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노모리 호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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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시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초상화

雨森芳洲(あめのもりほうしゅう)
(1668년~1755년)

1. 개요
2. 생애
3. 일본 조선어학의 토대를 닦다
4. 아라이 하쿠세키와의 관계
5. 에피소드



1. 개요[편집]


일본 에도 시대에 활동했던 유학자. 조선과의 외교 및 쓰시마 번의 조선어 교육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호슈(芳洲)는 고 이름은 토시요시(俊良)였으나 이후 노부키요(誠淸)로 고쳤다. 는 백양(伯陽)이다.


2. 생애[편집]


현재의 시가현에 해당하는 오미 국에서 태어났다. 일족인 아메노모리씨는 원래의 성을 후지와라로 자처하는 북부 오미 지역의 사족으로[1] 기요쓰나의 대에 아자이 나가마사를 섬겼고, 아자이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한 뒤에는 노부나가의 휘하 무장이었던 아츠지 사다유키(阿閉貞征)를 섬기게 되었는데, 사다유키는 혼노지의 변 이후 아케치 미츠히데를 도와 주고쿠 회군으로 돌아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맞아 싸우다 대패하고 몰락해버렸다.[2] 그의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무사에서 의사로 전업하게 된다. 가업을 잇기 위해 교토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주자학자인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유학자의 길로 진로를 바꾼다. 이 시절 그의 동문이자 평생 절친이며 쇼군 보좌역까지 출세하게 되는 아라이 하쿠세키를 만나게 된다. 기노시타 준안의 추천으로 쓰시마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그곳에서 대조선 외교문서 작성 등의 업무를 맡게 된다. 동시에 나가사키에서 중국어를 습득하기도 했다. 쓰시마에서는 이후 조선 관련 외교를 담당하는 가로(家老) 스기무라 우네메(杉村采女) 및 히라타 나오에몬(平田直右衛門)의 보좌역(佐役)으로 활약했다.[3] 조선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는 우삼동(雨森東)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며, 인품이나 학식의 측면에서 호평받은 인물이었다.


3. 일본 조선어학의 토대를 닦다[편집]


호슈는 나가사키에서 중국어를 직접 습득함으로서, 완전히 일본화되어 있던 훈독 한문이 아니라 원어를 배워서 소통했기 때문에 필담이 아니라 직접 조선인, 중국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외국어에 조예가 깊었다. 어떤 중국인은 아메노모리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당신은 모든 외국어에 능통하지만 특히 뛰어난 건 일본어다"라는 우스개를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도선주(都船主)로 부산으로 건너와 활동할 때는 조선어를 학습했을 뿐더러 당시 양반들은 천시하던 언문(한글)[4]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가면서 익혔다고. 아메노모리 호슈가 남긴 글에는 "조선어 배우려면 조선에서 나오는 책을 보되 한문으로 된 책 말고 그 나라 언문으로 된 소설 같은 걸 봐야 습득이 빨리 된다"고 충고하는 것도 있다. 그가 그런 글을 굳이 남긴 걸 보면 당대에 조선어를 배우고자 했던 일본인들이 엉뚱하게 조선의 한문 책을 구해서 어떻게든 습득해 보려고 헛수고를 하는 일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시 조선의 일본어 학습교재인 <왜어유해(倭語類解)>의 개정 증보 등의 편찬에 원어민으로서 협력했고 그 이전까지 체계적인 교재가 없었던 조선어 학습을 위해서 1729년 <전일도인(全一道人)>, 1703년 <교린수지(交隣須知)>[5]라는 이름의 교과서를 지었는데, 이 교재는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조선어 교재로 계속 사용되었고, 쓰시마에서의 관직에서 사임하고 은거를 시작했을 때도 조선어학교(韓語司)를 지어 많은 조선어 통역을 양성했다. 한국인이 일본어 배울 때 자주 하는 실수 등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한국인은 어두 유성음(탁음)을 잘 발음 못한다고 지적한 것 등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팁이다.


