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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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희성 화백의 기록화 중에서, 윤지충이 신위를 불태운 일을 책망하는 친척들의 모습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 후폭풍
5. 현대의 평가



1. 개요[편집]


1791년(정조 15년)에 가톨릭 교도였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등이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

진산 사건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만화는 다음과 같다.[1]
1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68
2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99
3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53
4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71
5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45
6편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4


2. 배경[편집]


16~17세기 동양에 대한 예수회의 현지 적응주의 선교 방식은 가톨릭의 교세 확장에는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으나, 일각에선 이들의 선교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 등은 조상의 제사를 용인하는 예수회의 방식을 우상숭배라고 비난했고, 예수회는 동양의 제사란 우상숭배가 아닌 하나의 문화적 관습이라고 옹호했다.

교황청예수회도미니코회의 주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결국 조상공경보단 조상숭배와 미신적 요소가 더 강하다고 판단한 당시 클레멘스 11세 교황에 의해[2] 조상 제사를 금지하였다.[3] 그 결과 가톨릭은 중국에서도 박해를 받는 등 고난을 겪게 된다. 이는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제사가 금지되었음을 안 초기 천주교 신자들 중 양반 계층이 빠르게 이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3. 전개[편집]


윤지충(尹持忠)은 1759년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정약용과는 내종사촌 관계이다. 24세의 나이로 진시에 합격한 윤지충은 이후 정약용의 권유로 중국에 갔다오게 되고 거기서 견진성사[4]까지 받고 온다.

고향인 진산(珍山)으로[5] 내려온 윤지충은 2년 뒤 1791년에 모친상을 맞게 된다. 천주교 신자였지만 유교적 관습을 하루아침에 버리기는 뭐했던 것인지, 처음에는 유교적으로 상을 치르고 조문을 받고 혼백도 모셨다. 외종사촌이자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인 권상연(權尙然)이 이를 보고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투의 말을 하자[6] 윤지충은 생각을 바꿔 모친의 궤연[7]을 뜯고 상복을 불태우고, 조상의 위패까지 전부 없애버린다. 얼마 뒤 권상연도 모친상을 맞고 그는 처음부터 조문객도 받지 않고 천주교의 방식대로 장례를 치렀다.[8]

당시 조선성리학적 질서가 다스리던 나라였고, 따라서 이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은 조선의 이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조선시대때 신주나 시신을 고의적으로 훼손시킬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9] 이에 고발당한 윤지충은 도망쳤으나 자수하였고[10]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은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다시 상복을 입고 유교적 예를 갖출 것을 권했으나 그들은 뜻을 꺾지 않는다.

처음 이들은 법망을 피하고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신은 신주를 훼손시킨 게 아니라 땅에 묻었을 뿐이라고 거짓진술을 했다. 단순히 신주를 세우지 않거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처벌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에 묻었다는 신주를 증명할 길은 없었고, 결국 불태워서 땅에 묻은 것이라고 말을 바꾸었다.[11] 그래서 신사원은 "이자들이 단단히 미쳤군"이라고 말하며 전주에 있던 상관인 전라 감사 정민시에게 압송시켰다.

하관인 신사원의 보고를 들은 정민시는 이들을 패륜아로 오해하고 단단히 화가 나서 윤치충과 권상연에게 불호령을 때렸는데 "도대체 천주교가 뭐길래 부모의 상을 치를때 신주위패를 불살라버리는 짓을 하느냐?" 라고 묻자 윤지충이 “신주와 위패는 귀신이 붙은 물건이라 천주교에서는 우상숭배”라고 했고 정민시가 "닥쳐라! 국가에는 법이 있고 예가 있다.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극형을 면치 못하리라!"라고 일갈했지만 윤지충은 “나라에 법이 있듯이 저한테는 천주님이 있고 천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입니다. 감사 영감.”이라 대답하자 정민시는 어이가 없어 윤지충과 권상연을 형틀에 매달아 놓고 잘못을 시인할 때까지 곤장을 쳤는데도 윤지충이 뜻을 굽히지 않자 정민시는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결국 이 일이 중앙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다만 위의 내용은 정민시가 윤지충을 심문할때 아래의 장계문을 요약한 것이다.

