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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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파일:Arthur_Schopenhauer_by_J_Schäfer,_1859.jpg

출생
1788년 2월 22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단치히
(現 폴란드 포모르스키에그단스크)
사망
1860년 9월 21일 (향년 72세)
독일 연방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국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Flag_of_the_German_Confederation_%28war%29.svg.png 독일 연방
직업
철학자
서명
파일: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서명.svg파일: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서명_화이트.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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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프랑크푸르트 중앙 묘지
모교
에르네스티넘 고타 김나지움 (중퇴)
괴팅겐 대학교 (의학과)
베를린 대학교
예나 대학교 (철학 / 박사)
경력
베를린 대학교 강사[1]
연구 분야
미학, 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논리학, 고전문헌
가족
아버지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 (1747~1805)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 (1766~1838)
여동생 아델 쇼펜하우어 (1797~1849)
종교
무종교(무신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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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일본어
アルトゥル・ショーペンハウアー
중국어
阿瑟·叔本华
그리스어
Άρθουρ Σοπενχάουερ
러시아어
Артур Шопенгауэр
아랍어
آرثر شوبنهاور
힌디어
आर्थर शोपेनहावर
세르비아어
Артхур Сцхопенхауер
조지아어
არტურ შოპენჰაუერი
페르시아어
آرتور شوپنهاور
아르메니아어
Արթուր Շոպենհաուեր
히브리어
ארתור שופנהאואר


1. 개요
2. 연보
3. 사상
3.1. 의지의 형이상학
4. 영향
4.1. 철학사적 영향
4.2. 심리학사적 영향
4.3. 문학사적 영향
4.4. 음악사적 영향
4.5. 그 외 영향을 미친 인물
5. 논란
5.1. 여성혐오
6. 어록
7. 읽을 만한 글귀
8. 저서
8.1. 한국어 번역서
9. 에피소드
10. 여담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img02.jpg 젊은 시절 (1815년)


독일[1]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어받았다고 확신했다. 또한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을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철학(인식론)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에 출간하였다. 대학강의에서 헤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서 줄곧 독자 연구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이후 <소품과 부록>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의 서적들은 주장이 굉장히 명쾌하다. 동시대 인기 철학자인 헤겔과 비교했을 때 헤겔은 현학적인 문장으로 읽는 사람을 난해하게 하는 반면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명료하고 지시성이 있다. 그의 저서에서 언어철학적 입장이 잘 드러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1820년 대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불교에 관해 알게 되었다. 이 종교들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과 칸트가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먼 과거의 동양 사상가들이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환경, 언어,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학의 과제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 철학의 세련된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한 철학자이자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표명한 독창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 19세기 말에 유행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2]

2. 연보[편집]


년도
사건
1788년
2월 22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793년
2차 폴란드 분할로 단치히가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자 가족이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1797년
여동생 아델레가 출생했다. 아버지가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친구 집에 쇼펜하우어를 맡겼고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2년 간 지내며 프랑스어를 익혔다. 훗날 쇼펜하우어는 이 시기가 매우 행복했다고 추억한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프랑스어를 확실히 익히길 원했고 결과에 만족스러워했다.
1799년
프랑스에서 돌아와 상인 양성기관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4년 간 공부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1800년
아버지와 함께 하노버, 칼스바트, 프라하, 드레스덴을 여행했다.
1803년
상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은 상인이 되기 싫어하는 쇼펜하우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런던에 도착하여 신부 랭카스터의 집에서 머물며 영어를 익혔다.
1804년
프랑스를 여행했으며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돌아왔다. 쇼펜하우어는 여행 도중에 사색하며 많은 일기를 썼는데 진지한 고민이 많았다. 단치히에서 상인 실습을 시작했으나 무관심했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며 문학, 수학, 역사 등을 독학했다.
1805년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자살한 걸로 추정됨.
1806년
아버지 사망 후, 가족이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쇼펜하우어만 함부르크에 남아서 상인 실습을 지속했다. 쇼펜하우어는 몰래 근무지를 이탈하여 골상학으로 유명한 프란츠 요제프 갈의 공개강연을 들으러 가기도 했고 아버지의 희망대로 상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1807년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한 후에 고타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라틴어그리스어를 엄청난 열정으로 학습했다. 고전어를 가르친 교사들은 쇼펜하우어가 미래에 뛰어난 고전학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쇼펜하우어는 1년도 못가 김나지움을 자퇴했다.
1808년
쇼펜하우어는 에어푸르트를 방문했다. 마침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국제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어느 극장에서 나폴레옹이 주최한 연극들이 공연되었는데 쇼펜하우어는 관람할 기회를 얻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는 나폴레옹에게 욕설을 해대더니 연극이 끝난 후에는 나폴레옹에게 극찬을 해대느라 호들갑떠는 여성관객들(지위 높은 귀족여성들)을 쇼펜하우어는 신랄하게 비난했다.
1809년
괴팅겐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함.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더 흥미를 두었다. 대학에서 화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 언어학, 법학, 역사, 비교해부학, 생리학 등 여러 강의에 적극 참여해서 공부함. 집에 돌아와서도 사색하며 꼼꼼히 공부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학교의 몇몇 천박한 교수들의 강의보다도 이미 죽고없는 과거의 위인들이 남긴 작품들이 더 가치있을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강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과 논평을 많이 썼으며 몇몇 교수들의 의견을 비판하고 논리적으로 박살내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습득한 당대의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1810년
철학자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의 강의를 들었다. 슐체에게 특히 플라톤칸트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스승 슐체의 진지한 조언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끼침.
1811년
어머니가 당시 독일 문학계의 거장인 크리스토프 빌란트에게 쇼펜하우어가 철학 전공을 못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부탁함. 78세인 빌란트는 23세의 쇼펜하우어와 만나서 설득은커녕 쇼펜하우어의 태도에 감명받아 자상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함. 가을에 베를린 대학교로 전학했다. 베를린대학에서는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생리학, 시학, 어류학, 식물학, 조류학 등 여러 강의를 들음.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당대의 유명 학자였던 셸링, 피히테의 사상을 공부했으나 회의를 품고 이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내었고 일기에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특히 피히테에 대해서는 "대중 앞에서 웅변을 토해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심오한 사상가인 척하는 사기꾼" 정도로 평가했다. 반면에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 잘 통한 일도 있었는데 바로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의 강의였다. 볼프가 주도하는 고대 그리스 역사와 철학 강의에 쇼펜하우어는 존경심을 표했다.
1812년
플라톤, 임마누엘 칸트 등 여러 사상가를 본격적으로 탐구함.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의 영국 사상가를 깊이 탐구함.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지만 매우 실망하고 말았다.
1813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연합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사이에 전쟁이 재발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을 떠나서 루돌슈타트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이 논문을 예나튀링겐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증정했다. 괴테는 이 논문을 보고나서부터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지지하였다. 수개월 동안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에 관해서 연구하고 토론했고 괴테는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괴테는 가끔 쇼펜하우어를 자기 집에 초대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1814년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우파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를 읽고 탐구했다. 어머니와 쇼펜하우어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이 일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나 편지교류는 가끔했다.
1816년
괴테와 색채론에 관해 교류하여 얻은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가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실험을 토대로 뉴턴의 색채론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괴테는 제자에게 비판받은 이 일을 베를린의 친구 슐츠에게 편지로 알렸고 약간 언짢았으나 쇼펜하우어를 대견스러워했다.
1818년
일생의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다. 자신의 책이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던 쇼펜하우어는 1년 동안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자신의 책을 몰라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동시대 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차올랐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며느리(오틸리에)와 친분이 있던 자기 여동생의 편지를 통해 괴테가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직접적으로 칭찬하지는 않았다. 책 출판을 기념삼아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1819년 봄에는 나폴리를 방문했다. 나폴리에서는 영국 청년들과 교류했다. 쇼펜하우어는 영국을 평생 동안 동경했으며 영국인들조차 쇼펜하우어가 영국인인 줄 알 정도로 완벽한 영어발음을 구사했다. 어머니가 파산위기에 처하자 속히 귀국하여 도와주웠으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낭패를 겪고 말았다.
1819년
베를린 대학교에 강사직을 지원했다.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희망했다.
1820년
채용 여부가 결정되는 시범 강의에서 통과함. 당시 50살이었던 노련한 헤겔이 쇼펜하우어와 강의 중에 약간 논쟁했다. 강의 계획은 1820~1822, 1826~1831년까지 수립돼 있었지만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끝남. 이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은 강단학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몽상적인 이론을 퍼트려서 대중을 속여먹는 저열한 사기꾼, 대중들의 두뇌를 해치는 넌센스 삼류작가, '철저히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이라며 비난했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는 자기 책에서 독일 젊은이들과 자기 세대 사람들이 헤겔의 이론을 공부하느라 두뇌를 손상시켰고 인생을 허비했다며 매우 한탄하고 있다. 더군다나 헤겔의 이론은 당대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하며 정치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라는 것을 대학교에서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여겼고 교수들의 파벌 자체를 증오했다.[3]
1822년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이탈리아의 문화, 예술, 환경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서 배우고 기록했다.
1823년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옴. 여러 질병과 청각장애를 겪었는데 가장 울적한 시기를 보냈다. 뮌헨에서 겨울을 보냈다.
1824년
가슈타인(스위스), 만하임, 드레스덴에서 체류함. 쇼펜하우어는 "멀쩡히 잘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나와 수준이 대등하다고 여기는 인간들과 가급적 사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일기에 쓰며 고독한 심정을 드러냈다. 겨울에 데이비드 흄의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등을 번역할 계획이었으나 도와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악평이 좀 나오기도 했으나 작가 장 파울은 호평했다.
1825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우울한 나날 속에서 스페인어를 열심히 학습해나갔다. 번역가로서 스페인어책을 번역하기도 함. 언어능력만큼은 나날이 좋아졌는데 예전에 익힌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외에 스페인어에도 매우 익숙해졌다.
1831년
이 해에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833년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정착함. 유행이 지난 옷을 항상 입고 다녔으며 애완견을 데리고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고 혼잣말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의 희한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쇼펜하우어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쯤에 쇼펜하우어는 여동생과 어머니와 편지교류를 했고 작품활동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1835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세상을 떠난 괴테를 위해 기념비 건립 계획을 세웠다. 쇼펜하우어는 당국에 괴테 기념비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인류를 위해 온몸으로 활동한 정치인들, 군인들, 개혁자들같은 위인들을 기념하려면 전신상으로 해야하지만 머리를 써서 기여한 문학가, 철학자, 과학자들을 기념하려면 흉상을 제작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완성된 괴테의 전신상 기념비는 매우 볼품없었고 훗날 미술사학자 프란츠는 이 기념비에 대해 '국가적 재앙'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1836년
자연과학이 증명해낸 것과 자신의 학설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 매우 꾸준히 학문에 매진했다.
1837년
쇼펜하우어는 <순수이성비판> A판(1판)을 B(2판)판보다 중시하여 칸트전집 출판에 개입했다. 칸트전집 출판에 관여한 로젠크란츠 교수는 쇼펜하우어의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1판 원고를 실어 출판했다.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8년
모친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72살의 나이로 사망함.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9년
현상논문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함.
1840년
현상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를 가지고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으로 지원했지만, 학술원은 '이 시대의 대단한 철학자들'인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당한 판정을 했고 수상하지 못함. 이후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판정'이라 취급했고 이 판정에 반론하는 글을 추가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헤겔을 심각하게 비난한 것은 인정하지만 헤겔이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1841년
두 현상논문을 묶어서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함.
1842년
여동생 아델레를 20년만에 만남.
1844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판이 완성됨. 제1판의 재판과 함께 출판함.
1845년
<소품과 부록(Parerga und Paralipomena)>를 쓰기 시작함.
1846년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우어를 만나 제자로 지냈는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열혈 추종자다. 특히 법조인들이 열혈팬이 되었는데 이들은 <관념론의 잘못된 근거>에 "세계가 후회의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번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올 것"라고 썼다. 쇼펜하우어는 판사 요하네스 베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을 글로 쓰지 않았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냄.
1847년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 번역을 비판하며 가급적 해설서도 참고하지말고 그 나라 언어를 배워서 원서를 볼 것을 강조한다.
1849년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남. 여동생 아델레가 사망함.
1851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소품과 부록>를 수 년간 집필한 끝에 출간함.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은 얼마못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고 많이 팔려나갔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1853년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인 존 옥센포드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소개하여 최초로 영국에 쇼펜하우어를 알림. 독일의 여성 언론인 린트나가 이를 다시 독일어로 번역하여 베를린의 포스신문에 발표하였다.
1854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헤겔의 '교수 파벌' 때문에 독일 철학계가 오염되었다고 엄청난 비판을 하며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려는 것은 인생낭비에 불과하니 자신의 사상과 칸트의 사상을 공부하라는 충고를 한다.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40여년 간 독일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기극을 사람들이 눈치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칸트 이후에 등장한 간사한 사기꾼들이 써낸 철학서적들과 한심한 논쟁들을 통해 하나의 진리라도 밝혀졌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하찮은 철학교수라 불렀던 셸링이 사망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니벨룽겐의 반지'의 헌정본을 보냈다. 쇼펜하우어가 바그너를 알게 됨.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게 혹평을 받고 냉대받았으나 개의치않고 기뻐했다.
1855년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가 '쇼펜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상 과제를 제시함. 여러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함.
1857년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가 본 대학교와 브레슬라우 대학교에 개설됨.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이 영국, 프랑스에 번역됨. 쇼펜하우어는 이 시절의 심정을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8년에 이 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박람회를 구경했다. 유럽에는 매우 드문 오랑우탄 한 마리가 전시되었다. 자주 찾아가서 관찰했으나 관찰할 기회를 너무 늦게 만났다며 한탄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오랑우탄을 볼 기회를 꼭 잡으라고 촉구했다.
1858년
쇼펜하우어 70살 생일 파티가 열렸고 신문 기사에도 생일파티 소식이 실렸다. 유럽 각지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를 뒤늦게 회원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1859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출간됨.
1860년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폐렴 증상을 겪었고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사망했다.[4]

