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궤이바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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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궤이바나 2세
Agüeybaná II



이명
아궤이바나 엘 브라보[1]
Agüeybaná El Bravo
출생
1470년
보리켄 과이니아(Guaynia)
사망
1511년
푸에르토리코
1. 개요
2. 상세
3. 스페인인들과의 조우
4. 스페인과의 갈등의 시작
5. 1511년 타이노 반란에서의 죽음
6. 평가




1. 개요[편집]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타이노인 족장(카시케)으로, 스페인에 대항해 반란을 이끈 강력한 지도자였다.

1493년 11월 19일 후안 폰세 데 레온과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에 맞서 1511년 산후안 스페인-타이노 전쟁(1511년 타이노 반란)을 일으켰다.

이름인 아궤이바나는 '위대한 태양'이라는 뜻이다.


2. 상세[편집]


원래 이름은 궤이바나(Güeybaná)로 보리켄 대카시케(대추장) 아궤이바나 1세(Agüeybaná I)의 동생이었다. 아궤이바나 2세의 마을은 푸에르토리코 남부에 위치한 과이니아(Guaynia) 강 근처에 있었으며, 그의 이름도 이 강에서 유래되었다.

푸에르토리코에는 섬의 여러 곳에 카시케(추장)가 다스리는 마을이 흩어져 있었는데, 다른 모든 보리켄 카시케들은 아궤이바나의 지도 아래 부족을 통치해야 했다.


3. 스페인인들과의 조우[편집]


1580년, 형 아궤이바나 1세와 스페인의 폰세 데 레온이 처음으로 조우한다. 타이노 전통에 따라 아궤이바나와 폰세 데 레온은 서로 친구가 되는 의식(guaytiao)을 하고, 서로 통성명을 하면서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는 아궤이바나의 어머니가 한 조언이었다. 바다를 건너 온 스페인 사람들을 처음 본 그들은 기독교의 신이 아닐까 하는 믿음이 있었는데,[2] 아궤이바나의 모친은 그들에게 정복당하기보단 친구가 되어 서로 협력하라고 아궤이바나에게 충고했고, 아궤이바나가 이에 순종한 것이다. 아무튼 최대한 평화를 추구하던 타이노인들은 그들을 환대하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물론 스페인 사람들은 얼마 못 가 그들의 뒤통수를 치고 배신했다.


4. 스페인과의 갈등의 시작[편집]


1510년 형 아궤이바나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아궤이바나 2세는 섬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대추장(카시케)이 되었다. 초대 총독이 되어 개발권을 위임받은 폰세 데 레온은 카파라라는 마을을 세우고 그곳을 마구 파헤쳐서 농산물과 금을 뺏어가는 등 가혹한 통치를 했다.

형들과는 달리 스페인 사람들이 신과 같은 존재가 맞는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아궤이바나 2세는 그들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아궤이바나 2세와 아나스코 카시케 우라요안(Urayoán)은 스페인 사람 중 하나인 디에고 살세도(Diego Salcedo)를 익사시켜 진짜로 부활하는지 아닌지(...) 실험해봤지만, 당연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리가 없었다.

디에고 살세도의 죽음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1. 아궤이바나와 우라요안이 아름다운 타이노 여자들이 가득한 호수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혹한 살세도는 집단 난교 파티(...)를 상상하며 갔다가 여자가 아닌 남자들만 가득한 호수에서 익사당했다는 설.

2. 타이노인들이 살세도를 안고 강을 건너는 것을 제안한 다음 그를 익사시키고 며칠간 가두어 죽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설.

3. 스페인 사람들이 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타이노인들이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했는데, 이스파니올라와 쿠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행패를 부려서 살세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설.[3]

살세도를 죽여 신이 아니라 정복자들이라는 것을 안 아궤이바나 2세는 다른 카시케들과 비밀 회의를 열어 스페인에 대한 반란을 조직했다. 미리 후안 곤잘레즈(Juan González)라는 스파이를 보내 반란 소식을 알게 된 스페인 측은 이들에게 경고했지만, 스페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궤이바나 일행은 크리스토발 데 소토마요르(Cristobal de Sotomayor)의 부하들을 죽이고 곤잘레즈를 공격하여 부상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탈출한 곤잘레즈는 카파라의 폰세 데 레온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본격적으로 스페인과 타이노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5. 1511년 타이노 반란에서의 죽음[편집]


먼저 타이노 측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투아도(Utuado)의 카시케 과리오넥스(Guarionex)는 소토마요르(현재의 아구아다) 마을을 공격하여 스페인 주민 80명을 살해했다.

1511년, 야구에카스(Yagüecas)로 알려진 지역에서 약 11,000~15,000명의 타이노군이 약 80~100명의 스페인인을 상대로 집결하여 전투를 시작했는데, 이를 야구에카스 전투(Battle of Yagüecas)라고 한다. 스페인 지도자인 폰세 데 레온은 이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이끌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한 스페인군이 화승총으로 원주민을 사살했는데, 이 원주민이 카시케만이 착용할 수 있는 황금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궤이바나 2세로 추정된다.

아궤이바나 2세의 죽음으로 타이노군은 철수했고, 타이노 사회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아궤이바나 2세의 군대와 그의 추종자들은 게릴라 전술을 통해 스페인과 교전했고, 이러한 게릴라전은 1519년까지 8년간 지속되었다.

2차 타이노 습격은 1513년, 폰세 데 레온이 플로리다를 탐험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을 때 발생했다. 스페인 정착지였던 카파라는 타이노-북동부 앤틸리스 제도 원주민 동맹에 의해 약탈되고 불태워졌다.

그러나 타이노 인구는 스페인과의 전쟁, 스페인의 탄압, 전염병으로 계속 줄어들었다. 1530년에는 푸에르토리코의 타이노인이 1148명만 남아있었고[4], 곧 혼혈 타이노인들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사라지면서 타이노는 멸망하고 말았다.


6. 평가[편집]


아메리카 식민지화 초창기에 타이노인들은 대부분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대규모로 연합하여 스페인을 축출하거나 저항하였다. 다만 아궤이바나 2세처럼 대규모로 오랜 기간 동안 스페인에 대항한 경우는 이례적인 사례였다.

현재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조국을 위해 맞서 싸운 위대한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에는 많은 공공 건물과 거리에 그의 이름이 헌정되어 있다. 한때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오스카상과 동등한 지위의 황금 아궤이바나(Agüeybaná de Oro)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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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사 아궤이바나'라는 뜻이다.[2] 그 당시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에게 잘 대해주는 타이노인들을 보면서 자신들을 신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신이 된 것마냥 행동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접대의 관습 때문이지 진짜로 신으로 모신 것은 아니다. 물론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의 만남은 그동안 없었던 일이니 신인지 아닌지 의심하기는 했다.[3] 스페인 성직자들이 기독교를 선교하면서 의구심이 생겨 살세도가 사흘 안에 부활하는지 지켜봤는데, 부활은커녕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비로소 스페인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4] 이게 얼마나 심각하냐면 스페인인들이 처음 타이노인과 조우했을때의 타이노인 인구는 현대 학자들이 추정해서 5만인데 무려 90%가 넘게 죽었던것이다. 비슷하게 아이티의 타이노족도 스페인의 탄압과 전염병으로 25만에서 500명으로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아예 멸종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