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탁세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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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아르메니아
Մեծ Հայք

Mets Ha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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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탁세스 왕조의 문장
존속기간
기원전 190년 ~ 기원후 12년
위치
아르메니아, 시리아, 터키 동부, 이라크 북부
수도
아르타샤트
국가원수

주요 국왕
티그란 2세(BC 95~BC 55)
언어
고대 아르메니아어
종교
아르메니아 종교 (주신: 아라마즈드[1])
종족
아르메니아인
성립 이전
예르반드 (오론테스) 왕조
멸망 이후
아르샤쿠니 왕조
로마 제국

1. 개요
2. 역사
3. 역대 왕


언어별 명칭
고대 아르메니아어
Հայք (Haykʿ)
코이네 그리스어
Ἀρμενία (Armenía)
고대 페르시아어
𐎠𐎼𐎷𐎡𐎴 (Armina)


1. 개요[편집]


Արտաշեսյան (아르타셰산)

아르탁세스 (아르타셰스) 왕조는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에 존재했던 왕조로, 아르메니아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던 왕조이다.


2. 역사[편집]


기원전 200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3세는 아르메니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론테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 오론테스 4세를 죽이고 아르메니아 전체를 공략했다. 이때 오론테스 4세의 부하로 알려진 아르탁세스 1세가 투항했고, 안티오코스는 그를 아르메니아 사트라프로 임명했다. 다만 안티오코스는 아르탁세스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이베리아,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콤마게네 등 여러 영토를 아르메니아 본토로부터 떼내어 사트라프들을 각각 임명했다.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군이 로마군에게 참패하면서 제국의 위세가 약해지자, 아르탁세스 1세는 이 때를 틈타 기원전 189년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을 로 선포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고원 전체와 여러 인접 지역을 공략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에 의탁했던 한니발 바르카가 자신을 잡으려드는 로마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아르메나 궁정에 망명했을 때 받아주기도 했다.

아르탁세스는 초기엔 아르마비르(Armavir)를 수도로 삼았지만 기원전 166년 아르타샤트(Artashat)를 건설하고 새 수도로 삼았다. 전설에 따르면, 이 도시는 한니발 바르카의 주도로 건설되었기에 '아르메니아 카르타고'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교차검증할 기록은 없어서 신빙성은 희박하다. 그는 아버지 자리아드레스의 이름을 딴 여러 도시를 더 세웠으며, 자신이 오론테스 왕조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그는 뒤이어 아트로파테네와 이베리아에 종속되었던 지역을 공략하고 이베리아의 파르나드좀(Farnadzhom)을 살해하고 아들을 그곳의 왕위에 올렸다. 또한 소 아르메니아를 공략하고 남쪽으로 확장하다가 셀레우코스 왕조와 무력 출동을 벌였다. 여기에 동쪽으로 진군하여 메데스, 카스피해, 파우니티다, 바솔로페다를 공략했다. 그는 정복지 주민들이 아르메니아어를 공용어로 쓰도록 권장해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던 아르메니아 왕국은 곧 셀레우코스 제국의 대대적인 반격에 직면했다. 기원전 165년, 안티오코스 4세는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르탁샤트로 진격해 아르탁세스와 격돌했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군이 패배했지만, 셀레우코스군의 손실도 컸다. 이에 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봉신이 되는 대신 아르탁세스가 영토를 그대로 가지게 했다.

기원전 164년 안티오코스 4세가 죽자,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밀레투스의 티마르코스를 지원해 셀레우코스 제국이 반란을 진압하느라 아르메니아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했다. 또한 서쪽의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소국 소페네(Sophene)를 카파도키아 왕국과 분할하려 했지만, 카파도키아 왕 아리아라테스 5세 필로파토르가 소페네에 꼭두각시 군주 미트로부자네스를 새 군주로 세우면서 분할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원전 160년 아르탁세스 1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아르타바스데스 1세는 기원전 120년 파르티아명군 미트리다테스 2세의 침공에 굴복하여 파르티아의 봉신을 자처하고 아들 또는 조카인 티그라네스 2세를 인질로 넘겨야 했다. 기원전 115년 뒤를 이어 왕이 된 티그라네스 1세 역시 파르티아를 섬기며 조용히 지내다 기원전 95년 여행 중에 사망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파르티아에 "아트로파테네의 70개 계곡"을 파르티아에 헌납하는 대가로 아르메니아로 귀환한 뒤 왕위에 올랐다.