3. 사상[편집]





3.1. 의지의 형이상학[편집]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표상의 세계'과 '의지의 세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지만 사실 '표상의 세계'는 인간이 인식함에 있어서 왜곡된 가상[5]에 불과하므로 사실상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세계'를 세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 표상의 세계: 인식론으로 파악한 세계. 인식 과정만으로는 칸트가 말한 '물자체'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그 '물자체'에 관련된 인식 표상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 표상은 충분근거율[6]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표상들의 관계를 조건 짓는 충분근거율에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이 있다.
  • 의지의 세계: 나의 신체로부터 알게되는 세계. 유추해 보면 무생물의 '힘'조차도 일종의 '의지'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의지'는 세상의 본질이므로 칸트의 '물자체'는 바로 '의지'와 다를 바 없다. '의지'는 충분근거율에 의해 조건 지어지지 않으므로,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는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의지다. 그것을 우리가 억지로 인식론의 관점에서 하나하나 구별하여 나누는 것일 따름이다. 이를 개별화의 원리라고 한다. 이 개별화의 과정에서 충분근거율이 개입한다. 충분근거율이란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을 말하는데, 하나의 의지를 시간과 공간으로 특정짓고, 원인과 결과로 구분하며, 논리적인 규칙을 세우고, 행위에 따른 동기를 찾는 것을 통해서, 개별적인 것으로 나누어져 인식된다는 것이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다소 논쟁적인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의지가 맹목적으로 요동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다양한 단계들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의지는 본래 하나의 의지이긴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여러 의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지들은 플라톤이데아와 비슷한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이를 '의지의 객관화' 또는 '이념(idee)'이라고 부른다.[7] 그리고 이 의지의 이념들이 충분근거율에 의해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으로 구분되어 인식될 때야 비로소 개체들로 특정되어 개별화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꽃을 예로 들면, 이데아와 같은 꽃의 본질이 있고, 이것이 꽃이라는 의지의 '이념'이다. 이 '이념'을 충분근거율을 통해 '인식'해야 비로소 각각의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꽃으로 나누어진다. 즉, 의지와 표상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이념이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보통 우리는 표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표상의 세계에서 원인, 동기, 이유, 구별 등의 개별화의 논리로 인해 각 개체들로 구분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할 뿐이고 그 이후에 자신의 행동을 논리적인 것으로 합리화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게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즉, 구분된 각 개체들의 표상 밑에는 의지가 숨겨져 있어서 의지의 명령대로 행동하고 있지만 각자는 구분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각 개체는 자신이 지닌 의지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서로 싸우게 된다. 이로서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난다. 그러한 세상은 자신을 개별체라고 생각하는 맹목적인 부분 의지가 자신의 표상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이기적인 세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적인 의지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표상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게 되며, 그로 인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괴롭고 고통스럽다.[8]

그러나 우리가 개별적인 것을 뛰어넘어 직관적으로 의지의 이념을 포착해낼 수 있다면, 이 이념에 대한 통찰을 통해 결국 그 의지가 하나의 우주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러한 앎에서 '나'와 '너'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이념에 대한 통찰을 통해 서로가 하나의 의지임을 알게 된다면, 서로는 서로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이로서 서로를 구분함으로써 발생하는 '욕망으로 인한 고통'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광기를 가진 예술가적 천재만이 자신의 관심, 의욕, 목적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순수하게 직관에 몰입하여 이러한 이념을 포착해낼 수 있다고 한다.[9] 그리고 관중들은 그 천재의 예술 작품을 '관조'함으로써 세계가 하나의 의지임을 깨닫고는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완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조'의 방식은 일시적이다. '관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표상의 세계'에 빠져 욕망을 추구하고 욕망에 의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더 본질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에 의하면, 그 방법이란 의지의 방향을 되돌려 의지 상태를 무(無)로 만드는 전략으로서, 의지가 일어날 때마다 그 의지를 부정하는 것, 즉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삶 자체가 '표상이라는 가상'이 만들어낸 고통이기 때문에,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10] 이런 개체적 의지의 부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의지 전체가 본래 하나임을 깨닫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서 벗어나 욕망이 만들어내는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쇼펜하우어는 그것이 불교의 열반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4. 영향[편집]


쇼펜하우어는 철학분야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과학분야, 예술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852년에 영국의 존 옥센포드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리뷰> 4월호에 쇼펜하우어 사상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존 옥센포드는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등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 쇼펜하우어가 알려졌고,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찰스 다윈같은 영어권 지식인들이 쇼펜하우어를 탐구했다.

