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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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인구 구성
2.1. 유럽계 및 중동계
2.2. 메스티소
2.3. 흑인
2.4. 아시아계
3. 문화
3.1. 언어
3.2. 종교
3.3. 식문화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인아르헨티나의 국민 및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헨티나 국적 소유자 등을 의미한다. 이웃국가인 브라질, 우루과이와 마찬가지로 유럽 각지에서 이민을 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아르헨티나는 국적 속지주의 국가로 만약 본인이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면 자동으로 아르헨티나 국적을 갖게 되며 또한 아르헨티나 국적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본인이 싫다는데 웃긴 나라 아르헨티나 헌법에 국적 포기 불가 조항이 박혀있어서다.[1]


2. 인구 구성[편집]


전체 인구는 2020년대 초반 기준 4500만여명으로, 우루과이와 마찬가지로 유럽계 백인 혹은 백인에 가까운 메스티소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이 본인은 백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원주민들이 모여 사는 지방을 제외하더라도 실제 백인이라 주장하는 아르헨티나인의 DNA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70% 내외라고 한다. 즉, 백인과 원주민, 흑인 등이 혼혈되었으나 백인 유전자 비중이 높아 겉보기에 백인처럼 보일 뿐이다. 백인 이민자들의 대다수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이다.

네셔널 지오그래픽에서 2018년 인증한 하플로그룹 조사에 따른 추정에 의하면, 오늘날 아르헨티나인들의 유전의 52%는 유럽계, 27%는 아메리카 원주민 계열, 9%는 아프리카계(사하라 이남 흑인), 나머지 9%는 중동계나 아시아계에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일대 주민들 평균은 유럽계 유전자가 76% 정도로 압도적이었지만, 북서부 살타 주 주민은 유럽계 유전자가 33% 정도라고 한다. 다른 조사에서는 유럽계 혈통의 비율이 이보다 높게 나와서 최대 60% 후반까지 나오기도 하지만 이 조사들에서도 아메리카 원주민들 혈통을 가진 사람이 최소 20%를 넘는 것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인구의 상당수가 메스티소인 것은 변함이 없다.


2.1. 유럽계 및 중동계[편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약 600만여 명의 인구가 유럽 및 중동 레반트 지역에서 이르헨티나로 이주하였고, 이 가운데 300만여 명 정도는 아르헨티나에 영구 정착했다.[2] 브라질 남부와 우루과이 및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지역이 백인 인구 비율이 높은 이유는 대항해시대 초반에는 잘 개발되지 않던 지역이라 서아프리카 출신 인구의 유입이 적었던데다[3], 19세기 이후 해당 지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민 붐이 겹치면서 대규모 유럽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인데서 기인한다.[4]

유럽계 중에서는 이탈리아와 스페인계가 70% 이상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는 프랑스, 러시아[5], 폴란드, 독일, 영국, 우크라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벨라루스, 아일랜드,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이주해 왔는데, 프랑스계가 5%를 웃돌 뿐 나머지 국가에서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소수다.

특히 이탈리아계 출신 인구가 많은데, 1861년부터 1920년 사이 아르헨티나로 유입된 이민 인구 3,798,925명 중 59%에 달하는 2,270,525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경제가 좋지 않던 시절 아르헨티나 이민 붐이 일면서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아르헨티나로 건너왔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인의 62.5% 가량은 이탈리아인 이민자 및 그 혼혈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는 이탈리아어의 영향이 강한 편이기도 하다.

