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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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록에서의 등장
2.1. 다른 기록
3. 이름
4. 정체에 대한 추정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阿其拔都
(1364또는 1365 ~ 1380년)

고려한반도 해안지방을 노략질한 왜구.


2. 기록에서의 등장[편집]


한국 측 기록에 등장하는 대목에서 보여준 무용이 대단해서 유명한 점도 있지만, 그 무용 덕분에 이성계를 유명하게 만들어줘 더 유명한 인물이다. 이렇게 조선 역사에는 비중이 있으나, 반대로 일본 측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서[1] 그가 당시 일본이나 왜구집단 내에서 실제로 얼마나 비중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홍산대첩, 진포해전에서 패배한 후 삼남의 내륙지방으로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이성계와 그의 의형제 이지란황산대첩에서 왜구의 무리와 대전하였을 때, 적진에 나타난 장수이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을 다루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의 기록도 동일하다.

有一賊將年纔十五六, 骨貌端麗, 驍勇無比。 乘白馬, 舞槊馳突, 所向披靡, 莫敢當。 我軍稱阿其拔都, 爭避之。 太祖惜其勇銳, 命豆蘭生擒之。 豆蘭曰: "若欲生擒, 必傷人。" 阿其拔都著甲胄, 護項面甲, 無隙可射。 太祖曰: "我射兜鍪頂子令脫, 汝便射之。" 遂躍馬射之, 正中頂子, 兜鍪纓絶而側, 其人急整之。 太祖卽射之, 又中頂子, 兜鍪遂落, 豆蘭便射殺之。 於是賊挫氣。 太祖挺身奮擊, 賊衆披靡, 銳鋒盡斃。

적장 하나가 있어 나이가 겨우 열대여섯인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날램이 비길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피미하여 감히 맞서는 이가 없었다. 우리 군이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며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예함을 아껴 두란(豆蘭)을 명하여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가로되,

"만약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다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가라사대,

"내 투구의 정자(頂子, 꼭지)를 쏘아 투구를 벗기리니 네가 바로 쏘아라."

하며, 마침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기어 기우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가지런히 하니, 태조가 곧 그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바로 그를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의 기가 꺾였다. 태조가 앞서서 분격하니, 적의 무리가 피미하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2]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66번째 기사


결론은 이성계의 활솜씨를 빛나게 해준 귀한 엑스트라 A. 삼국지로 치면 관우에게 썰리는 안량 같은 포지션이다. 엑스트라 A일정도로 순식간에 죽긴 하는데, 이 일대를 휩쓸던 왜구들의 우두머리라는 점이다. 초특급 카메오인데 등장하자마자 죽은 셈이다.


2.1. 다른 기록[편집]


동사강목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당시 포로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기발도가 이원수(李元帥)의 진(陣) 친 것을 바라보고는 '이 군대의 형세는 지난날에 비할 바가 아니니 각별히 조심하라.' 했다."

하였다.

백사집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언급도 있었다고 한다.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상고하면, "고려 말에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장차 광주(光州) 금성에서 말에 먹이를 먹이겠다고 소리쳤다."고 기록되었는데, 주(註)에는 지금 담양부에 있다고 하였다.

이 같은 언급을 참조하면 어린 나이에도 왜구 중에서, 적어도 고려를 침략한 왜구 중 지휘관에 상당하는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인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내내 이성계는 왕조의 창시자로서 찬양해야만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이성계를 빛내는 업적으로 대표되는 아기발도 역시 후대에 이르기까지 태조와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언급된다. 실록에는 선조가 이상과 같이 논의한 기록이 있다. 태조가 쓰러뜨린 적들 가운데 네임드급 중 하나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날 경연에서 고(故) 재상 이준민(李俊民)은 이야기가 변방의 일에 미치자, 말하기를 '상께서는 왜국을 근심하십니까? 왜인은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하였다. 내가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더니, 준민은 '짧은 옷소매에, 단검(短劍)을 들고 맨발로 달리는 것은 잘하나, 그 밖에 다른 장기는 없으니 어찌 적(賊)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외숙 조식(曺植)도 항상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있는 것은 어쩐 일이냐?' 하니, 말하기를 '아기발도는 주객(主客)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적국에 깊숙이 들어왔으니 어찌 태조의 절제(節制)하는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호걸이 아닙니다.' 하므로, 나도 그렇다고 답하였다. 준민은 유장(儒將)으로서 명망이 있는 자인데 그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다.