'아르투어'는 영어로는 '아서'(Arthur)가 되는데 이것은 사업가였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자 영국친화적인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까지 전파되어 고독한 생활을 추구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신의 저서에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했고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틀에 박힌 것을 혐오하는 개성이 중요하다고 강변했고 에머슨은 불교와 우파니샤드에 관심이 많아졌다.

4.1. 철학사적 영향[편집]


독일 철학자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친구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 전집 출판에 힘을 썼고, 쇼펜하우어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인도철학과 우파니샤드에 대한 연구자로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도이젠은 직접 인도로 여행을 갔고 이에 대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도이젠은 플라톤, 칸트, 인도철학, 쇼펜하우어에 대한 저서를 남겼고 학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했다.[11]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 속하는 19세기 후반에는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19세기 초반의 일부 철학 교사들은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쇼펜하우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20세기 초의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에게 명백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12]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례적으로 국가주의[13]

에 얽매이지 않았고 독일의 작가들을 훤히 잘 알았던 만큼이나 영국과 프랑스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능통했다. 여타 철학자들보다도 믿음직한 철학을 추구한 예술가와 문학가들에게 쇼펜하우어가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철학을 전개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비록 의지를 메타자연학의 토대로 삼았어도 윤리적으로는 악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악한 의지는 염세주의자에게는 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중략) 쇼펜하우어의 의지 이론은 많은 철학자들에게 수용되었는데 특히 독일의 니체나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등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루소칸트가 그와 유사한 의지이론을 준비했지만 그토록 순수한 의지이론을 가장 먼저 설파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였다.[14]


20세기 초기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했다.[15]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 쇼펜하우어와 찰스 다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다.[16] 칼 포퍼는 에르빈 슈뢰딩거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슈뢰딩거는 인도철학에 몰두했으며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책 이름을 짓는 일에 쇼펜하우어가 지은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는 웬만한 철학서적은 대부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 책을 읽다가 칸트순수이성비판을 만났는데 칸트의 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쇼펜하우어의 여러 저서들을 읽었고 그 덕분에 칸트의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은 자신이 태어나서 최초로 진지하게 읽고 공부한 두꺼운 철학서적이라고 말했다.[17]

4.2. 심리학사적 영향[편집]


쇼펜하우어 찬미자였던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에두아르트 하르트만은 자신의 저서 <무의식의 철학>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심리학적인 주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프로이트정신분석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억압'에 대해서 자신보다 먼저 쇼펜하우어가 잘 설명했다는 것을 인정했다.[18]근대 심리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선사했으며 심리학이 정식 학문으로서 자리잡기 전에 심리학적인 주장을 철학서적에서 펼쳤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물을 산소수소로 분해한 라부아지에의 작업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면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분석되기 어려웠던 "자아 혹은 영혼"이라 불리는 것을 이질적인 두 가지 성분[의지와 지성]으로 분해하는 작업은 철학의 발전에 기여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헤겔의 거만한 문체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탐구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 헤겔은 마치 자신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다."[19]


4.3. 문학사적 영향[편집]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는 문학계일 것이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프랑스의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그리고 독일 작가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영미권 작가인 토마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창작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의 소설에서 나타나기도 하며, 발자크의 소설 <루이 랑베르>에서의 주인공 루이 랑베르가 주장한 철학의 내용이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자세히 읽어나갔고 자주 읽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주의를 뺏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읽었다. 스피노자니체같은 철학자들의 책도 읽었다. 내가 철학에 빠진 계기는 쇼펜하우어 덕분이며 오로지 쇼펜하우어 덕분이었다. 쇼펜하우어보다 헤겔을 더 좋아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20]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 직전인 1869년 여름에 자신의 친구이자 쇼펜하우어 책을 번역한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번 여름에 내가 뭘 했는지 알고계십니까?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강력한 기쁨을, 여태껏 한 번도 몰랐던 감동을 만끽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었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수강한 여느 학생도 내가 이번 여름에 발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앞으로 나의 이런 의견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쇼펜하우어야말로 모든 인간들 중에 위대한 천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당신은 쇼펜하우어가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무언가를 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것은 경이롭고도 생생하게 성찰되는 온전한 세계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쇼펜하우어의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 번역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계에는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21]


단편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기 드 모파상,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영국의 윌리엄 서머싯 몸,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가들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이후에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조지 버나드 쇼, 루이지 피란델로, 사무엘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는 철학자는 별로 없다. 예술,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카를 마르크스조차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당연히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22] 젊은 시절에 니체는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여 읽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쇼펜하우어를 평가한다.

오늘날 문화가 이토록 천박하지고 황폐해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비옥하고 건강한 토양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도처에는 먼지와 모래뿐이니 모든 것은 마비되고 탈진해서 죽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한 자락 둘데 없이 고독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상징은 뒤러가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죽음과 악마와 동행하는 무장 기사'이다. 무쇠처럼 굳센 눈빛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자신의 끔찍한 동행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개와 함께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뒤러(미술가)가 묘사한 이 기사가 바로 우리의 쇼펜하우어와 같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했다.


4.4. 음악사적 영향[편집]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1859년에 나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게 무관심했으므로 바그너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1854년에 친구이자 시인인 게오르그 헤르베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들고 바그너를 찾아갔다. 헤르베크는 바그너에게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해주었다. 바그너는 이것을 한 번 읽었고 감동받았다. 바그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년 동안 4번이나 통독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 니벨룽의 반지와 '존경하는 마음과 함께'라는 자필 헌사를 보냈으나 쇼펜하우어는 어떤 답장도 바그너에게 보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의 작품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바그너와 함께 관람한 적도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 대해서 '바그너는 음악이 뭔지 잘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평생 동안 쇼펜하우어를 존경했다.[23]

4.5. 그 외 영향을 미친 인물[편집]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시절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동료들의 성향, 생각, 농담, 여자 얘기 등에 동조하지 않았고 이런 쓰레기같은 동료들의 행태보다 더 싫은 것이 없다고 회고했다. 책벌레로 유명했던 히틀러는 오히려 방공호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이나[24] 열심히 읽고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고민했다고 한다.[25]

쇼펜하우어가 노년기에 읽은 글 중에는 <타임스>에 실린 <종의 기원>에 관한 서평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다비트 아셔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글을 써서 쇼펜하우어를 감동시켰다. 아셔는 쇼펜하우어와 편지교환을 자주 했는데 쇼펜하우어로부터 30여통의 편지를 받았다. 아셔는 <쇼펜하우어와 다윈주의>라는 논고도 발표했었다. 찰스 다윈은 이 논고를 읽다가 아셔가 인용한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자신의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 인용하기도 했다. 다비트 아셔는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의지'이론과 유사한 다윈의 '자연선택' 등의 개념이 결국엔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의 사위이자 그의 전기 작가인 루돌프 케이저는 1920년대 후반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마이클 패러데이, 쇼펜하우어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젊은 시절부터 칸트나 쇼펜하우어같은 철학자의 책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26]

5. 논란[편집]



5.1. 여성혐오[편집]


몸집이 작고, 어깨가 좁고, 엉덩이가 넓고, 다리가 짧은 인종[27]

에게 아름다운 성이라는 이름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적 충동에 의해 지성이 흐려진 남자뿐이다. 성의 아름다움 전체가 이 충동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고 부르는 대신에, 미적이지 않은 성으로서 여성을 설명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훨씬 많다.

『소품과 부록』의 「여성에 대하여』 중에서.[28]

쇼펜하우어는 근대철학자 중에서도 여성혐오주의자라는 비판을 자주 받는 편인데, 『소품과 부록』[29]의 「여성에 대하여 (Über die Weiber)」 이라는 에세이에서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30] 그는 이 에세이에서 "여성은 유치하고, 천박하며, 근시안적이므로 어린 아이들 수준에 맞는 간호사선생의 역할에 딱 어울리"며 "종의 번식을 위해서만 창조된 자질을 지녔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복종하는 것에 걸맞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자들은 마음속으로 돈을 버는 것은 남자의 일이고 그것을 쓰는 것은 자신의 일"이라는 믿음이 마음속 깊게 박혀 있고, "재능이 있을지는 몰라도 항상 주관적이고 감정에 휘말려 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각이 요구되는 천재는 될 수가 없다"고 단정짓는다. 게다가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교활함과 거짓말이 타고났으며", 이런 까닭에 "여성의 근본적인 결점은 정의감이 없다"는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한다.[31]

쇼펜하우어는 일부일처제도 부정적으로 보는데, 그것은 "남성의 권리는 절반으로 줄이면서 의무는 배로 늘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성이 결혼하는 이유는 "성적 충동으로 남성의 지성이 흐려져서다." 일부일처제는 여성에게도 좋지 못한데, 일부다처제를 실시하는 나라에서는 모든 여성이 부양을 받는 반면, 일부일처제를 실시하는 나라에서는 "결혼할 여성의 수가 제한되어 있어 수많은 여성이 생계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양받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 중에 그나마 "상류층 여성은 노처녀로 무위도식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하류층 여성들은 감당하기 힘든 중노동을 하며 살아가거나 매춘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또한 여성이 현실적 조건에 맞춰 결혼을 하더라도, 인간은 본성상 "자신에 대한 타인의 견해를 너무 지나치게 중시"하므로, 타인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의 현실에 여성은 불명예스럽고 서글픈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남성의 조건을 깐깐하게 따진다면 자신이 좋아하지 않은 남성과 억지로 혼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거나 평생 노처녀로 시들어 가다 죽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남성들간의 동성애를 옹호하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는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세 번째 확장판(1859) 「성애의 형이상학」에 관한 장에 추가한 부록에서 쇼펜하우어는 "남성들간의 동성애(pederasty)가 병든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이점이 있다"고 쓴다. 노년의 성욕이 동성애로 감으로써 고령 출산으로 인한 병든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이 악덕[32]은 자연의 목적과 결과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나,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관심사인 문제에서 보다 큰 악[33]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것은 실제로 바로 이 목적들에 기여한다"고 진술한다. 쇼펜하우어는 젊은 때의 동성애 보다 나이 들었을 때의 동성애가 많은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4]