이탈리아계 다음으로 많은 것은 스페인계이며, 아르헨티나로 온 이주자 중 약 30%를 차지하여 스페인계 인구도 상당하다. 애초에 아르헨티나 자체가 스페인 식민지로 출발했다. 185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에 약 350만여 명의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중 최소 절반 이상이 19세기에 새로이 막 개발되던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원래 스페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멕시코 같은 경우에는 독립 이후에 혐스페인인 감정이 불거지면서 스페인계 이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하던 상황이었던 데다가,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농지가 새로 개간되면서 스페인인 농부들이 새 땅을 얻어 정착하기 쉬웠던 것도 있다. 다만 스페인 본토의 인구 자체가 이탈리아에 비해 적다 보니 이탈리아인들에 비해 이민자 수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 다음은 프랑스계다. 하지만 프랑스계는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에 비하면 매우 소수이며, 전체 이민자수의 5% 웃도는 정도로[6] 이탈리아 + 스페인계에 비하면 존재감이 상당히 적다. 이탈리아계 등 타민족들이 주로 빈농 등 가난한 사람들이 대거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온 반면 프랑스계는 전문직 출신이 많았다고 하며 이에 대한 부심을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19세기 혁명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던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그만큼 엘리트들의 삶이 안정되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프랑스계 다음을 차지하는 독일계의 대다수는 사실 독일계 러시아인들의 후손이며, 특히 '볼가 독일인'이라 불리는 독일계 러시아인 출신이 전체 독일계 아르헨티나인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독일계 중에서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출신 독일계 이민 후손을 제외하고 볼가 독일인 후손만 2백여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볼가 독일인들은 러시아에서 종교 문제와 징집 문제로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어째서 러시아에서 다시 아르헨티나 등으로 이민했는지 관련해서는 독일계 러시아인 문서나 아니면 재침례파 문서 참조.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 정착을 피해 이주한 유대인 인구도 적지 않았는데 러시아 제국 출신 이민 중 일반적인 러시아인 정교회 신도는 극소수였고 상당수가 볼가 독일인이나 유대인이었다. 미국으로 이민한 볼가 독일인의 경우 개신교와 가톨릭 신도 비율이 2:1이었다면 남미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의 경우 개신교와 가톨릭 신도 비율이 1:7이었다. 브라질로 이주한 독일인 농민 중 상당수가 브라질 현지 농장에서 구타와 폭력 문제로 고생하는 경우 그냥 독일로 돌아간 것과 다르게 브라질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들의 경우 브라질에서 적응하는데, 실패하는 경우에도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기는 힘들었고 결국 아르헨티나로 재이주하는 것을 택했다 한다.

그 다음으로는 폴란드계인데, 많은 수는 아니지만, 당시 폴란드인의 인구 비율을 생각하면 적은 비율는 아니다. 게다가 폴란드는 지리적으로도 이민 오기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등에 흩어져 있던 폴란드인들이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민했다. 1차 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2차대전 시기까지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50만여 명의 인구가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는데 이 가운데 45% 정도는 루테니아인정교회동방 가톨릭을 믿는 우크라이나인이나 벨라루스인, 일부 루신인러시아계 폴란드인이었다. 폴란드인 이민의 경우 아르헨티나 내 스페인계나 이탈리아계와 같은 로마 가톨릭을 믿기 때문에 종교적인 충돌이 적었지만 우크라이나계의 경우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과 가톨릭 사이에 알력이 심했고 1940년대에 들어서야 교회가 제대로 건설될 수 있었다고 한다. 벨라루스계의 경우 미국의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계 미국인 혹은 미국 아슈케나짐 사회로 그대로 흡수된 것과 다르게 아르헨티나에는 상술한 것처럼 정교도 러시아인 이민자가 적었고, 폴란드에서 정교회 차별을 피해 건너온 벨라루스인 이민자가 더 많았기 때문에, 벨라루스계 고유 정체성이 보존되었다. 러시아계는 적은편이지만 러시아 내전하고 소련 시절의 탄압을 피해 이민을 왔으며 주로 La pampa주하고 Entre ríos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아랍계같은 중동계 혈통의 아르헨티나인들도 거주하고 있다. 1891년부터 1920년까지 367,348명이 레반트 지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정착하였다.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이 시리아 출신 아르헨티나인으로 대통령이 되기 이전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7] 폴란드나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인구 상당수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나치 독일 집권 이전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피난한 유대인 인구도 적지 않았다.

유대계의 경우 종종 중동 레반트에서 건너온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러시아와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대서양을 건너온 독일계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해외 디아스포라로는 주로 미국으로 갔으며 아르헨티나계는 2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옆나라 칠레에 8만 5천명 스페인에 7만명 이스라엘에 5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2.2. 메스티소[편집]


원주민 인구는 공식적으로 2% 내외에 불과하고 메스티소의 인구비율이 그리 높지 않지만 유전적인 조사결과에 의하면 인구의 상당수가 메스티소이다. 애초에 아르헨티나인의 문화 아이콘인 가우초부터가 메스티소 유목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르헨티나는 팜파스, 차코, 파타고니아, 티에라델푸에고 섬 일대에 분포하던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8]을 학살, 추방하면서 영토를 확장한 국가이고, 또한 이렇게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획득한 영토에 유럽계/중동계 이민을 심고,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원주민에 대한 차별을 일삼아서 메스티소였던 가우초들도 원주민 정체성보다는 백인 정체성에 더욱 가까워질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르헨티나에 이민 온 유럽인들 가운데 여성보다는 남성 비율이 더 많았으며, 유럽계 이민자 남성 상당수는 원주민 여성과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 후안 페론도 이러한 메스티소 가운데 한 명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서는 원주민이나 메스티소에 대한 차별도 많이 완화되었고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원주민이나 흑인들도 보기 쉬워졌기는 했다.[9]


