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배

최근 편집일시 :

성씨

(審)

(配)

정남(正南)
생몰 기간

? ~ 204년 8월
고향

기주 위군 음안현
1. 개요
2.1. 원소 생전
2.1.1. 배경 : 원소군 내의 하남 예주계, 기주계 대립
2.2. 원상 옹립
2.3. 원가 내분
2.4. 죽음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4.2. 부정적 평가
4.3. 중립적 평가
5. 미디어 믹스
6.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중국 후한 말의 문관, 원소 세력의 정치가이며 자는 정남(正南)으로 기주 위군 음안현 출신.

특이한 점으로 원소의 핵심 참모들 중 저수, 봉기, 신평, 허유, 순심은 책사로서의 면모만 보이지만 심배는 원소 휘하에서 행정관, 감찰관, 관도 대전 이후에는 일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인 도독까지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즉 문신인 동시에 무신인, 원소 세력의 만총이었던 셈.

군사적인 공훈은 세우지 못했으나 문신으로서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다만 성격이 강직하다 못해 딱딱해 관도대전 패배의 단초를 만들었으며 그럼에도 원소 정권에 죽을 때까지 충성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2. 정사[편집]



2.1. 원소 생전[편집]


심배는 어렸을 때부터 의롭지 않은 것은 눈뜨고 보지 못하는 성격으로 보통 사람들은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기백이 강했다고 한다. 한복이 기주목이 되었을 때는 올바른 성격 탓에 소외되었으나 곧 한복을 몰아내고 기주를 장악한 원소는 심배를 중용했다.

원소는 개인적으로도 심배를 좋아했는지 속마음을 드러내 맡기며 크게 신임했다고 한다.

191년 이후로 199년 무렵까지 막부를 총괄했다는 기록이 있고 심배가 처음에 임명된 치중 종사는 기주의 인사권을 총괄하는 요직이다. 인사권은 다 알다시피 권력의 핵심이다. 뒤이어 별가 종사 직에 오르는데 기주목이 된 원소의 문신 보좌관인 종사들의 우두머리가 별가종사다. 즉 문신으로는 2인자가 된 것이다. 물론 기주 자체가 꿀 땅이긴 하지만 그 생산력을 집중시켜서 후방 지원을 든든하게 해 유주, 청주, 병주를 손에 넣기까지 뒤를 받쳤음을 생각하면 행정가로서의 유능함은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년, 공손찬을 격파한 원소는 곧 조조를 칠 계획을 세웠다. 저수전풍이 지구전 전략을 주장했으나 원소는 곽도와 심배가 주장한 단기결전 전략을 채용한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곽도가 저수를 탄핵해서 군 총사령관 직인 감군이 폐지되고 곽도, 순우경, 저수 삼도독으로 그 권한이 삼분할되면서 원소 진영의 무신 2인자였던 저수는 그 위세를 잃게 된다. 원소가 남하를 위해 군비를 갖추기 시작하자 심배는 봉기와 함께 업에 남아 보급 등 후방지원을 총괄한다.

이 무렵 조조 진영에서도 원소와의 대치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 공융은 원소 휘하의 장수들을 칭찬하며 이기기 힘들다는 비관적인 견해를 내놓았는데 심배와 봉기를 원소의 충신으로 평가했다. 반면에 순욱은 공융에게 반박하면서 심배는 고집불통에 융통성이 없으며 봉기 역시 과단성은 있지만 자기 판단에만 따르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라고 비평했다.
둘다 틀린 말이 아닌게 관도대전 도중이란 타이밍에 허유 스캔들을 터뜨려 순우경이 죽고 오소가 불타 전쟁에서 지는 단초를 제공한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원소 사후 원상과 함께 조조에 저항하다 함께 죽는 마지막 충신이기도 했다.

이듬해, 마침내 남하한 원소는 조조와의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고 차츰 원소에게 밀려나다가 관도에서 고립된 조조는 멸망직전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전쟁 막판에 원소의 모사였던 허유가 배반하여 조조에게 투항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허유가 조조에게 투항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허유가 자식과 조카들을 시켜 횡령 등의 비리를 저지르던 것이 심배에게 발각되어 가족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이었다.

