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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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지도자 겸 국가수상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파일:아돌프 히틀러 사진1.jpg

출생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브라우나우암인
(現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주 브라우나우암인)
사망
1945년 4월 30일 (향년 56세)
나치 독일 베를린 퓌러붕커
(現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요양원 앞마당 지하)
재임기간
제24대 국가수상
1933년 1월 30일 ~ 1945년 4월 30일
제3대 국가대통령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 퓌러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서명
파일:아돌프 히틀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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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 (1837년 ~ 1903년)
어머니 클라라 푈츨 (1860년 ~ 1907년)
배우자
에바 브라운 (1945년 4월 29일 결혼)[1]
학력
실업학교 중등과정 (졸업)
실업학교 고등과정 (중퇴)
병역
육군 상병 (Gefreiter) 만기전역[2]
종교
가톨릭불명(범신론)[3]
신체
175cm[4], 68kg
최종 당적

상훈
1급 철십자 훈장
2급 철십자 훈장
전상장 (Verwundetenabzeichen)



파일:Hitler portrait.jpg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4. 시클그루버의 악연, 그의 이름에 대하여
5. 사상
5.1. 정치 사상
5.1.1. 영향 받은 학설들
5.2. 인종주의
5.2.1. 유색인종에 대해서
5.3. 아돌프 히틀러와 종교
6. 인간 아돌프 히틀러
6.1. 예술적 취향
6.1.1. 건축
6.1.2. 음악
6.2. 아돌프 히틀러와 미술
6.3. 성격
6.4. 식습관과 혐연
6.6. 사치와 부정부패
6.7. 평상시 목소리
9. 소속 정당
10. 선거 이력
11. 히틀러의 라이벌
12. 히틀러의 협력자
13. 각종 음모론
14. 각종 매체의 아돌프 히틀러
14.1. 역사서
15. 기타
15.1. 유럽 대륙 및 영미권
15.2. 아시아
15.2.1. 대한민국
15.2.2. 일본
16. 어록
17. 관련 이미지
18. 둘러보기 틀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 태생의 바이마르 공화국 제3대 국가대통령이자 나치 독일퓌러.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지도자로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정권을 잡아 1933년 총리가 되었고, 수권법을 통과시키는 것을 통해 독일의 민주주의 체제를 무력화시켜 나치 독일을 수립한 후 1934년 퓌러의 자리에 올랐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개시하여 막대한 인명 손실을 초래하고,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 등 독일의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쟁범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이던 1945년 4월 30일 칩거하던 퓌러붕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고, 며칠 후 5월 9일, 그의 뒤를 이은 플렌스부르크 정부연합군에 항복하며 그가 수립한 나치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2. 약력[편집]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틀딱히.jpg}}}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세계를 지배 할것이다."

나의 투쟁》 中

1933년 독일 총리가 되었으며, 1934년 독일 대통령을 겸직하면서 퓌러(총통)가 되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이를 총지휘했다. 또한 홀로코스트와 같은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주모자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브라우나우암인이라는 도시의 알로이스 히틀러라는 평범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가를 꿈꾸며 상업 미술가 활동을 이어나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제국군(바이에른 왕국군)에 자원입대하였다. 독일 제국의 패전 이후 히틀러는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에 들어가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원래는 감시역으로 파견되었는데, 정당원이란 사람들이 그냥 불평만 늘어놓는 뜨내기들로 보이니까 본인이 일침을 놓으면서 입당했다.



1936년 에센에 위치한 크루프 공장에서의 연설(2분 49초 부터 유명한 장면을 볼수 있다)
  • 해당 연설은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3년 차이자, 이틀 후에 1936년 총선 및 라인란트 재무장에 관한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던 시점에서 이루어져있다. 따라서 이 연설은 지난 3년 간의 히틀러 정권이 이룩한 업적을 독일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이 주가 되고 있다.

Wir sind doch wieder ein so anständiges Volk geworden!

(비어 진트 도흐 비더 아인 조 안슈텐디게스 폴크 게보르덴!)

우리는 다시 올바른 국민이 되었습니다!

Wir sind doch jetzt wieder ein so fleißiges und tatkräftiges Volk geworden!

(비어 진트 도흐 예츠트 비더 아인 조 플라이시게스 운트 타트크레프티게스 폴크 게보르덴!)

우리는 지금 다시 근면하고 활기찬 국민이 되었습니다!

Was schaffen wir jetzt nicht wieder in Deutschland?

(바스 샤펜 비어 예츠트 니히트 비더 인 도이칠란트?)

지금 독일이 해낼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Was haben wir nicht für Aufgaben? Man hat uns die ganzen Jahre schon eingeredet, dass der Deutsche sowieso nicht ganz gleichwürdig sei den anderen Völkern in der Welt.

(바스 하벤 비어 니히트 퓌어 아우프가벤? 만 하트 운스 디 간첸 야레 숀 아잉게레데트, 다스 데어 도이체 조비조 니히트 간츠 글라이히뷔르디히 자이 덴 안데렌 푈케른 인 데어 벨트.)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우리는 독일인들은 세계의 다른 민족들과 전혀 동등하지 않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Was haben wir heute für Aufgaben? Was für gewaltige Werke bauen wir? Wir bauen heut' die schönsten Straßen, gewaltige Anlagen industrieller Art, neue Erfindungen haben wir gemacht, ungeheure Wohnhauskolonien. Sie werden entstehen und sind bereits entstanden. Was wird nicht überall gearbeitet auf allen Gebieten.

(바스 하벤 비어 호이테 퓌어 아우프가벤? 바스 퓌어 게발티게 베르케 바우엔 비어? 비어 바우엔 호이트' 디 쇤슈텐 스트라센, 게발티게 안을라겐 인두스트릴러 아르트, 노이에 에르핀둥겐 하벤 비어 게마흐트, 웅게오이레 본하우스콜로닌. 지 베르덴 엔츠텐 운트 진트 베라이츠 엔츠탄덴. 바스 비르트 니히트 위베랄 게아르바이테트 아우프 알렌 게비텐.)

우리가 해온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짓고 있는 위대한 작품들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거대한 공장시설을 짓고, 새로운 발명품들을 만들고 있으며, 어마어마한 주택가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완성되고 있거나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모든 분야 중에 잘 해내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Wir haben in diesen drei Jahren bewiesen, daß wir ein Volk sind, das sich sehen lassen kann vor den anderen.

(비어 하벤 인 디젠 드라이 야렌 베비젠, 다스 비어 아인 폴크 진트, 다스 지히 젠 라센 칸 포어 덴 안데렌.)

지난 3년간 우리는 독일 국민이 다른 국민보다 훌륭히 해보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습니다.

Und darum bitte ich nun deutsches Volk: Darüber gib nun dein Urteil ab! Der Welt unterstell ich mich nicht! Die kann mich nicht richten! Nur dir unterwerfe ich mich, Urteile du über mich!

(운트 다룸 비테 이히 눈 도이체스 폴크: 다뤼버 기프 눈 다인 우르타일 아프! 데어 벨트 운테르슈텔 이히 미히 니히트! 디 칸 미히 니히트 리히텐! 누어 디어 운테르베르페 이히 미히, 우르타일레 두 위버 미히!)

그렇기 때문에 저는 독일 국민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제 판단해주십시오! 저는 (다른) 세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세계는 저를 심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저를 예속하고, 심판할 수 있습니다!

Leg du ein Bekenntnis ab, Ob du meine Arbeit für richtig hältst, ob du glaubst, dass ich fleißig gewesen bin, dass ich gearbeitet habe, dass ich mich in diesen Jahren für dich eingesetzt habe, dass ich anständig meine Zeit verwendet habe, im Dienste meines Volkes. Gib Du jetzt deine Stimme ab, wenn JA dann tritt für mich ein, so wie ich für dich eingetreten bin!

(레크 두 아인 베켄트니스 아프, 오프 두 마이네 아르바이트 퓌어 리히티히 헬츠트, 오프 두 글라우프스트, 다스 이히 플라이시히 게베젠 빈, 다스 이히 게아르바이테트 하베, 다스 이히 미히 인 디젠 야렌 퓌어 디히 아잉게제츠트 하베, 다스 이히 안슈텐디히 마이네 차이트 페르벤데트 하베, 임 딘슈테 마이네스 폴케스. 기프 두 예츠트 다이네 슈티메 아프, 벤 야 단 트리트 퓌어 미히 아인, 조 비 이히 퓌어 디히 아잉게트레텐 빈!)

숙고해주십시오. 만약 제가 해온 일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실히 일해왔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그동안 여러분을 위해 일해왔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국민 여러분을 위해 시간을 바쳤다고 생각한다면. 부디 찬성 투표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 힘차게 일어섰던 것처럼!


그는 괴벨스와 함께 청중을 압도하는 연설과 경이로운 선전능력을 발휘하여 동네 소수정당에 불과했던 나치당을 제1당으로 일으켜 세웠다. 정권을 장악한 후 총리직과 새로 얻은 대통령직을 합쳐 퓌러의 자리에 올랐다.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했으며, 군수산업중공업을 집중 육성하고 아우토반과 같은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건설해 독일을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했고, 사회 각 영역에 군국주의적 색채를 강화하는 조치들을 실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있고 패배주의에 찌들었던 독일 국민 대부분의 열광을 받기에 충분했고 심지어 '히틀러=독일의 메시아'라는 나치 당국의 선전을 그대로 믿는 국민들도 나올 정도였다. 전쟁을 기피하는 연합국의 소극적인 반응에 힘입어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주데텐란트 지역을 무혈로 독일에 병합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미래 비전은 아리안의 세계 지배로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폴란드 침공은 1차 대전으로 잃은 실지의 회복은 물론, 독소 동맹으로 동부 전선을 고착하고 서쪽에만 신경쓸 수 있게 됐다. 드디어 연합국선전포고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 나치 독일은 영국, 프랑스의 소극적 자세에 따른 이른바 가짜 전쟁의 전개를 역이용하여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복속시키고, 드디어 양 진영은 격렬한 전면전에 돌입한다. 독일은 마지노 선을 우회해 대대적인 프랑스 침공으로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이른바 전격전으로 단숨에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대륙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나, 대전 중반부를 넘어서고부터는 독소전쟁의 전략적 실책에 짐덩이가 되어 버린 주축을 떠안은데다 일본의 도발로 전선이 확대되는 등 악재가 겹쳐 매우 열세에 처하게 된다.[1]

그와 동시에 점령지에서도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점령지 주민 학살을 주도하고 각종 전쟁범죄를 방치, 조장함으로써 그는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레지스탕스빨치산들이 돌아다니며 테러, 사보타주를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시즘의 압제와 인권 탄압에 질려 내부적으로도 반나치 인사들이 암암리에 생겨났다. 유능한 과학기술자들은 연이어 연합국으로 망명하거나 투항했으며,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을 비롯한 군부 측근들까지 히틀러에 대한 암살쿠데타를 시도했다. 결국 전쟁 말기 그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실패와 노르망디 상륙 이후 반 년에 걸친 연합국의 공세에 독일은 주도권을 완전히 잃고 몰락해 버렸다. 서부에 전력을 몰아 회심의 반격을 노린다는 계획도 실패하고 동부에서는 소련군이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계속된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연합군 전략폭격기들이 히틀러가 애써 만들어놓은 산업단지들과 도시들을 전부 초토화시켜 버렸고 독일의 전쟁수행능력도 점점 악화되었다. 군대가 와해되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진격도 후퇴도 없이 그저 "결사항전을 하라"고 떼를 썼다. 지휘에서 전략과 전술이 실종되었고, 물자의 보급도 끊겼다. 이미 전선에는 소년병과 노병이 징집되어 최전방에 끌려가 싸운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죽기 1주일 전까지 편성도 제대로 안 된 부대를 데리고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했다.[2] 이윽고 1945년 4월 30일, 소련군베를린을 포위하자 총통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 넣은 독재자의 최후는 허망했다.

패색이 짙어지기 전에는 독일인들에게 거의 신으로 숭배받는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종전 후에는 유럽에서나 전세계적으로도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나치즘에 입각하여 전쟁 중 점령지의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는 등 숱한 전쟁 범죄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또한 홀로코스트 같은 인종 학살을 주도했고 T-4 프로그램 같은 장애인 말살 정책을 펴기도 했다.

남미칠레, 아르헨티나는 친독 국가였다. 다만 이들은 부득이한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치의 남미 도주 문서 참고. 중동, 아프리카인도 등지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이다. 일부는 대놓고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기도 한다. 이들은 영국,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에게 시달린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발트 3국, 아이슬란드, 스웨덴 등은 나치 독일의 후원자였다. 핀란드, 발트 3국은 소련에게 많이 시달려 부득이하게 나치와 손을 잡았었고, 아이슬란드는 덴마크 군주인 크리스티안 10세 때문에 화가 났던 아돌프 히틀러가 독립시켜줬기 때문이다. 단 발트 3국을 제외하면 이들 나라들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더라도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으로 여기진 않는다.[3]

2010년대 후반 들어 유럽의 이슬람 난민들이 유럽에서 범죄 등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자 비주류 민족 및 인종들을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극우파들이 유럽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즉, 유럽에서 극우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인데, 그래도 하도 이미지가 시궁창이므로 자신들은 나치가 아니라고 하며 연성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마린 르펜 등이 그렇다.

여담으로, 히틀러는 전 세계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물론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말이다. 히틀러와 똑같은 독일 내의 또다른 대표 제2차 세계 대전의 인물들인 헤르만 괴링, 빌헬름 카이텔, 카를 되니츠,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같은 사람들은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인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괴링은 그나마 나치당 활동 경력이나 권력서열,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삽질들 덕분에 타 인물들보다 인지도가 높지만 나머지는 보통 역사나 군사학 전공자, 덕후들이나 아는 수준이다.


4. 시클그루버의 악연, 그의 이름에 대하여[편집]



아돌프 히틀러가 누렸던 수많은 행운 중에서 맨 처음 행운은 히틀러가 태어나기 13년 전에 닥쳤다. 1876년 훗날 히틀러의 아버지가 되는 사내가 이름을 알로이스 시클그루버에서 알로이스 히틀러로 바꾼 것이다. 아버지한테 가장 고마운 점이 시클그루버라는 상스럽고 촌스러운 성을 내다버린 것이었다는 아돌프의 술회는 빈말이 아닐 것이다. 확실히 Heil Schicklgruber!(하일 시클그루버!)는 민족 영웅을 경배하는 인사말로는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리라.

이언 커쇼, "히틀러" 1권 (p. 39)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의 원래 성은 오스트리아 페인트공 출신의 뜻을 지닌 시클그루버(Schicklgruber)였으나, 알로이스의 어머니이자 아돌프의 할머니인 마리아 아나 시클그루버(Maria Anna Schicklgruber)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와 재혼하면서 알로이스의 성이 히들러로 바뀌었고, 1876년에 히들러에서 히틀러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

이 일은 모두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기 때문에 아돌프의 성이 시클그루버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아돌프의 정적들과 소련군과 연합군들이 아돌프를 놀릴 때 "아돌프 시클그루버"라고 불렀다. 일부 소련군은 "우리는~ 베를린에 처박혀 있는 광분한 시클그루버 아저씨를 곧 만나러 간다네~"라는 요상한 노래도 부르며 조롱했고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들도 전쟁포로로 잡힌 SS 무장친위대들에게 얌마, 니네 위대한 총통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사람 말인데, 원래 오스트리아 페인트공 출신으로 진짜 성씨는 "시클그루버" 랜다. 라며 맞장구를 치며 조롱했다.[4] 물론 독일 점령지에서 저랬다면, 게슈타포친위대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불구가 될 정도로 구타를 당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다. 아돌프 본인도 자신의 인생의 불명예로 생각할 정도였다. Gruber가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가장 흔한 성씨다보니 독일어권에서는 굉장히 오스트리아인스러운 이름으로 들린다고 한다.

히틀러라는 성은 히들러(Hiedler), 휘틀러(Hüttler)라는 성의 바리에이션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 유래는 오스트로바이에른어로 천정천을 의미하는 Hiedl이나 독일어로 헛간을 의미하는 Hütte에서 왔을 것이라 보는 의견이 있지만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Hitler라는 성은 알로이스 시클그루버가 자신의 성을 바꾸면서 만든 성씨라 독일에서는 거의 히틀러의 가족들이나 쓰던 성이고, 바리에이션인 Hiedler, Hüttler도 독일어권에서는 그리 많이 쓰이는 성은 아니었다. 저 성으로 검색하면 뜨는 사람들이 모두 아돌프 히틀러의 가족일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천하의 대악당으로 평가되면서 Hitler라고 하면 바로 아돌프 히틀러를 떠올리게 되어 독일어권에서는 더 이상 이 성을 쓰지 않게 되었다. 2차 대전 이후에도 살아남은 히틀러의 가족들이나 Hitler 성씨를 지닌 이들은 Hiedler나 Hissler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가끔 히틀러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이거나 자식에게 지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네오 나치나 진짜 나치 후손이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100%라고 봐도 될 정도다. 다만 아예 아돌프까지 붙은 아돌프 히틀러 우노나는 그런 오해를 받기 쉽지만, 아버지가 역사를 잘 몰라서 그냥 유명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히틀러라는 성뿐만 아니라 아돌프라는 이름도 서양 사회에서는 거의 나쁜 이름을 넘어 대표적인 금지어로 취급받고 있다. 아돌프는 독일에서 흔한 이름이었으나 종전 이후에 출판된 전화번호부를 보면 그 흔했던 이름들이 싹 사라진다. 물론 아돌프라는 이름은 오스나브뤼크의 성 아돌푸스(축일은 2월 11일)와 같은 가톨릭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써 왔던 이름이기에, 나치 정권 때나 그 전에 태어난 노인들 중에는 아돌프라는 이름을 가진 경우가 간혹 보이지만 새 아기한테는 지어주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아돌포, 루돌프, 랜돌프, 돌프 등 약간의 변형을 거친 이름들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북유럽 지역의 경우 아직도 아돌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존재하긴 한다. 다만 북유럽 지역에서 네오나치의 기세가 상당하다 보니 히틀러에 경도된 네오나치들이 이름을 따왔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긴 하다.

Ефрейтор Шикльгрубер не зря сидел в тюрьме! (시클그루버 상병께선 깜빵에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던 게 아니라지!)

-

소련의 프로젝트성 하드락 밴드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 1986)의 노래 "나의 투쟁"(Mein Kampf) 첫 소절[5]

[6]


러시아에서는 '아돌프 기틀례르(Адольф Гитлер)'라고 표기한다. 원래 러시아어에는 /h/ 발음이 없는데[7], 인명이나 지명의 h를 /g/ 발음의 Г로 썼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인들은 /h/를 Х보다는 Г에 가까운 발음이라고 인식해 왔다.[8][9]

그리고 워낙 히틀러의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악명 높다보니, 구글이나 유튜브에서 히틀러를 검색하면 필터링돼서 연관 검색어가 뜨지 않는다.

5. 사상[편집]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410414_400.jpg

1941년 4월 14일 타임지

아돌프 히틀러의 사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유럽은 멸망하리라"는 식의 염세주의[10], 변질된 니체주의에 입각한 우생학인종주의, 사회진화론과 독일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기반한다.

거대한 영향력에 비하자면 사상 체계는 빈약하고 체계성이 없어 상호모순적인 측면도 많았다. 나의 투쟁 출판 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책과 모순된 정책으로 비웃음을 샀다. 심지어는 나치즘의 이론조차 히틀러가 세운 게 아니고 그레고어 슈트라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등이 세웠는데, 슈트라서는 장검의 밤 때 숙청당했으며, 로젠베르크는 시온 의정서 따위의 음모론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히틀러를 논할 때는 정치, 인종 사상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편의상 이하는 별도로 다룬다.


5.1. 정치 사상[편집]


파일:external/media.vam.ac.uk/2006BB5421_jpg_ds.jpg
Ein Volk - ein Reich -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 하나의 국가 - 하나의 지도자!


히틀러는 감옥 안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히틀러의 세계관이 분명하고 광범위하게 담긴 이 책은 1945년까지 독일 안에서만 1천만 권이 팔렸다. 《나의 투쟁》에는 히틀러의 정치적 신조, 세계관, 사명감, 전망, 장기적 목표가 모두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 신화의 토대가 거기서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이 책에서 자신을 도탄에 빠진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불세출의 지도자로 그렸다.

《나의 투쟁》을 읽으면 히틀러가 1920년대 중반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간파할 수 있다. 그 무렵 히틀러는 역사와 세상의 모든 악을 완벽하게 규명하고 그 극복 방안까지 알려주는 철학을 개발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우월한 아리아인이 기생충 같은 열등한 유대인에게 시달리고 피해를 입는, 선과 악의 인종 투쟁으로 역사를 보았다. 인종 문제는 세계사는 물론 인간의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히틀러는 주장했다. 나치 운동의 사명은 오직 하나, 유대 볼셰비즘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단숨에 논리가 비약해서 그래야만 독일 민족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데 필요한 생존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서 노골적인 제국주의 침탈을 정당화했다. 히틀러는 이 생각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세월이 흘러도 바탕은 달라지지 않았다. 메시아를 방불케 하는 하나의 이념에 대한 비타협적 몰입, 단순하고 수미일관하고 포괄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신념 체계는 히틀러에게 의지력과 운명에 대한 주인 의식을 심어주었고 히틀러와 접한 사람들은 누구나 거기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히틀러는 넘치는 자기 확신을 강하게 표현할 줄 알았고 주변 사람들은 자연히 거기서 권위를 느꼈다. 모든 것은 흑백으로, 승리가 아니면 완전한 파멸로 그려졌다.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

히틀러 1권 7장 카리스마(366쪽)


아돌프 히틀러는 1차 대전의 패전은 독일인들이 '인류 문명의 수호'라는 슬로건을 내건 연합군을 이길 사상적 무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생학, 인종주의, 사회진화론 등 온갖 자극적인 소스를 무질서하게 혼합한 나치즘을 내세운다. 빈약한 사상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독일인들의 관념 깊숙히 파고들 수 있었다. 그가 주장했던 독일민족의 생존권 영역은 이미 독일 제2제국 시절부터 존재했던 독일 민족의 영역 확장 개념에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식의 사회진화론적 주장을 도용한 결과물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1905년에서 1914년까지 빈에서 보냈다. 이 시절은 '나의 투쟁' 초반부에 잘 나타난다. 아돌프 히틀러는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단순한 룸펜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각 정파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계에는 기독교,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범게르만주의 세력이 주요 정파들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대중주의를, 기독교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반유대주의를, 범게르만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독일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사해동포주의나, 기독교의 엘리트주의나 그리고 범게르만주의의 반가톨릭주의[11]를 배격했다. 이렇게 각 정파의 장점만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자신만의 사상을 발달시켜 나갔다. 또한 거리의 부랑아 숙소에서 동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면서 화술 및 대중 장악력을 길렀다. 이 시절의 그를 기억한 한 부랑자가 나중에 이를 자랑스럽게 떠벌이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1차 대전의 허무한 패배와 굴욕적인 조약으로 인한 국민적 분노는 아돌프 히틀러가 득세하는 토양이 되었다. 프로이센 시절부터 보오전쟁, 보불전쟁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던 독일 제국의 패배는 일반 민중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물론 1차대전 말기에는 독일 민중도 이미 전쟁수행능력이 바닥났음을 인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뒷공작으로 인해 부당한 패배를 당했다고 현실도피를 시작했다. 연합군이 독일 영토 내로 진격하기 전에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항복했다는 사실은 망상을 부채질했다. 때문에 전간기 독일인들에게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은 무너져버린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인정함으로써 패전을 합리화시키는 그럴듯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윈스턴 처칠과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유럽과 세계를 지배할 야망과 "마스터 플랜"이 있다고 믿었다. 영국인 학자로, 1970년대 <2차대전의 기원>을 발표한 A.J.P. 테일러는 그 견해에 반대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유럽 정치환경과 연합국의 온정적인 정책과 기타 여러 삽질들이 겹쳐진 결과라고 본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뚜렷한 계획은 없었으며 세계의 정세를 잘 탄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이는 당대의 주류 의견과는 반대였기에 큰 반감을 샀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유력한 주장 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 민족"조차도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파괴도구"로 여겼다. 그리고 독일이 한계에 도달해 패배가 확정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자체와 함께 자폭하려 했다. 마지막 순간에도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도취적인 파멸의 미학에 빠져서 가능한 한 많은 인간과 문명이 자신과 함께 파멸하도록 모든 힘을 다했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 민족은 패배자니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면서 사회기반시설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는 "독일 민족은 약한 걸로 판명되었어. 나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없어"라는 망언을 남겼다. 이는 그의 사상이 얼마나 사회진화론에 물들어 있는지 볼 수 있는 단적인 예다. 독일 민족은 전쟁에서 졌으니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불태우라고 했던 파리는 불타지 않았으며,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각종 전쟁 범죄 혐의가 있던 파리의 독일 주둔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가 되려 선한 사람으로 둔갑해서 각국의 도덕 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베를린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절친한 친구였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방어전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온존시켰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독일이 멸망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와 소련이 대립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동쪽에서 온 자들(소련)이 세계를 지배하리라고 예측했다. 서구권의 민주주의는 나약하여 소련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에 맞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불안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20세기 전반 전 세계를 휩쓴 파시즘의 광풍도 종말을 고했고,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기나긴 냉전에 돌입한다. 그러나 절멸 전쟁이 남긴 참혹한 폐허와 홀로코스트는 양 진영 모두에게 나치즘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가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차별적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반성은 종전 이후 세계적으로 인종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급격히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독재/공포 정치가 사라지지 않았듯 인종주의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특이한 점으로 세습 군주제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가 되었지만 자신이 독일의 카이저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히틀러는 퓌러라는 직위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는데 그 이유도 이와 연관된다. 나의 투쟁에서는 군주제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 언급되어 있고, 이후의 발언 중에는 '세습하는 군주제의 군주란, 대부분 식료품 가게 하나 제대로 운영할 능력도 없는 자들'이라는 적나라한 비난도 있다. (1942년 3월의 어느 저녁시사 도중 발언)

아돌프 히틀러가 군주제에 반감을 가진 이유는 여러가지다. 먼저 빌헬름 2세를 비롯한 제1차 세계 대전 패망 이전 독일 제국의 군주제 체제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히틀러는 고향인 오스트리아 특유의 다민족-다문화 체제를 매우 증오했는데, 바로 이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한 곳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였고 이 자체가 합스부르크의 중요한 정체성이기도 했다. 이것이 합스부르크 왕조를 포함한 군주제를 향한 반감으로 이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 인사들과 히틀러의 관계는 대단히 나빴는데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표격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대놓고 반나치 저항 운동을 벌였다.
태생적 한계도 있을 수 있다. 자본가들도 그러한 모습이 있었으나 당시 귀족들은 당연히 비귀족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랜시스 골턴 등이 기여한 유럽의 우생학에서는 귀족들이 태생적으로 우월한 인간이었으며 특히 독일 귀족들은 귀족주의가 상당히 심했고 심지어 같은 나치여도 내심 히틀러와 같은 비귀족들을 멸시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히틀러는 자본가 계급에는 속할 수 있었어도 귀족 계급에는 속할 수 없어서 그런 인간들과 자주 대립하기도 했다.


