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시(장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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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쑤성 남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8,488㎢, 인구는 약 1,300만 명으로 장쑤성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장쑤성의 '쑤'가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역사적으로 장쑤성과 강남지역을 통틀어 중요한 역사도시였다.[3]
과거 춘추전국시대 당시 오나라의 수도였다. 그 이후에도 지역 행정 중심지로 수나라 때 대운하가 완공된 후 강남에서 생산된 쌀의 수송 거점으로 성장했다. 현대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공업, 관광도시로 성장했다.
5개의 구와 4개의 현급시로 구성되어있다.
쑤저우역
시외교통으로는 난징과 상하이를 잇는 후닝고속선 상에 있는 쑤저우역을 이용하면 상하이, 난징등 주요 대도시에 30분~1시간 내외에 도착할 수 있다. 또한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는 징후고속철도상에 있는 쑤저우베이역이 있다.
철도교통 외에도 버스교통도 발달해있다. 쑤저우항은 중국 내에서 유명한 항구이다.
버스는 여름, 겨울철에는 2 또는 3위안이고 냉난방이 없는 계절에는 주로 1위안이라 중국의 여느 도시와 비슷하게 매우 저렴하다. 쑤저우 궤도교통은 7개의 노선이 있으며, 그중 쑤저우 궤도교통 11호선은 쿤산시에서 상하이 지하철 11호선과 환승이 가능하다.
은근 대도시임에도 공항이 없어 공항 떡밥이 자주 도는 동네이기도 한다. 하지만 주변에 큰 공항이 3개가 존재하는데다 교통도 나쁘지 않아 공항이 지어질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현재까지는 항공을 이용하려면 인근 대도시인 상하이 또는 가까운 공업도시인 우시로 가야한다. 대부분 더 규모가 큰 상하이로 간다.
아열대기후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는 덥고 습하며 겨울에는 춥다. 화베이 평원의 동서쪽에 위치하여 작은 구릉을 끼고 있는 평지도시이다. 도시의 북쪽으로는 양쯔강이 흐르고 있으며, 도시 주변에는 타이호, 양청호, 진지호 등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호수들을 끼고 있다. 인근 도시로는 동쪽으로는 상하이, 북서쪽으론 난징, 전장, 창저우, 우시 등이 있으며, 남쪽에는 후저우, 항저우 등이 있다.
상하이에서 고속도로로 30분 ~1시간 거리에 위치해 관문 역할을 하고 있어 경제력이 장쑤성의 성도인 난징을 능가하는 강소성 제 1의 도시이다. 관광산업과 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전기자전거 회사인 바팡의 본사가 있다.
미국의 창고형 대형 할인마트 코스트코(开市客)의 점포가 후추구에 중국본토에서 두번째로 세워졌다.
한국에 다니는 중국산 전기버스 모델 중 하나인 하이퍼스 시리즈의 버스 제조회사인 하이거의 본사가 있다.
삼성 그룹의 대규모 공장이 있어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삼성반도체 패키징, 가전공장이 있다.(LGD 공장은 매각)
소주에 속하는 현급시 쿤샨은 중국내 현급시 중 수년간 GDP 1위를 했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다.
