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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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 가문의 세 자매(宋家姐妹, 宋氏三姐妹)
쑹아이링 - 쑹칭링 - 쑹메이링



쑹메이링
정체자: 宋美齡|간체자: 宋美龄

출생
1897년 3월 5일
상하이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사망
2003년 10월 23일 (향년 106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웨슬리언 칼리지
웰즐리 칼리지[1] 영문학 전공, 철학 부전공
신체
166cm
종교
개신교
가족
아버지 쑹자수
언니 쑹아이링, 쑹칭링
오빠 쑹쯔원
남편 장제스 (1927년 ~ 1975년, 사별)

1. 개요
2. 생애
2.1. 본토 시절
2.3. 에피소드
3. 매체에서



1. 개요[편집]


한때 중국 대륙을 제패했던 장제스의 세 번째 부인이자 중화민국의 정치인이다. 한국식 독음은 송미령인데, 가끔 '손미령'으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다.

장제스의 영부인으로만 여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유창한 영어 실력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권력을 사랑한 여인

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정치에 개입했다.

국부천대 이후에는 타이완에서 활동하다가 장징궈의 집권 이후에는 권력에서 밀려나서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간간이 타이완에 다시 돌아온 적도 있었다. 1960년대 말에는 '미국의 가장 존경하는 10인의 여성'에 포함되기도 했다. 실제로 동양에서 가장 정치력이 있는 여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특히 대미(對美) 로비 능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쑹메이링의 일가는 국부천대 이전 중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던 네 가문인 4대가족의 일원이었다.


2. 생애[편집]



2.1. 본토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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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 목사이자 무역업자인 아버지 쑹자수의 3남 3녀 중 3녀로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신식 교육을 받았던 부친은

"여자도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

며 세 딸을 모두 미국에 유학보냈는데, 1908년 쑹메이링 또한 언니들과 함께 도미했다. 1912년 16세의 나이로 웨슬리언 칼리지에 들어갔다가 웰즐리 칼리지로 편입하여 1917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전공은 영문학이었으며, 부전공은 철학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유창한 영어 실력 외에 6개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어학에 발군이었다. 그 외에 중국화 방면에서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노 실력 역시 수준급이었을 정도로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러나 당시 교사의 평을 빌리자면 생각은 깊어도 별로 활동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운명의 남자였던 장제스와는 광저우 국민정부 시절 왕징웨이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었으며, 이때 장제스의 아내인 천제루를 농부의 아내로나 어울릴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중국공산당과 단절한 이후 탄옌카이의 소개로 장제스와의 정략결혼이 추진되었으며, 1927년 8월 공직에서 하야한 장제스가 일본 외유를 떠나 장제스-다나카 회담 이후 쑹메이링의 어머니인 예계진에게서 결혼 허락을 받아내면서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두 사람은 1927년 12월에 결혼했다. 쑹메이링이 격동의 역사속에서 주도적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36년 서안 사건때로, 그는 남편인 장제스가 억류당하자 직접 현장으로 가서 장쉐량 등 주동자들과 담판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직접 전선을 방문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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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족 뿐만이 아닌 인류의 번영을 위해, 설령 실패할 위험이 있더라도 우리는 소중한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때에 왔습니다

not for ourselves alone, but for all mankind... In order to preserve, uphold, and maintain them, there are times when we should throw all we cherish into our effort to fulfill these ideals even at the risk of failure.

1943년 미 의회, 출처


진주만 공습 이후 1943년 2월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유창한 영어로 의회 연설을 했다. 그녀는 중일전쟁에서 중국의 항일의지를 나타냈고, 더불어 미국의 지원 확대를 호소했다. 이는 큰 호응을 이끌어 냈는데 중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미국 의회 연설이었다.

"선교사가 중국에서 예수를 알렸다면, 쑹메이링은 미국에서 중국을 알렸다."

는 호평을 들었을 정도였다. 1943년에는 카이로 회담에서 남편 장제스의 통역으로 같이 참가했다.