단, 그가 이러한 글을 썼던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돈과 명예만을 보고 결혼한 어머니[35]가 줄곧 병약했던 아버지를 돌보기는커녕 파티만 즐겼었다는 것[36]이 평소에 못마땅했었는데, 아버지의 자살 이후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사교계에서 활약을 시작하자 이에 대한 반감이 극심해지면서 여성혐오적 성향이 그에게서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참석한 여성들로부터 늘 무겁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받았던 것[37]과 어머니가 여동생 아델은 극진히 아끼면서 자신에게는 매정하게 대했던 것[38][39] 등 주변 여성들로부터 받은 여러 부정적인 경험들로 인해 그 혐오가 더욱 짙어지게 된 것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자가 쇼펜하우어에게 시비를 걸고 화가난 쇼펜하우어가 그 여자를 밀치자 그 여자는 이를 법정에 고소하여 합의금을 타내기도 하는 등의 사건을 겪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쇼펜하우어가 연애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는데, 여러 명의 여자와 연애를 했고, 50살에는 십대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하기도 했었었다. 그러나 그의 연애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결혼은 평생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독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도 유명해진 말년에 이르러선 조금 바뀌는데, 여성혐오적인 내용을 책에 적어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이 여성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것이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겼다. 사실, 자신의 욕망과 그로 인한 삶의 고통을 담담하게 인정하면서도 연민의 감정으로 타인을 대할 때 그런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당시 여성들에게 묘한 위안을 가져다 주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그는 유명해짐에 따라 그를 보러온 여러 재능있는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면서 여성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편견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친구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와의 대화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여성에 관한 저의 최종 판결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여자가 대중을 멀리하거나 대중을 무시할 수 있다면 그 여자는 끝없이 성장해서 남자 이상이 될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40]


6. 어록[편집]


인류는 내게서 몇 가지를 배웠고 그걸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철학에서는 행간의 눈물과 울부짖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와 다들 죽고 죽이느라 아우성치는 끔찍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철학이 아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다.[41]


인간의 가혹하고 불쌍한 많은 운명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점이다.[42]


불행과 고뇌를 겪을 때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위안은 우리보다 더 불행한 자를 바라보는 것이다.[43]


인생이란 어떻게든 끝마쳐야 하는 힘든 과제와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인생을 견뎌 냈다"라는 말은 멋진 표현이다.[44]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만족이 부족할수록 남들에게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란다.[45]


독서는 스스로 사고하기의 단순한 대용품에 불과하다. 독서를 하면 남의 생각에 자신의 사고가 끌려다닌다.[46]


행복을 구체적으로 누릴 능력이 더 이상 없는 사람은 마음을 온통 돈에 바친다.[47]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들의 진정한 연관성을, 종종 그것들이 일어나는 동안이나 그 직후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한다.[48]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이 단 한 번뿐이고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임을 항시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49]


인간은 헛되이 신들을 만들지만, 신들에게 구걸하고 아부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의 의지력이 초래할 수 있는 것만에 불과하다.[50]


인간은 자신의 결점이나 악덕은 깨닫지 못하고 타인의 결점이나 악덕만 알아챈다.[51]


7. 읽을 만한 글귀[편집]


고뇌를 추방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고뇌의 형태를 바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고뇌의 형태는 원래 부족과 곤궁, 삶의 유지를 위한 근심이다. 극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이 형태를 지닌 고통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고통은 연령이나 사정에 따라 교대로 수많은 다른 모습을 취하며 성 욕동, 열정적인 사랑, 질투, 부러움, 증오, 불안, 명예욕, 금전욕, 질병 등으로 나타난다. 고통이 결국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없게 되면 싫증과 무료함이라는 슬픈 회색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것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가지를 시도한다. 마침내 이 싫증과 무료함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 이전의 여러 고통 중 하나에 다시 빠져 고통스런 춤을 처음부터 다시 추게 될 것이다. 모든 인생은 고통과 무료함 사이에 이리저리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430


건강은 외적인 어떤 재화보다 월등히 중요하므로 정말이지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완벽한 건강과 조화로운 신체에서 비롯되는 차분하고 명랑한 기질, 분명하고 생기 있으며 통찰력 있고 올바르게 파악할 줄 아는 분별력, 온건하고 부드러운 의지, 그에 따른 한 점 부끄럼 없는 양심, 이런 것은 지위나 부로 대신할 수 없는 장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인간 자신을 이루는 것, 홀로 있을 때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것, 아무도 그에게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그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이나 남의 시선에 비친 그의 모습보다 분명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2~23


운명은 변할 수 있어도 자신의 성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상한 성격과 뛰어난 두뇌, 낙천적 기질과 명랑한 마음, 튼튼하고 아주 건강한 신체와 같은 주관적인 자산, 즉 "건강한 신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이 우리의 행복에서 으뜸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외적인 자산이나 명예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앞에서 든 자산을 키우고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자산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이러한 좋은 특성은 즉각 보답을 주기 때문이다. 즐거워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그가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 이유다. 이러한 특성만큼 다른 모든 자산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반면 이런 특성 자체는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젊고 잘생긴 데다 부자며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행복한지 판단하려면 그가 명랑한지 알아보아야 한다. 반면에 그가 명랑하다면 젊든 늙었든, 몸이 반듯하든 굽었든, 가난하든 부자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행복한 것이다. 유년 시절 나는 어느 고서를 뒤적이다가 "많이 웃는 자는 행복하고, 많이 우는 자는 불행하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매우 단순한 말이다. 비록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소박한 진리를 담고 있어서 나는 그 글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명랑함이 우리를 찾아오면 언제라도 문을 활짝 열어줘야 한다. 명랑함이 잘못된 때 찾아오는 법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8


얼핏 살펴보아도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는 고통과 무료함임을 알 수 있다.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사실상 진폭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 두 가지 적수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양자가 이중의 적대 관계, 즉 외적 혹은 객관적 적대 관계와 내적 혹은 주관적 적대 관계에 있는 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외적으로는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따라서 하층 계급 사람들은 궁핍, 즉 고통과 끊임없이 때로는 정말이지 절망적인 싸움을 벌인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3


인간처럼 물질을 필요로 하고 여러 욕구로 이루어진 종족에게는 부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노골적으로 존경과 숭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 심지어 권력조차 오로지 부를 얻는 수단으로만 여겨져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아울러 다른 모든 것이 돈을 벌려는 목적 때문에 무시되고 망가지는 것, 예컨대 철학이 철학 교수에 의해 망가지는 것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의 소망이 주로 돈에 향해 있고, 인간이 무엇보다 돈을 사랑한다고 종종 비난받기도 한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고 변신에 능한 [[프로테우스처럼 변화무쌍한 우리의 소망과 다양한 욕구의 대상을 언제라도 충족시켜 주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다른 재화는 단 한 가지 소망, 한 가지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음식은 배고픈 사람에게, 와인은 건강한 사람에게, 약은 환자에게, 모피는 겨울에, 여자는 젊은이에게 좋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재화일 뿐이다. 즉 상대적으로 좋은 것에 불과하다. 돈만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다. 돈은 구체적으로 단 하나의 욕구에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욕구 전반에 소용되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51~52


타인의 의식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에게는 상관없다. 우리 역시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얕은지, 개념이 협소하고 신조가 천박한지, 견해가 왜곡되고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알면 타인의 견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또한 그런 자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그런 자가 하는 말이 자신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되자마자, 모두가 하는 말이 때로 얼마나 하찮게 들리는지 경험으로 알면 타인의 견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형편없는 인간들이 위대한 인물을 깎아내리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의 견해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그들에게 지나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58


세상에서 가장 값싼 종류의 자긍심은 민족적 자긍심이다. 민족적 자긍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사실로 자랑할 만한 개인적 특성이 부족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수백만의 사람과 공유하는 것을 굳이 손에 넣으려고 할 턱이 없다. 의미 있는 개인적 장점을 지닌 사람은 언제나 자국민의 결점을 보고 있으므로 오히려 자신의 민족이 지닌 결점을 가장 또렷하게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무엇 하나 자랑할 만한 게 없는 가련한 멍청이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가 속한 민족을 자랑하는 것을 붙든다. 그럼으로써 그는 힘을 회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국민 특유의 온갖 결점과 어리석음을 필사적으로 옹호하려고 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65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대충 알아보려면 그가 어떤 일에 즐거워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일에 슬퍼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 자체로 볼 때 사소한 일에 슬퍼할수록 더욱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사람이라야 사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말로 불행한 상태에 빠지면 그런 사소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22~123


미래의 재앙 중 우리를 정말 불안하게 하는 것은 올 것이 확실하고, 오는 시기 역시 확실한 재앙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재앙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재앙이란 일어날 가능성이 있거나, 어쨌든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하거나, 일어날 것이 확실하지만 일어날 시기는 완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종류를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한시도 마음 편한 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올 것이 불확실하거나 오는 시기가 불확실한 재앙 때문에 생활의 안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올 것이 불확실한 재앙은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오는 시기가 불확실한 재앙은 그렇게 금방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28


