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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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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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쪽 5km 지점의 광우산 (广武山). 유방과 항우가 각각 양쪽 산에 성을 쌓고 대치하던 곳이다.
荥阳
영어 Xingyang
허난성 정저우시의 현급시. 인구는 약 70만명으로, 동쪽의 정저우와 시가지가 거의 연결되어 가고 있다. 2천년 이상 형양 지명을 유지했고, 성고 (成皐) 등으로도 불린 유서 깊은 도시이다. 형양 · 성고 전역와 광무 대치, 호뢰관 전투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동남쪽 외곽에는 정나라의 도시 유적이 있고, 북동쪽 와곽에는 광무산 및 형양고성이, 북서쪽 10km 지점에는 호뢰관 (사수관) 관광지가 있다.
상고대 시기 제수[1] 가 망령 (邙岭)에 이르러 범람해 이룬 습지를 형택 (滎澤)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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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공이 동생 공숙단 (公叔段)을 봉한 징청 (경성) 유적
고대부터 낙양의 옷깃이자 삼진 (三秦)의 목구멍으로 묘사되며 중시되었고, 주나라의 직속 제후국인 동괵 (東虢)이 있었으나 기원전 767년 정나라에게 멸망하였다. 이후 시기 동남쪽의 경성은 양책 및 신정과 함께 정나라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기원전 375년, 정나라를 멸망시킨 한나라가 (현재는 사라진) 형수 (滎水) 이북에 도시 (邑)를 세운 것에서 형양 (滎陽) 지명이 유래하였다. 이는 낙양, 한양, 양양, 심양 등의 작명법과 같다.[2]
진나라 시기 삼천군 (三川郡) 휘하 형양현 (滎陽縣)이 설치되었고, 초한쟁패기에 형양 · 성고 전역와 광무 대치가 일대에서 벌어졌다. 정확히는 현 시가지 북서쪽에 성고현 (成睾縣) 및 호뢰관, 동북쪽에 형양현 및 광무산 (廣武山)이 있었다. 한나라 시기에는 하남군 (河南郡)에 속했고, 서진 건국 직후인 266년에 형양군 (滎陽郡)이 설치되었다. 4-5세기 후조, 전연, 전진, 후진의 지배를 거쳐 북위 시기인 493년에 형양현은 기존의 형양고성 (荥阳故城, 현 정저우시 서북쪽 구싱진)에서 현 위치인 대책성 (大柵城)으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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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 북위 초까지 형양현이 있던 형양고성[3]
동위 건국 직후인 534년, 형양군은 성고군 (成皋郡)으로 개칭되었고 형양현은 서성고현 (西成皋縣)으로 바뀌었다. 다만 군의 치소는 유지되었고, 일대는 북예주 (北豫州)에 속했다. 한편, 현 시가지 동남쪽에 있던 경현 (京縣)은 북제 시기에 형양으로 흡수되었다. 북주 시기인 578년, 북예주는 형주 (滎州)로 개칭되었고, 형양현 지명도 회복되었다. 수나라 시기인 584년, 형양고성 북쪽에 광무현 (廣武縣)이 설치되었다. 그 무렵 성고군이 폐지되며 형주는 정주 (鄭州)로 개칭되었다. 성고현은 598년 사수현 (汜水縣)으로 개칭되었고, 621년 재차 성고현이 되었다. 광무현은 601년 형택현 (滎澤縣)으로 개칭되었고, 607년에는 형양군이 재설치되어 당나라 시기에도 유지되었다.
650년 기준 싱양시 일대에는 형양현, 형택현, 성고현이 있었다. 그러던 691년에 형양현의 일부가 분리되어 무태현 (武泰縣)이 신설되었고, 모두 낙주 (洛州)에 속했다. 얼마후 무태현이 형양현으로 통합되었고, 형양이 무태로 개칭되었다. 696년 무태가 형양, 이듬해 다시 무태, 705년에 재차 형양현으로 돌아오며 정주에 편성되었다. 688년에 광무현으로 개칭되었던 성고현 역시 같은해 사수현으로 재차 바뀌었다. 732년에는 시가지 동북쪽에 하음현 (河陰縣)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싱양 일대는 형양, 형택, 사수, 하음의 4개 현이 공존했다. 북송 시기인 1072년, 형양 및 형택현은 진으로 격하되어 현 정저우시 동부에 있던 관성현 (管城县)에 포함되었다. 1086년 형양, 형택현은 복구되어 경서북로 (京西北路) 정주에 편성되었다.