소주는 과거 비단산업으로 유명한 곳으로 중국 3대 비단 (촉금, 운금, 송금) 중 하나인 송금의 생산지였다
상고시대[4] 에는 월족의 일파인 백월족(白越族)의 땅이었다.[5] 상나라 말기에는 희성 주씨의 수령인 고공단보(古公檀父)의 아들인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현명한 계력(季歷)에게 양보하고자 섬서성 기산의 주원을 떠나 남쪽으로 달아나 장강 이남의 고소(姑蘇)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구오(勾吳) 혹은 공오(工吳)라고 칭해지는 오(吳)나라다. 세월이 흘러 주간왕 15년(기원전 585년),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오나라 군주인 수몽(壽夢)이 칭왕을 하고 패권을 다투던 초(楚)나라를 견제하려는 진(晉)나라의 지원을 받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수도로서 기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부차가 다스리던 그 오나라다.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개발이 더디고 생산력이 낮은 곳이었다. 어쨌든 주영왕 12년(기원전 560년), 수몽의 아들 제번 대에 이르러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주경왕 6년(기원전 514년), 합려가 즉위하면서 고소성을 새롭게 고쳐 쌓았다. 주원왕 3년(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그곳을 차지해 월나라의 영역에 들었다. 주현왕 35년(기원전 334년), 초위왕(楚威王)이 월나라를 멸하고 옛 오나라와 월나라 땅을 모두 초나라가 차지해 초나라가 망할 때까지 초나라의 영역이 되었다. 초고열왕 원년(기원전 262년), 초나라의 재상인 춘신군 황헐(黃歇)의 봉토가 되었다. 진시황 24년(기원전 223년), 진(秦)나라의 노장 왕전(王翦)이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창평군과 항연[6] 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 패해 모두 죽었다.
통일 후 진시황이 초군(楚郡)을 설치해 군현제가 실시되었다.[7] 그리고 초군은 훗날 구강군, 장군(鄣郡), 회계군으로 분할되었다.[8] 진시황 21년(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천하통일[9] 을 이룩해 전국을 36개 군과 그 하위의 현으로 분할해 다스렸다. 그리고 고소 땅은 회계군에 속하게 되었고, 훗날 고소 땅에는 오현(吳縣)이 설치되었다.[10]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항연의 아들과 손자인 항량과 항우 숙질은 이곳에서 진(秦)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거병했다. 진나라를 멸한 뒤 초한쟁패기에 항우의 봉토인 서초에 속했다.한고조 5년(기원전 209년), 한고조 유방이 초나라를 멸하고 장수 관영(灌嬰)을 파견해 그곳을 차지했다. 그 뒤 한 고조가 한신(韓信)을 초왕에 봉했다가 회음후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사촌형 유가를 형왕에 봉했다.
기원전 196년 반란을 일으킨 회남왕 경포가 유가를 죽이고 고소를 차지했으나 곧 진압 되었다. 한고조 11년(기원전 196년), 옛 서초 땅을 아들인 유비(劉濞)를 보내 오왕에 봉해 고소를 도읍으로 삼게 했다. 한문제 대에 장군이 회계 군에 편입되고 장군으로 옮겨졌다. 7년 뒤 오현이 되었다. 한경제 대에 유비가 반란을 일으키고 죽자[11] 오나라가 폐지되고 다시 회계군이 되었다. 한무제 대에는 양주를 설치해 양주 회계군 오현이 되었다. 서기 9년, 왕망이 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태덕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서기 25년, 후한의 시조 광무제가 태덕현에서 오현으로 복구시켰다. 한순제 대에 회계군에서 오군 소속으로 바뀌었다.[12] 한헌제 흥평 2년(195년), 손책(孫策)이 엄백호(嚴白虎)를 쳐서 쫓아낸 뒤 주치(朱治)에게 오군을 다스리게 해 손책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후한이 망하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손권이 오나라를 세우면서 강남이 개발되었고 쑤저우의 경제도 발전했다. 특히 양쯔강 일대의 비옥한 환경, 동서남북 모두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벼농사에 유리했다. 손권의 손자인 손호 대에는 오흥군 소속이 되었다.
서진(西晋)의 황제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한 뒤 단양군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해우현을 설치했다. 동진 대에 사마연이 사마악을 오왕으로 삼아 그 봉지가 되었고, 이후 낭야왕으로 옮겨져 다시 동진의 영토가 되었다. 송나라 때에는 다시 오군이 되었고, 교주(僑州)[13]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교주에서 남서주 소속으로 옮겨졌고, 다시 양주 소속이 되었다. 양나라 대에는 신의군이 설치되고 거기에 신현을 두었다. 훗날 오주가 되었다. 진(陳)나라 대에는 오주 오군 오현이 되었다.