4. 아라이 하쿠세키와의 관계[편집]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와는 사적으로는 매우 절친이었지만, 호슈가 친한 성향의 유학자라면, 아라이 하쿠세키는 자국(일본)중심주의적으로 다소 혐한적인 인물이어서[6] 대조선외교 정책에서 대립한 적이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쇼군(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사강(侍講)이면서도 정책결정에 크게 관여하여 조선통신사 접대의 간소화를 주장했고, 특히 종래에 일본 쇼군을 대내외적으로 일본국 대군(大君)[7]으로 호칭하던 것을, 일본국 국왕(國王)으로 바꿀 것을 주장했는데,[8] 이것은 정치 구조가 실권의 쇼군과 상징의 덴노로 이원화된 가운데 쇼군과 조선국왕의 호칭을 같게 함으로서 대조선 외교에서의 ‘격’을 맞추고[9] 덴노가 조선국왕보다 위라는 것을 어필하려는 의도였다. 호슈는 이에 대해 반대했으며,[10] 하쿠세키 사임 이후에는 종래대로 돌아갔다. 일본은 심지어 막부 말기 미일화친조약에 이르기까지 하쿠세키가 바꾸려고 했던 '일본국대군'을 계속해서 쇼군의 칭호로 사용했고, 쇼군이 물러난 뒤에는 덴노의 비공식 칭호 가운데 하나로 살아남았다.

자세한 건 임수간의 동사일기 중 강관필담 참조. 그러나 이 문제에서 아라이 하쿠세키는 피휘에 대해 없다가도 있다는 거짓말을 하다가 말빨이 딸려서 나중에는 자기 일 아니라고 발뺌하고 뒤에서 사람들을 시켜서 피휘사건을 일으켰으며 통신사가 이 일로 보자고 사람을 보냈는데도 병있다고 안 간 추한 모습을 보인다. 하쿠세키는 중국의 각종 서적을 읽었고 필담능력도 뛰어나 이것을 이용해 조선의 지리나 서양 사정에 대한 무관심, 무지함을 들어 조선을 깐 적도 있다. 심지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의 원수인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켜 주었으니 에도 막부도 조선에 대해 재조지은의 은덕이 있는데 왜 조선은 이에 대해 감사하지 않느냐는 발언까지 하였다.[11] 호슈는 변방인 쓰시마를 벗어나 중앙에서 좀 더 출세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듯하며 학연인 하쿠세키는 그의 힘이 되는 인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라이 하쿠세키는 결국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채 물러났고 호슈는 이에 많이 상심한 듯하다.


5. 에피소드[편집]


  • 온화하고 조선에 우호적인 사람이었지만, 조선인들이 일본이라는 이름 대신 '왜(倭)'라고 부르거나 '왜적', '야만'이라고 부르는 등의 반일감정을 드러낸 것을 볼 때면[12] 아무래도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임진왜란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그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여전히 기억이 남아있는 이상 마냥 일본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기는 어려웠고, 실제로도 일본에서 완벽하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재를 완벽하게 청산한 것은 아니었기에[13] 일본으로서도 할 말이 없기는 했다. 조선인들이 일본을 '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신유한은 "그러면 너희 들은 우리를 부를 때 왜 자꾸 당인(唐人)이라고 부르냐? 우리를 중국 짝퉁 취급하냐?" 라고 따졌는데, 아메노모리는 이에 대해 "조선이 중국에 못지 않게 문화가 뛰어나서 그러하다. 우리도 중국 문물을 숭상하고 최고로 치기 때문에 좋고 훌륭한 것이 있으면 당(唐)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부르곤 한다. 조선은 중국 문물을 숭상하고 배워서 본받는다면서 '중국 사람 같다'고 하는데 그걸 왜 불편해 하는 거지?" 라고 얼버무렸다. 서로가 자기들 편의에 따른 것이라 정당한 반박은 아니지만 18세기에도 이러한 호칭의 사용을 통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서로의 인식에 대해 많은 간극이 있었던 듯하다. 결국 위의 일화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임기응변 정도로 보면 된다.[14] 기실 일본의 정식국호는 이미 고대에 왜국에서 일본으로 교체한 후 한번도 변경한 적이 없으니[15] 불쾌할 만 하였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도 굳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공양하는 사찰에서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 연회를 연다거나, 자기들에게 '왜인'이라고 부르면 불쾌해 하면서도 조선인들을 부를 때는 '당인'이라고 부르며 조선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중국의 하위 부속 존재 취급하는[16] 일본측의 모습이 결코 곱게 보일 수만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일본으로 인해 겪은 국치의 과거를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조선과 사과하는 시늉은 해도 책임 회피 내지 변명으로 일관하며 내심 조선에 대한 하대와 비하를[17] 내비치는 일본, 그리고 그 사이에서 최대한 중재하고 무마하려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노력은 눈물겹다고 해야 할까. [18]