5.1.1. 영향 받은 학설들[편집]


히틀러가 가장 존경하는 미국인으로 미국 포드 자동차의 창업주인 헨리 포드를 꼽았는데 <나의 투쟁>에 반영된 상당수의 유대인 비판이 헨리 포드가 쓴 <국제유대인>이라는 문헌과 똑같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예 포드의 주장을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다가 전부 베꼈다고 해도 될 정도다. <국제유대인>의 한국어판도 나와있는데 읽어보면 나치의 유대인 비판 내용과 완전히 똑같은 대목이 대부분이다. <국제유대인>은 포드가 1920년대에 배포한 4권의 반유대주의 책자인데 이 문헌에서 미국 유대인 재벌 제이콥 쉬프같은 인물이 국정실패의 탓을 유대인에게 전가하려고 유대인을 탄압하던 러시아 왕정을 무너트리기 위해 레닌트로츠키에게 러시아 혁명 자금을 지원한 사실 등을 비난하며 유대인-공산주의자의 커넥션을 고발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한데, 포드는 제조업의 아버지로서 미국의 유대계 금융업자들의 이같은 행태에 상당히 불만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의 문제점들을 대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헨리 포드는 히틀러한테 선거 자금으로 쓰라며 7만 달러를 지원할 만큼 나치독일에 우호적이었고 그 답례로 나치로부터 독일 정부가 외국인한테 주는 최고의 훈장인 독일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실제로 제이콥 쉬프같은 유대 재벌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제국에 자금을 지원하고 메이지 천황을 알현했고 일본 천황은 차관 제공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2] 물론 그 포드도 소련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며 소련의 경제성장과 군비확장에 도움이 된 인물이라는 것은 함정이기는 하다. 아르투어 딘터는 아리안인과 타인종의 결혼을 반대하며 인종의 순수성 보존을 주장했던 사상가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실하다. 아르투어 딘터는 1925년부터 나치당 튀링겐 대관구장을 지냈다가 "나치당 안에 입법부를 만들자!"고 아돌프 히틀러의 권위에 홀로 도전하다 1928년 쫓겨난다.

루돌프 헤스의 스승이었던 하우스호퍼 교수의 게르만족의 동부생활권(레반스라움)도 <나의 투쟁>에서 차용했다.

당대 독일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힌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의 <19세기 독일사>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읽진 않았어도 당시 유행했던 사조로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슈펭글러의 다른 저서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1920년)에서는 민족 전체가 독재자 아래 일치 단결하는 초계급적 민족사회주의가 제창된다.

보수혁명론자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Moeller van den Bruck)는 낡은 것이 젊은 것에 패하는 것은 이치라며 독일의 패전을 합리화했고, 그의 저서 제3제국(Das Dritte Reich, 1923)에서 낡은 독일은 보수혁명을 통해 서구의 자본주의와 러시아의 공산주의 같은 외세의 이념에 대항하고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권위주의적인 "민족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 통치되는 "제3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나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졌다.


5.2. 인종주의[편집]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처음에는 반자본주의적 색깔을 띠다가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유대인을 소련 및 공산주의자들과 연결하는 쪽으로 바뀐다. 자본주의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주장을 버리고 공산주의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쪽으로 말을 바꿔 탄 것은 아니었다. 증오에 사로잡힌 히틀러의 머리에서 둘은 공존했다. 그렇게 지독한 증오는 공포심이 없다면 생겨날 수가 없었다. 국제 금융 자본과 소련 공산주의를 모두 조정할 수 있는 막강한 집단을 상상했을 때 느껴지는 적대감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도 감당하기 벅찰 만큼 강력한 '유대인의 세계 음모'가 있다는 고정관념이었다.

히틀러 1권 (p. 368)

히틀러는 권좌에 오르기 전부터 죽는 순간까지 '유대-볼셰비즘'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 지금으로선 우습지만 당시 우익 진영에선 유대적이란 말과 볼셰비즘이 동일한 개념으로 통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고립과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유대인과 연관지어 독일인의 증오를 유발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양면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공격을 결심한 이유도,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비이성적인 증오가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소련의 고위직에는 몰로토프 이전 외무장관이었던 막심 리트비노프 등 유대인도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스탈린은 유대인을 배려하지는 않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 받는 탄압 이상의 차별도 없었다. [13] 때문에 그의 관점에서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거치면 소련은 '유대인'과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악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국가였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이 아닌 인종 투쟁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인종성을 순종으로 유지하지 않고 잡종이 돼버린다면 그 민족은 망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흑인이 독일말을 배우고 독일말에 익숙해졌다해도 독일인이 될 수도 없고 유대인들도 기독교로 개종해도 절대 독일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독일말을 잊어버리고 200년 전 러시아로 이주한[14]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독일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구분이 문화나 언어가 아닌 인종이다. 민족성 강조도 인종주의에 기반한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는 1차 세계대전 전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가톨릭 교육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그가 살던 빈 내 과격파들의 유대인 척결론,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독일 내 부각되었던 여론을 따랐던 것이 가장 크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반유대주의 성향은 1905년에서 1914까지 빈에서 지냈던 시절부터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의 시장은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전신인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의 창당자 카를 루에거(Karl Lueger)[15]라는 반유대주의자로 1897~1910년까지 빈의 시장으로 재임했다. 열성 가톨릭 신도로 우파성향의 정치인이었지만 사회복지와 연방주의도 같이 주창해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루에게를 좌익으로 생각하고 2년이나 임명을 거부한 전력도 있다.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는 유명한 어록이 있는데, 이는 빈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안심시키고 혹은 냅두고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내려온 코가 크고 검은 머리에 독일어를 못하고 튀는 외모의 유대인들만 탄압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는 연설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며 인기를 얻었다.[16] 나의 투쟁에 따르면 당시 히틀러는 남는 시간을 "독서"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가 읽는 책들은 주로 인종주의적인 팜플렛이거나 혹은 과격한 정치단체의 선전물들이었다. 이때부터 그가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를 두고 히틀러 전기작가 이언 커쇼는 "뮌헨에서도 그랬고 빈에서도 그랬고 히틀러에게 독서란 깨닫거나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선입견을 다지는 수단이었다"고 촌평했을 정도다.

반유대주의는 이 시대 유럽의 보편적인 감정이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살던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

반유대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도 상당했다. 드레퓌스 사건만 봐도 당대 서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가톨릭 교회의 세가 강한 남유럽, 이탈리아, 스페인은 더 심했다. 끝판대장격은 러시아 제국으로 조직적인 유대인 탄압과 학살(일명 포그롬)을 펼쳤다. 폴란드발트 3국도 러시아와 사정이 비슷했다. 차르 시대에 대한 반감과 빈부격차 등 사회모순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선동꾼들도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반유대교육을 실시했으며 정부는 이를 방조했다. 게토 지역에는 살인, 약탈, 강간, 방화 등이 빈번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탄압이 적은 다민족 다언어 국가인 오스트리아로 많이 이주했다. 이주 유대인들은 빈의 골목 지역에 주로 살았는데,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 수준과 언어 장벽 때문에 뒷골목에서 매춘, 소매치기, 구걸 등으로 연명하는 하층민들이 증가한다. 이들이 유대인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으며, 반유대주의 선동까지 더해져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유대인은 부유하다는 편견 때문에 당시의 상황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도 부유한 사람은 소수다. 서방 금융권에서 유대계의 비율이 높긴 하나 그 수많은 유대인 인구가 다 금융계의 거물들일 리 만무하다. 미국 뉴욕에만 해도 유대인 마을은 브루클린에 있다. 브루클린은 개발되고 치안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가난한 동네였다. 청나라가 개막장일 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세운 차이나타운과 아일랜드가 감자대기근을 겪을 때 이주해 온 이들이 세운 헬스키친도 위치는 맨하탄에 있다. 부유한 사람은 해외로 이주하는 등 발빠르게 행동했으며, 그들 중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자들도 최후에 그 자리에 갔다. 언제나처럼 가난한 자들이 먼저였다.

'헤르만 뢴스', '디터 에크하르트', '빌헬름 폰 폴렌츠' 등은 반유대적인 농민소설을 쓴 작가다. 이들은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자, 가축상인, 중개인 등으로 묘사했다. 20세기 초반 40쇄를 찍을 정도로 엄청나게 팔린 '테오도어 프리치'의 <반 유대주의 문답서>는 후에 나치에서 위대한 교사라 칭할 정도였다. 이런 작품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독서 취향이었다.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은 1916년 독일에 귀화한 영국인이다. 영국 해군제독의 아들로 태어났고 영국 육군원수 네벨 체임벌린의 조카뻘이 된다. 반유대주의자 프랑스인 고비노 백작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의 사위가 된다. 그는 게르만빠로 반유대주의자였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1927년 체임벌린이 임종시엔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손에 입을 맞춰줄 정도였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어 아버지와의 불화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가 유난히 유태인을 싫어했을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일부에선 어렸을 때 유태인한테 강간당했다느니, 혹은 어머니가 유대인과 바람을 피웠느니 아버지가 실은 유태인이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를 못 살게 굴었다느니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다.

반유대주의는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유럽에 보편적인 정서였다. 히틀러도 독자적인 반유대주의를 창시했다기보다는, 수천년동안 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주로 금융업과 보석세공업에 종사하며 여기저기 이주하였던 유대인들이 돈줄을 쥐고 유럽 도시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금융자본주의 담론은 이미 18세기부터 어느 정도의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노숙자로 살던 시절에 주로 거래하던 화상(畵商)이 유대인이었고, 심지어 이후 겪게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우 중에 유대인이 있었으나, 그와 사이는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그때 받았고 이후 그가 평생 자랑하던 철십자 훈장을 주도록 추천해줬다는 설의 주인공이자,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후고 구트만도 유대인이었다. 후고 구트만 역시 아돌프 히틀러 집권한 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적이 있으나 부대 전우들의 청원으로 석방되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진짜인지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빈으로 상경하기 전엔 유대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물론 이는 사실은 아니다. 히틀러의 학교 동창 증언으론 빈으로 상경하기 전에 이미 반유대주의에 빠져있었고 린츠와 아돌프 히틀러가 다닌 학교에서도 유대인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언 커쇼의 연구 등을 종합해본다면 빈 상경 이전~빈 체류 시절에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에 어느 정도 빠져 있긴 했지만 당시 유럽 전반에 유행하던 반유대주의의 흐름을 고려할 때는 특출나진 않은 편이었다.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유대인에 대한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거나 멘델스존을 비롯한 유대인 예술가들을 호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유럽과 소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슬라브 민족은 게르만 민족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히틀러는 '인종적 검사'를 통해 '가치'가 판명된 슬라브인들에 한해 간단한 셈법과 교통 표지판을 알아볼 정도의 기초적인 교육만 시켜서 독일인들의 노예로 부려먹고, 나머지는 우랄산맥 밖으로 추방하며 굶어죽든말든 개의치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볼 인세지옥이 실현된다. 막상 독소전이 개시되고 아리안인의 후손들이 동장군에 고생하자 나약함을 질타하고 열등했다고 주장했던 슬라브인들의 "인종적 강인함"을 찬양하는 등 오락가락 맛탱이가 갔다.

다만 나치당 내부에 슬라브계 간부들도 있었다. 나치당 교육부장이었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러시아계 피가 섞인 발트 독일인이었고, 바르샤바 봉기에서 봉기 진압을 맡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는 폴란드계였다.

반면 서유럽북유럽에서는 그나마 온정적이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영국에 '저런 하등한 인종 돕는다고 서로 싸우지 말고 우월한 우리들끼리 잘 살아보자'며 화해 의사를 피력했다. 물론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이를 거절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또한 북유럽에 속하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벨기에플란데런 지역은 인종적 가치가 독일 민족과도 비슷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한때 독일계 민족국가의 영토였던 벨기에의 오이펜-말메디,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19세기 독일 연방에 속했던 룩셈부르크 지역의 거주자들은 조부모 중 두 명 이상의 혈통이 확인되면 '명예 아리아인' 인증을 했다. 독일군 입대시 독일 국적도 부여했다.

물론 히틀러의 모든 논리는 독일인은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다른 민족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일 민족과 얼마나 많은 유사점을 가졌는가"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일례로 프랑스는 골 족과 게르만 족의 피가 섞인데다 라틴 민족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만큼 더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요아힘 C. 페스트는 자신의 저서 《몰락》(한국판: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14일)에서 구체적인 사상은 존재치 않고 오직 파괴와 증오만 존재하였다고 간략하게 그의 사상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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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벌리 코니시는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라는 서적을 발표한다. 여기서 린츠에서 자랄 때 학생 시절의 유대인 급우이자 훗날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충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다만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는 같은 학교 동기라는 외에는 충돌할 지점이 적었다. 실제 학교만 같지 학년은 달랐다.


5.2.1. 유색인종에 대해서[편집]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론에 따르면 다른 민족들은 아리안과 유대인 사이에 위치한다. 그 당시 서양의 흔한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백인은 다른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에 따르면 아리안은 인류 문명의 모든 가치있는 것을 만들고 발전시켜 나갔으며, 다른 민족들은 아리안인을 뒤쫓기 바빴으며 유대인은 문명을 파괴하기에 바빴다는 설명이다.

"아리아인의 문화가 없다면 일본이나 중국은 다시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며 동양인보다 아리아인이 위대하다는 걸 확실히 해두기는 했지만 일본과 추축 동맹을 맺은 후엔 재독 일본인들을 명예 아리아인이라 선포하고, 심지어는 여러 번 동양과 접촉하고 나서는 "아시아인의 고대 문명이 우리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믿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 말은 그의 본심이 아닌 어디까지나 동맹인 일본을 위한 외교적 발언이었다. 오히려 실제론 전쟁 중에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곤 매우 아쉬워했다. 영국이 자신들과 동맹만 맺었어도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면서 독일이 전유럽을 제패해나가자 일본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일본 교과서 만큼이나 엄청나게 인쇄되며 팔려나갔다. 일본인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으며 감명받고 일본도 독일처럼 행동해서 아시아를 정복하고 미국과 영국을 밀어내야한다고 주장하며 궐기대회까지 열며 아돌프 히틀러 본받기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판매된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일본인에 대한 아돌프 히틀러 본인 스스로도 이불킥적인 안 좋은 이야기가 검열된 후반본 책이다. 다음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일본 번역판에서 검열된 초반본 부분이다. 이 검열 부분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도 언급된다. #

일본인은 미개하고 추악하지만, 서구문명이라는 빛을 얻음으로써 일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빛이 없으면 그림자 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인종이다.

스스로의 창작성이 부족한 열등한 인종이다.

하지만 손재주가 좋고 일처리가 빠르니 독일의 하인으로 이용하기에는 좋다.


독일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의 단계적 계획이론의 4단계 상황, 즉 독일 민족의 위대한 독일 제국이 해외에서 세계제국 건설에 나서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제국 독일과 동맹국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돌프 히틀러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일본 양국이 내렸던 중요한 결정들을 보면, 양국의 불신이 극명했다. 애초에 동맹을 맺기 전 중일전쟁 때는 중국에 무기를 계속 수출하고 전쟁 고문들도 계속해서 파견해 일본군이 독일제 무기와 독일의 고급 인력들을 상대하면서 궤멸해 가는 일본군의 상황이 연출됐고 동맹 채택도 중국 or 일본 중에 꽤나 고민했다. 또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을 일본에 비밀로 했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 된 진주만 기습 결정에 대해서 독일에 알리지 않았다.

1942년 1월 18일에 독일-일본 양국이 비밀 군사회담을 통해서, 시베리아와 인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동경 70도를 기점으로 동반구에서의 각자의 작전반경을 나누었지만, 베를린과 도쿄는 어떤 군사 협정도 체결하지 않았다. 두 추축국은 보급상의 난관을 무시하고, 인도양 일대를 공동 작전지역으로 설정했다.

양국간의 군사 협력이 구체화되지 않은 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일본이 무지막지하게 태평양과 유럽의 식민지들을 강탈하고 여러가지 성범죄나 학살같은 전쟁범죄에 대해서 일본을 견제할 생각이 있었다는 추정이다. 이와 관련해서 폰 하셀(von Hassell)이 일본이 싱가폴을 함락시킨 직후인 1942년 3월 22일에 적은 일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의 엄청난 성공에 크게 열정적이지 않았고, 그는 영국이 그 일본 황인종을 격퇴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 영국에게 20개 사단을 기꺼이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Milan Hauner, Did Hitler Want a World Dominion? 중


그러나 흑인종에 대해서는 그때 당시의 온 유럽이 좋게 생각하지 않았듯이 비슷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나치 독일 내에서 흑인들 또한 이런저런 못볼 꼴을 많이 당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이 나오고 있다. 특히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라인란트 지방이 벨기에, 프랑스군에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군 중에 식민지 출신 흑인 부대(외인부대)도 주둔했고, 그 흑인 프랑스군과 독일 여성 사이에서 500여 명의 아이가 생겨났다. 이들은 "라인란트 사생아(Rhineland Bastard)"라고 불리웠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불임 수술을 통해 이들을 사실상 멸종시켰다.

당시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매우 저 아래'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깔려있던 시기라서 굳이 흑인을 타겟으로 잡고 사냥해봐야 별다른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치즘은 반서방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니 그들과 차별화하려는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흑인에 대한 처분은 유대인처럼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서방열강들처럼 마구 탄압하던 것도 아닌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당시 유럽의 유색인종(흑인, 황인 등)은 식민지를 통해서 유입되었으나, 독일은 식민지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색 인종이 적은 편이었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 당시 독일 본토에 살고 있던 흑인의 수는 25,000명 정도로 전체 인구 6,500만 중 0.04%에 불과했다. 이렇게 유색인이 적다보니 유색인의 존재감은 독일 내에서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스 또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고 나치당에서도 확고한 정책 기준이 없었다.

그나마 다른 서구권 지도자들에 비해 우호적으로 대접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손기정[17]제시 오언스에게 축하인사[18]를 건네거나, 태국 국왕 라마 8세 아난타 마히돈이 독일에 오자 직접 공항까지 가서 마주한 것, 그리고 1938년 네팔 국왕에게 차를 선물한 것 등이다. 또 중동의 국가원수들과 회담을 하고 슬라브계인 크로아티아불가리아와도 우호적으로 지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일개 당수 시절부터 독일 총통으로 다른 나라들에 대한 침략 전쟁을 벌일 때까지 상대방을 기만함으로 일종의 뒷통수를 쳐서 그 자리까지 올라왔다. 즉 상대방을 현재 상황에 맞게 이용해 먹은 것 뿐, 나치가 진짜 견제할 국가 없이 세계 패권을 쥔다면 어떻게 변했을 지 알 수 없다. 소련과도 불가침조약 이후부터 독소전쟁 이전까진 상호 비난의 수위가 크게 줄어들고 경제협력도 크게 늘리는 등 훈훈한 듯한 분위기가 오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히틀러는 뮌헨 협정 시기까지는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치적으로 필요했었다면 인종을 떠나서 이용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다만 히틀러는 1940년 유색인종을 잡아와서 동물원에 넣어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이른바 '인간 동물원'에 대한 폐지 명령을 내렸다. 벨기에에서는 1958년까지도 이러한 인간 동물원이 존속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의외인 지시.

5.3. 아돌프 히틀러와 종교[편집]


일단 명목상으로는 가톨릭 영세를 받았으나 하지만 히틀러는 부모에게서 독립 후에 가톨릭의 미사7성사의 참여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19] 또 1931년 나치 지도층 전체가 함께 파문을 당하면서 가톨릭으로부터 멀어졌다.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관은 아주 좋은 떡밥이며, 기독교인이나 유신론자는 아돌프 히틀러가 무신론자나 반기독교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반기독교주의자와 반종교주의자들, 그리고 일부 반가톨릭적 성향이 강한 개신교인들은[20] 아돌프 히틀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꼭 가톨릭에 한정된 건 아니고 다른 주장으로는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개신교에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이었든지 무신론자였든지 그 사실이 기독교유신론, 혹은 반기독교주의나 무신론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종교가 걸려 있기 때문에 오늘도 논쟁이 끊일 날이 없다.

아돌프 히틀러는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기독교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였다.[21] 그리고 연설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나 이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당시 80%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 우파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무신론=볼셰비즘으로 낙인 찍던 시대이다. 현재도 세속화가 상당히 진행된 유럽에서도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국가 지도자는 잘 나오지 않고 있으며, 미국 같으면 정치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면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아돌프 히틀러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 같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고, "가톨릭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기독교를 정치적으로도 자주 써먹었다. 당시엔 "무신론 = 공산주의"라는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였으니 무신론자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도 당연히 서슴치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위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인지, 다른 종교인인지, 무신론자인지 알 수 없지만, 다음은 아돌프 히틀러가 어떻게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 보여주는 문구이다.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특별히 각자 자기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단지 피상적으로 신의 뜻을 얘기하는 것을 중단하게 하고 실제로 신의 뜻을 실행하게 하여 신의 말씀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만들 성스러운 의무를 지닌다. 왜냐하면 신의 말씀은 인간에게 그 형체와 정수와 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의 작업을 파괴하는 자는 주님의 피조물, 그 성스러운 의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일깨워, 원한다면 각자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이 누구든 그 활동에 있어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의 종교적인 공동체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것을 일차적이고 가장 성스러운 의무로 삼게 하라.

(중략)

따라서 오늘 나는 전능하신 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유대인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랄프 만하임(Ralph Manheim)[22]

영역, 먼소류[23] 한국어 역


이것저것 길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론만 따지고 말하면, 자신의 반유대주의가 종교(혹은 신의 의지)에 의해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퓌러께서는 최종 해결책의 임무를 맡은 자들에게 살해가 가능한 한 인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알렸다. 이것은 해충으로 가득한 세상을 정화하라는 신의 명령에 봉사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과도 일치했다. 로마 교회의 계급을 혐오하면서도 여전히 로마 교회의 평판 좋은 회원인 그는 유대인이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는 그들의 가르침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말살 정책은 따라서 비개인적으로 잔인하지 않게 행해지는 한은 그가 단지 신의 복수의 손으로서 행동하는 것이었으므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John Toland (Pulitzer Prize winner), from "Adolf Hitler", pp 507, talking about the Autumn of 1941.

이것도 마찬가지. 아돌프 히틀러는 세간의 비난을 받기 쉬운 학살을 정당화 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인들은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고 매도했고, 그 매도를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의 기록이다. 유대인을 예수를 살해한 자라고 비난한 건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히틀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많은 발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1941년에 그는 나치 중위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과 게르만 영웅적 세계관 사이에는 풀 수 없는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모순은 전쟁 중에는 해결할 수 없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라고 발언을 하며 전후 기독교의 체계적인 말살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남겼다.

또 나치 신문 편집자였던 한스 지글러에게 히틀러는 "당신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비종교적이다. 나는 그것을 비기독교인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무신론자였다는 증언도 있다.오토 슈트라서와 히틀러의 친구 에른스트 한프슈팅글은 히틀러가 무신론자였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정치세계에서 무신론자임을 드러내는 건 정치적으로 큰 리스크였고, 이 둘은 히틀러와 후에 척을 진 인물들이기에 그의 이미지를 깍아먹기 위해서 과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히틀러의 예수에 대한 이해는 굉장히 괴상했는데, 그는 예수를 유대인과 맞서 싸운 아리아인이라는 시각을 가졌다. 실제로 1921년 4월 연설에서 히틀러는 예수를 금발벽안이라고 주장했으며, 1922년 11월의 연설에서는 예수를 게르만인이라고 주장했다. 또 히틀러의 측근 오토 바게너에 따르면 히틀러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무덤에서 고의로 숨겨졌다고 발언하여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부정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어릴 적 가톨릭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었으며 유럽의 보편적인 기독교 문화에 대놓고 반대하지 않았고 좀 불만이 있었어도 독일 민족이 2000년 동안 기독교에 동화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봤다. 힘러처럼 대놓고 반기독교적 성향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즉,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는 아니었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적어도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자주 보여줬다. 연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쓰는 네덜란드식 감사 기도[24]라며 공식석상에선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측근과의 대화에서나 1927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나치당 강령을 두고 회의 시엔 "당 강령은 안 바꾼다. 성경은 모순 덩어리지만 기독교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라고 못박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수많은 성직자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을 틀려먹은 종교(Wrong Religion)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가톨릭에 비해서는 덜 한편이기는 하였으나 반나치 성향 고백 교회 목사들 700명을 게슈타포가 체포해서 수용소로 보내기도 한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거슬리지 않는 경우에 한정된 이야기로 보인다. 가톨릭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 나치당 내의 개신교도를 억압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였고, 심지어 나치와 개신교의 충돌을 막고자 "게르만 기독교 신앙운동"을 열기도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다른 점이 독립된 종파이며 중앙 조직이 없다는 점인데 가장 크게 반발했던 부분이다. 세례받은 유대인을 탄압하거나 서로 다른 개신교 종파를 억지로 "독일 민족 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서 국가에서 관리하고자 할 땐 개신교계에서도 크게 반발했다. 이는 독일 개신교 내에서 반나치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 고백교회를 이끌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다.

