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르 루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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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주요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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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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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hur Rubinstein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737 Vine Street.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hur Rubinstein
[1]

파일:Artur_Rubenstein_1968.jfif.jpg

출생
1887년 1월 28일
러시아 제국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 우치
사망
1982년 12월 20일 (향년 95세)
스위스 제네바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피아니스트
종교
무종교(불가지론)
수상
성 제임스의 검 훈장[2] (1958)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기악 독주자 퍼포먼스 (1960, 78)
레오니 소닝 음악상 (1971)
성 제임스의 검 훈장 (1972)
대통령 자유 훈장 (1976)
대영제국 훈장 명예 사령관 기사 (1977)
케네디 센터 공로상 (1978)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실내악 퍼포먼스 (1975, 76)
그래미 평생 공로상 (1994)

1. 개요
2. 생애
3. 연주
3.1. 독주
3.2. 협주
4. 이모저모
4.1. 연주에 대해서
4.2. 루빈스타인 개인에 대해서
5. 어록



1. 개요[편집]


폴란드 출신의 미국의 피아니스트.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폭넓은 레퍼토리, 화려한 테크닉, 곡에 대한 깊은 이해 모두 갖췄다고 평가된다. 네임벨류로 따지면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아르헤리치와 함께 최고로 꼽힌다. 메인 레퍼토리는 쇼팽이었는데, 지금도 피아노계에서 그의 쇼팽 연주는 권위가 막강하다.[3]

2. 생애[편집]


나는 한때 루빈스타인의 성품에 매료된 적이 있다. 루빈스타인, 그의 주변에는 마치 햇살이 빛나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가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로 그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를 알게 되었을때, 그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나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정말로 긍정적이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당시 러시아 치하에 있던[4] 폴란드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독일로 유학하여 부모와 떨어져 지냈다. 빌헬름 켐프, 겐리히 네이가우스 등을 가르친 하인리히 바르트에게 요제프 요아힘의 도움을 받아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영향을 받았다.[5] 그러나 바르트와 루빈스타인은 기질 자체가 달랐고 바르트가 좋은 뜻으로 유태인인 루빈스타인을 입양하여 자기가 가르치는 베를린의 학교의 교수직을 주겠다고 제의하자 바르트와 대단히 좋지 않게 결별하고 어찌어찌 돈을 모아 파리로 맨땅에 헤딩을 하러 간다. 거기서 좌충우돌에 주변인에게 민폐를 끼쳐 가며 성장, 젊은 시절부터 비르투오소로 이름을 높였다. 폴란드 출신 답게 평생에 걸쳐 쇼팽을 연주하였으며, 연주의 수준 역시 매우 높다. 쇼팽 외에 고전파에서 부터 근대 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보유했으며 대부분 최상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또한 루빈스타인 기준으로 '현대' 음악가의 발굴, 홍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브라질빌라-로보스가 대표적인 예. 그 외에도 시마노프스키, 스트라빈스키 등의 피아노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일단 당시에 활동하던 모든 음악가는 루빈스타인과 친분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19세기 말에 태어난 덕택인지 20세기 출생 피아니스트에 비해 낭만적인 경향의 해석을 보이지만 과하지 않아, 안티가 거의 없다. 파데레프스키, 코르토 등의 연주를 듣다가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들으면 꽤나 모던하게 느껴질 정도. 사실 루빈스타인이 젊을 때는 너무 건조하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본인의 말로는 쇼팽 연주가 가장 큰 비판을 받았는데 꿋꿋이 연주했다고.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야샤 하이페츠 와 더불어 백만불 트리오를 결성한 적이 있다. 상설 실내악단은 아니지만 틈틈이 무대에 서고 여러 음반을 녹음했다. 하지만 이 트리오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하이페츠와 루빈스타인의 음악적, 개인적 불화가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된다. 그 외에 다른 연주자, 그룹과 많은 실내악 녹음을 남겼고 퀄리티가 꽤 좋다.

어릴때부터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바람둥이로 유명했다가, 1932년에 22세 연하의 아니엘라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6] 그 중 아들 존은 배우로 나름 커리어를 쌓았는데,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미드 프렌즈 마지막 시즌 마지막 화에 산부인과 의사로 출연. 궁금하면 찾아 보자. 아버지와 붕어빵이니 찾기 쉽다.