조선왕조실록》선조 26년(1593) 6월 17일자 7번째 기사

승정원일기에는 고종이 각지의 관찰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전남도 관찰사 조종필과 대화하며 이같이 언급된다.

"曾是太祖高皇帝破阿只拔都, 而其地有勝戰碑矣."

"일찍이 태조 고황제께서 아기발도(阿只拔都)를 격파하였는데, 그곳에 승전비가 있다."

《승정원일기》140책, 고종 37년(1900) 7월 7일[양력 8월 1일] 10번째 기사

정약용이 황산대첩비를 읽고 그 감상을 시로 남겼는데 거기에도 언급된다.


3. 이름[편집]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아지' 역시 이두식으로는 '아기'라고 읽기 때문에 마찬가지 뜻이다. 용비어천가 제50장의 주해에서는 한글'아기바톨'이라고 당대의 독음을 적었다.

정사에는 인으로 기록되었는데, 얼핏 보면 한국 한자음으로 부른 일본식 이름으로 보이지만 '아기발도'는 그의 본명이 아니다. 그와 마주친 고려의 병사들이 '아기발도'라고 불렀기에 그대로 역사서에 기록되었을 뿐이다. 본명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용비어천가 50장의 주해에서도 아기발도를 일러 我軍稱阿其拔都(우리 군사가 부르기를 '아기발도'라 하였다.)라고 하여, 본명이 아님을 설명했다.

아기발도에서 아기는 우리말에서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사인 '아기'인 것이 확실하다. 아기는 이미 고대부터 원형이 거의 변하지 않은 순우리말이다. 800여 년 전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를 어릴 때 아지(阿之)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발도(拔都)는 몽골어로 용사나 영웅을 가리키는 바투르(ba'atur)의 한자 음차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바토르가 같은 단어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란 뜻. 즉 정리하면 아기바투르라는 한국어+몽골어식 이름이 된다.

이성계의 일대기에는 오랑캐 장수를 '호발도(胡拔都)'라고 부른 표현 또한 등장한다.

신우 8년 임술에 여진인 호발도(胡拔都)가 단주(端州)에 침범하니, 태조가 동북면 도지휘사로서 군사를 풀어서 공격해서 크게 이겼다. 바두는 겨우 몸만 도망쳐 갔다.

연려실기술 발췌.

몽골의 영향으로 '바투르'라는 단어가 고려 말기에는 상당히 흔히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는 원간섭기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몽골어 단어를 섞어쓰는 현상은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에서 일본어에서 온 단어들이 쓰이는 것과 비슷한 현상.

아기발도가 왜장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몽골식 명칭으로 지칭된 이유가 아기발도가 일본계가 아닌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몽골계가 상주하고 있던 제주에서 출생하여 당시 다국적 해상세력을 구성하고 있던 왜구에 협력한 몽골계 제주인이었기 때문이지 않았는가 하는 추정(출처: 한국 제주 역사 문화 뿌리학). 그러나 당시 문헌만 상고해봐도 이는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아기'는 방언으로 어린아이를 부르는 말이다. '발도'는 발돌(拔突)이라고도 쓰는데, 몽고(蒙古)말로 용감하여 대적할 자가 없는 것을 말한다.

용비어천가》 권7 50장의 주석 내용


我軍稱阿其拔都(아군칭아기발도)

우리 군사가 '아기발도'라 일컬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66번째 기사


즉, 아기발도 본인이 아기발도라고 자칭한 게 아니라 그 당시의 이성계의 병사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용비어천가에서 분명히 '아기발도'에서 '아기'는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발도'는 몽골어로 '영웅'을 뜻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발도라는 몽골어가 사용된 점은 당시 왜구 토벌전의 주력군인 이성계 군 대부분이 그의 사병, 즉 가별초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성계와 그의 사병 대부분은 대몽항쟁 막바지에 몽골에게 넘어간 이후 백여 년 가까이 원의 지배를 받은 동북면 일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몽골어로 고유명사를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훗날 36년의 일제강점기에 한민족의 언어 사용에 일본어가 깊게 침투해 있었을 정도이니, 100여 년이나 되는 몽골 간섭기 시기에 몽골어 단어가 당시 고려 민중들의 언어 사용에 침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3]

어찌됐든 현대어로 '꼬마 장군' 내지는 '꼬맹이 적장'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아기장수 우투리

아기발도의 본명은 따로 있었을 것이나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이 사람을 설명할때 아지발도(일본식 독음으로 아키바쓰)라는 명칭을 그대로 쓴다.