우리는 즐거운 생활을 할 때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보내다가, 막상 좋지 않은 시기가 닥쳐야 비로소 옛날과 같은 시절이 돌아왔으면 하고 바란다. 명랑하고 즐거운 순간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언짢은 얼굴을 하고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보내 놓고, 나중에 우울한 시간이 찾아오면 좋았던 옛날을 헛되이 그리워하며 탄식을 내뱉는 것이다. 그러는 대신 지금은 냉담하게 그냥 흘려보내는 심정으로, 어쩌면 조급한 심정으로 떠밀어 보내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견딜 만한 현재, 다시 말해 일상적인 현재를 존중하는 것이 좋다. 이때 명심할 점은 현재가 바로 지금 신격화된 과거 속으로 흘러들어 가 그 후부터는 바로 그곳에서 불멸의 빛에 에워싸인 채 기억으로 간직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특히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이 기억은 베일을 걷으며 우리의 진실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29


인간은 너그럽게 대하면 버릇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그 때문에 타인을 너무 관대하거나 다정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돈을 꿔달라는 부탁을 거절한다고 해서 친구를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정작 돈을 꿔주면 금방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소 거만하게 소홀히 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쉽게 친구를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너무 친절하고 싹싹하게 대하면 상대가 오만하고 참을 수 없는 태도를 취해 결국 의를 상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66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떤 내적인 원칙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성격이란 절대로 교정할 수 없다. 그런 원칙에 의해 인간은 같은 상황이 되면 언제나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절교한 친구와 다시 화해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친구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절교의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행동을 더욱 뻔뻔스럽게, 자신이 상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임을 몰래 의식하면서 다시 되풀이할 것이다. 해고했던 하인을 다시 고용할 때도 마찬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상황이 변했는데도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 관계가 바뀌게 되면 신속하게 신조와 태도를 바꾸어 버린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70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는 모두 비밀로 간주해야 하고, 친한 사람에게도 그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전혀 모르게 놓아두어야 한다. 아무리 무해한 문제라도 그들이 알면 나중에 뜻하지 않게 불리한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별력을 드러낼 때는 말보다 침묵이 낫다. 침묵은 현명함의 문제고, 말은 허영심의 문제다. 두 가지가 올 기회는 똑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이 가져다주는 지속적인 이익보다는 말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만족을 선호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큰소리로 한마디 하면 사실 가슴이 후련해진다. 하지만 버릇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 자꾸 그러다가는 생각이 말과 친해지고 허물이 없어져 남과 대화할 때 자기도 모르게 생각이 말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우리의 생각과 말 사이에 틈을 크게 벌려 두는 것이 현명하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81


"격한 어조로 말하지 마라"라는 처세가의 오랜 원칙은 자신이 한 말의 해석을 타인의 분별력에 맡기라는 뜻이다. 일반 사람들은 분별력이 부족하므로 그 자리를 뜬 뒤에야 해석을 내릴 수 있다. 반면에 "격한 어조로 말하라"라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라는 뜻이므로, 모든 일은 원래 의도와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의 바른 태도와 친절한 어조로 말하면 무례한 내용이더라도 직접적인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83


인생의 전반기를 지배하는 성격이 행복에 대한 충족되지 않은 동경이라면 후반기를 지배하는 성격은 불행에 대한 우려다. 인생의 후반기가 되면 온갖 행복이란 환영과 같은 반면, 고뇌는 현실적이라는 인식이 다소나마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때문에 그쯤 되면 적어도 이성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면 향락보다는 고통이 없고 확실한 상태를 추구한다. 나는 청년 시절에 초인종이 울리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고 기뻐했지만, 훗날 나이가 들어서는 대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리면 오히려 "무슨 귀찮은 일이 있으려나?"하고 두려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99


산 너머 반대편 기슭에 잇는 죽음은 산을 오를 때는 보이지 않는다. 청년기에 명랑하고 삶의 의욕에 차 있는 것은 부분벅으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산의 정상을 넘어서면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던 죽음이 실제로 눈에 보인다. 그러면 곧바로 삶의 활기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삶의 의욕도 감퇴해 청년기의 오만함이 물러가고 음울한 근엄함이 지배해, 얼굴에도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가 젊을 때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든 인생이란 무한하다고 생각해, 시간도 그런 식으로 다루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을 경제적으로 이용한다. 노년이 되면 하루를 보낼 때마다 교수대로 한 발짝씩 끌려가는 범죄자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청년기 입장에서 보면 인생이란 무한히 긴 미래이고, 노년기 입장에서 보면 매우 짧은 과거다. 그래서 인생이란 처음에는 사물이 오페라글라스의 대물렌즈를 눈앞에 댄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접안렌즈를 눈앞에 댄 것처럼 보인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늙어 봐야, 다시 말해 오래 살아 봐야 한다. 시간 자체도 청년기에는 훨씬 더디게 흘러간다. 그 때문에 우리 인생의 첫 4분의 1은 가장 행복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가장 긴 시기이기도 하므로, 어느 시기보다 많은 추억을 남긴다. 그래서 추억 이야기를 할 때는 누구나 그 다음 두 시기를 합친 것보다 이 첫 4분의 1 시기에 대해 할 얘기가 더 많을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01~202


생명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우리가 서른여섯 살에 이르기까지는 그것의 이자로 살아가는 자에 비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 생명력이 다 떨어져도 내일이면 다시 생긴다. 그렇지만 서른여섯 이후부터는 자신의 자본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연금 생활자의 처지와 같다. 처음에는 사태의 변화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지출한 돈 대부분이 여전히 저절로 원상 복구된다. 이때 발생하는 미미한 적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그러다가 이러한 적자가 점차 늘어나 눈에 띄며, 적자 폭 자체가 하루가 다르게 커진다. 적자가 증가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 모든 오늘이 어제보다 더 가난해지는데, 이러한 상황이 멈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리하여 떨어지는 물체처럼 감소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 급기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여기서 비유로 든 생명력과 재산 두 가지가 정말로 함께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하면 참으로 슬픈 경우다. 나이가 들면서 소유욕이 강해지는 것ㄴ 바로 그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05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힘이 자꾸만 떨어지는 것은 물론 슬픈 일이지만 그런 현상은 필연적인 동시에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죽음의 준비 작업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죽음이 너무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고령에 이르러 얻는 가장 큰 이득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병에 의하지도 않고 경련을 수반하지도 않으며 아무런 느낌도 없는 매우 안락한 죽음 말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14


우리 인생의 여러 장면은 거친 모자이크 그림과 같다. 가까이서 보면 아무런 매력이 없고 멀리서 보아야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열망하던 것을 얻으면' 그것이 공허한 것임을 알게 되어,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것을 기대하며, 동시에 때로는 지나간 것을 후회하는 심정으로 그리워하기도 한다. 반면에 현재는 다만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목적에 이르는 길로서 아무것도 아닌 걸로 경시된다. 그 때문에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의 끝 무렵에 이르러 한평생 임시로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다지 존중하지도 즐기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 보낸 것이 바로 기대에 차서 살아온 그들의 인생임을 깨닫고 놀라워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인생행로는 대체로 희망에 우롱당하며 죽음을 껴안고 춤추게 되어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51~252


더없이 행복하게 꿈꾸는 유년 시절, 즐거운 청년기, 고통스러운 장년기, 노쇠하고 때로는 애처로운 노년기, 죽음에 이르는 병의 고통, 마지막으로 죽음과의 싸움, 이런 사실로 볼 때 인간의 생존이란 그 결과가 점차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하나의 오류처럼 생각되지 않는가? 인생을 환멸로 파악하는 게 가장 옳을 것이다. 만사가 그렇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55


우리는 도살업자가 자기들을 하나하나 고르는 줄도 모르고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양과 같다.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즐기는 중에는 운명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액운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질병, 박해, 빈곤, 불구, 실명, 광기, 죽음 등과 같은 액운을. (중략) 개개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곤궁이나 무료함과의 투쟁일 뿐 아니라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적대자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싸우면서 살다가 손에 무기를 든 채 죽음을 맞이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58


인식 자체에는 언제나 고통이 없다. 고통은 의지만 겨냥하는데, 의지가 억제당하고 방해받고 차단될 때 고통이 생긴다. 그렇지만 이러한 억제에 인식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 (중략)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그 자체로는 온갖 고통과 무관한 인식에 의해 의지의 억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64


생식 행위가 어떤 욕구나 성적 쾌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고 합리적인 숙고에 의해 일어난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인류가 과연 존속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히려 태어나는 세대를 가엾이 여겨 생존이라는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하지 않을까? 또는 적어도 냉혹하게 그런 짐을 부과하는 것을 꺼리지 않을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66


인간이란 애당초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라 해도 세계가 우리의 마음을 서로에 대한 아량으로 챋우는 데 적합하다는 것은 대체로 확실하다. 우리는 그러한 평가를 받는 인간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면 인간끼리 서로를 부를 때 '아무개 씨', '아무개 선생'이라고 하는 대신 '고통의 동지'라고 하는 게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고 상대를 가장 올바로 평가하며 가장 필요한 것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그 말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그 때문에 누구나 빚지고 있는 관용, 이내, 보호, 이웃 사랑을 상기시킨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72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란 어떤 실체를 없애 버리겠다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의욕하지 않는 행위,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의욕해 온 것을 더 이상 의욕하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질, 사물 자체인 의지를 의욕하는 행위 속에서, 의욕하는 행위를 통해 알고 있으므로 이러한 행위를 중단한 뒤 그 의욕이 계속해서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행하는지 말하거나 파악할 능력이 없다. 그 때문에 의욕의 현상인 우리에게는 의지의 부정이 무(無)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82


