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특이 사항

덤프버전 :

분류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신해철



1. SF/판타지 덕후
2. 보컬 능력에 대한 자평
3. 연기 경력
4. 사람 신해철
5. 연예인 신해철
6. 신해철과 정치
6.1. 정치인들과의 관계


1. SF/판타지 덕후[편집]


SF/판타지 장르에 엄청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하드 SF 계열도 읽기는 하지만 주로 '사이파이(Sci-fi)' 혹은 '스페이스 오페라'로 불리는 장르에 꽂혀 있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앨범의 컨셉들도 사실상 SF/판타지 소설을 탐닉하면서 받아들인 세계관들에 근거한 경우가 많으며, 일반적으로 단순히 영혼기병 라젠카의 OST 정도로만 알려진 N.EX.T의 4집 앨범 스페이스 록 오페라(Space Rock Opera)는 그런 성향과 그동안 익혀왔던 음향기술을 집대성한 완성체이다. 팬들조차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앨범은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OST이기도 한 것이지, 엄연히 N.EX.T의 정규 앨범이며 동시에 컨셉 앨범이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서" 해산을 선언했던 당시 N.EX.T가 해산 선언 직전에 남긴 앨범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 앨범의 의의가 결코 N.EX.T의 2, 3집에 비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SF/판타지 번역본 출간 사정 자체가 좋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든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출간되면 무조건 산다" 주의였다.[1] 그러다가 을 밟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읽고 나서는 엄청나게 욕을 하고 구석에 처박아둔 뒤 오랜 시간이 흘러, 신작 SF영화가 나왔다길래 무조건 달려가서 보기 시작했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가 나오더란다. 바로 그 '똥'의 영화판.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고스트스테이션에서 '로저 젤라즈니'가 답인 퀴즈를 낸 적이 있을 정도.

SF/판타지 장르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낸다. 영혼기병 라젠카의 음악을 맡았던 것도 단지 '로봇'이 나온다는 이유이고[2], 심형래디 워의 헌정곡인 'The Virgin Flight (Theme Of Imoogi)'를 만든 것도 단지 '용'이 나온다는 이유에서였다.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해서 저그 헌정곡을 만들기도 했고,[3][4] N.EX.T 시절 앨범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워로드2에 빠졌던 것도, 게임을 좋아하기 이전에 SF/판타지에 환장하는 성향이 컸던 것.

단, 안면인식장애와 더불어 제목인식장애[5]도 앓고 있었던 탓에, 팬이라고 자처하는 작품들의 제목조차 잘못 말하기도 했다. 1990년도 후반 솔로시절 인터뷰 영상을 보면 'The Lord of the Rings'를 계속 'The Ring of the Lord'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제목을 잘못 말한 경우도 많아서, 고스트스테이션에서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근미래 SF영화를 한 편 추천하면서 제목을 틀리게 이야기해서 청취자들이 알아서 제목을 유추한 후 영화를 찾은 뒤 게시판을 통해 바로잡아 주기도 했다.

고스트스테이션에서 폴 앤더슨의 SF소설 '타임 패트롤'을 음성 특수효과를 곁들여서 1인 라디오 드라마화 한 적도 있다. 여성의 음성도 본인이 직접 냈는데 결국 힘들다고 2회만에 때려치웠다.


2. 보컬 능력에 대한 자평[편집]


20장 이상의 음반을 발매한 뮤지션치고는 보컬리스트로서의 자신에 대한 엄살이 심하다.

고스트스테이션으로 팬들과 좀더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본인은 노래를 못하는 편이라고 계속 주장해왔고, 아무도 보컬을 안 하려 해서 본인이 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보컬 능력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단 음반 기준으로만 F1[6][7]의 극저음에서 F#5 [8]의 극고음이라는 엄청난 음역을 보유하고 있으며, 또한 앨범에서 뿐만 아니라 라이브에서도 중후한 중저음에서 날카로운 고음까지 소화할 수 있다. 다만 컨디션에 크게 좌우되는 모습을 보인다. 베이스로 타고난 걸 억지로 고음역대를 소화하면서 두통이나 안압상승 등의 여러가지 지병을 얻었다고 하는데, 헤비메탈키드로서 본인은 어느 정도 만족스런 성과인듯 하다. N.EX.T. 해체 이후에는 극저음역(대표적으로 일상으로의 초대)을 시도하기도 했다.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다한증이 무척 심해서 기타, 키보드(신디사이저), 베이스 기타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데에 애로사항이 있다고 한다. 본인 왈, 3살 때 녹용을 잘못 먹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조건 악기 연주를 피하는 것은 아니고 앨범 레코딩 시 필요에 의해 직접 연주한 경우도 많다. 참고로 김세황이 신해철의 기타 실력에 대해 증언하길, 수준급의 스쿨 밴드 수준이라고 한다(…). 신해철은 이 말에 대해 <진중권의 문화다방>에서 스스로 인정했다.[9] 본인이 기타를 친 저그 헌정곡 'Zerg is Coming'에서도 사운드가 거지같다고 깠지만 딱히 사운드에 흠잡을 데는 없으며 오히려 리스너들에게 조잡한 사운드야말로 저그의 특징을 잘 살렸다는 호평을 받았다.

대외적인 엄살이 심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2000년대에 들어 보컬스타일을 메탈리카제임스 헷필드처럼 중저음의 흉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바꾸면서 보컬에 대한 자신감이 좀 더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아내와 오붓하게 지낼 때 사용할 자신의 앨범이 한 장도 없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재즈 앨범도 1장 발매한다. 심지어 녹음도 1곡당 한 번에 녹음. 보컬 사운드 면에서도 훌륭한 앨범이지만 한국어 가사가 유난히 느끼하게 들려서 팬들도 자주 듣지는 않는 앨범이다. 애초에 프로모션 의도로 만든 게 아니다보니 대중적으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의 사진이 잘 나왔는지, 일단 항목 맨 위의 사진도 그렇고 영정 사진도 이 때의 사진을 걸어놨었다. 사실 해당 앨범 이후로는 각 잡고 찍은 사진이 없긴 하다. N.EX.T 6집 당시 찍은 사진은 특유의 화려한 유니폼 때문에 영정 사진으로 쓰기 애매했고, 문신을 새긴 이후엔 선글라스를 많이 끼고 다녀서 눈이 나오는 사진이 적었다. 특히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은 더더욱 적었다.

본인 스스로도 못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 인터넷에서 보컬들 레벨 매기는 사람들 중엔 '정말로 아마추어 보다 노래를 못 부르는 줄 아는' 사람들도 늘어난 탓인지, 2011년경부터는 이런 식의 보컬과 관련한 엄살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오냐오냐 했더니 수염까지 잡아당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그렇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학생들을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는 보컬트레이너의 입장이기 때문에 자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신해철의 보컬을 저평가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신해철 생전 그의 보컬을 저평가 하던 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진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 유튜브 등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신해철의 라이브 영상 대부분은 신해철의 목이 망가지기 시작한 시기의 라이브 영상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인 것도 있다. 1993년 ~ 1996년에 대마초 흡연 혐의로 인해 지상파 출연금지 연예인이 되어 신해철은 콘서트 위주로 활동하였지만 당시에는 스마트폰 같은 것도 없었던 시절이라 팬들이 촬영한 자료 같은 것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마찬가지로 2000년대 초반에도 아직 스마트폰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그닥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데다가[10],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대중화 뒤에는 이명박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어 콘서트는 커녕 음반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은 신해철의 극초창기(무한궤도 ~ N.EX.T 결성 직후) 무대이거나, 출연금지가 해제되어 TV에 출연, 송출된 무대이거나, DVD로 발매된 영상, 혹은 건강 악화로 인해 목이 많이 망가진 말년의 무대들이 대부분이다.

신해철은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의 보컬과 관련한 평가를 잘 알고있다. 이에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방송 중 보컬들의 발성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면서 센가성이라는 정체불명의 용어에 대해 슬며시 언급하고 지나간 적이 있다.

변성기 시절 무리하게 목을 혹사한 원인으로 목소리의 저/고음역대의 파형 자체가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특이한 편이라고 한다. 영국의 엔지니어들로부터 들은 평가라고 한다. 일반인들이 파형분석을 해볼 수는 없겠지만, 실제로 신해철의 고음을 직접 들어보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그런 센가성과는 많이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컨디션에 따라 음정이 들쑥날쑥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목소리로 세 시간 내내 공연하는 하드한 스케줄을 생각해본다면 소위 말하는 불량발성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창법을 바꾸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목에 무리가 와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금씩 고음을 내기 힘들어 했었는데, 2009년 그에게 정신적으로 힘이 되어주었던 노무현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는 그 슬픔으로 인해 과도한 음주를 하게되어 목과 건강이 크게 망가져 고음은 물론 소리를 오래 내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2014년에는 어느정도 가창력을 회복하는 듯 하였지만, 10월에 있었던 마지막 무대에서는 수술의 후유증으로 인해 다시금 건강이 급속도로 안좋아져 노래 부르는 것을 힘들어 하였고, 결국 며칠 뒤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고스트네이션에서 전인권이 게스트로 출연했을 당시 자신이 노래를 못 부른다며 내내 얘기했었지만 전인권은 "잘 부르는데 왜 그러냐"고 말했었는데 이 때 신해철이 굉장히 쑥쓰러워하는 걸 들을 수 있다.