"지충이 공술하기를 ‘계묘년 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갑진년 겨울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마침 명례동(明禮洞)에 있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佑)의 집에 갔더니, 집에 책 두 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주실의(天主實義)》이고 하나는 《칠극(七克)》이었습니다. 그 절목(節目)에 십계(十誡)와 칠극(七克)이 있었는데 매우 간략하고 준행하기 쉬워서, 그 두 책을 빌려 소매에 넣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베껴 두고는 이어 그 책을 돌려보냈습니다. 겨우 1년쯤 익혔을 때 떠도는 비방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 책을 혹 태워버리기도 하고 혹 물로 씻어버리고 집에 두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혼자 연구를 하고 학습을 하였기 때문에, 원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곳이나 함께 배운 사람도 없습니다.

천주(天主)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됩니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의 목주(木主)는 천주교(天主敎)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 앞에 술잔을 올리고 음식을 올리는 것도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서민(庶民)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 엄히 금지하는 일이 없고, 곤궁한 선비가 제향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주도 세우지 않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으로서 나라의 금법을 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나아가 조문(吊問)을 거절했다는 일로 말하면, 내 부모가 돌아가신 것을 위문해 주었으니 감사하고 애통스러워 맞아 곡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차마 거절한단 말입니까. 만약 믿지 못한다면 조문한 손님이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부모를 장사지내는 일로 말하면 관곽(棺槨)·의복·곡읍(哭泣)·천효(穿孝)222) 는 천주교인일수록 더욱 두텁고 근실하게 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부모를 장사하는 일을 소홀히 했겠습니까. 상여를 잡는 예와 4척의 높이로 무덤을 만드는 것은 풍속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5월에 모친상을 당했는데도 8월 그믐날에야 기한을 넘겨 장사를 지낸 것은 집안에 마침 전염병이 돌아 외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근의 친구들은 비록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어도 동네의 평민들은 모두 와서 거들어 주었으니, 이것도 한 번만 물으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소문은 정말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상연은 공술하기를 ‘저는 윤지충과 내외종(內外從) 사이로 같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천주실의》와 《칠극》을 수 년 전 윤지충의 집에서 얻어 보았는데, 그 때는 지충이 책을 태우거나 씻어버리기 전이었습니다. 제례(祭禮)는 이미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았습니다만, 사판(祠版)은 훼손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그동안 부모를 장사지낸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학문을 한 이후로 일가의 여러 종족들이 모두 「네가 이미 제사를 폐지했으니 신주도 역시 반드시 훼손해버렸을 것이다. 너 때문에 족당(族黨)에게 피해가 미칠 것이다.」 하면서 못하는 말없이 꾸짖고 책망하였는데, 이에 없는 일이 부풀려져 비방이 떠돌아다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지충과 상연을 다시 자세히 문초하고 매 30대를 치니, 지충이 공술하기를 ‘양대(兩代)의 신주를 과연 태워버리고 그 재를 마당에다 묻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묻었다고 공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8월 모친 장례 때에도 신주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한 조목으로 말하면, 그 책을 얻어 그 학문을 익힌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전해받은 스승이 있겠습니까. 교주(敎主)라는 말은 서양(西洋)에 있다고는 들었어도 우리 나라에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홍낙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도를 많이 늘렸다는 말은 더욱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스스로 터득하는 학문일 뿐 애초부터 권하고 가르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제처럼 친한 경우에도 본래 전해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도를 늘렸겠습니까. 또 망령되게 증거하지도 말고 남을 해치지도 말라는 천주의 가르침이 계율(誡律) 가운데 있으니, 더욱 다른 사람을 끌어다가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상연은 공술하기를 ‘저의 집의 신주를 애초에 땅에 묻으려 하였으나, 이목이 번거로울까 두려워 남몰래 불태워버리고 그 재를 무덤 앞에 묻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책은 지충에게 빌려보았을 뿐 애초에 베낀 일이 없는데, 어떻게 감추어둔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충의 동네 사람들을 또 추문(推問)했더니, 회격(灰隔)과 횡대(橫帶)를 예대로 했고, 시기를 지나 장사지낸 것도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의 변괴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윤·권 두 사람처럼 극도로 흉악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시신을 버렸다는 것은 비록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낙착되었지만, 그 위패를 태워버린 것은 그 자도 역시 실토하였습니다. 아, 이 두 사람은 모두 사족(士族)입니다. 그리고 지충으로 말하면 약간이나마 문자를 알고 또 일찍이 상상(上庠)의 유생이었으니, 민간의 무지스러운 무리들과는 조금 다른데, 사설(邪說)을 혹신(酷信)하여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린 채 단지 천주가 있는 것만 알 뿐 군친(君親)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나아가 평소 살아계신 부모나 조부모처럼 섬겨야 할 신주를 한 조각 쓸모없는 나무라 하여 태워 없애면서도 이마에 진땀 하나 흘리지 않았으니, 정말 흉악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제사를 폐지한 것 등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합니다.