인간의 탐욕이란 각 개인이 우연히 서로 상대방을 방해해 한쪽에는 재해를, 다른 쪽에는 해악을 끼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죄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탐욕은 이미 원래 본질적으로 죄가 되어 배척받아 마땅한 것이다. 따라서 삶에의 전체 의지 자체가 배척받아 마땅한 의지이다. 세상에 가득찬 온갖 전율과 비참함은 중생의 전체 성격에서 비롯되는 필연적 결과고, 그러한 성격에 의해 삶에의 의지는 인과율의 끊임없는 연속으로 나타나며 그 성격에 동기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객관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온갖 전율과 비참함은 삶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단순한 주석인 셈이다. 우리의 생존 자체가 죄를 함축하고 있음을 죽음이 증명하고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85


스스로 사고하기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과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 사이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큰 차이가 있다. 사람마다 원래 두뇌의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독자적 사고에, 어떤 사람은 독서에 끌리는데, 그 차이 때문에 두 가지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끊임없이 커진다. 다시 말해 독서는 우리가 순간적으로 갖는 정신의 방향이나 기분, 너무나 낯설거나 이질적인 사고를 마치 도장 찍듯 정신에 강요한다. 이때 정신은 전혀 그러고 싶은 충동이 없고 기분이 나지 않는데도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생각하도록 외부로부터 심하게 강요당한다. 반면에 독자적 사고를 하는 경우 정신은 순간적으로는 외부의 환경이나 어떤 기억에 좀 더 좌우된다 해도 자기 자신의 충동을 따른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환경은 독서와 달리 어떤 특정한 사고를 정신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천성과 그때의 기분에 맞는 것을 생각하도록 소재와 계기를 제공해 줄 뿐이다. 따라서 용수철에 무거운 짐을 계속 놓아두면 탄력성을 잃듯, 많은 독서는 정신의 탄력성을 몽땅 빼앗아 간다. 그러니 시간이 날 때마다 아무 책이나 덥석 손에 쥐는 것은 사고를 못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학식을 쌓을수록 사람들 대부분은 원래의 자신보다 더욱 우둔하고 단조로워지며, 그들의 저작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이러한 독서 습관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38


이따금 우리는 크게 애써 스스로 사고하고 다방면으로 조합해서 천천히 알아낸 진리나 통찰이 어떤 책에 그대로 쓰인 것을 편리하게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사고해서 알아낸 지식은 책에서 거저 얻은 것에 비해 100배는 더 가치 있다. 그렇게 해야만 그 진리는 불가결의 부분이자 살아 있는 구성 요소로 우리 사고의 전체 체계에 들어와, 완전하고 확고한 관련을 맺으며, 그 근거와 결론이 모두 이해되어 우리의 전체 사고방식의 색깔, 색조, 특징을 띠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진리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바로 때 맞추어 나타나므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해 두 번 다시 사라져 버리는 일이 없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39


제1급의 정신을 지닌 소유자들의 특징적인 자질은 모두 직접 판단을 내린다는 점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의견은 모두 그들 자신이 스스로 사고해 얻은 결과이며, 어디서나 말솜씨를 보더라도 그런 사실이 잘 드러난다. 따라서 그들은 독일 제국에 직속된 영주들처럼 정신의 제국에 직속되어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영주에 예속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독자적인 특징이 없는 그들의 문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스스로 사고하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군주와 같다. 그는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결정하며, 자신을 넘어서는 사람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판단은 군주의 결정처럼 자신의 절대적 권력에서 유래하며,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한다. 군주가 타인의 명령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 사고하는 자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자신이 재가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효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온갖 종류의 지배적인 견해, 권위, 편견에 사로잡힌 속된 두뇌의 소유자는 법이나 명령에 묵묵히 복종하는 민중과 같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44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은 물론 문학에서도 그릇된 주의나 방식 또는 작풍이 유행하고 경탄을 받는다. 천박한 두뇌의 소유자들은 그런 것을 받아들이고 익히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통찰력 있는 자는 그런 사실을 인식하고 경멸한다. 그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몇 년 후에는 대중도 진상을 파악해 현재의 유행을 바보짓이라 인식하고 그것을 비웃는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58


이해되지 않는 글의 가면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오직 독일에서만 통용되는 그 가면은 피히테에 의해 도입되어 셸링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마침내 헤겔에 의해 최고 정점에 도달했다. 그 가면은 항상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글을 쓰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반대로 중요한 사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친근하게 여겨진다. 신비화는 그 속에 심오한 뜻이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큰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온갖 기술을 사용하는 데는 지력이 없어도 전혀 상관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줄 때 지력이 필요한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68


진리는 적나라할수록 더없이 아름답고, 그것이 주는 인상은 간단한 표현일수록 더욱 심오하다. 첫째로, 그래야 진리는 부수적인 사상에 의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독자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래야 독자는 수사적 기교에 농락당하거나 기만당하지 않고, 전체 효과가 사실 자체로부터 시작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76


인간의 행복한 상태라는 것은 대체로 일종의 나무숲과 같다. 멀리서 보면 무척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고, 나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자주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437


기억 속에 단단히 새겨 놓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직접적으로든, 또는 실례나 단순한 비유 또는 유사한 것 등으로서, 되도록 구체적인 것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좋다. 모든 구체적인 것은 단지 추상적으로 생각한 것이나 단순히 말 이상으로 훨씬 더 단단히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읽은 것보다 경험한 것을 훨씬 더 잘 보존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453


8. 저서[편집]


제목
발간 연도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52]
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1813년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
Über das Sehen und die Farben
1816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53]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Vol. 1
1818년/1819년
논쟁적 토론술[54]
Eristische Dialektik: Die Kunst, Recht zu Behalten
1831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55]
Ueber den Willen in der Natur
1836년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Ueber die Freiheit des menschlichen Willens
1839년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Ueber die Grundlage der Moral
1840년
윤리의 두 가지 근본 문제[56]
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thik
1841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개정판)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Vol. 2
1844년
소품과 부록[57]
Parerga und Paralipomena
1851년

8.1. 한국어 번역서[편집]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나남출판, 2010. - 김미영의 역서는 모두 완역본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 - 2019년에 출간 200년 기념 전면 개정판으로 부록이 추가되어 개정판으로 나왔다.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아카넷, 2012.
  •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책세상, 2019
  • 쇼펜하우어. 《토론의 법칙》. 최성욱 옮김. 원앤원북스. 2016.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09. - 일부만 번역된 편역본이다.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인생론》. 권기철 옮김. 동서문화사, 2016. - 편역본이며 내용에 오류가 약간있으나 무시하고 읽어도 지장없으며 책값이 매우 저렴하고 읽을거리가 많아 쇼펜하우어를 공부하는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하다. 쇼펜하우어가 독일어 편역한 스페인의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격언집이 첨부되어 있다.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문장론》. 김욱 옮김. 지훈, 2005. -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에서 글쓰기 및 비평에 관한 부분만 솎아낸 책이며 일본어 중역서이지만 추천할 만하다.
  • 헬런 짐먼. 《쇼펜하우어 평전》. 김성균 옮김. 우물이있는집, 2016(원서는 1876년 출판).
  • 뤼디거 자프란스키 《쇼펜하우어》(부제:쇼펜하우어와 철학의 격동시대). 정상원 옮김. 이화북스. 2020(원서는 1987년 출판. 2018년에 나온 꿈결 출판사의 "쇼펜하우어 전기" 판본은 절판되었다.). 쇼펜하우어 평전으로서 걸작으로 꼽힌다.
  • 쇼펜하우어.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욱 편역. 포레스트북스, 2023.

9. 에피소드[편집]


25세의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의 살롱에서 만난 인물 중 괴테에게 가장 매혹되었다. 이들의 만남은 예나의 어느 연회장에서 이루어졌다. 연회에 참석한 여성 몇몇이 쇼펜하우어를 놀려대며 궁시렁대는데도 쇼펜하우어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은 채로 사색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때 고상하게 보이는 괴테가 킥킥대는 여성들에게 다가가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여성들의 대답을 들은 괴테는 이렇게 타일렀다. "쇼펜하우어를 그냥 놔둬.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도무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해질 테니까." 괴테는 쇼펜하우어만 자신의 집으로 조용히 불러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를 매우 존경했고 괴테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생각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오랜 세월 동안 과민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쇼펜하우어가 6살이던 시절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우는 아들"을 산책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발견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을 집에 버리고 떠났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에 살 때는 잠자다 미미한 잡음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서 권총을 집어들었다. 그 이유는 1848년 3월 혁명 당시 '폭도'[58]들이나 도둑들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수염을 면도해주는 이발사도 전혀 신뢰하지 않았었다. 전염병에 민감하여 결벽증도 있었던 것 같다. 외식하러 갈 때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한 잔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자신이 준비한 잔을 가져가서 사용했다. 자신의 재산 관련 계산서나 수표에도 결코 독일어를 쓰지 않았다. 자신의 지출 내역 관련 기록은 영어로 기록했고 자신의 사업 서류들을 그리스어라틴어로 쓰기도 했다. 자신의 귀중품들을 비밀 장소에 숨겨뒀고 강도를 피하려고 가짜 이름표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자신의 채권들을 엉뚱한 문서에 숨기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이런 성향을 인정하고 절망하기도 했고 졸렬한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성향으로 추정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동안 고전 철학과 고전 문학을 집중해서 읽었다. 또 철학ㆍ과학ㆍ문학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읽었다. 이탈리아 작가들 중에는 단테, 아리오스토, 마키아벨리 등도 좋아했지만 특히 페트라르카를 가장 좋아하며 그의 시는 무척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책에 대한 피상적인 해설서나 엉터리 번역서들을 경멸했다.그러면서 쇼펜하우어 본인은 번역활동을 해서 독자들에게 해외 서적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괴테의 파우스트 구절을 영어로 번역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세르반테스돈키호테스페인어로 읽었고 스페인 작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치만 헤겔 같은 교수들이 영국 사상가들의 책을 제대로 연구도 안하며 엉터리 번역서나 참고하는 사기꾼들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번역을 주로 혐오했던 것은 사실이다.