  • 다만 조선과 일본 사이의 이런 평행선과는 별개로 아메노모리 호슈는 특별히 조선에 대해서 비하적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입장도 잊지 않았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구한말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자신의 입장에서 빠지기 쉬운 편견이나 범하기 쉬운 오해를 걷어내고 조선과 일본 양국을 중간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수필집 다와레구사를 한국어로 편역한 김시덕은 아메노모리 호슈를 ""조선과 일본 양쪽을 중재하고 두 나라를 같이 이해하려고 노력한 개방적 내셔널리즘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 실제로 한국에 번역된 아메노모리의 수필집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에 보면 "나라가 귀하고 천함은 그 나라에 군자와 소인의 많고 적음과 그 나라의 풍속이 좋고 나쁜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중국에 태어났다고 뻐길 것 없고 오랑캐 땅에 태어났다고 부끄러워할 것 없다"고 한다거나, 술에 관해서도 조선 술이 최고다, 아니다 일본 술이 최고다 하는 논쟁에 대해 "조선 사람에게는 조선 술이 제일 맛있고, 일본 사람에게는 일본 술이 제일 맛있고, 남만(네덜란드) 사람에게는 남만 술이 제일 맛있지 않겠느냐'''"고 평하기도 한다.]

  • 아메노모리 호슈는 대조선 외교에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들을 후대 쓰시마 후추 번주들에게 권하는 《교린제성》을 남겼고,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교린제성》을 보면 아메노모리 호슈의 입장에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간의 문화적 차이를 비교한 글들이 꽤 많이 남아 있고, 어떤 것은 현대에도 새겨둘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이 밖에도 통신사행 때를 보더라도 (조선인들은) 나팔을 한 번 불면 '출발하라'는 고시로 알고, 두 번을 불면 모두 집합하고, 세 번을 불면 출발하는데 한 사람도 늦는 사람이 없었다. 배에 타고 내리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오전 4시 출발', '오전 6시 출발'이라고 서로 정하면 저쪽은 조금도 늦는 일이 없다.
일본 사람들은 머리를 땋고 손을 씻고 하카마 입고 각반 치고 큰 칼, 작은 칼 허리에 다 차고 인롱에 주머니 다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다 보니 준비가 끝나기도 전에 시간이 많이 흘러 버린다. 그래서 출발 시각을 오전 4시로 정해도 오전 6시가 되고 오전 6시로 정하면 오전 8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조선쪽이 (일본인의 이러한 늑장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출발 시각을 미리 앞당겨 알렸는데, 위와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나자 그 후에는 삼사(三使) 쪽이 기다리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여 출발 시각은 출발할 수 있는 그대로를 알렸다.