4. 정체에 대한 추정[편집]


고려사 기록이 꽤나 상세한데 이는 아기발도가 포함된 무리가 평소의 왜구와 많이 달라 기록할 거리가 된다는 뜻이다. 일단 굉장히 큰 규모였으며 철기병도 운용했다. 이들은 전쟁터에서도 사신을 죽이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 스스로 사신을 칭한(실제로는 정탐을 나온) 고려인 배검한테 술을 대접하고 철기병을 붙여 호송했다. 그리고 '하늘'[4]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단을 쌓고 여자아이를 잡아 인신공양을 하며 악기를 연주(아악/가가쿠, 또는 무악/가구라)했다. 이 기록에서 '점치는 자'도 언급된다. 고대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 임금의 역할이었던 것을 보면 아기발도는 최소 명문가 고위인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남의 나라 땅에서 이런 제사를 지낸 것을 보면 정복 의도도 충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려사

어린 나이임에도 지휘권을 갖춘 장수였던 것으로 보이며, 좋은 갑옷을 입고 있고 기마 무예까지 능숙했다고 한다.

원래 사무라이 즉 일본 무사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궁수였다. 그리고 고려 말 왜구들이 극성을 부리던 서기 14세기 일본 무사들은 말을 타고 칼과 창을 든 채로 적을 향해 돌격하는 기마 백병전에 능숙했다. 심지어 14세기 일본 무사들 중에서는 말에 쇠사슬로 만든 갑옷인 마갑을 입힌 중무장 기병들도 존재했다. 지금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 무사들이 말에 입히던 마갑의 유물이 한 점 보관되어 있다.[5] 물론 이후 일본이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이전의 중앙정권의 권력이 여러 다이묘들에게로 분산되어 기병의 유지비를 대기 어려워지면서 기병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6] 하지만 그럼에도 다케다 기마대 이야기가 현대에도 사실인 것 마냥 퍼져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 영향력은 남아있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아기발도가 평범한 왜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특히 고려사 변안열 열전을 보면 황산대첩 이후 왜구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이 왜구들의 동정을 알리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시 포로가 되었던 자가 적진에서 돌아와, “아지발도가 이장군(이성계)의 진용이 잘 짜여진 것을 보더니 자기 부하들더러, "이번 군대의 군세를 보니 과거의 장수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오늘 전투는 너희들이 각각 조심하라.”고 당부하더이다. 애초 아지발도는 섬에 있을 때 출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 무용에 탄복한 왜적들이 굳이 청하여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적의 우두머리들도 그를 보러 올 때에는 반드시 달려와 꿇어 엎드렸으며 부대의 지휘도 모두 그가 맡았습니다.”라고 알렸다.

《고려사》 열전 39권, 간신(姦臣) 2, 변안열: 변안열이 양광·전라·경상도 도체찰사로서 왜적을 물리치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아기발도는 사실 고려에 침공하는 것을 망설였다는 점, 왜구들도 아기발도를 보면 항상 상전을 대하는 것처럼 대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아기발도는 평범한 왜구 우두머리가 아니라 꽤 지체 높은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특히 이성계의 진용을 정찰하거나 그 진영을 파악하는 모습, 그리고 이성계와 이지란의 협공에 죽기 직전 몸소 필마 단기로 분전하며 사기를 고무하려 한 점은 확실히 평범한 도적떼가 아니라 정규군 무장에 가까운 모습이다.

또한 당시 일본남북조시대의 혼란기였는데 규슈에 근거지를 잡고 있던 남조가 북조에 궤멸당하던 시기와 황산대첩 시기 왜구가 대거 침공해온 시기가 겹친다. 이 때문에 고려말 왜구를 일본 남조 세력의 마지막 발악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7] 이러한 견해에서는 아기발도를 남조 측에 선 호족 세력 출신의 장수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사 변안열전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 관련논문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아지발도와의 발음 유사성을 근거로 그의 정체를 당시 규슈의 무사 세력이었던 아카보시(赤星) 가문이나 아지히(相知比) 가문의 인물로 추정된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당시의 고려인들이 이름을 몰라 그를 그냥 아기 장수라고 부른 것이며 용비어천가에 '아기'는 한국어로 '어린 아이'를 의미하는 보통 명사를 의미한다고 적고 있기 때문에 이 추정의 설득력은 떨어진다.

