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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睢县
영어 Sui County
허난성 상추시의 현. 카이펑 ~ 상추시 사이의 평원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90만으로, 현 치고 많은 편이다. 지명은 전국시대 위나라가 세운, 현 카이펑 ~ 쑤첸시를 잇는 운하를 지칭하던 수수 (睢水)에서 유래되었다. 다만 현재는 쑤수이가 근처에 흐르지 않고[1] , 화이허의 지류인 후지강이 시가지 서쪽에 흐른다. 옛 지명으로 양읍 (襄邑), 수주 (睢州) 등이 있다.
출신 인물로 [[
신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춘추시대에는 송나라 및 진나라 (陳)에 속했고, 전국시대에는 위나라에 속했다. 진나라 시기 탕군 (碭郡) 산하 양읍 (襄邑)이 설치되었다. 본래 현 시가지 서남쪽 10km 지점의 쾅청향 (匡城乡)에 현을 두었으나, 곧 옛 송양공의 무덤인 양릉 (襄陵) 일대로 이전하였다.
전한 시기에는 양읍현 (襄邑縣)이 설치되어 우선 양국 (梁國)에 속했다가 기원전 122년 진류군 (陳留郡)으로 이관되었다. 신나라 시기 양평현 (襄平縣)으로 개칭되었다가 후한 성립 후 기존으로 환원되었다. 189년, 조조가 진류에서 반동탁 기의군을 모집할 때에 양읍현은 기오현과 함께 주요 모병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193년, 조조의 서주 원정을 틈타 원술이 견성 방면으로 북상했다가 봉구에서 패배한 후 양읍으로 도주하였다.[2]
조조의 집권 후, 그의 아들 조준 (曹峻)이 217년 양읍후 (襄邑侯)로 봉해졌다. 조위 건국 후, 조주는 221년 양읍공을 거쳐 222년 진류왕에 봉해졌다. 따라서 진류군은 진류국 (陳留國)이 되었고, 224년 그가 양읍왕으로 변경되어 다시 진류군이 되었다가 232년 진류왕으로 복귀하며 진류국으로 이어졌다. 265년, 서진 성립 후에는 폐위된 조환이 진류왕으로 봉해졌으나 업성에 거주했다.
영가의 난 후 진류국은 다시 진류군이 되었고, 후조 시기인 335년에 건창군 (建昌郡)으로 개칭하였다. 351년 동진이 수복한 후 진류군으로 환원시켰고, 358년 상실했다. 416년 동진이 재수복한 후 남쪽에 교치시킨 진류군[3] 과 대비하여 북진류군 (北陳留郡)이라 명명했다가, 420년 둘을 합쳐 진류군으로 환원시켰다. 422년, 북위가 진류군 대부분을 점령한 후 유송은 남은 양읍현 등을 초군 (譙郡)으로 이관시켰으나 467년 그마저 북위령이 되어 진류군으로 환원되었다.
494년 진류군이 폐지되었고, 양읍현은 동군 (東郡)으로 이관되었다가 528년에 신설된 양하군 (陽夏郡)에 귀속되었다. 534년 동위 건국 직후, 양하군은 진류군과 함께 양주 (梁州)에 소속되었다. 북주 시기인 578년, 양주는 변주 (汴州)로 개칭되었고 수나라 시기인 583년, 양하군이 폐지되어 변주에 직속되었다. 596년 변주의 양읍, 옹구현이 기주 (杞州)로 분리되었다. 607년, 기주가 폐지되어 일대는 송주 (宋州) 산하 양군 (梁郡)으로 이관되었다.
당나라 건국 직후인 619년, 기주가 재설치되어 양읍현도 그에 속했다가 627년 (혹은 635년) 기주가 폐지되어 송주로 돌아갔다. 742년 송주는 수양군 (睢陽郡)으로 개칭되었고, 756년 안록산이 일대를 점령한 후 양읍 및 옹구현에 기주를 재설치했으나 이듬해 당군이 수복한 후 기존으로 환원되었다. 758년, 수양군은 송주로 바뀌었다. 한편 수대에 통제거가 개통한 이후 수수 (睢水)의 북부는 점점 메워졌고, 한때 남천한 황하에 합류했다가 명대 이후로는 쑤저우 (숙주) ~ 훙쩌호 일대만 남아 쑤이허 (濉河)라 불리고 있다.