3. 연기 경력[편집]


의외로 드라마에 몇 번 출연한 적이 있었다. 신해철은 안녕, 프란체스카에 앙드레 대교주로 캐스팅되었다. 원래 신해철이 앙드레 대교주 역을 맡게 될 당시 앙드레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대교주다운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이었지만 신해철 본인이 '내 인생이 지겹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오히려 제작진을 만류, 그 결과 모두가 다 아는 실속 없는 캐릭터로 탄생했다. 그럼에도 강인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2006년 애니메이션인 아치와 씨팍에서 작중 등장하는 범죄 조직 보자기 갱단의 보스이자, 작중 최종 보스인 보자기 킹을 연기하였다. 포스 넘치는 더빙 연기가 매우 좋은 작품이다. 신해철의 몇몇 곡의 특정 가사를 읊는 것도 소소한 감상 포인트.

4. 사람 신해철[편집]


여자친구를 '영숙이'라 칭했다고 한다. 마지막 영숙이가 바로 현재 아내인 윤원희.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도 있으나 가족들의 언론 노출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신해철의 성향상으로 볼 때, 팬들에게 써먹을 만한 대외적인 호칭으로서 개발한 측면이 큰 듯하다. 밑도끝도 없이 자기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부르는 남친을 허용하는 여자는 드물 것이다.

아내 윤원희는 9살 연하의 미스코리아 뉴욕 진 출신 재원이다. 신해철이 미국에서 비트겐슈타인 작업을 할 때 만난 사이로, 일본 골드만삭스에서 일하다 결혼을 위해 사직하였다. 주변에서 부부의 나이차를 두고 놀리면 난 누구누구처럼 띠동갑은 아니니까 괜찮지 않냐며 대응한다나.

결혼 전에 아내의 암이 발견되었다. 본래 결혼이라는 제도에 거부감이 깊던 신해철은 이때 아내를 옆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결혼시기에 대해 고민하던 중, 오히려 그의 어머니가 아내가 힘든 이런 시기일 때야말로 빨리 결혼을 해야 그쪽 부모님들이 편안해 할 거라며 결혼을 재촉했다고 한다. 결국 결혼과 함께 아내는 수술을 받았고 완치됐다. 그때 신해철도 골다공증으로 고생하면서 부부가 사이좋게(?) 병원에 다녔다고 한다.

암이 완치된 이후 신해철 부부는 딸과 아들을 얻었다. 어떤 악플러가 신해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공개된 딸의 사진을 보고 악플을 쓰자, 신해철 본인이 그 악플러의 미니홈피를 찾아가 방명록에 욕설로 대응해서 그 악플러를 겁먹게 했다. 이에 사람들은 '역시 마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것보다는 역시 아버지. 사실상 불임부부가 고생 끝에 아기를 가질 수 있었던 상황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해철의 과민반응이 이해가 갈 만한 상황이었다. 다만 평소 워낙 독설가로 알려져 있다보니 욕설 대응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을 뿐이다.

마왕이나 독설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사석에서는 후배에겐 친절하고 격의 없이 대하면서 선배에겐 깍듯한 사람이기도 했다. 배철수는 마왕이라는 이미지로 이런 신해철의 인간적인 면을 대중이 알아주지 않는 데 대해 몇 차례 안타까움을 표하며 "사석에서는 어리광을 피우기도 하는 귀여운 후배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양준일도 1990년 초반 데뷔 이후 방송계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때 신해철이 챙겨주었다고 회고했다. 까마득한 후배 인디 뮤지션들과도 음악적으로 교류하며 사적으로도 친해 이런 저런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11][12] 신해철이 인디씬 전체에 대해 꾸준히 보인 관심과 후배 뮤지션들에 대한 애정에 대해선 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 그런 반면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을 지키는 것도 중요해서 잠시 일했던 라디오 작가가 그만둘 때까지 반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신해철의 사망 이후 그에 대한 이런 이미지가 잘 녹아 있는 신해철의 '몰래 카메라' 출연분이 오랜 시간 인기검색어에 올라 있었다.

안면인식장애 때문에 손석희성시경으로 착각했다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손석희에게 야 시경아! 했는데 그게 손석희였다는 내용.

2007년에는 MBC의 쇼바이벌에서 심사위원으로 나왔는데, 그 때 일반인 출연자로 나온 은가은은 이후 신해철의 도움을 받아 가수로 데뷔하게 됐다. 은가은 본인에게는 신해철이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TOP밴드 출연 당시 코치했던 서울 직장인밴드 S1 16강 탈락 판정에 불복하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S1의 코치로 계속 음악을 하면서 이 팀이 진짜로 음반을 내고 활동을 하고 잠실 주경기장에서 S1이 콘서트를 하는 걸 봐야겠다는 것이 나에게는 불복이다" 라는 인터뷰를 진행 했다.[13][14] 해당 발언 이후 나온 기사들을 보면 립서비스 난무하는 방송계에서 유달리 남다른 인간적인 면모가 보인다. S1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듯 한데 Dancing Queen 음원은 신해철이 직접 편집, 마스터링하였고 신해철의 목소리도 들어가 있다고 밝혔다.[15] 인터뷰

여담으로 국카스텐을 칭찬하면서 앨범 좀 빨리 좀 내달라고 독촉하는 인터뷰를 했다. "넥스트가 아닌, 지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스타가 나와 구멍을 뚫어주는 게 훨씬 중요하다. 그러니까 빨리좀 앨범 좀 내라 이 새끼들아. 너희가 멈춰있으면 후배들이 기회를 잃는다"라는 인터뷰를 보아하니, 꽤나 국카스텐을 아끼는 듯하다. 2집의 '감염'이 선공개 되었으나 2집이 채 나오기도 전에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16]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오자키 유타카와 유사점이 많다. 각 나라의 대중음악계에 끼친 영향력과 위상은 물론 개인적인 삶까지도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기억되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명곡을 가지고 있으며, 두 사람 다 초창기 시절에는 정통적인 로큰롤과 발라드를 추구했고, 가사 또한 일반적인 사랑 얘기에 국한되지 않고 삶을 사는 이유, 자아성찰, 사회비판 등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작사를 하였으며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창법과 목소리가 변했다는 것도 동일한데, 둘 다 술과 담배를 즐겨했으며 이 때문에 점점 목이 망가져 어느 순간 창법을 바꿨다. 아예 노래 부르는 것을 힘겨워 했던 시기도 존재했지만 말년에는 다시 라이브를 안정적으로 소화해냈다. 게다가 둘 다 마약에 손을 댄 적이 있고, 이로 인해 구속되었던 적도 있다. 또한 둘 다 전성기엔 TV 출연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두 사람 모두 솔로 6집이 유작이 되었다.

5. 연예인 신해철[편집]



5.1. 연예인들과의 관계[편집]



5.1.1. 서태지[편집]


서태지와는 외가 쪽 6촌 사이다. 진짜로 서태지와 친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 서태지가 TV에 나온 걸 집에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신해철의 어머니가 "어머 저거 현철이[17] 아니야?"하며 알아보았다고 한다. 서태지와 신해철이 처음 만났을 땐 서로 친척인지 몰랐다고. 그래서 신해철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과 그가 직접 PD와 싸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던 서태지는 2집을 준비하면서 당시 신해철이 가지고 있던 AKAI s2000과 샘플러에 대해 배우기 위해 후배 뮤지션으로서 그에게 방문했을 때 무서운 형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음악을 배우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되었지만. 2002년 일본에서 가족 정도만 모여 치룬 신해철의 결혼식에도 서태지가 참석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관련 에피소드로, 서태지가 신해철을 강제로 설득해서 신해철과 김종서, 서태지가 같이 스키장을 갔는데 신해철이 크게 넘어져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생겼다. 당연히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어머 저 사람 신해철 아냐?" 라고 하며 신해철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서태지는 고글과 비니로 얼굴을 완전히 감싸고서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신해철을 배웅했다고 한다. 신해철은 깊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구급차에 실려갔다. 그 모습이 너무 밉상이었던지 신해철은 아직도 그때 혼신의 힘을 쥐어짜내서 "저 새끼 서태지다!"라고 소리치지 못한 게 한스럽다고 한다.(...)

김구라의 진실게임에 친분 관계가 언급되어 있다.

이처럼 서태지는 비록 신해철과 타이업 활동을 하는 등의 공식적 접점은 없었지만 사적으로는 데뷔 이래 계속 친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그룹 해체 이후 서태지는 미국으로 칩거하게 되고, 그가 보유하고 있던 악기들 대부분은 신해철을 통해 처분되었다. 또한 2000년 이후 상호간의 활동기간과 휴식기간이 거의 겹친다. 서태지가 2000년 태지로 은퇴 번복 후 컴백했을 때 신해철은 신생 밴드 비트겐슈타인을 이끌고 있었으며 2004년 7th Issue 때는 신해철이 넥스트를 재결성하여 개한민국을 발표하였다. 2008년에도 Atomos와 신해철 20주년 컴백+넥스트 6집 활동기가 맞물렸으며[18] 2014-2015년에도 서태지가 9집을 냈을 시점 신해철이 솔로 6집의 활동을 막바지에 두고 원대한 프로젝트인 N.EX.T Utd.의 첫 발을 떼고 있던 타이밍이었다.