자서전을 두 권 남겼다. 태어나서 20대 후반까지를 다룬 My Young Years, 그 후를 다룬 My Many Years. 전자는 일부 주변 인물을 가명으로 표기하긴 했지만 꽤나 진솔한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풀어 냈다는 평이 대부분인 반면 후자는 좀 엉성하고 장황하다. 젊은 시절을 다룬 책은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사망한 상태라(...)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 그랬다는 분석도 있고, 후자는 루빈스타인의 삶이 안정된 뒤의 이야기이기도 한데다 집필할 때 건강이 악화되고[7] 누가 봐도 임박한 그의 죽음보다 전에 출판하기 위해 제대로 편집을 거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반전은 그의 죽음을 지킨 여성이 아내인 아니엘라가 아니라 수십년 젊은 다른 여성이었다는 점(...) 결혼 후에도 주구장창 바람을 피워 댔는데, 정작 아내만 몰랐다고 한다.(...)


3. 연주[편집]


보통 만년의 연주가들은 테크닉의 감소를 보이는데, 루빈스타인의 경우 애초에 초인적인 신체 능력으로 밀어 붙이는 타입은 아니었고, 손에 무리가 없는 합리적인 운지법을 유지했으며, 자신의 기술에 맞지 않는 곡들은 뜯어 고치거나 (알베니스의 이베리아 모음곡이 대표적) 아예 연주하지 않았기에[8] 나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테크닉의 감소는 그다지 보이지 않고 음악적 깊이만 더해져 만년의 연주도 좋다. 다만 만년의 스튜디오 녹음들은 라이브나 젊은 시절의 녹음들과 비교해 보면 좀 조심스러운 것도 있다. 후세에 길이 남을 녹음에서 틀린 음을 치는 것을 만년에는 극도로 두려워 했다고. 편집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걸 걱정하게 되면 연주할 때 약간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흔히 간과되는 점이 있는데, 루빈스타인은 작은 체구나 '평범한' 손 크기를 가졌었음에도 남다른 손가락 길이 비율로 12도 [9] 의 범위를 무리 없이 짚을 수 있었으며, 동시대 거장들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신체 능력도 가졌었다. 협주곡들 중에서도 최상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브람스 협주곡 2번을 들어보면 엄청난 도약과 옥타브로 가득한 패시지를 순식간에 넘어간다. 60세의 나이에 녹음된 쇼팽 협주곡 1번 실황음반의 11:52-12:15구간이 또한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정확하게 옥타브를 집는 것도 힘들어 하는 구간인데[10] 폭발적인 스피드와 힘, 완벽한 강약조절을 보여준다.


3.1. 독주[편집]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57 (rec. 1963)
슈베르트, 즉흥곡 D. 899 No.4 (rec. 1973)


슈만, 카니발 Op.9 (rec. 1963)
멘델스존, 무언가 Op.67 No.4 (rec. 1950)


쇼팽, 왈츠 Op.34 No.1 (rec. 1963)
쇼팽, 마주르카 Op.50 No.2 (rec. 1952)


쇼팽, 폴로네즈, Op.53 (rec. 1950)
쇼팽, 뱃노래, Op.60 (rec. 1962)


리스트, 사랑의 꿈 3번 (rec. 1950)
브람스, 카프리치오 Op.76 No.2 (rec. 1970)


시마노프스키, 마주르카, Op.50 No.2 (rec. 1961)
그라다노스, 스페인 무곡 Op.37 No.5 (rec. 1954)


프로코피예프,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중 행진곡 (rec. 1961)
빌라-로보스, 아기의 가족 모음곡 중 2, 6, 7번 (rec. 1941)


플랑, 간주곡 FP 118 (rec. 1963)
샤브리에, 스케르초-왈츠 (rec. 1963)


3.2. 협주[편집]


생전에 '협주곡의 왕'이라 불렸을 만큼 다양한 레퍼토리의 협주곡 녹음을 남겼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K.466 (rec. 1961)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Op.58 (rec. 1947)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Op.37 (rec. 1973)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Op.11 (rec. 1953)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Op.18 (rec. 1956)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2번, Op.22 (rec. 1975)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Op.83 (rec. 1952)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Op.16 (rec. 1975)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Op.23 (rec. 1963)
슈만, 피아노 협주곡, Op.54 (rec. 1967)