또한 다른 나치 추종자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고 본다면 돌격대와 친위대는 가톨릭 사제들을 "로마의 첩자", "남색집단"이라고 폄하했고 괴벨스는 가톨릭 사제들을 가리켜 "검은 무뢰한들"이 동성애적 성향으로 독일 청소년들에 성적인 폭력을 동반한 악영향을 끼친다고 비난했으며, 힘러와 친위대는 신비주의와 실체도 없는 게르만 민족종교나 찾아다니는 등 반유대-반기독교성향이 뚜렷했고 총통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은 "국가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당한 인종학자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독일이 살아남으려면 십자가가 떨어져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괴벨스도 가톨릭 장학금만 먹튀하고 신앙은 일찍 버렸다.[25]

평전 작가 이안 커쇼는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의지와 운명만을 믿었다고 평가했고 아돌프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한 <독재자들(Dictators)>을 저술한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아돌프 히틀러는 교회를 파괴하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점에서 판단으로 독재체제 내에서만 허용되었다"라고 평가한다. 종국에는 소련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는 종교와 양립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돌프 히틀러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힘러와의 사적 대화에선 "기독교 교리는 과학이 진보하기 전에 낡아버렸다."라고 평가했다. 독일이 기독교 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어서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적극적인 탄압은 없었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 및 독일 개신교 교단의 성향상 나치의 종교 정책에 대체로 순응했으며 반나치 성향의 고백교회를 제외하고 적극 이용당하고 소극적으로나마 협력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교도라는 주장도 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이교, 즉 게르만족의 전통 믿음인 북유럽 신화에 관심을 보이고 독일의 신앙을 기독교에서 이교로 갈아치우려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실제로 나치는 크리스마스 때 산타가 아니라 오딘이 선물을 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혹은 예수의 출신을 북유럽의 영웅으로 조작했고 이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제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나치 고관들인 루돌프 헤스하인리히 힘러와는 달리 신비주의적이나 이교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헤스나 힘러는 기독교 이전 시대의 아리안족 고유신앙을 재구성한답시고 문자가 새겨진 비문들을 수집하거나 인도나 페르시아의 고대 종교들을 연구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오히려 이러한 행동들을 비웃었다. 실제로 힘러가 1938년에 "아리아인의 뿌리를 찾겠다."라며 친위대원들로 탐사대를 꾸려서 티베트로 보낸 적이 있는데 이게 아돌프 히틀러 귀에 들어가자 예산을 함부로 낭비했다는 일갈이나 들어야했다. 슈페어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리안 드립은 쳤지만 고고학적 발견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엄청난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유물로는 돌도끼 같은 것이나 발굴되면 쪽팔리니까 그만두자는 것이었다. 힘러와 후에 나치 내에서도 정신상태가 맛이 갔다고 여겨지던 루돌프 헤스는 프리메이슨과 가톨릭 예수회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국제 유대인 조직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힘러의 친위대에선 휴스턴 체임벌린의 영향을 받아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아인이었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나치당이 집권한 후엔 심지어 일본신토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혼들을 숭배하는 위대한 종교라고 추켜올리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공자석가모니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역시 해석은 제멋대로에 엉망이라서 인도에 자리잡았던 아리아인들은 북부 독일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세웠던 지배인종이며 샤캬족도 그들의 후손이라는 개드립이나 치는 수준이었다. 이슬람이 진정한 아리안의 신앙인데 망할 카롤루스 대제가 이슬람의 북상을 저지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가 모국의 종교로 자리잡게 됐다."라는 발언을 했다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26]

내가 유일하게 존중해주는 종교는 이슬람이며,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지자는 무함마드이다.

-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위 발언처럼 이슬람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발언도 하였다.[27]

물론 일본의 신토 관련으로 발언한 것과 같이, 이 또한 외교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남긴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대전이 진행되면서 독일은 예루살렘의 大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 휘하의 팔레스타인계 아랍 민병대들을 꼬셔다 반영 반란을 부추기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슈페어에게 "아랍인들은 아리아인들보다 한 수 아래다"라는 발언을 직접 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히틀러가 그러면서도 아랍인들의 일사불란한 군사 문화에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는 게 슈페어의 회상이었다. 실제로 힘러에게도 친위대 내부에 무슬림 분과를 마련해놓으라고 했다는 증언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 예수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목사 및 신부 탄압과 기독교 탄압이 "자신을 예수로 인정해주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를 "재림 예수"처럼 꾸며낸 일등공신은 괴벨스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서 친숙한 성자나 구세주적인 이미지를 쓴 것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서 유교 드립 친다고 해서 상투 틀고 갓 쓰면서 청학동에 사서삼경 외우는 사람이 아니듯이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기독교적 소도구를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저 루머는 목사와 신부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다가 실패하고 탄압했다는 것이 와전되어서 생긴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돌프 히틀러가 종전 후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계획했다는 설도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 자료

아래는 위 내용을 대충 간추려서 번역한 글이다.

앨런 불록(Bullock)은 전쟁이 끝난다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뿌리뽑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고 썼다. 미첼 페이어(Phayer)는 1930년대 후반기까지 교회 관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다른 나치당원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말살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 국민들의 절대 다수가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목표는 나치의 단기적 목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장기적 목표가 되어야만 했다.고 적었다. 1999년 Julie Seltzer Mandel은 뉘렘베르크 프로젝트의 문서들을 연구하던 도중 도노반(William Donovan) 장군이 나치의 전쟁 범죄를 문서화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집한 한 세트인 150권의 기록을 발견하였다. 도노반은 미국 검사팀의 수석요원이었으며 나치당의 교회 박해에 대한 많은 양의 증거를 모았다.
108쪽의 개요문서인 나치당의 종합 계획에서 미국 전략사무국은 나치 정권은 조직적인 박해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보고서에서는 민족사회주의당(national socialist party)의 주요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말살과 순수하게 인종에 근간을 둔 종교로 대체하는 이러한 상황을 반겼을 것이라고 서술되었다. 가장 유력한 근거는 박해 그 자체가 가지는 조직적 본성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동유럽 독일화 계획에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안배는 전혀 없을 것이었다. 그때까지 당분간은 아돌프 히틀러는 이러한 교회 문제에 대하여 느리게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가장 반교회 성향이 강하고 공격적인 인사 중 하나였던 괴벨스는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문제는 전후에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고, 이는 즉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와 독일 전통 이교 신앙 사이에는 매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불록은 전쟁이 끝난다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뿌리뽑겠지만, 그 순간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신중함을 유지하기로 스스로 다짐했다.라고 적었다. Yad Vashem에 기고한 글에서 역사학자 미첼 페이어는 1930년대 후반까지, 교회 관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장기적인 목표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멸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수석 설계자였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고록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새 베를린 초안을 구상할 당시 그가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비서였던 마르틴 보어만에게 가톨릭과 개신교 관계자들에게 교회의 위치에 대하여 논의하였다고 하자 보어만은 짧게 교회들은 건물 위치를 배정받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나치가 기독교 말살을 계획했다는 주장 자체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상당한 근거를 들어 제출된 바가 있고(본문에서 언급되는 도노반 장군의 자료들이 재판에서 제출되었다.) 첫 문단에서 인용하고 있는 앨런 불록의 <Hitler: A Study in Tyranny>나 미첼 페이어의 <The Catholic Church and the Holocaust> 등에도 실려 있다.

도노반 장군의 자료들의 내용을 요약하면,

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Nuremberg) 국제재판은 무려 6백만의 유태인을 살해한 Holocaust 사건을 나치의 인종학살 계획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고발하였다. 미국의 고소인단을 이끌었던 윌리엄 도노반 장군(General William Donovan)은 나치가 유태인 학살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체계적 파괴도 계획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방대한 분량의 문서들을 제출하였다. 도노반의 문서들무려 150 권에 달하는 장정본(裝幀本)은 1959년 도노반이 죽은 후에 코넬(Cornel) 대학교에 보관되었다. 지금은 Rutgers Journal of Law and Religion에서 internet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이 범죄적 음모에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선전부장 요셉 게벨스(Joseph Goebbels), 히틀러 유겐트의 지도자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피고인 발두어 시라크(Baldure Schirach)를 포함한 나치당의 정상급 핵심 요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나치는 기독교회가 애초부터 나치의 인종차별과 정복전쟁 계획에 반대 입장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나치는 교회의 내부에 침입하려 하였다. 즉, 중상모략, 체포, 습격 등을 획책하고 목회자를 살해하고, 신도의 사상을 개조하며, 교회 학교와 청소년 조직에 침입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교회는 타협적인 교회에 반대하면서 대(對) 나치 항거의 전면에 나섰다. 성경의 무오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하지 못했던 자유주의 교회들은 집권자의 친-진화론적 이념에 기독교 교리를 끼어 맞추려는 기도의 일환으로 기독교 교리를 서슴없이 재해석하려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다윈의 과학적 이론에 추종하려는 현상과 유사했다. 일찍이 1937년에 벌써,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나치 정책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자 나치는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700명의 목회자를 체포 구금하였다. 인본주의자와 자칭 민간 자유주의 단체는 창조설을 교회 내에 국한시키자, 그리고 모든 기독교의 영향을 대중의 생활과 학교로부터 말살하자고 외쳤다. 이 불길한 외침에 보조를 맞추어 여러 교파의 교회들도 종교 활동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으로 한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자진하여 축소한 활동범위 위에 더 많은 제약을 막무가내로 가하려 하던 나치의 방해 공작에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기독교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러한 현상은 나치의 점진적 잠식을 위한 용의주도한 기독교 말살 계획을 진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교회의 조직체계를 나치의 정치목적에 이용당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 혐오에 대해 일단 아돌프 히틀러 본인이 직접적으로 남긴 발언은 상술했듯 기독교가 "너무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라서 싫다"는 거였는데, 다만 이 또한 어떤 경로로 기독교를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가 극히 불분명하다. 순수하게 신학적으로만 따져본다면, 기독교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대다수가 최후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으나 이 중에서 최후의 심판 직전에 대전쟁이 지상을 휩쓸고 지나간다고 예언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하다. 물론 이는 요한묵시록의 문헌적 특수성을 감안해야 하는 점도 있으나 일단 이것만 놓고 본다면 기독교가 비슷한 계통의 다른 종교들에 비해 "순종적이고 무기력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결국 이 또한 신학적 이해 없이 그냥 되는대로 발언하고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외 히틀러의 여러 연설과 주변인들과의 발언을 토대로 그의 종교관을 분석한 리처드 위카르트(Richard Wikart) 교수는 그가 범신론적 성향을 지녔다고 저서에서 밝혔다. 실제로 히틀러는 1941년 연설에서는 "자연의 영원한 법칙 앞에서 인류는 무력합니다. 인류 전체의 구원은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인간이 그 법을 거역할 수 있다는 게 거짓이라는 걸 인지하게 된다면 결코 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과 자연의 법칙을 동일시 하면서 적자생존의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게 신의 뜻에 부합하다는 그의 종교관을 내비쳤다.

이렇게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공통된 사실이 있다면 이러한 설들에 대해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치나 아돌프 히틀러 관련하여 공신력 있는 서적들에서 종교 탄압은 꼭 한 챕터씩은 다루고 있다. 페스트 <아돌프 히틀러 평전>, 이안 커쇼 <아돌프 히틀러>,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 일상사>, 귀도 크놉 <아돌프 히틀러의 뜻대로>, 마르틴 브로샤트 <히틀러 국가>, 슈테판 마르크스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 간접적으로 다룬 책들 중에 폴 존슨 <모던 타임즈>,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등이 있다. 다만 반기독교와 같은 동기, 신념과 기독교에 대한 증오, 혐오로 탄압했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나치와 자신에게 방해가 될 때에만 탄압했다.

그래서 히틀러의 종교관에 대해서 '애초에 종교에 대한 일관적인 관점이나 사상 자체가 히틀러에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때 그때 권력에 이용하기 위해 태도를 달리하였을 뿐이다'라는 해석도 존재하고 있다.

6. 인간 아돌프 히틀러[편집]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아돌프 히틀러의 모습은 퓌러 아돌프 히틀러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인간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당시 독일 내외의 표면적인 이미지는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였다. 금주, 금연, 금욕[28]에 채식을 했고 동물을 사랑하는 이미지였다. 동물 보호법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시초일 정도. 케이크나 단 빵 종류를 엄청 좋아했다는 미식가적 일면도 있다.[29] 실제로 나치 집권 후 아돌프 히틀러는 금연 캠페인을 벌였으며, 나는 이미 독일과 결혼했다는 말을 했다.

오늘날의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 대한 이미지는 과장된 면이 있다. 영화처럼 평소에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눈을 뒤집으며 거품을 물지 않았다. 그는 당시 다수의 독일 정치인들과 달리 소시민 계층 출신으로 소박한 면도 많다. 그가 독일 국민들로부터 선풍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소박한 생활을 동경하여 잠시 그러한 삶을 살기도 했으나 고된 일과 형편없는 생산성에 질려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세무서장으로 활동하여 충분한 자산을 축적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가문은 충분한 유산을 소유하여 독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청년기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지망생으로서 그림 엽서나 홍보 그림을 그려서 팔던 알바생이었다. 배고프고 가난한 화가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중 그는 20대 중후반에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그는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여러 참호들을 오가며 참호전신 역할을 맡은 연락병으로서 자신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함과 정말 열심히 싸웠고 그 대가로 부상까지 입어서 철십자 훈장을 두 번 수여받았고 전상장을 받은 것을 자부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광기 어린 모습은 전쟁 말기 그를 묘사한 현대 전쟁 영화들에서 유래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주변인들에게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며 다정했고 화를 정말 잘 안 냈다고 한다.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한량이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으므로, 터프가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사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연설과 같은 공적인 상황일 때처럼 화려한 논변술로 사람들을 압도했다거나 성질을 부려 사람들을 위축시켰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 2002년에 사망한 아돌프 히틀러의 여비서이자 타자수였던 트라우들 융에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녀에게도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2013년에 사망한 로후스 미슈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하여 언제나 친절했던 최고의 보스였다는 개인적인 인상을 남겼다. 또한 특이하게 히틀러는 자신에게 반대하더라도 그 의견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발터 모델과 귄터 폰 클루게. 이 두사람 모두 히틀러가 환상속의 전술을 이야기하면 차갑게 히틀러에게 반박을 하는 군인들이었고 그런 면을 히틀러는 신뢰하였다. 비록 히틀러가 1942년 중반부터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 구데리안이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파울 하우서를 한직에 날려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처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신뢰하고 요직에 등용했기에 독일은 잠시나마 정말로 세계정복을 이루는듯 했던 것이다.

그래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몰락(다운폴)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아돌프 히틀러가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대신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영화는 아돌프 히틀러를 미화한 작품이 아니냐?'는 대한민국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벼랑 끝에 몰린 아돌프 히틀러가 반쯤 실성하여 울부짖는 모습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운폴 문서를 참조.

인물 MBTI 프로파일링 위키 사이트인 Personality Database에서 분석 결과 INFJ로 추측하고 있다. 출처[30]


6.1. 예술적 취향[편집]


잘 알려져 있듯, 뛰어난 예술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화가로서 활동하였던 만큼 그는 예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서도 예술 중 으뜸은 음악과 건축이라고 꼽았다. 건축은 히틀러 자신이 가장 관심이 많았던 예술 분야이고, 음악은 실제로 미학자들 중 상당수가 음악, 특히 기악음악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추상예술이라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히틀러가 이상한 거라기보다는 예술계에서 흔히들 일컫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히틀러도 그대로 한 것.

반면 연극은 스스로의 장점 없이 남의 습성을 흉내내기 좋아하는 유대인의 예술이라고 여겨 탄압했다고 알려진다. 베니스의 상인을 연극으로 연 적이 있었는데 이마저도 반유대주의 목적이었다. 집무실에 스위스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 연작 중 3번째 작품을 걸어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이 예술에 관심이 많고 감각도 뛰어났기에 예술품을 모으는 데도 관심이 많았는데, 전쟁 중에 러시아의 호박방을 비롯한 고전 시대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까지 전 유럽에서 예술품을 강탈했고, 훗날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던 린츠를 전면적인 문화수도로 개조하고 직접 설계한 린츠 박물관에 수집한 예술품들을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모은 예술품들은 전쟁이 끝나고 주인이나 각국 정부로 반환되었지만 상당수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를 두고 스위스 비밀금고에 처박혀 있다, 나치 잔당들이 들고 튀었다 등 수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는 예술적 재능만 따져보면 뛰어났다. "빈에 거주하던 시절 매우 가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부업삼아 그리던 그림엽서가 나름 잘 팔려서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진 않았다.", "뮌헨에서는 광고판 등을 그렸으며 평 또한 나쁘지 않았다."는 기록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보면 아돌프 히틀러가 그림만 그려도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의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31], 이 정도면 당연히 미술 방면의 재능이 일반인 수준은 확실히 넘었다고 보는 게 옳다. 다만 당시의 유럽 지도자들 중 이상할 정도로 예술적 재능과 소양이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기에[32] '아돌프 히틀러는 예술적 재능이 형편없었다'는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다.


6.1.1. 건축[편집]


아돌프 히틀러는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건축의 꿈을, 젊은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루기를 기대하고 총애하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한다. 이전에는 트로스트가 건축을 담당했다고 하는데, 건물은 물론 실내 장식이나 가구 배치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취향을 반영하지 않았다. 슈페어 발탁 후에는 건축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어 세세한 치수나 가구의 재질까지 신경을 쓰면서 다른 일을 소홀히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 취향에 대한 고집이 셌지만, 전문가가 진지하게 주장하면 마지못해 따랐다고 한다.

일부 건축물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마인크래프트에 가까운 공상의 산물이었다. 히틀러의 구상한 건축의 대부분은 대리석 같은 최고급 재료로 건물을 짓자고 해 놔서 원활한 재료 수급이 불가능했고, 크기도 너무 커서 당대의 기술로는 수십 년은 지나야 겨우 완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의 망상이 극에 달한 게르마니아 계획은 만약 이루어졌다면, 베를린은 지반이 약한 편이라 수년 안에 도시 전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었다. 덕분에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를 설득하거나 조금이라도 현실적인 설계를 하느라 자주 머리를 싸매야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도안이 실현된 건축물은 베를린 경기장과 총통관저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총통관저는 베를린 전투 때 거의 파괴되었고, 소련군이 나머지 건물을 폭파하여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고대 건축물들의 폐허를 꽤 좋아한 모양인데 폐허 그림들이 그의 건축에 꽤 큰 영향을 준 듯 하다.


6.1.2. 음악[편집]


음악에 대한 관심과 소양도 평균 이상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일반인 수준에 비교할 때 그렇다는 것이지, 히틀러는 기본적으로는 고전시대보다는 낭만주의 이후 음악을 더 좋아했고 당대에 변화 발전하던 20세기 이후의 대중성 높은 현대음악은 영 탐탁지 않아 했으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히틀러의 음악에 대한 이해는 미술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 장르나 특정 시대의 음악만을 추구하는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음악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이었다. 엄청난 바그너 팬이었으므로 빈 시절부터 바그너의 공연이라면 빼먹지 않고 오페라하우스를 꼭 찾아갔다고 한다. 바그너의 초기 작품보다 게르만 신화가 나오는 후기작품을 편향적으로 좋아해서 바그너의 작품을 순수하게 좋아했다고 여기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있지만, 음악적으로는 바그너 후기 작품이 훨씬 깊이 있고 바그너 음악의 정수를 담고 있으므로 아돌프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경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4년만에 휴가를 받아서 후방에 가게 되었을 때는 동네 오페라 극장에 들렀다가 바그너는 안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나와버린 일이 있을 정도로 히틀러의 바그너 숭배는 중증이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바그너 작품 가운데서 가장 좋아한 것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 바그너의 전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신화가 사용되지 않은 작품이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쉬운 곡을 쓰지 못한다는 비판을 의식한 바그너가 의도적으로 평이한 화성과 선율을 사용하여 작곡한 곡으로,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 리스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후원자이면서 추종자이기도 했다.

바그너 이외의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 가운데에서는 안톤 브루크너를 두 번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세 번째로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 독일에서 제국음악회장을 하면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전후 나치 협력문제로 비판을 받는다. 이렇듯 1930년대 기준으로 조금 올드한 독일 낭만파 음악을 좋아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독일 작곡가로 꼽히지만 작법에서는 고전주의적인 형식성과 명료성을 상대적으로 중시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의 경우에는, 젊었을 때는 구색 맞추려고 듣는 수준이었다가 만년에야 좀 즐겨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히틀러의 개인 취향과는 별개로 베토벤의 곡들은 나치 프로파간다에서 아주 잘 써먹었다. 역시 지극히 가볍고 경쾌한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Die lustige Witwe)'[33]을 좋아했으며, 이는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던 작품이라고 한다.

자기가 특히 관심있는 분야나 대상이 아니면 별다른 체계적인 지식이나 선호가 없었던 히틀러답게 독일권 이외의 다른 문화권의 작곡가와 음악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히틀러는 인종차별 정책에 따라서 슬라브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여겨 그들을 탄압했지만, 정작 아돌프 히틀러 자신은 슬라브인 음악가인 차이코프스키라흐마니노프의 음악,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의 레코드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반면 1920~3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재즈에 대해서는 청승맞은 선율과 리듬에 맞춰 몸이나 배배 꼬고 돌리는 열등한 깜둥이 음악으로 취급했다.[34] 정작 모리스 라벨이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같은 서구권의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은 재즈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꽤나 남겼고, 오늘날 재즈가 1920년대 이후의 서양음악에서 가장 의미있는 발전을 이룬 장르로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히틀러다운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세기 최고의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 꼽히는 주세페 베르디의 음악은 가끔 가다가 듣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베르디의 1급 음악보다 바그너의 2급 음악이 100배 낫다는 식으로 폄하했으며, 황실 오페라 극장의 베르디 공연보다는 동네 극장의 바그너 공연을 듣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길거리 악사가 베르디의 대표적인 아리아인 "여자의 마음"을 연주하는 걸 보고, 바그너의 음악이라면 저런 천박한 자가 연주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베르디를 좋아하던 젊은 시절의 절친한 친구인 아우구스트 카비체크에게 너의 베르디도 참 안되었다고 혀를 찬 일도 있다고 한다. 그나마 베르디 음악 중에 괜찮다고 평가한 건 아이다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군의 군가인 군함행진곡을 듣고 만족해서 자주 흥얼거렸다고 한다.


6.2. 아돌프 히틀러와 미술[편집]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가졌다고 평가되는데, 오죽하면 히틀러를 다룬 매체들에서 '계속 그림이나 그리지, 으이구!'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할 정도다.

미대에 낙방했단 것 때문에 히틀러의 미술 실력이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는 말이 많지만, 독일의 역사학자인 라이너 자이틀만 등에 따르면 사실 히틀러의 그림 실력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평균 이상이었다고 한다. 다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구적인 화풍을 고집한 것일 뿐이지, 그림 자체는 분명 꽤나 잘 그리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별로였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히틀러의 악행들로 인한 증오심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는 의견도 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아돌프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파리로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는 건축물을 묘사한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사람을 잘 그리지 못해 인물화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풍경화에서도 배경의 사람들은 간략하게만 묘사하였다. 후기작에서는 간간히 사람을 그렸지만 여전히 중심은 건물이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남긴 그림을 보면 평범한 구도에 특별히 미적인 독창성이 없으며, 어긋난 원근법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색감 또한 단조로운 편이다.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기술은 괜찮았지만 예술적 성향보다는 건축 조감도 느낌이 난다고 평가했다. 이를 아돌프 히틀러의 과격하고 잔혹한 정치적 행보와 엮어서 '아돌프 히틀러는 인간을 무의미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서도 지워버렸다'는 식으로 추론하는 의견이 종종 보이지만, 제대로 된 근거는 없기 때문에 단순히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풍경화 취향이 그랬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미술적 취향은 자신의 그림처럼 다소 고전적이었으나 훗날 알려진 것처럼 처음부터 모더니즘 예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롤모델이었던 무솔리니와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초기 모더니즘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나치당 역시 초기에는 모더니즘 건축 등에 관심을 보였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게르만의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하던 나치당의 인사들에 의해 고전 예술이 게르만적이라고 정의되고 모더니즘이 타락한 예술이라고 정의된 이후부터 거기에 편승했다. 마침 독일의 기성 미술계도 이런 비슷한 보수적인 시각이 있었기에, 차츰 입체파 스타일 등을 시도만 해도 화풍이 '유대적으로 물들었다'고 판명하고 제국 예술협회에서 쫓아내고 활동을 금지했으며, 현대미술 작품에는 퇴폐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37년에는 <위대한 독일미술전>과 <퇴폐미술전>이라는 전시회를 여는데, 퇴페미술전에 에밀 놀데, 마네 등 오늘날 근대 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기형아, 장애인의 사진과 비교를 하면서까지 '옳지 못한 예술, 옳지 못한 신체'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주입하려고 애썼다. 반대로 <위대한 독일미술전>은 아카데믹한 회화나 조각이 주를 이룬 전시회였고, 아리아 인종의 신체를 찬양하는 교과서적인 누드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정작 내세웠던 위대한 독일미술의 기원은 그리스-로마 조각상, 르네상스 이탈리아 회화다. 또한 <퇴폐미술전>은 나치의 기대와는 달리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건축적인 취향은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를 통해 나치 제국의 수도 계획인 게르마니아로 구체화된 바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배타적인 예술관에 대한 일화가 있다. 괴벨스는 300만 제국 마르크를 들여 초호화 제국선전장관 관저를 지어놓고 집들이 겸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도 초대되어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경악하며 인사도 없이 돌아가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괴벨스가 선전부 예산과 영화계 뇌물로 흥청망청 초호화 저택을 지어서도 아니었고, 국립미술관의 그림들을 선전장관 개인 저택에 제 멋대로 걸어놔서도 아니었다. 바로 입구에 걸어 둔 수채화 그림이 천박해서였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몰래 베를린에서 개최하는 미술작품 전시회에 '몰래' 분장을 하고 갔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비서인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롱코트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차림으로 미술 전시회에 갔는데, 그 이유는 이전에 전시회에 그냥 갔다가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계속 "총통각하 만세!"를 외치는 바람에 작품 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젊은 시절 2천여 점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 중 700여 점 정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복무 하던 시절에 그린 그림이 벨기에의 농가에서 발견되는 등 간간이 신작이 발견되기도 하기 때문에 수가 약간씩 늘고 있으며, 경매에도 꽤나 자주 나오는 편. 총통 시절에도 나치당원들이 아부한답시고 비싸게 샀지만 현대에도 그 희소성으로 인해 상당히 비싸게 거래된다.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 중에서 꽤나 유명한 축에 속하는 <바다의 야상곡>이라는 그림은 2012년 슬로바키아의 온라인 경매에서 3만 2천 유로(약 5천만 원)의 가격에 팔렸고, 뮌헨 시청을 그린 그림 한 점은 13만 유로(약 1억 8000만 원)에 팔렸을 정도. 인터넷에서도 상당수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클릭하는 걸 보면, '세계의 모든 사람이 내 작품을 보도록 하고 싶다'던 아돌프 히틀러의 소망은 결국 실현된 셈이다.

