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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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성리학과의 차이
3. 학문으로서의 '실학'의 실존 논란
4. 실학자 목록
5. 학파 목록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넓게는 유교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과 대립되고 실제의 참된 학문이라는 뜻을 지닌다. 즉 실학이란 용어 자체는 유교 내에서 쓰이는 보편적인 단어였다.

좁게는 조선 후기에 성리학보완[1]하여 경세치용[2]과 이용후생[3], 실사구시[4]의 태도를 강조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천관우가 실학의 개념을 정립하면서 실학자들의 연구에 실사구시의 실학적인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후자(협의)의 뜻으로 주로 쓰인다.

조선의 실학은 그 기원을 17세기 이수광과 한백겸에서 찾는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접했던 이수광지봉유설에서 실학정신의 기원[5]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모습을 보였으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평양에 있었다는 기자의 정전 유적을 나름대로 고증하면서[6] 토지개혁론의 시작을 열었다.

그렇게 싹이 보인 조선의 실학이 본격화된 것은 이후의 고증학과 서양학문에 대한 관심,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외부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18세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서유구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서울에 주로 거주하던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특히 관심을 보인 학문은 북학론이다. 이 북학론이 청나라를 배우자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청나라에 남아 있는 중화 문명을 배우자는 사조로서, 북벌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이 조선 후기의 실학에 대한 관심은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학자들이 청나라에서 실학 관련 책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책이 같이 들어왔다. 최초로 천주교의 존재를 소개한 것이 이수광지봉유설이었을 정도이며, 이후 이익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실학자들은 이것을 처음에는 서학, 또는 천주학이라 부르면서 학문으로 연구하다가 이게 서양의 종교라는 것을 깨닫고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실학의 전개는 크게 3기로 나누는데, 1기인 18세기 전반은 실학의 발생기로 중농학파가, 2기인 후반은 실학의 정립기로 중상학파가, 3기인 19세기 초반은 실학의 전성기로 국학파가 대두[7]했다. 다만 실학의 분류 자체가 꽤 주관적인 것임을 명심하자.[8]

이후 실학은 개화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2. 성리학과의 차이[편집]


실학이 성리학의 관념적인 측면을 비판한 학문으로서 시대를 개혁하려는 측면이 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정리하자면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 벌열양반 중심, 관념철학, 사장 중시, 사변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실학은 민중도 연구 대상이고 기존 유학의 사변적 측면에 경험적, 실험적 방법론을 더하고 성리학 이전의 선진 시대 유학과 제자백가 유학도 포섭했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그동안 임진왜란 이후 적으로 얕봐왔던 일본에 대한 재인식이 있다는 것이다.[9] 성리학 사상을 가진 양반들은 성리학을 통해서 중국을 중시하면서도 일본을 왜놈이라고 얕잡아 보며 그들의 행태를 탐탁지 않게 봐왔던 것과는 달리 실학에서는 일본의 변화를 주시하여 왔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처음에 압도하였던 점에서도 볼 때 고전을 면치 못한 원인인 일본의 발전에 주시를 하고 있던 것이다.


3. 학문으로서의 '실학'의 실존 논란[편집]


