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베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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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젠다리움의 등장인물
아르베두이
Arvedui


파일:Elena Kukanova_Arvedui and Firiel.jpg

아르베두이와 피리엘
본명
Arvedui
아르베두이
이명
Last King
마지막 왕
성별
남성
종족
인간 (두네다인)
출생
T.A. 1864
거주지
에리아도르(아르세다인)포로드와이스(포로켈)
가문/왕조
House of Elendil
엘렌딜 왕조
Isildurionath
이실두르 왕조
직책
King of Arthedain
아르세다인의 왕
재위기간
T.A. 1964 - 1974
가족관계
아라판트 (아버지)
피리엘 (아내)
아라나르스 (아들)
한 명 이상의 다른 아들

1. 개요
2. 이름
3. 행적
3.1. 곤도르의 왕권 주장
3.2. 최후, 그리고 북왕국의 종말
4. 평가



1. 개요[편집]


"왕자님의 이름은 아르베두이로 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르세다인의 마지막 왕이 될 테니까요. 그 때 두네다인족은 선택권을 갖게 될것입니다. 그들이 지금으로서는 그닥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선택을 한다면 왕자께서는 이름을 바꾸고 대영토를 다스리는 왕이 되실 겁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두네다인족이 다시 발흥하여 통합될 때까지 수많은 슬픔과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선견자 말베스

아르베두이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북왕국의 최후의 왕이다.[1] 아르베두이는 제3시대 1864년에 아라판트의 아들로 태어나 1964년에 즉위하였고. 1975년, 11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과 함께 북왕국은 멸망하였고, 전쟁으로 인구가 급감한 북왕국의 두네다인은 나라를 재건하지 않고 황야를 떠도는 순찰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2. 이름[편집]


  • 아르베두이(Arvedui)[S] - '마지막 왕(Last King)'이라는 뜻이다. ar(a)-[2] + vedui[3]


3. 행적[편집]



3.1. 곤도르의 왕권 주장[편집]


왕위에 오르기 전인 1940년에 아르세다인곤도르는 오랜 단절을 깨고, 관계를 회복하고 동맹을 결성하였다. 드디어 그들은 앙마르나 전차몰이족이나 모두 어떤 공통된 이의 조종에 의해 누메노르의 생존자들을 멸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아르베두이는 동맹을 기념하기 위해 온도헤르의 딸 피리엘과 결혼하였고 아라나르스를 비롯한 아들들을 낳았다.

1944년에 곤도르의 왕 온도헤르가 왕자들과 함께 전사하자 사위인 아르베두이는 엘렌딜의 장자인 이실두르의 직계 후손이자 온도헤르의 사위로서 두네다인의 모든 땅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주장은 거부되었다. 당시 섭정인 펠렌두르가 주된 역할을 맡았다.[4]

"곤도르의 왕권 및 왕권은 오로지 이실두르가 이 나라 영토를 양여했던 아나리온의 아들 메넬딜의 후계자에게 속한 것이다.

곤도르에서 이 유산은 아들들에게만 물려주는 것으로 돼 있다. 우리는 아르노르의 법도가 이와 다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말에 아르베두이는 이렇게 대꾸했다.

" 엘렌딜에게는 아드님이 계셨으며, 그 중에서 이실두르가 장자로서 부왕의 후계자였다.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엘렌딜의 이름이 곤도르의 왕족 계보에서 제일 위에 있음을 알고 있다. 그분은 두네다인족의 전토를 다스린 대왕이었기 때문이다. 엘렌딜이 생존해 계셨을 동안 남왕국의 공동규약은 그 왕자들에게 위임된 바 있었다. 그러나 엘렌딜께서 돌아가셨을 때 이실두르께서 부왕의 왕권을 계승하러 가셨고 남왕국의 처리를 부왕이 그랬던 것처럼 그 형제의 아들에게 위임했던 것이다. 그분은 곤도르의 왕권을 취하한 것이 아니며 또 엘렌딜의 영토를 영원히 분할하려는 뜻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과거 누메노르에서는 국왕의 홀이 남녀를 불문하고 왕의 장자에게 전해져 왔다.[5]