관도에서 참패한 원소는 장합이 귀순할 때 안전하게 튀려고 지휘부 막사에 낸 화재에 휘말려 난리통에 한때 생사조차 불명이었다. 이에 원소의 영지에서도 수많은 반란들이 일어났는데 원소는 병사들을 수습해 기주로 돌아왔고 반란군들을 모조리 격파하여 평정했는데 이 무렵 원소는 전풍을 죽였다.[1]

관도대전에서의 패배로 심배의 두 아들이 조조에게 사로잡혔는데, 맹대는 평소에 심배와 불화해 장기와 함께 심배는 정치를 독점하는 자리에 있고 그의 종족은 크고 병사가 강하면서 두 아들이 남쪽에 있으니 반드시 배반할 마음을 품을 것이라 했으며, 곽도, 신평도 이에 동조했으나 봉기의 변호로 기각되었다. 원래 심배와 봉기는 사이가 나빴으나 이를 계기로 화해하고 서로 친하게 지냈다.

한편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굉장한 정치감각을 발휘해 심배는 역공을 가해 곽도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탄핵했다. 순우경은 전사하고 저수는 숙청당해서 하나로 돌아간 채 곽도가 쥐고있던 도독위, 다시 명칭을 바꾼 감군직을 차지하면서 정쟁에 승리한 것이다. 이로써 심배는 문신 1인자에 이어 무신 1인자에 오른다.


2.1.1. 배경 : 원소군 내의 하남 예주계, 기주계 대립[편집]


조조헌제를 맞아들인 196년 무렵부터 원소 세력 내에서는 하남 출신이었던 원소와 기주의 호족인 저수, 전풍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원소는 같은 예주 출신의 곽도 등을 전폭적으로 기용하는 방식으로 저수, 전풍을 견제했다

관도전 무렵에는 2인자였던 저수는 탄핵되어 감군에서 쫓겨나고 감군의 강대했던 권한이 삼분되어 저수/곽도/순우경에게 각각 주어졌다가 저수의 군권이 다시 대폭 축소되어 곽도에게 속하였고, 순우경, 신평, 순심, 안량, 허유, 봉기 등 심배를 제외하면 주요 간부의 절대 다수가 하남 출신으로 이루어졌고, 전풍은 형틀에 묶여 투옥되는 등 기주계는 완전히 발려 하남계가 폭주하다시피 위세를 부렸다.

이때 심배는 기주의 유력한 호족이면서도 같은 입장이던 저수, 전풍과 달리 원소의 충성파를 자처했기에 중용될 수 있었다. 혹은 성격이 나빠 양 진영의 주요 책사와 사이가 나쁜 독고다이라 세력이 없었고 세력을 만들 인망도 없다고 판단해서 감군 직을 줘서 하남 예주계를 견제했을 수도 있다.[2]

심배는 원소의 의견에 직언하다 미움받은 전풍, 저수와 달리 원소의 마음에 드는 전략만 바친다고 이 둘과 사이가 나빴고 하남계인 곽도, 신평과도 기주계라 대립관계였다. 관도전 무렵까지 절정의 위세를 누리던 곽도 파벌은 관도전의 패배가 원인이 되어 심배에게 밀려나 청주로 쫓겨났지만 중앙 복귀에 나름대로 야심도 있고 심배와도 사이가 나쁜 원담에게 아첨하고 부추겨서 결국 원소 사후 정국을 내전으로 이끌었다.

심배는 역시 형주 남양군 출신인 봉기와도 사이가 나빴는데 곽도, 신평이 관도전에서 심배의 두 아들이 조조에게 인질로 잡힌 것을 이유로 심배를 참언하는 맹대장기에 동조했는데, 봉기가 심배를 변호하여 끝내 심배를 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격 나쁜 심배는 죽을 게 뻔한 원담과의 협상에 봉기를 보내 죽게 만들어서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2.2. 원상 옹립[편집]


원소는 군대가 패배한 이후 병이나서 걱정하다 죽었다. 원소는 생전에 원담을 폐출시켜 일찌감치 후계에서 잘라버렸고 막내아들 원상을 총애해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당시 원상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기주 안에서는 곽도신평 등을 중심으로 해서 어린 원상보다는 원담이 후계자에 더 적합하다는 여론이 만들어졌다.

봉기,심배 역시 평소부터 원담과 사이가 나빴던 데다가 곽도, 신평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심배와 함께 선수를 쳐 기주를 장악하고 있지도 않은 원소의 유명을 만들어내 원상을 후계자로 옹립하였다.

