당 기간 동안 '신천이 미군 통제하에 있었기에, 미군이 공식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며, 치안대를 통제하면서 그들에게 임무를 부여하거나 그들과 협동작전을 구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연구가 있다.[8][9] 또 한편으로는 학살이 '미군의 명령' 하에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점령통치에 관한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연구가 있다.[10] 이 두 가지 연구에는 미국의 역할과 관련해 미묘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두 연구 모두 학살의 핵심 주체를 치안대와 같은 우익 청년단체라는 사실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11] 김태우는 저서에서 펠턴과 플레런 등 국제민주여성연맹의 조사단이 우익 치안대의 역할을 굳이 은폐할 이유가 없다고 봤본 반면 북한은 우익치안대의 존재를 감춰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즉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북한 내외부에 알리는 것 자체가 정권 입장에서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시 국제민주여성연맹이 신천군 학살을 미군의 소행으로 돌린 것은 북한 정권이 고용한 통역자들이 의도적으로 거짓된 통역을 했던 까닭이라고 보았다.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자들은 타 지역에서와 달리 신천에서는 북한 정권이 배치한 증언자뿐 아니라 길가에서 마주친 일반 생존자들도 신천 사건이 미군의 소행이라고 증언했다고 기록했는데 북한이 일반 생존자들에게까지 사전에 힘을 썼을 가능성은 낮지만 그 시민들의 증언을 통변하는 통역가들은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북한은 토지개혁을 중심으로한 이른바 '민주개혁'의 성과에 대해 대대적으로 찬양하고 선전해왔다. 이는 해방 이후 10월 항쟁,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같은 정치,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던 남한 정권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반대하는 다수의 북한 청년들이 우익 치안대를 조직해 정권에 반대했다는 사실, 게다가 그들이 대규모 유혈사태를 주도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지면 북한 정권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북한 내 반정부 세력의 적극적인 활동이 알려지면 김일성 정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는 우익 치안대 관련 정보를 적극적으로 통제했다는 것이다.[12]

한편 한성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신천학살의 가해자를 미군으로 특정하는 것은 다른 맥락에서 짚어봐야 한다"며 “신천박물관 전시실에는 진열된 총기류에는 ‘한청(대한청년단)’, ‘치안대’ 글자가 적혀있다”고 말했고 "신천학살은 우익치안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의 저서의 저자인 김태우 교수는 기사에서 냉전의 마녀들에 나온 서술과 비슷하게 당시 신천군 사건을 조사했던 국제민주여성연맹이 가해자를 미군 또는 미군 통제하의 한국군으로만 지목하는 상황에 의구심을 표하고 현장 대기자들이나 통역, 북한측 인사들이 우익 치안대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정보왜곡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북한 측 주장[편집]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군과 국군이 북진하면서 미군들이 38선을 넘어와 황해도 신천군을 점령하면서 '해리슨 중위'라는 점령군 사령관의 지시로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하며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지어 반미 교육에 이용하고 있다.

휴전 1년 전인 1952년 국제 사법단체로 공산주의 계열의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13]에서 북한의 요청으로 북한 지역을 돌며 ‘한반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 계급의 신천 점령군 지휘관과 예하 미군 1개 중대 그리고 국군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려 약 3만 5천여 명,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측 선전화를 찍은 사진이 있는데 흑백 사진이지만 일방적인 대학살 현장을 찍은 사진이 들어 있으니 주의.(#)

김정은 시대 들어서 2015년 경 북한은 신천 박물관을 새롭게 단장했다. 새로운 단장 기념으로 이곳을 방문한 김정은은 "계급교양과 복수심의 발원점으로 미제의 야수적 만행 역사의 고발장'이라며 교양사업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은 전했으며 김병호 신천 박물관장은 "미제는 신천 강점 52일 기간에만도 애국자들을 무고한 주민들을 3만5천여 명이나 무참히 학살하였습니다. (사이) 인민들 속에 미제를 끝없이 증오하고 반대해서 견절히 싸워나가도록…."이라고 주장했다. 즉, 북한은 학살의 주체는 여전히 미군으로 명시하고 있다.# 다만 현재 북한은 치안대의 참여를 부정하지 않으며 미군이 학살을 하는 와중에 치안대가 미군을 도왔다고 적시하고 있다.