2.2. 국부천대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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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천대 이후 장제스와 함께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장제스의 영부인으로서 계속 활동했는데 장징궈의 세습에 반대하면서 장징궈의 태자파와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국내정치에 환멸을 느껴 주로 외교쪽으로 활동했다. 대중국 영국 연합 원조 기금(British United Aid to China Fund) 명예의장, 권리장전 기념회원 등에 올랐고, 1960년대 말에는 계속적으로 '미국의 가장 존경하는 10인의 여성'에 포함되었다.

그러다가 1975년 장제스가 죽자 남편의 유촉에 서명한 후 장례식을 치르고 요양을 목적으로 바로 미국 뉴욕주롱아일랜드로 떠나버렸다. 1976년 장제스의 서거 1주기를 기념하여 귀국했는데, 당시 대리총통이었던 옌자간 부부와 행정원장이었던 장징궈의 영접을 받았다. 하지만 추모 행사가 끝나자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78년에 장징궈가 총통에 당선되자 취임식에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서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전보를 보내 축하했다.

1981년, 둘째 언니였던 쑹칭링은 병이 위독해지자 동생인 쑹메이링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쑹메이링을 중국으로 초청했다. 1973년에 이미 큰언니인 쑹아이링을 잃었던 쑹메이링은 쑹칭링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초청은 거절했다. 이후 미국에 거주하며 국민대회때마다 전화를 연결하여 메시지를 전달했고, 각종 자선사업을 했다. 1988년에 장징궈가 사망하자 쑹메이링은 90세의 노구를 이끌고 오랜만에 타이완으로 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후 한동안 타이베이에 머물면서 장제스의 옛 관저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거주했다.

국민당 상무위원회가 리덩후이를 국민당 대리주석으로 추대하자 쑹메이링은 대리주석을 추대하는 일이 너무 성급하며 이를 제13차 국민당 대회에서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리덩후이 지지파는 이를 기습적으로 처리해버렸고, 쑹메이링은 신병 치료를 위해 1989년까지 타이완에 머물다가 1989년 4월에 도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따라 장징궈 일가도 대부분 타이완을 떠나버렸다. 1993년에는 오랜만에 장웨이궈를 미국에서 만났고, 리덩후이가 주장하는 대만 독립론과 장제스 격하에 대해 심한 불쾌감을 표출했다. 이 사실을 눈치챈 전 행정원장 하오보춘이 제14차 대표대회에 즈음하여 쑹메이링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손자들인 장샤오원(蔣孝文), 장샤오우(蔣孝武), 장샤오츠(蔣孝慈), 장샤오융(蔣孝勇) 등이 차례로 죽었으며 쑹메이링이 자식처럼 아꼈던 쿵샹시쑹아이링 부부의 아들인 조카 쿵링칸(孔令侃)도 사망했다.

1995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 기념으로 53년 만에 다시 미국 의회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쑹메이링은 100세에 가까운 노령임에도 이를 수락했고, 1995년 7월 26일에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부축없이 10분 동안 강연했다. 강연 동안 세 차례나 기립 박수가 터져 연설이 중단되었고, 제일 긴 박수는 3분 동안 계속되었다. 1997년에는 100세 생일을 맞이하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초청을 받아 중화문물보물회 전시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 20세기, 21세기 3개의 세기를 모두 경험하고 2003년에 106세로 사망했다. 쑹메이링은 신해혁명, 청나라의 멸망, 군벌간의 대혼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시안 사건, 원폭 투하, 제2차 국공내전, 국부천대, 대만의 경제 부흥, 대만 민주화, 첫 민진당 집권까지, 격동과 영욕의 중국사를 지켜봤다. 유언에 따라 대만에 있는 남편 장제스와 합장되지 않고, 언니 쑹아이링과 그 가족들이 곁에 있는 뉴욕 근교의 펀클리프 공동묘지에 묻혔다.