뒤늦게 업에 도착한 원담은 원소의 뒤를 계승할 수 없게 되자 군사를 여양에 주둔시키며 거기장군을 자칭했는데, 거기장군은 원소가 처음 거병해서 반동탁 연합의 맹주가 되었을때 칭한 관직이므로 이는 자신이 원소의 후계자라는 공식적인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원상은 중재역으로 봉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조조가 원소의 부재를 틈타 쳐들어오려는 정황이 감지되자 원담은 원상에게 지원군을 요구한다. 심배는 원상에게 거듭 진언하여 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했고 이 결과 대노한 원담은 봉기를 참수한다. 이에 원상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원담을 구원했고 심배는 남아서 업을 지킨다. 이 무렵의 기록이 매우 불명확한데, 《한진춘추》에 의하면 중재역으로 파견된 봉기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오히려 원담을 부추기면서 원상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에 심배가 원상에게 구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하자 마침내 대노한 원담이 봉기를 죽이고 원상의 승계를 인정하면서 원상과 화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인용된 글에 의하면 심배는 봉기를 '원가의 악창'으로 표현하며 맹렬히 디스하고 있고 봉기의 일족도 모조리 숙청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원상은 한때 고전했으나 마침내 조조를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원담이 조조를 추격해 궤멸시키자고 제안하나 원상은 이를 의심해 받아들이지 않았고, 원담군에 대한 무기와 병력의 보급을 중단하며 청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2.3. 원가 내분[편집]


원담은 대노했으나 폐출된 신분으로 정통인 원상을 거스를 명분이 없어 속으로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원담한테 곽도신평이 "선공에게서 장군이 폐출된 것은 모두 심배가 계책을 꾸며 이간질했기 때문"이라 모함사실을 고하자 빡돈 원담이 마침내 군사를 끌어모아 원상을 습격했지만 결과는 역관광. 도망친 원담은 다시 군사를 모아 업을 노리는데 이때 원상군은 심배가 주축이 되어 원담을 완전히 털어버렸다고 한다.

참패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근거지인 평원군마저 포위되기에 이른 원담은 정면대결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조조에게 항복한다. 조조가 이를 받아들여 북상해온다.

한편 업에서는 원담이 원상과 싸우다 패하여 달아난 후, 원상과 심배는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온다. 곽도와 신비는 이 사실을 알고 일족들과 같이 업에서 탈출했지만 남아있었던 신평은 일족들과 같이 사로잡혔다. 이들은 인질로 잡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심배는 성문이 열려 조조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곤 곽도와 신평 형제가 참언으로 기주를 망치게 된 것에 이를 갈며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 인질로 잡혀있던 신평과 그의 일족들을 모조리 죽인다.

원상과 심배는 조조와 대치한다. 심배는 원담이 원수와 손을 잡은 것을 질타하며 모든 문제의 원흉인 곽도를 베고 화해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3][4] 원담은 이를 읽고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곽도에게 실권이 넘어가 겁박당하고 있던 처지였으므로 이를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별 접전을 벌이지 않은 채로 조조가 다시 황하를 건너 철수한 뒤 물길을 바꿔 군량 수송로를 통하게 하는 등 장기전을 준비하자 원상은 심배를 남겨 업을 지키게 하고 직접 출군해 평원의 원담을 공격했지만 조조는 원상의 부재를 틈타 다시 북상해 기주에 도착했다. 이때 심배와 같이 업을 지키던 소유는 조조에게 호응하며 업을 넘기려 했지만 심배에게 음모가 적발되어 실패했고, 군사를 이끌고 업 내에서 심배와 시가전을 벌였으나 패해서 조조에게 달아났다.

조조가 업을 포위하자 심배는 처음에는 이를 잘 막아 싸웠지만 마침내 조조가 수공을 펼쳐 업을 수몰시키자 성 안의 아사자가 절반을 넘는다. 병주의 고간은 업의 구원에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마침내 원상이 돌아와 심배와 협공해 조조를 물리치려 했지만 오히려 참패하여 원상은 병사의 대부분을 잃고 단기로 도망치게 된다. 이를 지켜본 고간은 마침내 원상을 배반해 독립했고 업의 사기는 무너져 내린다.

