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티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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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역사가, 언론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막바지에 강화교섭을 진행하였으며 직후 성립된 프랑스의 2대 대통령을 지냈다.
2. 생애[편집]
2.1. 청년기[편집]
마르세유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엑상프로방스[2] 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변호사로 등록했지만 정작 주전공인 법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문학/역사/언론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821년 9월 티에르는 파리에 도착하면서 기자 겸 역사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티에르는 자유주의적 노선을 띄면서 퇴행적이고 억압적인 정치를 펼치던 샤를 10세를 강하게 비판하던 언론인이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얻은 지식으로 1823년부터 1827년까지 "프랑스 혁명사"라는 역사책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대박을 쳐서 1834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에 들어가게 된다.[3]
2.2. 초기 정치 경력[편집]
티에르는 7월 혁명 과정에서 샤를 10세 축출에 상당한 공을 세웠고[4] 7월 왕정에도 참가하기 시작한다. 1832년 내무부 장관으로 시작하여 외무부 장관, 무역부 장관, 의회 의장과 같은 요직을 두루 거쳤고 1836년과 1840년, 두 차례에 걸쳐 총리에 임명되었다. 1832년 샤를 10세의 며느리 베리 공작부인의 반란을 [5] 저지했고, 1840년에는 세인트헬레나에 매장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유해를 프랑스 본토로 이장시키는 일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직후 당시 내란이 한창이던 스페인 개입 문제[6] 를 놓고 국왕 루이필리프와 충돌을 빚은 끝에[7] 모든 관직에서 사퇴하고 역사서 저술에 몰두한다.
1848년 혁명 당시 루이필리프는 티에르에게 다시 총리직에 오를 것을 권유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티에르는 이를 거부하고 혁명 세력에 참여한다. 새로 수립된 프랑스 제2공화국 초대 대선에서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뽑았으며, 이 선택은 두고두고 비난 받게 된다. 루이 나폴레옹의 친위 쿠데타에 의해 공화국이 붕괴되고 프랑스 제2제국이 수립된 후로는 의원직만 가진 채로 별로 두드러진 정치 활동을 보이지는 않았다.[8] 조용히 칩거하던 티에르는 그 당시로는 엄청난 고령이었던 70대에 접어들었고, 그렇게 그저그랬던 정치인으로 사라지는 듯이 보였다.
2.3.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파리 코뮌[편집]
- 자세한 내용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파리 코뮌 항목 참고.
1870년 엠스 전보 사건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티에르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반대했다. 하지만 프랑스 내 다수의 반응은 전쟁을 원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여론에 휩쓸린 나폴레옹 3세는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프로이센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가 스당 전투에서 제대로 박살난다. 결국 나폴레옹 3세가 스당에서 항복해 포로로 잡힌 직후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제2제국은 붕괴된다.
앞서 전쟁을 반대한 선견지명을 보여준 덕분에 티에르의 정치적 위상은 급상승했고 임시 정부는 그에게 입각할 것을 제의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항전을 결의한 임시 정부와 달리 티에르는 조기 강화협상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입각을 고사한다.[9] 그 대신 임시정부는 그에게 외교 특사를 맡겨서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바이에른 왕국, 러시아 제국 등의 개입을 이끌어 보려고 했지만 프로이센에는 당대 최고의 외교 천재 비스마르크가 있었고, 비스마르크가 전쟁 이전에 이미 다 손을 써놨던 탓에 여타 열강들의 개입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1871년 2월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는 항복을 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고, 티에르는 임시정부의 수장 겸 협상단 대표로 강화교섭을 진행한다. 하지만 1871년 3월 굴욕적인 강화[10] 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고[11] 일시적으로 밀린 티에르와 임시정부는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긴다. 한편 파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정부가 수립되니, 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 파리 코뮌과 임시정부 간의 대치는 5월까지 이어졌지만 결국은 프로이센군의 지원[12] 을 받은 티에르의 임시정부가 코뮌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나폴레옹 3세를 조졌던 독일 제국에선 프랑스에 보나파르트 제정을 복고하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비스마르크의 반대파인 주불 독일 대사인 하리 폰 아르님 백작. 빌헬름 1세도 이에 지지를 표명했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공화국이어야 군주국들의 대불 동맹이 유지될 수 있다고 프랑스 공화국의 유지를 강행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아르님 백작이 티에르 정부는 곧 공산주의자들이나 군부 독재로 대체될 것이 뻔하니 독일에서 쿠데타를 사주하여 왕정을 복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결국 대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2.4. 이후[편집]
코뮌을 진압한 이후 프랑스에는 공식적으로 공화정이 수립됐고, 티에르는 새 공화정의 첫번째 대통령이 된다. 취임 직후 티에르에게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상흔을 지우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고, 티에르의 노련한 국정 운영 덕분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독일 제국에 조기 지불하면서 프랑스에 막대한 채무를 지워 이를 외교적으로 이용하려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무력하게 당한 군대를 재편하기 위해 복무기간 5년인 징병제를 도입하자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당시 의회 다수를 차지한 왕당파들과 공화국 선포를 두고 다툼을 벌였고[13] , 공화파들과도 파리 코뮌 강제 진압으로 생긴 앙금으로 적극적인 협력은 하지 못했다.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게 된 티에르는 의회를 압박하기 위해 1873년 대통령 사직서를 제출하는 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의회가 이 사직서를 그대로 수령하면서 티에르는 얼떨결에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왕당파는 이를 기회로 삼아 티에르 대신 강성 왕당파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을 대통령에 앉혀 왕정복고를 시도하지만 내분으로 인해 실패한다.