이 법의 전쟁의 혼란 속에 망명지에서 지켜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우리 족속의 법도이며,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온도헤르의 자손이 후사 없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말에 곤도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개선장군 에아르닐이 곤도르의 왕권을 주장했으며, 그가 왕가의 자손이었기에 곤도르의 모든 두네다인족도 왕권을 승인해 주었다. 그는 텔루메흐타르의 차남인 아르키랴스의 아들 칼림마킬의 아들 시리온딜의 아들이었던 것이다.[6] 아르베두이는 자신의 요구를 계속 주장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곤도르의 두네다인족이 내린 선택에 반대할 힘도 그럴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왕권이 사라져 버린 후에도 그 후손들(아라나르스, 아라고른 2세)은 선조의 요구를 잊지 않았다. 이제 북왕국이 종말을 맞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곤도르에서도 에아르닐 2세를 이은 왕은 하나뿐이었다. 만약 왕관과 홀이 하나로 통합되었더라면 그 왕권은 계속 유지되고 위험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대부분의 곤도르인들에게 아르세다인의 영토가 대대로 그곳을 다스려온 통치자들에 비해 작아보였을지 몰라도, 에아르닐은 현명했고 거만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아르베두이에게, 자신이 남왕국의 법도와 필요에 의해 곤도르의 왕권을 받았다면서 다음과 같은 전언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아르노르의 정통성을 잊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친족 관계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오. 또한 엘렌딜의 영토들이 서로 소원해지는 일도 원치 않소. 앞으로 그대가 도움을 필요로 할 경우,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드리겠소."

그러나 에아르닐이 자신이 약속한 바를 이행할 때가 되었다고 여기기까지는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라판트왕은 점점 쇠해 가는 군세로 앙마르의 공격을 저지하며 버텨왔던 것이었는데 왕위를 물려받은 아르베두이 역시 같은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3.2. 최후, 그리고 북왕국의 종말[편집]


1974년, 앙마르가 다시 세력을 일으켜 그해 겨울이 다 가기 전 마술사왕이 아르세다인을 습격했다. 마술사왕은 포르노스트를 점령하고 남아있던 두네다인 대부분을 룬 강 너머로 축출했다. 그중에는 왕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르베두이는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을 계속하다가 호위대 몇 명과 함께 북쪽으로 피신했다.[7] 그들이 달아날 수 있었던 것은 빠른 말 덕분이었다.

1975년에 아르베두이는 한동안 산맥 맨끝에 있던 난쟁이족의 옛 광산 갱 속에 숨어있었으나 마침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포로켈의 설인족 롯소스에게 도움을 청하러 나섰다. 왕은 해안에서 그 무리들을 만났으나 그들은 왕을 도우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왕이 줄 수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보석 몇 가지밖에 없었고, 또한 결빙과 해빙을 자기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졌던 마술사왕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부는 수척한 왕과 그 신하들에 대한 연민에서, 또한 일부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무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약간의 음식을 제공하고 눈으로 집을 만들어 주었다. 아르베두이 왕은 그곳에서 남쪽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오기만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아라나르스로부터 왕이 북쪽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키르단은 즉시 포로켈로 배를 보내 왕을 찾아오게 하였다. 그 배는 여러 날 후에야 그 곳에 이르렀는데 선원들은 멀리서 장작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실종자들을 발견하였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어서 그때가 3월이었는데도 겨우 녹기 시작한 얼음이 해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설인족들은 바다에 뜬 배를 처음 보고 경악과 두려움을 느꼈다. 전보다 훨씬 더 우호적이 된 그들은 왕과 살아남은 수행원들을 썰매에 태워 얼음판 멀리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렇게 해서 배에서는 보트를 내려 간신히 왕의 일행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설인족의 족장은 바람 속에서 위험의 기미를 느끼고 왕에게 여름에 출발할 것을 권고했지만 왕은 그에게 사의를 표하고 작별의 표시로 바라히르의 반지를 내주었다.[8] 그러나 왕이 탄 배가 바다 한복판에 채 이르기도 전에 거대한 폭풍이 일어 배는 얼음장 위에 올라앉았다. 키르단의 선원들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날 밤이 되자 얼음에 선체가 부서지면서 배는 침몰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최후의 왕 아르베두이는 목숨을 잃었다. 그와 함께 그가 가지고 있던 안누미나스의 팔란티르와 아몬 술의 팔란티르도 바닷속에 잠기게 되었으며, 배의 난파 소식은 한참 후에야 설인족들을 통해서 전해졌다.]

