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오 피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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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오 피올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칼리아리 칼초 역대 감독

카를로스 알베르토 쿠아리오
(1954)

실비오 피올라
(1954~1956)


카를로 리고티
(1956~1957)
카를로 리고티
(1956~1957)

실비오 피올라
(1957)


마리오리노 콘지우
(1957~1958)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주세페 메아차
(1937~1939)

실비오 피올라
(1940~1947)


발렌티노 마촐라
(1947~1949)


실비오 피올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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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세리에 A 로고.svg

1936-37 · 1942-43
파일:실버슈.png

1938 FIFA 월드컵 실버슈
[1]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파일:silvio piola.jpg

두 개의 구장, 하나의 이름
이름
실비오 조아키노 이탈로 피올라
Silvio Gioacchino Italo Piola
출생
1913년 9월 29일
이탈리아 왕국 로비오
사망
1996년 10월 4일 (향년 83세)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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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80cm | 체중 75kg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은퇴
소속
선수
FC 프로 베르첼리 1892 (1929~1934)
SS 라치오 (1934~1943)
토리노 FC (1943~1944)
유벤투스 FC (1945~1947)
노바라 FC (1947~1954)
감독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위원회 (1953~1954)
칼리아리 칼초 (1954~1956)
칼리아리 칼초 (1957)
국가대표
34경기 30골[1] (이탈리아 /1935~1952)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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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
가족관계
외삼촌 주세페 카반나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3. 감독
2.4.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관련 어록
5. 뒷이야기
6. 사생활
7. 수상
7.1. 클럽
7.2. 국가대표
7.3. 개인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이자 세리에 A 역대 최다(274골) 득점자.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피올라는 로비오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직물 사업상 이유로 인해 1914년에 베르첼리로 이사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조아키노 이탈로(Gioacchino Italo)로 등록되었지만 군복무때 이름에 실비오가 추가되었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하던 피올라는 카보우르 기술 연구소에서 축구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고 이때 테오발도 데페트리니(Teobaldo Depetrini), 피에트로 페라리스와 함께 뛰기도 했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FC 프로 베르첼리 1892[편집]


이런 피올라의 축구 재능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베르첼리 지역에서 살던 한 신부였다고 전해진다. 외삼촌 주세페 카반나의 지도로 실력을 키워가던 피올라는 신부의 소개로 FC 프로 베르첼리 1892[2]에 입단하였고 당시 프로 베르첼리의 감독 너지 요제프에 의해 1930년 2월 16일, 볼로냐 FC 1909를 상대로 16세의 어린 나이에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 소년은 프로 베르첼리가 가져본 적이 없는 스트라이커가 될 거야.

세콘도 레시아(당시 프로 베르첼리 구단 회장)


첫 해에는 드문드문 경기에 출전하였지만 다음 해부터는 주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1930년 11월 2일, SS 라치오를 상대로 공식전 첫 득점을 올리며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자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피올라는 17세의 나이에 13골을 넣음으로써 성공적으로 세리에 A 무대에 적응을 마쳤고 1931년 2월 8일, SSC 나폴리전에서 첫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3]

하지만 1933~34 시즌이 시작되기 전, 베르첼리 구단과 피올라의 사이가 벌어졌다. 베르첼리 구단의 보드진은 세리에가 출범한 지 5시즌이 지난 당시에도 시대착오적인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고 있었다. 10년전이던 1924년에도 이미 로세타 이적 사건으로 간판 수비수 비르지니오 로세타유벤투스 FC에 뺏겼음에도 그들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재정적 문제로 다른 선수들을 팔아넘겨버려 팀의 전력이 대놓고 약해졌음에도 클럽이 피올라만큼은 절대 팔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피올라도 베르첼리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졌다. 피올라가 훈련 세션도 거부했고 1933~34 시즌 개막전에서 베르첼리가 제노아 CFC에 0대3으로 대패하자 베르첼리는 한발 물러나 1933~34 시즌이 끝나고 피올라의 이적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했다.