다만 아기발도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하는 해석과 달리 이성계를 띄우기 위해 과장되게 기록된 무명 해적 장수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결국 일본 측 기록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사실상 유일한 기록이 태조실록이다. 고려사의 기록 역시 거의 같은 시기 같은 집필진이 썼으므로 그 안에 포함된다. 조선왕조실록이 비록 꼼꼼하고 신뢰성 높은 기록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본편과 달리 태조실록 총서 부분은 조선왕조실록 다른 부분처럼 사관이 그 당시에 옆에 붙어서 일일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성계의 옛날 무용담'을 후대에 수집해서 만든 것이고 전주 이씨 왕가의 창시자로서 미화하기 위한 논조가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2022년 한국에서는 아기발도가 단순히 호족 출신이 아니라 더 높은 신분, 특히 일본 남북조 시절 남조의 덴노였던 고다이고 덴노의 손자인 "이쿠라노미야(伊倉宮)"로 추정한다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쿠라노미야의 아버지이자 남조의 고다이고 덴노의 아들 가네요시(懐良) 친왕은 정서대장군[8]으로서 규슈를 거점으로 세력을 끌어모아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임명되기도 하는 등, 본인이 지배하던 정서부(征西府)를 남조로부터 분리독립시키려던 인물이었는데, 그 아들인 이쿠라노미야는 1365년생으로 1380년엔 15, 16세이므로 '어린 영웅'이라 추측되는 아기발도의 나이와 일치한다.관련논문

이쿠라노미야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6대 쇼군(将軍)이자 고사가 천황(後嵯峨天皇)의 제1황자인 무네타카 친왕(宗尊親王)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9]


5. 대중매체에서[편집]


일본인이지만 일본 쪽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단지 이성계의 맞상대라는 점으로만 유명한 인물이다보니 한국 측 창작물에서만 중간보스격으로 인상깊게 등장한다. 이성계를 묘사하는데 맞상대인 아기발도가 별 것 아닌 인물로 연출되면 긴장감을 느낄 수 없으므로, '이성계만큼은 못하긴 해도 나름대로 강적'이라는 식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본국 일본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유명한 이런 점은 이순신에게 패배한 거로 유명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비슷하다.[10]

Why? 한국사 전쟁 황산 대첩 파트에서 등장. 다른 악역들의 얼굴이 누가봐도 악당으로 나오는 편이지만 아기발도는 정말 못생긴 사람으로 묘사된다.

고우영 화백이 그린 만화 고우영 수레바퀴에서도 이성계의 장수 시절을 다룬 파트에서 단역으로 잠시 등장한다. '나이가 어리다'는 실제 기록을 인용했는지 나이가 어린 미소년 장수로 등장하였으나 등장한지 두세 컷도 안 되어서 이성계에게 활을 맞아 죽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왠지 무서운 건 이성계가 쏜 화살이 그대로 입으로 들어가서 꽂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우영 화백의 창작은 아니고 면갑 때문에 얼굴도 쏠 수 없자 이성계가 투구 끈을 쏘았고, 이에 놀라서, 혹은 투구를 맞혀 기울어져 투구 끈이 목을 조른 탓에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키다가, 아기발도가 입을 벌리자 그대로 제2사를 날려 입을 맞혔다는 전승이 있기 때문. 명궁인 형제가 힘을 합쳐 죽이긴 했는데, 처음 쏜 사람이 이성계인지 이지란인지는 전승에 따라 다르다.

1969년에 초판이 나온 박흥민의 <이야기국사>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성계가 먼 거리에서 쏜 화살이 투구를 맞추자 놀란 아기발도가 입을 딱 벌렸고, 연달아 날린 화살이 입을 꿰뚫어서 죽였다고.

웹툰작가 유승진의 포천에서는 4막 28장(159화)에서 짤막하게 등장하는데,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를 엮어서 묘사한다. 작중 왜구들과 싸우던 이성계가 무쌍난무를 펼치던 아기발도를 보고는 이지란과 함께 투구를 벗기고 머리를 꿰뚫어 사살하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성계가 아기발도를 활로 쏘아죽인 이후 이성계 曰 "그러고 보니 그 어린장수 이름이 우투리였다던가?" 라고 짧게 언급한다.