다만 예술적 가치가 있어서 팔린다기보다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직접 그린 작품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경매에 나오는 쪽에 가깝다.[35] 인터넷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작품을 검색해 보는 사람들 또한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란 악당이 그림도 그렸다는데, 과연 어떤 그림일까' 같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위에 나와 있는 <바다의 야상곡> 같은 경우도 그림만 보고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작품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다른 제대로 된 작품들과는 달리 경매 자체에도 논란이 있다. 나치 피해자 중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그린 그림도 나치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걸 낙찰받는다는 것 자체가 홀로코스트 관련 단체들의 어그로를 끄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큰 경매장에서는 올라오지도 않고, 대부분의 낙찰자 역시 익명으로 낙찰받는다. 그나마 밝혀진 경우는 자료 삼아 공개적으로 구입하는 교육재단 등의 시설 뿐. 2017년 새로 발견된 아돌프 히틀러 그림 역시 신원 미상의 기증자가 관련 재단에 기증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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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를 소재로 한 우표들. 우표의 경우 나치 독일 시절 워낙 많이 찍어놓은 지라 그렇게 높은 가격을 받지는 못한다.


6.3. 성격[편집]


히틀러를 매일 보았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히틀러를 접했던 수행원과 비서 같은 보좌관 중에서도 지도자라는 껍질 안에 숨겨진 진솔한 히틀러를 엿보았을 만큼 히틀러를 잘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히틀러는 언제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대중은 우상을 원한다."고 그는 훗날 말했다. 히틀러는 대중뿐만 아니라 자기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사람들에게도 우상처럼 굴었다. 군중 앞에서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고 측근들에게도 기나긴 독백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히틀러는 기질적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불신과 냉소가 워낙 몸에 배어서 남들에게 고백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도통 없었다. 수백만 명 앞에 드러난 공인의 모습과는 달리 히틀러는 지극히 폐쇄적인 사람이었다. 제대로 사람을 사귀는 경우도 드물었다. 아무리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더라도 히틀러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히틀러가 부담 없이 반말로 대하는 사람은 겨우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듬해 어릴 때 가깝게 지냈던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와 상봉했을 때도 말을 꼬박꼬박 올렸다. 1933년 이후로 히틀러를 부르는 정식 호칭으로 자리 잡은 '지도자(Fuhrer)'라는 말은 이 딱딱한 사이를 잘 나타낸다. 히틀러가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에 따라붙는 후광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히틀러는 아주 가까운 가신한테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히틀러라는 인물이 '신비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히틀러의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권위를 살려주는 역할도 했다.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인간적 따뜻함보다는 자기의 권의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언 커쇼 히틀러 (p. 68~69)


히틀러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어떤 효과를 노리고 연출한 쇼였다. 불같이 화를 내고 폭발하는 것도 실제로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히틀러는 기회가 생기면 평당원과 만나서 굳게 악수를 나누고 '남자답게' 눈을 바라보았는데 초라한 평당원에게는 죽어도 잊지 못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행동은 개인 숭배 열풍을 강화해 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연기일 뿐이었다. 실제로 히틀러는 추종자들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서 히틀러를 따르던 사람도 1928년 히틀러가 "인간을 경멸한다"고 비판했다. 히틀러의 성격에서 자기 중심주의는 실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다.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선전의 이미지가 내면이 공허를 감추었다. 그는 쓸모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이언 커쇼 히틀러 (p. 415)


유대인 학살에는 분명히 히틀러의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공개 연설에서 그렇게 비난하고, 갈수록 급진화되는 극단적 폭력을 그렇게 선동하고, 자기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면서 그렇게 겁을 주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 살해에 자기가 관여한 흔적을 절대로 남기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어쩌면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동안에도 히틀러는 유대인의 권력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유대인이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웠는지 모른다. 히틀러 자신의 비밀주의도 한몫 거들었겠지만, 어쩌면 독일 국민이 무시무시한 비밀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끔찍하긴 해도 두루뭉술한 표현으로만 그 문제를 언급했는지도 모른다. 측근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히틀러는 유대인 살해를 솔직하게 거론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그 범죄를 작당하는 장본인들이 동석했더라도 유대인 살해를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언 커쇼 히틀러 (p. 598)


아돌프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의 평가는 다정다감하며 친절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절대다수가 그와 친분이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의존한 탓도 있지만, 최소한 그가 저지른 온갖 만행과 전쟁범죄와는 무관하게도 주변사람들에게는 되도록이면 다정하고 소탈하게 대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본래 아무리 악명을 떨친 독재자라도 의외로 주변 인물들에게는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대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비록 나중에는 독재자가 되었지만 맨 처음 정권 자체는 독일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적법적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주위 사람의 호감조차 사지 못하는 사람이 온국민의 지지를 받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이런 면모는 아돌프 히틀러의 말년에 그의 비서로 근무했던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녀는 노년의 인터뷰에서 비록 아돌프 히틀러가 개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거대한 이상과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013년 96세로 사망한 로후스 미슈 전 SS 통신상급반지도자의 증언은 아돌프 히틀러의 사생활을 연구할 때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는 독일 슈피겔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하고 다정했으며 최고의 상사라고 평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하는 사람들의 직책을 부르지 않고 일일이 이름을 불렀으며 절대로 까먹는 일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요리사 만치를르아니는 퓌러 전속 채식 요리사였다. 그는 영화 몰락에서도 등장한다. 조상 중 유태인이 있던 사실이 밝혀져 해고됐지만, 그가 연금 수령 및 재취업에 불이익이 없도록 주민등록상 순수 게르만으로 등재토록 아돌프 히틀러 개인이 조치를 취해 줬고, 전쟁 말기에는 아예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는 하루는 그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나는 결코 가정에 충실할 그런 가장이 못되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측근이 총통 관저에서 자신을 위한 음악회를 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하나 때문에 예술가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전속 사진사 호프만의 증언에 의하면 1933년 총리가 되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들 중에서 집회나 공식석상이 아닌 평소에 아돌프 히틀러에게 '퓌러 각하(Mein Führer)'나 '하일 히틀러!'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로 아돌프 히틀러 씨라고 불렀으며 낯을 많이 가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주절주절 수다를 떨기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 다운폴 초반에서 묘사했듯이 한 친위대 장교에 의하면 "퓌러 사령부에 새로 부임받은 장교들이나 병사들은 퓌러를 만날 때마다 깍듯이 열정에 차서 "하일 히틀러"라고 경례를 한다. 하지만 퓌러는 공적인 자리도 아닌 이런 곳에서 너무 그러지 말라며 그냥 인사만 하라고 맨날 달래신다. 실제로 퓌러 사령부에서 좀 오래 있던 사람들은 그냥 퓌러를 만날 때 "좋은 아침입니다. 퓌러 각하."라고만 인사한다."라고 한다. 동류집단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는 어눌할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또 인간적으로 몹시 소탈해서 선물을 받으면 상이군인 병원이나 양로원 등으로 보냈다고 한다.

친구처럼 지낸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무 말도 없이 둘이 몇 시간씩 산책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식사도 친한 사람 몇 명과 하거나 혼자 했으며, 친분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괴벨스가 검열로 자르거나 수입 금지된 할리우드 영화 작품까지 특별히 들여와 밤새도록 감상했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즐겨 보았으며 자신을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는 포르투갈을 통해 입수해 두 번이나 감상했다. 덧붙여서, 미국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월트 디즈니의 만화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기미 상궁이었던 마고트 우엘트에 따르면 나름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온화한 성품이라고 한다.

나치 정부를 좋지 않게 여기는 독일인도 히틀러와 한번 얼굴을 맞대고 나면 좋은 느낌을 받았다. 히틀러는 상대방 수준에 맞추어서 대화를 이끌어가는 재주가 있어서 거부감을 주지 않았고 합리적이고 포용력이 있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히틀러와 마주앉아서 한번 대화를 나누면 아무리 히틀러를 욕하던 사람이라도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나치의 가톨릭 교회 공격을 비판했던 파울하버 추기경은 1936년 11월 초 베르크호프에서 히틀러와 세 시간 동안 만난 다음 비밀보고서에 "총리는 틀림없이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다."라고 썼다.

히틀러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도 딱딱하고 정중하고 깍듯하게 굴었다. 느지막히 일어나서 시중을 받으면 비서한테 한 두 마디 고맙다는 말을 하는 편이었고 오후와 밤에는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운전 기사이자 집사 노릇을 했던 아르투어 카넨베르크의 익살과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도 좋아했다. 히틀러 보좌진에 합류하고 얼마 안 된 공군 부관 니콜라우스 폰 벨로프가 신혼여행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겠다고 했을 때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마음 편히 다녀오라고 말하는 아량을 보였다. 크리스타 슈뢰더라는 비서가 몸이 아팠을 때는 선물도 보내고 병원으로 문병을 가기까지 했다. 측근의 생일과 크리스마스도 꼬박꼬박 챙겨서 선물을 보냈고 선물을 고를 때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거기서 푸근한 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히틀러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지만 수행원도 쓸모가 있는 동안에만 챙겨주었다. 아무리 오래 자기를 섬긴 사람도 쓸모가 없어지면 그냥 내쳤다. 아랫사람들도 히틀러를 어르신으로 부르면서 받들어 모셨다. 그들은 히틀러를 무서워하면서도 우러러보았다. 히틀러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강했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가 자리에 끼면 분위기가 딱딱해졌고, 히틀러가 있으면 마음이 편치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생활 습관이 별났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다 보면 근무 시간도 늘어나고 몸이 고달팠다. 비서들은 대게 아침에도 일을 했지만 어떨 때는 밤 늦게까지, 심지어 새벽까지 기다리면서 장문의 연설을 받아 적어야 했다.

히틀러의 실제 성격은 폐쇄적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측근들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 애썼고, 자신의 속내를 절대 털어놓지 않았다. 또한 다운폴에서 나온 대로 사석에서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모아놓고 자기 혼자 무수히 많은 독백을 하는 것이 히틀러의 습관 중 하나였다. 그래서 히틀러와 이야기를 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 이야기나 바그너의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로 나오지 말아야 했는데, 이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히틀러가 흥분하여 먼 동이 터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히틀러가 자신만 관심있는 주제를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야기했던지 히틀러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히틀러가 말할 내용을 술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히틀러와 같이 있으면 한 마디도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히틀러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가 나오면 몇 시간이 되었든 간에 곁에서 참을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곁에 있을 때 대단히 불편해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어떨 때는 쑥쓰러울 만큼 늘어지는 칭찬을 했지만 어떤 때는 비서들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심기만 건드리지 않으면 누가 함부로 굴어도 눈감아 주었지만[36] 자신에게 기어오르거나 깔아뭉갠다고 느낀 사람한테는 가혹하게 대했다. 1923년부터 궂은 일을 한 빌헬름 브뤼크너의 여자친구는 히틀러에게 잘못 보여서 냉대와 수모를 당했다. 이후 사소한 언쟁 끝에 브뤼크너를 해고했다. 또한 오랫동안 일 한 카를 크라우제를 사소한 문제로 해고했다.

히틀러는 자기를 챙겨주는 사람들의 얼굴이 바뀌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서 늘 똑같은 얼굴을 봐야 마음이 놓였다. 방랑자처럼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왔으면서도 히틀러의 생활은 지극히 단조롭고 융통성이 없어서 직원이 바뀌는 것을 싫어했다.

우정에 가까울 만큼 가까웠던 사람은 괴벨스와 슈페어였다. 히틀러는 두 사람을 좋아해서 자주 불렀고 두 사람의 아내와 가족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다. 베를린에 있는 괴벨스의 집에 히틀러는 자주 방문했고, 베를린 재건축 사업을 놓고 슈페어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은 히틀러의 취미였다. 그것은 삭막한 정치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취미 같은 것이였다. 괴벨스와 히틀러 사이는 부자지간과 비슷했다. 1937년 9월 전당대회를 마치고 히틀러는 밤에 비행기를 타면 좋지 않으니 자고 가라고 말하는 인간미를 드러냈다. 히틀러가 이 두 명과 친했던 것은 괴벨스에게서는 탁월한 선동가라는 자신의 분신을 보고 슈페어에게는 뛰어난 건축가라는 자신의 분신을 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을 아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히틀러의 성격유형을 분석해 볼때 대중적인 성격유형검사인 MBTI의 INFJ 유형의 가장 어두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6.4. 식습관과 혐연[편집]


젊은 시절에는 미식을 좀 즐겼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복무할 때에는 다른 데는 돈을 하나도 쓰지 않았지만, 더 맛있는 음식을 사먹을 때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서 동료들에게 먹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후술되어 있는 한프슈탱글의 증언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이후 히틀러 특유의 식습관으로 바뀌었는데, 거의 청교도와 맞먹을 정도로 엄격한 식습관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담배는 평생 피우지 않았던 금연을 넘은 혐연자였다. 부하들도 아돌프 히틀러의 앞에서는 절대로 못 피우게 해서 부하들이 싫어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흡연의 위험성 개념이 매우 약했던 시대[37]라 남성 흡연율이 매우 높았고 여성 흡연율도 높았던 시대다. 신앙이 깊거나 한 소수 경우 제외하면 고위공무원급이라면 거의 다 담배를 피웠고 계급 구별 없이 같이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회의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런 인식은 히틀러가 죽은 후에도 바뀌지 않아서 연예인들이 공식석상에서 사진 찍을 때 보면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도 많고 집이나 차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오히려 금연자가 비주류 취급받던 시절이다. 영화 몰락에서 히틀러가 죽었다니까 젊은 장교들이 다같이 담배를 무는 코믹한 장면이 있을 정도다.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 의하면, 회의 중에 휴식시간을 가졌을 때 한 정치인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담배를 권하며 "퓌러 각하, 담배는 우리의 몸을 소독시켜주고, 피로를 회복시켜주는 건강에 이로운 물건입니다."라고 말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 생각해보게나, 흡연자들의 이가 누렇게 변하고 맨날 가래가 끓으며 운동할 때마다 폐활량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입술과 피부는 죽은 사람처럼 어둡게 변하게 하는데 전혀 건강에 이로워 보이지도 않네. 게다가 담배가 이롭다는 과학적 근거도 없다네."라고, 지금 기준으로 봐도 꽤 상식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시 나치당에서의 금연 캠페인 포스터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을 지내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사교예절을 가르치고 숙청되기 전 미국으로 망명한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후에 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히틀러가 란츠베르크에서 석방되고 나서 와인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웠다가 점차 배가 나오는 걸 경계해서 육식과 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구술했다. 그러니 술을 아예 안 마신 게 아니다. 맥주홀 폭동 당시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아돌프 히틀러는 돌격대 앞에서 맥주를 완전히 들이키고, 잔을 바닥에 던짐으로서 모든 게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그 후로도 어떤 비장한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는 종종 큰 라거잔에 든 맥주를 들이키고 그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외에도 여기저기서 필요한 상황이거나 기념할 날에는 맥주나 와인 정도의 적당한 음주를 한 기록과 영상에도 발견된다.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이 밝히기로는 맥주집 폭동으로 수감하고 나서도 술은 조금 마셨다고 한다. 나중에 집권 후에도 알려진 것과 달리 식사 때는 소화를 돕기 위해 알콜 냄새는 지독히 싫어해도 코를 쥐어막고 '코냑 한 잔' 정도는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한다. 만성적인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그에게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이 처방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 맥주는 독일인들이 술이라 여기기보단 물처럼 마시는 것이다 보니, 히틀러의 음주 습관을 논할 때 맥주는 빼고 얘기하기도 한다.

채식주의자고기를 잘 먹지 않고 식사도 적게 하는 등 일반적인 이미지에 비해 의외의 면이 많다. 다만 금주, 금연한 것은 약간의 정신병적인 '건강 염려증' 때문이었으며, 채식은 사실이나 최고급 식재료인 아스파라거스 같이 서민들이 상시 먹기 힘든 고급 채소류와 감자요리, 파스타 종류를 주로 즐겼고, 단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육식을 완전히 끊은 건 조카딸 겔리 라우발이 1931년 자살하고 나서라고 알려졌다. 그 전까지는 비둘기를 보양식으로 먹는 등 약간의 육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돌프 히틀러의 방에서 권총 자살했는데 육식할 때마다 그 이미지가 떠올라서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음식 검사관으로 고용되었었던 마르고트 뵐크의 말에 따르면, 주로 아스파라거스나 피망 같은 채소에 파스타나 쌀을 곁들여서 먹었다고 한다.

일단 이것들만 본다면 의외로 소박하고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 듯 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식사 시간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일례로 2차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사령부 중 하나인 볼프샨체에서 히틀러의 수석 부관인 루돌프 슈문트가 국방군 지휘참모부의 장교 중 한 명이 매일 아돌프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동석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젊은 장교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했는데, 같이 식사해보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그 규정의 발안자인 슈문트가 매일 저녁식사에 참석할 장교를 강제로 지정해야 했다. 왜냐면 앞서 말했듯이 일단 아돌프 히틀러가 소싯적부터 규칙적인 생활과는 한참 떨어진 니트적인 생활을 했으므로[38] 저녁 시간이 일상인의 리듬과 전혀 맞지 않은데다가, 히틀러의 식단은 채소뿐이고 적게 먹는 데다 식사 자리에서는 금연이었으며 히틀러는 식사할 때 주로 혼자 떠들어대고 그와 식사하는 주위 사람은 인내하며 들어야 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식사할 때 대화 주제로는 '개를 길들이는 방법', '로엔그린이나 파르지팔 같은 게르만족의 영웅이 나오는 바그너 오페라 이야기',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나 '채식의 우월함' 따위였다. 게다가 혹여라도 정치적인 화제가 나오거나 전선에서 나쁜 소식이라도 전해지면 분위기는 금방 심각해졌고[39] 저녁식사 후 아돌프 히틀러는 몇 시간 동안이나 동석한 장교들을 앞에 앉힌 채 혼자서만 말을 해댔기 때문이다.[40] 때문에 히틀러와 식사를 할 때는 정치적인 얘기는 금기였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결벽증이 있었다는 소문도 떠돌아다녔다. 근데 정작 케이크를 무지 좋아해서 치아 상태는 별로였다고 한다. 충치가 워낙 심해서 항상 치통을 달고 살았으며 나중엔 치아농양까지 발생해 잇몸이 내려앉아 버렸다. 그래서 치과의사 후고 블라슈케(Hugo Johannes Blaschke)한테 치료를 받았는데 이때 치료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중엔 그의 치과 주치의로 임명된 블라쉬케를 피해다녔다고 한다. 그나마 3조각 이상은 절대 먹지 않았던 젊은 시절, 중년 초반 시절과는 달리 노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병적으로 케이크를 찾기 시작해 3접시를 한꺼번에 해치웠다. 초콜릿도 굉장히 좋아하여 하루에 1kg에 달하는 양을 먹었으며 케이크, 파이, 과자도 초콜릿이 많이 든 것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과자와 크림빵도 좋아해서 즐겨먹었고 덕분에 자주 복통에 시달렸다. 이는 생모가 위암으로 죽은 가족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거기다 채식을 하면 자연스럽게 육식을 안 하는 것에서 오는 부족함을 채우려고 단 음식을 많이 찾게 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41]

아돌프 히틀러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에 관련된 몇몇 논란이 있으며, 영문 위키피디아에 아돌프 히틀러와 채식주의에 관한 항목이 따로 개설되있다. 해당 문서에서 Ilse Hess, Fritz Redlich, Thomas Fuchs의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는 고기, 빵가루, 달걀, 채소 등을 섞어 뭉쳐 만든 간만두 LeberKnodel을 항상 먹었다고 한다. 역사학자 Robert Paine는 히틀러가 채식주의자였다는 일화는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조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치아와 틀니에 존재하는 치석 퇴적물 분석에서 고기 섬유가 발견되지 않은 점, 히틀러가 사망한 지 사반세기가 넘었고 수십년간 학자들이 연구했는데도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 및 무엇보다 히틀러의 식사를 검사하던 기미상궁 역할을 했던 여인이 일하는 동안 단 한번도 고기라곤 구경도 못해보았단 증언을 남겼으니 채식주의자가 맞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의 전담 주방장이 건강 악화를 우려해, 히틀러 몰래 감자죽을 끓일 때 뼈를 같이 끓여 우려내기도 했다고 한다.


6.5. 동물 보호[편집]


파일:external/greyfalcon.us/Hitler_w_Blondi_500.jpg
브론디(블론디)와 아돌프 히틀러 (영상)

히틀러는 동물 애호가였다. 그는 독일 최초의 동물보호법[42]을 만들었는데, 이 법안을 결재한 아돌프 히틀러 친필 사인도 있다.[43] 이 법안은 많은 현대 국가들의 동물보호법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당 법은 수렵을 제한하는 것 외에 '동물 꼬리 자르기 금지', '동물을 이용한 생체실험 금지' 등의 조항도 있었다.

동물 중에서도 특히 애견가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셰퍼드 블론디(Blondi)는 사실상 그의 유일한 단짝과도 같았다. 물론 블론디 이전에도 를 여럿 키웠다. 블론디는 1941년 마르틴 보어만에게 선물받았다고. 또한 1차대전 당시 종군할 때도 전우들과 거의 친교하지 않았던 병사 아돌프 히틀러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던 대상도 적진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넘어온 '푹슬(Fuchsl)'이라는 화이트 테리어였다. 이 개는 영국군의 군견이었는데 길을 잃어 아돌프 히틀러가 소속된 소대가 있던 참호로 뛰어들어 왔다고 한다. 푹슬은 매우 영리하고 붙임성이 있어 비사교적이던 아돌프 히틀러마저도 푹슬에게는 마음을 열었다고 하며, 전쟁 내내 아돌프 히틀러의 애견으로 함께 하였다.[44] 그런데 1917년 6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어느 기차역의 역장이 푹슬을 탐내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200마르크에 개를 팔 것을 제의했는데 히틀러는 벌컥 화를 내면서 20만 마르크를 줘도 푹슬은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역장은 (아돌프 히틀러의 말에 따르면) 푹슬을 훔쳐가버렸다고 한다. 히틀러는 부대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개를 찾겠다고 부대 이동을 지연시킬 수는 없으므로 푹슬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 일로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슬퍼하고 분노했다고 하는데 이 일이 훗날 그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2차대전 말기에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던 그는 자살하기 전 폭풍같이 밀려오는 소련군이 그의 애견을 잡아먹을 것을 두려워하여 주치의로 하여금 독극물 투여로 블론디를 죽이게 하였고, 얼마 뒤 자기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영화 몰락에서 블론디에게 직접 독약 캡슐을 먹이고선, 끙끙대며 죽어가는 블론디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나서 블론디가 죽자 완전히 영혼이 나간 얼굴로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반대로 고양이는 싫어했다. 고양이는 이기적이고 충성심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의심을 달고 살았던 사람이니만큼 개에 비해 인간에게 살갑지 않은 고양이에게 '속내를 감추고 있다' 정도의 느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고양이와 개의 다른 습성이 크게 작용한걸로 보는데 고양이가 주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는 것에 반해 개는 주인의 말을 잘 따르는데 결국 자신의 뜻에 잘 복종하기를 바라는 지도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항상 충직한 개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45]

다만 동물에게는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면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유대인은 동물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의미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실제로 나치가 가졌던 특이한 이념에 기반한 것이기에 나치의 동물 보호법을 이해할 때는 동물 자체에 대한 나치의 사랑보다는 나치의 생물관을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나치는 동물을 인간-동물-열등한 인간으로 구분지었으며 이중 열등한 인간(유대인)을 말살함과 동시에 인간(아리아인)과 동물을 보호해 이상사회를 구축하고자 한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히틀러 뿐만 아니라 다수의 나치당원이 동물보호에 동의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나치는 동물이 충성심이 있기에 배후중상설에 기반한 배신자 유대인 자본가들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특히 개는 충성심이 강해 좋아했으며 고양이를 싫어한 이유 역시 이와 같다.

6.6. 사치와 부정부패[편집]


출처
독일 정권은 히틀러의 금욕적인 면을 부각하는 선전을 했지만 이는 철저히 기만이었다. 히틀러는 물욕에 빠져있던 부패한 독재자였다. 아마 빈곤했던 시절의 기억을 못 잊어 이후 돈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빈 시절만 해도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받은 유산과 매달 25크로네씩 나오는 고아 연금이 있었고, 본인도 포스터나 극장 간판 그림 알바 등으로 상당한 추가수입이 있었다. 그러나 오페라나 전시회 관람 등 취미 생활에 돈을 쏟아붓는 통에 이내 거덜이 났고 판매를 도맡던 친구와 관계가 틀어지며 그림 알바도 막혀 엄청나게 쪼들리게 되어 노숙자 숙소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바이에른 시절에는 웬만한 은행원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당시 Fuchsl 평균 월급이 70크로네 정도였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연수입은 1,200크로네, 즉 월 100크로네 정도를 벌었던 것이다.