10월 29일에 있었던 ACF 피오렌티나전에서는 피올라 혼자 6골을 넣어 세리에 A 1경기 최다골 기록[4]을 경신함과 동시에 베르첼리의 7대2 대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1934년 4월 29일, 볼로냐를 상대로 피올라는 그의 베르첼리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2.2.2. SS 라치오[편집]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비토리오 포초도 피올라를 주목했지만 스키아비오, 펠리체 보렐 등에 밀려서 1934년 월드컵 대표팀에는 선발되지 못했다. 이 일은 피올라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다른 구단들은 피올라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고 특히 암브로지아나 인테르가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피올라 이적 사가의 종착지는 그에게 세리에 A 데뷔골을 내줬던 로마SS 라치오였다. 원래 피올라는 라치오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새 팀으로 라치오를 선택했는데 정작 라치오는 피올라의 포지션을 하프백으로 옮겨 기용해 많은 전문가와 축구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피올라는 바이시클 킥 등을 사용한 멋진 플레이와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단숨에 라치오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입단 첫 시즌에 21골을 넣어 리그 득점 기록 2위를 차지하였고,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그의 대표팀 데뷔 무대는 중유럽 컵 대 오스트리아전이었고 그 경기에서 피올라는 2골을 넣어 2:0 승리를 이끌어냈다.

결국 1936-37 시즌에 피올라는 처음으로 세리에 A 득점왕 자리를 차지하였고 월드컵에 출전하기 3달 전에 가진 벨기에와의 친선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6:1 대승을 이끌어내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쳐 1934년 월드컵 이후 스키아비오가 은퇴한 대표팀의 스트라이커 자리의 주인을 더 확실히 정해놓았다. 대표팀의 주전 멤버 중 하나였던 지노 콜라우시도 소속팀에서는 스트라이커였지만 피올라에 밀려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지션을 맡게 되었을 정도였다.


2.2.3. 1938년 월드컵[편집]


피올라는 노르웨이를 상대로 한 월드컵 첫경기에서 연장전에 결승골을 넣어 2:1로 짜릿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노르웨이의 요한센 골키퍼가 파시나티의 슈팅을 막아냈지만 피올라의 2차 슈팅까지는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뒤이어 열린 개최국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는 2골을 넣으며 3:1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프랑스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뒤에 있었지만 이탈리아는 디펜딩 챔피언답게 프랑스보다 한 수 위의 경기력을 선보였고 비아바티의 어시스트를 2번 다 깔끔한 골로 연결해냈다.

다음 4강전의 상대는 남미 축구의 자존심 브라질. 많은 축구팬들이 브라질의 레오니다스와 피올라의 창 대 창의 대결을 기대했지만 브라질의 감독 아데마르 피멘타는 부상 회복과 체력 안배를 위해 레오니다스를 명단에서 제외했다. 이 경기에서 피올라는 브라질 수비수 도밍구스 다기아를 상대로 페널티 킥을 얻어내었고 주세페 메아차가 바지 고무줄이 끊어지는 악조건 속에서 왼쪽으로 깔끔하게 차넣어 승리를 거두었다.

결승전의 상대는 헝가리. 4강에서 레오니다스와의 맞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전 3경기에서 9골을 합작해 낸 샤로시 죄르지젠겔레르 줄러 콤비와의 맞불 양상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피올라는 여기에서도 추가골과 쐐기골, 2골을 넣어 대회에서 총 5골을 넣어 대회 득점 랭킹 2위에 올랐다.


2.2.4. 월드컵 이후. 세리에 A 우승을 위한 노력[편집]


월드컵 이후에도 SS 라치오에서 그는 계속 활약을 이어갔다. 득점왕 자리는 다시 차지하였지만 결국 그토록 바라던 세리에 A 우승에는 실패하였고 라치오에서 149골을 넣어 당시 역대 최다골 기록[5] 을 남긴 채 전년도 우승팀 토리노 FC로 옮겨 발렌티노 마촐라와 호흡을 맞추면서 우승을 노렸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세리에 A가 1943년부터 중단되었고 토리노에서는 2년간 리그에서 제대로 활약도 못한 채 계약이 끝나버렸다.[6]

