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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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의 발단
3. 채문덕
4. 서관희와 숙청
5. 광란과 공포
6. 반전
7. 후유증
8. 언론에 돌아다니는 피해자 목록
9. 평가



1. 개요[편집]


심화조 사건(深化組 事件)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김정일 정권 초기에 일어난 대숙청 사건이다. # 20세기 후반 북한에서 일어난 숙청 가운데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만 무려 25,000여 명이다.

김정일의 각본, 감독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자 자신이 권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패륜이나 연쇄살인과 같은 어떠한 범행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다는, 그야말로 김정일 자신의 인간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심화조'라는 말은 이 숙청 사건에 이용된 이른바 "특수감찰반"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북한 내에서는 사건이 발생한 평양 용성구역[1]의 이름을 따서 "용성 사건"(룡성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사건의 발단[편집]


1994년 김일성의 죽음[2]으로 그 뒤를 잇게 된 김정일은 '유훈통치'라는 비정상적 체제로 가는 한편,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권력 주위에 아직도 남아있는 김일성의 측근들을 제거하는 것과, 흉흉해지기 시작한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이미 1974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에 의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된 이후에[3] 계속 지도자 수업을 받아온 김정일이지만 19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획득하기 까지 권력 세습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물론 김정일은 1960년대 말부터 조선로동당 문화예술부장 겸 선전선동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교향곡 피바다', '꽃파는 처녀'와 같은 김일성 세대의 항일유격투쟁 업적을 찬양하는 작품들을 영화로 제작하거나, 또는 연극 무대에 올리면서 김일성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것이 김영주와의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나 군부에 대한 영향력이 없었다는 점이 불안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김일성이야 "항일 유격" 활동이라는 간판이 있었기에 군의 지지를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본인은 군 경력이 전무하니 군부에게 영향력이 없었던 것.

그런 와중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이복형제 김평일의 행보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사건 직후 김평일은 북한의 대학생들로 하여금 군 입대를 독촉하고, 여기에 자신 역시 직접 자원해 인민군에 입대함으로서 군의 신뢰를 높이 사는데 성공한다.

사실 김평일은 김정일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는데, 우선 김일성과 흡사한 외모를 지닌 김평일에 대한 지지도는 그야말로 넘사벽이였고, 거기에 김일성은 김평일이 태어났을 때 "우리 집안에 장군감이 났다"면서 좋아했을 정도의 인물이다. 더구나 러시아 출생이었던 김정일과는 달리 국내 출신이었던 까닭에 소위 "백두혈통"에 대해 이의가 없었다.

거기에 김정일이 1980년대 들어 김일성을 "수령님의 건강과 여생을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김일성을 슬금슬금 권력 밖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정책을 수립, 지시하게 되기 시작하면서 그의 지도력에 상당한 결점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말하자면 김일성은 다른 사람의 사소한 의견이라도 들어줄 줄 아는 아량이 그나마 좀 있었던 반면, 김정일은 자신의 의지대로 관철되고 집행되어야만 되는 독단주의자였다.

일례로 북한과 대만 군사과학자 상호협력에 관한 안건을 토의하던 협의회 중 당시 정무원총리였던 강성산이 "이러한 중요의제는 일단 수령님께 보고를 드리고 비준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의견을 내자 "안 그래도 몸이 불편하신 수령님께 그런 것을 보고드려 부담을 드릴 필요가 있갔소?"며 묵살해 버렸다고 한다. 대만과의 교류는 중국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만큼 신중함이 요구되는 중요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이렇게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진행한 정책들이 모두 시행착오 내지는 실패로 귀결되자, 권력의 중요 요직을 맡고 있던 김일성의 측근들이 목숨의 위태로움을 감수하고 비밀리에 이러한 과실을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본질을 알고 난 김일성은 크게 노하여 "지금부터 모든 중요 안건은 당 지도부를 거치는 일 없이 내게 직접 보고하라!"라며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여기에 사소한 가정 문제를 갖고 있던 강성산 정무원총리를 눈엣가시같이 여기던 김정일이 가정혁명화로 크게 부각시켜 해임시켜버리자, 격노한 김일성이 "당 총비서로서 당 조직비서에게 당적 경고를 준다"고 한 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어떻게 자신의 친인척도 가리지 않는가?!"[4]라면서 노발대발했다.