4. 이모저모[편집]



4.1. 연주에 대해서[편집]


  • 곡에 대한 신선함을 잃지 않도록 연습은 하루에 3시간만 하라고(...) 젊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조언했다 (이는 루빈스타인의 라이벌인 호로비츠도 하루에 3시간만 연습했다고 한다).[11][12] 이에 대한 본인曰: "저는 그냥 태생이 굉장히, 굉장히 게으릅니다. 그래서 늘 아주 길게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 연습을 지나치게 하는 건 좋지 않아요. 그러면 준비한 곡이 주머니에서 꺼내는 것처럼 나오거든요. "아, 난 이걸 알아!"라는 마음으로 연주하면 곡에서 신선한 피가 돌지 않고, 또 청중들은 그걸 바로 알아요." "저는 연주회마다 많은 것을 그 순간에 맡겨요. 반드시 제가 예상 못한 무언가가 나와야 해요. 저는 모험과 도전이 좋아요. 예상치 못한 것들로 스스로를 놀래켜주고 싶고, 그걸 청중보다도 더 즐기고 싶어요. 그런 방식으로 음악은 새로 피어납니다. 마치 사랑을 나누는 것과 같아요. 행동[13] 자체는 언제나 같지만, 매번 색다른 경험인 것이죠."[14][15]
  • 시그니처로 팔을 들고 건반을 내려찍는 동작이 있다.[16] 마누엘 데 파야불의 춤 47년 카네기 홀 실황 2분 20초, 영웅 폴로네즈 3분 44초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저렇게 높은 지점에서 내리찍는데 건반에 손을 붙인 것 마냥 정확한 음을 낸다.
  • 쇼팽 연주의 권위자로 유명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3개의 새로운 연습곡'은 녹음했지만 Op.10과 Op.25 전곡은 녹음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까지도 쇼팽 애호가들 사이에서 틈틈히 나오는 토론 주제다. 예를 들어 Op. 10 1번을 만져본 기록은 이 영상에서(21:10부터) 잠깐 건드려 본게 전부다. 마찬가지로 전곡 녹음을 하지 않은 호로비츠는 워낙 레퍼토리가 띄엄띄엄한걸로 유명하다보니(...) 딱히 놀라울 것이 없다는 반응이 다수지만, 루빈스타인같이 쇼팽에 진심이었던 대가가 왜 스튜디오 레코딩을 하지 않았는지는 추측만 무성할 뿐[17] 미궁으로 남았다.


4.2. 루빈스타인 개인에 대해서[편집]


워낙 천재였기 때문에 일반인의 상식을 초월하는 여담이 많다.
  • "사람들이 흔히 말하길 내가 젊었을때 와인, 여자, 일(피아노)에 시간을 공정하게 배분했다고 하죠. 이건 완벽한 오해예요. 난 내 시간의 90%를 여자에 썼어요." (...)[18]
  • 완전기억능력의 소유자로, 자기가 본 악보의 커피자국까지(...) 기억했다고 한다. 좋은 예시로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적 변주곡(1885)을 연주하게 되었을 때, 이전에는 이 곡의 악보를 본 적도 없었지만 기차를 타고 가면서 악보를 펴고 무릎을 손가락으로 치면서 완성했다(...). [19]
  • 8개 국어를 아주 능숙하게 구사했다.
  • 차이코프스키의 선배인 19세기 러시아 음악계의 거장 안톤 루빈스타인과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형제와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처음 일본에 연주 여행을 갔을 때 갓 결혼한 아내와 같이 전통 다도를 체험하는데 시중을 드는 일본 여성들이 입을 벌리니 이가 전부 새까맣게 썩어 있었다며 기겁을 한 경험을 자서전에 썼다. 그 이후로 다른 언급이 없는 걸 보면 누가 제대로 말도 안 해 줘서 평생 그렇게 알고 살다 간 모양(...).
  • 생활고로 인해 20세인 1907년에 베를린의 한 호텔 방에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벨트에 목을 매었는데, 다행히 벨트가 끊어지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미국의 폴란드계 작곡가인 프레데릭 제프스키(Frederic Rzewski, 1938-2021)가 이 자서전의 내용을 기반으로 "베를린의 루빈스타인(Rubinstein in Berlin)"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나레이션을 하는 굉장히 독특한 형식의 곡이다.#