심배는 조조군도 지칠대로 지쳐있으며 곧 유주에서 원희가 지원군을 보내올 것이라 병사들을 독려했으며 조조가 포위망 가까이를 시찰하는 것을 보곤 숨겨 놓았던 쇠뇌를 일제히 쏘게 해 조조에게 화살 몇 발을 맞히며 부상을 입히기도 했으나 조조는 목숨을 건진다.

이때 심배의 조카인 심영이 조조에게 배신하여 성문을 열었고 조조군이 물밀듯 들어오자 심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끌고 조조군에 대항했지만 잡히고 포로가 된다.


2.4. 죽음[편집]


신비는 업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의 일족들을 풀어주려고 감옥으로 향했지만 이미 모두 죽어 있었다.[5] 그 날 사로잡힌 심배가 조조에게 호송되어 가는 것을 보고 신비는 그를 말채찍으로 때리며 "이 살인마, 네 놈은 이제 죽었다."라며 분노를 터뜨리자 심배는 "이 개같은 놈아! 너 때문에 조씨가 우리 기주를 격파하게 되었으니 너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조가 끌려나온 심배에게 심배의 조카 심영이 조조와 내통했음을 알려주자 심배는 심영의 용렬함에 한탄했다. 또한 조조가 말하길 . "전에 내가 성에 갔을때 무슨 궁노를 그렇게 많이 쏘았소?"라며 자기를 쏘아 죽일 뻔한 일을 얘기하자 "너무 적었던 것이 한스럽다."라고 쏘아붙힌다.

조조가 심배의 능력과 기백이 아까워 "경이 원씨 부자에게 충성한 것처럼 또 나에게도 그렇게 할 수 없겠는가."라고 설득했으나 심배는 이미 굽히는 말이 없었고, 신비 또한 원수를 제발 죽여달라고 읍소하길 그치지 않으니 조조는 결국 심배를 참수했다.

먼저 조조에게 항복했던 기주 사람 장자겸(張子謙)은 심배와 사이가 나빴는데, 심배를 보곤 비웃으며 "이보오, 정남. 그대도 나와 같이 하는 게 어떻소?"라고 말하자 심배는 "너는 항복한 포로가 되었고 나 심배는 충신이 되었으니, 비록 죽는다 해도 어찌 그렇게 살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사형을 받을 때는 "내 주군께서 북쪽에 계신다."라며 집행인을 질타해 자신을 원상이 있는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칼을 받았다. 이토록 심배는 마지막까지 허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던 데다 목소리와 기백이 장렬했기 때문에 이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탄식했다고 한다.


3. 연의[편집]


저자 나관중 또한 심배를 높게 평가했는지, 대충 묘사하는 관도대전과 조조의 하북 평정 과정에서도 심배의 분량은 어느 정도 챙겨주는 편이고, 심배의 최후 장면에서 어리석은 주인을 만나 죽었지만 충직하고 청렴한 의인이라며 칭송하는 시도 붙여줬다.

최후의 농성전 장면이 인상깊었기 때문인지 삼국지연의에서는 관도전투 초반에 토산을 쌓고 땅굴을 파는 작전이 심배의 계책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사실 정사에서 심배가 원소를 따라 종군하지 않고 업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지만 연의에서는 이후 조조군의 습격이 계속되자 원소가 심배를 업으로 보내 후방지원 업무를 총괄하게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4. 평가[편집]



4.1. 긍정적 평가[편집]


봉기와 마찬가지로 실무 능력면에선 크게 흠잡을 구석이 없다. 원소가 기주목이 된후 주의 행정과 실무를 총괄했는데 원소 세력은 전국에 난립한 군벌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영내를 안정시키고 방대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관도대전을 앞두고 단기결전을 주장하긴 했으나 곽도와 달리 별다른 실책을 저지른바 없으며 업에 남아 업의 사무처리와 군수품의 보급 등 행정업무을 맡았다.

충성심의 경우 훗날 삼국지에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는 심배를 높게 평가해 시대의 열사라며 극찬했으며, 이후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은 심배를 원소의 주요 막료들 가운데 끝까지 충성을 바친 유일한 인물이라 평했다.