후량 건국 직후인 907년, 양읍현은 송주에서 분리되어 경기로 (京畿路) 산하 개봉부(開封府)에 직속되었다. 그러다 북송 시기인 1105년, 양읍현을 중심으로 공주 (拱州)가 설치되어 경기로에 소속되었다. 동시에 공주에는 보경군절도사 (保慶軍節度使)가 배치되었고, 5개 현을 통솔했다.[4] 공주는 1110년 폐지되어 개봉부로 병합되었다가, 1114년 공주가 재설치되었고 1120년 경동서로 (京東西路)로 이관되었다. 1126년, 일대를 정복한 금나라는 공주를 수주 (睢州)로 개칭하고 남경로 (南京路)에 소속시켰다.
원나라 시기 수주는 변량로 (汴梁路)에, 명나라 시기 개봉부에 소속되었고 양읍현을 흡수하였다. 1377년, 수주는 수현 (睢縣)으로 격하되었다가 1380년 수주로 회복되며 직례주가 되었다. 1389년 수현에 수양위 (睢陽衛)가 배치되었고, 1545년 이래로 수주는 송주를 계승한 귀덕부 (歸德府)에 귀속되었다. 1642년,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개봉성을 포위할 당시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려 홍수가 났다. 이때 황하의 충적지 남쪽에 있어 비교적 저지대이던 기존의 수주성이 수몰되었고, 현재의 펑황호로 남아있다. 청나라 시기 들어 펑황호 남쪽에 새 수주성이 세워진 것이 현 구도심 일대이다.
신해혁명 후 1913년, 수주는 수현이 되었고 1932년 하남성 제2행정독찰구에 편성되었다가 1948년 제10행정독찰구로 이관되었다. 1948년, 쑤이현에 인민해방군이 진주했고 상추전구에 편성되었다. 1958년, 쑤이현은 카이펑전구로 이관되었다가 1961년 상추전구로 돌아왔다. 상추전구는 1969년 상추지구를 거쳐 1997년 상추시가 되었다.
1. 개요[편집]
睢县
영어 Sui County
허난성 상추시의 현. 카이펑 ~ 상추시 사이의 평원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90만으로, 현 치고 많은 편이다. 지명은 전국시대 위나라가 세운, 현 카이펑 ~ 쑤첸시를 잇는 운하를 지칭하던 수수 (睢水)에서 유래되었다. 다만 현재는 쑤수이가 근처에 흐르지 않고[1] , 화이허의 지류인 후지강이 시가지 서쪽에 흐른다. 옛 지명으로 양읍 (襄邑), 수주 (睢州) 등이 있다.
출신 인물로 [[
등이 있다.
2. 역사[편집]
신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춘추시대에는 송나라 및 진나라 (陳)에 속했고, 전국시대에는 위나라에 속했다. 진나라 시기 탕군 (碭郡) 산하 양읍 (襄邑)이 설치되었다. 본래 현 시가지 서남쪽 10km 지점의 쾅청향 (匡城乡)에 현을 두었으나, 곧 옛 송양공의 무덤인 양릉 (襄陵) 일대로 이전하였다.
2.1. 고대[편집]
전한 시기에는 양읍현 (襄邑縣)이 설치되어 우선 양국 (梁國)에 속했다가 기원전 122년 진류군 (陳留郡)으로 이관되었다. 신나라 시기 양평현 (襄平縣)으로 개칭되었다가 후한 성립 후 기존으로 환원되었다. 189년, 조조가 진류에서 반동탁 기의군을 모집할 때에 양읍현은 기오현과 함께 주요 모병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193년, 조조의 서주 원정을 틈타 원술이 견성 방면으로 북상했다가 봉구에서 패배한 후 양읍으로 도주하였다.[2]
조조의 집권 후, 그의 아들 조준 (曹峻)이 217년 양읍후 (襄邑侯)로 봉해졌다. 조위 건국 후, 조주는 221년 양읍공을 거쳐 222년 진류왕에 봉해졌다. 따라서 진류군은 진류국 (陳留國)이 되었고, 224년 그가 양읍왕으로 변경되어 다시 진류군이 되었다가 232년 진류왕으로 복귀하며 진류국으로 이어졌다. 265년, 서진 성립 후에는 폐위된 조환이 진류왕으로 봉해졌으나 업성에 거주했다.