이후 티에르는 공화주의 보수파의 막후 보스로 활동하다가 1877년 사망한다. 사후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3. 기타[편집]
파리 코뮌을 진압했던 탓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티에르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고, 사후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무덤은 종종 공산주의자들에게 반달당하곤 한다.
개인적인 취미로 미술품 수집을 즐겼는데,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진 회화부터 동양의 미술품까지 다양한 종류를 수집했다. 동양미술품은 만국 박람회에서 판매를 전제로 출품된 작품을 통해 구했다고 한다.
다른 프랑스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여자 문제가 매우 화려(?)했다. 학생 시절에는 어느 부잣집 여성과 연애하다가 그녀의 오빠와 다툼이 벌어져서 결투까지 벌였는데 둘다 총에 맞지 않아서 유야무야 끝났다. 또한 1833년에 20살 연하인 엘리스와 결혼했는데, 티에르는 이전부터 그녀의 어머니 에우리디케와 친한 사이여서 엘리스가 사실 티에르의 친딸이 아니냐는 악성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럿 정부를 두었다.
"샹보르 백작(앙리 5세)이 프랑스 공화국의 수립자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앙리 5세를 칭찬하는게 아니라, 앙리 5세의 고집 탓에 프랑스의 왕정 복고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을 비꼰 것이다. 이부분은 앙리 5세 문서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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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도라 공동 영주 겸임.[2] 당시 이름은 엑스 Aix[3] 그러나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티에르의 저작을 제대로 된 저작물로 쳐 주지 않는다.[4] 역사가로 얻은 명성이 언론인으로써 대중에 호소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5] 샤를 10세의 손자인 샹보르 백작을 왕위에 앉히려 한 사건[6] 이 당시 스페인은 이사벨 2세와 이사벨 2세의 외삼촌이었던 카를로스 대공 사이의 왕위계승전쟁이 한창이었다. 카를로스 대공의 이름을 따 보통 카를로스 전쟁이라고 많이 불리는 편.[7] 티에르는 스페인에 개입할 것을 원했지만 평화주의자였던 루이필리프는 개입을 꺼렸다.[8] 사실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이던 시절에 그를 비판한 적이 있었고, 쿠데타 직후 코렁탕 먹어 몸을 사려야 했다.[9] 그리고 굴욕적인 종전 이후 '티에르가 하자는 대로 일찍 강화했으면 이런 개쪽은 안 당했을거 아니냐'라는 여론이 대두되면서 티에르는 패전에 대한 비난 여론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사실 프로이센군이 파리 시내에서 하루종일 승전 퍼레이드를 펼치는 것을 허락해서 미친듯이 까이긴 했다.(...) 단지 패전이 티에르의 책임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뿐이다.[10] 파리 시내에 설치된 모든 대포를 철거할 것을 비스마르크가 요구했다.[11] 그 당시 티에르를 두고 많은 프랑스인들이 매국노라고 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던만큼 티에르가 실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이 많진 않았다. 일단은 티에르 역시 기분이 좋진 않았는지 비스마르크와 강화교섭을 끝내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고 전해진다.[12] 특히 프로이센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시기 스당과 메츠에서 잡은 군인 포로들을 석방했는데 이들이 파리 코뮌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3] 웃긴건 티에르는 본인도 왕당파였음에도 국왕 선출을 거부하고 공화국을 멋대로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