더구나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처음 장계를 보고 처음에 소문으로 들렸는데 자세한 경위를 파악한 정조는 장계를 보고 "이제 전라 감사가 조사해 아뢴 것을 보면,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태워버린 한 조목에 대해서는 이미 자백하였다 하니, 어찌 이처럼 흉악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있겠는가. 대저 경학으로 모범이 되는 선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점차 물들어 이처럼 오도되기에 이른 것이니, 세도(世道)를 위해서 근심과 한탄을 금할 수가 없다." 라고 한탄하였고, 대신들과 이 사건을 논의하였는데 대사간 신기를 비롯하여 천주교인이 상대적으로 많던[12] 남인을 대표하던 좌의정 채제공까지 "서학의 무리가 커지면 나라에 해가 될 것이니 이는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이에 정조도 이 일은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물론 천주교를 전파하는 이승훈 베드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수하, 홍낙민, 이기경 등도 체포해 문초하고, 진산군을 5년간 한 급이 낮은 진산현으로 낮춰부르도록 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정조의 명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고 전주풍남문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13] 또한 진산 군수 신사원은 이 일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땅에 유배당했다.[14]

한편 같이 체포된 이승훈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주교 역할을 했던 권일신은 배교하는 것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유배지 이동 중 사망하였다. 홍낙민, 최필공, 이벽 세례자 요한, 정약용,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신앙을 버리겠다는 상소를 올려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약종은 배교를 번복한 뒤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15]

이를 조선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辛亥迫害)라고 일컫는다.[16]

4. 결과 & 후폭풍[편집]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가 오랫동안 지배했던 국가였다. 당장 송시열의 의도야 어땠는지는 몰라도 그의 주장으로 윤휴, 윤증, 허목 등이 주자를 중시하지 않는다며 사문난적으로 불렸던 마당에, 아예 성리학적 예법을 거부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행동은 당시 조선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진산 사건을 계기로 조선 사회는 천주교인들을 무부무군(無父無君), 즉 군주도 부모도 섬기지 않는 도리를 모르는 범죄자로 간주해 19세기 말까지 박해했다.[17] 이에 정하상 바오로는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집필해 무군무부에 대한 해명 등을 시도하며 “제아무리 효자라도 부모님이 주무시고 계실 때에는 음식을 공양 않는 법인데 죽은 뒤에는 또 어떻겠느냐”며 천주교가 도리를 모르는 종교가 아니라는 인유론적 관점을 보여주기도 했다.[18]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는 유항검이 수습해서 바우배기에 묻었다. 다만 유항검이 치명한 후 신자들 사이에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 무덤의 위치를 잊게 되었는데, 천주교 전주교구는 2021년 3월 이곳을 정비하다가 유해를 발견했고 같은 해 9월 1일, 발견된 유해가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19] 3명의 유해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천주교계는 이번 유해 발견이 한국교회사, 더 나아가 세계 가톨릭 교회사에 기록될 큰 일로 평가하고 있다. 자세한 발견 경위는 전주교구가 작성한 문건을 참조하길 바란다. 유해 발견 과정, 유해의 사실 확인 및 조사 과정, 유해의 진정성과 공증 과정, 보고회.

한편, 이들의 유해가 발견되자 충청남도의회반환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유가족이 돌보지 못한 상황에서 선의로 관리해 온 전주교구는 여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시 초남이성지 교리당에 모셨다.#[20] 한편 이들을 묻은 유항검은 자신도 그 인근에 묻혔다가 1914년 치명자산 성지이장되었다.