메이링의 장례식은 가족들과 수행원들의 참관하에 조용하게 치러졌다. 장례식 이튿날, 당시 대만 총통이었던 천수이볜은 쑹메이링의 맨해튼 저택을 방문해 애도를 표한 후, 경의의 뜻을 담아 그녀의 친척들에게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수여했다.


2.3. 에피소드[편집]


쑹메이링의 내면을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서안 사건 같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제스의 전처인 천제루가 자신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은 회고록을 출판했을 때도 침묵으로 일관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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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매력적이었던 여성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녀를 만나 본 사람들은 그녀의 매력에 대해 군말없이 인정했다. 쑹메이링을 본 장제스의 전처인 천제루는 상하이의 잡지 화보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것 같다고 평가했고, 소련의 고문이었던 미하일 보로딘은 한때 그녀에게 반해서 헤롱대기도 했다. 쑹메이링을 '황후 폐하'라고 부르며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사람 정도로 봤던 미국의 장군 조지프 스틸웰도 쑹메이링이 대단히 매력적이고 영리한 여성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며, 미국 대사관 무관인 데이비드 배럿은 그녀를 숨구멍마다 매력을 발산하는 여인이라고 호평했다.

그녀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는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172명의 기자와 부통령 헨리 월리스 그리고 루스벨트 부부를 완전히 휘어잡았다. 당시 중국 전선을 무시하던 미군 수뇌부는 쑹메이링 때문에 미국의 군사전략이 완전히 뒤바뀔지 모른다고 불안에 떨었을 정도였다.

1943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쑹메이링과 만났던 윈스턴 처칠도 그녀에 대해 범상치 않고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표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녀를 요부라고 부르며 그녀의 곁에 앉는 것도 꺼렸다. 이렇듯 쑹메이링은 개인적인 매력이 대단했으며 자신을 민주주의의 수호자, 중국 기독교 정신의 전파자, 반파시스트 투사로 포장하여 대단한 인기와 영향력을 얻어내곤 했다.

미국 대통령 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절친했는데 이는 쑹메이링이 루스벨트의 아들 제임스가 중국 방문 중 위궤양 수술을 받고 입원했을 때 특별히 지시를 내려 몸조리를 잘 하도록 도왔기 때문이었다. 쑹메이링이 미국을 방문하던 중 늑골 부상과 위병으로 잠시 입원하자 엘러너 루스벨트는 세 번이나 병문안을 오기도 했고, 쑹메이링을 딸로 삼고 싶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장제스가 유독 독설과 욕을 많이 하는 바람에 통역 담당이었던 쑹메이링은 이를 필터링하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또한 장제스가 영•미연합군의 장성들에게 매우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요구와 의견을 서슴지 않아서 이를 무마하느라 고생했다. 예컨대 장제스는 루이 마운트배튼 장군을 만나서 연합국의 지원이 미비함을 질타했는데 마운트배튼 장군이 몬순 기간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물자를 공수하는 일이 어려워서 그렇다고 답변하자 장제스는 지금 중국에선 수천만 명이 아등바등 죽어가는데 내가 그까짓 몬순이라는 변명이 알게 뭐냐는 요지로 화를 냈고, 장제스의 너무도 공격적인 발언에 당황한 쑹메이링은 마운트배튼에게 장제스가 몬순이 뭔지 몰라서 저러는 것이라고 변명했다. 물론 장제스가 몬순이 뭔지 모를 리가 없었지만 이후 장제스는 한동안 '몬순도 모르는 무식쟁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다만 몬순 기간엔 일반 알보병도 이동이 힘들기에 장제스가 무식하게 말한 건 사실이다.