덴나(天和) 연간(1682)에 있었던 일이다.
통신사 일행이 지나는 도로 주변의 가로수가 모두 고목인데도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손상된 곳이 없음을 본 삼사(三使)들이 '법령의 엄숙함 때문이리라' 하면서 특히 감탄했다.
닛코(日光)와 대불을 통신사 일행에게 보여줌으로써 웅장함과 화려함을 과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19] 거기에는 감탄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인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가로수에 통신사 일행이 감탄한 것을 보면 이것 또한 일본과 조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그 차이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 통신사 신유한과의 대담에서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남색(동성애) 행위인 와카슈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신유한이 "음양이 조화가 되어야 이치인데 양과 양이 이끌린다니 해괴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호슈는 "학사께서 아직 그 즐거움을 모르시는구려"라고 웃으면서 대꾸했다고 한다. 신유한은 그것을 "성리학자인 아메노모리도 저런데 보통 일본인들은 오죽하겠나"라고 평했다. 참고로 해당 대담이 수록된 해유록 문견잡록에는 점잖게 말해서 일본의 성적인 개방성은 물론, 딜도춘화가 널리 퍼진 점, 유곽 문화 등 여러모로 성진국 일본에 대한 관찰과 소감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 저서 '교린제성'에서는 조일외교에 있어서 일본이 더 이상 조선에게 강압적인 태도로 나서서는 안된다는 평을 남겼다. 임진왜란이 막 끝난 뒤에는 그 위세가 남아 있어서(余威) 조선이 다소 저자세로 나오는 일이 있었지만, 이제는 점차 그 위세가 옅어져 조선인들도 이에 익숙해져 있다고 평가했다. 교린제성에 실린 호슈의 목격담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왜관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이 성이 나서 눈 부라리면서 "어이!"라고 소리만 질러도 벌벌 떨며 일부는 도망치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똑같은 상황에서 칼을 뽑아 성을 내려는 일본인에게 조선인이 도리어 "뭐 임마?"라며 도리어 화를 내고 이에 일본인이 당황해 도망쳐 버렸다나...

  • 한국인들에게는 상술한대로 통신사로 간 신유한의 해유록을 통해서 주로 알려진 인물인 만큼 신유한의 일본 체류시 원래 한반도와 밀접한 쓰시마 섬에서 일하는 유학자라는 아주 이상적인 배경으로 인해 주 통역 겸 가이드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막상 신유한은 떠나면서 아메노모리를 통해 본 일본 유학의 발전 상태에 대해 나름 좋게 평가하고, 아메노모리 호슈 본인도 재주와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 했지만, 사람 자체의 품성에 대해서는 "그 형상을 보니, 험하고 독하여 평탄하지 못하였고, 겉으로는 문장을 한다고 핑계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창과 칼을 품었다"[20]라고 평하며 못 믿을 인간이라 보았다. 이는 신유한이 언행간 분석과 몰래 엿본 시, 아메노모리가 한 말들의 함의에 대한 통찰 등을 통해 아메노모리 마음 속의 존황, 반막부 의식을 파악했기 때문인데 조정의 녹을 먹는 유학자로서 바로 그 충성의 대상인 막부 정부에 대한 마음 깊은 거부 의식을 음흉하고 이중적인 태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통신사로 갔다 온 다른 많은 조선 유학자들이 막부를 군주(천황)를 쥐고 흔드는 불충한 존재로 여기고 존황의식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유학자나 귀족들을 높게 평가한 걸 생각하면 다소 의외인 부분이다.