이후로 형양은 계속 정주에 속했다. 정주는 금나라 시기 남경로 (南京路), 원나라 시기 변량로 (汴梁路), 명나라 시기 개봉부 (开封府)에 속했다. 황하와 가까운 하음 및 사수현은 송대에 낙양 인근의 맹주에 편성되었다가 각각 원나라와 금나라 대에 정주로 편입되었다. 1640년에는 이자성, 장헌충 등 10여 농민군 지도자들이 형양에 집결하여 명나라 멸망을 위한 진격로 배분을 논의하는 '망명전략대회'를 열었다. 청나라 들어서도 명대 행정구역이 유지되다가, 1724년 정주가 직례주 (直隷州) 관할이 되었다. 1732년 정주는 재차 개봉부 하에 놓였다가 1894년에야 직례주로 돌아갔다. 한편 1765년 하음현은 형택현에 병합되었다.
신해혁명 후 1914년, 형양현은 개봉도 (开封道) 관할이 되었다. 동시에 재설치된 하음현[광우진] 은 1931년 형택현[구싱진] 과 합쳐져 광무현이 되었다. 1932년, 형양-광무-사수 일대는 하남성 제1 행정독찰구에 편성되었다. 1948년에는 사수현[쓰수이진] 과 광무현을 합친 청가오 (성고)현이 신설되었고, 이듬해 싱양 (형양)과 함께 정저우전구 관할에 놓였다. 그리고 1954년 청가오현이 싱양현에 통합되며 현재의 행정 구획이 이루어졌다. 1955년 싱양은 카이펑전구로 이관되었고, 1958년 정저우시 관할이 되었다가 1961년 카이펑 전구로 돌아왔다. 그러다 1971년 재차 정저우시 관할이 되었고, 1994년 싱양현은 현급시인 싱양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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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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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쪽 5km 지점의 광우산 (广武山). 유방과 항우가 각각 양쪽 산에 성을 쌓고 대치하던 곳이다.
1. 개요[편집]
荥阳
영어 Xingyang
허난성 정저우시의 현급시. 인구는 약 70만명으로, 동쪽의 정저우와 시가지가 거의 연결되어 가고 있다. 2천년 이상 형양 지명을 유지했고, 성고 (成皐) 등으로도 불린 유서 깊은 도시이다. 형양 · 성고 전역와 광무 대치, 호뢰관 전투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동남쪽 외곽에는 정나라의 도시 유적이 있고, 북동쪽 와곽에는 광무산 및 형양고성이, 북서쪽 10km 지점에는 호뢰관 (사수관) 관광지가 있다.
2. 역사[편집]
상고대 시기 제수[1] 가 망령 (邙岭)에 이르러 범람해 이룬 습지를 형택 (滎澤)이라 불렀다.
2.1. 고대[편집]
파일:20210509_The_Site_of_the_Ancient_City_of_Jing_01.jpg
정장공이 동생 공숙단 (公叔段)을 봉한 징청 (경성) 유적
고대부터 낙양의 옷깃이자 삼진 (三秦)의 목구멍으로 묘사되며 중시되었고, 주나라의 직속 제후국인 동괵 (東虢)이 있었으나 기원전 767년 정나라에게 멸망하였다. 이후 시기 동남쪽의 경성은 양책 및 신정과 함께 정나라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기원전 375년, 정나라를 멸망시킨 한나라가 (현재는 사라진) 형수 (滎水) 이북에 도시 (邑)를 세운 것에서 형양 (滎陽) 지명이 유래하였다. 이는 낙양, 한양, 양양, 심양 등의 작명법과 같다.[2]
진나라 시기 삼천군 (三川郡) 휘하 형양현 (滎陽縣)이 설치되었고, 초한쟁패기에 형양 · 성고 전역와 광무 대치가 일대에서 벌어졌다. 정확히는 현 시가지 북서쪽에 성고현 (成睾縣) 및 호뢰관, 동북쪽에 형양현 및 광무산 (廣武山)이 있었다. 한나라 시기에는 하남군 (河南郡)에 속했고, 서진 건국 직후인 266년에 형양군 (滎陽郡)이 설치되었다. 4-5세기 후조, 전연, 전진, 후진의 지배를 거쳐 북위 시기인 493년에 형양현은 기존의 형양고성 (荥阳故城, 현 정저우시 서북쪽 구싱진)에서 현 위치인 대책성 (大柵城)으로 이전되었다.