쑤저우의 대표적인 정원인 졸정원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한 뒤 고소의 이름을 따 소주가 되었다가 오주를 거쳐, 다시 오군이 되었다. 당나라 대에 이름이 소주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강남도에 속하게 되었고 훗날 강남동도 소속이 되었다. 특히 송나라가 들어설 무렵이면 이미 경제력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이 도시에도 규모가 큰 신라방이 있었을 정도로 강남지방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오대십국시대 때에는 전류가 오월왕이 되면서 오월의 영토가 된다.
북송 대에 강남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원나라 대에는 강회 행성을 두어 다루가치가 다스렸다. 원말명초 시기 장사성이 이곳에 거점을 세우고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켰으나 주원장에 의해 정벌되었다. 주원장은 이곳의 잠재력을 두려워해서 강남성 소속으로 두어 막대한 세금을 매기고 부유한 가문을 난징이나 다른 도시로 이주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쑤저우를 탄압했다. 그러나 이미 발달할 대로 발달한 도시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고, 쑤저우의 명성은 명대에도 이어졌다.
당시의 경제력을 보면 다른 도시와 단위가 다른 수준의 압도적인 경제력을 보여준다. 명나라 때 수도였던 베이징이나 난징의 인구가 100만에서 120만 선이었다면 쑤저우의 인구는 200만에서 240만에 달했다. 청나라가 건국된 이래 강소성 소속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군대가 이곳을 점령했고, 나중에 진압되는 과정에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한산사와 더불어 소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던 운암사가 파괴되었고, 호구탑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사진 출처 : http://irene-travelogue.com/tag/suzhou-street/
도시 내부를 가로지르는 운하 때문에 동양의 베네치아라고도 많이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와 다른 동양적인 풍경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며, 천국에 빗댄 속담까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쑤저우시 일대에서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현대건축물이 여러 채 세워지고, 많은 운하가 메워지면서 안타깝게도 옛 정취가 많이 사라진 편이다. 론리플래닛에서도 이에 대해 엄청난 혹평을 남겼다. 그나마 쑤저우 근교에는 좀 더 원형을 보존한 퉁리, 저우장 등 운하도시들이 남아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근교로 찾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옛 관료·지주들이 꾸민 정원들도 많이 있어 정원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대표적인 정원들은 쑤저우 4대 정원(창랑정, 유원, 사자림, 졸정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그 외에도 오래된 도시답게 4대 정원과 같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산사 등 명승고적들도 많다.
호구산 검지의 왕희지 필적
오나라 왕 합려가 천하를 얻기 위해 만든 간장·막야 설화와 관련이 있는 호구산의 검지 (劍池)도 유명하다. 월나라 사람에게서 명검을 얻은 합려는 그 예리함을 시험하기 위해 호구산의 큰 바위를 내려쳤고, 바위가 두동강이 나자 흡족해 했다는 설화가 있다. 이는 현재 시검석 (試劍石)인데, 실제로는 풍화 작용에 의해 갈라진 것이다. 후일 왕희지가 검지 글자를 새긴 명문이 남아있다.
한편 합려가 죽은 후에 그의 능이 호구산에 조성되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능의 위치를 아는 이들이 후일 도굴할 것을 우려해 공사에 참여한 장인들을 연회에 초대한 후 취한 틈에 죽이니, 그들이 모여 앉았던 바위에 피가 스며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를 천인석 (千人石)이라 부르는데, 실제로는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유문암이기에 붉은 것이다.
6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단량전 (斷梁殿)
호구산의 2번째 산문인 단량전 역시 오래된 유적으로, 원대의 건물이다. 두 대들보를 이어 만들어 하중을 분산시킨 것이 특징이다. 내부에는 호구산의 역사와 호구탑의 축조를 설명하는 4개의 비석이 있다. 호구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다.