파일:아르메니아 터키.png
티그라네스 2세 시기 아르메니아의 최대 영역.

티그라네스 2세는 파르티아의 봉신으로 만족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아르메니아를 강대국으로 육성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러던 기원전 91년, 미트리다테스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파르티아는 30여 년간 샤한샤들의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국 혼란이 심해졌고, 동방에서 쳐들어온 이민족들을 막느라 다른 곳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이 틈을 타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원전 94년 아르메니아 고원을 양분하고 있던 소페네스 왕국의 마지막 군주 아르타네스를 폐위시키고 소페네스를 병합했다. 그 후 강력한 공성 부대와 중기병대를 구축하여 군사력을 강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아트로파테네의 70개 계곡을 탈환했다.

기원전 88년부터 85년까지 카파도키아,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페니키아를 공략했으며, 기원전 82년 안티오코스 12세나바테아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틈을 타 셀레우코스 제국의 본거지인 안티오키아를 포함한 킬리키아와 시리이 북부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기원전 87년에 파르티아 왕가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엑바타나를 약탈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정복 전쟁 외에 바빌론과의 부역 관계를 개선하고 아랍인과도 무역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형제를 메소포타미아 서쪽의 무역을 통제하는 니시미스의 통치자로 임명하는 등 외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기원전 80년대 후반, 그는 폰토스의 군주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맺고 미트리다테스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 미트리다테스가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에서 영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동안, 그는 동방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하고 미트리다테스에게 인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다만 전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건 자제했다.

이렇듯 영토 확장을 성공적으로 이어간 그는 자신을 샤한샤로 칭하기 시작했다. 그는 흰색과 자주색 줄무늬가 있는 튜닉과 보라색 외투를 입었으며, 항상 보석으로 장식된 티아라를 어디에서나 착용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하인을 자처한 4명의 측근에게 둘러싸였다고 한다. 그에게 정복된 국가들은 자치권을 인정받았지만 공물을 바치고 보조병을 보내야 했으며, 현지인들은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그의 의향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는 그리스 문화의 숭배자로도 유명했다. 기원전 83년부터 착공을 시작한 수도인 티그나케르타는 헬레니즘 양식으로 설립되었다. 이 도시는 22m 높이의 성벽과 마굿간을 통합한 인상적인 요새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 극장, 사냥 공원 및 유원지와 같은 편의 시설도 있었다. 그는 3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이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대부분은 카파도키아에서 왔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어가 페르시아어 및 아람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69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잔여 세력이 남아있던 프톨레마이스를 함락시키고 여성 군주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사로잡았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셀레우키아에 감금한 뒤 나중에 죽여버렸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다른 야심가들을 막으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죽인 뒤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셀레우코스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사로잡았다."


기원전 70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연전연패한 미트리다테스 6세가 아르메니아에 망명했다. 루쿨루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티그라네스는 그가 자신을 "왕중왕"이 아니라 "왕"이라 칭한 것에 분개했고, 폰토스와의 오랜 동맹을 깰 생각도 없었기에 거절했다. 이에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로 진격해 기원전 69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티그라네스의 대군을 섬멸했다. 티그라네스는 옛 수도인 아르탁사타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병력을 규합하여 또다시 맞붙었으나 또 패배했고, 미트리다테스와 함께 캅카스 산맥 너머로 도주했다.