그러나 위의 관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근대적 관점에서 결과론적으로 실학을 평가했다는 비판이 있다. 정체성론에 반박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억지로 내재적 발전론적 사고로 접근했다는 주장. 실제적으로 실학이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 억지로 성리학에서 실학을 분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기되며 비판이 제기되었고 최근 유행하는 근대성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학설이 퍼지며 더 공격받게 되었다. 학계[10] 일각에서는 '사실 성리학과 별 차이가 없다'라고 아예 실학이라는 카테고리를 부정하는 입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중 한 예가 도올 김용옥이다. 이 부분은 김용옥 문서 참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실학의 이미지는 권력에서 쫓겨난 남인 계열 인사들이 주자학(성리학)의 한계를 발견해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주자학 대신 말 그대로 ‘실용적인’ 담론을 펼쳤지만 자신들의 권력 지키기에 급급한 노론(경우에 따라선 벽파라고 구체적으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그쪽은 노론 음모론 계열이다) 세력들이 이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대한 다양한 문헌 기록들을 찾아내어 연구하는 자료가 쌓이다 보니, 그동안 거의 완벽하게 호평만 받아오던 실학자들의 주장들이 실제로는 조선시대의 현실과 뒤떨어진 지극히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는 비판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 중에서도 일부 주장은 방구석에서 논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기까지 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반계수록의 저자인 유형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수레를 쓸 줄 모른다."라고 적어 마치 조선에서는 수레를 전혀 안 쓰는 것처럼 서술했으나 실제로는 유형원이 살았던 시대의 조선에서는 수레를 잘만 사용했으며, 박제가도 북학의에서 조선의 배가 물이 차올라 곡식을 싣지 못하는 형편없는 것이라며 혹평했으나 18세기 조선의 경강상인들은 무려 2천 석 이상의 곡식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대형선박을 잘만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감을 주기 위해 비교 대상을 꼽자면 구한말 인구감소와 혼란으로 붕괴된 물류시스템에 큰 도움을 준다며 치하했던 200톤급 서양 기선이 2400석, 풍범선은 1000석, 조운선으로도 사용했었던 판옥선이 300석이었다. 당시 조선은 육운을 통한 유통보단 수운을 통한 유통을 많이 했다. 특히 조선은 육운이 많이 불리한 점이 있었긴 했다. 대표적으로 험한 산지와 화강암 지형 때문이다. 이 문제는 터널을 뚫어야 해결이 가능한데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기술력이 없다 보니 아무리 못해도 근대에나 가능해진다. #1, #2 거기에 흔히 조선까 성향의 서적에서 자주 보이는 레퍼토리인 "조선은 바늘 하나를 못 만들었다." 라며, 이강회(李綱會)의 말을 근거로 내세우는데, 선사시대 때도 뼈 따위를 가공하여 만든 바늘이 있었거늘 상식적으로 화포는 물론 서구의 호이겐스식 탈진 장치 등도 카피한 조선에서 진짜로 못 만들었을까? 청나라산 수입 바늘이 각광받았던 것으로 보이나, 민간은 물론 나라에서도 침장이라 하여 바늘을 만드는 장인들을 모은 기관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울러 실학자 중 한 명인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에서 마치 양반들이 생산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놀고먹는 기생충이라는 식으로 서술하여 오늘날까지 양반들에 대해 그런 이미지가 있으나, 급제해 벼슬살이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양반들은 농업경영으로 재산을 쌓았고, 향반들은 아예 직접 농사를 지었다. 양반들은 농업경영이든, 직접 하든 농사와 자산관리에 대해서 능통해야만 했지 글만 읽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만 양반전에 나온 것 같은 양반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박지원이 비판한 것은 양반들 중 생활에 관한 문제를 도외시하는 일부 생활력 없는 양반을 비판한 것이지 양반 전체를 싸잡아 비판한 것이 아니다.

또한 실학자들이 조선의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평등한 사회를 주장했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들이 남긴 글을 잘 보면 오히려 신분제도를 옹호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 글이 현재는 비공개되어 있어서 내용을 요약하자면, 실학자들이 어느 책에서는 신분제를 비판하고 노비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으면서[11] 또 어디에서는 반대로 천민과 일반 민중에 대한 선민사상에 가까운 우월심을 드러내며 신분제 강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익같이 잘 덜 알려진 실학자일 뿐 아니라 심지어 정약용조차도 비슷한 뉘앙스를 띈 적이 있는데, 이 점 때문에 학계에서는 실학에 대한 회의론이 더 강해지는 중이다.