윈옌스 후치우타 (운태사 호구탑)
도심 중북부에 위치한 후치우 탑(虎丘塔, 호구탑)은 '중국의 피사의 사탑이라 불린다. 실제로 색깔도 비슷하고, 연대는 훨씬 더 오래되었다. 오대십국 시대 오월 정권 하에서 건설이 시작되어 약 반세기 후인 961년 완공되었다. 송대의 시인 소동파가 소주에 와서 호구탑을 보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라는 시를 남겨 유명해졌다. 기반이 돌 반, 흙 반으로 지어졌기에 3.5도 기울게 되었으며, 명청대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친 끝에 1957년 시멘트를 주입하여 안정시켰다. 높이는 47m, 무게는 7,000톤에 달한다. 본래 꼭대기에 올라가 전망을 볼 수 있었으나, 안전과 보존 문제로 2010년부로 금지되었다.
오래된 유적말고도 현대적인 건물도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쑤저우 동쪽에 위치한 진지호(金鸡湖) 호반에 조성된 공업원구(工业园区)라는 신도시에 밀집해있는데, 이 중 높이 302m, 66층 규모의 마천루인 동양의 문(Gate of the Orient)이 특이한못생긴 모양으로 유명하다.[14]
동양의 문 외에도 공업원구에는 수많은 마천루가 건설중 또는 계획중인데 대표적으로 중난 센터(Zhongnan Center)가 있다. 중난 센터는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한 초고층 빌딩이며 높이 729m, 138층이다. 완공되면 중국에서 제일 높고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마천루가 될 예정이다.[15]
진지호(金鸡湖) 주변으로 공원 및 상권이 매우 아름답게 잘 조성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산책을 즐기거나 외식을 한다.
과거 춘추전국시대때 부터 명나라때 까지 긴 기간 수백개가 넘어가는 정원들이 만들어 졌으며 그 중 몇몇 유서깊고 아름다운 정원들은 역사성과 미적 기준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남북조 시대에 창건한 한산사. 사진 출처: http://www.ivsky.com/tupian/hanshansi_t13808/
쑤저우에서 제일 오래된 정원이며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0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유원 사진. 사진 출처: http://www.ivsky.com/tupian/suzhou_liuyuan_v12199/pic_314870.html
쑤저우 고성 서북쪽에 위치해있으며, 쑤저우를 대표하는 정원이다. 명대에 조성되었으며 1997년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원나라때 천여법사의 제자들이 만들었으며, 2000년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졸정원 사진. 사진 출처: http://www.ivsky.com/tupian/suzhou_zhuozhengyuan_v12200/pic_314936.html
51,950 m²의 면적으로 쑤저우에서는 가장 큰 정원이다. 강남지방에서 제일 아름다운 정원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동부전구공군 26특수사 93연대가 쑤저우에 주둔한다
1. 개요[편집]
"上有天堂 下有苏杭" [2]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
중국 속담
중국 장쑤성 남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8,488㎢, 인구는 약 1,300만 명으로 장쑤성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장쑤성의 '쑤'가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역사적으로 장쑤성과 강남지역을 통틀어 중요한 역사도시였다.[3]
과거 춘추전국시대 당시 오나라의 수도였다. 그 이후에도 지역 행정 중심지로 수나라 때 대운하가 완공된 후 강남에서 생산된 쌀의 수송 거점으로 성장했다. 현대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공업, 관광도시로 성장했다.
2. 행정구역[편집]
5개의 구와 4개의 현급시로 구성되어있다.
3. 교통[편집]
쑤저우역
시외교통으로는 난징과 상하이를 잇는 후닝고속선 상에 있는 쑤저우역을 이용하면 상하이, 난징등 주요 대도시에 30분~1시간 내외에 도착할 수 있다. 또한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는 징후고속철도상에 있는 쑤저우베이역이 있다.
철도교통 외에도 버스교통도 발달해있다. 쑤저우항은 중국 내에서 유명한 항구이다.