예를 들어 이보다 30년쯤 뒤 통신사로 간 다른 유학자 조명채는 비슷한 유도성 질문과 추리, 마음 속 떠보기 등으로 마찬가지로 일본 유학자들의 존황 반막부 사상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신유한과는 반대로 일본 성리학자들의 모화사상적 논리에 공감하며 이들이 "군신의 분의를 대강 안다 하여 항상 관백이 국권을 천단하여 방자하는 것에 대해 아픔을 참는 뜻을 깊이 품어서 분연히 한번 반정(反正)할 뜻이 있다"며 긍정적으로 보았다. 똑같은 성리학자의 관점으로 봐도 신유한의 경우 역사적 배경이 어쨌건 당장 모시는 조정에 반감을 품다니 노답이라고 본 반면, 조명채의 경우 덴노가 원래 적법한 임금이고 막부는 조조, 왕망 같은 찬탈자라는 논리를 접하고선 저들이 퇴계 문집도 보고 유학을 배우더니 드디어 맞는 말을 한다며 맞장구 쳐 주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모습이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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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지와라노 후유츠구의 현손 요시타카의 후손이라고 자칭한다.[2] 야마자키 전투 참조.[3] 흔히 조선업무를 관장하는 기구인 조선방(朝鮮方)의 보좌역에 임명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착각이다. 애초에 사료에 '雨森藤五郞·陶山庄右衛門義朝鮮□(向)御用杉村采女·平田直右衛門佐□□□□(役被仰付か)候間存寄之儀も候ハヽ無遠慮罷出□□(可申か)と杉村賴母□(御か)取次を以被仰出, 則組頭を以申渡之(아메노모리 호슈와 스야마 쇼에몬을 조선담당가로(朝鮮向御用) 스기무라 우네메 및 히라타 나오에몬의 보좌역으로 임명하니, (앞으로)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망설임 없이 나와서 말하도록 스기무라 다노모께서 밑 사람(전달자; 取次)을 통해 말씀하셨기에, 구미가시라(組頭)를 통해 (아메노모리 호슈와 스야마 쇼에몬에게)이를 말했다)'라고 나온다. 자세한건 국사관논총 제57집에 실린 이즈미 조이치(泉澄一)의 논문 참조.[4] 글자 자체를 천하게 여겼다기보다는, 당시에 과거 시험에 출제되는 유교 경전들이 죄다 한문이고, 시험 답안지도 한문으로 작성해야 하다보니, 한글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진 것이다. 현대로 치면 영어 공부에 집중하느라고, 국어 과목은 등급 컷을 유지할 정도만 보고 관심을 끊는 것과 같다. 막상 양반들도 과거 합격 후에는 아동들에 대한 교육 목적이나 대중들에 대한 교양 지식 전파를 목적으로, 소학언해두시언해 등, 한문으로 된 고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힘을 쓴 경우가 많다.[5] '이웃(조선)과 사귐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라는 뜻.[6] 어느 정도였느냐 한 가지만 꼽아 보자면 조선에 대해서 "조선은 일본에게 군사력으로는 안 되니 자꾸 문화력을 내세워서 우리를 두고 '예의의 나라' 조선이 '예의없는 나라' 일본을 교화한다 하는 식으로 대한다"며, "예의없는 걸로 치면 애초에 조선은 신대부터 우리 일본에 신하가 되겠다고 복속한 나라 아니었냐?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쿠데타 일으켜서 자기 왕도 나라도 전부 제끼고 세운 나라인데, 그런 인간이 세운 나라가 무슨 '예의의 나라'라고?"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말하는 식이었다. 사실 진구 황후 전설이야 허구라고 쳐도 이성계가 고려의 신하이면서 쿠데타로 고려를 무너뜨린 것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기는 하다마는...[7] 재계의 거물을 의미하는 타이쿤(tycoon)이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8] 여기서 아라이 하쿠세키와 아메노모리 호슈의 입장차는 '왕'에 대한 해석을 황제보다 낮은 제후로써의 왕이냐, 어엿한 독립국가의 통치자이자 한 나라(왕국)의 정당한 주권자로써의 왕이냐로 보는 차이도 한몫했다. 사실 진시황이 '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어내기 전까지 황제 칭호와 똑같은 무게를 지녔던 단어가 바로 왕이었다.[9] 하쿠세키는 일본국대군의 ‘대군’이 조선에서는 그 나라 국왕의 아들(적자)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점도 지적한 바 있다. 일본국 대군 즉 쇼군이 조선의 적통 왕자와 동급이 되는 셈. 