원소 세력 내부의 파벌 다툼을 (곽도, 봉기, 순우경 등으로 대표되는) 하남 출신 중심의 친위세력을 이용한 원소의 기주 현지의 (저수,전풍으로 대표되는) 토호 세력 숙청 이란 흐름으로 보는 것이 원소 세력 재평가의 일반론적인 경향이나, 기주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면서도 양 파벌의 주요인사들 전원과 극도로 사이가 나빴고, 오직 원소에게만 절대적으로 충성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독특한 위상을 가진 인물이다.


4.2. 부정적 평가[편집]


하지만 사서의 기록을 통해 나타나는 심배의 인격은 고결함과는 거리가 멀다. 순욱은 심배를 무모하고 고집불통인 인물로 평했으며, 기록을 통해 살펴본 심배의 행적 역시 이와 들어맞는다. 원소의 열렬한 추종자였지만 대국적인 시야가 넓다고 보긴 어렵고, 의협심이 강해 불의를 참지 못했다곤 하나 정작 본인도 일족들을 주요 관직에 임용시켜 강대한 권력으로 재산을 쌓아올렸고, 사사로이 법을 어긴 죄인들을 보호하며 파벌을 키우는 등 원소의 비호를 믿고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그러면서도 경쟁 계파라 할 수 있는 허유신비의 실책에 대해선 가차없이 처벌하는 등 탐욕스럽고 야심이 강했으며 권력욕이 강했다.

정리하자면 분명 능력은 뛰어나고 원소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바 없지만 부패하고 도량이 좁으며 뒷방정치를 즐겨 조직안에 분란을 초래하는 인물이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군을 위기에 몰아넣었고, 원소에 대한 충성심도 의심스러운 곽도보다야 낫지만 심배 같은 인물은 원소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주군이 적당히 중재하고 조율하지 않으면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한계는 원소 사후에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공통적으로 서술된 심배의 원상 옹립 동기는 원소가 후사를 명확히 정하지 못한 채 급사하고 나이 많은 원담의 계승이 중론이 되자, 평소부터 사이가 나빴던 원담의 집권으로 정치적 보복이 올 것이 두려워 그 승계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명분으로 원상을 내세운 것이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원상의 충신으로 알려져 있는 이미지와 달리 애초에 원상과 별로 가깝지도 않았으며, 그저 정치적인 논리에 따라 어리고 만만한 원상을 허수아비로 내세웠다고도 해석할 수 있어서 일편단심의 충신 이미지 또한 크게 퇴색된다.

생전에 원소가 원담을 폐출시켜 죽은 백부의 아들로 입적시키며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없도록 못 박아뒀으며 원상을 후계자로 할 뜻을 밝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심배가 있지도 않은 원소의 유명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당시 원상이 나이가 어렸고, 만약 원상의 원복(=성년식)이 있기도 전에 원소가 죽었다면 원상은 적자로 족보에 올라갈 수도 없고 원소의 공식적인 후계자임을 주장할 수도 없게 된다. 심배가 조작한 원소의 유명이라는 것이 원상의 관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심배는 단지 원담의 집권이 싫다는 이유로 원소가 결정하지도 않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지어 어린 원상을 옹립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원상의 어린 나이와 심배의 입지를 생각해 볼 때 원상의 강경한 반응은 심배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권신에 자리에 있었지만 권력욕을 가진 것과 대조되게 충성심도 있어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보신만 챙겼던 황호, 잠혼 같은 쓰레기 부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결국 그게 국가 전체적으론 악영향을 끼친 관정과도 비슷한 케이스.[6]

원소 사망 당시 원상은 자체적인 입지가 없었고, 원담과 사이가 나쁜 심배가 원담의 집권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원상을 옹립했다는 점, 곽도와 신평이 원담에게 내전을 부추기면서 이간한 대상이 원상이 아닌 심배라는 점, 조조가 개입한 시점에서 화해를 위해 원상 진영에서 원담에게 보낸 서신도 원상이 아닌 심배의 이름으로 보내졌다는 점 등으로 사료 번역이 충실히 이뤄지지 않던 시절에도 원소 사후 원씨 형제의 내전이 실질적으로는 심배와 원담의 대립이었다는 의혹의 눈초리는 많았으나, 번역된 심배의 서신[7] 내용을 요약하면 심배는 원담과 곽도를 가루가 되도록 까는 것과 동시에 조조의 북상이란 위기 상황에 대해 원상의 유약하고 무른 태도[8]로 인해 원담을 조기에 제압하는 데 실패하면서 조조의 개입을 허용했기에 생긴 일로 분석하고, 원담이 곽도의 머리를 바치며 투항하지 않으면 군을 내서 원담으로 인한 해악을 쳐 없애겠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데, 심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담을 죽이거나 배제할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던 초강경파였고, 원상은 오히려 내전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던 온건파에 가까웠다는 것이 설득력이 높다.