버스는 여름, 겨울철에는 2 또는 3위안이고 냉난방이 없는 계절에는 주로 1위안이라 중국의 여느 도시와 비슷하게 매우 저렴하다. 쑤저우 궤도교통은 7개의 노선이 있으며, 그중 쑤저우 궤도교통 11호선은 쿤산시에서 상하이 지하철 11호선과 환승이 가능하다.
은근 대도시임에도 공항이 없어 공항 떡밥이 자주 도는 동네이기도 한다. 하지만 주변에 큰 공항이 3개가 존재하는데다 교통도 나쁘지 않아 공항이 지어질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현재까지는 항공을 이용하려면 인근 대도시인 상하이 또는 가까운 공업도시인 우시로 가야한다. 대부분 더 규모가 큰 상하이로 간다.
4. 지리[편집]
아열대기후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는 덥고 습하며 겨울에는 춥다. 화베이 평원의 동서쪽에 위치하여 작은 구릉을 끼고 있는 평지도시이다. 도시의 북쪽으로는 양쯔강이 흐르고 있으며, 도시 주변에는 타이호, 양청호, 진지호 등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호수들을 끼고 있다. 인근 도시로는 동쪽으로는 상하이, 북서쪽으론 난징, 전장, 창저우, 우시 등이 있으며, 남쪽에는 후저우, 항저우 등이 있다.
5. 경제 [편집]
상하이에서 고속도로로 30분 ~1시간 거리에 위치해 관문 역할을 하고 있어 경제력이 장쑤성의 성도인 난징을 능가하는 강소성 제 1의 도시이다. 관광산업과 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전기자전거 회사인 바팡의 본사가 있다.
미국의 창고형 대형 할인마트 코스트코(开市客)의 점포가 후추구에 중국본토에서 두번째로 세워졌다.
한국에 다니는 중국산 전기버스 모델 중 하나인 하이퍼스 시리즈의 버스 제조회사인 하이거의 본사가 있다.
삼성 그룹의 대규모 공장이 있어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삼성반도체 패키징, 가전공장이 있다.(LGD 공장은 매각)
소주에 속하는 현급시 쿤샨은 중국내 현급시 중 수년간 GDP 1위를 했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다.
소주는 과거 비단산업으로 유명한 곳으로 중국 3대 비단 (촉금, 운금, 송금) 중 하나인 송금의 생산지였다
6. 역사 [편집]
상고시대[4] 에는 월족의 일파인 백월족(白越族)의 땅이었다.[5] 상나라 말기에는 희성 주씨의 수령인 고공단보(古公檀父)의 아들인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현명한 계력(季歷)에게 양보하고자 섬서성 기산의 주원을 떠나 남쪽으로 달아나 장강 이남의 고소(姑蘇)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구오(勾吳) 혹은 공오(工吳)라고 칭해지는 오(吳)나라다. 세월이 흘러 주간왕 15년(기원전 585년),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오나라 군주인 수몽(壽夢)이 칭왕을 하고 패권을 다투던 초(楚)나라를 견제하려는 진(晉)나라의 지원을 받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수도로서 기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부차가 다스리던 그 오나라다.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개발이 더디고 생산력이 낮은 곳이었다. 어쨌든 주영왕 12년(기원전 560년), 수몽의 아들 제번 대에 이르러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주경왕 6년(기원전 514년), 합려가 즉위하면서 고소성을 새롭게 고쳐 쌓았다. 주원왕 3년(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그곳을 차지해 월나라의 영역에 들었다. 주현왕 35년(기원전 334년), 초위왕(楚威王)이 월나라를 멸하고 옛 오나라와 월나라 땅을 모두 초나라가 차지해 초나라가 망할 때까지 초나라의 영역이 되었다. 초고열왕 원년(기원전 262년), 초나라의 재상인 춘신군 황헐(黃歇)의 봉토가 되었다. 진시황 24년(기원전 223년), 진(秦)나라의 노장 왕전(王翦)이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창평군과 항연[6] 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 패해 모두 죽었다.