피올라는 잠시 사망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1945년 1월, 밀라노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나왔는데 이 뉴스는 4개월이 지나서 공식적으로 부인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전역에 퍼졌다. 전쟁이 끝난 후 유벤투스 FC로 옮겼다. 전쟁이 끝나고 유벤투스에서 다시 신예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등과 우승을 노렸지만 바로 전 소속팀이자 지역 라이벌인 토리노에 밀려서 2년 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유벤투스에서 나온 그는 당시 세리에 B 팀에 있던 노바라 FC로 옮겨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세리에 B에 있던 노바라 칼초로 이적하자마자 16골을 넣으면서 세리에 A 무대로 옮겨놓고 7년간 2경기 1골에 가까운 득점력을 보여주며 노장의 투혼을 보여주었다. 1950년 11월 19일, 37세의 나이로 친정 SS 라치오를 상대로 한 해트 트릭은 당시 세리에 A 최고령 해트 트릭 기록[7]이었고 41살까지 활약했던 그의 세리에 A 최고령 출장과 득점 기록도 세웠다. 오래도록 묵은 그의 출장 기록은 30년 후 디노 조프에 의해, 득점 기록은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에 의해 깨졌다.[8]

그 나이에도 피올라는 여전히 강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상대를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 경기를 잘 기억한다. 피올라는 두 명의 수비수를 상대했지만 그는 여전히 유명한 바이시클 킥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닐스 리드홀름



2.3. 감독[편집]


피올라의 주요 감독 커리어는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위원회칼리아리 칼초가 있다. 하지만 대표팀 기술위원회에서는 코치들간의 불화로 피올라가 금방 기술위원직을 그만두었고 칼리아리에서도 유의미한 성적은 남기지 못했다.


2.4. 이후[편집]


치매로 인해 말년에 고생하다 1996년,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망 다음날 이탈리아 대표팀몰도바와의 경기에서 추모 행사를 가졌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스피드와 파워, 판단력, 용기, 공중볼 경합 능력, 슈팅 테크닉 등을 고루 갖춘 전천후 스트라이커. 그의 세리에 A 통산 득점 기록인 274골은 아직도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 기록[9]이며 세리에 A 출범 전 디비지오네 나치오날레의 기록을 합산해도 290골로 1위의 기록이다.

피올라의 능력은 단순히 골 관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축구 지능과 볼 컨트롤, 패스 능력도 좋아 동료를 활용한 어시스트에도 능했고 인사이드나 아웃사이드 포워드, 하프백 포지션도 소화 가능한 선수였다.

그의 활약을 기념하여 그가 데뷔한 클럽 프로 베르첼리와 은퇴한 클럽 노바라는 각자 자신들의 구장 이름을 실비오 피올라로 부르며 그를 기리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기록한 30골은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게다가 1위 루이지 리바는 42경기(경기당 0.83골), 2위 주세페 메아차는 53경기(경기당 0.62골)로 34경기를 뛴 피올라(0.88)보다 경기당 골 수에서 뒤진다. 전쟁 때문에 커리어에 손해를 꽤 본 선수이다.


4. 관련 어록[편집]


피올라는 2미터는 될 넓은 보폭으로 땅을 집어삼키는듯 했고 타워에 도달할 것만 같은 긴 다리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진 기술적 완성도는 그가 전술적 전개에 참여하도록 도움을 줬고 그의 골결정력은 어떻게든 그가 골을 넣을 수 있도록 해줬다: 그의 중거리 슛은 위협적이었고 바이시클 킥은 환상적이었다.

축구 선수로서 성숙해지면서 민첩성은 다소 떨어졌지만 체격이 커지면서 대신 힘을 얻었다. 그 시점에서 슈팅의 품질이 더욱 좋아지면서 세련된 슈팅을 쏠 수 있었고 측면도 이용하면서 챔피언의 초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카를로 키에사


골 머신. 아마도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그런 유형과 기량을 갖춘 유일한 선수일 것이다. 주세페 메아차는 개인 행동을 선호하고 파올로 로시는 크로스를 최대한 활용했지만 피올라는 근접, 장거리, 오른쪽, 왼쪽, 헤딩, 곡예 등 모든 방식으로 득점했다.

존 풋


피올라는 적절한 순간에 최적의 위치를 찾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는 수동적이거나 중립적인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수비수들에게서 분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모든 경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특별해진다. 그는 그들에게 즉시 수비수들에게 개입하고 신속하게 수비에서 벗어날 줄 알며 항상 그들의 실수를 악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피올라가 지면이든 높은 곳이든 상관없이 상대방과 같은 거리에 있을 때 열에 아홉은 그가 먼저 도착할 것이다. 만약 몸집이 작은 운동선수라면 가능할 수 있겠지만 피올라는 그만한 체격의 운동선수에게는 놀라운 수준의 움직임, 순발력과 몸, 머리, 다리의 스냅을 가지고 있다. 나는 과거에 피올라와 유사한 사례를 안다. 올랭피크 릴루아에서 뛰었지만 1차 대전에서 사망한 벨기에 선수 피에르 식스[10]

이다.