2015년 북한을 방문한 재미교포인 최재영 목사[14]는 북한에서 학살의 주체로 선정한 '해리슨 디 매든(Harrison D. Maddon)'이라는 인물이 장성급 계급인 미 육군 소장이었으며 6.25 전쟁 중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미군 방첩부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이하 CIC)의 지휘관으로 신천사건에 개입했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통일뉴스의 기사에서 최재영 목사는 "미군은 좌익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재령과 신천에 긴급 투입된 사실이 분명하며 투입된 후에는 치안을 평정하기 위해 수많은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이다", "미국이 우익 치안대를 도와 상상을 초월한 전대미문의 살육전을 개시했고, 신천에 주둔한 미군은 반공 봉기사건의 방관자나 감독자 역할이 아닌 학살의 직접적인 주체로서 개입했다"고 주장했다.학살책임자 해리슨은 위관급인가? 장성급인가? 사실상 북한이 말하는 주장과 대동소이한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5. 진위 여부[편집]


북한은 학살 주체를 미군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군이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다.

당시 미군은 북진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으며 북한이 주장하는 신천 점령군 사령관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대장은 당시 미군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명단 그 어디에도 없다. 이름만으로 따지면 미8군 부사령관 윌리엄 켈리 해리슨이 있지만 그는 신천이나 그 근방까지도 아무련 연관이 없는 인물이다.

한 과학자 출신 탈북자는 이 사건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가진 나머지 자신의 지역으로 이사 온 신천군 출신 여성에게 생활품을 뇌물 형식으로 주면서 자세히 말해 달라고 했다고 했는데 그랬더니 그 여성은 "미군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사건의 우익 측 주역들은 훗날 미군에 의해 동키1부대로 편성되었는데 본인들의 증언을 믿자면 이들이 미군에 의해 명령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사건으로부터 1달 후의 일이다. 미군은 어디까지나 고문관으로써 이런 유격대를 일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드물게 미군 고문관이 함께 침투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북한이 신천 학살에 대한 묘사에서 그리고 있는 미군 장교가 지휘하는 무장조직은 비록 훗날의 일이지만 실존했다. 이렇게 본다면 신천 학살에서의 해리슨은 이런 미군 고문관들에 대한 북한측 정보를 가지고 가공한 인물일 수 있다.

사실 북한 측에서는 이들이 이미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물론, 동키부대원들이 북한의 해리슨에 대한 주장을 감추기 위해 미군 지휘를 받기 시작한 시점을 거짓 증언하는 경우도 가능성이 크지는 않으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이들의 모든 증언이 사실은 해서는 안 될 금지된 증언들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금기를 어겼는데 자기 자신들이 아닌 미국을 위한 거짓말은 끝까지 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북한이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왜곡해야 할 목적성이 더 큰 입장이다.