5. 어록[편집]


  • 기자: "연주회에서 항상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가 원곡인) 바흐를 연주하면서 왜 녹음은 안하죠?" 루빈스타인曰: "평론가들이 왜 '원곡대로 치지 않냐'고 뭐라잖습니까. 애시당초 바흐의 오리지널 피아노 악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가 원작인데 피아노로 연주하면 당연히 완전히 다른 페달링과 울림이 필요하죠.[20] 출처 (인터뷰 후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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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란드어식으로는 Artur Rubinstein[2] Order of Saint James of the Sword.[3] 특히 녹턴 음반이 거의 이견이 없을 정도로 최고로 평가된다.[4] 당시 폴란드는 무자비하게 찢겨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에게 분할 지배당하고 있었다.[5] 루빈스타인 본인은 꽤나 부정적으로 회고하지만 바르트에게 배운 켐프의 증언에 따르면 루빈스타인의 연주 자세, 음악적 태도 등이 완전히 바르트가 가르치는 그대로였다고.[6] 아니엘라는 폴란드의 유명 지휘자 에밀 무이나르스키의 딸[7] 시력을 거의 잃어서 많은 부분을 구술해야 했다[8] 그래도 레퍼토리는 미친듯이 방대했다. 뭐, 이 레벨끼리 따지는 거지 루빈스타인도 충분히 괴물이니 그가 연주할 수 없는 곡들은 기량 문제라기보다 취향 문제인 것도 있고.[9] 도 ~ 솔까지. 라흐마니노프가 13도인 걸 감안하면 정말 거대한 수치다. 단, 루빈스타인은 그의 오른손 조형을 보면 손이 딱히 크거나 그냥 손가락이 다 길거나 한 건 아니지만 손가락 비율상 애지가 일반인과 비교하자면 압도적으로 길다. [10] 쇼팽 콩쿠르를 봐도 이 구간에서 꼬이거나 힘들어 하는 파이널리스트들이 대다수다. 리스크를 줄이려고 일부러 템포를 줄이는데도 대부분 불안정하다. [11] 요컨데, 매너리즘을 경계하는 동시에 고도의 집중력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짧고 굵게 연습하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이 양반은 기교적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얄팍한 루바토를 하는 적이 없다고 봐고 무방한데, 그러한 거침없는 기교는 얄팍한 깊이의 연습으로 얻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단, 피아니스트들 중에 자신의 연습시간을 낮잡아 보고하는 경우가 완전 없는 건 아니니 진실은 저 너머에. [12] 본인의 아이들에게 2류 피아니스트로 기억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1934년의 여름부터 한동안 하루에 6, 8, 9시간 연습을 하며 그 곡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맛봤다고 회고했지만, 이것 또한 그가 이미 보유한 레퍼토리를 다시 공부하는 시간이었기에 '새로운 곡들을 마스터하기 위한 연습시간'이 아니다.[13] 악보[14] "Arthur Rubinstein Dies in Geneva at 95". The New York Times. November 21, 1982.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November 14, 2013. Retrieved November 6, 2011.[15] "UALR Public Radio – KLRE Classical 90.5 – Pianist Arthur Rubinstein". Klre.org. Retrieved January 7, 2012.[16] 루빈스타인 스스로는 Swan dive라 불렀다.[17] 오늘날의 클래식 피아노계가 워낙 좁다보니, 영미권 클래식 포럼 등지에 가보면 꽤 신빈성 있어보이는 카더라통신들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출처가 없으니 공신력이 없다.[18] "Arthur Rubinstein Dies in Geneva at 95". The New York Times. November 21, 1982[19]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피아노에 앉아서 저 때 완성한 운지법을 정확히 기억해내는 것이 또 함정이다. [20] 즉, 하프시코드로는 불가능한 폭 넓은 강약과 페달링에 대한 비난인데, 오늘날에도 상당한 논쟁거리다.루빈스타인 본인의 바흐 연주에 대한 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