또한 서태지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신해철 사망 전 이승환, 싸이, 김종서 등과 함께 모종의 합동공연 비슷한 기획 이야기가 오고갔던 것으로 보이지만 신해철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단 완성된 것이 딱 하나 있긴 있다. 4인의 90's Icon 프로젝트. 2011년부터 신해철-이승환-서태지 삼자 팬 사이에 돌던 공동 퍼포먼스에 나머지 셋과 절친한 편에 서태지와 타이업 활동을 Free Style로 한 적 있던 김종서까지 끌어들여, 2014년 서태지 버전의 90's Icon을 9집을 통해 공개하고, 이후 4인 프로젝트의 작업을 완료해 공개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4인 합동공연 정도가 아닌 합동 싱글 공개와 장기 활동까지 하려고 한 듯 하지만…이 녹음 얼마 후 넷이서 얘기하던 중 신해철은 배가 좀 아프네…하고 병원으로 달려갔고[19] 그게 세 사람이 본 살아있는 신해철의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신해철의 사망 직전 이 프로젝트의 녹음까지는 완벽하게 끝났고, 후반 작업을 논의하며 웃음꽃을 피우면서 이야기하던 상황이라 완성에는 문제가 없었고, 실제로 이미 완성되었지만, 남아있는 세 명은 서로의 가슴 속에 이 음원을 묻기로 하고 현재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서태지를 향한 네티즌들의 도를 넘은 악플이 줄어들게 된 것도 신해철의 영향이 큰데, 2014년 신해철이 의식불명에 빠졌을 때 방송에 잘 나오지도 않던 서태지가 슈퍼스타K6에 직접 출연하면서 "신해철 형님이 형님 답지 않게 많이 아파요, 여러분들이 응원해 주시면 빨리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울먹이며 말을 한 이후로 네티즌들의 악플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며칠 뒤 신해철은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00년대에 중후반기에 들어서 신해철은 TV 출연을 자주했었는데, 신해철을 게스트로 데려다 놓고 정작 서태지의 근황을 계속 물어보는 것에 대해 은근 삐졌었는지 신해철과 서태지가 친척 관계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에 "아니에요."라며 구라를 치기도 했었다.

5.1.2. 정석원 & 015B[편집]


당시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무한궤도 멤버들에 더하여 무한궤도 앨범 녹음을 위해서 영입한 제3의 키보디스트가 바로 훗날 015B의 정석원이다. 사실상 그를 음악계로 데뷔시킨 것은 바로 신해철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신해철이 2000년 즈음에 인터넷상으로 연재한 본인의 자서전 격이라 할 수 있는 연작글(에세이)을 보면 고교 동창들이 만든 밴드인 "아기천사"의 땜빵 멤버로 참가한 강변가요제 예선을 나갔던 사실이 나와 있고, 대학가요제 예선 때 서울대 "실험실" 멤버였던 정석원의 피아노 연주를 보게 되었다고 썼으나, 정석원이 쓴 "공일오비 스토리"에 따르면 그는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적이 없으며 강변가요제 출전 시 1차 예선에서 탈락했다. 3차 예선에서 탈락한 팀은 신해철이 있던 밴드 '아기천사'였다. 출처는 공일오비 스토리. 신해철이 잘못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이렇게 1차 예선에서 탈락했을 때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보고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는 가운데 한 남자만 일어서서 갈채를 보냈고, 후에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음악을 하자고 제의했는데 그가 바로 "아기천사"의 멤버 신해철이었다고 했다. 이후 신해철이 무한궤도의 앨범 작업을 진행하면서 직접 영입 제안이 왔다고 한다.

신해철의 에세이 원문에서 인용.

서울대에서 왔다는 괴상한 3인조는 째즈도 아닌 가요도 아닌 골 때리는 곡을 연주했는데 밴드 이름이 실험실이었으며, 바벨 2세에 나오는 요미와 흡사한 키보디스트가 피아노 연주로 관객들을 으악 죽이고 있었다.[20]

[21]


무한궤도 앨범 녹음은 신해철이 기타를 맡았지만 방송 출연시 보컬과 기타를 병행할 수 없었기에 객원으로 영입된 기타리스트는 바로 정석원의 친형인 정기원이었다. 이후 밴드가 사실상 해체된 이후 무한궤도는 신해철 개인의 솔로활동 및 키보디스트 정석원, 베이시스트 조형곤, 객원 기타리스트였던 그 정기원이 결성한 015B로 나뉘어서 90년대 대중음악의 한 축을 이룬다. 그 정기원? 그가 바로 015B의 간판 장호일이다.

비록 별개의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동일한 음반사에 소속된 음악적 동료로서 무한궤도 해체 직후 때만 해도 서로를 존중하며 꽤 절친한 듯이 보였던 신해철과 정석원이었다. 신해철은 015B 1집에 수록된 '난 그대만을'이란 곡을 작사 작곡하고 직접 보컬까지 맡았으며[22], 015B 2집 수록곡인 불후의 명곡 '이젠 안녕'에서 집단 보컬 중 1인을 맡는 등[23] 한동안 정석원과 상당히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신해철의 솔로 데뷔 앨범에도 정석원의 곡인 'P.M. 7:20', '함께 가요', '인생이라는 이름의 꿈'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정석원이 '실험실'이란 밴드로 강변가요제 예선 출전시 연주했던 노래도 'P.M. 7:20'이란 노래인데, 신해철 1집에 수록된 곡은 정석원이 기존에 작곡했던 동명의 곡에 신해철이 별도로 작사한 곡이므로 강변가요제 출전 곡과는 완전히 다른 노래다. 이들의 관계는 공일오비 첫 콘서트에 신해철이 특별출연하여 '난 그대만을'을 열창하였던 92년도 초반까지만 해도 크게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24]

정석원과는 본래 무한궤도에서 함께하던 시절부터 서로 추구하는 음악 장르 및 지향점의 차이가 있었음을 일찍부터 서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석원이 그러한 부분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015B 자서전의 내용과 무한궤도의 마지막 방송 출연이었던 라디오 공개 방송에서 신해철이 무한궤도가 공식적으로 해체하게 될 것이며, 이후 신해철 자신과 정석원을 중심으로 새롭게 결성된 밴드로 나뉘게 될 것임을 밝히면서도 특별히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거나 그러한 의미를 담은 어휘를 선택하지 않은 채 가볍게 언급하는 점을 감안해 보아도 그렇다.

실제로 90년대 초반 아이돌 스타로서 압도적인 인기와 지명도를 얻었던 신해철의 인기와 앨범 판매량은 N.EX.T를 결성한 다음부터 본인이 추구해왔던 음악세계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의도적으로 대중의 취향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인형의 기사 Part 2"와 "도시인"이 히트한 1집과 "날아라 병아리"가 히트한 2집 앨범을 제외하고 음악적인 성과와 비평과는 별개로 판매량은 완연한 감소세가 분명했다. 물론 대마초 사건과 그로 인한 방송 출연 금지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편 동일한 시점에서 정석원이 이끈 015B는 POP계에서 등장한 최신의 장르를 재빠르게 받아들인 다음, 한국적 감성에 바탕을 둔 대중적 취향을 솜씨 좋게 결합해내면서 음악적 실험성과 대중성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고, 015B는 3집부터는 판매량 밀리언 셀러 기록 및 가요차트까지 완전히 석권하는 속칭 대박을 친다. 여전히 같은 음반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부터는 신해철과 정석원의 작품 속에서는 양자의 음악적 교류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화룡점정으로 015B 5집 앨범 부클릿에 적힌 글 중 '친분 있는 평론가들의 찬사 일색의 평론을 자기 앨범 속지에 자랑스럽게 써두는 몰지각한 음악인' 운운하며 N.EX.T를 디스하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그야말로 신해철과 정석원의 관계에 종언을 알렸던 듯.

과거 무한궤도 및 넥스트 멤버와의 재결합 가능성을 묻는 2008년의 인터뷰에서 정석원과의 재결합에 대해서는 단칼에 고사하며 (정)기송이형이라면 몰라도 "정석원이랑은 절대 안하죠", "재수 없으니까요, 그대로 쓰셔도 돼요"라면서 거침없이 대놓고 디스하는 언행을 보였다.

정석원 스스로 '공일오비 스토리'에서 데뷔 당시에 몸담았던 밴드 무한궤도를 그 당시 정석원 자신보다 상당히 앞서가는 음악성을 지닌 밴드로 평가하였고, 015B 1~2집 활동 때에는 신해철 솔로 앨범의 인기와 평가 면에서 완전히 밀린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015B라는 그룹명 자체를 무한궤도에서 차용한[25] 것을 보면 적어도 데뷔 초기까지의 정석원은 당시 동갑내기이면서도 평단의 주목이나 인기도 측면에서 상당히 앞서가는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신해철에게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신해철 또한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은 N.EX.T 1집 'HOME' 앨범으로 단 한 번밖에 기록해보지 못한 밀리언 셀러를 세 번 씩이나 기록하며, 1990년대 신세대의 대변자로서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게 된 015B에 대해서 역시 그리 편한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해철과 정석원 양자의 이러한 관계는 2014년 10월, 신해철의 빈소에 다른 015B의 멤버들과 함께 정석원이 찾기 전까지 결국 계속되었다. 생전에 두 사람이 화해했는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긴 하나, 어쨌든 젊은 시절 같은 팀이기도 했고 상당 기간 음악적으로도 교류했던 정석원에게 신해철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사망은 정석원이 가지고 있던 앙금을 희석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2015년 10월 27일, 신해철 사망 1주기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윤종신이 '월간 윤종신 Special'이라는 타이틀로 신해철의 1집 수록곡 '고백'을 리메이크하여 발표했는데, 이 곡의 편곡을 정석원이 맡았다. 윤종신은 보도자료를 통해 "신해철의 초창기 음악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으면서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뮤지션인 정석원과의 작업이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곡의 수익금은 모두 신해철의 유족에게 돌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5.1.3. 이석원 & 언니네이발관[편집]


한때 정말로 원수 관계였었다. 위의 정석원이 일종의 애증 관계 였다면 이석원은 정말로 원수 관계였었다. 신해철의 말로는 현피를 떴었다(!!!)고 하지만 정말 현피를 떴는지는 알 수 없다.

둘이 원수 관계가 되었던 이유도 아주 간단한데, 이석원이 데뷔 전 신해철과 N.EX.T에 대해 악플을 달면서 선시비를 털었던 게 그 시작이다.