더군다나 북한이 주장하는 수많은 잔학행위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점령군이 피점령인을 재미와 공포로 살해하기에는 너무나 이념적 적개심이 가득한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강간이나 칼로 살해한다는 등은 난징 대학살이나 다른 미군 범죄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머리에 노동당원증을 못박았다든가, 코를 꿰서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일은 하기도 힘들고 피학살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로 크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는 현재까지는 전혀 없지만 학살 자체는 존재했음이 인정되며 이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신천군 주민들 사이에 '좌우 대립' 격화로 우익 세력들이 학살을 주동하여 3만~3만 5천명[15]의 좌익 계열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학살 사례를 보자면 치안관리라는 명목으로 좌익 혹은 무고한 주민 학살에 나선 일이 대부분이다. 이런 걸 볼 때 마을 단위에서 일어난 우익의 학살극이 미국에 의한 학살 의혹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만 5천 명이라는 학살자 수치에 관해서는 특히 이견이 갈린다. 신천군 출신의 실향민들도 대개 그 정도로 많은 주민이 살해당했을 것으로 보지 않았고 사망자는 수천 명 정도로 추정된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다. 안악군의 봉기군 간부로 활동한 이경남은 그 수치가 한국전쟁 전사자와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 월남민, 실종자가 모두 포함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한편으로는 "우군이 진격한 후 즉시 대한민국북한을 접수하였더라면 이렇게 처참한 피의 복수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치안대 등 민간에 방임한 탓으로 무수한 무명의 부역자 가족이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쉽게 말해 국군미군이 북진에만 혈안이 돼서 점령지 관리를 내팽개친 탓에 이런 헬게이트가 열렸다는 평가다.

추모행사는 열리고 있지만 학살의 희생자가 아닌 '반공 의거' 때 사망한 반공주의자들을 추모하는 성격에 가깝다. 오히려 유엔군 측 자료에서는 많이 언급되고 있다.(한겨레 21 2002년 4월 17일 405호 기사)

한국의 민정 경찰[16]이나 우익 민병대, 게릴라부대 내지는 청년단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민간인을 불법으로 처형 내지는 부상자들을 고의로 방치시켰던 사례는 의외로 많이 소개되었다. 1950년 황해도에서는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주민들을 학살하고 부상당한 민간인들에게 미군이 지급한 식량과 의약품도 갈취하는 반공 유격대의 만행에 격분한 영국군 정보 장교가 반공 유격대장 머리에 총을 겨누고 후에 미군 사령부에 항의한 기록도 존재한다.

이를 좀 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당시 민간인 유격대나 자경단은 좌우익 할 것 없이 양 진영 모두 있었고 좌익이 점령하면 좌익 자경단이 우익을 살해하고 우익이 점령하면 우익 자경단이 좌익을 살해하는 등 막장일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북청년단도 비슷하게 탄생한 부류이며 소련김일성 일가 때문에 갖은 박해를 다 받다가 하루아침에 전 재산 다 날리고 좌익 민병대에 공격받은 우익 세력의 분노와 보복극이 빚어낸 참사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좌익들도 미군정 이후 갖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6.25 전쟁 초기에는 좌익들의 우익 학살도 많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좌우파나 사상, 국가의 숭고한 명예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민들이 단순히 평소의 친분 혹은 친인척·학연 등으로 같이 묶여서 학살당하는 상황도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 아들이나 아버지가 사병이나 장교로서 국군으로 열심히 싸우는데도 가족이나 친척이 이렇게 학살당해 나중에 그걸 알고 절망감에 탈영[17]하거나 군을 그만두고 한국군에 대한 증오를 쏟아냈던 생존자[18]도 있다. 당시 증언자들 중에는 "그때 중학교 동창 5명이 끌려갔는데, 나 빼고 나머지 애들은 지금도 행방불명됐다. 이런데 참을 수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당시의 학살과 보복 학살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져서 아직도 화해하지 않고 있는 마을이 대한민국에도 여럿 있다.


5.1. 1972년 경향신문 기사[편집]


