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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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어
Հայ Կաթողիկէ Եկեղեցի
영어
Armenian Catholic Church



1. 개요
2. 역사
3. 현황


1. 개요[편집]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전례를 따르며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 현재 신도수는 70만 명이라 주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5만여 명 정도[1]. 현재 총대주교좌는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다.


2. 역사[편집]


십자군 전쟁킬리키아에서 아르메니아 교회가톨릭간의 접촉이 있었고, 킬리키아 교회와 가톨릭을 서로 일치시키고도 해봤지만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되었다.

동방 가톨릭 교회는 주로 십자군 운동이 활발했던 중근동 일대 및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일대 리비우를 중심으로 신도들이 분포해 있었다.[2]

그 후 1740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한 아르메니아인 사제가 스스로 킬리키아의 총대주교라고 선언하였는데,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킬리키아 총대주교좌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쪽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분열되었다.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한 쪽은 바로 이 아르메니아 가톨릭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이로서 아르메니아 가톨릭은 공식적으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오스만 제국 정부는 1829년부로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를 정식으로 인가하였다.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갈등도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서유럽, 중유럽 진출을 수월하게 해주는 포석 역할도 수행했다. 아무리 같은 기독교라 하더라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교리 차이로 가톨릭과 구별된 교파인데, 종교의 자유라는 권리는 근대에나 와서 확립된 개념이었고,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서유럽, 중유럽에 진출할 경우 유대인이 유럽에서 당했던 것과 비슷한 차별을 당할 위험이 상존했다.


3. 현황[편집]


아르메니아 가톨릭 총대주교청(정식 명칭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가톨릭 총대주교청)은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으며 직접 관할하는 레바논 내 신도는 1만 2500여 명 정도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본국의 신도 수도 이와 비슷한 규모. 이외에도 시리아의 알레포다마스쿠스, 이라크의 바그다드, 터키의 이스탄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이란 이스파한에도 성당과 교구가 있으나 규모는 더 작다. 리비우에 있던 아르메니아 가톨릭 성당은 규모는 작지 않으나 소련 시절 동방 가톨릭 탄압의 여파로 사실상 기능이 정지했다.

오늘날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도들은 소련 시절의 동방 가톨릭 탄압과 레바논 내전으로 인해 대부분 북미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편이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이 밀집한 캘리포니아 LA 근교 글렌데일에 아르메니아 가톨릭 북미 교구가 있으며, 캐나다와 미국 내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도 3만여 명을 총괄한다고 한다. 프랑스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 신도 수는 해당국들이 가톨릭 국가인 영향으로 신도 비율이 약간 있는 편이라고 한다. 파리에 있는 교구에서 프랑스 내 신도 3만여 명,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교구에서 신도 1만 6천여 명을 관리 및 수용한다고 한다.

1911년 당시 아르메니아 가톨릭 인구는 13만 6400여 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오늘날에도 신자 분포지역만 바뀌었을 뿐 신도수는 비슷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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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르메니아 내 로마 가톨릭 및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도는 다 합쳐서 1만 3천여 명 정도이다.[2] 리비우의 경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정부에서 정교회를 가톨릭에 통합시켜 강제 개종시키려던 정책을 처음 시작했던 곳이기도 했다. 갈리치아 일대는 폴란드 멸망 이후에도 러시아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우세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