쇼펜하우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로베르트 호른슈타인이라는 음악가가 1855년에 쇼펜하우어 자택을 방문했다. 이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인 젊은 작곡가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회상》이라는 책을 남겼다. 호른슈타인은 이 책에서 스승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렸다. 호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다른 예술가나 예술 분야의 권위자들을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 때였다. 소설가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동네 주민들에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청년 시절부터 입어 온 유행이 지난 외투를 입고 다녔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모습과 쇼펜하우어의 애완견인 푸들 '아트만'은 프랑크푸르트의 명물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항상 이런 식의 차림으로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며 산책을 했다. 칸트의 성실한 산책 이야기가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듯 애완견과 같이 산책하는 쇼펜하우어의 모습이 마치 인격이 좋은 주인과 충직한 애완견처럼 보여서 유명해졌다.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웬만하면 평안한 기분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산책을 꼬박꼬박 했다. 쇼펜하우어는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걸어다닐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걷던 동네 주민들은 가끔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매일 점심밥을 먹고 나서 플루트를 불었다고도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피안》에서 쇼펜하우어와 플루트에 대해서 언급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 사실은 쇼펜하우어가 청년 시절부터 악보를 술술 읽고 모차르트 음악 연구에 몰두한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음악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음악 철학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인 것이다. 바그너는 베토벤 기념 논문인 '베토벤'에서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문학이나 조형 예술 등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명쾌하게 음악이 다른 예술 분야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이렇게 썼다.…"

덴마크의 사상가 쇠렌 키르케고르의 '절망'이라는 말과 쇼펜하우어의 '고뇌'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키르케고르는 말년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키르케고르가 남긴 많은 일기 속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감격적인 글들이 남아있다. 키르케고르의 《순간》이라는 책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헤겔에 대한 비판, 맹목적인 낙천주의, 근대과학의 오만함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키르케고르와 쇼펜하우어의 공통점이다. 키르케고르는 죽기 2년 전에, 그러니까 1853년 정도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50년대 중반의 일이다. 독일 브레슬라우 대학교의 켈바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자연과학의 관계'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쇼펜하우어에 대한 비평과 책들이 출판되었다. 영국에서는 쇼펜하우어 책의 일부가 편역되어 떠돌았고 프랑스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특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서적 보다는 통속적이고 명쾌한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는 '소품과 부록'라는 책이 더 인기를 끌었다. 쇼펜하우어의 자택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도 이 시기에 쇼펜하우어를 방문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존경과 칭찬의 편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사람도 꽤 있었다. 1858년에는 쇼펜하우어의 70살 생일 잔치가 열렸고 이 때에 쇼펜하우어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독일 작가 테오도어 폰타네의 절친 빈케라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은으로 만든 잔을 생일 선물로 주었다. 괴테의 며느리였던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책 출판에 대한 축하 편지를 썼다.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여동생과도 친했고 쇼펜하우어가 젊었을 때부터 괴테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를 응원해준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 편지를 받고 오틸리에 괴테에게 감격에 찬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마그데부르크의 법률고문관으로 재직한 프리드리히 드루그트는 쇼펜하우어의 논문과 저서들에 감격하여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수제자가 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는 쇼펜하우어 사후에 유고를 정리하여 《토론의 법칙》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쇼펜하우어 전집을 출판했다. 사법관이었던 아담 도스라는 사람은 어린 나이인데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에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와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변호사 빌헬름 그비너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격하여, 먼저 찾아와 진지한 이야기를 해서 쇼펜하우어와 친해진 사람이었다.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의 유언을 집행했고 쇼펜하우어 집안의 유산을 유언에 따라 잘 처리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평평한 화강암을 이용해 묘비를 만들어 줄 것을 생전에 희망했고 묘비에다가 자신의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새기지마라고 말했다. 이 묘비는 현재 프랑크푸르트 시립 중앙묘지에 묘비는 잘 안장되어있다.이후에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전기를 최초로 쓰기도 했다. 이 시기에 조각가 엘리자베스 네이가 찾아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대리석으로 만들 흉상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이 흉상을 보고 쇼펜하우어는 만족스러워 했다. 이 흉상의 진품은 현재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시의 네이미술관에 있다.[59]

어느날 쇼펜하우어는 폐렴 증세가 있었으나 평소대로 일찍 기상하여 쾌활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가정부는 항상 그랬듯이 집안을 환기시키느라 창문을 열어놓고 집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분쯤 지나서 거실로 들어온 주치의는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차분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쇼펜하우어를 발견했다. 1860년 9월 26일 쇼펜하우어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 앞에서 거행된 장례식의 참가인원은 별로 없었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모였다. 어느 개신교 목사가 장례식을 주관하며 추도문을 낭독했고 이어서 쇼펜하우어의 절친인 빌헬름 그비너가 준비한 추도문을 낭독했다.

한 세대가 지나도록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함께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낯선 이방인으로만 여겨지던 이토록 희귀한 고인의 관은 실로 비상한 감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누구도 고인의 혈육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인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살았고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고인의 앞에 있는 무엇이든지 그렇듯 일평생 고독을 감내한 고인을 이토록 뒤늦게나마 위로해줄 수 있기를 삼가 기원합니다. 죽음의 캄캄한 어둠에 파묻혀 외롭게 방치되는 친구나 적을 바라볼 때조차 우리의 눈은 즐길 수 있는 향락거리를 찾기도 하지만, 이윽고 우리의 다른 모든 감정은 '생명의 원천들을 알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소진됩니다. 지식은 고인과 언제나 함께하면서 고인을 장수하도록 도와준 친구였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고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한 고인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의 껍데기 같은 외면들을 무시했을뿐더러 그러한 자신의 태도가 자신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킬 가능성마저 개의치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심장을 지닌 이 심오한 사상가는 흥겹게 놀다가 돌연히 성난 아이처럼 일평생 쉬지 않고 내달리면서 고독했고 오해받았으되 스스로에겐 진실하기만 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더불어 그것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교육마저 충분히 받은 고인의 모험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인은 자신이 누리던 그런 (특히 아버지로부터 받은) 특혜에 언제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유일한 소망은 그런 특혜에 보답하는 것이었고 그런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명을 추구하느라 평생 애썼습니다. 고인은 세상에서 설정했던 목표를 오랫동안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고인의 이마에 씌워진 월계관은 고인의 인생이 황혼에 접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고인에게 수여된 것입니다. 고인의 확고한 신념은 애초부터 고인의 영혼에 뿌리박힌 것이었습니다. 고인은 오랜 세월 동안 남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꿋꿋하게 고결한 길을 걸었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인은 에스드라스(Esdras)에 기록된 "진리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위대하고 우월하다"는 명제를 명심하여 고생하다가 어느덧 백발노인이 된 것입니다.


10. 여담[편집]


  • 쇼펜하우어가 자살을 옹호한다는 오해가 많은데,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범죄라고 낙인찍으려고 하는 것에 반대했을 뿐, 자살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60]