2.3. 흑인[편집]


흑인노예가 상당수 유입되었기때문에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흑인 후손들도 있지만, 유럽인 및 중동인들과의 혼혈이 오랜기간 진행되면서 대다수는 백인화 되었고 흑인으로 자각하는 사람은 20만 이하에 그친다. 흑인조상이 있는 경우는 200만 정도로 추정된다. 아르헨티나 역시 브라질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흑인들이 노예무역으로 유입되었고 아르헨티나 독립 직전과 아르헨티나 독립 직후의 통계를 보면 부에노스 아이레스 인구의 1/4에서부터 1/3 가량을 흑인이나 흑인혼혈이 차지하고있다는 통계도 나올 정도로 흑인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독립전쟁을 묘사한 그림에서도 흑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즉, 아르헨티나 건국 초기때까지는 백인국가로써의 정체성을 지닐려고 해도 다수의 흑인들이 엄연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았기에 백인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기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흑인들의 처지는 아르헨티나 독립 이후로도 브라질에 비해 나았어도 상당히 고달픈 편이기는 했다.

그러다 아르헨티나 역사 초기에는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탓에(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 연합전쟁, 삼국동맹전쟁과 팜파스 전쟁이 대표적.) 많은 흑인 남성들이 죽어 흑인들의 성비는 엄청난 여초현상을 띄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흑인 여성들은 새로 이주해온 백인 이주민과 결혼하면서 많은 흑인들의 자손들은 흑백혼혈이 되었으며 세대가 지날수록 압도적인 수를 지닌 백인들과 혼혈이 지속되어 외형적으로 백인에 가까워졌고. 아르헨티나 인구조사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20세기에는 흑인들이 등록되는 란이 없어졌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백호주의적인 이민정책을 펼치면서 흑인들의 유입은 상당기간 차단된 상태였고 거기에다가 원주민만큼은 아니더라도 흑인들을 걸끄러워하던 풍토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흑백혼혈인들을 점차적으로 백인으로 간주했으며 결과적으로 세대가 지날수록 흑인 조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백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되어 잊혀지게 된 것이다. 반면에 브라질은 동북부 지방의 흑인-흑백혼혈 인구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10] 유럽계 인구 대량 이주 이후에도 흑백혼혈 파르도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다. 브라질 역시 원래 인구밀도가 희박했었다가 유럽계 이민을 받았던 남부 3개 주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아르헨티나인들과 외양이 대동소이하지만, 원래부터 인구가 많았던 동북부로 가면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외형이 많이 달라진다.


2.4. 아시아계[편집]


한국 교민들이 1960년대 처음 이민 온 이후 국적을 따거나 자식을 낳아 2세대부터 국적이 생기는 경우가 늘면서 한국계 아르헨티나인도 생기게 된다. 다만 그 수가 절대치적으론 많다고 볼 순 없다. 참고로 개요 항목에 상술된 아르헨티나 국적법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출생한 2세대의 경우 한국에 와서도 아르헨티나 이중 국적을 가지고 산다.

이민의 경우 1980년대 말 약 4만명으로 정점을 찍었다가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상당수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거나 미국, 멕시코, 브라질 등으로 재이주해,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엔 교민수가 1만 5천명선까지 줄었다가 2000년대 이후 다시금 증가해서 현재 약 3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출처: 주아르헨티나대사관.)

중국계의 경우 2010년대 기준 약 20만명 정도가 있고, 일본계는 약 6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3. 문화[편집]



3.1. 언어[편집]


대개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스페인어는 아르헨티나인들의 모국어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이탈리아계 후손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쓰이는 스페인어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스페인어와 달리 이탈리아어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아 스페인 본토는 물론 다른 중남미쪽의 스페인어와도 다른 구석이 제법 많다. 다른 나라의 스페인 화자들은 아르헨티나의 스페인어가 이탈리아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중남미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마누엘 푸익이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루이스 보르헤스의 경우 세계 문학사의 거장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문학 외적으로는 원주민에 대한 비하적인 시각을 보유한 것으로 당시 시대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로도 평가되며, 마누엘 푸익은 초창기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이지만, 동시에 본국에서 우파 정권의 탄압을 받아 해외를 떠돌다 객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누엘 푸익의 삶은 비교하자면 또다른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거두였던 러시아계 미국인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소련을 혐오하면서도 고국 러시아를 계속 동경하고 그리워했던 것과도 매칭된다고도 볼 수 있다.