드라마 정도전에도 아지발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으며 배우 서건우가 연기하였다. 기록상의 묘사처럼 나이가 마냥 어리지는 않지만, 외모가 준수하며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성격은 매우 호전적이며 잔악무도하다. 9화에 첫등장해 고려군을 발라먹는 위엄을 선보이며 10화에서도 이인임에게 등이 떠밀려 억지로 공격을 감행하게 된 이성계와 맞서 잠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아귀처럼 싸우는 이성계와 이지란의 활솜씨에 당해 쓰러지며 최후를 맞는다. 여기에선 정사의 내용을 각색해서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쏴서 면갑을 벗기고, 그 직후 이지란이 투구를 맞춰서 쓰러뜨린 뒤 이성계가 달려들어서 확인사살을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놀라 입을 벌리게 하고 입 안을 쏘아 죽였다는 전승보다 면갑을 벗긴 쪽이 사실성이 있다. 극에서는 아지발도가 입 부분이 뚫린 천 같은 재료로 된 면갑을 쓰고 있는데, 일본 면갑은 나무 같은 것으로 만들지만 입 구멍이 커서 입 안을 노린다면 그냥 쏘면 된다. 입은 있지만 구멍은 막힌 것도 있고.

고전소설 옥루몽의 후반부를 보면 이 아지발도에서 영감을 받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왠지 여기서는 몽골인이다. 실제 역사의 아지발도처럼 굉장한 용맹으로 아군을 몰아붙이지만, 역시 역사 속 인물처럼 주인공과 동료 장수의 화살 협공에 의해 죽는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권에서 농민들의 대화로 잠깐 등장한다.
[1] 왜구는 중앙의 통제를 받는 세력이 아니므로 일본 정부 측에서 기록을 남길 가능성이 낮았다. 애당초 일본에서는 육국사 이후로 국가 차원의 정사도 편찬하지 않았으니 변방의 인물에 대한 기록은 더더욱 남아있기 어렵다.[2] 당시의 정예는 무사의 형제와 가신들인데, 이들이 전멸했다는 의미. 아기발도의 정체가 미궁에 빠진 이유 중 하나다. 대가 끊기고 세력이 궤멸당한 셈이니.[3] 그나마 일본어의 잔재는 지속되는 언어순화운동으로 거의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 당시에는 그런 것도 없었을 테니 뭐.[4] 귀신도 바다도 아니고 하늘이라고 명시되어 있다.[5] 출처: 잊혀진 전쟁 왜구/ 이영 저/ 에피스테메(방송대출판문화원)/ 2007년 04월 출간[6] 간단히 말하면 똑같은 돈을 원래는 1명에게 집중되었던 것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진 상태다. 즉, 절대적인 수익은 똑같아도 개인이 가진 돈이 줄어든 것.[7] 역사적으로 무너져 가는 세력이 '마지막 발악'의 일환으로 한반도로 와서 깽판을 치는건 한국사에서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당장 아기발도와 비슷한 시기에 홍건적이 그랬으며, 명청교체기 당시엔 모문룡이 그랬다.[8] 직제상 흔히 말하는 쇼군, 즉 정이대장군과 동급의 직책이다.[9] 당시 일본은 난세였고 황족과 공가도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기발도와 이쿠라노미야가 동일인이 아니더라도 남조의 황족이었을 가능성 자체는 있다. 이 경우 아지발도의 정체를 추측해볼 만한 기록이 일본에서 사라진 것도 자연스럽다. 결국 승리한 건 북조인데다 남조 황손들은 소수를 빼면 숙청되었으니까. 이쿠라노미야의 기록도 굉장히 적다. 남조의 기록은 사라졌고, 북조가 남조의 사정을 다 알 수 없다. 설령 알아도,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싸우다 죽고 대가 끊겼으며 근거지도 사라진 남조 황족을 굳이 찾아 황족으로서 인정하고 행적을 기록할 이유가 없다.[10] 물론 와키자카는 아기발도처럼 아예 기록이 없는 건 아니고 일본 쪽 기록이 상세하지만, 임진왜란 커리어를 제외하면 별로 인상적인 인물이 아니라서 일본 대중매체에서는 평균 이하의 지나가는 등장인물 A 수준의 비중인 게 대부분이다. 반면 한국 측 창작물에서는 다른 장수들 다 제쳐두고 이순신의 라이벌 포지션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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