나치당 시절에는 당으로부터 받는 활동비와 본인이 끌어모은 후원금 중 일부를 당에 집어넣지 않고 횡령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대부분 장부에도 없이 익명에 현찰로 받았기 때문에, 좋은 집과 옷에 자가용[46]까지 굴리는 그를 세무서가 작정하고 털려고 해도 '다 공무용으로 마련한 것이고 내 수입은 없다'라며 버티는 통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20년에는 파산해서 매물로 나온 신문사 '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와 '프란츠 에어 출판사(Franz Eher Nachfolger)'[47]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인수한 뒤 직접 사장 자리에 앉았다. 표면적으로는 당 선전기관 쯤으로 둘러댔지만 실제로는 거의 아돌프 히틀러 개인 홍보수단에 가깝게 이용했고, 그 수익금도 개인이 차지해 버렸다. 이 외에도 워낙 독선적인 아돌프 히틀러에 반발한 당 수뇌부가 그의 당내 권한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탈당 소동을 일으키는 등 크게 반발하자 결국 아돌프 히틀러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당이 회계권까지 쥐어주는 등 이전보다 더 큰 권한을 넘겨주게 됐다. 이후 프란츠 에어에서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을 출판하면서 아돌프 히틀러가 15%의 인세를 가져가게 됐는데, 초기에는 별 인기가 없었던 책이 집권 후 거의 반강매로 전 국민에게 돌려지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안겨줬다.

집권 전의 아돌프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아이돌로서의 인기가 높았고, 심지어 그의 사진이 담긴 액자나 머그컵 같은 상품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였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사진 찍히는 걸 워낙 싫어한 탓에 그의 사진은 품귀 현상을 빚고 있었는데, 무명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이 미국 신문사로부터 1,000달러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 돌격대원들에게 걸려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아돌프 히틀러는 웬일로 흥미가 동했는지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눴고, 그에게 자기 사진을 독점적으로 찍을 수 있는 파격적인 권리를 약속하고 대신 그 수익 중 10%를 받게 되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대박을 터뜨려서 본인도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축재(蓄財)에 한 몫 단단히 하게 된다. 그렇게 전속 사진사가 되고 나서 아돌프 히틀러는 호프만과 둘이서 연설 퍼포먼스를 연구하기 위한 사진을 찍으며 연설연습을 하곤 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 중 상당수가 바로 호프만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후 호프만은 아돌프 히틀러의 취미인 미술품 수집도 도맡게 되었는데, 워낙 금전감각이 없었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림 값을 부풀려 받아내는 것으로 역시 짭짤한 이득을 챙겼다. 아돌프 히틀러 사진의 인기는 곧 우표에도 실릴 정도가 되었는데, 호프만은 당시로서는 생소하게도 우표에도 초상권을 주장해서[48] 인세를 받아냈다. 우표값이야 대단치는 않았지만 워낙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이걸로 호프만은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내 급여는 전부 순직한 돌격대원 유족들의 연금으로 돌리겠다'고 발표해 큰 호응을 얻어냈다. 물론 인세와 초상권만으로도 그깟 월급 안 받아도 될 정도의 부자였지만. 위에서 쓴 대로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부터 온갖 핑계를 대어 단 한 푼의 세금도 안 내고 있었는데, 이 무렵 국세청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기 힘든 그의 지갑사정을 파헤치기 위해 다시 한 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국세청과 접촉한 재무차관 라인하르트는 협상에 성공하여 '국사에 바쁜 지도자가 세금 문제로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자 카드는 국세청에서 말소되어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의무는 사라졌고, 그는 총리 급여를 도로 자기 계좌로 돌려버리게 된다.

이미 1933년에만 나치당이 대량으로 구매한 나의 투쟁을 통해 120만 마르크를 벌었고 1937년에는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우표에 저작권료를 부과해 1년에 5000만 마르크를 벌었다. 또 독일의 재벌들은 정경유착형으로 히틀러에 뇌물을 제공했고 독일의 관제언론들 역시 히틀러의 연설을 인쇄할 때 마다 수수료와 로열티를 제공해야 했다. 물론 히틀러의 세금납부내역은 아예 말소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총통으로 재임한 이래에 단 한 번도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히틀러는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완성시켜나갔다. 먼저 히틀러를 신뢰하지 않던 독일 국방군 소속 장성들의 환심을 사야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는 히틀러로부터 토지 면세권을 선물받았고 다른 장성들도 히틀러로부터 엄청난 돈과 명품 그림, 사치품들을 선물받았다.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역시 히틀러로부터 나치 점령하 폴란드의 937 헥타르의 땅을 부동산으로 선물받았고 평생동안 면세가 보장되었다. 구데리안은 이후로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49]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페르디난트 쇠르너,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에리히 폰 만슈타인, 귄터 폰 클루게,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등의 유명한 독일군 장성들도 탐욕에 눈이 멀어 히틀러로부터 적극적으로 뇌물을 챙겨갔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독일군 장성은 에르빈 롬멜 정도다.[50]특히 헤르만 괴링은 부패와 사치의 대명사였다.

이 시기 아돌프 히틀러의 돈 관리를 담당한 것은 은행원 출신의 친위대 대장 막스 아만(Max Amann)이었다. 1차 대전 당시 부사관으로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그는, 탁월한 금전감각을 발휘하여 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재정을 지켜낸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출판사 인수를 비롯해 온갖 빚 독촉을 연줄로 무마하거나 후원금을 울궈내 돌려막는 수완을 발휘했고,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원내총무 및 출판사 대표 등을 역임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심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역시 자기 돈주머니 챙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아돌프 히틀러는 결국 자기 회계관리를 퓌러 대리 및 친위대, 돌격대 대장 루돌프 헤스의 심복인 친위대 및 돌격대 대장 마르틴 보어만에게 맡겼다. 보어만은 워낙 철두철미하고 입이 무거우면서도 돈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에 아돌프 히틀러의 큰 신임을 얻으면서 나치당의 실세 중에 한명으로 떠올랐다.

물론 히틀러의 사치와 부정부패에는 약탈도 빼놓을 수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각 점령지로부터 많은 재산들을 약탈해갔고 수 많은 유대인의 재산도 역시 나치로부터 몰수당했다. 빼앗은 약탈품을 바탕으로 히틀러→나치당국방군→재벌→민간으로 이어지는 복잡하고 거대한 부패의 고리가 형성되었고 독일 국민들도 큰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히틀러를 지지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였겠지만 폰지사기에 가까운 메포어음같은 무책임한 물건을 돈이 부족할 때마다 발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였다.

패망이 가까워지자, 아돌프 히틀러는 유서에서 당과 독일 정부에 전 재산을 헌납하고 주변인들에게도 얼마씩 나눠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유서를 집행할 보어만은 탈출 중에 전사했고 이후 상속법에 따라 처리되었다. 강제로 강탈한 재산은 원주인에게 돌려졌고, 나머지 재산은 유일한 상속순위자인 여동생 파울라에게 일부 상속된 걸 제외하고는 모조리 바이에른 주정부로 헌납되었다. 독일 정부가 히틀러의 재산을 가져갔으니 결과적으로 유언 자체는 지켜졌다.

개인 재산으로 몇몇 별장들을 가지고 있었다. 독수리 둥지로 불린 켈슈타인하우스와 베르그호프가 유명하다.


6.7. 평상시 목소리[편집]









직접 들어보자. 목소리가 꽤 굵직한 편이며 말을 천천히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하는 성향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연설시 그 특유의 악센트[51]는 훗날 찰리 채플린이 흉내내는 것보다 유명한 독일어 개그로써 전세계 코미디언의 흉내 대상이 되고 있다. 히틀러어를 익히면 독일어 흉내가 가능하다.[52] 대한민국 성우로 따지자면 정영웅 느낌이 난다.


7.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19 - 1923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
)
1923 - 1924
수감으로 인한 탈당


1924 - 1945
복당
사망


10.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32
독일 대통령 선거
독일


13,418,547 (36.8%)
낙선 (2위)
[53]
1933.3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비례대표
(북바이에른·슈바벤
비례선거구)[54]
17,277,180 (43.91%)
당선 (1위)
초선[55]
1933.11
나치 독일 총선
39,655,244 (92.11%)
재선
1936
44,462,458 (98.8%)
3선
1938
48,751,587 (98.93%)
4선[56]

명성에 비해 원내 입성은 1933년으로 상당히 늦은 편인데, 국적 문제 때문에 그렇다. 1925년 오스트리아 국적을 포기한 이후 6번이나 귀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고, 7년 후인 1932년 2월 25일에 간신히 독일 국적을 얻어 그 이후 대선과 총선 출마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은 일반적인 의원 내각제와 달리 의원이 아니어도 총리와 장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었다.


11. 히틀러의 라이벌[편집]


  • 이오시프 스탈린 - 어제는 동지, 오늘은 적. 아돌프 히틀러는 집권 후 소련과 우호적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교방침을 뒤엎고 소련을 위협하면서 디스했으나, 본격적으로 서유럽에서 영-불과의 대결이 임박해지자 잠시 적과의 동침에 이르러 소련과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이렇게 손잡은 동안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나눠먹고, 독일은 서유럽에서 신나게 프랑스-영국과 싸우는 동안 소련은 보이지 않게 동유럽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챙겼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서유럽에 그치지 않아서 드넓은 소련땅까지 꿀꺽하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소련을 침략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세기의 독재자로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가장 치열하고 결정적인 전투는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났다. 재미있는 건 두 독재자는 서로를 존경했다. 스탈린은 1934년 나치당 좌파와 돌격대 국방군 내 반대세력을 숙청한 '장검의 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고, 아돌프 히틀러도 독소 불가침 조약 전후로 '스탈린은 볼셰비즘에서 국제 유태적인 요소를 많이 청산했다'라며 덕담을 했다. 히틀러는 전쟁 중에도 소련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의 대리인으로 스탈린을 세워야 한다고 발언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1944년 7월 20일에 암살당할 뻔했다가 구사일생한 이후엔 스탈린처럼 군부를 가차없이 숙청했어야 되었다고 후회했다. 이런 여러가지 면모를 봤을 때 두 독재자는 쌍둥이처럼 유사성이 많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 참조. 다만 둘이 서로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 윈스턴 처칠 - 아돌프 히틀러 자신이 인정한 최대의 라이벌. 초창기부터 마지막까지 처칠과 아돌프 히틀러는 적이었으며, 처칠의 최대 업적 중 하나가 아돌프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 것이다. 당연히 히틀러는 처칠을 부정적으로 여겼기에 처칠을 알콜 중독 "저질" 선동가이며 전쟁광이자 국제 유대 자본에 굴종한 금권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히틀러의 악감정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유대인 음모론스러운 부분을 제외하면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는 게 실제로 처칠은 술과 담배를 매우 좋아했고 말솜씨 또한 대단히 뛰어났다. 거기다 전시 수상이란 것도 결사 항전을 맹세한 점 하나 때문에 붙은 별명이고, 그의 전략적 안목은 없는 것보다도 못한 수준이라서 일선 장군들이 처칠의 계획에 맹반대하며 독자적 작전을 수립하지 않았으면 영국이 망했을 거라는 게 중론일 정도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북아프리카 전역. 처칠은 독일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북아프리카의 롬멜을 쫓아내는데 지나치게 집착했고 공격을 강요했다. 롬멜의 주특기는 방어든 공격이든 준비가 덜 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기동이었고 당연히 상부의 압박으로 이루어진 영국군의 공세를 분쇄해버리며 이집트 국경까지 도달했다. 그나마 오킨렉이 부임하여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롬멜의 소모를 유도해 승기를 잡고 있었는데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잘라버렸다. 심지어 오킨렉은 처칠에게 소모전 전략의 중요성을 정말 친절히 설명해 주었는데도. 그리고 임명된 사령관이 바로 몽고메리였다. 이 사람은 오킨렉처럼 친절히 처칠을 설득하는 양반이 아니라 대거리하는 양반이었고 그의 처칠말 개무시하기 덕에 영국은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하고 전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었다. 또한 아서 해리스의 드레스덴 폭격을 비롯한 독일 민간인 무차별 폭격을 승인한 양반도 바로 이 양반이었다. 정작 드레스덴 폭격이후 비난이 쏟아지자 아서 해리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고 승전 기념식 때 공훈부대 명단에서 폭격기부대들을 제외시켜버렸다. 정작 아서 해리스와 처칠의 무차별 폭격 작전으로 12만 명의 폭격기 승무원 중 5만명이 전사 했던걸 고려하면 입만 산 저질 선동가라고 까일 만 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아돌프 히틀러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최종보스. 다만 히틀러는 유럽에 신경을 쓰느라 그를 신경쓰지도 못했고, 그를 전쟁에 끌어들인 건 독일이 아닌 일본이었지만, 그가 뉴 딜 정책으로 복구시킨 미국이 아니었으면 처칠은 마음 놓고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해에 집권해 같은 해에 재임 중 눈을 감았다. 여담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루스벨트가 소아마비가 아니라 매독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루스벨트가 죽은 뒤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 대통령이 된 해리 S. 트루먼이 소련과의 대치를 우선시하여 전쟁을 멈출 거라고 기대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물론 그의 예상이 맞긴 했지만 트루먼이나 스탈린이나 그 전에 히틀러부터 때려잡고 그 다음 서로 적대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샤를 드골 - 아돌프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눈엣가시로 알려졌으며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되고 드골이 런던으로 망명하면서 나치를 프랑스에서 몰아내자며 프랑스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자 아돌프 히틀러의 라이벌이자 적이 되었다. 드골은 런던에서 프랑스인들에게 고하는 성명에서 우리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를 몰아내어 자유를 되찾자는 호소를 하였다. 사실상 아돌프 히틀러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적대지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프랑스를 점령한 아돌프 히틀러라지만 정작 수장인 드골은 잡아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을만 하겠다. 다만 이는 드 골이 망명 당시 고작 소장에 불과했으므로 당시엔 히틀러가 잡으려고 생각할 정도의 거물은 아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 백장미단 - 나치 독일에 유일하게 항거했던 독일의 대학생 단체. 한스, 죠피 숄 남매를 중심으로 1942년에 결성되었다. 나치의 악행을 비판하고 나치의 패망을 선언하는 전단지를 뿌리면서 극악무도한 독재자와 그의 수하들에게 대항했지만, 1943년 체포되었다. 한스 숄, 조피 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첫 재판 이후 사형되었으며 나머지는 두 번째 재판 이후 사형당했다.


12. 히틀러의 협력자[편집]


  • 베니토 무솔리니 -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을 추축국에 끌어들였고 본인 역시 아돌프 히틀러와 애증관계에 그를 추종하고 지지하는 입장이자 같은 추축국의 수장으로서 유럽 침략에 뜻을 같이하는 등 같은 길을 걸어갔다. 무솔리니는 초반의 히틀러를 나를 따라하는 아류 중 정신이 조금 이상한 바보병신으로 보아 히틀러를 멀리했지만 히틀러는 달랐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처럼 의심병이 많았지만 무솔리니만큼은 자신의 우상이자 아이돌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극렬히 추종했는데 안슐루스 도중 무솔리니가 히틀러에게 독일의 개입을 받아들이겠다는 소식을 전하자 "죽어도 죽어도 죽어도 이 은혜를 잊지않겠으며 세상 모두가 등지더라도 나만큼은 당신에게 달려가 도와줄 것 입니다."라고 전했고 실제로도 그랬다.[57] 그러나 전쟁 중에는 입장이 바뀌게 되어서 오히려 아돌프 히틀러가 큰 일을 항상 상의없이 돌출적으로 하는 태도와 일이 끝난 다음에야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행동에 커다란 불만을 품었고 그로 인해 엄청 급하게 준비한 그리스 침공때는 이번에는 히틀러가 신문으로 이탈리아의 그리스 정복을 보게될거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잘나가는 히틀러를 질투하였다. 그리스 침공 후 이탈리아군이 그리스 국경을 넘었소. 라고 히틀러에게 너도 좀 놀라고 약오르라고 싱글벙글 말했지만[58][59] 그리스 침공조차 히틀러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했고 이탈리아가 시칠리아에 상륙당한 소식을 듣자 극도로 분노한 히틀러는 이탈리아로 직접 찾아가서 무솔리니에게 온 세상 모든 욕을 한다. 이후 입장이 완전히 역전되자 내심 무솔리니의 뜬금없는 돌발행동에 화가났던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되려 기분상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1943년 이탈리아가 조기에 패망하고 히틀러의 걱정대로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 방에 박혀 우울증에 시달리다 감옥에 갇힌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구출된 후 생명의 은인이 된 히틀러를 질투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화해한 듯 한데[60] 무솔리니는 나치 패망 직전까지 히틀러와 같이 다니면서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61]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국가원수로서 추축국 가입과 무솔리니의 개전을 허가하는 등 위험한 행동을 벌였으나, 무솔리니가 전쟁을 초반부터 줄줄이 말아먹기만 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국왕 권한으로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전쟁을 중단한 덕분에 전범으로써의 처벌을 면했다. 그러나 결국 왕정을 유지시키지 못했다.
  • 쇼와 덴노,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 우선 고노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을 추축국에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총리인 도조는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적극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협력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도조를 환상의 파트너로 여겼다. 하지만 실상은 최악의 파트너에 가까웠다. 아돌프 히틀러는 도조가 소련을 공격해 주길 원했는데 도조는 미국을 공격했고 거기서 잡은 손을 뺐으면 좋았을 텐데 아돌프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버렸다. 결국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자폭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히로히토는 고노에가 주도한 추축국 가입과 도조가 주도한 태평양 전쟁을 국가원수로서 허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아돌프 히틀러의 협력자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했던 스페인의 수장이었지만 사실은 나치 독일이탈리아와 협력했고 프랑코 본인도 아돌프 히틀러에게 우호적인 성향이라 사실상 협력자에 속한다(독일군으로 국내 반대 세력을 쓸어버리기도 했으니). 그래서인지 대체역사물(추축군이 패배했다는 실제의 거시역사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및 히스토리 픽션에서는 프랑코 정권 역시 추축국으로 참전하는가 하면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으로 나치 잔당이 도망간다는 설정으로 응용되기도 한다(실제로도 그랬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의 협력자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누렸다. 종신 집권을 한 것은 물론, 왕정이 부활한 다음에도 추종자들이 있을 정도다.
  • 호르티 미클로시 - 국왕이 없던 헝가리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내륙국의 해군 제독이라는 참으로 괴이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총리인 기울라 굄뵈시(Gyula Gomboss)를 시켜서 추축국 구성안을 내놓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헝가리가 추축국 준 메이저급의 대우를 받게 한다. 그러나 이후 전세가 기울자 헝가리 나치당이라고 할 수 있는 화살십자당 당수였던 살러시 페렌츠를 잡아 가두고 연합군에 항복하려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인간병기 오토 스코르체니에게 그의 아들을 납치하도록 해서 저지시킨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와 페렌츠에 의해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해외로 쓸쓸히 망명해야 했다. 그 결과 부다페스트는 소련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함락당했고 헝가리 여성들은 베를린에서 자행되었던 것과 같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 이온 안토네스쿠 - 루마니아의 총리로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루마니아에 진출하자 아돌프 히틀러의 충실한 개가 되어 독일에게 석유를 마구마구 퍼준다. 이후엔 독소전쟁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소련의 맹공으로 국토가 점령당하고 안토네스쿠는 잡혀서 사형당한다.
  • 필리프 페탱 - 샤를 드골이 히틀러와 맞서 싸운 프랑스 지도자라면 이쪽은 히틀러의 꼭두각시가 된 프랑스 지도자이다. 히틀러가 프랑스에 세운 괴뢰정부인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이다.


13. 각종 음모론[편집]


유명한 인물이고, 워낙에 악명이 높은 지라 온갖 별의별 음모론들이 쏟아지게 되었다. 여자설, 생존설, 유대인설이나 외계인설, 타임슬립설 등 온갖 해괴한 음모론들이 많은데 그에 관련한 음모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사실 그는 자살하지 않았으며 충성스런 나치당원들 및 일부 병사들과 함께 남극으로 도피해 비밀기지를 세우고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설이다. 또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UFO는 이 나치 잔당의 작품이란 설도 유명하다. 전쟁 이후 보고된 아돌프 히틀러 목격담이나 남미 도피설도 존재한다. 앗 시리즈 124권에 다양한 생존설이 나온다.이래서 나치는 멸망 뒤에도 오래도록 음모론 필수요소에 수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영국 현지시각 2016년 1월 7일 영국 대중지인 '더 선'과 '익스프레스' 등은 최근 기밀 해제된 700쪽짜리 FBI 자료를 미국의 전문가가 검토한 결과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은 자작극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 아래 음모론 항목의 남미 은신설과 일치한다. 그러나 더 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의 대표적인 황색언론발 기사이므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아돌프 히틀러 여성설'도 있는데 죽은 아돌프 히틀러의 시신을 발굴했더니 성인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골반뼈 등이 발굴되어서 남성적으로 생겼지만, 사실 여자 아니냐는 것이다.[62] 하지만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자살 후 화장과 매장을 한 자리에 해버렸기 때문에 뼈가 섞여서 생긴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왜 남자 골반뼈는 발견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는데, 분노에 찬 러시아 병사들이 발굴 작업 때 포격이 진행되는 도중 참호를 파듯 삽질을 막 해댔기 때문에 골반뼈가 훼손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부정확한 정보다.

2009년 9월, 당시 소련군이 아돌프 히틀러의 벙커에서 수거해간 아돌프 히틀러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에 구멍이 난 두개골이 여성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보도에 의하면 이 두개골의 연령이 20~40대의 여성임을 볼 때, 에바 브라운의 유골을 아돌프 히틀러의 것으로 착각하여 수거한 게 아닐까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겠지만 좀더 두고봐야 한다. 에바는 청산가리로 자살했다고 알려져있다.

청산가리 자살설은 영화 몰락을 보면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아돌프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는 이미 죽고 없었고, 그녀가 쓴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책자는 혼란으로 가득한데다, 바로 옆에 있었던 만큼 미화된 면 등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아돌프 히틀러는 입에 청산가리 캡슐을 물고 깨물면서 동시에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의의로 권총으로 자살하는 경우 순간적인 반사행동 등으로 인해 실패하거나 중상만 입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실패시 고통이 상당하고 빈사상태에서 적에게 잡히는 일도 많다. 당장 같은 추축국일본도조 히데키가 이런 케이스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확실하게 하려면 차라리 수류탄을 사용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그래서 청산가리 캡슐도 동시에 깨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NKVD(소련 KGB 전신)에선 스탈린이 아돌프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믿지 못하자, 아돌프 히틀러 벙커의 부관 참모 요리사 관리 청소부까지 죄다 잡아서 4년 동안 심문하고 보고서 작성했는데[63][64] 결론은 자살이다.

그 외에도 남미 은신설이나 숨겨둔 자식이 남미로 도주했다는 설 등의 음모론이 있다.

남미 은신설에 의하면 아돌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측해서 연합군의 공세를 피해 수송기를 타고 스페인카나리아 제도에서 그 비행기를 고의로 격추시킨 뒤 거기부터 잠수함을 타고 아르헨티나로 도망친 뒤 마르텔플라타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후 아돌프 히틀러는 아르헨티나에서 여생을 보내고 1962년 2월 13일에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자연사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남미 은신설에는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2017년 공개된 미국 CIA 기밀문서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1955년에도 생존해 있었고 콜롬비아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설은 그저 어느 전직 SS친위대의 일방적인 주장이어서 설득력은 떨어진다. 특히 그의 당시 사진이라고 내세운 것은 특징적인 콧수염을 그대로 기른 상태라 더욱 신빙성이 없다. 남은 생을 모두 숨어서 살아야할 입장인데, 적어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은 깎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 아돌프 히틀러의 시체를 조사한 소비에트 연방 측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들은 성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등 사인이 일치하지 않다.
  • 자신은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모든 장교들에게 나가라고 지시한 뒤 그의 시체를 본 독일 장교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한 몸매에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나있었고 이를 아돌프 히틀러라 생각하며 불에 태웠다는 점을 보아 자살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아닌 그의 대역이었다.
  •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몸에 7,200만 달러의 보험을 들고 있었으나, 그가 죽은 후 그의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돈을 찾아가지 않았다.
  • 아돌프 히틀러가 찍힌 마지막 모습이 뉘른베르크에서 SS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 1950년 3월경에 아르헨티나에서 아돌프 히틀러로 추측되는 사람이 목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독일의 신문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에 생존했다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 스탈린이 아돌프 히틀러 사후인 1946년에도 그를 찾아내서 제거하라는 명령을 NKVD에 내렸다. 그러면서 스탈린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지역을 샅샅이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생각해보면 한때는 세계정복을 꿈꾼 야심가가 전쟁에 질 것 같다고 그렇게 쉽게 자살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 말년의 히스테릭한 심리상태와 자기파괴적 광기를 보면 후일을 도모했으리라는 생각은 자연스럽지 않다. 만약 진짜로 살아 있어서 나치 잔당들을 규합해 후일을 도모하려 한다 하더라도 히틀러를 찢어 죽일 생각만 하던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던 미국의 입장에선 히틀러란 인간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손해만 되는 존재이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독일 없애려고 끝까지 전쟁했는데, 그 수괴를 살려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남미에 행하는 미국의 막대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남미에 피신한 히틀러를 미국의 정보력으로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음모론이 퍼진 이유는 상위 항목 중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에도 서술되어 있듯 스탈린은 나치 잔당들이 새 인물을 구심점으로 모이는 것보다 아돌프 히틀러의 흔적을 찾다가 힘이 빠지도록, 일부러 '아돌프 히틀러는 살아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NKVD나 KGB에 아돌프 히틀러를 찾으라거나 죽이라고 거짓 지시를 한 것도 스탈린 본인이다. 이는 효과적이어서 이제는 나치 잔당이고 뭐고 없는 현대에도 수많은 음모론을 낳게 했다.