PC통신 활동시절에 이석원은 여러 밴드의 비평글을 썼는데, 넥스트의 음악을 해외음악에 비해 구성이 구리다는 이유로 따라잡기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석원은 앨범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유기적인 구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넥스트 앨범은 백화점식 구성이라며 비판했고 신해철이 이 글에 반박글을 썼다. 당시 신해철은 이석원을 만나면 죽여버리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제대로 화가 났었다[26]고 회고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이석원이 음악을 시작하고 앨범을 내자 홍보를 해야했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는데, 그때 이석원이 홍보를 제안한 매체가 바로 신해철의 라디오 였다고 한다. 신해철은 이석원의 이런 화끈함이 맘에 들었는지 그간의 화는 다 잊고 술자리를 마련해 많은 이야길 나눴다고 한다.

그 후에는 친하게 잘 지내고 있었으나, 신해철의 말년에는 그리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도 자주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석원문서에 있는 이석원의 일기를 보면 신해철이 심정지로 쓰러지고 난 후의 심정을 알 수 있다. 결국 신해철세상을 떠나자 언니네 이발관의 전 베이시스트 이상문을 떠나보낼 때만큼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5.1.4. 윤도현 & YB[편집]


앞으로 크게 될 윤도현

영화 정글 스토리 OST 부클릿 中


윤도현은 신해철이 가장 아끼던 후배 중 한명이다.

윤도현이 갓 데뷔 했을 당시에는 국내 가요계가 댄스 음악 중심이었던지라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묻히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윤도현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격려해주며 도움을 주던 선배 뮤지션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두 명이 바로 김광석신해철인데, 김광석윤도현을 위해 KFC 치킨을 사줬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며, 신해철 또한 정글 스토리 OST 작업 당시 앨범 부클릿에 윤도현을 "앞으로 크게 될 윤도현"이라고 적어놓았던 바가 있다. 또한 2006년 발매된 ReGame? 앨범의 수록곡인 날아라 병아리의 도입부 하모니카 피쳐링을 윤도현이 담당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한 가지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ReGame? 앨범 녹음 당시 윤도현이 리메이크 소식을 듣고 신해철을 찾아가 듀엣 보컬로 참여하고 싶다고 제의를 했으나 밴드의 보컬이 갈라지는 것을 염려한 신해철이 보컬 대신 하모니카 피쳐링을 제안했고, 본래 8마디를 녹음했던 것마저 위기감을 느껴(?) 반토막 내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신해철은 훗날 2014년에 N.EX.T Utd.로 컴백하면서 이현섭을 서브 보컬로 영입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ReGame? 녹음 당시와는 달리 2014년의 신해철은 여러 부침으로 인해 목이 많이 망가졌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2014년,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떠났을 때엔 장례식장에서 위패를 들며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김광석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가장 아껴주던 선배를 하늘로 떠나보낸 셈이다.


5.1.5. 윤상[편집]



내게 저렇게 가까웠던 친구가 있었나?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에 함께했던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너였니?

윤상


"윤상은 노래 잘 하는데 자기가 그걸 모른다."

신해철


68년생 동갑내기 친구로 신해철 1집과 윤상 1집이 발매된 90년에 서로 친해지게 되었으며, 전자음악에 대한 관심사나 데뷔연도가 비슷해서 친해졌다고 하며, 밴드 경력이나 솔로가수로 데뷔해 아이돌과 같은 인기를 누린점, 싱어송라이터라는 점도 공통점이 많다. 92년부터 같이 음악을 하자고 서로 약속했다고 한다.

프로젝트 그룹인 노땐스를 결성하여 같이 호텔[27] 를 빌려서 두 뮤지션이 가지고 있는 장비를 놓고 합숙을 하며 앨범을 내기도 했다. 당시 아트 오브 노이즈의 개리 란간을 초대했는데, 서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과정에서 신해철이 윤상보다 영어를 더 잘해 질투했고, 윤상이 유학을 가게된 촉매제가 되었다고 한다. 신해철의 음악 커리어에서 노땐스와 같이 서로 동등한 싱어송라이터로서 같이 작업한 결과물은 거의 없다. 크리스 샹그리디와 작업한 Monocrom 는 공동프로듀서이긴 했지만 앨범의 작곡의 대부분 신해철이 했으며, 샹그리디는 어쿠스틱/일렉기타, 베이스를 담당하는 서포터였다. 노땐스골든힛트는 윤상과 신해철이 프로듀서(공동), 보컬, 작곡·편곡, 컴퓨터 프로그래밍, 건반, 코러스를 담당하며 평등하게 역할을 나눈 신해철 디스코그래피에서 매우 드문 결과물이였다. 대신 윤상은 작사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페르소나인 박창학과 신해철이 나눠서 했다.

윤상의 군생활동안 휴가 나와서 가장 많이 만난 친구가 신해철, 가장 술을 많이 사줬던 친구도 신해철이라고 한다.

2010년에 게임 아키에이지의 음악감독으로 윤상과 신해철이 더블캐스팅 되었으나,# 신해철은 개인사정으로 하차했다.

신해철 사후 6년간 신해철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던 윤상은 선미네 비디오가게에서 신해철의 정치적 메세지와 사회적 참여에 대한 견해차이[28]로 몇년간 교류하고 있지 않다가, 신해철이 사망하기 전날에 병문안을 하여 마지막으로 손을 잡았다는 얘기를 울먹이며 밝혔다.


5.1.6. 안흥찬[편집]


크래쉬의 베이시스트 겸 보컬인 안흥찬과는 서태지를 통해 알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국내 메탈계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킨 크래쉬는 서태지의 앨범에도 피처링으로 참여하며 대중들에게 잘 알려졌다.

처음에 안흥찬은 신해철을 약간 꺼렸다고 한다. 안흥찬은 신해철을 상당히 무서운 성격일 것이라 생각해 좀 꺼렸는데, 신해철이 적극적으로 게임 CD를 안흥찬에게서 빌리거나, 용돈을 주는 등 친해지고자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안흥찬도 신해철이 그리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친해졌다고. 아마 다른 크래쉬 멤버들하고도 꽤 친했던 듯 하며, 드러머 정용욱도 신해철과 친했던 듯 싶다. 다른 넥스트 멤버와도 친했고, 양 쪽 멤버들이 죄다 겜덕이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는 듯 하다.

다만 안흥찬이 신해철과 같이 음악을 한 적은 넥스트 5집 개한민국의 Dear America 딱 한 곡이다. 안흥찬은 노바소닉 음악에 피처링으로 자주 참여한 적은 있지만, 신해철과는 음악 활동을 같이 한 적이 적은 건 아쉬울 따름.

신해철과 관련된 건 아니지만, 하나로통신배 스타리그 때 연예계에서 나름 스타로 이름난 연예인들이 프로 선수들과 팀을 짜 2:2 스타 대회가 열린 적이 있는데, 이 때 안흥찬&강도경 조가 김세황&변성철 조를 4강에서 만나 강도경이 안흥찬보다도 먼저 털리며 패배한 적이 있다.

5.1.7. 싸이[편집]


존경하고 사랑했던 형은 꿈에서 깨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겠구나.

-

싸이


싸이와는 친한 친구이자 싸이의 음악적 스승이기도 했다.

Project X 앨범이나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음반 등을 같이 작업하기도 했으며, N.EX.T의 정규 5집 개한민국에 싸이가 랩 피쳐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신해철의 음반에 가장 많이 피쳐링으로 참여한 아티스트 중 한명이 싸이이기도 하다.

다만 개한민국의 수록곡인 'Dear American'에 피쳐링으로 참여했을때 싸이 파트의 그 선정적이고 잔혹한 가사[해당가사] 때문에 신해철싸이 둘 다 반미주의자로 몰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물론 둘 다 반미주의자는 아니나[29] 당시 시대상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와 같은 일들과 부시 정부의 삽질로 한국인들 사이에서 미국의 비호감도가 높았던 시절임을 감안해야 한다. 무엇보다 해당 곡은 반미주의적인 내용보다는 명분 없는 전쟁과 포로 고문 등의 전쟁 범죄를 반대하는 반전주의적 성향을 띄는 곡이다. 아무튼 이후 미국에서 해당 가사가 논란이 되자 싸이는 해당 가사의 잔혹한 표현에 대해 사과를 했으며 이 일로 인해 신해철은 음원 사이트에서 해당 앨범을 통째로 내려 현재는 들을 수 없다. 싸이에게 더 이상 피해가 가지 않게 배려한 것으로 추측된다. 신해철 본인 스스로도 해당 앨범의 직설적이다 못해 날선 메세지 표현 방식을 은근히 흑역사로 여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같은 해 이승기데뷔 앨범[30]을 함께 프로듀싱했다. 해당 앨범에는 싸이와 신해철을 포함해 유건형, 바운스 등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앨범 제작에 참여했다. 싸이는 당시 타이틀 곡이었던 내 여자라니까와 삭제, 아버지를 작사/작곡했고 신해철은 수록곡 ‘앵콜’ 과 ‘Anding’ 의 작사/작곡을 맡았다.[31]

신해철이 입원했을 당시에 이승환, 서태지 등과 함께 싸이는 신해철의 병문안을 다녀간 가수들 중에 하나였으며, 이틀 이후 신해철이 별세하자 윤종신, 윤도현, 이승철 등과 함께 눈물로써 자기를 아껴주고 사랑했던 형을 떠나보냈다.