1972년 관련자의 증언(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북괴의 분류에 의한 처단자 가족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은 황해도 10.13 반공의거사건에 가담했거나 연계를 맺었다가 체포되어 처단된 사람들의 가족이다. 이 황해도 10.13 반공의거사건은 50년 6.25 동란 발발 2개월전인 4월 17일 조선민주당 재령군당 위원장 김씨와 정씨가 주동이되어 조직한 대한광복회의 발족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대한 광복회는 10월 9일 '하오 2시에 사리원으로부터 해주 방면으로 무기를 수송하는 괴뢰군추럭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기탈취 작전을 벌였다 정씨을 비롯한 수명의 동지는 괴뢰군복으로 가장하고 신대리에 있는 권씨 과수원에 대기하고 있다가 기다리던 트럭이 지나 가자 검문형식으로 차를 멈추고 괴뢰군 군관과 운전사를 끌어내려 군관은 즉결처단하고 운전사를 귀순시킨 후 소련제 장총 2백 14정을 노획했다.그리고 그 중 1백14정을 광복회 신천 지부장 김씨댁에 전달하여 폭동에 대비토록 했다. 이렇게 무장을 갖춘 재령·신천지구 애국자들은 10월 13일에 무장봉기할 치밀한 계획을 짜고 탄약의 보충, 태극기와 의료 약품 준비등을 해나갔다.
10월 13일 하오 4시 먼저 재령읍 남산 산마루 높이 태극기가 꽂히는것을 신호로 장총으로 무장한 청년들을 앞세운 시민들이 봉기했다. 총소리와 함께 교회 종이 일제히 울렸으며 사기 충정한 무장 의거군은 제1중대 제2중대 제3중대 특공대 선무공작대 연락대로 각각 대오를 나우어 괴뢰 검찰소를 비롯하여 내무성 정치보위부 우편국 군·면 인민위원회등 각 기관으로 물밀듯이 진격하여 삽시간에 모두 점령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다른 면들에서도 괴뢰 지서와 면 인민위원회를 습격, 점령했다. 대한민국 만세!소리와 애국가의 합창소리가 재령군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에 극도로 당황한 북괴는 괴뢰군 대부대를 재령땅으로 급파했다. 의거군은 한동안 분전햇으나 역부족으로 신천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신천에서는 신씨의 지휘 아래 밤9시 총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각 기관으로 진격하다가 재령에서온 동지들과 합세했다.
10월 14일 새벽, 날이 밝자 의거군은 총기 이외에 수류탄 대용으로 휘발유가 든 사이다병, 솜 마개에 불을 지르며 쳐들어가 내무서를 비롯한 각기관을 노도와같이 습격, 점령했다. 또한 15일에는 괴뢰 군당을 포위하여 이를 점령하고 범바위 산등에 자리잡고 최후 반격을 시도하는 잔당을 소탕했다. 그리고 16일에는 새로 내습해 온 괴뢰군 부대와 치열한 야간전투를 전개하여 양랑리 온천면 용문북부 토성리 남률 북률 서호등지에서 적을 격퇴했다. 특히 17일 북부 의거대는 괴뢰 황해도 인민위원장을 사살하여 북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리하여 의거 5일만인 18일 밤 10시, 재령·신천일대를 평정한 상태에서 유엔군의 입성을 마지하였다.
바로 그 이튿날 의거군은 유엔 주둔군사령부에 다음과 같이 전과를 보고했다.
전리품=자동차 1백18대, 야포2문, 반전차포 37문, 소총 4천46청, 따발총3백 14정, 중,경기관총 195정, 수류탄 1트럭분, 탄환 수백상자, TNT 2트럭분, 권총 46정, 우마차 3백여대.
괴뢰군 생포=1078명.
애국동지 희생자=5백24명.
이러한 전과보고와 함께 전리품 일체를 유엔군에 인계하고 다음날 순국동지의 합동장례식을 거행했다. 이와 같이 황해도 10.13 반공의거사건은 북괴를 공포속에 몰아넣고 심대한 타격을 가한 대대적인 애국적 거사였다. 그래서 북괴는 이 사건 가담자와 관련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 학살하였고 그 가족에게 '처단자 가족'이라는 딱지를 붙여 온갖 학대와 박해를 가하고 있다.