아라나르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것이 아닌 두네다인 족장으로 남아 북부의 순찰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4. 평가[편집]


그가 즉위했을 때부터 이미 북왕국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지나지 않았고, 아르베두이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이었건 사실상 멸망을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명나라의 숭정제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11세와 비슷한 입장이다.

그러나 시대 상황만으로는 옹호가 불가능한 실책도 저질렀는데, 롯소스족의 충고를 무시하고 굳이 서둘러 항해를 시작했다가 죽은 것이다. 그가 롯소스의 땅으로 대피했을 당시 이미 아르노르는 멸망한 상황이었기에 본인의 죽음이 큰 위기를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가보 팔란티르를 잃어버린 타격은 컸다. 현지인의 지혜를 무시하고 문명의 이기만을 믿다가 변을 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저렇게 길을 서두른 것도 마냥 실책은 아닌 게, 마술사왕이 언제 쳐들어와 몰살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자체가 불안감을 조성했을 것이므로 하루 속히 아군이 있는 회색항구로 가고 싶어했을 것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맨 위의 예언에서 볼 수 있듯이 만약 여름까지 포로켈에 버텨서 살아남았다면 에아르누르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고, 아라고른보다 수백년 먼저 아르노르-곤도르 통합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언이 거의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그래도 그가 만든 긍정적인 영향이 있으며, 이는 후대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일단 본인의 곤도르 왕위 계승권 주장도 그렇고, 무엇보다 국왕으로써 후대를 양성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이실두르의 혈통이 보존될 수 있었다는 것. 아르베두이의 자식들은 이후 두네다인의 족장이 되었으며, 순찰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의 먼 후손인 아라고른 2세가 다시 곤도르와 아르노르를 이은 통합 왕으로 즉위한다. 만약 아르베두이에게 자식이 없었다면 아라고른 2세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고 프로도는 브리에서 나즈굴들에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는 후계자 양성을 방기하고 무술에만 매진하다가 결국 분기탱천해 뻘짓으로 왕조를 끊어먹은 동시대의 에아르누르보다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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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이름을 지은 것은 선견자 말베스로 그는 아르베두이뿐만이 아니라 두네다인 전체가 맞이할 운명을 예견하였던 것이다.[S] 신다린[2] Noble(고귀한). noble/high/royal(고귀한/높은/왕족의)'를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RĀ/ARA, 또는 'good/excellent/noble(좋은/훌륭한/고귀한)'을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ARAN에서 파생된 단어 aran에서 비롯된 접두사이다.[3] End/Final/Last(끝의/최종의/마지막의). 'End/Finality(끝/최종)'을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MET에서 파생된 medui의 연음화된 형태이다.[4] 아직 팔란티르 사용이 가능하던 시기였으니 이 대화는 팔란티르를 통해 이루어진 걸로 추정된다.[5] 제 6대왕 타르알다리온이 이 법을 만들었다.[6] 만일 아르베두이가 그 자신이 아닌 아내 피리엘을 계승자로 내세웠거나 아들 아라나르스를 내세웠더라면 다른 전개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에아르닐이 온도헤르의 6촌 동생인 반면에, 피리엘은 온도헤르의 유일한 자식이니 아르베두이가 근거로 내세운 누메노르의 장자승계원칙에 가장 부합한 인물이다. 아라나르스만 해도 온도헤르의 외손자이니 곤도르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덜한 대상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의 주장은 거부되었다.[7] 이 때 탈출하면서 팔란티르들 또한 가지고 탈출하였다.[8] 이 반지는 훗날 아라나르스가 족장에게 값을 치르고 다시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