웃기게도 조선은 대중국 외교에서는 이등체강 즉 친왕(중국 황제의 적자)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10] 아라이 하쿠세키가 막부의 쇼군을 일본국대군이 아니라 일본국왕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조선과의 외교 문제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현실을 보는 시각의 차이도 있었다.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에는 교토의 지식인들이 암암리에 교토의 덴노를 왕자(王者), 에도의 쇼군을 패자(覇者)로 부르는 등 존왕사상이 퍼져 있었으며, 이는 쇼군이 일본이라는 나라(왕국)의 실권자이기는 하지만 정당한 주권자 즉 왕은 교토의 덴노뿐이며 쇼군은 어디까지나 덴노의 신하로써 일본의 통치를 대행하고 있는 것 뿐이라는 성리학의 명분론에 의한 것이었기에,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부르게 되면 자칫 교토의 덴노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 애초에 막부가 있는 에도와 가까운 가즈사(지금의 치바현) 출신인데다 쇼군의 정치 고문으로 막부 중추 권력의 일원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가 국내외적으로 막부의 이익과 입장을 우선시하는 것은 그가 국수주의자냐 혐한이냐의 문제를 떠나서 당연한 것이었고, 거꾸로 쓰시마의 경제가 조선과의 교역 여하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현실뿐 아니라 성리학을 깊이 공부한 데다 체질적으로 쇼군보다 덴노를 받드는 존왕(尊王) 의식이 강할 수 밖에 없는 교토 근방에서 자란 아메노모리에게 덴노가 아닌 쇼군이 일본국왕으로 불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아메노모리 호슈는 이런 주장을 펴는 하쿠세키를 (막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폭유(暴儒, 깡패 같은 유학자)라고 비난했고, 하쿠세키도 아메노모리를 "쓰시마 촌구석 선비 주제에 제놈이 뭘 안다고"라고 깠다.[11] 아라이 하쿠세키 본인이 또 말을 세게 하는 데다 고집도 센 성격이라 막부 내에서도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들을 "쇼군의 뜻"이라며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아 막부의 보수파 관료들이 이런 하쿠세키를 "어으 저 악마 같은 놈"이라고 꺼렸다. 결국 쇼군 이에노부가 죽고 뒤를 이은 이에쓰구가 요절한 뒤 하쿠세키는 실각했다.[12] 쇼군 이에노부도 가끔 조선의 이러한 반일/배일 감정이 담긴 문헌을 접하고 "이 정도로 조선은 우리가 미운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노부 입장에서는 임진왜란으로부터 백 년이나 뒤에 태어난 사람이니만큼 백 년 전의 그 전쟁이 얼마나 처절했고 조선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와닿지 않을 수밖에 없겠지만.[13] 당장 신유한 본인도 오사카에 이르러 히데요시가 머물렀던 오사카 성이 건재한 것을 보고 "머리가 쭈볏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토로한다. 조선통신사들이 연회를 받기로 된 사찰 호코지가 하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양을 위한 사찰이었다는 것이 밝혀져서 조선 통신사들이 "우리는 이런 곳에서 연회 받기 싫다. 다른 데로 옮기든지 연회 취소해라"라고 항의하는 바람에 아메노모리 호슈가 나서서 히데요시 공양하는 사찰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있던 사찰입니다 하고 위조 문헌까지 가져와 보여주면서 조선 통신사들을 달래야 했다. 글로는 이렇게 써 놨지만 실제 현장 분위기는 지금보다 더 살벌했었던 것 같아서, 신유한의 <해유록>에는 그때 아메노모리는 조선 통신사들이 끝내 접대를 거절하자 분해하면서 칼까지 빼려고 하는가 하면, 조선 통신사들에게 그 가짜 기록을 보여주고 난 다음 날에도 실무 맡은 일본 측 관리들에게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가며 마구 갈구고 통신사들에게도 "저희가 아니라고 문서까지 가져와 보여드리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안 믿어주시니 너무 섭섭합니다"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되어 있다.[14] 여담으로 일본에서 중국 문물에 당나라 당 자를 붙이는 것은 흔하기는 하다. 우리가 아는 형태의 당면도 실제로는 청나라 대에 새로 나온 음식이지만, 일본인들이 중국(당)의 제면기술이라면서 당면이라고 부르던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에서도 당면이라는 이름이 정착하게 된 것이다.