  • 극도의 동물애호가였다. 개에 목줄을 채우는 것마저 동물 학대라고 말했을 정도.
[1] 엄밀히 말하면,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당시의 독일 지역은 함부르크, 프로이센 등의 여러 나라들로 나뉘어 있었고, 독일 제국으로 통합되어 '독일' 이라는 나라가 등장했을 때는 쇼펜하우어가 사망하고 11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여러 소왕국들을 옮겨 다녔기 때문에 편의상 독일로 표기되었다.[2]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박은미 역, 2016, 쇼펜하우어 파트.[3] 토론의 법칙, 최성욱 역 참조. 해설:쇼펜하우어는 "대중을 현혹하는 협잡꾼 헤겔과 그 일당"이라는 식으로 매번 비난했다.[4]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역, 2015, 연보 참조.[5] 그러한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이를 '마야의 베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마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우파니샤드에서 현실세계가 기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6] 충족이유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용어 사용에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는 한국에서 쇼펜하우어 번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 홍성광의 용례를 따른다.[7] 그렇다고 이데아와 이념이 같다고는 볼 수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완벽한 형상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반면에, 쇼펜하우어의 이념은 광기를 가진 천재적인 예술가가 직관으로써 포착할 수 있는 이상적인 형상의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차이점은 복잡하니 원문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8] 프로이트와 라캉이 쇼펜하우어의 욕망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물론 프로이트 자신은 부정하긴 하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사실상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고 본다.[9] 쇼펜하우어는 이 주체를 순수한 인식 주관이라고 말하는데, 쇼펜하우어는 모든 인식이 가상(표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외적으로 천재는 이러한 이념을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헷갈릴 수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본질인 의지는 물자체로서 우리가 인식할 수 없고, 인식 자체는 가상(표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념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는데, 인간은 의지를 인식할 수 없지만 의지와 관계맺는 이념은 아주 제한적으로 천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의지는 인식불가능하지만 의지에 관계맺는 이념은 매우 제한적으로 인식가능하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것이 모순된 주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모순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원전을 볼 때 이 부분이 헷갈리더라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10]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삶에의 의지 der Wille zum Leben'다. 그가 말하는 '삶에의 의지'는 흔히 '살려는 의지 der Wille zu leben'와 혼동되고 있는데,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 욕망을 끊는 것이라면, '살려는 의지의 부정'은 식욕과 같은 생리적 욕구를 끊는 것이다. 즉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면 욕망, 번뇌가 사라지므로 해탈에 이르는 반면, '살려는 의지'가 마음속에서 소멸하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즉 쇼펜하우어는 삶에의 의지, 즉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지, 살려는 의지, 즉 생존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739)[11] 랄프 비너,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 최흥주 역..[12]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284쪽, 브라이언 매기의 말. The Philosophy of Schopenhaur,Oxford, 1983.[13] 쇼펜하우어는 국수주의를 상당히 비난했는데 독일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를 선동한 피히테가 대표적이다. 독일 문학가 토마스 만은 저서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트' 에서 쇼펜하우어와 헤겔을 비교하며 아예 나치와 파시즘의 발흥에 헤겔의 국가주의가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러셀은 이런 맥락에서 당대 철학자들 중 국수주의에서 벗어난 쇼펜하우어를 언급했다.[14]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쇼펜하우어 파트, 1946.[15]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 영향에 대한 설명 참조..[16] 칼 포퍼, 끝없는 탐구, 박중서 역, 20쪽.[17] 칼 포퍼,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147쪽.[18]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19] 카를 구스타프 융, 기억 꿈 사상(자서전), 조성기 역, 김영사, 133쪽~134쪽..[20] Si le grain ne meurt. Collection Folio. Paris : Gallimard, 1972..[21] Aylmer Maude, The Life of Tolstoy:First Fifty Years, 1917..[22] 다만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쇼펜하우어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니체는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받았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쇼펜하우어에게 비판적이게 된다.[23] 브라이언 매기, 트리스탄 코드, 김병화 역, 2005, '8장 바그너, 쇼펜하우어를 발견하다' 부분 참조.[24] 안타깝게도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집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통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25] 요아힘 페스트, 히틀러 평전, 137p, 1997 푸른숲[26] Rudolf Kayser, Albert Einstein: A Biographical Portrait, 2011.[27] 여성을 가르킨다[28] It is only a man whose intellect is clouded by his sexual impulse that could give the name of the fair sex to that under-sized, narrow-shouldered, broad-hipped, and short-legged race; for the whole beauty of the sex is bound up with this impulse. Instead of calling them beautiful there would be more warrant for describing women as the unaesthetic sex.[29] 한국에서는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으로 번역되어 있다.[30] Based on his essay "On Women" (Über die Weiber), Arthur Schopenhauer has been noted as a misogynist by many such as the philosopher, critic, and author Tom Grimwood. In a 2008 article published in the philosophical journal of Kritique, Grimwood argues that Schopenhauer's misogynistic works have largely escaped attention despite being more noticeable than those of other philosophers such as Nietzsche. (Thomas Grimwood, 『The Limits of Misogyny: Schopenhauer, "On Women"』)[31] 하지만 쇼펜하우어 자신도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그 이자로 평생을 살았으며, 타고난 불안증과 강박증 때문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툴렀고, 연민의 사상을 펼쳤으나 가족과의 다툼과 시민혁명에 대해서는 연민을 억제하고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려고 노력했었으므로 정의감이 투철하다고도 볼 수 없다. 또한 카페에서 매번 감정적 토론을 펼치면서 객관적인 진리를 무시하고 인신공격과 논리적 오류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이기는 것을 즐기기도 했으며, 복종에 맞서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것을 주장했으나 자신의 어머니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표출했었다. 이런 까닭에 그의 「여성에 대하여」 라는 에세이는 이를 연구하는 많은 비평가와 학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는다. (Thomas Grimwood, 『The Limits of Misogyny: Schopenhauer, "On Women"』 참조)[32] 남성들간의 동성애, 즉 남색을 말한다.[33] 병든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34] 한국에서 번역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는 「성애의 형이상학」 파트를 빼기도 하거나, 이 부분이 없는 제1판을 기준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확인하려면 원문을 보면 된다. 독일어 원문[35] 실제로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쇼펜하우어의 아버지)와의 결혼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그녀의 부모는 그와 결혼을 하라는 강요는 일체 하지 않았고, 당시 그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이 자기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서 자발적으로 결혼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애초에 사랑이 아닌 돈과 명예를 보고 결혼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남편이 요구했던 열렬한 사랑을 주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36] 당시 그녀는 병환에 시달리던 남편을 돌보기는커녕 그의 재산을 가지고 파티를 즐기는 데에 주력했고, 집안에 종사하던 하인만이 그를 돌보았다.[37] 그렇다고 쇼펜하우어는 여성들을 험하게 대하거나 아예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 아델만큼은 잘 대해줬으며 여성과 연애를 할 때도 상대방을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다.[38] 요한나는 자신의 아들과의 유일한 연락 방식이었던 편지를 통해 그의 비관주의적이고 오만해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고 괴롭다는 내용을 담아 그에게 불만을 종종 표출했다. 심지어 그녀는 아들이 쓴 편지들을 없애버리는 경우도 있었다.[39] 그러나 이 둘 사이의 편지도 머지않아 끊겼는데, 쇼펜하우어가 여동생 아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의 책임이 크다고 비난한 내용을 요한나가 읽어 완전히 아들과의 소통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어머니 요한나와 만나고자 몇 번 시도를 했으나 그녀 쪽에서 거절을 했고, 요한나가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쇼펜하우어는 동정심으로 그녀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요한나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이러한 갈등은 속절없이 지속되었고 요한나는 죽기 직전 자신의 딸 아델을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정을 해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아들을 싫어했다.[40] 뤼디거 자프란스키, 『쇼펜하우어 : 쇼펜하우어와 철학의 격동시대』 정상원 옮김, 이화북스, 2020, p.656[41] Das Leben schwingt, gleich einem Pendel, hin und her, zwischen dem Schmerz und der Langeweile.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426)[42]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98[43]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58[44]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66[45]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442[46]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39[47]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433[48]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437[49]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28[50]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444[5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73[52] 철학 박사 논문. 인식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가 의도하는 것은 칸트의 이성비판이 이룬 결과가 헤겔같은 철학교수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리고 당대의 유행하던 철학사조를 강력히 비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오류를 범한 점을 지적하며 칸트의 오류를 보완하는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철학적 의도를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53] 쇼펜하우어의 철학 주저. 인식론, 형이상학, 미학, 윤리학 네 가지 주제를 다룬다.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청춘을 바쳐서 만들어낸 작품이고 쇼펜하우어는 이 책을 "일시적이고 헛된 이념을 좇아 사라져가는 자기 세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손들과 인류를 위해" 썼다며 대담한 선언을 했다. 서양 근대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책은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사실 번역으로는 제대로 읽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의지'라는 개념이 오해받거나 외면받았다.[54] 한국어 제목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은 미국의 번역서 《The Art of Being Right: 38 Ways to Win an Argument》를 참고한듯 하다. 《토론의 법칙》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판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비난하며 인격이 저열한 사이비철학자 등의 간사한 주장 방식을 간파하는 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했다. "실제 토론에서 상대의 터무니없는 주장 방식을 간파하고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 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55] 당대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빠짐없이 기술했고 그 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으로 평가받는다.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이나 프리드리히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56]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이 두 논문을 묶어 출판되었다.[57]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보충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반 대중들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써서 출간한 대중서적이다. 《여록(餘錄)과 보유(補遺)》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 일본에서는 책을 소제목 부분으로 나눠서 《행복론》, 《인생론》 등의 제목을 달고 부분 번역되어 출판되는 책이다. 외국에서도 《삶의 지혜》(마찬가지로 소제목이다)라는 식의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하며, 소책자나 편역본으로 주로 출판되고 있다. 온갖 유머와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고 인생에 대한 격언이 쇼펜하우어 특유의 명쾌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어권에서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최고급 산문이자 탁월한 문학적 글쓰기로 평가받는다. 아인슈타인도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독일어 글쓰기의 진수라고 극찬했다고 한다.[58] 쇼펜하우어는 에드먼드 버크와 유사한 정치적 입장을 지녔고 3월 혁명 당시 시위대를 진압하던 군인들을 걱정할 정도였다.[59]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007, 권기철 역, 생애 해설 에피소드 참조..[60] 나는 자살에 반대하는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도덕적 근거를 나의 주저에 설명해 두었다. 그 근거는 자살이란 비참한 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엉터리 구원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도덕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자살을 도덕적 의미의 잘못이라고 해서 반대하는 것과 기독교 사제가 그것을 범죄라고 낙인찍으려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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