루쿨루스는 두 사람을 추격하려 했지만, 약탈을 제한하고 힘든 행군을 강요하는 루쿨루스에게 강한 반감을 품고 있던 장병들이 대대장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선동에 따라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들은 루쿨루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비옥하기로 유명한 메소포타미아의 아르메니아 영토를 침공하도록 강요했고, 루쿨루스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자 어쩔 수 없이 메소포타미아로 남하하여 니시비스를 포위했다. 그러나 니시비스 공략은 지지부진했고, 티그라네스는 이 틈을 타 빼앗겼던 영토 일부를 탈환했다. 미트리다테스 역시 폰토스로 귀환하여 그곳에 주둔중이던 로마군을 젤라에서 요격해 7,000명을 죽이고 폰토스를 탈환했다.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가 루쿨루스를 대신하여 동방 원정에 착수했다. 이때 티그라네스 2세의 셋째 아들 티그라네스가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다가 파르티아 궁정으로 도망쳤다. 프라아테스 3세는 젊은 티그라네스를 자기 딸과 결혼시킨 뒤, 파르티아군을 맡겨 아르메니아로 가게 했다. 파르티아군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를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되지 않자 젊은 티그라네스에게 분견대를 맡긴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티그라네스 2세는 아들을 물리쳤고, 젊은 티그라네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곧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끊고 로마에 복종하기로 했으며, 폼페이우스는 그가 왕위를 유지하는 걸 허용하되 6,000달란트를 배상금으로 지급하게 하고, 젊은 티그라네스를 소페네스의 통치자로 삼았다.

기원전 65년, 티그라네스 2세는 아들 티그라네스를 체포한 뒤 로마로 추방했다. 프라아테스 3세는 이를 빌미로 삼아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탈환했다. 이후 프라아테스 3세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젊은 티그라네스를 자신에게 넘겨주고 유프라테스 강을 로마와 파르티아의 경계로 공식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고르디아네를 반환하라고 요구하면서, 젊은 티그라네스를 넘길 수 없다고 답했다. 그 후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고르디아네를 공략하고 아르메니아에 넘겼다. 그 과정에서 별다른 무력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프라니우스는 메소포타미아를 통해 시리아로 귀환하는 중 많은 병사가 탈수병으로 죽어나가는 바람에 전력을 크게 잃었다.

기원전 64년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철수하여 폰토스 왕국과 전쟁을 재개하자, 프라아테스 3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아르메니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쉽사리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양자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호소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명령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며 개입을 거부했다. 결국 두 왕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는데, 메소포타미아와 아디아베네는 파르티아의 영역이 되었고, 고르디아네는 아르메니아의 영역으로 확정되었다. 그 후 티그라네스 2세는 로마의 동맹국 군주로서 조용히 통치하다가 기원전 55년 사망했다.

티그라네스 2세 사후 등극한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기원전 54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을 도왔으나 크라수스가 카르헤 전투에서 패사한 뒤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에게 굴복하여 봉신 관계를 수립하고 자기 누이를 오로데스 2세의 장남 파코로스 1세와 결혼시켰다. 그 후 파르티아를 섬겼지만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이 파르티아의 패배로 끝난 뒤 로마와 도로 손을 잡았고,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지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보급부대가 파르티아 기병대에 습격당하여 섬멸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그는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본토로 철수했다.

파르티아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배신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를 전격 침공했다. 그는 별다른 대응도 못해보고 로마군에 체포되어 장남 아르탁세스 2세를 제외한 가족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압송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전국 각지를 약탈하는 로마군에 분노하여 아르탁세스 2세를 옹립했지만, 로마군의 공세로 토벌되었고 아르탁세스 2세는 파르티아로 망명했다.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된 개선식에 전리품 취급받은 뒤 감옥에 갇혀 지내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뒤 귀환한 클레오파트라 7세에 의해 처형되었다.

기원전 30년, 아르탁세스 2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한 틈을 타 파르티아의 지원을 받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해 로마 군단을 물리치고 아르메니아를 탈환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로마에 복수하기로 작정하고, 아르메니아의 모든 로마인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지난날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아버지의 수급을 챙기기도 했던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왕 아트타바스데스 1세와 전쟁을 벌여 대승을 거두고 아르타바스데스 1세를 사로잡았다.

그는 뒤이어 로마에 사절을 보내 지난날 부친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갔던 동생 티그라네스를 송환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를 꺾고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로마인들을 학살시킨 일을 거론하며 요구를 거절했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는 동방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느라 아르메니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기원전 20년 티베리우스에게 대군을 맡겨 아르탁세스 2세를 폐위하고 티그라네스를 새 국왕으로 세우라고 명령했다.

