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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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수훈이력
4. 여담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32년 11월 22일, 김책시 덕인리에서 혁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은 받지 못하고 막노동하다가 해방 이후 만경대혁명학원 제2기에 입학하여 그제서야 교육을 받았다. 박송봉과 동기다. 6.25 전쟁 중에는 김일성 친위중대에서 복무하였으며 전후 김책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외국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1961년 4월, 내각 사무국 및 조선인민군에서 사업하였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73년 10월,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되면서 김정일의 측근이 되었다. 1976년 5월,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에 임명되었다. 1978년 1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대회대표자격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1981년 5월 28일 새벽 1시에 5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북한은 그의 공식사인을 심장마비로 발표하였다. "혁명가의 가정에서 출생하여 해방후 당의 품속에서 성장한 심창완동지는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를 높이 받들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인민무력부, 사회안전부의 중요한 직책에서 당과 인민군대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 심창완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우리 당을 견결히 옹호보위하고 당의 로선과 정책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으며 그의 략력까지 발표하는 등 크게 예우했다. 장의위원회도 구성되었는데 정작 장의위원 명단은 발표되지 않았다. 사후 1981년 6월 8일, 김일성훈장이 추서되었다.

사후 사회안전부 정치국장 자리는 남포시 책임비서로 일하고 있던 김치구가 차지한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사후 김일성훈장이 추서되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영웅적 위훈을 세운 귀중한 선군혁명전우'로 조명록, 김광진, 김두남, 전재선, 윤치호, 리동춘, 김하규, 리진수와 함께 심창완을 언급하였다.

2022년 8월 25일자 조선중앙통신 기사 <우리 혁명무력의 핵심골간을 키운 위대한 동지애의 품>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령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지닌 심창완동지를 1980년대의 김혁으로 높이 내세워주시고 혁명의 길에서 생사운명을 같이 할 동지로 굳게 믿어주고 키워주시였다. 어려운 공사를 불이 번쩍나게 해제낄 때마다 누구보다도 기뻐하신 우리 장군님의 품속에서 심창완동지는 《일을 제끼는 일군》,《아무 일에나 막힘없는 일군》이라는 값높은 평가를 받아안을수 있었으며 오늘도 영생의 삶을 빛내이고있다."라고 심창완을 기렸다.

3. 수훈이력[편집]


  • 국기훈장.
  • 공화국창건 20주년기념훈장.
  • 자유독립훈장.
  • 전사영예훈장.

4. 여담[편집]


이름이 심창완인데 이상하게 심창환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그의 아들 심철호는 김정은 시대에 체신상을 지냈는데 한번 보위부에 시비를 걸었다가 요덕수용소에 끌려가서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한다.

5. 참고문헌[편집]


  • 조선대백과사전 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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