신해철 사후 싸이는 2015년에 발매한 본인의 정규 7집 칠집싸이다에 신해철 헌정곡인 DREAM을 수록했다. 생전 신해철과의 술자리에서 신해철이 종종 얘기했던,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꿈이 아닐까?"하는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제작한 곡이라고 하며 실제로 작사가로 신해철과 싸이가 등록되어있다. 또한 이 노래의 가사 중 후반부의 '만남의 기쁨도 헤어짐의 슬픔도 긴 시간을 스쳐가는 짧은 순간인 것을' 부분은 신해철의 솔로 2집 Myself에 수록된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의 가사인 '만남의 기쁨도 헤어짐의 슬픔도 긴 시간을 스쳐가는 순간인 것을'에서 따온 가사이다.


5.1.8. 문희준[편집]


문희준과는 2000년대 초반 무렵 인연을 맺었다. 문희준이 H.O.T. 해체 이후 록커 변신을 선언하고 한창 100만 안티를 불러모으던 시절, 신해철이 당시 안면도 없던 문희준에게 식사 자리를 마련하며 불러냈다고 한다.[32] 신해철의 연락을 받은 문희준은 술을 한잔 하며 식사를 함께했는데, 그 자리에서 신해철은 문희준에게 "너 나 존경하냐?"라고 한 마디 물어봤다. 문희준은 "네 형님." 이라고 대답했는데, 신해철은 "내가 보기엔 널 욕하는 사람들은 록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난 너 음악 좋아. 네가 존경한다는 사람이 좋다고 했으니까 너의 길을 계속가고 너의 음악을 계속해." 라고 격려를 해줬다. 문희준은 안면은 없었지만 자신이 존경하던 선배가 직접 격려를 해주는 걸 보고 큰 감동을 받고, 자신감도 많이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발언은 신해철이 문희준을 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홀로 외로이 욕을먹어가면서 록음악을 하는 후배를 안타까워 하는 진심어린 마음에서 나온 말이였기에 문희준은 더욱더 감동을 먹었다.[33]

이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친분을 맺고 말년까지 친한 사이로 지냈다. 2001년 합동공연을 시작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 여러 록페스티벌에 함께 출연해 공연하기도 했고, 2003년 SMTOWN의 여름 앨범에 자신의 곡 그대에게를 리메이크 하는 것을 허락해주기도 했다. 신해철은 자신이 진행하던 고스트스테이션에서 문희준을 비방하는 록 팬들을 거세게 질타할 정도로 문희준을 매우 아낀 것으로 유명했다.

2014년 신해철이 별세하자 문희준은 직접 빈소에 조문했고, 인터뷰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형이 없다는 게 안 믿길 것 같다" 는 말을 남겼다. 이 후에도 문희준은 불후의 명곡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신해철에 대한 얘기를 종종 하고 있다.

5.1.9. 은가은[편집]


신해철이 딸처럼 아꼈던 후배 가수이다.

은가은은 2007년 쇼바이벌에 일반인 참가자로 나와 일반인 600명 중 1위를 차지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신해철의 눈에 띄어 신해철의 회사 연습생으로 발탁해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다. 신해철이 기획한 4인조 헤비메탈 밴드 '스핀'의 보컬로 직접 발탁할 정도였으니, 이미 실력으로는 인정받은 셈이었다. 다만 해당 밴드는 잘 되지 않았으며 은가은은 이후 2011년에 새 소속사로 옮겼다. 사실 이 시기 즈음엔 신해철 본인 조차도 제대로 된 활동을 못했을 시기였으니... 이 당시 신해철은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이의 자살에 대한 충격으로 몸을 혹사하고, 당시 이명박 정부의 탄압을 받고, 본인은 사교육 광고 논란에 휘말렸으며 운영하던 회사는 적자에 학원은 망하고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빚도 2억 가까이 생겼다고 말했을 정도의 암흑기였다.

고시원에 살면서 가난한 연습생 생활을 했었는데, 신해철은 이런 은가은을 딸처럼 대해주었고 은가은 본인도 신해철은 아버지 같았다고 언급했다. 아버지가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며 자신의 딸처럼 아끼면서 데리고 다니시고 몰래몰래 용돈도 주었다고 한다. 책상 서랍에 몰래 돈봉투를 넣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은가은은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양송이 버섯'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N.EX.T 정규 6집 666 Trilogy Part I의 수록곡 'Cyber Budha Company LTD.'에도 피쳐링으로 참여했다.

은가은 본인은 한동안 신해철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몇몇 사람들의 '뜨기 위해서 신해철을 이용한다'는 오해 때문에 신해철에 대한 일화들을 얘기하지 못 했었다고 한다.


5.1.10. 하현우 & 국카스텐[편집]


장수 한 명이 앞장서서 성문을 뚫어야 병사들이 진격하듯,

뛰어난 밴드 하나가 성문을 뚫어줘서 후배 밴드들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

N.EX.T가 아닌, 지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스타가 나와서 구멍을 뚫어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즉, 국카스텐과 같은 친구들이 쭉쭉 뻗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국카스텐 이 새끼들아! 빨리 앨범 내라.

너희가 멈춰있으면 결국 너희 후배들이 기회를 잃는다.[34]

신해철


신해철이 윤도현 이후 가장 눈여겨보고 응원해주던 후배이며 신해철하현우가 매우 존경하는 선배 아티스트이다.

신해철은 생전에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이 정도 연주에 이 정도 외모에 이 정도 음악에 뭘 더 해야 밴드가 잘 될 수 있는 건가?", "국카스텐 같은 밴드면 못해도 지금쯤 200~300만 장 쯤은 팔렸어야 되는 게 아닌가?" 라고 할 정도로 국카스텐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2집 앨범을 빨리 내라며 애정 섞인 디스를 했을 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당 앨범이 발매되기도 전에 신해철은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후일담에 따르면, 국카스텐은 정규 2집이 나오면 앨범을 들고 신해철을 찾아갈 계획이었으나 신해철이 이전에 사망하면서 결국 두 사람은 생전 만남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신해철에게 사랑받은 것에 대한 헌정인지 보컬인 하현우는 복면가왕우리 동네 음악대장으로 출연하여 44회차에서 2라운드와 3라운드에서 각각 신해철의 곡 '민물장어의 꿈'과 'Lazenca, Save Us'를 불렀다. 그 결과 모든 대전자들을 압도적인 표 차로 이기며 가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56회차에서도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를 선곡했다. 2016년 MBC 연예대상에서는 하현우가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소감으로 "하늘에서 저를 기특하게 바라보고 계실 신해철 선배님께 다시 한번 이 상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국카스텐 팬들과 신해철의 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5.1.11. 김광석[편집]


첫인상, 진짜 후줄근했지.

차림새, 완전 변두리.

목소리, 청승맞다고 생각했지.

이제 내게 기억되는 건 그의 얼굴 가득 주름 지으며 웃던 웃음 뿐.

나 이제 광석이 형 노래 안 들어. 도저히 CD를 손에 들 수가 없어서.

나 형 미워해.

살아있었으면, '나 형 졸라 맘에 안 들어' 라고 꼭 얘기하고 싶은데,

그럼 또 그 주름 쫙 만들면서 웃어줄 텐데.

신해철


김광석신해철의 관계는 그다지 알려진 것도 없고, 신해철이 N.EX.T로 활동하며 인기를 한창 얻고 있었을 당시인 1996년에 김광석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음악적 접점도 딱히 없어 둘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신해철이 작성한 김광석의 추모 글귀에서 김광석을 '광석이 형'이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사적으로는 친분이 있었던 듯 하다.

윤도현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김광석신해철을 주로 언급한다.

김광석신해철 모두 각각 자살사고사(의료사고)로 요절하였으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살아서 노래해주었으면'하며 안타까워하는 스타이기도 하다. 둘은 개개인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당시 사회의 주력 세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아티스트이기도 하며, 이 둘의 죽음 또한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아티스트이다.

강태규 음악평론가는 신해철이 사망한 해에 김광석을 언급하며, "(2014년 기준) 4050세대가 김광석이 죽었을 때 느꼈던 충격은 현재 3040세대가 신해철[35]을 보며 느끼는 아픔과 맞닿아있다." 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김광석신해철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가수'의 죽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아이콘'이 사라지고, 10대의 청춘, 꿈, 희망을 공유하고 함께 기뻐하고 좌절했으며, 실패도 나눈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상실 혹은 손상됐다.'라는 느낌을 주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고 분석했다.

여담으로 김광석의 노래와 신해철의 노래는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곡으로 많이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부치지 않은 편지민물장어의 꿈이 있다. 부치지 않은 편지의 경우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 당시 추모곡으로 사용되었으며, 민물장어의 꿈그대에게와 함께 신해철이 추모 무대에서 울면서 열창한 곡이다. 물론, 부치지 않은 편지노무현 대통령 이전에도 추모곡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곡이긴 하다.


5.2. 걸그룹 사랑[편집]


아이돌 가수를 까지 말라는 주장을 많이 하곤 하고 본인도 S.E.S.의 열혈 팬이었다. 한때 소녀시대를 좋아했으나 카덕으로 개종(?)했다. 그것도 아예 방송상에서 인증해버렸다.개종선언 이후 구하라가 신해철에게 카라가 종착역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바람에 완전히 침몰했다. 사실 이 발언이 없었다면 티아라로 옮겨갔을 거라고. 팬들이 구하라의 사진 조공을 바치다가 저작권 관련 문제는 어떻게 하냐고 글을 올리자, 비장한 말투로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며 올리라고 대답해줬다(...) 그런데 레인보우로 갈아탔다! 역시 70C의 위엄 나중에는 또 나인뮤지스라고... 그리고 원더걸스로 갈아타셨다...[36]

하지만 아이돌 가수의 팬덤에까지 무한한 애정을 표하는 것은 아니어서 2008년 6월에 있었던 드림콘서트에서의 이른바 소녀시대 침묵 사건에 대해서 '그냥 저질 삼류관객 나부랭이 무리'라고 가차없이 까버렸다. 이에 발끈한 해당 팬클럽 쪽에서는 신해철의 사과를 요구하며 촛불시위를 벌이겠다고 했지만 결국 별일 일어나지 않았다.