아르탁세스 2세의 친족들은 강대한 로마군과 싸우느니 아르탁세스 2세를 몰아내기로 작정하고,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탁세스 2세를 살해한 뒤 티그라네스 3세를 왕위에 올렸다. 티베리우스는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한 끝에 아르메니아를 독립국으로 두되 로마인들이 왕을 임명하고 왕관을 씌워줄 권리가 있다는 걸 인정받았다. 티그라네스 3세는 12년간 조용히 통치하다가 기원전 8년에 사망했다.

그 후 티그라네스 3세의 아들 티그라네스 4세와 딸 에라토근친혼을 하고 공동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반로마, 친파르티아 정책을 추진해 아우구스투스의 경계심을 자극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5년 티그라네스 3세의 동생이자 티그라네스 4세의 삼촌인 아르타바스데스 3세를 새 군주로 내세웠다. 티그라네스 4세와 에라토는 이에 맞서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의 지원으로 아르타바스데스 3세와 맞섰다. 이 지원을 받은 반란으로 기원전 2년 아르타바스데스 3세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났고 로마군과 함께 퇴각하던 중 병에 걸려 죽었다. 티그라네스 4세와 에라토는 프라아테스 4세가 로마와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지원을 중단하자 로마에 사절을 보내 용서를 청했고,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복종하고 공물을 늘리는 대가로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서기 1년 티그라네스 4세는 이민족과의 전투를 치르던 도중 전사했고, 에라토는 남편이 죽은 뒤 정치 혼란이 극심해지자 퇴위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의 왕위가 공석이 되자, 아우구스투스의 특명을 받고 동방으로 파견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왕 아리오바르자네스를 새 왕으로 세우고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프라아테스 5세와 면담해 파르티아의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생각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아리오바르자네스는 즉위 2년만인 서기 4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했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르타바스데스 4세는 아르메니아가 로마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여긴 이들의 반발에 시달렸다. 급기야 그를 지켜주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거만한 태도와 언행들로 자존심 강한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자극해 아르메니아 왕실과 귀족들까지 피해를 입히는 폭동을 유발시켰고, 폭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협상장에 들어선 순간 아르메니아인들의 매복 공격을 받고 복부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폭동은 곧 진압되었지만, 가이우스는 더 이상 아르메니아에 머물지 못하고 소아시아로 도주해 얼마 안가 사망했다. 이리하여 로마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아르타바스데스 4세는 2년 후인 6년경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외교 정책을 재검토하여 모계 쪽에서 아르탁세스 왕가와 관련이 있고 자신을 충실히 섬기는 헤로데 대왕의 손자이기도 한 티그라네스 5세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왕가의 혈통이 희미한 그를 단독 군주로 섬기길 기피해 망명 생활 중이던 에라토 여왕을 궁정으로 불려들어 티그라네스 5세와 함께 공동 왕으로 세웠다. 두 사람은 서기 12년까지 아르메니아를 다스렸지만, 아르타바노스 2세와 내전을 벌이고 있던 파르티아 샤한샤 보노네스 1세가 아르메니아로 밀려난 뒤 그들을 몰아내고 아르메니아 왕을 칭했다.

18년 보노네스 1세가 파르티아군에 의해 아르메니아에서 축출되자, 티그라네스 5세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이런 일로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묵살했고, 폰토스 왕자 제논을 '아르탁세스 3세'로서 왕위에 올렸다. 그 후 그는 36년경 모종의 사유[2]로 고발당해 목숨을 잃었다. 이리하여 아르탁세스 왕조는 멸망했다.


3. 역대 왕[편집]




  • 괄호 밖은 그리스 식, 괄호 안은 아르메니아식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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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의 영향을 받았다.[2] 당시 아르메니아의 새 왕이 된 이베리아 왕자 미트리다테스가 파르티아와 전쟁을 한창 치르고 있던 중이었기에, 파르티아와 내통했다는 혐의가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 셀레우코스 왕으로서는 '티그라네스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