동북의 제2대 군벌이었던 장쉐량과 연인 관계라는 설이 있다. 훗날 쑹메이링이 죽은 후 남은 편지에서 쑹메이링이 장쉐량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사람들은 경악했는데 연금지의 장쉐량에게 보낸 편지가 남편 장제스나 장징궈, 자손들에게 보낸 것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장쉐량도 오랜 연금에서 풀려나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건 쑹메이링 덕이라고 했다. 다만 쑹메이링이나 장쉐량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야사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로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절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1등급, 현재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지원한 것과 별개로, 그녀의 개인적인 지원이 20여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공로로서 인정된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1932년 윤봉길 의거 당시 한인애국단에 후원금 10만원을 지원했으며 1940년에는 광복군 후원금으로 10만원을, 그리고 1942년에는 광복군 출정군인 가족들에게 10만원을 지원했다. 2019년 유관순이 대한민국장을 수훈받기 이전까지 유일한 여성 대한민국장 수훈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 때 수많은 한국인 여성 애국지사들을 다 제치고, 외국인인 쑹메이링 혼자 대한민국장 수훈자일 수가 있냐고 비판하는 여론이 생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독립을 정식으로 언급한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의 통역사가 쑹메이링이었다는 사실때문에 그녀가 한국 독립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는 건 한국에서도 인정하는 편이다.

사상 초유의 용병 공군부대인 플라잉 타이거즈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 초반에 공군력을 상실했기에 군사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아직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미국인들을 설득해서 돈을 받고 모인 용병부대라는 형식으로 공군 부대를 창설했고, 바로 이들이 종전시까지 맹활약을 펼쳤다. 그 밖에도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방면에서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스틸웰은 쑹메이링이 중화민국의 국방장관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하기도 했다. 농담이 아닌 게 한때 중국 공군의 어머니라고 불린 적도 있었을 정도로 공군에 관심이 많았고, 국민당의 웬만한 장군들보다 국방 분야에 끼친 영향력이 컸다.

쑤저우에 별장이 하나 있었는데, 제2차 국공내전 이후 린뱌오가 차지해서 자신의 휴양지로 썼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중국 국민당 내부에서는 '내가 국민당의 실권을 잡는 것이 쑹메이링 여사의 뜻'이라는 소리가 두어번 나왔다. 다만 당시의 그녀는 정치와의 관계를 끊어서 무관할 가능성이 높다.

최고 권력자의 부인이면서도 미식을 즐기지 않았고, 채식만을 고집하여, 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3. 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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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작 중국 영화 <송가황조>에서 우쥔메이(邬君梅: 영어 이름 비비안 우)가 역을 맡았다.[2] 역사상으로는 정치 권력 기준으로 자매들 중 최강이었지만, 극중에는 부잣집 막내 아가씨 스타일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시안 사건에서 직접 담판에 나서 장제스를 구하는 장면이 나와서 어느 정도 체면 치레는 했다.

영화 현재 시점인 1981년에 이미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던 중 쑹칭링의 위독 소식을 전달받고 중국행을 준비했지만, 출발하기 전에 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는 영화상의 설정이다. 쑹메이링은 장제스 사후 칩거하여 바깥 활동을 자주 하지 않았고, 고의적으로 무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쑹메이링은 자신과 관련된 기록을 일절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미상이다. 실제로 《송미령 평전》(진정일 저, 이양자 역)에서는 중국행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2009년 <건국대업>에서도 짧게나마 출연을 하는데 역시 우쥔메이가 연기했으나, 비중은 병풍 수준이다.

역사전략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호랑이 깨우기 DLC이후 중국의 장관으로 등장한다. 장제스가 국가 지도자일때만 고용할 수 있다. '민국의 국모'(안정도 +5%, 전쟁 지지도 +5%)라는 유니크한 특성을 달고 있지만 장제스(방어전쟁시 안정도 +40% 부여)와 린썬(안정도 +15% 부여)이 있기도 하고, 중일전쟁 중에 전쟁지지도 부족할 일 겪을리는 없는 중국 입장에서는 후반기까진 그다지 쓸모가 없다.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에선 다른건 다 비슷하지만 신생활운동 강화를 통한 국민당 강화 루트를 해야 기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 생겼다.

[1] 웨슬리언 칼리지에서 편입했다,[2]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의 후궁 원슈[文繡\](자금성에 쫓겨난 후 이혼하여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떠나는 모습의 그 여인) 역으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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