신해철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이돌'이나 '립싱크'가 아닌 '라이브 환경'의 문제다.[37]

고스트 스테이션에서는 '방송사 음악(순위) 프로그램들은 자신들은 라이브 방송을 한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차라리 라이브보다 립싱크를 하는 게 낫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방송사 음악순위 프로그램들이 라이브를 고집한다고 하지만 막상 음향환경은 라이브 무대를 위한 세팅이 돼있지 않고, 그저 예산을 아끼기 위해 생방송만 하는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다. 행사 무대나 다름 없는 생방 무대에서 실수하면 전후 세팅 상황과 관계없이 무대에 선 가수가 모든 화살을 감내하게 되기 때문. 때문에 좋은 라이브 무대를 위해서는 가수들 개개인을 위한 세팅이 따로 되어 있어야 하지만 순위 프로그램들은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젊은 멤버들로 꾸린 넥스트 5기 시기부터 젊은 새 멤버들의 프로모션의 일환이자 아이돌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한 조롱의 의미로, 자신은 아이돌 가수라는 식의 어필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넥스트 5기의 첫 대형공연인 2003년 겨울 장충체육관 콘서트에서는 '넥스트는 이제 댄스가수'라며 도시인에 맞춰 립싱크로 댄스공연을 했던 적이 있다. 처음 넥스트 다섯 명이 한 안무 부분에서는 모두가 열광했으나 솔로 댄스에서는 서툰 실력으로 폭소를 터뜨렸다. 이후 5집이 나오고 나서는 지상파 무대에서 대놓고 화려한 손싱크를 펼치며 넥스트 팬들을 웃겨서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걸그룹이 사람이니까 연애를 할 수 있지만 팬들에게는 그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본인이 좋아하던 걸그룹이 연애를 할 때마다 신인 걸그룹으로 갈아탄다고.[38]

5.3. 연예인들을 보는 시각에 대한 입장[편집]


연예인은 외로워요. 군중 속의 고독입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하죠. 나이를 먹고 얻는 지혜도 있는데 이런 단계를 밟기 전 무차별 공격에 노출되면 대처 방안을 몰라요. 가장 쉬운 방법은 경멸, 다음은 이들을 밟고 올라가는 것이죠. 제 나이 때 인터넷이 없기 망정이지. 만 20살에 데뷔했는데 초등학생이 지나가다 '저 ×× 신해철이다'란 말에 상처 받아 정신병원을 찾은 적도 있어요. 인터넷 문화가 활성화됐으면 저 역시 자살했을 수도 있죠. 다행히 욕하는 사람만큼 지지자가 있어 이겨낼 수 있었어요.


우리는 문화적으로 개인을 지극히 왜소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개발 독재 시대에는 단결을 위해서 '튀지 마 인간형'을 요구받았다. 그런데 '연예인은 각자 캐릭터를 갖고 살아야 해'와 상충한다. 평소 예쁘다 하면서도 사건이 터지면 갑자기 '악플'이 도배되고 따귀를 때리는 식으로 급변해 연예인들은 대중들에게 혼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파리 목숨으로 끝나지 않을만한 시스템 구축을 위해 관계자들의 안목이 필요하다.


인간인 이상 악플에 즐거워하진 않는다.


대중예술인들은 대중의 친구여야 한다.

대중의 도 아니고 대중의 주인 행세를 해서도 안된다.

대등한 친구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 배울 필요가 있다.


'대중은 당연히 연예인들의 우위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시각에 거부감을 표하며 단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쉽게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때문에 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호기심으로 팬을 자처하며 사인이나 사진 혹은 연예인이 곤란해할 법한 행동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일례로, 한 대학의 특강에서 한 학생이 팬이라며 사인을 요청하자, '앨범을 사고 가수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줘야 진정한 팬이다. 음악을 계속 듣고 싶다면 앨범을 사라. 불법 복제한 음악을 들으면서 팬이라고 하는 것은 팬이라고 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불법 복제를 까기도 했다.

또 다른 예로, 데뷔한지 얼마 안 된 시절, 신해철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웬 여학생들이 수군수군대며 웃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빠서 그 학생들에게 다가가 '한 번만 더 웃으면 입 찢어버린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연예인을 특별히 깔보는 인식을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나, 당시엔 데뷔한지 얼마 안 돼 신해철 스스로 유명 연예인이라는 인식이 없던 시절이라 있을 수 있었던 상황이다. 때문에 적당한 예시가 아니다.

사실 위의 사례는 라디오 방송에서 연예인 공인론을 부정하며 했던 말이다. 심지어는 연예인이 공인으로 여겨지는 각종의 사례들을 열거하며, 대중매체가 사인인 연예인의 지극히 사적인 부분까지 파고 들어도 이것이 정당하다는 근거로 삼기 위해 연예인을 공인에 준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며 주장했었다. 이런 식으로 공인의 책임을 덧씌울 거라면 "차라리 연금이라도 주든가"라고 말을 했었다. 이는 자연스레 대중이 연예인에 대해 가지는 상반된 시각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대중은 연예인들을 '광대' 내지는 '딴따라' 정도로 인식하여 하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39], 유달리 도덕적인 면모나 정치적인 행보 등에서는 정치인보다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기 때문.

사실 진짜 문제는 연예인의 유명세를 이용하는 현실임에도, 지금도 대중들 중 일부에게선 "딴따라 주제에 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는 말이 나온다는 점이다.

실제로 신해철이 떠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2020년대에도 연예인들은 '우상'인 동시에 '딴따라', '광대' 같은 천민 취급을 받으며 감정 쓰레기통으로 다뤄져 해당 연예인의 인격을 만신창이로 다루거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당장에 2019년에 설리구하라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일부 네티즌들은 '딴따라 광대 따위가 죽은게 뭐가 불쌍하냐'며 고인드립을 하고 이에 동조하며 연예인 무시 및 고인비하 여론을 조성하려 하기도 했었다.

박용하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에는 연예인 인권이 최악까지 떨어진 시대라고 하기도 했으며, "3년 안에 10대 아이돌이 자살할 수도 있다."며 경고하기도 했다. 덧붙여 "우리가 이 시점에서 10대 연예인에게 적용 가능한 노동법을 입법화 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6. 신해철과 정치[편집]


사실 신해철은 2002년 16대 대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정치의 정자만 나와도 치를 떨 정도로 정치를 멀리했었는데, 2002년 16대 대선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입장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친노, 친문의 노선을 걸어왔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는 당시 노무현을 지지하며 선거 유세에 나가 연설을 하기도 했었고, 2012년 18대 대선에서는 건강 때문에 직접적으로 선거 유세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문재인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하기도 했었다.

과거 1987년 신해철이 서강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당시엔 운동권의 민주화 운동 열기가 한창 강렬했을 때였는데, 당시 신해철은 우익에 대한 반감 만큼이나 좌익에 대한 짜증(?)도 많았다고 한다.

소위 철학과라는 곳이 짱돌 던지는 데 빠지지 않는 부류가 다니는 과라는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첫 엠티 때부터 제헌의회'만이' 이 나라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선배를 보고는 그 짜증이 폭발해버렸다. 그래서 고교 때 정치나 제도를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지만 그 방법'만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더니 고교 때 세상에 무관심했다는 내 행동에 대한 비판을 또 졸라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신해철 이야기, 1987년 6월

물론 당시 국민들이 다들 그랬었듯, 신해철 또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원했기에 당시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이진 않더라도 가끔씩 참여해왔었는데, 민주화 운동에 참여할때에는 머리 숫자가 오방 많은 NL 진영을 쭉 지나쳐 몇몇이 모여 있는 CA 쪽에 갔다고 한다. 당시 신해철이 속해있던 철학과는 극렬 CA 분자인 몇몇 선배들의 주도로 CA 경향이 상당히 강했는데 이 때문인지 NL은 최루탄이 한 방 터지거나 특히 백골단이 투입되면 나 살려라하고 도망가는 성향이 좀 있지만(?) 숙련된 투사인 CA 계열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질서정연하게 퇴각(?)하여 '달려가는' 사람의 숫자가 오히려 적었기 때문에라고 설명하였다.

다른 운동권 학생들에 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오지 않았던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해철은 본인 스스로 '민주 투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한궤도로 데뷔 후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87학번이라 그냥 돌도 몇 번 던져봤고, 그러다 딴따라라고 따가운 눈초리도 받고..."라고 대답했었다가 몇 주 뒤 나온 기사의 헤드라인이 "나는 민주 투사였다."여서 황당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운동에 성공하고 다음 년도인 1988년에 대학가요제에 참여하였는데, 당시 무한궤도 멤버들이 전부 엘리트 대학 출신이었던 것과 앞서 말한 CA 계열이었던 철학과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무대에 오를 당시 높으신 분들(?)이 '데모를 주도할 수도 있다'며 요주의 인물들로 선정하고 지켜봤었다고 한다.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초라한 무대에 선 것도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고... 정작 당시 무한궤도 멤버들은 정치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기에 웃기는 얘기였다고 한다.

이후에는 앞서 설명한 것 처럼 정치를 멀리하며 살아왔는데, 2002년 16대 대선 이후로 다시 정치적인 입장을 나타내며 가장 정치적인 발언을 많이하는 연예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신해철 특유의 자존심과 중2병(?)으로 인해 쓸데 없는 논란을 만들며 정치적으로 조금 미숙한 모습을 꽤 보이기도 했었으나, 2009년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 이후 바뀌게 되어 정치적으로 더욱 성숙해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물론 이 사건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건과 합쳐 신해철이 이명박하면 치를 떨게 되는 기점이 되기도 했다.