[15] 글자만 바꿨다는 거지 발음은 바꾸지 않아서 왜(倭)나 대화(大和)나 일본(日本)이나 일본어 훈독으로 읽을 때는 똑같이 '야마토'로 읽는다.[16] 일본 사상가들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일본(本朝), 중국(唐土), 인도(天竺)의 삼국관에서 무로마치 말기 이후 인도가 탈락하고 남만(유럽)이 추가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를 근세적 삼국관이라 한다. 여기에서 조선, 류큐, 에조 등은 중국이나 일본에 종속된 존재로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다(荒野泰典「近世の対外観」『岩波講座 日本通史』13、岩波書店、1994、p.214).[17] 조선 통신사를 일본 막부는 조선이 일본에 조공 오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조선 통신사들이 그것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알았다면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았을 듯.[18] 사실 쓰시마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로 대조선 외교 총책임자였던 아메노모리로써는 조선 통신사들이 강경하게 나오면 나올 수록 그 화살이 쓰시마 번이나 실무 관료의 총책임자격인 자신에게 다 돌아오는 만큼 매달릴 수밖에 없었기도 했다. 이때 호코지에서 있었던 소동과 자신이 수습한 것에 대해 호슈 본인은 훗날 《교린제성》에서 "이딴 짓은 오히려 우리(일본) 학문의 부재와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이라고 괴로움을 토로했다.중간관리직의 비애[19] 조선의 기본 국정 운영 방침이 근검절약이었고, 동시에 숭유억불이었다. 일본쪽에서 신사나 사찰 크게 지어 놓고 보여주면서 '부럽지?' 해 봐야 조선 통신사 입장에서는 "그딴 거 크게 지을 돈 있으면 그 돈으로 백성이나 좀 구제할 것이지..."하고 넘겨 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조선 통신사의 기록에는 자신들이 거쳐간 일본의 도시와 그 번화하고 화려한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고 친일적인 한국인들은 이를 조선이 일본보다 미개했다느니 발전이 늦었다느니 까대는 수단으로 내세우지만, 그것도 도시의 이야기고 시골에서는 에도 막부의 고압적인 세율에 자연재해로 쌀 부족에 시달리면 봉기를 일으키기도 하고, 양육에 필요한 일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자신의 갓난아기를 죽이는가 하면 아이와 여성은 인신매매되거나 팔려가거나, 쌀을 만드는 농민은 굶어 죽고 무사와 도시민은 굶어 죽지 않는 상황도 자주 생겼다. 현대 일본 학계에서는 에도 시대는 마냥 '성장'과 '발전'의 시대라고만 보기 어려우며 그 이면에 부정적인 면도 만만치 않았음이 지적되고 있다.[20] 해유록 하권 12월 28일 병인.[21] 어찌보면 이것이 일본에서는 유학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인데, 유교에서 강조하는 충효에서 효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충은 충성을 바칠 대상이 하나가 아니라 덴노와 쇼군으로 이원화되어 있으니 근본에서부터 혼란이 올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유학이 아주 영향이 없던건 아니라 막부와 조정과의 관계나 존황양이 사상에 영향을 주긴 했다. 에도 막부는 정통성 강화 밑 이제 전쟁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 지배층의 문신화를 유도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통해 전파된 성리학을 관의 공식 이념으로 밀어 주었고, 이미 무가의 지배에 수백년간 익숙해진 일본 지배층이 갑자기 새삼스럽게 막부를 망탁조의 취급하며 덴노의 재집권을 요구하게 된 것도 성리학적 정치 윤리의 전파로 인한 발전이다. 막부 입장에선 원래 자신들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권장한 학문이 오히려 치명적인 독으로 돌아온 셈이고, 조선 입장에선 장기적 흐름에서 보면 임진왜란이란 침략을 통해 부수적으로 일본이 배워간 조선 국가 이념이 되려 훗날 조선 침략의 선봉이 되는 막부 말 존황양이 유신지사들의 씨앗이 된 셈이다. 이에 대한 더 깊은 논의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제자인 역사학자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