5. 현대의 평가[편집]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참고. 진산 사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천주교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진산 사건은 대체로 조선 사회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한 두 천주교인의 의거로 평가받고 있다. 그 결과 2014년 8월 중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광화문 광장에서 이 둘을 포함한 순교자들이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가 있듯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일단 교황청이 반대한 제사라는 개념은 다른 종교에서도 행해지는 조상에 대한 예(禮)이자 공경하는 자세로 대하는 것이었다. 즉 그 나라만의 문화이자 기틀로 만들어진 것인데, 교황청은 한쪽 말만 듣고 신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 뻔힌 제사 금지령을 본인들이 외교적으로 해결도 못한채 일단 지르고 본다.[21] 조선에서 제사가 금지된 것은 중국 선교에 있어 예수회도미니코회의 의견이 달랐던 것이 영향을 끼쳤다. 상류층 위주로 포교한[22] 예수회에서는 제대로 된 제사와 민간에서 행해지는 미신적인 제사 방식을 모두 보았으나, 하류층 위주로 포교한 도미니코회에서는 제사의 미신적 부분에 집중해 모든 제사가 다 똑같이 미신적인 행사인 줄 알고 보고했다.[23] 그리고 교황청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했으며, 동양에서 가톨릭에 대한 시선을 나쁘게 만들어 버리고 여러 신봉자들이 돌아서게 만들었다.