게다가 김일성 사후 나타나기 시작한 고난의 행군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인구 17만의 김책시에서 하루에 200명의 노동자가 굶어 죽는 정도였는 데다, 그나마 주민을 연명시키던 동시에 주민 통제의 핵심인 배급제마저 붕괴되면서 아사자는 수십만에 이르는 상황까지 일어난다. 소위 고난의 행군이 절정이던 1998년에 가면 평양을 제외한 전국의 배급이 끊기게 된다.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도 이미 '심화조'의 숙청이 한참 진행되던 1998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제철소 노동자들에 대한 배급이 장기간 끊기고 다들 굶어죽기 직전 상황이 되자, 간부들이 임의로 자재를 내다 팔아서 식량을 마련한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자구책을 마련한 것인데, 북한 정권은 국유재산을 마음대로 빼돌린 범죄 행위이니 법대로 한다면서 간부들에 대한 일제 처형을 지시했고, 여기에 노동자들이 "다 굶어죽을 판이라 어쩔 수 없었다!"면서 반발해서 농성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인민무력부 탱크부대가 노동자들을 묶어서 산 채로 깔아뭉개 살해하는 것으로 상황은 종결되었다.

이러면서 여러 가지 민심이반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김정일은 사상 무장을 더 강화함과 동시에 이 난국을 타개할 묘책을 짜내기에 골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묘책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제공받게 된다.


3. 채문덕[편집]


채문덕은 김정일과 동시대에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 평양시 안전국장, 즉 한국으로 치면 서울지방경찰청장까지 오를 정도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런데 1992년 당시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였던 문성술과 평양시 당 책임비서였던 서윤석이 채문덕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채문덕이 김정일의 위세를 믿고 "안하무인적으로 경거망동하고 있다"며 공격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채문덕은 평안남도 북창군으로 쫓겨가고 득장 분주소장, 즉 한국의 파출소장으로까지 격하되고 말았다.

그러나 채문덕은 장성택의 후원으로 1995년 중앙정계로 복귀하고, 이듬해 1996년에는 장성택의 형 장성우가 맡고 있던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이라는 핵심보직을 꿰차게 된다.[5] 채문덕은 김정일에게서 한 가지 지시를 받는데, "우리 가문을 착취한 최지주라는 자가 있는데, 그의 아들은 남조선으로 달아나 장성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또다른 가족들과 자손들은 북조선에서 아직도 출신을 속인 채 살고 있지만 잡아내지 못했고, 아울러 6.25 전쟁에서 남조선에서 활약한 서북청년단의 잔당들이 지금도 북조선에 남아있으니 이들을 반드시 잡아내어 숙청시키라"라는 내용이었다. 표면상으로는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철두철미하게 박멸시킨다는 본심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김정일은 채문덕에게 심화조라는 조직을 만들라는 지령을 내리고, 이 심화조로 하여금 북한 전국의 모든 간부들을 '재검토', 즉 자세히 재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1995년 말에 평양시 룡성구역에서 생긴 대수롭지 않은 한 사건이 이 엄청난 숙청극의 서곡을 올리게 된다. 당시 룡성구역 안전부 주민등록과의 안전원 박 모라는 인물[6]이 룡성구역 행정위원장을 "간첩"으로 신고한 것이다. 박 모에 따르면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주민등록 자료를 보던 중 행정위원장이 미군 첩보기관에서 훈련을 받은 뒤 6.25 전쟁 때 남조선을 통해 침투한 간첩임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 나중에 이 신고는 허위로 밝혀져 박 모는 간부 모함죄에 걸려 되려 자신이 생활 제대를 당하고 심지어 량강도 백암군으로 추방까지 당했다. 그러던 중 TV 뉴스를 통해 미국산 무기와 수류탄, 총탄이 룡추동 뒷산에서 발견된 사실이 보도되면서, 행정위원 역시 서북청년단 잔당이었다는 발표와 함께 행정위원이 총살됨으로 말미암아 상황이 반전이 된다. 그 박 모라는 사람은 신분이 회복됨은 물론 노력영웅 칭호까지 받게 된다.

사건의 발단을 일으킨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후로 벌어질 사태를 "채문덕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4. 서관희와 숙청[편집]


1997년 초에 사회안전성 본부에 중앙상무조가 설치되고 채문덕이 책임자로 오른다. '전국 모든 도, 시, 군 안전부에 심화조를 설치하고 간부들의 경력을 검증하라'는 지시가 김정일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그리고 그 첫 희생자는 바로 당시 중앙당의 농업 담당 비서였던 서관희(문화어식인 "서관"로도 알려짐)라는 인물이었다.