심지어 그를 재현한 밀랍인형에서조차 도시전설이 나돌았었다. 아돌프 히틀러/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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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번째 사진은 머리까지 비슷해서 정말 아돌프 히틀러와 닮았다. 두 번째 사진의 인물은 코소보의 Emin Djinovci란 인물로 자신을 히틀러의 환생이라고 믿고 있으며 나의 투쟁을 들고 다니며 열렬히 나치즘을 신봉하는 위험한 사상을 지닌 인물이다. 그가 이전에 독일에 거주하다가 코소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독일 검찰에서 기소가 불가능하지만 그가 독일로 돌아올 경우 체포될 수 있다. # 히틀러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유럽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히틀러의 외모가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연구팀이 내놓은 2018년 연구에 의하면 히틀러는 1945년에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탈나치화'라는 러시아의 침공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히틀러도 유대인 혈통이다'라는 음모론을 꺼내서 파장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정부는 주이스라엘 러시아 대사를 불러 강력하게 항의했다. #


14. 각종 매체의 아돌프 히틀러[편집]



14.1. 역사서[편집]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어떤 책이 나왔나로 먼저 볼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를 다룬 서적은 전후 수천 종이 쏟아져 나왔는데 음모론이나 별 신빙성 없거나 흥미 위주의 책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다룬 서적으로는 수백여 종이 있고 국내에 발매된 것 중 권위있는 서적은 요아힘 C.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과 이언 커쇼의 《히틀러 1(의지), 2(몰락)》이 있다. 요하임 페스트는 전문 학자는 아니지만 독일의 저명한 방송인 겸 저널리스트로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에서 주필를 지내고, 독일 공영방송 ZDF의 현대사 편집장을 20년간 지낸 전문가이며, 이언 커쇼는 영국의 역사학 교수이다. 커쇼는 수십년 넘게 준비해서 발표한 히틀러를 다룬 저작으로 영국의 기사 작위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히틀러를 다룬 저작 중에 가장 권위가 있고 자세한 대신에 단점이라면 읽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분량이다. 요하임 페스트는 개정판 기준 1,400페이지, 이언 커쇼는 2 200페이지가 넘는데 특히 커쇼의 책은 페스트의 책보다 책 넓이도 넓어서 양은 거의 두 배에 달한다. 두 작품 모두 읽으면 좋겠지만 하나만을 읽는다면 2000년대에 나온 이언 커쇼의 《히틀러》 하나만 봐도 무리가 없다. 반대로 히틀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가 쓴 《히틀러 여비서와 함께 한 마지막 3년》을 읽어보기 바란다.

  •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은 현재 한국에 여러 권 정발되어 있다.
  • 아돌프 히틀러 사후 포로로 잡힌 히틀러의 전속 부관인 오토 귄셰하인츠 링에를 심문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의 순간을 재구성한 히틀러북이 존재한다. 이는 스탈린의 개인 문서로 분류되었다가 소련 붕괴 이후 해금되었고, 2003년 독일 현대사연구소의 마티아스 울과 헨릭 에벨레가 이 파일을 찾아내어 출판했다. 한국에는 2008년 루비박스가 정발했으나 2017년 현재 절판되었다.
  • 생각의 나무에서 2008년에 정발한 독일 역사학자 겸 저널리스트 라파엘 젤리히만의 아돌프 히틀러: 집단 애국의 탄생이 있다. 2017년 현재 절판 상태이다.
  •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이 1998년에 1권, 2000년에 2권이 정발되었다. 나치 시대에 대한 의도주의 연구의 결과물로 이언 커쇼의 《히틀러》가 나오기 이전까지 아돌프 히틀러 평전의 대표적인 물건으로 거론되었다. 페스트의 책은 1970년대에 먼저 나왔고, 1990년대 동구권 기록이 해제되면서 개정판이 나왔지만 그래도 이언 커쇼의 책보다 이전이며 전체적으로 무리는 없지만 현재의 연구와 사실이 약간 다른 면도 있다. 그외에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다룬 요아힘 페스트의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14일도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영화 <몰락>의 원전이 되었다. 후자는 2005년 교양인에서 정발했으나 2017년 현재 절판되었다.
  • 이언 커쇼의 히틀러가 존재한다. 2010년 1월 교양인에서 정발한 걸작으로 나치 시대 전반에 대한 기능주의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인데 권당 50,000원씩, 2권에 100,0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엄청난 분량의 압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치 시대와 아돌프 히틀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저서이다. 이전까지의 히틀러 연구들이 무비판적으로 인용했던 사료들의 신뢰성을 철저히 검증하여 히틀러와 나치시대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저서이다. 사실 이언 커쇼 이전에 출간된 히틀러 전기들은 이제 와서는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커쇼는 이 연구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 이언 커쇼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자 그의 스승인 마르틴 브로샤트 교수의 아돌프 히틀러 국가 역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 트라우들 융에히틀러 여비서와 함께 한 마지막 3년,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인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도 한국에서 정발된 상태이다.
  • 평전이 아닌 또 다른 저명한 서적으로는 시대가 낳은 쌍생아 스탈린과 히틀러를 동시에 다룬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Dictators)이 있다. 리처드 오버리는 역사학자로 독소전쟁을 다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의 저자이기도 하며 이 부분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 만화가 김태권이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기를 다룬 《히틀러의 성공시대》를 그렸으나, 역사 왜곡이 심하다 보니 펑가가 심히 안좋다.
  • 2019년, 퓰리처 상을 받은 미국의 작가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이 페이퍼로드를 통해서 출판되었다. 과거의 물건이라 이후 이언 커쇼의 평전에 비하면 학술적인 질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히틀러가 걸어온 생애의 발자국 하나까지 죄다 살리려 한 작가의 열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책도 2권 짜리에 각각 40,000원 구성으로 금전적인 부담은 적지 않지만 문체는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편이라서 히틀러에 대한 입문용으로는 괜찮으며 히틀러에 대한 흥미로운 잡썰들도 꽤나 많이 실려 있아서 그런 잡썰들을 읽는 재미도 있다. 문제는 앞서 서술되었듯, '결정판'이라는 이름이 안어울리게 지금은 꽤 낡은 책인 데다가,[65] 저자가 전문 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료 해석 등에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 독일 역사학자 하랄트 슈테판이 지은 《아돌프 히틀러》도 있다. 원서는 독일에서 1983년에 나온 책으로 1997년 한길사에서 정발했다. 히틀러의 전기라기 보단,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히틀러의 정치적 측면과 세계관을 주로 분석했다.


14.2. 창작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 기타[편집]


  • 1939년 노벨 평화상 후보자이다. 당시 스웨덴의 한 국회의원이 아돌프 히틀러를 추천해서 후보자에 올랐다고 한다. 이는 노벨평화상을 비난하는 래퍼토리인데 사실 추천만 받으면 누구나 후보가 될 수 있다. 말그대로 후보만 오르는 것이다.[66]
  • 인중 쪽에만 집중적으로 돋은 특유의 콧수염으로도 유명하다. 칫솔처럼 생겨 통칭 투스브러시 수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으며, 19세기부터 서양권에서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던 바 있었다. 본래 히틀러는 당대 유행하던 카이저 수염을 길렀으나, 1차 세계대전 병사 신분으로 참전하던 중 독가스전이 시작되자 방독면을 수월하게 착용하도록 수염을 교정하라는 명령을 받고 칫솔 수염으로 바꾸어 훗날까지 굳어진 것이다.# 혹자는 찰리 채플린의 팬이던 히틀러가 채플린 콧수염을 오마주했다는 설도 제기되곤 하는데, 강압적으로 바꾼 수염을 굳이 유지하던 시기상의 정황을 보면 얼추 들어맞는 사안이다. 하지만 히틀러 본인이 이 사안에 공식적인 입장을 보인적은 없었으니 어디까지나 추측으로만 도는 이야기다.
  • 실제 눈 색깔은 파란색, 다시 말해 벽안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주변 인물들 증언을 토대로도 히틀러가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많이 말했기 때문이다. 다만 후에 컬러복원은 보통 히틀러의 눈을 파랗게 복원한 사진이 별로 없었다.
  • 대단히 뛰어난 웅변가다. 나치 독일이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가 이 사람의 연설이었으며, 그의 연설을 직접 들어본 사람의 말로는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은 한 번 내뱉었다 하면 그를 미워하는 사람조차 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마술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아돌프 히틀러의 웅변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준다.
  • 이 웅변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 지망생 시절 길거리 노숙자들을 불러모아 빵과 음료수 등을 사주고 그들에게 환호성을 질러달라는 주문을 한 뒤 연설 연습을 했다. 이게 쌓여서 아돌프 히틀러는 웅변의 달인이 된 것이다.
  • 유튜브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자동완성되지 않으며, 그의 연설 영상은 철저히 검열되어 30초에서 40초 남짓의 영상들만 남아있고 자막은 제공되지 않는게 대부분이다. 남아있는 영상들도 히틀러의 이미지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는 연설들 위주로 남아있으며, 구글 인수 전이나 2010년대 초반에 업로드 되었던 히틀러의 연설 풀버전 자막 영상들은 전부 삭제되었다. 이유는 당연히 네오 나치들의 입문용 영상으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런 영상을 학술적 이유 등으로 찾아야 한다면, 데일리모션 등 다른 사이트를 찾아가야 한다. 물론 히틀러를 희화화하는 것이 자명한 영상[67]이나 관련 2차 창작물[68] 은 잘 검열되지 않는다.
  • 사적인 지인에게는 자기가 뭐하는 인간인지 단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동생인 파울라 히틀러조차 자기 오빠가 뭐하는 인간인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참고인 자격으로 끌려가서야 알았다. 다만 이건 1930년대 이후 연락을 전혀 하지 않고 지낸 탓이기도 하다.
  • 히틀러의 동복 여동생인 파울라는 오빠가 그렇게 극악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녀와 히틀러의 사이는 좋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돌프 히틀러가 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 일본의 여성 아이돌 그룹인 모닝구 무스메가 진행하는 일본의 한 프로그램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를 세계의 위인으로 소개해서 물의를 빚기도 하였으며,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마재윤이 본좌 시절에 불렸던 별명 '마틀러'도, 당시 서양 팬들 사이에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짓이 드러나면서 참으로 적절한 별명이 되어버린 것이 아이러니하다.
  • 아돌프 히틀러의 조상이 유대계, 슬라브계와 흑인계였다는 설이 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의 유골조차 제대로 회수가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니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너무 진지하게 믿지 말아야 한다.
  • 빅데이터 인문학의 저자들이 구글 엔그램 뷰어를 이용해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유명했던 사람을 선정했는데 히틀러가 1위였다. 1위 아돌프 히틀러, 2위 카를 마르크스, 3위 지그문트 프로이트, 4위 로널드 레이건, 5위 이오시프 스탈린, 6위 블라디미르 레닌, 7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8위 찰스 디킨스, 9위 베니토 무솔리니, 10위 리하르트 바그너순이었다.[69]
  • Epic Rap Battles of History에서는 다스 베이더와 세번이나 랩 배틀을 벌인다. 그런데 시즌 1에서는 카보나이트에 갇히고 시즌 2에서는 랜코어 핏에 떨어진다. 게다가 시즌 3에서는 광선검으로 반으로 베인다. 시즌 4 예고에서는 유령으로 부활하고 자신이 날 수 있다며 히히덕거리다가 고스트 버스터즈에게 걸려서... 사실 서양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안 좋은 취급을 받고 있으니 어찌 보면 대우 차이가 당연하다.
  • 디시 같은 곳에서는 흔히 히총통이라 불린다. 이는 유명한 짤방으로 쓰였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 "히總統의 대사자후"에서 따온 것이다. 원본 링크는 짤렸지만 1935년 동아일보에 같은 기사가 있다.
  • 유명한 게 마약 허용이다. 대표적으로 마약 때문에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미친듯이 제공해준 인물이 다름아닌 헤르만 괴링. 원래 이런 인물이 아니다. 아무리 우울증 때문이라지만 마약을 너무 오래 한 나머지 1차대전 때의 건강했던 정신이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다 전범 재판 때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살도 빠졌다. 이건 독일군이 볼 때는 기적이나 다름없지만 이미 전쟁은 끝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히틀러도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데, 이 사실을 장군들이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히틀러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해서 처방 받은 약이 바로 마약이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총통의 정신 상태가 더 악화되어서 며칠전에 전멸한 부대가 아직 있다고 믿거나, 안그래도 재배치돼서 저 먼 서부전선에서 뼈빠지게 연합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부대를 동부전선에 있다고 생각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 대한민국의 교육과정 중 6차에서는 사회책에 그가 설명돼 있었으나 7차에서는 그는 거의 언급이 없고 2차 세계대전 페이지에서는 무솔리니만 나와서 기묘하게 되었다. 그후 2007 개정에서 다시 아돌프 히틀러가 부활했으나 2009 개정에서 사라진 걸로 알려져있다.
  •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의 유품은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
  • 아돌프 히틀러의 근무복 외투는 히틀러 사후 모스크바에 소재한 중앙 육군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이 외투가 이걸 입는 관람객을 모두 심장마비로 죽여버려서 박물관에서 과학자들에게 이 외투를 조사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저 외투 때문에 죽은 사람만 39명이라고 한다.
  • 아돌프 히틀러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폭행당해 실명된 고양이도 있다. #
  • 소문으로만 들리던 아돌프 히틀러의 고환이 하나라는 이야기가 연구 끝에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링크 소문이라고 쓴 것은, 당시 독재 정권 하에서의 독일이 위대한 총통 각하가 짝고환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을 리가 없으므로. 의학 검진 자료에 의하면 아돌프 히틀러의 이러한 신체적 결함은 후천적인 것이 아닌 선천적인 특성이었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뒤틀린 여성관과 지나친 마초성의 추구가 어쩌면 본인의 신체적 결함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강한 마초성을 내보일수록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케이스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는 존 톨랜드의 책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에도 나오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히틀러 지인 중 일부는 그의 운전기사 중 한 사람의 여동생인 예니 하우크가 히틀러의 정부라고 생각했다. 예니는 히틀러에게 헌신적이었고 경호원을 자원해 팔에 권총을 차고 다녔다. 헬레네는 이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푸치, 말했잖아요. 히틀러는 고자예요."라고 말했다."[70]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에서 연합군과 대립을 하였는데 영국 군사 한 명이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 소련군이 시신에서 발굴한 골반뼈가 말해주듯 엉덩이가 여자처럼 크고 이뻤다고 한다. 다만 이것이 머리에 총상 흔적이 있는 여자의 두개골과 더불어 히틀러의 진짜 시체인지는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 히틀러가 유태인이라는 근거를 히틀러라는 성에서 유추한 NGC 다큐멘터리가 있다. 내용은 히믈러나 히슬러, 히들러 등의 성은 흔한데 히틀러라는 성은 독일-오스트리아 역사를 뒤져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해서, 공문서에서 히틀러라는 성을 추적했는데 전유럽과 미국을 뒤져도 2차 대전경에 미국에 이민간 2백여 명의 유태인들이 히틀러라는 성을 다른 성으로 변경해 달라고 미국 법원에 신청한 기록만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결과만으로 히틀러가 유태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한 의심을 갖게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 일각에서는 유럽의 죄를 짊어지고 죽은 예수같은 존재라는 드립이 있다. 히틀러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고, 히틀러와 추축국의 악행이 강조되면서 연합국 측 식민 제국들의 악행들이 묻히는 것을 비꼬는 의미다. 소위 "이전 유럽 열강은 하루에 세 번씩 독일 방향으로 절해야 한다."[71]
  • 히틀러 생가는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이민족' 난민 재정착 센터로 유용하게 재활용됐다고 한다. # 그러나 이 때문에 여기서 네오 나치 범죄가 기승을 부리자 아예 2023년까지 경찰서로 용도변경을 완료한다#는 방침이 내려왔다. 하도 네오 나치들이 여기로 찾아와서 말썽을 피우자 아예 네오 나치를 잡아들이기 쉽게 경찰서로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 히틀러의 선 채로 두 손을 모은 자세는 '어색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버릇이다. 실제로 히틀러가 찍힌 사진이나 영상에서도 두 손을 모은 모습을 흔히 찾아볼 수 있으며(ex. 프랑스 침공 항목 에펠탑 배경으로 찍은 사진), 서구권에서는 이 자세가 나름 나폴레옹의 '주머니 손' 같은 트레이드 마크로 인식되는 듯. 일설에는 히틀러가 유전적 결함으로 고환이 하나였기에 손으로 가렸다는 주장이 있었고, 훗날 실제로 잠복고환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때문에 저런 버릇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뿐만 아니라 전간기와 전쟁 당시에도 히틀러의 손 모으는 버릇은 유명했으며 당시 사람들이 남긴 기록 중에 그가 독신인 점을 들어 "언제나 쓰지도 않는 걸 가린다."라는 조롱도 있었다.
  • 히틀러는 잔인한 행각과는 별개로 자신의 옛날 지인들을 상당히 챙겨준 편이다. 에드워드 블로흐는 어머니를 사망 직전까지 치료해줬던 가족 주치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특별히 그를 프랑스로 떠나도록 배려했다. 독일 제국 육군 보병대위 출신인 휴고 구트만은 과거 아돌프 히틀러가 1급 철십자훈장을 받도록 추천서를 써준 사람이다. 그 인연으로, 유대인이었던 그가 체포되자 아돌프 히틀러가 지시를 내려 석방했다. 전우이자 상관이었던 에른스트 헤스도 살려뒀다.
  • 스코르체니와 한나 라이치는 카미카제와 비슷한 자살 폭탄 공격을 기획한다. 히틀러와 괴링은 이에 반대했고 기각된다. 이 계획은 카미카제와는 달리 탈출과 후퇴 수단이 있긴 했음에도 비인간적이고 비효율적이라는 판단 하에 반대한 것이다.
  • 한때 아돌프 히틀러의 친모 클라라 퀼츠가 아돌프 히틀러를 낙태할까 고려하다가 낙태를 하지 않고 낳았다는 루머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그의 모친 클라라는 아돌프 히틀러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그녀의 주치의 였던 에드바르트 블로흐 역시도 그녀는 낙태를 고려해야할만큼 건강이 악화된 상태가 아니었다고 증언했을 정도. 오히려 상당히 건강했다고 한다.
  • 농담으로, "미대 입시에 떨어지고, 끝내 자살한 오스트리아 청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생애의 중요 사건들이 뭉텅이로 생략되었다"라는 드립은 덤이다.
  • 일본 만화에서는 히틀러를 군부 독재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히틀러는 직업군인이 아니며, 쿠데타 없이 독재를 이룩한 인물이다.[72]
  • 권력의 획득 과정은 일본식 군부보다는 소련 공산당이 정권을 얻어가는 과정과 유사하게 당을 중심으로 사람을 결집하고, 당이 중심이 되어 사회 전반을 장악했다. 특히 군부에 대한 통제와 사회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친위대를 창설하였는데, 이 친위대는 소련식 정치장교의 형태와 유사하다. 물론 그 권력은 민간인의 통제력까지 발휘해서 더 크다.
  • 1936년 10월 21일에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조선의 수재민들을 위해 금일봉을 보냈다고 한다. 물론 조선인을 생각해서라기 보단, 독일과 일본의 친선관계에 따른 것이다. 유튜브 영상
  • 히틀러는 남 앞에 알몸을 드러내기를 꺼려서 옷은 하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손으로 입었다고 한다. [73]
파일:아돌프와 히틀러는 다른사람.jpg
  • 위대한 독재자로 인해 국가불문하고 아돌프와 히틀러를 별개의 인물로 표현하는 유서깊은 드립이 있다. 히틀러는 우리가 잘아는 사악한 독재자 히틀러지만 선량한 평화주의 애국청년인 아돌프 시클그루버 의사는 아돌프-히틀러로 같이 활동한 민족주의자지만 유대인과 소수민족 차별에는 결사반대하여 일 평생 히틀러에게 대적하였으며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가 주장한 유럽평화론에 입각하여 사악한 독재자 히틀러를 쏘아죽인 것이고 상세한 증거자료를 사악한 혐성국이 은폐했다나 뭐라나.
  • 총통 시절 사용한 그의 의전차량은 메르세데스-벤츠 770. 총 7대가 그의 관용 업무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차들 중 몇몇은 박물관에 보존되었다. 참고로 동맹이던 이탈리아 왕국일본 제국의 지도자인 베니토 무솔리니쇼와 덴노 또한 히틀러의 제안을 받고 해당 차량을 구입하였다.
  • 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랩 대령의 모티브가 된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립과 안면이 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병합 후 게오르크에게 크릭스마리네 복무를 요청했지만 게오르크는 자신의 조국은 오스트리아라며 거절했고, 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 불쾌하게도 히틀러의 이름을 딴 곤충이 있다. 바로 히틀러장님먼지벌레[신칭]Anophthalmus hitleri Scheibel, 1937(아노프탈무스 히틀러리). 가엾게도 이름때문에 히틀러 추종자들에게 대량으로 잡혀 멸종위기가 되었다.
  • 1936년 뮌헨 올림픽 당시 미국인 여성이 히틀러에게 다가가서 키스를 시도했다. 히틀러와 주변 사람들은 처음에 웃으면서 피했지만 결국 여성은 히틀러의 뺨에 키스를 했다. 이후 보좌관이 다가와서 막았다. 주변에서 다 웃고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사실 경호상으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어서 경호원들이 후에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영상


15.1. 유럽 대륙 및 영미권[편집]


그 이름 이제 수명 다 했지?

아무도 이제 아이에게 "아돌프"라고 이름 짓지 않아.

"우리 작고 귀여운 아돌프"는 없다고.

내가 알고 들어본 사람 중에도 전혀 없지.

학교에는 "로비"나 "카일리"들은 엄청 많지만,

출석 부를 떄 이런 경우는 없어.

브리트니? Here! 저스틴? Here!

아돌프? (머리를 내려 히틀러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나치식 경례를 하며) Here!

- 리키 저베이스


서구권에서는 아돌프 히틀러, 나치에 대한 반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유럽 국가들은 더욱 그렇다. 물론 과거 독일의 식민지였었던 나미비아탄자니아 같은 아프리카의 국가들 역시 과거 식민지배국의 독재자였다는 이유로 엄청난 반감을 품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은 국제적으로 묻히는 편. 그런데 나미비아는 같은 이름의 정치인이 있다! # 이름과 별개로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나치즘이나 비슷한 류의 인종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였다.

독일 등을 포함한 대다수의 서구권 국가들에서는 히틀러의 '히'도 꺼내지 못하도록 하며, 화두에 오르더라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일관한다. 미화를 했다간 고소를 당하거나 문자 그대로 다굴 당할 수 있다. 희화화도 제정신으로는 불가할 지경이다. 이 지역이 독일에게 직접 피해를 받았고, 20세기 중반의 국제 세력 구도에 작용했던 복잡한 국제 정세가 개입된 탓이다. 일부 밀덕후들이 한국에서 하듯 '히총통님 간지네요' 같은 소리를 했다간 그 자리에서 현지인에게 린치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오죽하면 독일은 경찰이 네오나치가 시민들에게 맞아죽을까봐 출동한다는 말이 있겠는가? 그리고 더 생각할 것없이 전쟁 전 독일어권에서 가장 흔히 쓰이던 이름 아돌프는 전후 아무도 쓰지 않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단지 히틀러 이름이 아돌프였다는 이유로.

독일,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에서는 아예 나치 관련 상징을 기재하는 행위부터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루마니아와 헝가리처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추축국 편에 서던 나라들도 있었지만 정작 이들 국가들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네오나치, 스킨헤드 같은 족속들이 아니고서는 대개는 영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 국가들에서조차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학살자로 비난받는다.[74] 실제로 동유럽 지역에 여행갔던 한 서방 국가의 관광객은 불가리아의 흑해 휴양지 바르나에서 "니네 나라 아돌프 히틀러 나치놈들이랑 손잡고 깡패짓했잖아."라고 말했다가 현지인에게 멱살 잡혀 '우리나라 역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깡패라고 입 나불대지 마라',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 인도 등 식민지 사람들 학살하고 잔혹하게 착취한 주제에 니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강압에 끌려간 우리나라를 비난할 자격이 되느냐?', '앞으로 그 살인자 이야기 꺼내지마라. 우리도 그놈한테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아픈 역사 있다.'라며 욕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이 관광객은 심지어 현지민에게 말을 잘못해 욕을 얻어먹은 뒤 이후 바르나를 떠나 벨리코투르노보와 소피아 등 불가리아 다른 도시에 가서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했어도 그 곳의 불가리아 현지민들조차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를 비난하거나 살인자, 야만인이라고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불가리아는 나치의 압력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추축국에 합류해 피해를 입은 것과는 별개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나치독일의 지원으로 제2차 발칸전쟁에서 루마니아로부터 빼앗긴 도브루자 지역을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실익을 얻기도 했었지만, 여기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네오 나치나 스킨헤드 등 나치즘 밎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일부 현지의 극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학살자, 전범으로 비판받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찾아볼 수 없다.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에서 목소리를 내며 비난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이 두 진영은 2차 대전 시절에 독일이랑 죽어라고 싸웠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사이가 나빠지자 서로를 사실 히틀러랑 한패라고 비난했다. 서방 진영은 전체주의론을 들고와서 소련이야말로 사실 나치의 정치적 쌍생아라고 비난했고 공산 진영은 레닌의 제국주의론, 그를 바탕으로 발전한 독점자본주의 이론을 들먹이면서 히틀러를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라고 주장하며 서방과 한패라고 비난해댔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자녀 이름을 히틀러라고 지은 부모가 법원에 의해 양육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

라이온 킹스카의 캐릭터송인 Be Prepared에서도 이 인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와서 독일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독일 버전이 문제의 그 장면을 가장 진지하게 연기했다. 자세한 것은 Be Prepared 문서 참고.

