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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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집권 전
2.2. 집권
2.3. 죽음
3. 여담


1. 개요[편집]


니카라과에 민주주의를 주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고추를 먹이는 것과 같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아나스타시오 "타초" 소모사 가르시아(Anastasio "Tacho" Somoza García). 1896년 2월 1일 ~ 1956년 9월 29일.

니카라과의 19대 대통령(1937~1947, 1950~1956), 독재자. 타초는 별명이다.

니카라과 소모사 가문 3대세습의 시발점을 끊은 인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라는 말의 장본인이다.


2. 생애[편집]



2.1. 집권 전[편집]


산마르코스에서 부유한 커피 농장주였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레예스와 훌리아 가르시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니카라과에서 알아주던 집안 출신인 살바도라 데바일레와 1919년에 결혼해 정치 기반을 다진다. 1926년 그의 아내의 삼촌이었던 후안 바우티스타 사카사를 지지, 반란에 가담했으며 그와 친척이던 대통령 호세 마리아 몬카다의 지지 아래 국가헌병대 사령관으로 고속 승진한다.

1933년 니카라과에 주둔했던 미군이 대공황 여파로 인해 물러나고 산디노와의 내전이 종결되었지만, 국가헌병대 해체를 요구했던 산디노는 1934년 2월 21일 소모사 지지자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1936년 국가 헌병대를 이용해 대통령이었던 사카사를 몰아내고, 1937년 1월 1일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2.2. 집권[편집]


1937년부터 1947년, 1950년부터 1956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으로 재임했는데, 이 두 임기 사이에는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허수아비 정권을 유지했다. 그리고 비록 세계 대공황 때문에 니카라과를 떠나긴 했지만 지리적 요점 때문에 니카라과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의 독재정권 시절에도 그랬듯 속내야 모르지만 겉으론 일단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를 니카라과의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적합한 대통령이라며 간접적으로 인정해줬다.

이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니카라과와의 외교관계를 비서관이 만류하자, "소모사는 개새끼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Somoza may be a son of a bitch, but he's our son of a bitch.)"라는 말을 날렸다는 설도 있다.[1] 하여튼 이런 미국의 지지 덕분에 집권을 굳건히 하는 데 성공하였고, 미국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미국이 진주만 공습을 당하자 미국보다 먼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독일인 소유 재산 국유화는 덤.

집권 동안 많은 개혁을 이끌었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토지, 기업, 재산들을 자신 소유로 만들었으며 정적들을 해외로 추방했다. 다른 나라들의 지속적인 압박 때문에 1947년 의사 출신인 레오나르도 아르궤요를 당선시키지만, 허수아비라고 생각했던 아르궤요가 헌병대를 축소시키려고 하는 등 소모사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한 달도 안 되어서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자기 아내의 삼촌인 벤하민 라카요를 대통령으로 삼았다. 그리고 1950년 부정 선거로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2.3. 죽음[편집]


1955년 개헌을 통해 재집권을 가능하게 하자, 국내외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결국 1956년 9월 21일 레온에서 민주청년전선 회원인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스에 의해 암살되지만 장남인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기 때문에 독재 정권은 루이스 소모사의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물러날 때까지 20년 더 지속된다.


3. 여담[편집]


  • 아르헨티나후안 페론과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었다. 한국에서는 후안 페론의 스탠스가 다소 왜곡이 된 채로 알려졌기 때문에 얼핏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사실 후안 페론도 소싯적에는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에 잠시 거주하면서 무솔리니의 통치술에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은 데다가 공산당을 때려잡은 경력도 있고 반공독재정권 치하의 파나마와 파라과이, 그리고 프랑코 집권기의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해나갔기 때문에 동질감이 있었다. 정착 취했던 정책은 정반대에 가깝기는 했지만 말이다.

  • 후배인 자이르모부투 세세 세코처럼 정적 탄압보다는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은데, 소모사는 국가 경작지의 50%를 보유하며 국내는 물론 국외에 대저택, 고급 자동차나 양복, 아내를 위한 방대한 보석 컬렉션을 수집했으며, 1956년에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재산은 당시 가치로만 1억 5000만 달러(2023년 기준으로 약 16억 4천만 달러)에 달했으며, 1979년까지 소모사의 자녀들은 5억~10억 달러(2023년 기준으로 약 21~41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하여 수십 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가족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가 집권할 동안 요직에 앉은 소모사 가문 출신 사람은 최소 11명에 달했다.

  • 그가 집권할 동안 니카라과의 영화관에서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소모사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영상과 함께 '소모사와 영원히'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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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했다고 전해지긴 하는데, 공식 문서가 없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