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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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오 "타치토" 소모사 데바일레(Anastasio "Tachito" Somoza Debayle)
1925년 12월 5일 ~ 1980년 9월 17일
50년 가까이 니카라과를 통치했던 소모사 가문왕조의 마지막 독재자. 아버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와 형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에 이어 1967년부터 1972년, 1974년부터 1979년까지 국왕 대통령을 지내며 독재 정치를 쳘쳤다.
아버지가 "타초 Tacho"라는 닉네임으로 불렸다면 소모사 데바일레는 작은 타초라는 뜻의 "타치토 Tachito"라고 불렸다.
개인적인 성품은 막장이었고, 주장하던 정책들도 그저 막장에 가까웠는데 형인 루이스 소모사는 그래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어서 야당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주택을 건설하고 복지제도를 확충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타치토는 반정부 세력을 힘으로 밀어붙이는 정책을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루이스 소모사 집권 말기에 과 갈등을 겪다가 형이 죽은 뒤에 거수기 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연히 야당이나 산디니스타 반군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그러다 1972년 상반기에 야당인 보수당을 상대로 유화책을 써서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는 대가로,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면서 2선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이는 훼이크였고,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수도 마나과에 대지진이 발생, 1만명이 사망하고 25만명이 이재민으로 전락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타치토 소모사는 외국에서 보내온 지원금을 제대로 쓰기는커녕 그 돈을 대거 횡령하여 자기와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배를 채웠고 그 중 상당수는 타치토가 주도하는 사업자금으로 투입되었다. 당연히 지진수습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고, 국민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1]
또한 빈부격차를 해소시키려는 정책이나 복지정책을 펴려는 의지 등은 애초에 없었으며, 그저 사치만을 누릴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당시 니카라과는 농축산업이 발달했지만 인구의 절대다수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데 급급했고, 문맹률무려 50%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모사 데바일레가 1974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통해 다시 당선되자 빈민층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계층에서도 반발이 터져나왔고, 산디니스타 반군이 지방에서 세를 확장해나가더니 1978년에 자신이 거주하던 대통령 관저가 산디니스타 혁명군에게 점령되는 사태까지 펼쳐졌다. 이 사건 자체는 얼마안가 진압되긴 했지만 이후에 아나스타시오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논조[2]의 유력지[3] «라 프렌사»의 편집인 페드로 차모로를 암살해버렸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빈농들과 중소기업 운영자들, 중산층들까지 들고일어섰고, 신디니스타 혁명군도 니카라과에 진입했지만 소모사는 그 동안 쌓아온 돈[4]과 사병들을 바탕으로 생각외로 오래 버티는 듯 싶었다.
그러나 미국인 기자 빌 스튜어드가 소모사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로인해 미국이 지원을 완전히 끊는 등 상황이 소모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혁명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1979년 7월에 소모사는 미국으로 도주했다. 결국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세력이 주도권을 잡지만 1981년 레이건이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에게 불만이 있던 세력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주면서 니카라과는 내전 상황으로 돌입한다. 그리고 이란 콘트라 사건이... 여하간 소모사 테바일레는 도주한 다음에 미국에서 머물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도 욕을 먹고 사실상 쫓겨났고, 쫓겨난 이후에 파라과이에서 편하게 망명생활[5]을 보내다가 1980년 9월 17일 아순시온에서 벤츠를 타며 운전하던 중 산디니스타의 사주를 받은 아르헨티나의 좌익게릴라 조직인 인민혁명군 조직원에 의해 기관총 세례를 받고 죽었고 그 시체마저도 인민혁명군 조직원에 의해 자신의 벤츠와 함께 절벽으로 추락하여 불에 타 교통사고로 위장당했다. 향년 55세.

[1] 위대한 히스패닉 메이저리거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이 당시 구호지원금을 보냈다가 소모사 일당의 전횡을 알고 쳐서 비행기를 타고 직접 돈이 아닌 구호물자를 전달하러 가려다가 악천후로 비행기추락하여 사망했다.[2] 다만 소모사에게 비판적이라고 해도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중도보수성향 정도의 언론사였으며(애초에 차모로 일가가 니카라과 보수당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보수당 소속으로 대통령을 배출해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집안이었다. 산디니스타 혁명이후로는 옛말이 되기는 했지만)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에는 라 프렌사지는 우파적인 논조를 지닌 언론사가 되었다.[3] 사실상 유일했던 신문사라고 봐도 된다.[4] 아닌 게 아니라 니카라과 농지와 기업의 50% 가량을 소모사 일당이 소유했을 정도다. 참고로 소모사가 소유한 기업은 1980년대 전반기에 국유화되었지만 80년대 후반부터 민영화가 다시 추진되기 시작하고 90년대에 우파정권이 집권하면서 다시 민영화가 되었으며 토지도 80년대 전반기에 소작농들에게 배분되지만 80년대 후반기부터 90년대까지 니카라과의 경제사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부농으로 넘어간 사례가 적지 않다.[5] 당시 파라과이도 소모사 집권기의 니콰라과처럼 반공 군사독재체제였다는 점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