아울러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조선의 노비 제도가 세상에서 가장 나쁘다. 중국에도 노비가 있지만 그저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판 것 뿐이며, 혈통에 따라 노비가 되지는 않는다. 혈통에 따라 자자손손 대대로 노비가 되는 나라는 조선 밖에 없다"라는 내용을 적어서 마치 세습 노비가 전 세계를 통틀어 오직 조선에만 있는 것으로 묘사했고 이를 후대의 실학자나 구한말 애국계몽 운동가들이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주장함으로써 21세기인 현대에 와서도 마치 세습 노비가 조선에만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12]. 하지만 이 반계수록의 주장은 완전한 거짓말인데,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집필했던 시기인 중국 청나라에도 가생자(家生子)라는 세습 노비와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 계급들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중국의 세습 천민 계급들은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초기 시절까지 계속 있었다. 이는 유형원이 일부러 자국을 비하한 것이라기보단 이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소위 실학자들이 주변 나라(청나라)를 배우자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주변 나라들에 대해서 무지했으며, 동시에 동시대 자국의 현실이 타 국가에 비해 어떠한지 비교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었다는 뜻이다. 과거 당나라의 토지제도이자 선진시대 중국의 이상적인 토지제도였던 정전제를 복원시키자는 주장이 근대적 개혁인가? 이는 서양으로 따지자면 서양 학자가 초기 기독교 시대의 공동생산 공동소유 방식의 경제제도를 18세기 서양의 현실에 다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랑 똑같다.

또 실학이 주자학과 동떨어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당장 가장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부터가 성리학자이며(물론 당시 주류인 서인 계통 학맥과는 의견이 좀 다르다), 흔히 주자학의 봉건적 제도에서 벗어나 근대적 토지제도를 처음 생각해 내 다른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고 알고 있는 유형원의 토지제도의 경우, 연구를 통해 정작 그의 주장이 주희의 주장에 별로 벗어나지 않았으며,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지 오래이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런 면이 드러나는데, 박시백은 실학자들이 결국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이들이 성리학[13]의 한계 내에서 조선을 바꾸려고 했던 것이라 지적한다. 그리고 이들이 왕정에서 벗어나 근대국가, 즉 근대 공화정을 지향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북학파 등 특정 실학 학파를 근대 국민국가 수립과정의 일환으로 서술하던 옛날 학계와 역사 교과서의 담론을 좀 극단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유형원의 토지제도 얘기가 나와서 더 서술하면, 당시 조선의 토지제도가 봉건적이고 불합리했다는 비판은 좀 생각을 더 해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토지제도는 그야말로 유사봉건제라 불릴 만큼 민에 대한 배려가 1도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는데(전시과 문서를 참조하자),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유교적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이를 모조리 때려 부쉈지만 여전히 조선 초중기까지만 해도 이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으며, 자영농 분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난이 일어나며 상황이 바뀐다. 양난은 조선을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사회가 변화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신분제 동요 같은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것 말고 잘 안 알려진(사실 최근 밝혀진 거라..) 변화로 자영농과 소작인의 성장이 있다. 즉 고려의 개판 같은 토지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황무지 개간 등 여러 요인으로) 자영농이 성장하고 비교적 합리적이고 경제 성장에도 용이한 토지제도로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심지어 가장 최근 연구에서는 16세기 기회론이라 해서 이때 토지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고 농업과 경제 부분에서 상당한 발전과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당시 토지상황이 마냥 좋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봉건적인 조선의 기존 토지제도와 근대적인 실학자들의 토지제도라는 극단적인 담론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당시 지배층들은 아예 바꿀 생각을 안 했는데 어쨌든 바꾸려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측면에서 실학은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당시 주류인 서인-노론들이 변화를 아예 입 꾹 다물며 거부했냐면 그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조선후기 수구꼴통의 대명사로 아는 송시열의 경우 남녀 상관없이 능력만 된다면 차별 없이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흔히 송시열이 주자를 맹신했다고 알고 있으나 오히려 송시열이 주자의 한계를 인정했다는 게 학계에서는 이미 밝혀졌다. 대중에 전파가 안 돼서 그렇지. 이외에 우리가 모를 뿐 송시열이 오히려 보통 실학을 탄생시켰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남인 계열보다 더 많은 개혁을 주장했으며[14] 송시열과 반대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허목은 군사력 강화, 대동법, 호포제 등 당대에 나온 모든 개혁들을 다 거부했으며, 심지어 비양반계층에서 과거에 급제하는걸 질서가 문란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 다 그러지 않았겠느냐고 그럴 수 있는데, 설령 그렇더라도 송시열과 대비되어 개혁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적절하다.