6.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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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파의 대표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자세한 것은 파블로 피카소 문서 참조.massacre in korea(한국에서의 학살) 다만 이 설에 대해 이미 이전에 한국전쟁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려 달라는 프랑스 공산당의 요청을 받고 그렸기 때문에 굳이 신천군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 때문에 1969년에 피카소를 찬양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사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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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화룡「전쟁의 그늘- 1950, 황해도 신천학살 사건의 진실 」포앤북스[2] 1957년에 나온 신천군 반공의거를 다룬 조동환의 책 항공의 불꽃에서도 학살의 근원적 책임은 북한에게 있다고 했지만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묘사하고 있다.출처 블로그 2002년경 나온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7회 신천군 사건편에서도 당시 생존해 있던 신천 출신 반공 의거인들의 인터뷰를 수록했는데 북한과 좌익의 괴롭힘과 학살 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히 하고 있지만 좌익에게 당해 분노한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해서도 분명히 증언했다.유튜브 영상[3] 구국동지회 내에 유격대를 편성했다.(조동환, '항공의 불꽃', 보문각, 1957, 89-97면)[4] 국무총리를 지낸 백두진의 친척이라고 한다.[5] 조동환, 항공의 불꽃, 369-371면[6] 역시 황해도 신천군 출신으로, 당시 봉기에 직접 참여하였고 1.4 후퇴 이후에는 동키부대에서 활약하였다. 인천 부시장, 의정부 시장을 역임했다.[7] 인터뷰 대상자 중에는 일반 치안대원은 물론, 신천무장대의 간부로 활동했던 이들과 재령의 봉기를 주도했던 인물이 있다.[8] 이신철, 『6.25남북전쟁시기 이북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p.151[9] 이러한 경우에는 1948년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사건에서의 미군정의 개입과 학살 작전 지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제주 4.3 사건 당시 학살을 자행한 건 이승만이 보낸 경찰병력과 서북청년단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훈장을 주고 이들의 작전계획에 개입하여 실질적으로 수립한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다. 즉 그런 비슷한 맥락 속에서 신천 학살을 본 것이다.[10] 한모니까, 『'봉기'와 '학살'의 간극:황해도 신천사건』p.130[11]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p.227~228.[12]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p240[13]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14] 2018년 국보법 위반 수사를 받았으며 이 사건 자체는 무혐의 처리되었지만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등 노골적인 친북 활동을 벌인 바 있으며 재미 친북 언론인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같이 활동하면서 민족통신의 편집위원을 맡은 바 있다. 2014년 민족통신과 자주민보에 게재된 대담에서 그는 노길남을 북부조국 바로 알리기로 통일운동에 기여했다, 조국통일에 애쓴다며 칭찬한 바 있으며 이후 NK비전2020란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고 통일뉴스에 올린 그의 신천군 사건 관련 기사들을 보면 학살의 주체를 미국으로 적시하고 반미 선동과 한국의 대미 종속성을 언급하며 기존의 북한측에서 하는 말과 별 반 다를 바가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듯 최재영은 제대로 된 학자가 아니며 그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지, 정치적 의도가 없는지는 따져 봐야 할 문제다.[15] 한화룡 백석대 교수는 대량학살이 일어났지만 3만 5천명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당시 증언이나 북한 자료가 오락가락하는 것을 봤을 때 과장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정확한 학살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 없다고 말했다.[16] 내무부 소속이 아니라 점령지에서 피점령 주민으로 구성된 자치부대.[17]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국군으로 열심히 싸우던 이진태(장동건)가 북한군으로 넘어간 동기.[18] 2002년 당시 77살이었던 김창남(사병) 씨와 74살이었던 안종식(당시 소위) 씨가 증언하길 "우린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한국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러는 조국이란 것은 보답으로 내 부모와 친척을 이렇게 빨갱이라며 죽였다. 그래서 시체조차도 집단으로 매장하거나 바다에 버려서 가묘와 추모비로 제사를 지낸다. 정말로 빨갱이라면 우린 이렇게 나서서 큰소리도 못낸다. 그분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순박하게 농사짓고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냥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빨갱이라는 증거도 그렇더라고 할 뿐, 당시 지휘하던 이들도 증거라는 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피해다닌다. 이러는데 나라사랑? 대한민국? 이럴 수 있느냐?"고 50년 동안 참았던 울분을 쏟아부었다. 출처는 지리산 킬링 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