2.2. 중세[편집]
영가의 난 후 진류국은 다시 진류군이 되었고, 후조 시기인 335년에 건창군 (建昌郡)으로 개칭하였다. 351년 동진이 수복한 후 진류군으로 환원시켰고, 358년 상실했다. 416년 동진이 재수복한 후 남쪽에 교치시킨 진류군[3] 과 대비하여 북진류군 (北陳留郡)이라 명명했다가, 420년 둘을 합쳐 진류군으로 환원시켰다. 422년, 북위가 진류군 대부분을 점령한 후 유송은 남은 양읍현 등을 초군 (譙郡)으로 이관시켰으나 467년 그마저 북위령이 되어 진류군으로 환원되었다.
494년 진류군이 폐지되었고, 양읍현은 동군 (東郡)으로 이관되었다가 528년에 신설된 양하군 (陽夏郡)에 귀속되었다. 534년 동위 건국 직후, 양하군은 진류군과 함께 양주 (梁州)에 소속되었다. 북주 시기인 578년, 양주는 변주 (汴州)로 개칭되었고 수나라 시기인 583년, 양하군이 폐지되어 변주에 직속되었다. 596년 변주의 양읍, 옹구현이 기주 (杞州)로 분리되었다. 607년, 기주가 폐지되어 일대는 송주 (宋州) 산하 양군 (梁郡)으로 이관되었다.
당나라 건국 직후인 619년, 기주가 재설치되어 양읍현도 그에 속했다가 627년 (혹은 635년) 기주가 폐지되어 송주로 돌아갔다. 742년 송주는 수양군 (睢陽郡)으로 개칭되었고, 756년 안록산이 일대를 점령한 후 양읍 및 옹구현에 기주를 재설치했으나 이듬해 당군이 수복한 후 기존으로 환원되었다. 758년, 수양군은 송주로 바뀌었다. 한편 수대에 통제거가 개통한 이후 수수 (睢水)의 북부는 점점 메워졌고, 한때 남천한 황하에 합류했다가 명대 이후로는 쑤저우 (숙주) ~ 훙쩌호 일대만 남아 쑤이허 (濉河)라 불리고 있다.
2.3. 중근세[편집]
후량 건국 직후인 907년, 양읍현은 송주에서 분리되어 경기로 (京畿路) 산하 개봉부(開封府)에 직속되었다. 그러다 북송 시기인 1105년, 양읍현을 중심으로 공주 (拱州)가 설치되어 경기로에 소속되었다. 동시에 공주에는 보경군절도사 (保慶軍節度使)가 배치되었고, 5개 현을 통솔했다.[4] 공주는 1110년 폐지되어 개봉부로 병합되었다가, 1114년 공주가 재설치되었고 1120년 경동서로 (京東西路)로 이관되었다. 1126년, 일대를 정복한 금나라는 공주를 수주 (睢州)로 개칭하고 남경로 (南京路)에 소속시켰다.
원나라 시기 수주는 변량로 (汴梁路)에, 명나라 시기 개봉부에 소속되었고 양읍현을 흡수하였다. 1377년, 수주는 수현 (睢縣)으로 격하되었다가 1380년 수주로 회복되며 직례주가 되었다. 1389년 수현에 수양위 (睢陽衛)가 배치되었고, 1545년 이래로 수주는 송주를 계승한 귀덕부 (歸德府)에 귀속되었다. 1642년,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개봉성을 포위할 당시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려 홍수가 났다. 이때 황하의 충적지 남쪽에 있어 비교적 저지대이던 기존의 수주성이 수몰되었고, 현재의 펑황호로 남아있다. 청나라 시기 들어 펑황호 남쪽에 새 수주성이 세워진 것이 현 구도심 일대이다.
2.4. 근현대[편집]
신해혁명 후 1913년, 수주는 수현이 되었고 1932년 하남성 제2행정독찰구에 편성되었다가 1948년 제10행정독찰구로 이관되었다. 1948년, 쑤이현에 인민해방군이 진주했고 상추전구에 편성되었다. 1958년, 쑤이현은 카이펑전구로 이관되었다가 1961년 상추전구로 돌아왔다. 상추전구는 1969년 상추지구를 거쳐 1997년 상추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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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水)의 북부는 점점 메워졌고, 원대 이후로는 쑤저우 (숙주) ~ 훙쩌호 일대만 남아 쑤이허 (濉河)라 불리고 있다[2] 이후 조조가 추격해오자 수춘으로 향했다[3] 현 보저우 ~ 저우커우 일대에 진류군이 교치됨[4] 고성현(考城縣), 태강현(太康縣), 응천부의 영릉현(寧陵縣), 초구현(楚丘縣), 자성현(柘城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