서관희는 이 당시 김정일이 비료를 사오라고 내린 300만 달러를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교화 생활 중이었는데, 심화조는 서관희를 다시 불러내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의 사회안전성 예심국 구류장 안에서 모진 고문을 가한다.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한 서관희는 '자신이 서북청년단 잔당이고, 북한 사회를 붕괴시키기 위해 비료값을 횡령했다'는 거짓 자백을 한다. 여기에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이미 한참 전인 1984년에 타계한 김만금 역시 서북청년단 잔당이었으며, 전 평안남도 당위원장 피창린, 전 개성시 당 책임비서 김기선, 전 강원도 당 책임비서 림형구 역시 서북청년당 잔당이란 자백이 나왔으며, 채문덕을 몰락시켰던 두 인물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 문성술과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 서윤석 역시 서북청년단 잔당이었다는 진술이 나왔던 것이다.

이에 채문덕과 그를 배후조종한 장성택은 본격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작은 자신들을 끊임없이 견제하던 중앙당 책임비서 문성술을 겨냥한 것이었다. 중앙당의 책임 비서라면 서열로는 김정일 다음 가는 북한의 2인자이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 등장한 그들은 개의치 않고 문성술과 그 일가족을 전부 간첩으로 몰아 체포했다. 그때부터 숙청 열기에 불이 붙어 문성술 계파의 모든 인물들을 남조선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 닥치는 대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처형은 즉시 시작되어 위에 거론된 인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김만금마저 묘소에서 파내어져 시신의 머리에 총격이 가해졌다. 한 마디로 부관참시 당한 것이다. 참고로 김만금은 수십 년간 북한의 농업부문에 충실히 종사해 왔을 뿐더러 6.25 전쟁 중에는 평양이 함락 될 때 김일성 조상들의 묘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공적까지 있는 사람인데도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격이다.[7] 덤으로 김만금의 후손들까지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김일성 일가를 수호했다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뭉쳐 김일성 일가에 충성을 바치던 후손들에게 역적이라는 평가는 너무 가혹한 것이었기에 김만금의 후손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다 고문끝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1970년대의 김일성 후계 쟁탈전 중 김만금이 김정일의 정적이었던 김성애에게 도움을 준 일로 하여 김정일에게 원한을 산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림형규, 피창린, 김기선 등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백을 하고 총살형을 당했다. 반면 문성술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안전부 구류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심화조는 문성술에 설사약을 먹이고 3일 동안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엽기적인 방법으로 살해했으며, 서윤석은 살았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되었다. 처형 당한 간부들의 유족들은 사회안전성 교화국에서 관리하던 18호 관리소로 옮겨졌다.

서관희도 공개처형 당했는데, 그의 애인으로 알려졌던 생물학자 백설희에게도 그 불똥이 튀었는지 탈북자 신동혁개천 수용소에 수용되었을 때 그녀를 봤다고 첫 책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물론 신동혁은 그녀가 누군지는 몰랐고, 그냥 당시 수감자들 중 작업반장이었던 그의 말을 더럽게 안 듣는 떽떽거리기나 하는 노망 난 할망구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가 남한으로 와서야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고. 단, 신동혁개천 수용소 생활에 대한 증언은 상당 부분 과장되었던 것임이 후에 밝혀져서, 백설희에 대한 증언의 신빙성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다. 이미 2003년 시점에서 북한에선 백설희를 과거의 선구자로 선전하였고 2019년에는 80세 생일을 맞이해서 김정은이 생일상도 내려주었다.

심화조가 남조선과 내통한 증거로 사용한 근거들은 주로 한국전쟁 당시의 기록들이었고 이마저도 대부분 갖다붙이기 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6.25 때 살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용의자 선상에 올랐다는 의미이다. 특히 제일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은 황해도 사람들로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마저도 재수사를 받고 그 후손들은 간첩으로 몰렸다. 반혁명분자는 3족을 멸해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의 친척들과 후손들도 전부 지방으로 쫓겨가거나 처형당했다. 남조선 간첩의 친척들이라 하여 숙청된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15호 정치범 수용소(일명 요덕 수용소)가 확장되기도 했다.