통일 후 진시황이 초군(楚郡)을 설치해 군현제가 실시되었다.[7] 그리고 초군은 훗날 구강군, 장군(鄣郡), 회계군으로 분할되었다.[8] 진시황 21년(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천하통일[9] 을 이룩해 전국을 36개 군과 그 하위의 현으로 분할해 다스렸다. 그리고 고소 땅은 회계군에 속하게 되었고, 훗날 고소 땅에는 오현(吳縣)이 설치되었다.[10]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항연의 아들과 손자인 항량과 항우 숙질은 이곳에서 진(秦)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거병했다. 진나라를 멸한 뒤 초한쟁패기에 항우의 봉토인 서초에 속했다.한고조 5년(기원전 209년), 한고조 유방이 초나라를 멸하고 장수 관영(灌嬰)을 파견해 그곳을 차지했다. 그 뒤 한 고조가 한신(韓信)을 초왕에 봉했다가 회음후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사촌형 유가를 형왕에 봉했다.
기원전 196년 반란을 일으킨 회남왕 경포가 유가를 죽이고 고소를 차지했으나 곧 진압 되었다. 한고조 11년(기원전 196년), 옛 서초 땅을 아들인 유비(劉濞)를 보내 오왕에 봉해 고소를 도읍으로 삼게 했다. 한문제 대에 장군이 회계 군에 편입되고 장군으로 옮겨졌다. 7년 뒤 오현이 되었다. 한경제 대에 유비가 반란을 일으키고 죽자[11] 오나라가 폐지되고 다시 회계군이 되었다. 한무제 대에는 양주를 설치해 양주 회계군 오현이 되었다. 서기 9년, 왕망이 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태덕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서기 25년, 후한의 시조 광무제가 태덕현에서 오현으로 복구시켰다. 한순제 대에 회계군에서 오군 소속으로 바뀌었다.[12] 한헌제 흥평 2년(195년), 손책(孫策)이 엄백호(嚴白虎)를 쳐서 쫓아낸 뒤 주치(朱治)에게 오군을 다스리게 해 손책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후한이 망하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손권이 오나라를 세우면서 강남이 개발되었고 쑤저우의 경제도 발전했다. 특히 양쯔강 일대의 비옥한 환경, 동서남북 모두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벼농사에 유리했다. 손권의 손자인 손호 대에는 오흥군 소속이 되었다.
서진(西晋)의 황제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한 뒤 단양군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해우현을 설치했다. 동진 대에 사마연이 사마악을 오왕으로 삼아 그 봉지가 되었고, 이후 낭야왕으로 옮겨져 다시 동진의 영토가 되었다. 송나라 때에는 다시 오군이 되었고, 교주(僑州)[13]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교주에서 남서주 소속으로 옮겨졌고, 다시 양주 소속이 되었다. 양나라 대에는 신의군이 설치되고 거기에 신현을 두었다. 훗날 오주가 되었다. 진(陳)나라 대에는 오주 오군 오현이 되었다.
쑤저우의 대표적인 정원인 졸정원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한 뒤 고소의 이름을 따 소주가 되었다가 오주를 거쳐, 다시 오군이 되었다. 당나라 대에 이름이 소주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강남도에 속하게 되었고 훗날 강남동도 소속이 되었다. 특히 송나라가 들어설 무렵이면 이미 경제력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이 도시에도 규모가 큰 신라방이 있었을 정도로 강남지방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오대십국시대 때에는 전류가 오월왕이 되면서 오월의 영토가 된다.
북송 대에 강남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원나라 대에는 강회 행성을 두어 다루가치가 다스렸다. 원말명초 시기 장사성이 이곳에 거점을 세우고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켰으나 주원장에 의해 정벌되었다. 주원장은 이곳의 잠재력을 두려워해서 강남성 소속으로 두어 막대한 세금을 매기고 부유한 가문을 난징이나 다른 도시로 이주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쑤저우를 탄압했다. 그러나 이미 발달할 대로 발달한 도시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고, 쑤저우의 명성은 명대에도 이어졌다.
