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모리

운도에는 강부성과 사카이 거리 외에도 많은 마을이 있소. 그 마을들은 강부성 무사들을 위해 식량과 의복을 바치고, 각종 노역도 제공해야 하오. 태평성대라면 평안한 삶을 살 수도 있겠으나, 전란의 시대에서 평민들은 갈 곳을 잃고 떠돌거나, 내일이 올지 알 수도 없는 삶은 살아가고 있소. 소생은 그러한 전화 속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마을 농가의 딸일 뿐이었소. 철이 든 뒤로는 마을이 수시로 반군이나 도적들에게 약탈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때마다 놈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갔소. 그래서 우리도 지하동굴이나 음식을 숨기는 창고 등을 만들어 대응하는 법을 터득했소. 그때는 아직 소생도 무예를 익힐 마음은 없었소. 매일 생각하는 것은 그저 금년의 수확이 어떨지, 내일은 무엇을 먹을지, 오늘은 어떤 밭일을 할지 그런 생각뿐이었소... 그때 소생은 그러한 날들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러나 본도는 그 모든 것을 짓밟았소.

소생이 태어나기 전, 본도의 쇼군이 군사를 이끌고 운도를 침략했소. 물론 이는 현지인의 반발과 저항을 유발했고, 소생의 부모님은 그러한 저항자들의 편에 선 사람들 중 하나였소. 정확히는 마을의 전원이 저항 세력이었지만... 우린 본도 병사들에게 추격당하는 저항자들을 숨겨주곤 했소. 그러나 그것이 결국 죽음의 화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오.
그것은 농한기의 어느 날 오후였소. 그때 소생은 밭에서 놀면서 일 년에 며칠 없는 그 편안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소. 그러나 갑자기 당황한 표정의 무사 한 명이 밭으로 달려왔소. 소생은 그가 추격자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저항 세력의 일원이라 확신하여 집으로 데려왔소. 부모님도 그를 환대해 주었고, 본도의 추격자를 피할 수 있도록 하룻밤을 재워 주기로 했소.
허나 그날 밤, 소생은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휩싸여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소. 일어나서 세수를 하려던 때, 소생은 그 사내가 몰래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소. 뒤쫓아가 보았지만 도중에 놓쳐버렸고,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리고 나서야, 마을이 이미 불바다가 된 것을 보았소. 그리고 그 저항 세력이라 믿었던 사내는 본도의 군대를 데리고 사방에서 생존자가 있는지 찾고 있었고... 소생은 부모님이 피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소... 소생이... 마을에 파멸을 초래했던 것이오.

... 불길에 휩싸인 마을, 피투성이로 쓰러져 죽은 부모님을 보며, 그때의 소생은 자신도 부모님을 따라가면 그만이라 생각했소. 소생이 그저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본도의 병사들은 소생의 생각을 알아챈 것 같았소. 그러나 그들이 다가와 나를 베려던 순간, 눈앞에는 서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고, 등 뒤에서는 내게 이곳에 있어선 안 된다고, 어서 다른 마을로 피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소.
피하라니, 이미 갈 곳을 잃은 소생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이오. 주변에서는 타오르는 불길이 화끈거리며 마을을 집어삼키는 소리와,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칼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소. 그때 소생은 그 사람이 찬 칼에 비친 소생의 눈을 보았소. 그 속에는 눈물조차 없이, 그저 주위의 불길이 비쳐 붉게 빛나고 있었소. 그때 소생은 깨달았던 것이오. 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만이 소생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이란 것을 말이오.
[당신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비록 그때는 그 뜻을 이룰 수 없었지만, 이후 노력을 거듭한 끝에 소생은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그분이 이끄는 무리에도 들어가 저항자가 될 수 있었소.

저항 세력의 일원이 된 후, 소생은 당시 소생을 구한 것이 저항 세력의 지도자, [명토의 유검] 이라고 불리는 나기 님이었음을 알게 되었소. 나기 님께서는 그 후 소생의 스승님이 되어 주셨고, 소생도 본도의 군에 저항하는 용사를 여럿 알게 되었소.
스승님께서 쇼군 암살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감금되신 후, 소생은 운도가 조금씩 본도에 지배되어 가는 것을 보았고, 저항 세력의 활동도 한동안 멈출 수밖에 없었소.
그후 몇 년간 소생은 홀로 비밀리에 본도의 통치에 항거하며 스승님의 행방을 수소문했소. 그 과정에서 운도의 많은 주민이 겉으로는 본도에 거스르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원성을 품고 있고, 또는 암암리에 소생과 같은 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소. 저항 활동은 지금까지 끊어졌던 게 아니라, 그저 지하에 숨어들어 본도의 눈이 닿지 않은 그림자로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오.
이에 소생은 그림자 속에서 활동하던 사람들과 연락을 취했고, 소생이 나기 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자, 그들은 소생을 추대하여 함께 고향을 되찾자고 맹세했소.