더 큰 문제점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너무 성급하게, 과격하게 행동한 점이다. 천주교는 당시 조선에서 그나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던 '외래 종교'였기에 종교적 자유를 위해서라도 꼬투리 잡힐 일은 최대한 줄이며 조심스럽게 민심부터 얻었어야 하건만[24], 중간 과정없이 무턱대고 부모님의 신주부터 불태운 것은 엄연히 성리학적 시대상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엔 그야말로 강상죄 그 자체로 비쳐졌을 것이다. 즉, 양심상 거부감이 들면 일단은 남몰래 천주교 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민의를 모으다 시기를 봐서 조정에 이해를 구하고 건의를 하는 식의 방식을 취한 후 사태를 논의했어도 되는 문제를 두 사람은 일부러 순교부터 당하려는듯 공공연하게 일을 키웠다. 허나 이들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이들의 희망과 달리, 포교의 대상이 되었어야 할 백성들로부터는 "부모도 몰라보는 패륜적인 사이비 종교"로 낙인찍혔고, 조정은 정조 사후부턴[25] 한동안 강성파들이 득세해 실학 쇠퇴와 몇차례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벌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피해는 신주를 불태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다른 천주교 신자들이 고스란히 짊어지는 등 거센 후폭풍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 부정적인 시각의 근거가 된다.
[1] 단,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읽자.[2] 시기상 18세기 초에 이미 이게 확정되었지만, 조선은 천주교가 신앙적으론 18세기 후반부터 본격 전파되었기에 이 소식도 비교적 늦게 들어온다.[3] 이후 비오 12세가톨릭은 다시 (제한을 걸긴 했지만) 조상 제사를 용인한다. 다만 '효'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용인한 것이지 조상의 혼이 음식을 먹는다 등의 전통적인 관점은 당연히 배제되었다.[4]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주교가 이마에 성유(聖油)를 바르고 성령과 은총을 주는 천주교의 의식. 세례성사가 천주교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면 견진성사는 어엿한 한 명의 천주교인으로 성장했음을 인정받는 성사이다. 쉽게 말해 천주교의 성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는 누군가의 대부, 대모가 될 수 있다.[5] 현대의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진산면, 추부면. 당시에는 전라도 관할이었다. 충청도에 편입되는 것은 170여년 뒤.[6] 출처 필요. 한국 가톨릭측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이미 윤지충의 어머니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유언으로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식 예법을 지키라 하였다고 한다.[7] 죽은 사람의 혼백을 넣은 궤와 거기에 딸린 물건들.[8] 이를 폐제분주(廢祭焚主)라고 한다.[9]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2번째기사.[10] 한양대 정민 교수에 따르면 윤지충, 윤지헌 형제와 친밀한 관계였던 숙부 윤징(尹憕)이 잡혀가자 윤지충이 곧바로 자수하였다고 한다.#[11]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7일 무인 2번째기사.[12] 반대로 말하면 남인에서도 비천주교인들은 많았다. 당장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만 해도 천주교 교리에 좋은 말도 있지만 괴력난신 드립을 보면 진짜 저걸 믿냐는 식으로 디스한 적도 있었다.[13] 이후 이들이 처형 당한 터에는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세워졌다.[14] 현대의 기준으로 따지면 엉뚱한 사람이 벌을 받은 격이지만, 조선시대에서 군수와 수령은 행정, 사법을 포함한 그 지역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권한을 가진만큼 책임도 막중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5] 이 때 큰아들 정철상 가롤로도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아내 유 체칠리아, 작은아들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순교했다. 정약종과 정철상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시복, 유 세실리아, 정하상, 정정혜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16] 사실 더 엄밀히 따지면, 조선 최초의 천주교 관련 희생자는 1785년 명례방 사건으로 유배당해 1787년 병사한 역관 출신 김범우 토마스가 있긴 하다. 다만 그는 국가 권력에 의해 순교당한 것이 아닌 귀양을 가서 사망한 것이기에 순교라고 보기 애매한 측면이 있다. 순교는 자의든 타의든 종교를 지키고자 죽는 경우를 일컫는데, 김범우는 신앙을 지키려다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적당히 마무리되어 유배당한 상태에서 병사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진산 사건과 윤지충, 권상연에 대한 처형으로 요약되는 신해박해는 국가 권력에 대한 개입이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기에 조선 최초의 박해라고 부를 수 있다.[17] 그리고 황사영 백서 사건을 계기로 이러한 천주교 박해 의견은 또 한번 정당성을 갖게 된다.[18] 천주교의 도입 이후 천주교의 입장은 보유론(補儒論)과 인유론이라는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보유론이란 유학을 중심으로 그 미흡한 점을 천주교로 보충하는 것이다. 반면 인유론이란 천주교를 유학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측면이다. 즉 중심을 무엇으로 두고 있느냐의 차이다.[19] 윤지충의 동생, 진산 사건 당시에는 살아남았으나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사망했다.[20] 순례객을 위해 첨언하면 카카오맵의 초남이성지는 유항검의 집 터이다. 여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연못 덕에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21] 2021년 영화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제사를 금지시켜버리면 신실한 조선 신자들은 필히 이것을 지키려 할 것인데, 방안도 없이 이러면 교황청이 신자들을 사지로 모는 것 아니냐며 무책임하다고 역정을 내고 배교를 선언한다.[22] 유명한 마테오 리치(이마두)가 예수회 출신이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현지에서 유교가 차지하는 위상이 종교뿐 아니라 철학과 생활 윤리까지 두루 미치고 있음을 경험한 뒤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을 유교에서 말하는 상제와 같은 개념이라고 동치시키며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유교의 가르침을 통해 증명하는 방식의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폈고, 마테오 리치 자신도 중국식으로 유건에 도포를 입고 유학자라고 자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기억의 궁전이라 불리는 서양의 기억술을 소개한 것도, 유교 사상의 강력한 영향 아래 살아가는 중국인들이 과거에 급제해 관리로써 출사하여 입신양명하고 부모와 집안의 이름을 빛내는 것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지상목표로 생각한다는 점을 노렸던 것. 이는 중국에서의 천주교 선교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지만, 동시에 다른 선교사들의 질투와 시기를 사기 충분한 것이었고 도미니코회도 예수회를 시기하는 선교사 그룹의 하나였다.[23] 이를 계파 싸움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24] 샘물교회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듯 현지 민심과 동떨어진 행위는 의도와 무관하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25] 신해박해가 일어났지만 최소한 정조 시대까진 그래도 "서학은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니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처럼 숭유에 기본 방침이 있었지 대대적인 억압에 초점이 맞춰지진 않았다. 이 당시 정조 포지션도 이 사건으로 자기들이 중용하던 천주교 신자 신하들까지 엮여 본인이 꺼리던 사화마냥 정치쟁점화될 조짐이 보이자 이 사건의 여파를 그래도 자기딴엔 최소한의 선에서 줄이려 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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