당시의 경제력을 보면 다른 도시와 단위가 다른 수준의 압도적인 경제력을 보여준다. 명나라 때 수도였던 베이징이나 난징의 인구가 100만에서 120만 선이었다면 쑤저우의 인구는 200만에서 240만에 달했다. 청나라가 건국된 이래 강소성 소속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군대가 이곳을 점령했고, 나중에 진압되는 과정에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한산사와 더불어 소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던 운암사가 파괴되었고, 호구탑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7. 볼거리[편집]
사진 출처 : http://irene-travelogue.com/tag/suzhou-street/
도시 내부를 가로지르는 운하 때문에 동양의 베네치아라고도 많이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와 다른 동양적인 풍경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며, 천국에 빗댄 속담까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쑤저우시 일대에서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현대건축물이 여러 채 세워지고, 많은 운하가 메워지면서 안타깝게도 옛 정취가 많이 사라진 편이다. 론리플래닛에서도 이에 대해 엄청난 혹평을 남겼다. 그나마 쑤저우 근교에는 좀 더 원형을 보존한 퉁리, 저우장 등 운하도시들이 남아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근교로 찾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옛 관료·지주들이 꾸민 정원들도 많이 있어 정원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대표적인 정원들은 쑤저우 4대 정원(창랑정, 유원, 사자림, 졸정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그 외에도 오래된 도시답게 4대 정원과 같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산사 등 명승고적들도 많다.
7.1. 호구산[편집]
호구산 검지의 왕희지 필적
오나라 왕 합려가 천하를 얻기 위해 만든 간장·막야 설화와 관련이 있는 호구산의 검지 (劍池)도 유명하다. 월나라 사람에게서 명검을 얻은 합려는 그 예리함을 시험하기 위해 호구산의 큰 바위를 내려쳤고, 바위가 두동강이 나자 흡족해 했다는 설화가 있다. 이는 현재 시검석 (試劍石)인데, 실제로는 풍화 작용에 의해 갈라진 것이다. 후일 왕희지가 검지 글자를 새긴 명문이 남아있다.
한편 합려가 죽은 후에 그의 능이 호구산에 조성되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능의 위치를 아는 이들이 후일 도굴할 것을 우려해 공사에 참여한 장인들을 연회에 초대한 후 취한 틈에 죽이니, 그들이 모여 앉았던 바위에 피가 스며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를 천인석 (千人石)이라 부르는데, 실제로는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유문암이기에 붉은 것이다.
6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단량전 (斷梁殿)
호구산의 2번째 산문인 단량전 역시 오래된 유적으로, 원대의 건물이다. 두 대들보를 이어 만들어 하중을 분산시킨 것이 특징이다. 내부에는 호구산의 역사와 호구탑의 축조를 설명하는 4개의 비석이 있다. 호구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다.
7.2. 후치우 탑 (虎丘塔)[편집]
윈옌스 후치우타 (운태사 호구탑)
도심 중북부에 위치한 후치우 탑(虎丘塔, 호구탑)은 '중국의 피사의 사탑이라 불린다. 실제로 색깔도 비슷하고, 연대는 훨씬 더 오래되었다. 오대십국 시대 오월 정권 하에서 건설이 시작되어 약 반세기 후인 961년 완공되었다. 송대의 시인 소동파가 소주에 와서 호구탑을 보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라는 시를 남겨 유명해졌다. 기반이 돌 반, 흙 반으로 지어졌기에 3.5도 기울게 되었으며, 명청대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친 끝에 1957년 시멘트를 주입하여 안정시켰다. 높이는 47m, 무게는 7,000톤에 달한다. 본래 꼭대기에 올라가 전망을 볼 수 있었으나, 안전과 보존 문제로 2010년부로 금지되었다.