5. 광란과 공포[편집]


이 사건에 대한 당시의 북한 풍경은 한 마디로 "광풍" 그 자체였다. 룡성구역에 거주하는 70세 이상의 노인들이 서북청년회 특공대원들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이 논리가 참 단순무식한 것이 6.25 때 북으로 왔으니 지금으로 치면 70대를 넘었을 것이라는 계산법이었다. 그들도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하고 그리고 총살당했다. 이렇게 자그마치 2년 동안 희생된 사람들의 수가 2만 명이었다. 어떻게나 많은 사람들이 잡혀들어왔던지 아예 관리소를 새로 지어야 했을 정도였다. 평양의 중앙기관 간부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2년 동안 찍 소리 못하고 살아야 했다. 참고로 김일성 일가를 착취했다고 알려진 최지주의 남은 일가에 대한 제거 역시 집행되어져 모든 일족이 총살형을 당했다.[8]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범행 대상이 서북청년회 외에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하고 거기에 공화국 영웅칭호와 훈장까지 받은 사람까지 포함되었다.[9]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심화조에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약 40%가 처형을 받기 전에 취조 중에 자살했다고 한다. 실제로 자살한 사람도 있었고 혹은 고문 중에 죽은 사람을 자살했다고 조작한 사례도 있었다. 워낙 많은 인원을 체포하다 보니 빠른시간 내에 자백을 받아야 했고, 이 때문에 심화조가 자행한 고문은 잔인함의 극치를 달렸다. 심지어 잡혀온 사람이 고문 도중에 사망해도 시체를 그냥 유기했다고 한다.

여러 고문들 중 한 예를 들면 피해자의 양팔과 양다리를 뒤로 묶어 천정에 매달아놓고 군화발로 늑골을 걷어차면 늑골이 부러지는데, 자백을 하지 않으면 부러진 부위를 계속 걷어찼다고 한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부러진 뼈가 내장에 박혀 피해자는 내출혈로 사망했으며 치료는 당연히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죽은 사람의 몫까지 자백을 시키면 되기 때문에 고문은 갈수록 잔인해졌고 사망자가 속출했다.

심화조에 체포된 사람들 중 최고 거물이었던 문성술은 고문 중에 사망했는데, 채문덕은 자백을 받기 전에 문성술이 이미 죽었다는 보고를 받자 사체에서 손가락을 잘라서 자백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지시했다. 그 정도로 심화조 사건은 무법의 극치를 달렸다. 심화조가 적발해낸 '간첩들'이 워낙 많아서 공개처형이 힘들어지자 심화조는 감옥에 총살대를 보내 감옥에서 곧장 사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이 모든 학살을 배후에서 진두지휘한 사람이 바로 장성택이었다.


6. 반전[편집]


김정일은 자신의 목표가 모두 이루어지자 채문덕과 집행간부들에게 영웅 칭호를 내렸고, 참모장 황진택에게는 김일성훈장까지 수여한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불순분자 색출을 하도록 격려했다. 이렇게 광적인 열풍이 계속되어가는 듯 하던 심화조 사건은 일부 평양 간부들과 주민들이 던진 "만일 김정일에게 충성을 바친 간부들과 주민들이 다 간첩이라면 그동안 북조선이 어떻게 유지가 됐을 수 있었겠는가?"란 질문에 의해 반전을 맞는다.[10] 이러한 의문이 제기되자 김정일은 그야말로 "토사구팽"을 시전하는데, "국가안전보위부보위사령부가 공동으로 사회안전성을 조사하라"란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에 국가안전보위부보위사령부가 김정일에게 사건을 제대로 보고하기 위해 내사를 하여 심화조 수사의 위법성을 철저히 조사하였다. 은폐가 일상화된 북한에서 심화조 사건 당시의 각종 가혹행위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시작된 심화조에 대한 조사는 결국 채문덕이 개인적인 원한을 이 사건에 이용했다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심화조의 궤멸이 시작되었다. 2000년 초에 시작된 심화조 조사를 통해 7월에 채문덕이 처형당했고[11], 9월에는 나머지 심화조 단원들이 전격 체포되었고, 사회안전성 참모장 황진택과 일부 간부에게는 최고 20년에 이르는 징역형이, 심화조 세포조직을 책임졌던 각 도, 시의 안전부장과 정치부장은 10년형, 심화조 사업에서 앞장서 극악무도한 고문 방법을 맡았던 예심원과 고문 전문가 수백 명에게는 무기징역형이 내려졌고, 전국의 안전원 6,000명도 중형 내지는 철직, 추방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김정일의 지시로 사회안전성이 인민보안성으로 개칭되는데, 이것도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게 개칭의 이유가 "인민들에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게 하기 위함"이란 것이다.