트랜스포머의 여주인공이었던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의 감독 마이클 베이를 "아돌프 히틀러 같은 인간"이라고 비난했다가, 이게 언론에 알려져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단칼에 짤렸다. 아무래도 트랜스포머의 제작자가 유대인 스티븐 스필버그였으니 그 발언에 대한 분노가 더했다. 물론 굳이 스필버그가 아니었다고 해도 아돌프 히틀러 욕은 상당히 심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짤렸을 것이다.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칸 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나는 히틀러를 이해한다. 동정한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대중들에게 극도의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고 비난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칸 영화제 블랙 리스트에 올라 몇 년간 영화 출품을 금지 당하고 초청도 받지 못 했다고 한다. (지금은 해제)

히틀러(혹은 그를 필두로 형성되었던 단체)에게서 비롯된 말도 못하게 많은 사정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무지하게 민감한 소재다. 심지어 위에 언급된 모리스 센댁의 동화책 '깊은 밤 부엌에서'는 전체적인 내용은 어린이가 어른이 모두 잠든 밤중에 부엌에서 모험을 펼친다는 유쾌한 이야기이고, 아돌프 히틀러 얼굴을 한 요리사들도 사실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음에도 미국의 여러 공공도서관에서 비치 금지 조치를 당했다.

영국SF 드라마 닥터후 뉴 시즌 6 에피소드 8 제목이 "Let's Kill Hitler"라는 거창한 거라서 팬들을 설레게 했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쩌리 취급당했다. 죄값을 치르지 않고 죽은 역사 속 악인을 처단하는 미래의 시간법무부에 의해 죽을 뻔했다가 집무실로 날아든 타디스 덕분에 간신히 살았지만 닥터가 널 구한 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라고 하질 않나, 권총이라도 뽑아서 총질하려니까 200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로마군 백인대장에게 안면을 정면으로 강타당한 후 벽장에 갇히질 않나. 그리고 갇힌 채로 그냥 잊혀졌다. 그런데 이건 '스티븐 모팻이 의도적으로 SF 세계의 오랜 클리셰를 차용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분석이 있다. 해당 게시물 참조 바람

영국의 코미디 집단인 몬티 파이선에서도 미스터 힐터라는 이름으로 희화화를 한 적 있다. 이 에피소드는 1960년대에 방영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지 30년도 채 안 된 시기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딸'이라는 호주 작가의 작품에서는 딸이 패전 후 호주로 떠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딸을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냉대한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답이 없다.

Hearts of Iron III의 튜토리얼에서는 이상한 콧수염을 가진 그림 못 그리는 체구가 작은 사람이 나온다.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튜토리얼에서의 대사를 보면 본 문서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벙커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튜토리얼이 끝나면 그가 다른 방으로 이동한 후 총소리 한 발이 들렸다고 나오고, 정말 못 그린 그림만 남았다고 나온다.

A.J.P 테일러의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지금에 와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배경에 대한 연구서들 중에서 고전 대접을 받는 서적이지만 초간본이 나온 1962년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진지하게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영불 양 국가에 퍼진 독일의 처지에 대한 동정과 전쟁기피 분위기를 활용하여 공갈외교로 독일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저런 소리를 했으니 당연히 폭풍까였다.

독일 제3제국이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현대 독일인의 인식에 대한 관련 기사(이코노미스트 원본)

독일인 역사학자 한스 몸젠은 나치당이나 아돌프 히틀러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울 게 아니라 독일인 자신들의 동조한 점을 인식하며, 한편으로는 아돌프 히틀러를 나약한 독재자로 보기도 했다.

현재에는 특유의 악센트로 이미 코미디 재료로 격하되었다. #

2022년, 미국에서 핼러윈을 맞아 히틀러 분장을 하고 거리를 나선 남성이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국내 기사


15.2. 아시아[편집]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아시아권에서는 히틀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비교적 덜하지만, 대신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 제국이 제대로 깽판을 쳤기 때문에 역시 시선이 영 곱진 않다. 그러나 나치의 ㄴ자, 히틀러의 ㅎ자만 꺼내도 부정적인 반응 일색인 유럽권에 비한다면 아시아권의 인식은 우호적이지는 않더라도 중립적인 편에 가깝기는 하다. 반대로 서구권에서도 일본 제국이나 도조 히데키의 이름 역시 막연히 '악랄한 전쟁광' 정도 인식에 그칠 뿐, 아시아인들이 보이는 격한 반응에 비하면 다소 무른 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인간들은 자신들이 직접 겪은 일에 더 공감하고 분노하는 법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쨌거나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아시아 국가들을 직접적으로 적대하지도, 침공하여 학살하지도 않았다. 나치 독일이 노리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으로 대표되는 유럽에서의 레벤스라움 건설이었고, 그 외부에 있는 아프리카지중해 연안은 이탈리아 왕국 마음대로, 아시아일본 제국 너네들 마음대로 하라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이건 히틀러가 흑인이나 동양인 등 다른 인종들한테는 친화적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나치 이데올로기에서 동양인들은 그냥 굳이 귀찮게 찾아가서 박멸 하거나 지배할 만큼의 가치도 없는 하등한 인종으로 여겼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나치의 공격적인 이념 특성상 소위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고 나면 또 태도가 어떻게 돌변했을지는 모르는 일이겠으나, 결국 나치 독일은 아시아까지 도달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으며 실제로도 전성기에도 우랄 산맥은 커녕 캅카스 산맥조차 넘지 못한 채 패전했다.

둘째, 당대의 정치외교적 관점에서 아시아가 나치 독일에게 부정적일 이유가 없다. 당장 중일전쟁 이후부터 일본 제국나치 독일의 우방이었고 중화민국 역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의 예에서 보듯 한동안 나치 독일과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게다가 인도파키스탄의 경우 연합국의 일원인 대영제국의 식민지였으며, 실제로 추축국의 힘을 빌어 독립을 쟁취하려던 찬드라 보세 같은 인물도 있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이 소위 인도차이나 연방이라는 이름 하에 연합국의 일원이던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인도네시아 또한 연합국의 일원이던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들에게 추축국의 악행은 머나먼 유럽에서의 일이었지만 연합국의 악행은 당장 피부로 더 와닿는 상황이었고, 히틀러나 추축국의 죄업을 옹호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놈이 그놈'이라거나 '우리가 제국주의에 당하는 건 시대상이 그런 거고 지들이 유럽에서 당하는 건 인류사의 죄악이냐?' 정도의 냉소적 인식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소련에 당했던 발트 3국이 나치 독일에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인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사실 이런 면에서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특별한 케이스에 가깝다.

셋째, 식민 지배의 후유증과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던 아시아 국가들에게 파시즘의 대중 동원력과 응집력은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당장 장제스중화민국 역시 파시스트 국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권력 유지와 체제 개혁을 위해 부분적으로 파시즘의 광신적 속성을 받아들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이니까. 게다가 전간기 민주주의 국가들이 대공황이니 뭐니 헤매는 도중 히틀러의 나치즘스탈린공산주의가 나란히 약진했던 모습은, 전후 강력한 독재권력을 유지하면서 산업화를 시도하려 했던 많은 신생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물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파시즘은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기에 대놓고 파시즘을 추구한 국가는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파시즘적 통치 특성에서 일부분을 빌려 와서 써먹거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이름표만 뗀 채 파시즘에 내재된 방법론들을 의연중에 미화한 케이스는 상당했고, 이러한 교육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이 히틀러나 나치 논리의 부정적 측면이 갖는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게다가 일본 제국 치하에 있던 국가들은 정치논리에 따라 히틀러를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한 모습에 익숙했다.

넷째, 갈 곳 잃은 사회 불만의 표출과 간지. 멀리 갈 것 없이, 실제 역사 속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하기까지의 과정만 봐도 무슨 말인지 감이 올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이유라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원인들과 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즉, 서구권에서는 실제로 자기네 부모, 조부모 세대가 나치에게 당한 경우가 많은지라 아무리 그래도 네오 나치 급의 꼴통들이 아니면 히틀러를 옹호하는 쪽으로는 잘 안 가지만, 아시아권은 아무래도 당한 게 없다 보니 (특히 도덕관념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저연령층이나 독일군의 강함을 찬양하다가 흑화한 밀덕들이) 비교적 손쉽게 친나치, 친히틀러적인 스탠스로 빠져들기 쉽다.[75] 실제로 그런 발언을 했을 때 사회적 지탄의 강도에도 분명한 온도차가 있고. 추가로 역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일본 한정으로, 연합국을 깨부쉈던 화려했던 과거와 극우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15.2.1. 대한민국[편집]


히틀러가 생존해 있을 때 그를 직접 만난 한국인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유일하다. 손기정은 대회에서 우승하고 그 다음날 아돌프 히틀러를 친견했으며 그 소감을 먼 훗날 자서전에 남겼는데,"160센티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라고 남겼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수상한 이 해 8월에 태풍이 한반도 남부지방을 덮쳐 홍수 피해로 인해 2천여 명이나 되는 사망자가 발생했었는데, 이때 히틀러가 다롄 주재 총영사를 통해 수재의연금 3만원을 보내기도 했다.의연금을 가져온 총영사와의 인터뷰 기사(10월 21일), 히틀러가 낸 의연금 액수를 명시한 기사(11월 6일)[76] 이 조선을 콕 찝어 개인적으로 보낸 히틀러의 수재의연금 3만원이, 최초의 황인종 금메달 마라토너인 손기정과의 만남 이후 조선에 대해 생겨난 관심에 기인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강한 인간'에 대해 존경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극한으로 시험하는 마라톤이란 스포츠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손기정에 대한 존중을 표하기 위한 기부였음을 유추는 가능하다.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도 독일(및 나치독일)은 굉장한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일개 유럽의 약소국이 민족 대단결을 통해 유럽 최강의 강국으로 거듭난 사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도 '우리도 노력하면 유럽 열강들 밑에서 신음하다 강대국으로 거듭난 독일처럼 강해질 수 있다' 라는 희망의 표상이기도 했다.

한국은 대한제국 시절에 독일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적도 있고, 열강 외교도 선택지가 없긴 했지만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에 줄을 서기도 했다. 대한제국군 형식은 대부분 독일군을 배경으로 삼았다. 독일의 파시즘을 연구한 독립운동가도 있을 정도로 독일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는 받지 않은 관계로 취급이 자유로운 부분이 일부 있다. 그리고 애초 대한제국과 독일의 관계는 괜찮은 수준이었으며, 이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음에도 여전히 매우 좋은 평가를 받는데 영향을 줄 정도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프로이센 시절부터 형성된 우호적 관계의 연장선이다. 사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단순히 홀로코스트 등의 만행 문제뿐만 아니라 앞서 얘기한대로 한국을 식민 통치한 일본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만큼 현대 한국에서는 좋은 취급을 받기는 힘들다. 욱일기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를 동일시하며 배척하니 말 다한 셈. 물론 하켄크로이츠는 한국 사회 특유의 고등 교육과 과도하게 눈치보는 사회 성향과 서양권의 철저한 반나치 영향력이 합쳐진 게 원인이다.

정치인이다보니 꺼림칙한 부분은 다 검열돼서 카리스마있는 애국자[77]로 여겨졌으며, 특히 분열된 독일을 하나로 통일시켜 외세에 맞섰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 대학생들이 나의 투쟁을 읽기도 했다고.

다만 일본의 동맹국이라고 일본 쪽에서 추가적으로 검열해줘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착각하기 좋은데, 일단 결과적으로 동맹이었다는 점만 알고있을 뿐, 언제부터 동맹인지는 생각하지 않아서 생기는 착각으로, 일단 독일은 1차 대전 패전국이고 일본은 승전국이다. 승전국 권리로 아시아의 독일 식민지를 다 뜯어간 일본과 우호적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두 국가의 관계는 중일전쟁 발발이 중국군의 붕괴로 이어지자 군사적 관계 재수립 차원에서 우호적으로 변한 것이지, 1938년 이전에는 그냥 일본과는 대놓고 적대적인 관계였다. 즉 검열을 해도 독일이 했지 일본이 추가로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히틀러나 독일에 대한 평가는 적어도 1937년 이전은 사실상 일본 쪽에서의 개입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독일의 주중 독일 군사 고문단을 통해 중국 내 문제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군의 정예화에 노력한 모습을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전쟁범죄에 민감해진 현대엔 그런 거 없다. 물론 일본인이든 북한인이든 베트남인이든 적국이면 무차별 폭격에 진심인 르메이 같은 부류도 있으므로 결국 승자 위주의 편향적 시선이지만, 한국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위상은 대략 '독재자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것에는 노골적인 옹호나 미화가 없으면 크게 문제삼지 않고, 농담의 영역에서는 거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정도인데, 상기된 바와 같이 영미권이나 유럽권에서는 설령 사용자에게 악의가 없었다 해도 이런 취급이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현대 한국의 경우에는 종종 히틀러와 비슷한 행보를 가진 인물로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교하기도 한다. 둘 모두 독재자이자 육군 출신의 참전 경험이 있었으며 학살 행위를 일으킨 점 등이 공통점으로 꼽힌다. 전두환은 계엄군을 동원하여 광주 시민을 학살하였고, 히틀러 또한 군을 동원하여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물론 호사가들의 유흥을 넘어 학술적으로 두 인물을 비교하자면, 각각의 성격과 행보, 사건의 규모에서 일반적인 나열 비교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90년대 초반 KBS에서 방영한 코미디 프로그램 '쇼 비디오자키'에서는 심형래가 출현하는 '병사 심틀러'라는 코너가 있었다. 심형래가 독일군 병사(옷을 입은) 심틀러로, 조금산, 김학래 등과 열연. 물론 얼간이 군대로 나와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를 비꼬는 것이라 그런지 독일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선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더불어 적군으로 나오는 존재들이 베트남 저항군이라든지 미국 원주민들로 나오는데 이들에게 된통 당하는 게 많았다.

2000년대 초반 코미디언 심현섭이 모 제과 CF를 촬영할 때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하는 장면을 패러디했다가 독일 대사관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KBS2의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양동근이 자신이 만들었던 유행어 "한 턱 쏴!"를 설명하면서 게스트와 방청객들까지 한번에 로마식 경례를 했다. 자막까지 "아돌프 히틀러도 했던 로마식 경례"라고 넣으면서. 사실 나치식 경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건 로마식도 아니고 분명한 나치식 경례였다"#.[78] 나치 미화 의도가 아니라 어조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해외 사람들이 이걸 봤다간 난리날 거다.

아돌프 히틀러 희화화에서는 약간 벗어난 이야기지만, 어느 인터넷 소설에서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주변 사람들을 다 죽이자 "장하다. 김히틀러. 인류를 네 손으로 멸망시켜 버리렴."#이라고 산부가 말하는 내용이 인상적이라서, "장하다 김XX"라고 하는 밈이 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장안동에는 히틀러상사[79]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 수입차 부품 매장이 있다.# 보통 한국인들에게 독일의 지도자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의 인물이 히틀러이기 때문에, 독일 차 부품 매장의 이름을 별 아무런 생각 없이 히틀러상사라고 지은 듯 한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당연히 상호 등록조차 하기 어려운 이름이다. 즉 한국인의 입장으로는 유럽 어느 나라나 미국에서 '이완용한정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식당이 영업 중인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이 간판 사진은 짤방화되어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종종 '보헤미아 상병이 어느새 상사로 진급했다'는 드립으로 쓰인다.

2010년대를 거치고 나서는 "히틀러와 나치가 유럽의 모든 악명을 가져갔고 제국주의의 만행을 다 덮어버리고 이미지 세탁 해줬으니 유럽 국가들은 나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면서 2차대전 이전의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를 비꼬는 경우도 종종 생기고 있다. 이 농담은 나치 독일과 히틀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열강들도 제국주의 시절에 야만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이 나치 독일 못지 않게 심각한데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에 대한 비꼼이다. 두 쪽 다 나쁜 건 매한가지인데 나치 독일만 욕을 먹고 다른 유럽 열강들은 욕을 안먹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는 나치의 악행에는 분노하면서 동일한 추축국이던 일본의 전쟁범죄에는 관대한 잣대를 적용하는 서구권에 대한 비꼼도 있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 히틀러에게만 가혹하고 본인들과 큰 연관이 없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별 관심이 없는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진지하게 살펴보면 정말 뼈 있는 농담이다.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다른 식민제국 출신 승전국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의 과오를 인정해버리면 승전국으로서의 위신에 금이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마침 자신들 이상의 만행을 저지른 나치 독일을 악마화시켜서 본인들의 과거사를 덮으려는 것이다. (비록 백인 대상이었지만) 보어 전쟁에서 나치 독일에 앞서 세계 최초로 절멸 목적의 수용소를 운영한 대영제국이나 제국주의 시대 국가들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제국이 해체되었을 뿐 대부분 선진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공식적인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 모순은 유럽에서 나치 독일을 가장 강하게 부정하는 독일 역시 결코 피해갈 수 없다. 나치 독일 시기에 본인들이 침공했거나 괴뢰국, 보호령으로 삼은 유럽 나라들에게만 사죄하고 과거사를 반성하면서 정작 제국주의 시절에 식민지로 삼았고 지배의 강도도 악랄했던 독일령 동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일체의 사죄와 보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중잣대를 구사한다. ## 그나마 2010년대에 들면서 유럽에 피식민국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며 반성에 진전의 기미가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15.2.2. 일본[편집]


일본의 경우 나치는 주로 게임이나 특촬물 등 창작물의 악역 소재로 사용 되기도 한다. 가령 쇼커 전투원의 경례가 나치식 경례인데 "하일"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이 이거리기만 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성인 남성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설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동네북이다.

또한 특촬물 악역 중에서는 아예 나치 간부를 형상화하기도 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불가사리 아돌프 히틀러이다. 물론 나치 이미지를 많이 써먹고 이용해 먹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인공들한테 맨날 얻어터지는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에 독일 대사관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일본의 유명 게임개발업체인 SNK에서는 메탈슬러그 시리즈라는 슈팅게임을 개발했는데 여기서는 나치를 패러디한 모덴군을 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니까 주인공들의 목적이 이 가상의 나치인 모덴군을 때려잡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돌프 히틀러 본인이나 그의 제국을 모티브로 한 악당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정작 일본 제국의 치부나 만행은 숨기려고 하고, 히틀러에게 모두 떠넘긴다는 시선과 의혹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몇몇 극우물에서는 자신들이 일으킨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전쟁범죄는 오히려 감추려고 하고, 나치와 히틀러만을 더 강렬하게 부각 시키게 할려고 아니냐는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실 일본 극우들 중에는 일유동조론을 펴는 자들이 있는 만큼 유대인에게도 긍정적인 자들이 꽤 있다.

파일:iVsPhb1.jpg
일본 극우파들이 하켄크로이츠기와 함께 욱일기와 일장기를 사용하는 모습.
일본 극우파들의 경우 히틀러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적잖게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4월 20일 한 일본 극우파 단체는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었던 나치독일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며 나치 깃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하기도 했었다. 관련 기사1 관련기사2


16. 어록[편집]


저지른 악행이 커서 그런지 영미권에서 창조된 것이나, 한국 웹에서만 나오는 것 등 히틀러가 말한 적도 없는 가짜 어록들이 다수 있으므로 주의. 영어권 자료에 Hitler를 포함하는 워드로 검색하고, 확인 된 내용을 다시 독일어로 검색했을 시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짜 어록이다.

히틀러는 스스로를 민족영도자 쯤으로 생각하고 포장하는 인간이었는데, 아래 어록만 보면 영화 속 악당이 자기 죄를 자백하는 수준의 가짜 어록들이 즐비해있다. 바로 아래를 예를 들면 빵과 서커스 운운하며 전 국민을 조롱하는 말을 히틀러가 했다는 내용은, 영미권에선 오토 슈트라서와 견해 차에서 노동자들의 관심사는 그정도 뿐이라는 뉘앙스로 내뱉은 것으로만 등장하나,[80] 독일어로는 해당 내용을 찾을 수 없는, 독일 비실재→영미권 창조→한국 곡해 어록이다. 현실적으로도 생각해도 입 한번 잘못 놀리면 끝장나는 것이 정치인인데, 막대한 민중지지를 기반으로 총력전까지 불사하던 인기 독재자가 저런 식으로 지지자를 조롱하는 말을 대외로 퍼질 정도로 떠들어 댔다면 나치독일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히틀러가 먼저 쫒겨나 2차 대전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빵이 언급되는 건 당시 독일의 높은 실업률과 빈곤을 해결하겠다며 1933년 나치가 당차원에서 내건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슬로건인 일과 빵(Arbeit und Brot). #Nazi Propaganda: The Theme of Work and Workers in the Pre-Power and Post-Power Years 28 및 37페이지 참조, 그리고 집권 후 슬로건인 자유와 빵(Freiheit und Brot)#해당 슬로건이 적인 1936년도의 배지 뿐이다.
워낙 방대하게 쓰여있고 대규모 수정 시 나치나 히틀러 추종자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커 확인 및 수정이 힘든 상태라 주의문 만을 추가한다.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은, 빵과 서커스있으면 된다.


확성기는 함부로 쓰는게 아니야.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격에 있다.

Stärke liegt nicht in der Verteidigung sondern im Angriff.

- 독일 슈피겔 지의 기사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언급된 표현으로, 일련의 침략 행위에 담겨 있는 목적을 보여주는 그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뜬금없이 웹툰 선천적 얼간이들로 재조명되었다. 선천적 얼간이들/줄거리 19화 참고.


"국민들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잘 잊어버린다."


"국민은 아둔하여 무조건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병자나 기형아를 절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병적인 인간을 살려두어 꾸역꾸역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 배나 자비로운 일이다."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는 큰 거짓말을 믿게 된다."

Die große Masse der Menschen wird eher einer großen Lüge glauben als einer kleinen.

- 나의 투쟁


"선전에 따라 국민들에게 천국을 지옥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여기게 할 수 있다."


"거짓말을 하려면 될 수록 크게 해야 한다. 그럴 수록 국민은 쉽게 믿을 것이다."


"모든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나의 투쟁


여자는 약한 남자를 지배하기보다는 강한 남자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성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포와 힘이다.


모든 효과적인 선전은 요점을 크게 제한하고, 슬로건처럼 이용하며, 그 말에 의해 목적한 것이 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떠올려질 수 있되, 그 참 의미를 알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독일의 운명은 나에게 달려있으며 나만이 독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삶이란 뭐요? 삶은 곧 국가요. 개인은 어떻든 죽어야 하지 않소?

- 독소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장군들에게 한 말.


그 때, 마르크스주의에 대향한 투쟁이 이 싸움의 주 목표가 되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이 전쟁에 참가하며, 이 역병이 독일인들의 일상에서 완전히 쫓겨날 때까지 절대 쉬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오직 하나의 승리자만 있을 뿐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아니면 독일 국민! 승리자는 독일 국민이 될 것입니다!

- 1933년 2월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Sportpalast) 연설 중


우리는 우리 앞에 독일이 있음을 알고, 독일은 우리와 함께 행진하며, 독일은 우리를 따릅니다!!.

- 1934년 9월 7일 제6차 나치당 전당대회 히틀러 유켄트 연설 중


우리의 사회복지제도는 그저 단순한 자선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자들에게 "제발 가난한 사람들에게 뭔가 주시죠"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 국민 여러분 서로 도우십시오. 모두가 도와야 합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항상 당신보다 더 불행한 상황에 빠진 (독일)사람이 있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독일인으로써 같은 동포인 그 사람을 돕고 싶어해야 합니다."[81]


누구나 전쟁에서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살아남아서 죽은 전우들을 묻게 될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82]


승리한 군대라도 죽은 병사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83]


내가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말, 그것은 바로 항복이라는 말이다.

우리 독일 역사에 항복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 것을 온 세계에 선언하노라.


나의 불멸의 업적과 나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임을 알고 나는 기쁘게 죽을 것이다.

- 자살하기 전 남긴 말.


국가의 권위는 절대 스스로 종결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폭정이라 하더라도 불가침화되고 신성화된다. 만약 국가의 권력수단이 민중을 폐허로 인도한다면, 저항은 모든 개개인 시민의 권리일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 나의 투쟁 중.


외교의 목표는 국가의 실질적인 생존이 되어야지, 절대로 영웅적인 몰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목표에 이르는 모든 길은 선한 것인데 반해, 그 실패는 범죄적인 직무유기로 봐야 한다.[84]

- 나의 투쟁 중.


결사 항전하라. 후퇴는 용납되지 않는다. 철수란 이쪽에서 맞게 될 멸망을 저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라인강의 독일군을 철수시키자고 장군들이 건의하자 한 말. 이 말을 하니 독일 장군들이 비로소 총통도 전황을 직시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멸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드디어 "독일 민족은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망상에서 벗어났구나! 라고 생각했다.


삶은 나약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옹호자를 나치당원으로 만드는 것보다 공산주의자를 나치당원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쉽다.[85]


"스포츠적이고 기사다운 시합은 인간의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안에서 전투원(선수)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합시킵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것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 1936 베를린 올림픽 개회사. 당시 올림픽 준비위 위원장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작성해준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동맹도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다.

그리고 히틀러는 그 말 대로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그리고 도조 히데키히로히토의 일본 제국과 추축국 동맹을 맺고 전세계를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였다.


독일은 세계 최강국이 되거나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히틀러의 말 대로 전쟁에서 패전한 나치 독일은 완전히 사라졌다.


큰 거짓말이 잦아지면 곧 사실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오늘 혁명가로서 여기 서게 된다면, 그것은 혁명에 맞선 혁명가로서다.


"저는 제가 신용할 수 있는 자가 그대인걸 압니다. 제가 그대를 저의 가장 친한, 유일한 친구로 생각하는걸 알아주십시오."[86]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때 두체가 보여주었던 태도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감사로, 나는 이탈리아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하기를 삼갔다."

이후 속사포로 이탈리아를 디스한다. 무솔리니한테 그 동안 쌓인게 많았던 듯.[87]


"여기 있는 몇 명은 공산당을 박멸한 나를 용서 할 수 없겠지만, 난 다른 정당들도 없애버렸다!"

- 1933년 11월 12일 지멘스 공장 연설


"죽어도 죽어도 죽어도 이 은혜를 갚고야 말 것이며 세상 모두가 그대를 등지더라도 나만큼은 그대에게 달려가 도와줄 것 입니다."