7.3. 대표 마천루[편집]
오래된 유적말고도 현대적인 건물도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쑤저우 동쪽에 위치한 진지호(金鸡湖) 호반에 조성된 공업원구(工业园区)라는 신도시에 밀집해있는데, 이 중 높이 302m, 66층 규모의 마천루인 동양의 문(Gate of the Orient)이 특이한
동양의 문 외에도 공업원구에는 수많은 마천루가 건설중 또는 계획중인데 대표적으로 중난 센터(Zhongnan Center)가 있다. 중난 센터는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한 초고층 빌딩이며 높이 729m, 138층이다. 완공되면 중국에서 제일 높고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마천루가 될 예정이다.[15]
진지호(金鸡湖) 주변으로 공원 및 상권이 매우 아름답게 잘 조성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산책을 즐기거나 외식을 한다.
7.4. 전시장[편집]
8. 자매결연도시[편집]
9. 세계문화유산[편집]
강남의 정원은 천하 제일이고, 쑤저우의 정원은 강남 제일이다
과거 춘추전국시대때 부터 명나라때 까지 긴 기간 수백개가 넘어가는 정원들이 만들어 졌으며 그 중 몇몇 유서깊고 아름다운 정원들은 역사성과 미적 기준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9.1. 한산사(寒山寺)[편집]
세계유산에 등재된 남북조 시대에 창건한 한산사. 사진 출처: http://www.ivsky.com/tupian/hanshansi_t13808/
9.2. 창랑정(滄浪亭)[편집]
쑤저우에서 제일 오래된 정원이며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0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9.3. 유원(留園)[편집]
유원 사진. 사진 출처: http://www.ivsky.com/tupian/suzhou_liuyuan_v12199/pic_314870.html
쑤저우 고성 서북쪽에 위치해있으며, 쑤저우를 대표하는 정원이다. 명대에 조성되었으며 1997년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9.4. 사자림(獅子林)[편집]
원나라때 천여법사의 제자들이 만들었으며, 2000년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9.5. 졸정원(拙政園)[편집]
51,950 m²의 면적으로 쑤저우에서는 가장 큰 정원이다. 강남지방에서 제일 아름다운 정원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9.5.1. 군사[편집]
동부전구공군 26특수사 93연대가 쑤저우에 주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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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문 역시 개폐가 가능하다.[2]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苏杭)이라 불리기도 한다.[3] 장쑤성 명칭은 장닝(江宁/난징시의 옛 이름 중 하나)과 쑤저우(苏州)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장쑤성을 한 글자로 줄여쓰는 약칭은 소(苏).[4] 주나라 이전 시대.[5] 아마 이들이 후대 춘추시대 말기를 주름잡던 오(吳)나라의 구성원들의 조상으로 여겨진다.[6] 패왕으로 유명한 항우의 친할아버지다.[7] 엄밀히 말하면 초나라에도 군현제 비슷한 제도는 실시되고 있었지만, 보다 강력하게 중앙집권적으로 실시된 것은 진(秦)나라가 그 시작이다.[8] 즉 옛 초나라 땅을 초군으로 분류했다가 행정 편의를 위해 3분할한 것이다.[9] 당시에는 일통천하(一統天下)라고 했다.[10] 한나라 시대의 오군 오현의 시조.[11] 그 반란의 이름이 오초칠국의 난이다.[12] 훗날 삼국지의 엄백호와 허공의 근거지가 된다.[13] 지금 베트남과 광서, 광동성에 걸친 교주(交州)가 아니다.[14] 중국 네티즌들이 바지랑 닮았다는 이유로 큰 바지(大裤衩)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더 나아가 내복바지 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본래 쑤저우 전통 정원의 다리를 형상화하여 영국의 RMJM이 디자인했는데 실물이 영 좋지 않게 나왔다고 한다. 처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가 망한 서울시청, 첨단 기술을 과시하려다 디자인이 괴상하게 된 중국 중앙 텔레비전 베이징 본사와 비슷한 케이스.[15] 대기가 안 좋을 때는 꼭대기만 휑하고 사라진다...[16] 2000년 등록확장[17]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18]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19]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0]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1]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