신해철이 워낙 정치적으로도 다양하고 많은 어록을 남겼기에 신해철의 성향과는 상관 없이 각 진영에서 신해철의 말을 인용해 무기로 쓰기도 한다. 특히 펨코나 디씨등 반문 진영에서 문재인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신해철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가 가끔씩 있는데, 신해철은 생전 문재인지지했었다. 반문 진영 중에서도 이명박 지지자가 신해철의 말을 인용하여 무기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생전 신해철은 이명박을 전두환에 비유할 정도로 엄청나게 싫어했다. 게다가 이명박블랙리스트로 신해철의 밥줄을 끊으려 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한 이재명 지지자[40]나 진보 성향 네티즌들이 신해철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정작 신해철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이명박 뿐만이 아니라 정동영, 김근태, 이재명, 송영길, 추미애 같이 노무현의 등에 칼을 꽂았던 비노 성향의 사람들도 아주 강하게 비판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

6.1. 정치인들과의 관계[편집]


정치연예인에 가까운 모습을 자주 보였던 지라 정치인 인맥도 꽤나 있는 편이다. 노무현, 문재인 등 대통령은 물론 안철수와도 인연이 있었다. 인맥 뿐만이 아니라 이명박 같은 악연도 많은 편.

6.1.1. 노무현[편집]


파일:신해철과 노무현.jpg
파일:신해철과 노무현 2.jpg

노무현은 신해철이 다시 정치를 가까이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자 그에게 있어 정신적으로 크게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으로, 신해철은 노무현의 선거 유세에 참여하며 노무현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참여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신해철은 늘 노무현의 편에 서있었다. 다만 이라크 파병에 대해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었으나, 이는 이라크 파병을 반대했던 것이지, 그가 노무현을 싫어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N.EX.T의 5집 앨범인 개한민국이 이전과는 다른 컨셉을 가지게 된 것 또한 노무현과 연관이 있는데, 이 5집 앨범의 컨셉이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한 이유가 바로 2004년에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사건 때문이다. 개한민국 앨범 CD2에 실린 '아들아, 정치만은 하지마'의 가사 중 '하란 일은 절대 안 하고, 뭐가 잘못된지도 모르고, 지들끼리 둥글게 감싸고 도는 건 엄청 빠르고'와 같은 대목에서 신해철이 당시 노무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던 국회와 정치인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잘 나타난다.

다만 그렇다고 노무현에 대해 무작정 지지만을 했던 것은 아닌데, 가끔씩 비판도 하면서 지지도 계속 했다. 그러나 당시 신해철의 말투가 너무 과격해서[41] 사람들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이냐' 또는 '정계에 입문하려는 것이 아니냐?'라는 얘기까지 나왔었다. 물론 신해철 본인은 '아침에 잘 못 일어난다.'며 정계 입문 생각이 전혀 없음을 밝혔다.

2009년 노무현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추모 무대에 추모의 의미를 담은 삭발을 하고 올랐다. 당시 삭발과 함께 머리에 뱀(용) 문신을 하고 올랐는데 이게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뱀 문신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의 멸칭 중 하나가 쥐명박이었기에 뱀은 쥐를 잡아먹는다는 것에서 착안하여 이명박에 대한 분노를 담은 것으로 사람들이 추측했으나, 신해철이 말하길 정치적인 의도가 담긴 것은 아니고 '자녀를 가졌을때 태몽구렁이가 나와서'라는 지극히 가정적인 이유로 뱀(용)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라며 거기에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에 불쾌해했다.

정말 경멸했다. 사람로 비유하는 건 외모 비하고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다.

전두환·이순자를 대머리·주걱턱으로 말하는 건 대중 탄압에 대한 반감이 있기 때문이다.

루키즘(외모지상주의)은 기본적으로 옳지 못한 태도다. 그것까지도 좋은데, 왜 거기에 나를 끌어들이나.


또한 참여정부 말기 유행했던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에 대해서도 꽤 반감이 있었는지, 훗날 2014년 Reboot Myself Part 1으로 복귀하면서 발표한 'Catch Me If You Can (바퀴벌레)'에서 '이 모든게 다 바퀴 때문이야 / 모두 다 너 때문이야하는 가사를 통해 당시 뭐든지 노무현의 탓으로 돌리던 사람들과 노무현을 물어뜯었던 이명근혜를 비꼬았다. 그리고 이 노래는 KBS에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고 금지를 먹었다(...).

훗날 신해철이 새앨범으로 컴백했을때 진행 된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노무현에 대해 성공한 대통령이 될거라고는 기대한 적도 없어요, 카터처럼 현직에서는 욕을 먹어도 나이를 먹으면서 국민을 통합하는데 역할을 했으면 했어요라며 노무현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사실 대부분 정치계나 대중 시민들의 입장에서도 대통령의로서의 노무현은 비판해도 인간으로서의 그는 칭찬일색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가 퇴임 후 할 일이 더욱 많았기에 더욱 그의 죽음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또한 추모 무대서 노무현을 누가 죽였나, 내가 죽였다고 했던 것은 신념을 잃어버리고 빨리 결과가 나오길 바랬던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라며 단순히 노무현을 공격한 이명박보수 정치인 및 검찰, 언론 뿐만이 아니라 같은 정당이면서도[42] 노무현 꽂았던 사람들이나, 노무현 임기말에 등을 돌리고 공격을 했던 사람들까지 함께 비판하였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빠'하고는 정서가 다른 거 같아요. 전 그 분이 성공한 대통령이 될거라고는 기대한 적도 없어요. 카터처럼 현직에서는 욕을 먹어도 나이를 먹으면서 국민을 통합하는데 역할을 했으면 했어요. 퇴임 이후엔 버텨주기를 바랐는데 덜컥 세상을 떠났죠. 추모 공연에서 스테이지에 올라 울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무대에서 "노무현을 누가 죽였나. 내가 죽였다."고 했어요. 그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신념을 잃어버리고, 빨리 결과가 나오길 바랐던 사람들에게. 근데 아직까지도 그 말의 의미를 모르더라고요.

고(故) 신해철, '살고 싶어했던 마왕의' 마지막 인터뷰


신해철은 대표적인 비정치인 친노 인사였고 그 어떤 연예인 보다 적극적으로 이명박을 비판했기에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1순위로 선정되었으며 이는 곧 N.EX.T의 6집 Part 2와 Part 3의 발매 취소와 팀이 한번 더 해체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신해철 사망 이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가 매년 추모식에 근조화환을 보냈으며, 이에 보답하는 의미로 신해철의 유가족 측은 노무현 대통령 12주기에 근조화환을 보냈다.

6.1.2. 문재인[편집]


파일:신해철과 문재인.jpg
파일:신해철과 문재인 2.jpg

문재인신해철이 직접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참여정부 시기인 것으로 추측되나, 본격적으로 인연을 쌓게 된 것은 노무현의 사망 이후로 보인다. 노무현의 사망 이후 문재인은 다시 정치계에 몸을 담그게 되었고 2012년 18대 대선에 참가했는데, 이때 신해철은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곡인 그대에게를 선거곡으로 제공하고 자신의 SNS에 문재인 당선 시 제안을 올리며 문재인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

파일:신해철 2012년 대선.jpg

근소한 차이로 문재인이 낙선한 뒤에도 계속해서 문재인을 지지하는 의사를 밝혔으며, 2013년 있었던 노무현 추모 공연에서도 그대에게를 부르는 중 문재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거나 만세를 하는 등(상단의 사진) 친밀한 관계를 보여왔다.

파일:문재인의 신해철 추모.jpg

2014년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문재인은 개인 SNS를 통해 추모의 뜻을 밝혔으며 신해철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 문재인은 대통령 당선 전까지 매년 신해철의 기일마다 신해철을 그리며 추모하였으며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매년 추모식에 근조화환을 보냈다.