덧붙이자면 북한 고위층이 진작 이 상식적인 반문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지만 심화조 사건은 철저히 김정일의 권력 강화를 위한 친위 쿠데타였고 심화조 사건에 반문한다는 것은 김정일의 행보에 반발하는 것이니 즉각 숙청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김정일이 숙청을 행하는 기간에는 함구 되었다가, 숙청이 완료되었을 시 국면 전환 및 토사구팽을 위해 그 상식적인 여론을 이용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심화조 가담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던 장성택이었다.[12]

피해자 중 문성술은 장군님에게 보고하면 너희는 다 죽는다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었다는 것이 보고되어 김정일이 신념이 있는 인물이라고 칭찬했다는 탈북자 설이 도는데 이 말이 정말인지 김정일이 문성술만은 애국렬사릉에 묻어주었다. 해당 묘비에 문성술의 사망 날짜는 1999년 3월 10일로 되어 있다. 태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외교관이었던 문성술의 사위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장인어른이 복권되면서 석방되어 외무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얼마 되지 않아 은퇴했다고 한다.

7. 후유증[편집]


김정일은 자신이 직접 억울하게 당한 희생자의 누명을 벗겨준다는 명목으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있던 심화조 피해자들을 최고사령관 훈령으로 석방시켰다. 그러나 이미 커다란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조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된 것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피해자들이 정신질환을 앓거나 중병에 걸렸으며, 이미 피해자들이 살았던 예전의 거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지 오래되었기에 집단 거처와 쌀과 기름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피해자들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은 가족들과의 이별과 가정의 붕괴였다. 기혼자들의 경우 배우자들이 이혼하여 재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한 이혼이었다. 이들 역시 이혼을 거부했다면 수용소행을 피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수용소에서 석방되는 사람들을 나름 위해준답시고 떨어진 김정일의 명령. 바로 "원상복귀시키라우!"

원상복귀라는 말은 말 그대로 수용소에 끌려가기 이전의 상황으로 복귀를 말한다. 이를 위해 배우자는 현재 재혼한 사람과 강제로 헤어지고 수용소에서 돌아온 전 배우자랑 다시 결혼한 상태가 되어 한 집에 같이 살아야 했는데.. 명령 하나는 쉬울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지 않아서 수용소에서 돌아온 사람은 '자신은 힘들게 수용소에서 배우자를 그리며 살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배우자는 재혼해서 잘살고 있더라'라며 배우자에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반대로 난데없이 원래의 배우자랑 반강제로 헤어지고 재혼하다 다시 재혼한 사람과 헤어지고 원래 배우자를 맞이하게 된 사람은 원래 배우자가 살아 돌아와서 기쁘긴 한데 재혼했던 배우자와의 감정도 남아있는 상태라는 두 사람 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끝내는 이혼에 이르는 가정이 있었다 하니 그리스 희곡에나 나올 상황이 수천년 이후 북한에서 벌어진 셈.

피창린의 경우는 아들 3형제가 타살당하는 비극을 당해야 했다. 서윤석은 너무나도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나머지 봉화병원에 입원 중인데 간호원이 주사를 들고 다가서면 "선생님, 제발 주사는 놓지 말아 주십쇼, 다 실토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신이상이 되어버렸다.

한편, 김정일은 자신이 심화조의 전횡으로부터 인민들을 구원했다며 스스로를 인민의 구원자로 포장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이에 생존자들을 석방시킨 김정일을 칭송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만들어져 북한 각지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생존자들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 공권력의 잔인한 가혹행위가 알려지는 부작용도 가져왔다. 더 큰 문제는 측근들이 김정일을 불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심화조 사건은 그만큼 극도로 잔인하였고 북한 내부에 미친 충격도 컸다. 아무리 김정일에게 충성해도 언제 피의 숙청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북한 권력층은 분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주체사상으로 유지되던 김일성 체제가 분열되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김정일의 무자비한 숙청 때문이었다.

심화조 사건을 통해 김정일은 내부 단속에 성공하였으나 결국 더 큰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2000년부터 죽는 날까지 권력을 놓치면 죽게 될 것이라는 불안과 의심에 빠지게 된 김정일은 군부를 계속 우대하는 동시에 견제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은 자신의 통치이념으로 본격적인 선군정치를 내세우게 된다.

8. 언론에 돌아다니는 피해자 목록[편집]


피해자 목록으로 돌아다는 것들이 전현직을 구분하지 않아서 마치 현직에서 죽은 것처럼 쓰는데 심화조 사건 당시 강원도당 책임비서는 최원익이었고 개성시 책임비서는 김기선 퇴임 이후 림수만이 하다가 림수만이 병으로 급사하면서 김시학이 하던 상황이었다.