오른발, 왼발, 머리... 그는 모든 것에 능하다. 그는 슈팅 각도나 불안정한 자세에 무관심한듯하다.

가브리엘 아노트(Gabriel Hanot. 프랑스의 언론인)


피올라는 노르달의 파워, 찰스의 헤딩, 리바의 슈팅, 보니페르티의 교활함, 가베토의 곡예를 갖춘, 훌륭한 스트라이커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갖춘 선수였다.

브루노 페루차


나는 공을 잘 다루고 적절한 패스를 했고, 두렵지 않았다. 선수로 활동하면서 쇄골 골절과 무릎 타격이라는 두 가지 사고만 겪었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

실비오 피올라



5. 뒷이야기[편집]


  • 피올라는 현역 시절에 기량과 성격에서 주세페 메아차와 많이 비교되었는데 성격에서는 피올라가 훨씬 더 내향적이었고 효율을 더 중시했다.[11] 역사가 존 풋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조용한 생활 방식이 그가 동시대의 다른 선수들보다 더 오래 뛰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평했다. 이렇게 성향이 안 맞아서 피올라와 메아차가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오히려 둘은 사이가 좋았다는 증언도 있다.
  • 1939년에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피올라는 손으로 골을 넣었는데 나중에 본인이 그 사실을 인정했다.


6. 사생활[편집]


그의 형 세라피노도 축구 선수를 꿈꿨지만 시력 문제로 축구를 관두고 회계사가 되었다. 피올라는 1948년 알다 기아노(Alda Ghiano)와 결혼, FC 프로 베르첼리 1892에서 수비수로 뛰었던 아들 다리오와 변호사, 정치가, 심리학자였던 딸 파올라를 두었다. 그의 증손주도 브라질 국적으로 세미 프로 선수로 뛰었다.


7. 수상[편집]



7.1. 클럽[편집]




7.2. 국가대표[편집]




7.3. 개인[편집]


  • FIFA 월드컵 실버슈: 1938[12]
  • 세리에 A 득점왕 2회: 1936-37, 1942-43(SS 라치오)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1

[1] 대표팀 역대 득점 3위.[2] 이탈리아의 레전드 수비수 비르지니오 로세타도 이 팀에서 데뷔하였다. 하지만 피올라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같이 뛴 적은 없다.[3] 당시 나폴리의 골키퍼가 바로 피올라의 외삼촌 주세페 카반나였다.[4] 세리에 A 1경기 6골의 기록은 28년 후에 유벤투스 FC오마르 시보리데르비 디탈리아에서 한번 더 재현했다.[5] 현재 라치오의 최다골 기록 보유자는 치로 임모빌레이다.[6] 더 억울한 건 토리노에서 뛰었던 한 시즌 동안 23경기에 출전하여 27골을 넣었다. 하지만 이것은 공식 세리에 A 기록이 아닌 반쪽짜리 기록 취급당하고 있다. 하지만 유벤투스로 팀을 옮긴 게 피올라의 목숨을 살린 선택이 되었는데 발렌티노 마촐라를 포함한 토리노의 선수, 감독 등 관계자 거의 전원이 1949년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피올라 개인을 놓고 본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7] 현재 기록 보유자는 로드리고 팔라시오이다.[8] 코스타쿠르타의 최고령 득점 기록은 2023년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다시 한번 경신했다.[9] 여담으로 피올라가 라치오에서 전성기를 보낸 선수이기 때문에 지역 라이벌 AS 로마의 팬들은 라이벌리를 불태워 자신들의 영웅 프란체스코 토티가 피올라의 득점 기록을 깨고 은퇴하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토티는 250골, 통산 득점 2위의 기록을 남기고 은퇴하였다.[10] Pierre Six. 프랑스 르아브르 출신으로 1908년 올림픽에 참가했다. 즉, 벨기에 선수는 아니고 프랑스 선수이다.[11] 반면 메아차는 골초인데다 술(특히 샴페인)을 즐겼다.[12] 이전 문서와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이때 실버볼을 피올라가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피파 공홈에는 이 당시 수상자 명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1982년 이후 수상자만 피파 공홈에서 인정받을 뿐이고 후대 평가 중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건 신인상 뿐이다.자세한 내용은 월드컵/수상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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