2.2. 중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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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 북위 초까지 형양현이 있던 형양고성[3]
동위 건국 직후인 534년, 형양군은 성고군 (成皋郡)으로 개칭되었고 형양현은 서성고현 (西成皋縣)으로 바뀌었다. 다만 군의 치소는 유지되었고, 일대는 북예주 (北豫州)에 속했다. 한편, 현 시가지 동남쪽에 있던 경현 (京縣)은 북제 시기에 형양으로 흡수되었다. 북주 시기인 578년, 북예주는 형주 (滎州)로 개칭되었고, 형양현 지명도 회복되었다. 수나라 시기인 584년, 형양고성 북쪽에 광무현 (廣武縣)이 설치되었다. 그 무렵 성고군이 폐지되며 형주는 정주 (鄭州)로 개칭되었다. 성고현은 598년 사수현 (汜水縣)으로 개칭되었고, 621년 재차 성고현이 되었다. 광무현은 601년 형택현 (滎澤縣)으로 개칭되었고, 607년에는 형양군이 재설치되어 당나라 시기에도 유지되었다.
650년 기준 싱양시 일대에는 형양현, 형택현, 성고현이 있었다. 그러던 691년에 형양현의 일부가 분리되어 무태현 (武泰縣)이 신설되었고, 모두 낙주 (洛州)에 속했다. 얼마후 무태현이 형양현으로 통합되었고, 형양이 무태로 개칭되었다. 696년 무태가 형양, 이듬해 다시 무태, 705년에 재차 형양현으로 돌아오며 정주에 편성되었다. 688년에 광무현으로 개칭되었던 성고현 역시 같은해 사수현으로 재차 바뀌었다. 732년에는 시가지 동북쪽에 하음현 (河陰縣)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싱양 일대는 형양, 형택, 사수, 하음의 4개 현이 공존했다. 북송 시기인 1072년, 형양 및 형택현은 진으로 격하되어 현 정저우시 동부에 있던 관성현 (管城县)에 포함되었다. 1086년 형양, 형택현은 복구되어 경서북로 (京西北路) 정주에 편성되었다.
이후로 형양은 계속 정주에 속했다. 정주는 금나라 시기 남경로 (南京路), 원나라 시기 변량로 (汴梁路), 명나라 시기 개봉부 (开封府)에 속했다. 황하와 가까운 하음 및 사수현은 송대에 낙양 인근의 맹주에 편성되었다가 각각 원나라와 금나라 대에 정주로 편입되었다. 1640년에는 이자성, 장헌충 등 10여 농민군 지도자들이 형양에 집결하여 명나라 멸망을 위한 진격로 배분을 논의하는 '망명전략대회'를 열었다. 청나라 들어서도 명대 행정구역이 유지되다가, 1724년 정주가 직례주 (直隷州) 관할이 되었다. 1732년 정주는 재차 개봉부 하에 놓였다가 1894년에야 직례주로 돌아갔다. 한편 1765년 하음현은 형택현에 병합되었다.
2.3. 근현대[편집]
신해혁명 후 1914년, 형양현은 개봉도 (开封道) 관할이 되었다. 동시에 재설치된 하음현[광우진] 은 1931년 형택현[구싱진] 과 합쳐져 광무현이 되었다. 1932년, 형양-광무-사수 일대는 하남성 제1 행정독찰구에 편성되었다. 1948년에는 사수현[쓰수이진] 과 광무현을 합친 청가오 (성고)현이 신설되었고, 이듬해 싱양 (형양)과 함께 정저우전구 관할에 놓였다. 그리고 1954년 청가오현이 싱양현에 통합되며 현재의 행정 구획이 이루어졌다. 1955년 싱양은 카이펑전구로 이관되었고, 1958년 정저우시 관할이 되었다가 1961년 카이펑 전구로 돌아왔다. 그러다 1971년 재차 정저우시 관할이 되었고, 1994년 싱양현은 현급시인 싱양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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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하가 북쪽으로 흐를 때에 오늘날의 황하 하도를 따라 흘렀던 하천[2] 모두 강북에 있다. 다만 형수 (싱수이) 강은 19세기 무렵에 제수 (지수이)와 함께 사라졌다[3] 이후 광무-형택현이 들어선다[광우진] [구싱진] [쓰수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