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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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조선시대에 있었던 악습이다?



1. 개요[편집]


를 받는 행위를 뜻하는 동사 또는 씨를 받는 사람, 동물 및 식물을 의미하는 뜻의 명사. 씨 + 받이.

곡식 등의 작물을 기르는데 있어 씨를 거두어 받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에게는 종자 개량 혹은 번식을 위해 생식 세포를 받는 짐승을 뜻할 때에 쓰인다. 사람에게 사용하면 주로 모욕적인 호칭으로써 사용된다.

여러 윤리적 논란이 되고 있는, 타 여성의 난자를 사용하여 인공수정한 수정체를 대리 출산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대리모와는 엄연히 다른 용어이다.


2. 조선시대에 있었던 악습이다?[편집]


조선시대 정실부인이 아이를 갖지 못했을 경우 사용한 편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고려장, 백정각시놀음과 같이 일제강점기에 왜곡되어 잘못 알려진 낭설이다. 처음 잘못 알려진 건 조선일보의 주필이었던 이규태[1]의 에세이를 통해서다. 이규태 자신이 어렸을 때 동네에서 본 경우...를 에세이에 옮겼다고 하는데, 이규태는 소학교 때 광복을 맞이했다고 하니 조선시대를 경험한 세대는 아님에도 씨받이가 조선시대 전통이라고 왜곡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기록 어디에서도 씨받이에 대한 건 없다. 하지만 이규태의 책을 보고 임권택 감독이 아이디어를 얻어 동명의 영화까지 만들면서 조선시대 악습으로 사람들의 인식에 굳어져 버렸다.[2] 영화 개봉 당시 역사학계에서는 역사왜곡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거셌었지만 씨받이라는 소재 자체가 대중들에게 너무 강렬했고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큰 상을 타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다.[3]

씨받이는 백정각시놀음과 비슷하게나마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악습이 조선시대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본래 조선시대에는 적자를 통해 대를 잇지 못할 경우 조선 전기에는 서자가 대를 이었고 적서차별에 심해진 후기에는 양자를 들여 대를 잇게 했는데 이를 입후라 부른다. 입후는 현재의 입양과는 목적과 방식이 조금 차이가 있다.[4] 입후는 남편 측의 동성 친족 중에서 계후자를 들이는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는 매우 보편화된 문화로 얼마나 흔했는지 알고 싶다면 당장 조선 후기의 족보를 살펴보라. 족보에 보이는 수많은 ‘입(入)·출(出)·계(繼)’ 등의 표기는 조선시대에 입후가 얼마나 많이 행해졌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에는 입후가 매우 널리 퍼졌고 따로 숨기거나 흠으로 치지도 않았다. 초기에는 을 통해 얻은 서자로, 중후기에는 입후로 대를 잇는 것이 당연했다. 당장 왕실의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조선 제 14대 국왕 선조가 방계로 대를 이었다. 철종 또한 마찬가지. 또한 정조의 경우 1762년에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임오화변)을 겪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왕가에서조차 적자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조선후기 전통대로 자식이 없이 죽은 형제에게 자신의 자식을 입후시켜 나름 대를 잇게 하는 일이 많다.[5]

대군이나 [6]으로 내려가면 이런 경우를 훨씬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요절한 성녕대군의 경우 어려서 사망한 탓에 후사가 없어 친형인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양자로 들어가 후사를 이었다. 하지만 안평대군계유정난으로 사사되자 세조 6년에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이 양자로 들어간다.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은 원래 인조의 삼남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그런데 순조 15년(1815년), 28살이던 해에 정조의 이복 동생이자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양자로 입적되며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 이처럼 먼 친척을 데려와 입적을 통해서 후사를 잇게 하는 경우는 왕가에서조차 매우 흔한 일이었다. 왕가에서도 적자가 없을 경우 방계로 대를 이었는데 하물며 양반이나 일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 척화파였던 김상헌도 김극효(金克孝)의 4남으로 어릴 때 김극효의 형인 현감 김대효(金大孝)의 양자가 되었다. 또한 본인도 후사가 없어 생가 친형(법적으로는 사촌형) 김상관의 아들 김광찬을 양자로 들였다. 즉 김상헌의 후손들은 실제로는 김상관의 후손들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조선 초기의 왕위 계승 또한 양자 계승으로 이루어진 사례가 있다. 바로 정종 이방과와 태종 이방원의 계승이다. 흔히 정종 - 태종 승계를 '형제간의 계승'으로 이해하지만, 엄밀히는 양부와 양자의 계승이었다. 이방원이 형식적으로 이방과의 양자로 들어간 뒤, 양아버지 이방과가 양아들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 왕위를 계승하도록 한 것이다.[7] 이렇듯 조선은 동생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는 것도 용인되고 당연시되는 나라였다.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제한 없이 을 들이거나 양자를 들이는 것이 매우 보편적이며 아무런 흠도 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서 굳이 10달 동안 임신 사실을 숨겨가며 씨받이를 들일 이유는 없다. 조선시대가 폐쇄적인 농경사회임을 감안했을 때 더 그렇다. 물론 음성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암암리에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으나 매우 드물고 보편적이지 않은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오로지 아이를 낳기 위해 다른 여자를 데려오고 아이만 챙기고 생모는 내보낸다는 상황 자체가 한 번만 제대로 생각해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집안의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준 여자를 오로지 본처가 있다는 이유로 쫓아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본처가 쫓겨나는 일이 훨씬 자연스럽다. 아무리 본처에게 막강한 배경과 정실부인이라는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후계자를 낳은 어머니의 권력은 그 배경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알기 쉬운 예로 사극에 나오는 예를 봐도 원자 생산을 한 미천한 배경인 숙빈 등의 후궁이 막강한 배경의 정실 왕후를 내쫓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씨받이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집안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지름길인 셈이고 이런 권력이 주어질 기회를 양반가에서 그냥 애만 챙기고 생모는 버려도 될만한 미천한 집안의 여자에게 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라면 집안의 대를 잇게 하기도 부적합하다. 후계자를 양자로 데려오지 않는 이상 후계자를 낳을 여자는 씨받이는 커녕 신분이 양반가에 걸맞게 정실 부인으로 들이는게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도 집안의 명맥을 위해서도 훨씬 더 타당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첩을 두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양자를 들여도 양자들이 희미해진 유교의식 탓에 제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자 과도기적으로 간혹 등장한 것이 지금까지 조선시대 악습으로 왜곡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1] 한국 전근대 풍속사의 문제적 인물. 여러 베스트셀러들을 써냈지만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남발해 대중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경우도 많다. 자세한 내용은 이규태 문서 참조.[2] 영화가 촬영 된 곳은 울산의 보삼(보쌈)마을인데 조선시대때부터 이 곳으로 보쌈을 해오면 아무도 찾지 못했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이 역시 씨받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3] 현재에도 해당 주제를 다룬 역사왜곡 작품을 보고서 뜬금없이 조선이나 양반을 욕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4] 입양과 비슷한것은 3세 이전에 데려다 기른 수양자(收養子), 4세 이후에 데려다 기른 시양자(侍養子)와 같은 수양·시양을 통한 양자 영입으로 입후와는 구별 된다.[5] 의료가 발전되기 전 시대의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집안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고 숨길 일도 전혀 아니다.[6] 후궁의 아들[7] 이렇게 된 것은, 이방과가 많은 자식을 두었지만 모두 서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이방과에게 적자가 있었다면 또 다른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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