”…(중략) 농공상(農工商)과 품팔이하는 종들(傭隸), 신분이 낮은 천한 이들(下賤)이 모두 급제할 수 있는 것이다...[중략]조정의 근본에서 사방에 이르기까지 서민과 노비의 명분이 문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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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에서 허목은 무과의 문호를 대폭 확대하여 농민과 공인, 상인 및 천인층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명분의 문란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군대와 관련한 일을 "가장 규모가 크며 해악 또한 가장 깊은 일"이라고 하면서 군사력 강화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비록 그는 어린아이와 이미 사망한 이들의 군역 부담을 모두 삭감할 것, 변방이 아닌 내지에 설치된 둔전(屯田)을 혁파하고 중앙군의 수를 축소시킬 것, 흉년으로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 대해 적극적인 황정(荒政)을 실시할 것 등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이 또한 적극적인 제도개혁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제도를 운용하는 데 있어서 발견되는 취약점을 개선하는 수준의 소극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을 실학과 연결시키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후략](pp.147~152)

조성을,「17세기 조선의 經學과 經世學」,『조선의 주자학과 실학』(혜안, 2009).


애초에 실학자=남인이란 공식도 웃긴 게, 정약용을 비롯한 소위 중농학파들이야 남인들이 대부분이었지 북학파라고 불리는 박지원, 홍대용 등은 모두 서인 노론 출신이다. 숙종 이후 권력에서 쫓겨난 남인들은 두 개로 나뉘었는데, 그대로 경기도를 비롯한 수도권에 머무르기를 선택한 사람과 남인의 기반인 영남지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다. 이중 전자는 정약용 같은 인물들을 제외하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고(시파로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정조 사후 신유박해로 인해 시망 상태가 된다), 후자는 영남 지역에서 퇴계학을 기반으로 주자학을 발전시키며 후학을 양성하며 신권의 강화와 유교식 관료제를 옹호한 노론과 달리 강력한 근왕주의를 기반으로 칩거하다가, 구한말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위정척사파와 항일운동군의 강력한 축을 형성한다. 이렇게 보면 실학=남인이란 공식 역시 잘못된 셈이다.

그리고 송시열을 실학과 대비되는 성리학의 교조라고 지칭하는 것도 좀 웃긴 주장이다. 송시열 문서에 나와있지만, 송시열 본인은 여성에 대한 대우 문제, 노비제, 상업에 관한 태도 등 당대의 개혁 및 사회문제에서 지금 기준으로도 놀라울 정도로 유화적이고 개혁적인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송시열은 정적들이 자신을 교조주의자라고 비난하자 서울로 상경해 이에 해명하면서 화폐의 유통과 상품 생산 및 소비의 활성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참조 심지어 과부의 재혼이 가능하게 법을 바꿔야 한다고도 했으며, 여자에게 글자를 가르칠 것을 주장하거나, 심지어 서북 지역의 여자들을 징병해 남자처럼 전장에서 싸우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뒤를 이은 노론들은 이를 헌종 대에 기어이 관철시켰다(...)

이런 관점이 널리 퍼져있는 건 대중의 잘못이라기보단 옛날 학계의 관점이 대중들에게 널리 퍼져서 각인된 탓이 크다. 자본주의 맹아론이 정설이었을 시절 한국 학계의 역사 담론은 근대국가 지향이라는 마르크스의 유산이 강하게 묻은 목적론적 역사관이었으며, 서양영국 마르크스주의학파 - 프랑스 아날학파로 이어지는 기조 속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수정주의가 대두히고 E.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쓰며 기성 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치른 끝에 결국 기존 근대 지향적 담론이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그때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며 기조가 변화했지만 이게 대중들에게는 기존 담론이 너무 강하게 박혀있었고, 식민지배라는 트라우마 속에 각인된 감각이 있었던 탓에 옛날 관점이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사 분야에서 기존 학설을 뒤집는 충격적인 학설(양천제라던가)들을 발표해 유명한 유승원 교수는 저서에서 이런 기존 조선 꼴통 성리학-근대국가를 지향한 개혁적 실학자들이라는 선악구도가 열패주의만 불러일으키고 정작 식민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비판한 바 있다. 역시 기존 학설들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이어 왔던 지두환 교수도 이런 맥락에서 조선시대 사상사의 흐름에서 실학을 배제하고 주자성리학 - 조선성리학 - 북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제시했다.