17. 관련 이미지[편집]


파일:히틀러_타임_표지.jpg
▲ 타임지에 히틀러가 선정되었을 때의 표지, 그가 악인임을 잘 드러내는 표지이다.
파일:Hitler pattern.jpg파일:554419-.png
▲ 히틀러의 초상화가 있는 동전과 우표

파일:ALPINA-HITLER-POCKET-WATCH.jpg
▲ 히틀러의 초상화가 있는 Alpina 회중시계


18. 둘러보기 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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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벌이고 나서 루즈벨트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동맹인 추축국은 다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미군의 참전이 불러올 파멸을 깨닫지 못하고 일본의 대미 공습을 칭찬하기까지 했다.[2] 명령을 받은 펠릭스 슈타이너는 이것이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고는 투항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장면이 유명하다.[3] 그도 그럴것이 핀란드는 전쟁 막바지 연합국의 압력에 독일과 전쟁을 벌였다. 물론 핀란드군이나 독일군 양쪽 전부 어제까지 같이 소련과 싸우던 전우였기에 처음엔 서로 눈감아 주었지만 배반자를 벌하라고 날뛴 히틀러덕에 독일군이 철수 하며 유대인을 학살하거나 마을을 방화하는 범죄를 저질렀다.[4] 2차 대전 당시 개봉한 루니 툰의 한 선전 애니메이션 에피소드(Scrap Happy Daffy 편)에서도 대피 덕이 군수품 제조에 필요한 고철을 모으던 고철장을 순찰하면서 부르던 노래에서 히틀러의 본래 성씨 시클그루버를 언급한 장면이 있었다.[5] 해당 밴드는 경직되고 부패한 소련 체제를 나치 정권에 비유한 노래를 발표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다. 저 노래 자체도 나치를 "인류가 원숭이에서 여기까지 진화하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는데 원숭이로 전락하는 건 한 순간이구나!"라며 격렬하게 까는 노래다. 더 자세한 사항은 예고르 레토프 항목 참조.[6] 이걸 여기에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구글이나 얀덱스 등지에서 "시클그루버에 관한 노래"(Песня о Шикльгрубер) 등을 검색하면 높은 빈도로 이 노래가 검색되어 이 노래가 실제 독소전쟁 당시 러시아인들이 부른 노래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밴드는 1980년대 말 소련에서 프로젝트성으로 결성된 밴드다. 물론 사고를 좀 치긴 했다[7] 흔히 'ㅎ'으로 전사되는 글자는 Х로 이 글자의 발음은 [x\]이다. 한국어에서는 '흐르다'의 'ㅎ' 등 특정 환경에서 [h\]의 변이음으로 등장한다.[8] 이건 슬라브 계열의 많은 언어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크라이나어의 경우 아예 Г을 [g\]가 아닌 [ɣ\]-[ɦ\]으로 발음하고, 체코어의 경우 타 슬라브어의 [g\]가 [ɣ\]를 거쳐 15세기 전후 [ɦ\]으로 바뀌었다. (러시아어 Книга - 체코어 Kniha) [ɦ\] 발음은 우리가 흔히 하는 한국어의 ㅎ 발음이 유성음화된 발음으로 한국어에서는 '은행'의 'ㅎ' 등 특정 환경에서 [h\]의 변이음으로 등장한다.[9] 물론 현재는 어지간해서는 Х로 전사하는 관행이 자리잡긴 했는데, 여전히 독일계 고유명사의 경우 Г를 고집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여담으로, 이 문제로 인해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은 러시아에서 "게르만 게린그'(Герман Геринг)가 되어버렸다.[10]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그 대표격이다.[11] 당시 게르만주의 정당은 교황청의 독일 교회의 간섭을 배격하고 있었다.[12] # 헨리 포드의 '국제유대인'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볼 수 있다.[13] 스탈린이 필요 이상으로 유대인을 숙청하고 탄압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다.[14]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독일 루터교도들이 러시아로 많이 이주했다. 스탈린 시대 볼가 강 지역에 50만명의 독일계 주민이 남아 있었다.[15] 철자로 인해 '뤼거'로 표기되기도 하나 독일어 발음은 '루에거'에 가깝다. #[16] 물론 단순히 반유대주의자라서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고, 우파정치인임에도 사회복지제도를 선도적으로 도입하면서 상하수도와 전기같은 기초 인프라 시설들을 대거 확충해서 인기를 얻었던 것이기도 했다. 히틀러가 소식적에 복지당을 꽤 타서 생계를 꾸려나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히틀러도 루에거의 덕을 독특히 본셈이기도 했다.[17] 이 때 손기정을 히틀러에 대해 한 나라의 지도자다운 용모를 풍긴다며 꽤나 높게 평가했다. 물론 이 발언이 올림픽 직후, 즉 2차 대전이 터지기 전에 한 발언이란 건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시는 미국에서도 아돌프 히틀러가 당대 지도자들 중 가장 훌륭한 지도자 중 하나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나오던 시점이었다.[18] 제시 오언즈의 경우 조국인 미국에선 오히려 무시당했다. 흔히 알려져있는 히틀러의 악수 거부는 미국에서 왜곡한 사실이고 제시 오언즈를 무시한 건 당시 대통령 루즈벨트를 비롯한 미국인이었던 것이다.[19] Rißmann, Michael (2001). Hitlers Gott. Vorsehungsglaube und Sendungsbewußtsein des deutschen Diktators[20] 나치 집권 당시에 가장 나치가 유화적인 종교는 다름아닌 개신교였다, 나치는 마르틴 루터를 보고 교황의 속박에서 독일을 해방시킨 영웅으로 선전하기도 했으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고위 나치당원인 에리히 코크는 아돌프 히틀러와 마르틴 루터를 비교하면서, 나치가 루터의 정신으로 싸운다고 연설하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는 나치가 독일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비판해왔다. 이를테면 1931년엔 나치의 지도자층을 단체로 파문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3분의 2가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개교회주의가 만연한 개신교 특성상 모든 독일 개신교 전체가 히틀러를 옹호한 건 결코 아니었고 개신교계 상당수 교파들은 오히려 나치 독일에 의해 탄압 받았다. 세기의 개신교 목회자 디트리히 본회퍼 같은 목사도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며 아돌프 히틀러의 암살 작전에 동참했고 종전 한달 전에 나치에 의해 처형당한다.[21] Norman H. Baynes, ed., The Speeches of Adolf Hitler, April 1922-August 1939. Vol.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2. 아돌프 히틀러가 헌신적인 신자라고 말한 기사들은 다음 2개다. John Toland, Adolf Hitler. New York: Anchor Publishing, 1992, p. 507 / Michael, Robert (2008). A history of Catholic antisemitism. New York: Macmillan, p. 111[22] 유대계 미국인 번역가. 1907~1992[23] "뭔 소리유?"를 다소 바꾼 필명인 듯한데 역자 정보가 불분명하다.[24] 연설 말미에 "주여 우리를 자유롭게 하소서!"라는 문구로 끝낸다.[25] 학창 시절 반가톨릭적 글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장학금을 박탈당할 뻔해서 본인과 아버지 등 주변 인물들이 사정 사정한 끝에 박탈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괴벨스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고 본인 또한 장학금에 의존해 공부를 이어나가던 환경이었던 걸 감안하면 상당히 근시안적인 행동이었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26] Speer, Albert. <Inside the Third Reich: Memoirs>. New York: Simon & Schuster, 1997[27] 지금의 이슬람 근본주의에 물든 시각으로 보면 이상하다 생각하겠지만 이는 당시의 시대상 또한 감안해야한다. 제 1차 세계대전때만 해도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은 상당한 기술과 윤리관을 가진 하나의 열강이였다.[28]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침실을 정리하는 위치에 있던 인물이 에바 브라운과 히틀러가 성행위를 한 흔적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무성애자라는 이야기가 많고 실제로 나무위키 무성애 항목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지만 금욕과 아예 성적 지향성인 무성애가 다르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29] 채식으로 인해 육류 섭취를 못하는 스트레스를 당류로 대신했다는 추측도 있다.[30]예수 그리스도MBTI가 같다. 때문에 INFJ 관련 밈이나 유머에서 자주 사용되는 패턴 중 하나. 이중인격[31] 뮌헨 시절 히틀러의 소득은 월 100크로네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은행원들의 평균 월급 70크로네보다도 높은 액수이다. 설령 월 25크로네의 고아연금이 합쳐진 금액이라 가정하더라도, 이 시기의 히틀러가 이런저런 상업용 그림 알바만으로 어지간한 은행원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히틀러가 적어도 그림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만한 수준의 미술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 부분은 당시 사회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꼭 창조적 재능을 발휘하여 독자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인쇄 기술이나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원본 하나만 잘 뽑아놓으면 그걸 인쇄하고 복사해서 실컷 사용할 수 있지만 히틀러가 활동한 20세기 초반의 경우 길거리의 광고판이든, 그림엽서든 사람 손으로 그리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주로 그렸다고 알려진 광고판이나 그림엽서 등이 바로 이러한 '상업적으로 양산되는 그림'이 활용되는 대표적인 분야였다. 즉 히틀러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낼 만큼 창조적인 미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는 그런 독창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일종의 수공업 생산품에 가까운 그림의 수요 역시 상당했고, 히틀러는 이 영역에서는 상품이 될 만한 그림을 그려 팔 수 있을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32] 처칠은 글쓰기와 그림 양쪽에 능했으며 처칠의 문장과 그림은 지금도 유명하다. 스탈린은 공산당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쓴 시가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게다가 당시는 제정 시대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권력으로 뭘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33] 마지막 남녀 주인공이 춤추는 왈츠가 유명하다.[34] 재즈에 대해서 히틀러와 나치당 인사들이 가진 인식은 "더러운 흑인들이 여자들을 유혹할 때나 트는 음악"이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 시대를 다룬 독일 드라마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를 보면 주인공들이 모여서 재즈 음악을 틀며 놀다가 게슈타포가 오자 재즈 음악을 재빨리 꺼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재즈 음악을 금지곡으로 지정하여 듣는 사람이 있으면 처벌을 했기 때문이었다.[35] 비단 그림만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의 지구본, 자동차, 그의 친필 사인이 담긴 들 또한 같은 이유로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된다.[36] 가장 적절한 예시로 괴링을 들 수 있는데 온갖 부패와 사치를 벌이고 회의를 할때 약에 취해 졸거나, 슈페어나 풍크 등 군수 관계자들이나 해군 수뇌부들과도 의견충돌로 내분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온갖 실책에도 근신같은 조치를 취하지않았다.[37] 건강의 해악성 자체를 몰랐던 건 아니다. 중독성은 순조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고(니코틴이 발견되기 이전이다.), 해악성도 미약하게나마 중독성과 연관지어 발견하기도 했다.[38] 히틀러의 가정부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엘리자베스 칼하머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히틀러는 야간형 스타일로 밤이나 새벽까지 업무를 보다가 오후 2시 이전에 일어나는 일이 드물 정도로 늦잠을 잤다고 한다.[39] 여담으로 독일 고위관리의 부인이 "체포되어서 끌려가는 유대인들이 불쌍합니다. 어떻게 조치를 해주세요!" 라고 해서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해졌지만 정작 그 자리에 있던 히틀러와 힘러가 그냥 웃으면서 분위기를 넘긴 사례도 있다.[40] 출처: 제프리 메가기, 김홍래 역, <아돌프 히틀러 최고 사령부 1933~1945: 사상 최강의 군대 아돌프 히틀러군의 신화와 진실>, P. 319, 서울: 도서출판 플래닛미디어, 2009. 영화 다운폴에 이 장면이 비교적 잘 묘사되어 있다. 링크 참조.[41] 실제로 아주 특이한 상황이 아니면 육식을 거부하는 한국, 중국 스님들 사이에서도 단 음식을 좋아하는 스님들이 많다.(그 법정 스님도 아이스크림을 한 자리에서 3개씩 먹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42] 근대 최초의 동물보호법은 1822년 영국의 마틴법이며, 고대까지 범위를 넓이면 인도아소카 대왕이 만든 동물보호법이 세계 최초다. 무려 2400여 년 전에 시행했다.[43] 아돌프 히틀러는 대통령 겸 총리에 수권법이라는 법까지 만들어 그 외 수많은 추가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상 황제와 다를바 없었고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게 사실상의 입법권이 있었다. 누가 뭐라하건 그가 결재하면 법이 됐다.[44] 악마화된 히틀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인 '히틀러: 악의 탄생'에서는 히틀러가 푹슬을 학대하는 것으로 황당하게 묘사했다. 참호에서 히틀러가 푹슬에게 정신병자처럼 화내면서 앉으라고 명령하는데 푹슬이 앉지 않자 동료 병사들에게 "네 애인이 한눈 판다"는 식으로 비웃음거리가 되고, 자신을 망신시켰다고 뛰쳐나와 푹슬을 벨트로 때리면서 구타하는데, 그 순간에 폭탄이 히틀러가 원래 앉아 있던 곳으로 떨어져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유튜브 댓글들도 황당한 연출이라고 비판하는 반응이 많다.[45] 실제 일본에서는 이를 묘성(猫性)과 견성(犬性)이라 부르며 지도자들의 성향을 분류하기도 한다. 민주적인 지도자일수록 묘성이 높고, 독재적인 지도자일수록 견성이 높다는 것이다. ###[46] 업무용이라고 우겨서 당에서 뜯어낸 돈으로 중고차를 하나 샀지만, 워낙 낡아 금방 되팔아 버리고 자비로 새 차를 샀다. 대신 운전수는 당비로 고용해 달라고 우겼는데 결국 들어줬다고 한다.[47] 에어 출판사는 집권 후 독일 최대의 출판 재벌이 된다. 나치당이 대주주다.[48] 당시 우표에 자기 얼굴이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명예로 여겨져 따로 돈을 받는다는 개념이 드물었다고 한다.[49] Gambetta, Diego (2005). "Black Marks: Hitler's Bribery of his Senior Officers During World War II". In Kreike, Emmanuel; Jordan, William Chester (eds.). Corrupt Histories. Toronto: Hushion House. pp. 518. ISBN 978-1-58046-173-3.[50] 이쪽은 주로 추적 사료로 롬멜과 그의 아내 루시에간에 오간 편지들이 사용되는데 히틀러와 사이가 전쟁 중반까진 각별했던 롬멜이 히틀러에게 받아낸 것 중 가장 큰 것은 1940년 1월 국방군 총통경호대에서 기갑병과로 가고싶다는 소망이 받아들어져 제7 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하도록 조치 받은 것이다. 당시 대부분 기갑사단의 경우 기병 병과에서 넘어오다보니 예하 장교들이 보병 교관출신이 낙하산으로 내려왔다라며 우려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롬멜은 프랑스 침공에서 이 의심을 완벽하게 풀어버리는 전공을 세운다.[51] 히틀러는 한동안 생목으로 연설을 하다가 발성장애가 생겨서, 1932년 오페라 가수 파울 데프린트(Paul Devrient)로부터 발성 지도를 받았다. 특유의 목소리 톤은 이 과정에서 완성된 것이다. 데프린트는 나치당의 요구로 인해 이 사실을 철저히 함구해야 했으며, 독일의 패전 이후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숨겼다. 결국 1973년 그의 사후에 데프린트의 유족이 그가 남긴 일기장을 읽어보고 나서야 해당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52] 억양이나 악센트 등이 독특해서 인상적인 느낌을 남길 뿐 독일인들이 히틀러처럼 말하지는 않으므로 오해하면 안 된다. 히틀러의 육성이 자료로 많이 남아있는 만큼 독일인들이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처럼 말을 한다.'는 인식이 생겨 불편해하기도 하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히틀러는 표준독일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조금 심하고 말투와 억양과 사고방식, 표현법 등이 독특해서 히틀러의 말을 불편해하는 독일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과의 대화 녹음을 들어보면 오스트리아 사투리가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고 그보다는 당시 널리 쓰이던 고지 독일어 억양에 가깝다. 1928년 이후 히틀러는 연설장에서 마이크와 스피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이만(Neumann) 사의 마이크를 애용했다. 노이만 마이크는 가청 주파수를 꼼꼼하게 채우는 데 주력하여, 당시 유럽 기준으로 매우 고음질의 재생이 가능했다. 그의 연설이 독일인들에게 '사자후'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데는 발전한 음향장비 역시 큰 역할을 했다.[53] 1차 투표 11,339,446 (30.1%) 득표[54] 제24선거구[55] 히틀러 내각 출범[56] 1945.04.30 사망으로 궐위[57]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때 무솔리니가 보여주었던 태도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감사로, 나는 이탈리아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하기를 삼갔다. 오히려 언제나 이탈리아를 대등한 상대로 여기려 노력해 왔다.[58] 실제로 히틀러가 크게 놀랐으니 목적은 이룬 셈.[59]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와 키레나이카에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그 이상은 딱히 바라지도 않았다. 힘도 약한 주제에 무모하게 그리스 원정을 시도했으며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한마디 의논도 없었다. 이는 완전히 무의미한 전투였다. 이탈리아에게 바라는 유일한 최선은 아무 것도 하지않는 것이며 이것만 지켜주었다면 이탈리아가 매우 고마웠을 것이였고 값진 선물도 챙겨줄 생각이였으며 로마 제국을 원한다면 그것이 이탈리아가 동맹으로 싸우는 것보단 저렴했을테니 줄 생각이였다.[60] 사실 이 조차도 선택사항이 없는게 크다. 무솔리니는 죽을 때까지 히틀러가 석연찮았을지도 모를 일이다.[61] 히틀러 암살작전 이후에 기존 간부들에 대한 편집증이 스탈린 수준으로 발전해버린 히틀러가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주는 무솔리니에게 암살현장을 보여주며 저는 제가 신용할 수 있는 자가 그대인걸 압니다. 제가 그대를 저의 가장 친한, 유일한 친구로 생각하는 걸 알아주십시오. 라는 대단히 스윗한 말을 남기며 최후의 순간이 다가올 때에서야 서로를 완전히 신용하게 되었다. 야속하게도 서로 좋은 친구가 됐을때는 추축국은 이미 패망 직전이였고 역으로 생각하면 처음부터 이렇게 의기투합했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진 되지않아 친해지지 않았을 것이다.[62] 더불어 히틀러의 사진들을 보면 수염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는것처럼 보인다. 사실 여자라 그때그때 수염을 분장한거라던지, 히틀러가 간혹가다 남성호르몬을 주사로 맞기도 했는데 그게 성전환을 위해 호르몬 치료를 맞는거다 라는 식의 루머도 있다.[63] 영화 '몰락'에서 나온 꺾다리 부관 오토귄셰가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64] 책 제목은 <아돌프 히틀러 북>으로 국내에도 발간되었다.[65] 국내에서 늦게 나와서 그렇지 원저는 1976년 미국에서 나온 책이다.[66] 만약 그가 정말로 수상자가 되었다면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세계 대전을 일으킨 최악의 전쟁범죄자가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67] 예를 들어 AI 기술로 히틀러의 목소리만 따 와서 노래 보컬에 매시업한 영상. AI 기술을 이용한 2차 창작이 2023년 중후반부터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다만 히틀러의 목소리라 해도 1930-40년대 자료가 전부다 보니 보컬의 질은 낮은 편이다.[68]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화 몰락을 이용한 합성물과 2차 창작물.[69] 출처[70]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p.247[71] 일본 우익들은 이를 악용하여 나치 독일, 연합군의 악행만 부각시키고 일본 제국의 악행은 얼버무리거나 축소시키는 물타기를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72] 히틀러가 제복을 많이 입어서 그런것도 있다. 하지만 히틀러는 집권중에 자신에게 군사계급을 부여한적이 없고 히틀러가 입는 제복을 자세히 보면 군사 계급장이 없는것을 볼수가 있다.[73] 출처: 히틀러 2권 1장 자기확신 71page[신칭] 이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닌 나무위키에서 지은 이름이다.[74]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폴란드, 체코는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군이 자기 국가들에게 저지른 전쟁 피해들을 이유 삼아 독일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강경 반대하고 있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 하지만 루마니아는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에 협력한 이온 안토네스쿠를 공식적으로 복권시켰다. 음?[75] http://tieba.baidu.com/p/4912353589 사진 속 학생들은 중국 본토가 아닌, 대만의 어느 한 학교 학생들이다.[76] 당시엔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으로 독-중 동맹 비슷한 개념으로 중국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는 아무 관계도 아니였다. 단순히 올림픽에서 손기정을 만난 이후 극동에 관심을 가진 듯. 3만원의 시세는 당시 기준 서울의 고급 주택 30채 정도의 금액. 날짜를 보면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을 맺기 대략 한달 전인데, 협정을 하루아침에 맺을리가 없으니 일본에 대한 정보를 계속 접하다가 수해 소식을 듣고 의연금 지원을 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77] 전간기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인생을 소개하며 나라없는 애국자라고 불렀다. <국적도 업는 애국자 독일의 히틀러씨 (1930년)>[78] 해당 문서에서도 설명되어있지만 로마식 경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것이지는 복원되지 않았다. 그저 로마군들이 황제나 집정관을 향해 오른팔을 비스듬히 들었다는 정도의 문헌상 기록과 동상의 모습을 보고 추론하는 것일 뿐이다.[79] 주위의 가게 주인이 이름의 유래를 물어보니 눈에 확들어오는 이름이라고 지었다고 한다.[80] Your socialism is Marxism pure and simple. You see, the great mass of workers only wants bread and circuses. Ideas are not accessible to them and we cannot hope to win them over. We attach ourselves to the fringe, the race of lords, which did not grow through a miserabilist doctrine and knows by the virtue of its own character that it is called to rule, and rule without weakness over the masses of beings.[81]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공식 당명에서도 드러나듯, 나치즘이든 파시즘이든 본격적인 전시 동원 체제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좌파 사회주의적인 면모도 있었다. 애초에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모두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 속에서 탄생했으며, 노동계급의 연대를 강조하고 과학적 합리주의를 중시하며 체제를 위한 절대적인 희생을 미덕으로 삼는 등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단지 방법론적으로 한쪽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반대쪽은 그와 대비되는 국제주의를 채택했을 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 차이가 제1세계 민주국가나 제3세계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파시즘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함으로써 수명을 50년 가량 더 연장시켜줬다. 다만 나치가 조작질을 많이 해서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히틀러는 자기가 나중에 학살한 공산주의자들이나 유대인들과도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고 나치 내부의 좌파도 장검의 밤 때 학살해서 없애버렸다.[82]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통신병으로 참전하였으며, 훈장도 받았었다. 그나마 1차 세계대전의 전쟁 베테랑다운 어록.[83] 히틀러가 했다고 믿겨지지 않지만, 진짜로 그가 한 말 맞다. 기 사예르의 회고록 잊힌 병사에도 위 구절이 나온다. 사실 히틀러를 지구를 파멸시키고자 인세에 강림한 사탄처럼 취급하는 현대의 관점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는 자기 딴에는 장병의 복지나 인권에 대해 꽤나 진취적인 태도를 보였다. 문제는 히틀러 본인이 생각하는 "인간"이란 우선 독일인이어야 하고, '정신적, 신체적으로 하자가 없어야 하며, 투철한 나치로써 그 이외의 사상을 철저히 경멸해야 하고, 조국을 위해 언제든 초개같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에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 하나라도 예외가 생기면 곧바로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취급받으며 수용소로 보내졌으나, 역설적으로 저 범주 안에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사람들은 나치의 폭력에 직접 노출된 적이 없다 보니 스스로 범죄의 동조자라는 자각이 덜했다. 그래서 나치의 범죄가 낱낱이 밝혀진 오늘날까지도 당대의 생존자들 사이에 인식의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러 역사가들의 지적처럼, 히틀러라는 인물의 진취적인 일면들까지 무조건 부정하며 악마화하기보다는, 히틀러조차도 선악이 혼재된 현실정치의 일원이었음을 인정하되 잘못된 인식 위에 구축된 선의는 결과적으로 더 큰 악을 태동시킬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 과거로부터 올바로 배우는 자세일 것이다.[84] 타 국가에서의 외교에 대해서 결코 패배하는 일이 없이 승리하는 일만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안 된다면 그것은 운이 나쁜 것이 아닌 직무유기로 봐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타 국가와의 외교관계에서 을의 입장에 놓이는 것은 절대 있어선 안되고, 영웅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보다는 국가의 부흥을 위한 갑의 방향을 향하는 것이 절대선이라는 것이다. 말 자체만 놓고 보면 정치현실주의의 핵심을 찌르는 명언으로 전혀 흠잡을 곳이 없지만, 정작 히틀러는 정반대로 (나치의 관점에서) 영웅적인 몰락을 거쳐 국가의 실질적인 멸망으로 향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실 1930년대 시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질적인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보기도 어려웠으며, 정말 생존이 위협받는 수준이면 딱 필요한 예방전쟁을 하면 했지 타국에 쳐들어가서 땅따먹기를 할 여력도 없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절의 독일 제국이나 현대 이스라엘처럼 정말로 국가의 실질적인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국가들이 보면 코웃음칠 소리. 자국의 역량을 과대평가해 파멸을 자초한 것도 잘못이지만, 애초에 '영웅적인 몰락'을 각오하고 '실질적인 생존'을 위해 투쟁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니 엉뚱한 피해 망상에 쫓겨 세계에 민폐를 끼친 셈이다.[85] 공산당원에게서 전체주의 성향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의미. 실제로 괴벨스, 롤란트 프라이슬러 등 나치의 상당수가 원래는 좌익 성향이었다. 다만 그 중에는 좌익이라 해도 공산주의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에는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다.[86]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한 이후 한 말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되고 무솔리니는 여러 실패들로 실각되어 몸뚱아리랑 잔당들만 남은 터라 얻어낼게 있었던 정치적 쇼가 아닌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무솔리니가 처참하게 죽은 소식이 히틀러에게 알려진 다음 날 자신의 시체를 절대 넘겨주지 말라는 말과 함께 히틀러가 자살하였는데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과는 별개로 무솔리니를 잃은 상심이 굉장히 컸을 듯 하다.[87] 시칠리아에 연합국이 상륙하여 쫒겨나기 직전의 무솔리니는 독일에서 이탈리아까지 직접 찾아와 극도로 분노한 히틀러에게 온 세상 모든 욕을 듣는다. 무솔리니는 딱히 할말은 없었고 자존심이 상하여 건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그 날로 우울증이 더 심해져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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