3.2. 종교[편집]


여타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국민들 대부분이 천주교를 믿고 있다. 개신교를 믿는 아르헨티나인들이 늘어나고 있고 무종교인 경우도 많은 편이다. 일부는 동방 정교회를 믿고 있다.


3.3. 식문화[편집]


옥수수, 감자를 주로 먹는 브라질이나 페루, 에콰도르 등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 사람들과 다르게, 전체 인구 중 유럽계 이민자 비율이 더 많았던 영향으로 빵이나 파스타 등 밀가루 음식이나 소고기를 많이 즐겨먹는 편이다.[11] 남미 다른 나라들도 유럽계 이민은 안 받은 것은 아니라지만 아르헨티나의 경우 유럽계 이민 이전 가우초의 남미 다른 지역 식문화와 상당히 다른 편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메스티소들은 대개 감자와 옥수수를 먹었고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던 흑인 및 흑백혼혈들은 대개 콩밥을 주식으로 먹던 편이었다. 아르헨티나인들은 팜파스 초원의 유목민이던 가우초의 소고기 사랑을 물려받은 걸로도 유명하다. 아르헨티나인들이 마테차를 즐겨 마시는 이유도 가우초들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요리 문화는 기존 가우초의 식문화에 이탈리아계, 프랑스계 이민자들의 식문화가 더해지면서 자리잡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워낙 양질의 식자재가 넘쳐나는 나라였다보니, 음식의 맛 자체보다는 같이 식사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식사 분위기는 어떠한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편집]


[1] 때문에 아르헨티나 출신인 프란치스코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국적 문제가 발생했으나(교황 선출 규정상 원 국가/바티칸 이중국적 신분인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될 경우 원래 국적은 자동으로 소멸하며 오로지 바티칸 국적만 남게 된다. 사유는 정치적 중립 준수.) 국적 포기가 불가능한 아르헨티나 현실상 특별히 예외로 인정하기로 했다.[2] 비교하자면 같은 시기 우루과이에는 유럽계 이민이 50만여 명에 달했으며, 브라질 역시 당시 이민 인구가 300만여 명에 달했으나 적응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인구 비율이 아르헨티나보다 더 많았다.[3] 물론 비교적 적었다는 얘기이지 사실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을 당시에 흑인들이 많이 유입되어서 독립 당시에는 인구의 상당수가 흑인이거나 흑백혼혈이었다.[4] 19세기 말 의학이 발전하면서 장거리 이민이나 파견을 나간 사람들의 사망률이 감소하고,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기간동안의 저임금 중노동, 인구 증가에 의한 토지부족, 민족주의 부흥에 따른 반유대주의 폭동 등으로 신대륙 이민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는데 당시 유럽인, 일부 중동인들의 이민 행렬은 미국과 캐나다 외에도 아르헨티나, 브라질 남부, 우루과이, 칠레 등으로 향했다. 출처: 에릭 홉스봄 3부작[5] 순수 러시아인보다 볼가 독일인 혹은 유대인이 많다.[6] 1857년부터 1909년까지 이민자 337만여명 중 185,749명이 프랑스 출신이었다.[7] 다만 카를로스 메넴은 장례식은 순니 이슬람식으로 치루었다.[8] 테우엘체, 차루아, 과라니, 오나, 하우시, 마푸체 등. 특히 차루아족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버티지 못하고 멸족되어버렸다.[9] 아르헨티나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 탄압을 덜 받는 사람을은 대다수가 볼리비아나 페루에서 온 경우이고 멕시코나 과테말라 같은 중남미에서 온 경우도 소수나마 존재한다. 처음부터 아르헨티나 땅에서 살던 원주민들의 경우 그나마 남은 이들도 엄청난 탄압에 시달리고 있다(마푸체족이 대표적).[10] 인구가 중남미에서 가장 많았다.[11] 물론 이탈리아 요리와 스페인 요리의 영향으로 쌀 요리를 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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