물론, 그렇다고 옛날 사학자들이 자맹론과 근대성에 집착한 바보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아직 탈근대와 포스트모더니즘, 수정주의가 도래하기 이전이었으며, 사학자들은 그저 세계적인 흐름과 더불어 식민통치라는 특수한 상황을 반영했을 뿐이다. 하지만, 기조가 바뀌었고 그런 담론들이 폐기되었는데도 새로운 담론을 거부하고 기존 담론을 고수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또 이런 기조는 이상하리만치 과다하게 찬양받는 정조와도 연관이 있는데, 성리학을 거의 통달하다시피 하고 주자와 송시열을 칭송한 모습은 쏙 빼버리고 실학자들과 서얼을 등용하고 수원화성을 건축하는 개혁적인 모습만 부각하다 보니 무슨 정조의 개혁이 조선을 구할 개혁이었고 정조가 일찍 죽지 않았으면 조선개혁을 이뤄내 결국 근대화를 이루고 식민통치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다분히 결과론적인 담론이 대중에 크게 퍼지다 보니 정조가 중시한 실학자들에 대한 평가도 덩달아 이와 비슷하게 올라간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수혜를 본 사람이 다름 아닌 정약용.

4. 실학자 목록[편집]


볼드체 된 인물들은 수능이나 공시에서 자주 출제된 만큼 실학자 중 중요한 인물들로 손꼽힌다.



5. 학파 목록[편집]




6.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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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체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2] 학문이 실생활에 유용해야 한다.[3] 편리한 기구를 사용해서 백성의 삶을 풍족하게 한다.[4]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한다.[5] 성리학에 기원을 두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학문에의 관심, 외국에 대한 관심, 이익성호사설이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에서 보이는 백과사전식 저술 등 실학, 특히 남인 실학의 기원을 거의 다 보여줬다.[6] 사실 알고 보면 고구려 궁전유적이었다. 구획별로 나눠져 있었던 것이 사실 이 때문이다.[7] 다만 국학파를 실학자로 인식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거의 없는데, 어디까지가 실학이고, 어디까지가 국학인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이익의 제자로 역사학을 다뤘던 안정복은 국학파에 포함되겠지만 안정복에 대해서 실학자라는 인식은 적은 편이고, 인문지리지인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역시 마찬가지다. 해당분야의 발전을 도모했던, 지도의 김정호나 의학의 허준이제마도 국학파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있지만 이들을 실학자로 보기는 또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8] 이상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역사비평사,2009,p301[9] 경기도 남양주시 실학박물관 전시 내용.[10] 한국사학, 동양 철학, 한문학 등.[11] 4 신분제를 조선의 신분이라 알고 있으면 노비제 폐지만 주장한 게 의아할 수 있는데, 조선의 신분제는 양인과 천민으로 구성된 양천제이며, 천민은 노비만 해당된다. 학계의 정설이 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서 반상제로의 변화를 서술하는 것은 일부 연구자들이 조선 후기에서의 양천제 적용을 거부해서이다.[12] 마르크스 경제학에 사상적 기반을 둔 뉴라이트 계열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온라인과 오프라인 등지에서 "같은 동족을 노예로 부려먹은 나라는 조선 밖에 없다."는 식으로 조선 폄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 역시 세계사에 대한 무지함이 반영된 것인데, 보다 자세한 사항은 노예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13] 공자라고 표현했는데 이때는 성리학=유교였던 시절이다.[14] 물론 윤휴도 있는데 윤휴는 개혁가라기보단 차라리 몽상가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