신해철이 사망한 후 그대에게가 유가족들의 뜻으로 안철수에게 제공된 것에 있어서 문빠들과 안빠들의 다툼이 있으나, 이에 대한 결론은 18대 대선 이전 신해철의 트윗으로 보아, 2012년 당시 문재인이 승리하면 그 후 안철수에게 제공할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43] 해당 트윗에서 '다음 선거를 위해 안지지자들에게 기증하려고 했다'는 것은 18대 대선에서 안철수와 단일화에 성공한 문재인의 당선을 가정한 말이기 때문에 문재인과 안철수가 갈라지지 않았을 경우 19대 대선에서도 선거에 참여할 문재인에게 제공하고 그 후 20대 대선 즈음 안철수에게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6 06:11:02에 나무위키 신해철/특이 사항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실제 국내 SF 팬덤에선 '나오면 무조건 사라'는 말이 진리로 통한다. 보통 초판 이후에 바로 품절(혹은 절판)되고, 그러면 언제 다시 구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SF 덕후들이 전국의 중고 책방을 뒤지고 다닌다.[2] 단, 실제 음악감독은 따로 있었다. 신해철이 애니메이션 라젠카의 음악을 맡은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원본소스만 제공한 수준인 것. 그런데도 망했다. 직접 음악감독을 안 해도 OST에 손대면 망해버리는 신해철의 저주[3] Zerg are Coming. 앨범 자체는 구할 수 없으나 유튜브에 곡이 올라와 있다. 신해철 왈: 본인이 기타를 쳐서 사운드는 형편없지만 가사는 좋다고.[4] 이와 관련해 해프닝도 몇 건 있었다. 스타크래프트가 막 나왔을 때 신해철은 영국 유학차 있었는데 TV에서 해처리를 언급하는 바람에 본인은 '하체리'로 생각했으나 한국에서 스타크래프트 중계때 해처리 부서진다고 말하는 바람에 신해철이 아연실색 한 적 있고, 신해철이 PC방에 갔을 때 누가 해처리를 계속 말하는 바람에 "뭐 임마?"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참고로 그 누군가는 비트겐슈타인 멤버였다. 여담 문서 참조.[5] 아예 틀리게 말한 건 아닌데, 단어 순서를 거꾸로 말하거나 비슷한 단어와 미묘하게 헷갈리게 말하거나(...).[6] 서울역[7] N.EX.T 5집 수록곡 '예수 일병 구하기' 에서는 코러스지만 A#0(-2옥타브 라 샵) 까지 내렸다![8]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 껍질의 파괴[9] 하지만 신해철이 1991년도 별밤 잼콘서트에서 퍼스트 기타(리드 기타)를 맡았다는 것을 보면 기타 연주 실력이 평균 이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냥 김세황의 실력이 너무 넘사벽이라 김세황의 시선에서 그렇게 느껴진다고 봐야할 듯.[10]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은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것이다.[11] 당장 위에서도 소개되었듯 까마득한 선배 신해철의 컴퓨터를 뒤진 후 "하세가와 이즈미 좋아하세요?"라고 말했을 정도다.[12] av배우 하세가와 이즈미, 아키라 와타세를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뭐 고스트스테이션 같은 곳에서도 공공연히 언급이 나왔기에...[13] S1은 예선 1등으로 올라온 팀 답지 않게 16강전의 공연에서 한계점을 보였으며 판정단의 결과도 어느정도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신해철은 아마추어 밴드 경연이라는 프로그램의 모토와 평가위원단의 프로의 잣대를 내미는 평가 기준 속에 있는 이중적 잣대에 반감을 가진 듯 하다.[14] 이후 실제로 S1과 친하게 지낸것으로 보인다. S1은 2011년 N.EX.T 크리스마스 공연 오프닝 밴드로 초청됐다.[15] SBS 좋은아침 4475회 中 [16] 그래서 하현우는 이후 복면가왕에서나 마리텔에서나, 라디오 방송에서나 가끔씩 신해철 관련 에피소드를 꺼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복면가왕에서의 신해철 곡들의 선곡은 "감사의 의미"를 담아서 했다고 언급한 부분에서 확인사살.[17] 서태지의 본명은 정현철이다.[18] 서로의 Part 2 앨범이 나왔어야 하는 2009년의 경우 신해철의 노무현 대통령 자살 사태 이후의 칩거로 인해 활동 기간을 맞추지 못한 듯하다.[19] 달려간 병원 중에는 2~3차기관도 있었지만 줄이 너무 길어 서울스카이병원(현 서울삼성병원)에 가게 되고 얼마 안 가 심정지로 의식을 잃는다. 아산병원에서의 긴급 수술 후 아주 잠깐 의식이 있었다가, 바로 의식이 없어진 후 몸 상태가 호전되던 중 결국...[20] 그의 이름은 정석원이었다. 훗날 그의 별명은 요미가 된다...[21] 인터넷으로 원문이 아닌 편집글이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 이 구절이 원문.[22] 그런데 이것은 대영AV 측에서 "015B라고 하면 아무도 모르니까 신해철이 노래라도 하나 넣어라" 해서 반강제로 수록했다는 말도 있다. 진실은 본인들만이 알겠지만, 당사자인 신해철이 사망한 상황이라 진실은 미궁 속으로...[23] 2절에서 '시간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주겠지 우리 그때까지 아쉽지만 기다려봐요' 부분. 1절에서 같은 부분은 무한궤도의 드러머이기도 했던 015B의 드러머 조현찬이 불렀다.[24] 그러니까 넥스트 첫 앨범이 발매되기 직전 시점까지는.[25] 무(無)=0 한=1 궤도(Orbit)=5B. 다만 정석원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 설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2집 앨범의 자켓이 그 증거. 015B를 '空一烏飛(공중에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난다)'라고 적어놨다....고 하면서 또 나중에는 인정했다.[26] 신해철은 연예계에서 가장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 강한 사람 중 한명이다.[27] 워커힐 스위트룸[28] 윤상은 의견자체가 아니라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것이 제약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고 한다[해당가사] 이라크 포로를 고문해 댄 씨발 양년놈들과 고문 하라고 시킨 개 씨발 양년놈들의 딸래미 애미 며느리 애비 코쟁이 모두 죽여 아주 천천히 죽여 고통스럽게 죽여[29] 싸이야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가수준비를 한 경력도 있고, 신해철 역시 1998년과 1999년에 영국과 미국에서 모노크롬 및 음악작업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30] 내 여자라니까와 삭제가 수록되어 있는 앨범이다.[31] 훗날 이승기가 신해철의 추모 다큐에 나와서 말하길 신해철의 평소 쎈 이미지 때문에 녹음실에 가서 쫄아있었는데 신해철은 매우 다정하게 음악에 대한 여러 얘기를 꺼내며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32] 당시 문희준은 자신이 하는 록 음악에 대한 세간의 혹평과 악플 때문에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33] 신해철은 문희준뿐만 아니라 홍대의 유명 인디밴드를 넘어 방성활동 하나 나오기 벅찬 무명의 인디밴드들에게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지원을 해주면서, 챙겨주고, 격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에서는 방송 초창기부터 무명의 인디밴드의 곡을 선곡해서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패기로움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그 당시에 지상파에서는 잘 틀어주지도 않는 노브레인, 크라잉넛, CRASH등의 곡들이 유일하게 라디오에서 틀어진 데가 바로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이었다.(다만 이건, 고스가 늦은 시간대기도 했고 이 세 밴드는 각각 국내 펑크와 메탈에서 정점에 있던 밴드들이라 심의만 통과하면 방송 라이브도 간간히 하던 밴드들이다.) 또한 신해철은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인디 씬의 희노애락에 간접적으로나마 동참을 하는 등 환경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음악의 길을 가는 인디밴드들을 엄청나게 매우 챙겨주기로 유명한 인사였기 때문에 노브레인의 이성우와 크래쉬의 안흥찬과 정용욱은 신해철이 사망하자 신해철을 추모하며, 애도했을 정도였다.[34] 생전 국카스텐이 2집 앨범 발매를 앞둔 시점에서 신해철이 남긴 앨범 발매를 독촉하며 한 말.[35] 다만 신해철은 68년생이고 87년 20살 당시 대학교에서 민주화운동 막차도 탔었던 사람으로 엄밀히 말하면 n86세대이긴 하다. 물론 편의상 각각 n86세대X세대로 대표하여 칭했을 뿐, 실제로는 딱딱 나뉘는 것도 아니고 그 이전 세대나 그 이후의 세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36] 여담으로 걸그룹을 떠나 여자 연예인에 대한 애정도 시시각각 바뀌는 편이었다. 한땐 송선미에서 시간을 거쳐 홍수아로 변한 적이 있었을 정도. 하지만 그 기질 어디 안 간다고 요즘은 홍수아라고 말한 걸로 보아 언제라도 갈아탈 여지는 남겨뒀었다.[37] 지금에 와선 모두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만 신해철은 정말로 '아이돌'이었다. 무한궤도 시절과 솔로 시절, 넥스트 시절을 통틀어 1990년대의 신해철은, 한번도 자칭 정통파를 주창하는 락팬들에게 '진짜 밴드'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메이저 활동도 문제였지만 하는 음악 자체가 흔히들 생각하는 하드록이나 헤비메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데뷔 초 뜨는 데에 학력을 이용했다는 '오해'도 큰 몫을 했다. 요즘이야 서울대 나온 인디뮤지션이 더 뜬다[38] 그런데 이렇게 말해 두는 것이 해당 걸그룹의 신상에 이롭기는 하다. 일반인이 연예인에 대한 팬심을 드러내는 것과는 달리, 엉뚱한 열애설이 터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전혀 엮일 일이 없는 연예인임에도 불구하고 인스타그램 맞팔이고 같은 관심사를 공유한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는 사례도 있었다.게다가 연예인들이 팬으로 만나 연인으로 발전한 사례 또한 없진 않았다.[39] 실례로, 친숙함의 표현이라지만 지나가는 연예인의 연령을 불문하고 반말부터 꺼내는 건 분명한 실례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분명 없을 텐데 존댓말이 나오지 않는건, 일반 대중들이 평소 연예인에 대한 잠재적인 인식 탓이 크다.[40] 신해철의 생전 작업실이 성남시에 있었는데, 신해철 사망 이후 당시 성남시장이었던 이재명이 신해철거리를 만들었다. 정작 신해철은 이재명과 접점이 아예 없었다. 사실 신해철 생전에는 이재명이 유력 정치인도 아니기도 했고, 작업실의 위치가 어디건 시장이 누구건 거리 만드는 건 단체장이 이권을 노리고라도 만들었을 것이다.[41] 2000년대 중반의 신해철은 독설의 수위가 굉장히 강했는데, 신해철의 안티가 가장 많았던 것도 이 시점이다. 노무현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독기가 많이 줄어들었는데, 사실 이 때를 기점으로 신해철이라는 사람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정치적으로 훨씬 성숙해졌으며 예전 보다 말이 많이 부드러워졌다.[42] 열린우리당은 노무현의 지지율이 최저치를 찍었을 당시 노무현을 당에서 내쫓았다. 겉으로는 대통령이 탈당한 것이었지만 직접적으로 "나는 쫓겨났다."라고 하는 등 실제로는 출당 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후 열린우리당은 정동영, 손학규등이 중심이 되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당을 개편하여 17대 대선에 도전한다. 결과는 폭망.[43] 당시 트윗 작성일은 12월 3일이며, 10일전 11월 23일에 안철수가 문재인 지지 의사를 밝히며 사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