4.3. 중립적 평가[편집]


연의를 필두로 해서 역사적으로는 내전에 소극적이었던 원상이 되려 내전을 주도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져가고, 실질적인 주동 인물인 심배는 상대적으로 이에 묻어가면서 성질은 좀 더러워도 유능한 충신 이미지만 크게 남기는 등, 같이 엮이면서 이미지 상의 손해를 많이 보기도 했다. 사실 내전을 정당화하던 심배의 논리는 원소 특유의 편집적인 정적 배제 성향과도 유사한 면이 있기에, 이런 이미지상의 해석에서 벗어났을때 심배의 이런 모습에 대한 옹호는 원소의 대한 옹호와 상당히 비슷한 면모를 띤다.

심배의 분석대로 원상이 지나치게 온정적인 태도를 취했기에 조기진압에 실패하고 조조의 개입을 허용한 것인지, 아니면 원상의 화해 의지에도 불구하고 심배를 필두로 한 강경파들이 워낙 모질게 원담을 몰아붙인 끝에 궁지에 몰린 원담 《영웅기》에 따르면 본디 원담은 조조에게 투항하자는 곽도의 제의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지만 극도로 곤궁해지자 이를 수락한다. 조조에게 항복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개로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원담의 막장성을 받아주려는 원상의 유약함이 전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원인이라는 심배의 주장과 달리 심배 자신의 입지를 위해 끝까지 형제간의 싸움을 부추겼다고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 흔히 통용되는 고고하고 청렴결백한 이미지의 충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원상을 옹립하긴 했으나, 여기에는 나름의 확실한 명분이 있었고, 원상을 옹립한 이후에 원상의 권력을 심각하게 침해하거나[9] 적당한 기회에 원상을 팔아넘기며 원담이나 조조와 협상[10]하기엔 가장 최적의 포지션에 있으면서도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도 투항하면 후대하겠다는 조조의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는 점은 인정받을 만한 부분. 이런 측면이 후대 사가들에게 고평가를 받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되지 않는 현대의 관점으로 볼 때 평가에 조금 더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5. 미디어 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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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항목[편집]



[1] 관도에서의 참패 이후 책임과 비난 여론을 전가하기 위함이었다. 옆에서 봉기가 부추긴 것도 있고 말이다.[2] 전풍은 '억세고 모질어 주군을 거역한다'라는 평까지 듣던 인물이었던만큼 살려두기엔 위험하게 여겨지던 것으로 보인다. 원소의 "결국은 그에게 조소당할 것이다."라는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일 가능성이 높다.[3] 그 편지에는 자격없는 자가 힘을 얻으면 세상은 어지러워집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지상의 생명들은 고통에 몸부리치고 지하의 영혼들은 편히 쉬지 못합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가있는데 난세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문구로 알려져 있다.[4] 사실은 곽도 등 원담파를 숙청하기 위한 계략이었다.[5] 위에서 서술한대로 심배가 신평의 일족을 죽였다.[6] 물론 관정 따위가 심배에 비견할 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아부를 많이 했다고 하지만 공손찬 일족에겐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고 공손찬이 죽은 후 승산이 없음에도 결사항전→충신으로서의 죽음을 택한 것과 비슷하다.[7] 원담에게 보내는 글로 《후한서》와 《한진춘추》에서 전문이 인용되었는데,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하나 세세한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8] 청주로 달아난 원담의 재차 공세를 시도하자 협상만을 시도할 뿐 반격에 나서지 않아 원담의 기세만 올려줬으며, 뒤늦게나마 원담을 대파하여 원담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고도 정작 원담을 추격하지 않아 후환을 끊지 못했고, 원상의 평원 포위에 대해서도 시간만 끌며 공세를 계속 늦췄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고 심배가 언급했다.[9] 원상의 권력이 약했다고는 하나 헌제처럼 아예 바지사장은 아니었다.[10] 후계자로서의 입지가 취약했던 원상은 이런 식의 치명적인 배신을 허다하게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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