  • 김만금: 농업위원장. 이미 1984년에 사망했으나 서관히를 추천한 죄로 부관참시당했다는데,현재는 묘가 복원되었다.
  • 서관히: 정무원 부총리, 농업위원장, 비서국 농업비서. 1997년 공개총살설이 일본언론을 통해서 최초로 보도되었다. 황장엽의 말에 따르면 북한에 있을때 뜻이 많이 통하던 인물이고 고난의 행군상황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교환했었다고 한다.
  • 문성술: 조직지도부 부부장, 본부당 책임비서.
  • 서윤석: 당시 평안남도 책임비석 겸 인민위원장.
  • 림형구: 전 강원도당 책임비서, 인민봉사위원장. 이름조차 림형규라는 틀린 이름으로 많이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 피창린: 전 평안남도 당위원장, 애국렬사릉 안장. 농업과학연구원 부원장 직함으로 안장되었으며 공식 기일은 1998년 10월 21일.
  • 김기선: 전 개성시당 책임비서. 서관히와 같이 1997년에 공개총살된 것으로 보이는데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공식 기일은 1997년 8월 6일.

9. 평가[편집]


이 사건은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진행시킨 숙청이었지만, 너무나도 혹독하고 잔인하게 진행됐다. 아울러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패륜, 살인과 같은 어떤 범죄도 서슴치 않고 해낼 수 있는 악귀라는 점을 다시금 나타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측천무후 시절의 내준신이나, 남옥의 옥, 기축옥사, 대숙청 등의 북한판이라는 얘기.

아울러 장성택과 채문덕 역시 이 사건과 관련,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이들이 실질적인 집행자들이었던 데다 이들의 권력욕과 출세욕 역시 둘째 가라면 서운할 정도였다. 주성하 기자는 심화조 사건에 깊게 개입한 장성택이 훗날 처형된 것을 자업자득이라고 싸늘하게 촌평했다. 본인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본인도 같은 꼴이 되어도 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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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용악면 일대[2] 김정일은 이미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2년 원수 계급을 받으며 군 통수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김일성은 김정일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떠한 보고도 받을 수 없게 되어, 정치적으로 꼭두각시 수준으로 전락했고 사실상 '최고 고문'의 역할(황장엽의 주장)로 밀려나게 된다. 이때 김일성은 단지 명목상의 국가원수(= 얼굴마담)에 불과했고, 실권은 김정일이 휘둘렀기 때문에 김일성의 죽음과 권력 구도 변화와는 큰 관련이 없다.[3] 다만 공식적인 발표는 1980년이었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는 북한 정권과 언론은 김정일이 후계자라는 사실은 감추고 대신 "당중앙의 영도하에 어쩌구 저쩌구~"하는 식의 표현을 사용했고, 당시 한국에선 '당중앙'이 무엇을 뜻하는지 추측이 분분했다.[4] 강성산은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의 먼 친척이라는 설이 있다.[5] 장성우는 평양방어사령부 3군단장으로 영전해간다.[6] 북한은 주민통제를 위해 주민등록 업무를 인민보안부에서 운영한다. 남한으로 치면 거주 시군구 경찰서에서 맡는것.[7] 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80[8] 정말 착취를 했던 최지주인지 아니면 엉뚱한 사람을 잡았는지는 알수 없다.[9] 이 당시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이들까지도 부관참시하고 후손들을 총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버리는 짓거리를 저질렀다.[10] 사실 이건 대숙청이나 문혁 때도 나왔던 의문이었다. 레닌의 혁명동지들이 줄줄이 처형당하는 와중에 정치국에서는 가장 절망적이었던 혁명 때 같이 한 동지들이 30년대에 갑자기 트로츠키에게 왜 붙는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 사람들도 모두 같이 죽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이 대중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스탈린이 현지지도를 하는데 어느 노인이 목숨 걸고 당의 혁명전사들을 무리죽임하는데 그 혐의를 믿을 수 없다고 직언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현지지도 같이 간 측근들은 뒤집어졌지만 스탈린은 굳어진 얼굴로 저 말이 맞다고 하고 돌아갔고, 얼마 안가서 예조프가 숙청된다.[11]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한달 전인 6월 15일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김정일은 회담장에서는 실실 웃으면서 뒤로는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는 얘기.[12] 채문덕은 장성택의 잘못까지 뒤집어 썼고 총살로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